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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8 08:42:38

박문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제1대 농림상
박문규
朴文圭 | Park Mun Gyu
파일:박문규.jpg
본관 밀양 박씨
출생 1906년 2월 24일
경상북도 경산군 압량면 조영동
(현 경상북도 경산시 조영동)[1]
사망 1971년 10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시
국적
[[북한|]][[틀:국기|]][[틀:국기|]] (1948 ~ 1971)
학력 경산보통학교 (졸업)
대구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제국대학 예과 ( 문과 / 수료)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 법학과 / 학사)
정당

파일:박문규.png
1934년 5월, 경기도경찰부 형사과에서 촬영된 사진

1. 개요2. 생애3. 장의위원회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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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농경제학자, 정치인이다.

2. 생애

1906년 2월 24일, 경상북도 경산군 압량면 조영동(현 경산시 조영동)에서 대지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 어려서 독선생으로부터 한학을 수학했고 경산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0년 대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25년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예과 제2회로 입학하였으며, 1927년 법문학부 법학과로 진학했다. 학부 재학 중 법학과 동기생인 최용달, 리강국과 함께 사회주의 이념 서클인 경제연구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2] 당시 재정학 교수였던 일본인 사회주의자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로부터 사회주의 사상을 점차 수용했다.

1930년 3월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한 후, 모교에 남아 법문학부 경제연구실 조수(1930.4~1932.3) 겸 법문학부 부설 만몽문화연구회 촉탁, 조선경제연구회 사무조수(1932.4~)로 근무하면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및 조선 농경제학을 계속 연구하는 한편, 물밑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을 해왔다. 이 때문에 1931년, 경성트로이카 이재유가 주도한 경성제국대학 반제운동 사건에 연루, 1934년 5월 22일 경기도경찰부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에는 여운형의 건국동맹에 친우인 최용달, 리강국과 함께 참여했다. 8.15 광복 후에는 직업 정치가로 변모하여 건준, 인공의 중앙인민위원-재정부장대리를 역임했다.

1946년 12월, 남로당 창당에 참여하여 1기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는데, 재밌는 것은 현재 북한에선 이 경력을 1기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인정해주고 있다. 이후 공산주의 활동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지자 1948년 8월 월북했다. 월북 후 1948년 9월, 북한 초대 농림상으로 발탁되었고 1949년 6월, 남북로당이 합당하면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대학 동기생 최용달, 리강국과 달리 천수를 누렸다는 게 흥미롭다. 박문규, 최용달, 리강국은 대학 입학 후 해방전후까지 사회주의 운동가의 길을 함께 걸었다. 그리고 월북 후에는 북한으로 넘어가 북한 국가 체제의 기틀을 수립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최용달은 법학자로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헌법의 초안을 기초하였고 이른바 '민주기지론'을 이론적으로 정립했다. 한국판 마타 하리, 김수임 사건으로 유명한 리강국은 남로당파, 연안파, 소련파, 갑산파, 만주파가 공존하고 있던 초기 북한 정계에서 남로당파의 중추로 활약했다. 그리고 박문규는 일제강점기 시기 사회주의 이론에 따라 조선의 농업경제를 연구하고, 해방후에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북한 농업구조의 재편을 주도했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 1951년 8월, 허헌 장의위원을 지냈다. 1954년 3월 23일, 3월 전원회의 결과로 김일이 농업상에 임명됨에 따라 농업성 부상으로 강등되었다. 1956년 5월 11일, 국가검열상에 임명되었다.

1957년 9월, 2기 내각에서 국가검열상에 재선되었으며, 1958년 9월 7일, 김응기, 김응상, 리병남, 박세창, 유철목, 정성언, 최재우, 최재하와 함께 북한 창건 10주년 국기훈장 2급을 받았다. 1959년 5월, 국가검열성이 폐지되고 지방행정성이 신설되자 지방행정상으로 옮겼으나 1959년 9월, 지방행정성 폐지와 함께 해임되었다. 이후 1959년 10월, 최고인민회의로 옮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에 선출되었으나 1962년 10월, 림춘추에게 물려주었다. 1962년 10월, 3기 내각에서는 석산의 뒤를 이어 내무상에 임명되었다. 이후 1964년 12월, 내무성이 국토관리성으로 개편되면서 그대로 국토관리상을 역임하다가 1967년 7월, 다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에 선출되어 죽을 때까지 재직했다. 여담이지만, 이들 셋 중 최용달, 리강국은 남로당계 숙청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끝내 목숨을 잃었다. 반면 박문규는 같은 남로당계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숙청 기간에 농업성 부상으로 강등되었을뿐 살아남았고, 이후에도 여러 요직들을 두루 거치며 정치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월북인사들 중 숙청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인물들로 홍명희, 백남운, 이극로 등이 있지만 이들은 남로당 계열은 아니었는데 박문규는 남로당계였는데도 살아남은 경우다.

조선대백과사전의 기술에 따르면 1968년에 중앙위원회 위원 및 대의원에서 모두 소환되었다고 하는데 정작 북한에서 발표한 부고에 따르면 죽는 순간에도 중앙위원 겸 대의원이었다. 어쨌거나 마지막까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 겸 조평통 부위원장을 겸직하고 있었다. 당중앙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동지는 자신을 당의 유일사상, 수령님의 혁명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자기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우리 당과 전체 조선인민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 무한히 충직하였으며 공화국북반부에서의 사회주의건설의 촉진을 위하여, 조국의 자주적통일을 앞당기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였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 조성 이후 그곳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후임 서기장으로는 전창철이 임명되었다.

3. 장의위원회 구성


여담이지만 최고인민회의 관련 인물 아님 월북 인사들이 많은 걸 볼수 있다.


[1]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 [2] 박문규, 최용달, 리강국, 이들 세 사람은 대학 동기로 만나 인생 반 생애를 사회주의 운동가로서 함께 보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