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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3 00:19:04

박성철(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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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정무원총리
박성철
朴成哲
파일:박성철 북한.png
<colbgcolor=#bc0021><colcolor=#ffffff> 출생 1913년 9월 2일
경상북도 경주부
사망 2008년 10월 28일 (향년 95세)
소속 정당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외무상 시절2.3. 부수상 및 정무원총리 시절2.4. 부주석 시절2.5. 말년
3. 경력4. 장의위원회 구성5. 여담6.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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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

2. 생애

2.1. 초기 이력

1913년 9월 2일, 경상북도 경주군의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때 1912년 함경북도 길주 출신설이 있었으나 북한에서 발표된 공식 약력을 통해 경주 출신임이 밝혀졌다. 길주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부모를 따라 만주로 건너가 간도 용정의 대성중학을 다녔으며 이때 김일 등과 공산주의 학생조직에 가입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는 바람에 이곳도 중퇴하였다.

남한에서 그의 이력이 알려져 있지 않았을 때는 사실 본명이 박성수이며, 일본에서 중학, 도쿄 상지대학, 한도전대학을 졸업하고 지하 학생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었으며, 이후 1937년 중국으로 넘어가 팔로군 정치부 간부학교를 졸업한 연안계 인물로 중국통, 일본통이라고 알려졌으나 사실 빨치산이라는 것이 알려진 이상 다른 인물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론 1934년 4월에 만주 항일 빨치산에 합류했고, 1936년에는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중국공산당이 지휘하는 동북항일연군 제5군교도 제1대 청년대원으로 복무했다. 귀국 후 조선공산당에 가입하고, 1936년부터 만저우리에서 활동하던 김일성을 지원하여 자신이 일하던 팔도구 광산의 다이너마이트를 제공하였고 그와 함께 빨치산에 합류하였다가 이 인연으로 그는 김일성 빨치산 부대에 합류하였으며 김일성의 삼촌인 김형록의 사위가 되어 김일성의 종매부가 됨으로 김일성 일가의 일원이 된다. 1940년 10월 소련 영내로 들어가서 1942년 7월 항일연군 교도려(敎導旅, 소련극동방면군 제88보병여단)에서 하급 지휘관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해방 이후에는 무식한 빨치산 아내가 싫증 난다고 이혼해버리는 만행을 저지른다.(...)

2.2. 외무상 시절

광복 이후 김일성과 함께 귀국하여 보안대 간부 양성을 위한 평양학원과 보안간부 훈련소 부원장, 3.8경비대장 등을 역임했고 대좌계급을 받고 1948년 조선인민군 3사단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김경희라는 15세 연하의 젊은 여자와 재혼하여 박춘식, 박춘애, 박춘훈, 박춘오 3남 1녀를 낳았다. 1950년 3월, 중장으로 승진, 15사단장에 임명되어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 1950년 8월, 영천 전투에 참여하였으나 대구가 아닌 고향 경주로 진격하다가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에 참패하여 패주했다.

이후 해군사령부 부사령관을 거쳐 1953년 7군단장에 임명, 정전 후 최고사령부 정찰국장직을 마지막으로 예편하여 1954년 8월 불가리아 공사에 임명됨으로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1955년 5월 11일, 북한과 불가리아가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음에 따라 불가리아 공사에서 불가리아 대사로 승진하였다. 1956년 8월 2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박일영에게 대사 자리를 물려주고 귀국하여 외무성 부상에 임명되었다. 1958년 9월 전원회의에서 국제부가 신설되면서 초대 국제부장에 임명되었다.

1959년 최고인민회의 2기 대의원에 보선되었으며 1959년 10월 22일, 상무위원회 확대회의의 결정에 따라 부수상 직무에 전념하기로 한 외무상 남일의 뒤를 이어 후임 외무상이 되었다. 국제부장 자리는 박용국에게 물려주었다. 1961년 9월, 조선로동당 제4차당대회에서 조평통 중앙위원회 위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서열 24위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62년 10월 최고인민회의 3기 대의원에 선출, 외무상에 유임되었다. 외무상으로 재직하면서 아프리카, 남미를 대상으로 한 비동맹 외교에 주력하며 1975년 북한의 비동맹 기구 가입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하였다. 그의 외무상 경력은 무려 11년에 달한다.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4년 6월, 4기 9중전회에서 현재의 정치국에 해당하는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고, 66년 10월, 2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승진, 1966년 10월 18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내각 부수상을 겸하게 되었다. 1967년 12월, 4기 최고인민회의에서도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내각 부수상 겸 외무상에 유임되었다. 1969년 8월, 리주연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69년 12월, 정치위원회 상무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70년 7월 1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외무상에 해임되어 내각 제2부수상에 임명되었다. 정확히 어느 시점인진 알 수 없으나 고영환의 증언에 따르면 박성철의 아내 김경희가 자신의 부관과 바람이 나자 아내와 부관을 모조리 총살하고 27세 연하의 젊은 여자와 또 재혼했다고.(...) 이 사건 때문에 마누라 간수도 못한다고 김일성에게 쪼인트 까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일시적 숙청을 당했단 증언도 있으나, 해금된 헝가리 외교문서를 보면 1973년에 남북대화의 실패의 책임을 묻고 숙청당했다. 다만 김정일 지지파였기 때문에 1년만에 금방 지도부로 복귀했다.

