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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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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무원 총리
강성산
姜成山 | Kang Song-san
파일:강성산.jpg
출생 1931년 3월 3일
함경북도 경성군
사망 2000년 6월 25일(향년 69세)
국적
[[북한|]][[틀:국기|]][[틀:국기|]]
학력 만경대혁명학원 (졸업)
김일성종합대학 (정치학 / 학사)
모스크바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 석사)
카를로바 대학교 공과대학원 (산업공학 / 석사)
직업 관료, 정치가
주요서훈 김일성훈장(1982)
정당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좌천과 부활2.3. 2차례의 총리 재임2.4. 말년과 복권
3. 경력4. 여담5.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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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 2차례에 걸쳐 정무원 총리를 역임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931년 3월 3일,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출생했다. 한때 김일성의 이종사촌으로 칠골 강씨 집안의 일원으로 알려졌고 한때 남한에서 이것이 정설인양 통했으나 황장엽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 황당한 소리라고 일축하면서 구라로 밝혀졌다. 사실 김일성의 빨치산 부대의 기관총 분대장 강위련의 아들이며, 삼촌 강위룡이 호위사령부 책임자였고 이 덕분에 빨치산 2세대로 김일성의 신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4년 8월 5일자 인민일보의 강성산 소개 기사에서도 강성산을 혁명가 집안 출신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후 만경대혁명학원, 김일성종합대학을 거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인민일보 소개 기사에 따르면 중앙당학교를 졸업했다고 한다. 2023년 2월 건군절 열병식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많은 빨치산 2세대들이 그러했듯이 김일성 친위중대원으로 복무했다. 어쨌거나 당시 테크노크라트형 수재들이 많이 그랬듯이 1953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 공대로 유학하였고 1959년 귀국하였다. 일설에서는 1956년 8월 종파사건, 1967년 갑산파 숙청 사건, 1969년 1월, 허봉학, 김창봉 사건 등에 적극 개입하여 김일성 정적 숙청에 가담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증거 제시가 없으며, 통일부 확인에 따르면 1956년에는 강성산은 체코에 있던 시점이고, 귀국 이후에도 당내 조직이 아니라 교통 테크노크라트 경력을 밟은 것으로 보이는데 김일성 정적 숙청에 가담했다는 것은 신뢰하기 힘든 주장이다.

여튼 1969년 8월, 조직지도부장 김영주의 눈에 들어 자강도 책임비서에 임명되었다가 3개월만인 1969년 11월, 평양시 책임비서에 임명되는 파격적인 승진을 거쳐, 1970년 11월, 조선로동당 제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어 서열 66위를 기록했다. 당시 남북조절위원회 회의에도 북측 수행원으로 참석하여 강인덕과 만나기도 했다. 1972년 12월, 리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2년 12월, 최고인민회의 5기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평양시 책임비서 자격으로 상설회의 의원에 선출되었다. 1973년, 북한의 정치지형이 상당히 변동을 거치게 되는데, 정경택의 아버지이며 국가계획위원장을 지낸 정준택이 사망하고, 김만금이 농정 실패의 책임을 추궁당해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서 탈락하면서 정치위원회에 공석이 생기게 된다. 강성산은 1973년 1월, 정준택의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평양시 인민위원장에 선출되는 한편 1973년 9월, 5기 7중전회에서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면서[1] 당 서열 16위로 올라 핵심 엘리트의 인물 중 하나로 부상하였다.

