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봉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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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항일 빨치산 1세대 출신 북한의 군인, 정치인.1969년 1월, 허봉학과 함께 군벌관료주의자로 몰려 숙청당했다.
2. 생애
1919년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주로 넘어가 빨치산 부대에 합류하여 싸웠다.해방 이후 강건, 림춘추와 함께 소련군 소속으로 활동하다가 연길에서 귀국했다. 1946년 사리원에서 38선 경비를 위한 38경비보안대를 조직하여 대대장에 취임하였고, 조선인민군 창건 이후 김광협의 독립혼성여단 산하 3대대장에 임명되었다. 1949년 2월 7일, 국기훈장 3급을 받았다. 이후 6.25 전쟁에 참전, 1950년 12월, 12사단장에 임명되었으며 1951년 4월, 8군단장으로 승진했다. 1953년 7월, 집단군 체제가 실시되면서 기존 군단장들이 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되면서 7군단장으로 이동했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을 가능성이 높다. 1956년 7월, 5군단장에 임명, 1958년 1월 21일, 리권무, 최종학, 최현, 김봉률, 류경수, 김철우, 최용진, 리림, 리방남, 지병학, 김화천, 정병갑, 전우, 김대홍, 한일무, 유성철, 최광, 김창덕, 허봉학, 오진우, 정화준, 박창림, 전문섭과 함께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 1958년 3월, 1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1958년 7월, 2집단군 사령관에 이르렀다. 1958년 11월, 류경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0년, 총참모장 리권무가 해임되면서 후임 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 1960년 4월, 박달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60년 10월, 상장으로 진급했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는 한편 대장으로 진급, 민족보위상에 임명되면서 총참모장에서 물러났다. 후임 총참모장에는 최광이 임명되었다. 1962년 12월, 당군사위원회가 성립되면서 최용건, 김광협, 최현, 석산, 리영호와 함께 군사위원에 선출되었다. 1963년 9월 9일 북한 정권 수립 15주년 열병식에서 민족보위상으로서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1964년 6월, 4기 9중전회에서 박성철과 함께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966년 10월, 2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위원으로 승진했다. 1966년 10월 18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내각 부수상에 임명되었으며, 1967년 3월, 리봉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7년 12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는 한편, 내각 부수상 겸 민족보위상에 재선되었다. 1968년 2월 3일, 석산, 허봉학, 최광, 오진우, 오백룡과 함께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1968년 7월, 군사대표단장으로 헝가리를 다녀왔다.
하지만 허봉학과 함께 조직지도부장 김영주가 2인자로 등극하는 것에 반발하다가 총정치국 부국장 리용무의 밀고로 감시를 받게 되었으며 1968년 10월부터 당검열 그루빠가 집단군, 군단, 사단까지 모조리 검열하였고, 당 간부화 정책의 파괴, 전국 요새화의 반대, 낭비, 군벌주의, 관료주의 등이 고발되었다. 1968년 11월, 조선로동당 4기 18중전회와 1969년 1월, 조선인민군 당위원회 4기 4차 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허봉학과 함께 군벌관료주의자로 혹독하게 비판을 받고 숙청당했다. 김영순의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에 따르면 숙청 후 북창관리소로 끌려갔다가 당시 남한에 파견되어 있던 공작원 명단을 유일하게 파악하고 있던 그에게 명단을 알아내기 위해서 다시 평양으로 불러들였지만 북창관리소에서 나오는 순간 누군가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군을 특수화하고 당군 분리의 원칙을 저버리고 군을 당 위에 올려놓으려 한 군벌주의자로 북한에서 공식적 역적 취급당하고 있다.
3. 여담
성격이 매우 오만하고 포악했다고 전해진다. 김진계의 회고록에 따르면 한밤중에 료해를 나가서 현지 부대장이 잠옷 위에 군복을 겹쳐 입고 나오자 마구 성질을 내면서 그 자리에서 부대장의 견장을 떼어버리기도 했으며, 오백룡 등 다른 항일 빨치산 1세대에게 어려운 질문을 마구 던지면서 망신을 주곤 했다고 한다. 이는 북한 선전에서도 나오는 내용이다. 소련이나 동유럽 국가에서도 김창봉의 성격이 더럽다고 상당히 안좋아했다. 훗날 김일성이 7.4 남북 공동성명 협상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1.21사태를 사과하며 그 원흉으로 김창봉을 지목했다.[1]김길선의 증언에 의하면 김창봉이 민족보위상이었던 1960년대 북한군은 경례구호가 "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복무함."이었고 보급과 훈련도가 좋았다고 한다. 북한군이 민간에서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으며 오랜만에 휴가 나오는 북한군 병사를 위해 지역 잔치까지 열릴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북한군의 보급 수준은 병사들에게 때때로 사과들을 선물로 지급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1970년대 전후로 주체사상이 확립되고 북한군이 본격적으로 김씨왕조의 사병집단으로 전락하면서 보급과 훈련도가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고 한다.
4. 참고문헌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
-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서울: 도서출판선인, 2005).
- 스즈키 마사유키 (2004), 북한 인민군의 유일사상체계 확립: '군벌관료주의자' 숙청과 비대칭전략 완성, 한일공동연구총서 7.
- (最新)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
[1]
다만 북한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사태가 벌어지면 그 잘못을 항상 당 내 숙청 대상인 극렬분자들에게 뒤집어 씌우기 일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