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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11-23 16:15:37

김두남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군인, 정치인이다. 김영남의 친동생이라고 알려져있다. 얼굴이 김영남과 꼭 닮은 것이 사실로 보인다.

2. 생애

신상정보에 대해서는 1927년생, 1928년생, 1930년생 등 확인되지 않은 정보가 돌아다녔으나 2009년에 만 77세를 일기로 사망한 것을 보면 1931~1932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평안북도 벽동의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는데, 북한이 발표한 부고에 따르면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이후 화학공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해방 이후 만경대혁명학원, 회령군관학교 혹은 강건종합군관학교를 졸업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성일은 김두남은 만경대 졸업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1950년, 6.25 전쟁에 참전했다.

전후 1956년, 소련 군사아카데미에 유학하여 1963년에 수료하고 귀국했다. 1965년 당중앙위원회 군사부 책임지도원으로 배치, 과장으로 승진했다. 1967년 10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어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검사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는 김두삼과 혼동한 결과물로 보인다. 김광운의 기록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 중동전쟁에 파견된 적이 있다고 한다. 1970년 11월, 포병사령부 부사령관에 임명, 1975년 중앙위원회 군사부 부부장에 이르렀으며,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82년 2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82년 8월, 조선로동당 6기 6중전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0월에 군사부장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 1984년 4월, 오백룡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85년 4월 13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대장으로 진급하였다.

하지만 1985년 6월, 군사부장에서 해임되고 1986년에 정치국 후보위원에서도 소환되었다. 이후 김일성의 군사서기를 지냈다고 한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92년 4월,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5년 7월, 김봉률 장의위원, 1997년 2월, 최광 김광진 장의위원을 지냈다. 정확히 언제 보선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1994년 시점에는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직함도 가지고 있었다.

이후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 관장으로 임명, 1998년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2003년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99년에 인민무력부 부부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고령이 문제였는지 2006년 이후로 동정이 보도되지 않다가 2009년 3월 11일에 7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당중앙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원회는 공동 명의로 부고를 발표, "그는 미제의 무력침공을 반대하는 조국해방전쟁에 참가하여 용감히 싸웠으며 오랜 기간 인민군대의 중요직책에서 사업하면서 당의 주체적인 군사로선과 방침을 관철하는데 모든 지혜와 정력을 다 바쳤다. 그는 조선로동당의 선군혁명령도를 높이 받들고 인민군대를 정치사상적으로, 군사기술적으로 튼튼히 준비된 무적필승의 혁명강군으로 만드는데 적극 이바지하였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2016년 5월, 7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김정은은 '혁명무력의 강화발전을 위한 투쟁에서 영웅적 위훈을 세운 귀중한 선군혁명전우'로 조명록, 김광진, 전재선, 윤치호, 리동춘, 김하규, 리진수, 심창완과 함께 김두남을 언급하였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