2.2. 좌천과 부활

그런데 김현식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강성산은 김성애의 동생 김성갑과 친한 사이였으며, 김성애에게 잘 보이기 위해 김정일이 김성애 일가를 총공격하게 되는 계기인 인민대학습당 사저 신축 사태를 돕기도 했다고 한다. 1973년에 이것이 걸리는 바람에 결국 대소동으로 번지게 된다. 1974년 5월, 강성산은 강현수에게 평양시 책임비서 및 인민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내주고 해임당한다. 여기에 6개년 경제계획이 실패하면서 그 책임을 추궁당하여 서열이 강등당하고, 김영주 추종세력을 회치려는 김정일의 미움을 사서 한동안 고생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김성애 일가가 곁가지로 몰락하는 동안 강성산은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자리는 유지하였으며, 새로 정무원 교통-체신위원장에 임명되었다. 다만 강성산 스스로 수기에서 밝히길 자신은 이전까지 운수사업을 전혀 다뤄본 적이 없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전혀 경험이 없던 분야에 종사하게 되면서 상당히 쩔쩔매게 되었는데, 강성산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그를 도와준 것은 김정일이었다 카더라. 상투적인 선전일 수는 있겠지만 김정일과 강성산이 이때는 그리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당시 수송 분야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이 조달된 물자들을 각 공장과 기업소에서 제때 실어가지 않는 '미하차' 문제였는데 김정일의 조력으로 제때 물자를 받아가지 않는 기업소에 연체료를 부과하면서 수송 분야의 적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려했다고 한다. 덕분에 미하차 문제가 이전의 절반 이하로 줄어드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기관사 양성 체계 및 기관사 관리 체계를 정돈하고 열차의 정시 운행 준수를 위해 노력했다. 1974년 10월 정치위원회 회의에서 내려진 70일 전투 과업을 훌륭하게 수행하여 김일성과 김정일의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전해 같은 시기보다 329만톤 이상의 짐을 수송하는데 성공하였다. 인민일보에서 발표한 약력에 따르면 인민봉사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1976년 3월에 남일 장의위원, 5월에 홍원길 장의위원, 9월에 최용건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정무원 부총리에 임명되었다. 1979년, 박용석의 뒤를 이어 철도부장을 겸하면서 다시 수송 분야를 맡게 되었다. 철도부장으로 재임하면서 2차례의 <수송혁명 200일 전투> 개시를 선포하여 수송 문제를 혁신하려 했다. 1979년 12월, 로태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1980년 11월,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2년 4월, 최고인민회의 7기 1차 회의에서 정무원 부총리에 재선되었다. 4월 5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2년 8월에 개최된 6기 6중전회에서 유색금속 150만톤 고지 점령, 기계공업부문의 프레스화, 형단조화, 용접혁명, 절연물혁명 등 경제 문제가 논의됨에 따라 회의가 끝난 직후인 8월 31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전례가 없는 직책인 정무원 제1부총리로 승진하게 되면서 김일성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고,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1983년 1월 강량욱 장의위원, 1983년 9월, 김일대 장의위원을 지냈다. 당시 노령인 리종옥 총리 교체론이 슬금슬금 나오고 있었고 아니나다를까 1984년 1월 27일, 최고인민회의 7기 3차 회의에서 정무원총리에 선출되었다.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 4월 오백룡 장의위원을 지냈다.

2.3. 2차례의 총리 재임

총리가 된 강성산은 북한경제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기 위해 1984년 합영법을 제정했고,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교류 확대, 과학기술 발전 등을 강력하게 주문하면서 실용적인 마인드의 총리임을 보였지만 이미 김일성이 망쳐놓은 북한 경제의 구조는 강성산 한 사람의 똥꼬쇼로 해결될 수준이 아닌지라 북한의 경제실적은 계속 악화되었고 1986년 12월 27일, 6기 12중전회에서 정무원총리 해임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실각은 아닌지라 비서국 비서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연이어 12월 29일부터 30일 사이에 열린 최고인민회의 8기 1차 회의에서 리근모에게 총리 자리를 물려주었다. 1988년 3월, 6기 13중전회에서 비서에서 소환되어 함경북도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경제 전문가로서의 실력이 어디 가지 않아서 함경북도 실물경제를 잘 관리했으며, 나선 지구를 비롯, 두만강 지역을 개발하여 김일성과 김정일이 북한 경제의 숨통으로 여기던 대외경제개방정책의 전문가임을 과시함으로 다시 북한 지도부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여기에 강희원, 서윤석과 공저로 1986년 <수령님과 평양>이라는 김일성 후빨책을 집필하는 등 김일성에 대한 아부도 잊지 않았다. 1987년 8월, 박영순 장의위원,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0년 5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함경북도 인민위원장 자격으로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을 지냈다.

