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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5-28 18:34:53

박영순(1905)



1. 개요2. 생애3. 장의위원회 구성4. 참고문헌

1. 개요

항일 빨치산 1세대 출신의 북한의 정치인.

2. 생애

1905년 10월 19일, 함경북도 경성군의 빈농가에서 태어났다. 반일 지하조직에 가담, 팔도구광산에서 지하정치공작을 하다가 1930년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며 해방 이후 다시 국내공작활동에 종사했다. 193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1932년 김일성 빨치산 부대에 가담했다. 무기기술의 전문가였는지 병기창을 만들어 고장난 빨치산 무기를 수리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88국제여단 시절에는 소련군으로부터 통신기술을 배웠다.

해방 이후 1946년 함경북도 청진시당 부위원장에 임명되어 북한 건국 사업에 참여했으며 6.25 전쟁 중에는 민족보위성 통신부장으로 참전했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국기훈장 제2급을 받았는데 이때 직함이 당중앙위원회 통신부장으로 소개되는 것을 보아서 일찍이 당중앙위원회에서 사업한 것으로 보인다.

1956년,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통신부장에 유임되었다. 1956년 10월 23일, 당중앙위원회 통신부장 자격으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와 해방후 민주 기지를 강화하는 사업에서 공훈을 세웠다"는 이유로 50세 생일을 기념하여 로력훈장을 받았다. 1959년, 만주로 파견되어 항일 빨치산 관련 사적자료와 유물을 수집하였다. 1959년,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보선되었으며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 1962년 10월, 3기 대의원에 재선되는 한편 내각 체신상에 임명되었다.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 1967년 3월, 리봉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7년 12월, 4기 대의원 및 체신상에 유임되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71년 6월 26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영채에게 체신상 자리를 물려주고 당 행정부장으로 이동하였다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71년 10월, 박문규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2년 12월, 대의원자격심사위원을 맡았으며 당연히 5기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73년 1월, 조선혁명박물관 관장으로 이동하여 김일성 우상화 사업을 하였다. 1975년 10월 25일, 조선혁명박물관 관장으로서의 공을 인정받아 공화국영웅 칭호, 국기훈장 1급, 금별메달을 받았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82년 2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 1984년 4월, 오백룡 장의위원, 1986년 4월, 김좌혁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6년,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87년 8월 18일, 14시 30분에 81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당중앙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는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박영순동지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충실한 혁명전사이며 우리 당과 인민의 충직한 아들이다. 박영순동지는 일찌기 혁명활동을 시작한 때로부터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당과 수령, 조국과 인멘에게 끝없이 충실하였으며 우리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 투쟁하였다. (...) 박영순동지의 전생애는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 투쟁한 견결한 공산주의혁명가의 빛나는 한생이었다. 박영순동지의 서거는 우리 당과 인민에게 있어 큰 손실로 된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시신은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장되었으며 반신상에 제작되었다.

3. 장의위원회 구성

4.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