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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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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장의위원회 구성4. 여담5. 참고문헌

1. 개요

항일 빨치산 1세대인 북한의 군인, 정치가.

2. 생애

1910년 11월 13일, 함경북도 성진군 학성면 옥천리의 빈농가에서 태어났다. 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일본인들과 지주들의 착취와 압박에 시달리다 못해 1911년에 만주 연길현 산도만으로 이주하였으나 거기의 상황도 좋지 못해 중등학교까지 다닌 것이 교육의 끝이었다.

어려서 민족주의 및 공산주의 의식을 각성, 1931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공청생활을 거쳐 1932년부터 빨치산 활동을 했다. 1935년에 민생단 사건에 휘말려 죽을 뻔했지만 겨우 살아남았다고 한다. 김일성을 따라 소련으로 후퇴한 이후 88여단에 소속되었으며 상위로 진급, 소대장을 맡았다. 해방 이후 1945년 11월, 아녀자, 노역자, 최춘국, 조명록, 황순희 등과 함께 귀국했다. 시군의 당조직을 장악하기 위해 황해도에 파견되었으며 이후 진남포에 파견되어 남포시당 위원장을 맡았다. 이때 공장노동자 계형순을 당원으로 발탁하기도 하였다. 조선인민군 창설 이후 문화부사단장에 이르렀다.

1948년, 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중앙보안간부학교 문화부교장에 임명되었으며 1948년 12월 2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강건, 김광협, 김달삼, 김웅, 김일, 전태룡, 최용진, 무정, 박달, 박훈일, 최광, 최현과 함께 국기훈장 2급을 수여받았다. 6.25전쟁 발발 이후 군단 정치간부 및 집단군 정치부장 및 군사위원로 파주 전투, 충주 전투, 문경 전투 등에서 싸웠으며 낙동강까지 내려갔다. 1953년 8월까지 복무했다. 이후 조선로동당 함경북도 부위원장으로 사업하였으며,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국기훈장 제3급을 받았다.

1953년 8월 전원회의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검열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으며 1957년,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58년 1차 당대표자회에서 간부부가 폐지되고 새로 행정부가 설치되면서 중앙위원회 행정부 부부장에 임명되었다.[1] 1958년 9월 전원회의에서 행정부장으로 승진하였다. 1958년 11월, 류경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0년 1월, 총정치국장 서철, 당중앙검사위원장 김익선, 평양시 당위원장 리송운과 함께 최창익, 박창옥, 김웅 등을 재판하여 총살하였고 박의완에게 10년형을 선고했다. 1960년 4월, 박달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0년 5월, 리효순이 대남총국장으로 부임함에 따라 후임 평양시 당위원장에 임명되었다. 후임 행정부장은 안영이 임명되었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이렇듯 항일 빨치산 1세대로 나름대로 잘 나가고 있었으나 중병이 들어 몸져누웠고 수술까지 받았지만 용태가 호전되지 않았다. 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마지막 순간이 되자 항일 빨치산 동지들을 불러서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한 후에 "나는 이제는 동무들과 같이 더는 위대한 수령님을 받들어 모실 수 없게 되었소. (...) 이 경석이의 몫도 합쳐 동무들이 위대한 수령님을 부디 잘 모셔주기를 바라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부탁이오."라고 부탁한 후 병실에 걸린 김일성 초상화를 보며 "아, 수령님을 뵈옵고 싶구나!"라고 주접을 떨다 1962년 9월 8일, 병환으로 고작 52세를 일기로 갑작스럽게 숨졌다. 상투적 선전이지만 정작 60년대 선전에는 안보이고 1980년 기사에 나오는 걸 보면 구라일 수도 있다.

당중앙위원회는 부고를 발표, "언제나 당의 위임에 충실하였으며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복무하였으며 시종일관 당적 원칙성과 고결한 품성을 견지하여 온 김경석 동지는 공산주의적 혁명 투사의 모범으로 된다. 김경석 동지의 서거는 우리 당과 우리 인민에게 있어서 커다란 손실이다. 그러나 그가 남겨놓은 투쟁업적과 고상한 혁명가적 품성은 우리 인민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동지여! 고이 잠들라!"라고 크게 칭송하였다.

어쨌거나 항일 빨치산 1세대 중 1947년 사망한 안길이나 6.25전쟁 중 전사한 강건 김책을 제외하면 6.25 전쟁 후에 1958년 사망한 류경수 이후 두번째 사망자였으며 김일이 장의위원을 맡는 등 성대한 대접을 받았고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장되었으며 반신상도 제작되었다. 김일성은 함경북도 현지지도 중 김경석의 용태를 걱정해 평양에 전화했다가 부음을 듣고 놀라서 평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1968년 9월 1일, 북한 창건 20주년을 기념하여 김책, 안길, 최춘국, 조정철과 함께 공화국영웅 칭호를 추서받았으며 고향인 김책시에 반신상이 제막되었다. 김일성은 1970년 11월 2일, 5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김계림, 강진건, 강영창, 김은순, 리봉수, 김갑순, 김태근, 안룡각, 강상호, 리주연, 김원빈과 함께 김경석을 '당에 끝없이 충실하였으며 혁명을 위하여 몸 바쳐 투쟁한 동지'로 언급하였다. 그리고 1972년에 김일성은 김책과 더불어 그를 공신으로 지목하면서 "나는 오늘 이 자리에 김경석동무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을 가슴아프게 생각합니다. 그는 당과 혁명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충직한 혁명가였습니다. (...) 모두가 그처럼 산다면 나로서도 마음을 놓겠습니다."라고 교시했다 카더라.

3. 장의위원회 구성

4. 여담

탈북한 전 조선인민군 상좌 최주활의 증언에 따르면 김경석의 아들 김일룡도 나중에 군인이 되어 대좌까지 진급했고 인민무력부 대외사업부 부국장까지 진급해서 차기 국장으로 손꼽혔으나 지나치게 성분이 좋은 나머지 평소에 뇌물을 쓰지 않고도 잘 나가서 이런 분야에 문외한인 관계로, 자신의 부하였던 짐바브웨 주재 무관 리상우가 상아 밀거래로 벌어들인 돈 10만 달러를 김정일에게 충성자금으로 바치는 바람에 밀려나고 말았다고 한다. 이후 파키스탄 주재 무관이라는 한직으로 나가고 말았다.

5. 참고문헌


[1] 일부 문헌에서 그를 조직지도부장으로 기록하는데 이 시점에서는 이미 김영주가 조직지도부장을 하고 있을 시점이고 역시나 간부 문제를 다루는 행정부장을 한게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