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金佐赫1916~1986
북한의 항일 빨치산 1세대 정치인.
2. 생애
1916년 2월 3일,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매우 어린 나이였던 1929년부터 항일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931년 3월, 길림성 훈춘현에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석방 이후 1934년 2월, 김일성의 항일유격대에 가담하였으며 1945년 8월, 소련군의 한반도 진입이 시작되자 오백룡과 함께 소련군 전초부대에 합류하여 일본군과 교전하면서 귀국했다. 해방 이후 최용건과 함께 정주로 배치되었으며, 김일성으로부터 항일 빨치산 2세대들을 만주에서 찾아오라는 명령을 받고 만주에 다녀오기도 했다. 중앙보안간부학교. 김책정치군관학교, 민족보위성 후방국, 해군사령부, 포병사령부 등에서 근무하였다.
1952년 3월, 김책정치군관학교 졸업 이후 해군사령부, 제1군사학원에 배치되었으며 1953년 2월, 포방사령부 부장으로 배치되었다. 1954년 9월, 고급군사학교 졸업 이후 포병사령부 당검열위원장으로 배치되었다. 1957년 9월, 중앙위원회 과장이 되었으며, 중앙당학교를 졸업하고 민족보위성 총참모부 부총참모장 겸 정찰국장에 임명되었고 이후 총정치국 부국장도 했다.
1961년 9월, 조선로동당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는데, 이상하게 나중에 발표된 락력에서는 1962년에 중앙위원회에 들었다고 해놨다.[1] 1962년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67년 4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법제위원을 지냈다. 총정치국 부국장을 지내다가 1968년 7월, 김동규의 뒤를 이어 평양시 책임비서에 부임하였으나 1969년에 강성산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1970년 2월에 조선인민군 당위원회 검열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9월, 중앙위원회 부부장에 임명되었다.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하지만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서 탈락했다. 1977년 3월, 지병학 장의위원, 1978년 9월, 한익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는 한편, 주창복과 함께 당중앙검열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82년 4월 2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 칠순 기념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았다.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 4월, 오백룡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6년 4월 5일, 7시 30분에 중앙위원회 위원 및 검열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재임하던 중 병사했다. 당중앙위원회는 부고를 발표하고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세우고 당과 수령에게 무한히 충실하였다."라고 항일 빨치산 1세대 치고는 다소 간략한 치사만을 남겼다. 이후 시신은 처음에는 애국렬사릉에 묻힌 것으로 보이는데 1991년에 작성된 안장자 명단에 김좌혁도 항일혁명렬사 직함으로 있었다. 이후 대성산혁명렬사릉으로 이장되었으며 반신상도 제작되었다.
3. 장의위원회 구성
- 위원: 서철, 김환, 서윤석, 리근모, 계응태, 최광, 채희정, 전문섭, 김기남, 김국태, 김시학, 강석숭, 백학림, 박영순, 황순희, 한상규, 방학세, 김철만, 주도일, 강현수, 조명선, 최인덕, 태병렬, 오재원, 전문욱.
4. 참고문헌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