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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3 15:16:05

강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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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장의위원회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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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 테크노크라트.

2. 생애

1920년 11월 24일 함경남도 금야군의 사립학교 교원가정에서 출생했다. 하지만 평양 숭실중학을 거쳐 숭실전문학교를 다니다가 아버지를 여의고 중퇴했으며, 소년노동자로 고생을 하다가 청진철도국 전기구 전공으로 해방을 맞이했다. 이후 당에 가입, 북조선전기로동자직업동맹 청진시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1946년 4월, 청진시에 찾아온 김일성을 만나 그의 눈에 들게 되었다. 1948년 모스크바 종합대학에 유학할 권리를 얻을 수 있었고, 1952년에 귀국했다. 해방 이후 전력 공업의 테크노크라트로 활동했는데 1954년 11월 30일자 로동신문에서 그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허천강발전소 지배인을 거쳐 1958년 전기성 부상에 임명되었다. 이후 수풍발전소 지배인으로 조동되었다가 1960년 8월 중앙위원회 부부장에 임명,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정확한 시점은 확인해야 하지만 1959년 시점에서 림계철의 뒤를 이어 경공업부장으로 승진, 1962년 8월까지 재임하다가 안승학에게 이임하였다.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어 1990년 9기까지 쭉 연임하였다. 1965년 8월, 강영창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2년 8월에 정일룡의 뒤를 이어 평양시 인민위원장에 임명, 1973년까지 무려 11년이나 재임하였는데, 이는 최장기 기록이다.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 1963년 5월, 강진건 장의위원, 1968년 3월, 홍명희 장의위원, 1969년 1월, 김갑순 장의위원, 1969년 3월, 김태근 장의위원, 1970년 8월, 김원빈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으며 이후 1973년에 평양시 책임비서 강성산에게 자리를 물려준 이후 평양시 행정경제위원장으로 이임하였다. 1972년 12월, 리경석 장의위원, 1973년 1월, 정준택 장의위원, 1974년 9월, 김경인 장의위원, 1976년 3월에 남일 장의위원, 9월에 최용건 장의위원, 1977년 6월, 강장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8년 9월, 정무원 부총리에 임명되었으며 1980년, 함경북도 책임비서를 거쳐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81년 4월, 정치국 후보위원에 보선되었다. 1981년에 청진시 책임비서에 임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 1983년 1월 강량욱 장의위원,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 4월에 오백룡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84년 1월, 함경북도 책임비서 조세웅이 부총리로 조동됨에 따라 함경북도 책임비서에도 임명되었는데 청진시 책임비서와 겸한 것으로 보인다. 1985년 초까지는 청진시 책임비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1985년 여름에는 청진시 행정 및 경제지도위원장으로 조동되었으며 청진시 책임비서에는 조세웅이 임명되었다. 1985년 7월, 청진직할시가 취소되고 다시 함경북도로 합병되면서 함경북도 책임비서 자리도 조세웅에게 물려주고, 1985년 10월 즈음에 평양시 행정 및 경제지도위원장으로 조동되었으며, 1986년, 서윤석의 뒤를 이어 평양시 책임비서 겸 평양시 인민위원장으로 복귀하여 1989년까지 재임했다. 1987년 8월, 리진수 박영순 장의위원,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9년 4월 18일, 정무원 부총리에 다시 임명되면서 평양시 책임비서직을 최문선에게 물려주었다. 1990년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부총리로 재선되었다.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 1991년 6월, 허정숙 장의위원,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2년 6월부터는 건강이 너무 나빠져서 입원하고 실무는 맡지 않았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에 위촉되었으나 김일성 사망 후 불과 20일 후인 1994년 7월 28일 5시 30분, 정치국 후보위원 및 정무원 부총리로 재임하던 중 7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1] 강희원 전기에 따르면 왜 죽었는지가 기가 막힌데, 가뜩이나 건강이 좋지 않아 와병 중이던 강희원은 김일성의 사망 소식을 접해들고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호흡기가 없으면 호흡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령님을 어떻게 산소통을 들고 뵐 수 있냐고 호흡기 없이 조문하다가 죽어버렸다.(...) 이 필사의 똥꼬쇼를 김정일이 가상하게 여겼는지 당중앙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은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동지는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위업이 전면에 제기된 시기 당과 국가의 책임적인 위치에서 사업하면서 당원들과 근로자들을 당과 수령의 두리에 튼튼히 묶어세워 수령, 당, 대중의 일심단결을 백방으로 다지며 당의 의도에 맞게 행정경제사업을 개선강화하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였다. 강희원동지는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세우고 당과 수령에게 무한히 충실하였으며 당의 령도밑에 조국의 부강발전과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주체혁명위업의 승리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쳐 투쟁하였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이후 국장이 거행되었으며,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정무원 부총리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3. 장의위원회

강성산 박남기 김리룡
김영남 강현수 곽범기
한성룡 리용무 김세영
최영림 리지찬 박원현
홍성남 최복연 김학섭
양형섭 김창호 김성구
홍석형 리석 리재윤
김환 박용석 윤기정
김복신 리철봉 김수학
김창주 정준기 박명철
김윤혁 리성대 정문산
장철 김응상 리성록
공진태 김원진 임정상
윤기복

4. 참고문헌


[1] 그래도 아예 김일성 사망 당일에 사망해 죽음이 잊힌 조명선보다는 취급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