한편 강성산이 좌천된 상황에서 실시되었던 3차 7개년 계획이 참혹하게 실패하여 경제가 심각하게 악화되면서 1992년 12월 11일, 최고인민회의 9기 4차 회의에서 자강도 책임비서로 좌천된 연형묵의 뒤를 이어 정무원총리에 선출되었다. 당시 북한의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음은 강성산 내각 하의 부총리들의 숫자에서 알 수 있는데, 김영남, 최영림, 홍성남, 김복신, 강희원, 김윤혁[2], 김달현, 김환, 김창주, 장철 등 무려 10명에 달했다. 1993년 1월, 리계백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3년 4월, 최고인민회의 9기 5차 회의에서 함경북도 인민위원장에 물러난 것을 반영하여 중앙인민위원에서 소환되었다.

말년에 김일성에게 개혁개방에 대해 진언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를 신임하는 김일성은 다 죽어가는 노인네였고, 김정일은 강성산의 개혁개방론에 반감을 드러냈으며 황장엽의 증언에 따르면 김영춘이 경제 문제를 잘 다루지 못해서 김정일에게 근심걱정만 끼치는 강성산을 총살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윤승관은 정무원 당회의에서 강성산이 자기 아랫사람인것처럼 무례하게 대했다가 너무 나댄다고 해임당하기도 했다. 1994년 5월에는 그의 사위인 강명도가 탈북하여 핵무기 관련 정보를 떠들어대는 등 여러모로 그에겐 악재가 겹쳤다. 이때 남한에선 강성산 숙청을 점쳤으나, 1994년 7월, 김일성 강희원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등을 지내며 건재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강성산 스스로도 건강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김일성 사후 고난의 행군, 1차 북핵 위기 등의 대형 사고들이 북한을 뒤흔들었다.

2.4. 말년과 복권

하지만 김정일은 1994년 김일성 사망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총리를 교체하여 나라의 혼란을 더하고 싶진 않았으므로 1998년까지는 강성산을 총리로 유임하였으며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을 지냈다. 장의위원 명단에서 강성산은 김정일, 오진우의 뒤를 이어 서열 3위를 기록했다. 이후 강희원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하지만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고 김정일과의 불화설도 있었기 때문에 90년대부터 사망설, 김달현으로의 교체설이 남한에 퍼질 정도였다. 1997년 2월 덩샤오핑 사망 때 홍성남이 정무원 총리 대행 자격으로 조전을 보낸 것 때문에 강성산이 해임된 것으로 잘못 알려졌으며 심지어 그 해임날짜도 조전이 보도된 2월 21일로 멋대로 추측한 정보가 인터넷 여기저기에 잘못 기재되어 있다. 그 직후인 1997년 4월부터 다시 공개활동을 시작했으며 1997년 7월, 김일성 사망 3주기 추도식에도 등장했다. 강명도의 증언에 따르면 당뇨병과 간경화 등을 앓아 아프긴 했다고 한다.

최종적 해임은 1998년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였으며, 이때 내각총리 홍성남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공식석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보도는 없었지만 총리에서 해임되었으니 이때까지 유지하고 있던 정치국원 자리에서도 물러났을 가능성이 높지만 김정일 시기에는 형식적인 정치국 인선조차 하지 않았으므로 정치국 위원을 유지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후 2000년에 출판된 주체시대를 빛내이시며 6권에 강성산의 글이 수록된 것이 거의 마지막 등장이었다. 다만 이 글 자체도 1979년 4월, 철도부장 재임 시절에 쓴 글이었다.