2.3. 부수상 및 정무원총리 시절

1970년 11월 조선로동당 제5차당대회에서 정치위원에 재선출, 중앙위원회 서열이 4위에 이르렀으며 1972년 5월, 건강이 좋지 않았던 조직지도부장 김영주을 대신하여 남북조절위원회 북측위원장 대리 자격으로 서울을 방문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하여 7.4 남북 공동 성명을 이끌어냈다. 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박성철이 박정희를 마구 윽박질러 김일성에 제시했다는 통일 3대 원칙을 받아들이게 했다고 하는데, 상식적으로 황당한 구라에 불과하고, 남한 기록에 따르면 박성철은 어떠한 감정 표현도 하지 않으며 박정희가 하는 말을 메모하기에 급급했다고 한다. 회담 이후 박정희가 칵테일 파티에 박성철을 초대하여 술을 권하자, 박성철은 약을 먹고 있는 중이라서 술을 못먹는다고 거절하는 등 어떠한 헛점도 보이지 않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다. 어쨌든 생각보다 부유한 서울의 경험에서 상당한 충격을 받은 그는 평양으로 돌아간 후 김일성에게 자본주의 국가의 투자를 유치할 것을 제안했지만 김일성은 막대한 돈을 빌려와 모조리 떼먹었다.(...)

1972년 12월, 사회주의 헌법이 채택되면서 최고인민회의 5기 대의원,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정무원 부총리 겸 인민봉사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73년 1월, 정준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3년 6월의 3차 남북조절위원회 본회의에서도 김일성의 지령에 따라 주한미군 철수, 국군 10만명 감축, 남북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를 어거지로 요구하면서 남북대화도 신통치 않았다. 북한에서 발표한 약력에 따르면 1973년 7월부터 정무원 부총리가 되었다고 하는데, 1972년 12월에 이미 정무원 부총리에 선출된 상태였는데 무슨 얘기인지 애매하다. 다만 최용건의 약력의 사례를 생각한다면 1973년 7월에 인민봉사위원장에서 해임되어 정무원 부총리만 했다는 소리일수도 있다. 아니면 실수를 해서 중간에 정무원 부총리에서 해임되었다가 다시 임명되었단 얘기다.

1974년 2월 장길부 장의위원에 위촉되었다. 이렇게 정치적으론 잘 나갔지만 여자 관계가 문란하여 이혼을 거듭하였고 1977년, 자신보다 무려 23살이나 어린 황씨 여자와 4번째로 결혼하였다. 1976년 3월 남일 장의위원, 1976년 5월 홍원길 장의위원, 1976년 9월 최용건장의위원을 지낸 후 1976년 4월 27일, 최고인민회의 5기 6차 회의에서 김일의 뒤를 이어 정무원 총리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총리직은 영 신통치 않아서 재임 1년 8개월만인 1977년 12월 15일, 최고인민회의 6기 1차 회의에서 리종옥에게 총리 자리를 물려주고 외교담당 국가 부주석으로 조동되었다. 1978년 9월, 한익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2.4. 부주석 시절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에 재선되었으며, 1982년 2월, 7기 대의원에 선출, 최고인민회의 7기 1차 회의에서 국가 부주석,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에 유임되고 김일성 훈장을 수훈받았다. 1983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 1982년 4월에는 최현 장의위원, 1983년 1월 강량욱 장의위원, 1984년 3월에는 김일(1910) 장의위원, 4월에 오백룡 장의위원, 11월에 김만금 장의위원을 지냈다. 나이 먹고도 여자를 밝혔는지 1983년 자이르를 방문했을 때 프랑스제 정력제를 구해가기도 했다. 외교 담당 부주석이지만 의전만 하지 실권은 이미 다 날아간 상태였다고 하는데 불만 없이 놀고먹는 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이후 1986년 최고인민회의 8기 대의원에 재선, 1987년 8월, 박영순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0년 최고인민회의 9기에서 모두 국가부주석,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재선출되었으며 1991년 8월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공동의장을 맡았다. 1992년 4월 23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서철, 김익현, 조명선, 손종준, 최성숙, 강위룡과 함께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1993년 9월 2번째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았다. 다만 김일성 종합대학 교수로 훗날 국회의원을 지낸 조명철의 증언에 따르면 말년에 한번 김일성에게 혼이 난 적이 있는데, 1989년 13차 세계청년학생 축전을 준비한 후 있었던 5월 1일의 광복거리 개통식에서 박성철이 속도전 바람 때문에 사람들이 다들 혼났다고 했다가, 김일성이 총노선인 속도전을 비방했다고 박성철을 비판했다고 한다.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 1991년 6월, 허정숙 장의위원,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 1992년 7월, 방학세 홍기문 장의위원장,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2년 4월 23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1993년 9월 3일, 80세 생일을 기념하여 중앙인민회의 정령에 따라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2.5. 말년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7년 2월, 최광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부주석 직함이 폐지되면서 이를 대체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에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98년 12월, 전문섭 장의위원, 1999년 9월, 리종옥 장의위원을 지냈다. 2003년 11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재선출되었다. 북한의 외교 마스코트로 엄청나게 활발한 해외 순방 및 국내 행보를 밟아왔으나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레 활동이 뜸해졌고 강등설, 숙청설까지 돌았으나 사실무근이었다. 그러다가 2008년 10월 28일 5시에 95세를 일기로 숙환으로 사망했다.