이후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다가 2007년 사망설이 돌았고 이것이 정설로 인용되었다. 그러던 중 북한의 선전매체에도 젊은 강성산의 사진이 실리는 일이 잦아지는가 했더니 2021년 9월, 북한은 강성산의 시신을 애국렬사릉에 정무원총리 직함으로 전격적으로 안치하였다. 그리고 이때 공개된 묘비 사진을 통해 실제 사망일자가 2000년 6월 25일임이 확인되었다. 조선중앙통신은 이 사실을 보도하며 "당과 정부의 중요직책에서 오래동안 사업하면서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여온 강성산동지"라고 강성산을 칭하며 북한 정부에서 강성산이 과거와 다르게 상당히 높게 평가되고 있음을 드러내었다.

강성산이 2000년에 죽었음에도 무려 20년 넘게 대한민국 정부마저도 기일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은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05년 연형묵이 사망했을 때나 2008년 박성철, 2009년 홍성남이 사망했을 때는 즉각 보도가 되었으며 국가장의위원회가 구성되었다. 하지만 10년 가까이 총리를 지낸 강성산은 장의위원회는커녕 부고조차 보도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강성산과 김정일의 관계가 안좋았다는 학계의 추측을 뒷받침하는 정황이라고 볼수 있는 반증이라고 보인다. 김정은 시기에는 대접이 상당히 좋아졌는데, 전술하였듯이 각종 기록영화에도 등장하는 것은 물론, 2022년 2월 8일 열병식에서 친위중대 상징종대가 강성산의 초상화도 들고 행진했다.

3. 경력

임기시작 임기종료 비고
조선로동당 자강도 책임비서
1969년 8월 1969년 11월 평양시 책임비서로 조동
조선로동당 평양시 책임비서
1969년 11월 1974년 5월 정무원 교통-체신위원장으로 조동
평양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1973년 3월? 1974년 5월 정무원 교통-체신위원장으로 조동
조선로동당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1973년 9월 17일 1980년 10월 14일 5기 7중전회에서 보선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
정무원 교통-체신위원장
1974년 5월 1976년 4월? 인민봉사위원장으로 조동
인민봉사위원장
1976년 4월? 1977년 12월 17일 박성철의 후임으로 임명?
최고인민회의 6기 1차 회의에서 정무원 부총리 임명
정무원 부총리
1977년 12월 17일 1982년 8월 31일 최고인민회의 6기 1차 회의에서 임명
최고인민회의 7기 1차 회의에서 유임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제1부총리로 승진
정무원 철도부장
1979년 9월? 1982년 4월 5일? 박용석의 후임으로 임명
최고인민회의 7기 1차 회의에서 임기 만료?
조선로동당 정치국 위원
1980년 10월 14일 2000년 6월 25일? 6차 당대회에서 선출
임기 중 사망?
정무원 제1부총리
1982년 8월 31일 1984년 1월 27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임명
최고인민회의 7기 3차 회의에서 정무원총리로 승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무원총리
1984년 1월 27일 1986년 12월 29일 최고인민회의 7기 3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8기 1차 회의에서 임기 만료
조선로동당 비서국 비서
1986년 12월 27일 1988년 3월 11일? 6기 12중전회에서 선거
6기 13중전회에서 함경북도 책임비서로 조동?
조선로동당 함경북도 책임비서 겸 함경북도 인민위원회 위원장
1988년 3월 11일? 1992년 12월 10일 6기 13중전회에서 임명?
6기 20중전회에서 정무원총리로 조동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무원총리
1992년 12월 11일 1998년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9기 4차 회의에서 임명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직함 폐지

4. 여담

5. 참고문헌



[1] 1984년 8월 5일자 인민일보의 강성산 약력 소개. [2] 현재 북한 철도성 부상을 하고 있는 김윤혁과는 동명이인이다. 부총리 김윤혁은 1980년대 북한의 금속공업부장 (한국의 장관급)을 했던 구소련 유학파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