당중앙위원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내각은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박성철동지는 우리 당과 인민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령도밑에 민족해방, 계급해방위업과 사회주의건설, 조국의 자주적통일을 위하여 한생을 바쳐 투쟁하여온 충직한 혁명전사이다. (...) 동지는 다년간 당과 국가의 책임적인 위치에서 사업하면서 당과 인민정권을 강화하며 사회주의경제건설을 다그치고 조국의 부강번영을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박성철동지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제시하신 자주적인 조국통일방침을 받들고 조국통일의 전환적국면을 열어나가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였다. 동지는 우리 당의 주체사상, 선군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당과 수령에게 무한히 충실하였다. 박성철동지는 당과 수령에 대한 끝없는 충실성과 조국과 인민에 대한 헌신적복무정신, 고결하고 소박한 인민적품성으로 하여 우리 당원들과 인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박성철동지의 전생애는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한 주체형의 혁명가의 한생이였으며 동지의 숭고한 혁명정신과 혁명가적풍모는 우리 당원들과 근로자들의 모범으로 되였다. 박성철동지의 서거는 우리 당과 인민에게 있어서 큰 손실로 된다."라고 후하게 평가하였다.

장의는 국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영남이 장의위원장을 맡았고 양형섭이 추도사를 했다. 이후 시신은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장되었다. 김일성 시대를 상징하는 원로 중 한명이라서 김정은 시대에 소개편집물이 제작되기도 하였다.

3. 경력

임기시작 임기종료 비고
주 불가리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특명전권대사
1955년 5월 11일 1956년 8월 2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임명 및 소환
조선로동당 국제부장
1958년 9월 27일 1959년 10월 22일 1958년 9월 전원회의에서 임명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외무상으로 조동
내각 외무상
1959년 10월 23일 1970년 7월 1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임명
최고인민회의 4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제2부수상으로 영전
조선로동당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1964년 6월 26일 1966년 10월 12일 4기 9중전회에서 보선
2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승진
조선로동당 정치위원회 위원
1966년 10월 12일 1980년 11월 13일 2차 당대표자회에서 승진
4기 20중전회에서 정치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승진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직함 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
1966년 10월 18일 1970년 7월 1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임명
최고인민회의 4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제2부수상으로 승진
조선로동당 정치위원회 상무위원
1969년 12월 5일 1970년 11월 13일 4기 20중전회에서 승진
5차 당대회에서 직함 폐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제2부수상
1970년 7월 11일 1972년 12월 28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임명
최고인민회의 5기 1차 회의에서 직함 폐지
정무원 부총리
1972년 12월 28일 1976년 4월 29일 최고인민회의 5기 1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5기 6차 회의에서 총리로 승진
인민봉사위원장
1972년 12월 28일 1976년 4월 29일 최고인민회의 5기 1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5기 6차 회의에서 총리로 승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무원총리
1976년 4월 29일 1977년 12월 15일 최고인민회의 5기 6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6기 1차 회의에서 부주석으로 조동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주석
1977년 12월 15일 1998년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6기 1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7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8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9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직함 폐지
조선로동당 정치국 위원
1980년 10월 14일 2008년 10월 28일 6차 당대회에서 선출
임기 중 사망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1998년 9월 5일 2008년 10월 28일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11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임기 중 사망

4. 장의위원회 구성

5. 여담

6. 참고문헌



[1] 사로청 제1비서 리용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