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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00:11:15

김동규(북한)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전성기2.3. 몰락: 김동규 사건
3. 참고문헌

1. 개요

항일 빨치산 1세대 출신 북한의 정치인.

국제비서, 국가부주석까지 역임했으나 1977년에 돌연 숙청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조선족들은 그를 1915년 함경도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억하고 있으나 헝가리 대사관 보고에 따르면 1913년 출생이다. 공청 훈춘현 당위원회 서기로 사업하였으며 1935년 1월, 대황외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후 동북항일연군 6사 7단 연장이 되었다가 제3방면군에 파견, 제3방면군 산하 14단 단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김일성 직속 유격대에 합류하였다. 이후 소련으로 넘어가 88여단에 편성되었다. 그곳에서 소련 극동군 정찰부대원으로 활동했으며 일본어, 독도법 등을 배웠다. 이때 김동규는 일본어가 아니라 러시아어를 배우고 싶다고 반발했으며 몇년간 매우 우울하게 병영 안에서 지냈다고 한다.

해방 이후 하바롭스크에서 군용열차를 타고 조선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1945년 9월 2일 목단강시에 들러 항일연군개선환영대회에 참석, 김광협, 류창권, 조명선과 함께 목단강에 잠시 남아 고려정찰대에 합류, 황동하란 이름으로 고려정찰대 14단 3영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당연히 다른 중국인 자위대와 달리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을 지지하였고 이후 1949년 15병단 독립단장에 임명되었으며 국공내전 종결 이후인 1950년 3월, 인민해방군 독립 15사단 3단장에 임명, 조선인 부대들을 이끌고 귀국하였다. 원산에서 조선인민군 12사단으로 개편, 32연대 연대장에 임명되었다.

6.25 전쟁에 참전했으나 1950년 8월, 안강전투에서 참패하고 면직되어 한동안 별 보직 없이 지내다가 1958년 11월, 소련 나호드카 총영사로 파견되었다는 정보가 있다.

2.2. 전성기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법제위원에 선출되었다. 1966년 9월 30일, 평양시 당위원장 리송운이 검사총장으로 이임하면서 1966년 10월, 평양시 책임비서에 임명되었다. 1966년 10월, 2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으로 보선되었다.1967년 3월, 리봉수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67년 11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상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68년 3월, 홍명희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68년 7월에 김좌혁에게 평양시 책임비서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후 1968년 6월, 국제비서에 임명, 이후 국제부장도 겸하였다. 1969년 4월 9일, 프랑스 공산당의 초청으로 조선로동당 대표단을 이끌고 프랑스를 다녀왔다. 1969년 8월 3일, 루마니아 공산당 10차 당대회에 조선로동당 대표단장으로 또 다녀왔으며 1969년 8월, 리주연 장의위원을 지냈다. 루마니아에 들른 김에 오스트리아 공산당의 초청을 받아서 8월 16일, 오스트리아에도 다녀왔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대회집행부에 포함, 정치위원회 위원 겸 비서국 비서로 선출되었다. 1971년 4월 19일, 불가리아 공산당 10차 당대회에 조선로동당 대표단장으로 다녀왔다. 6월 13일에는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8차 당대회에 조선로동당 대표단장으로 다녀왔다. 10월엔 파나마, 11월엔 덴마크에 조선로동당 대표단장으로 다녀왔다. 이후로도 많은 나라에 대표단장으로 방문하였다. 1972년 12월, 리경석 장의위원장을 지냈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대의원자격심사위원장 및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73년 1월, 정준택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74년 11월, 최고인민회의 5기 4차 회의에서 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부주석으로 조동되면서 국제비서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이는데, 북한이 중국에 보내준 김영남의 략력에 따르면 1974년 11월에 김영남이 새 국제비서에 임명되었다. 1976년 3월, 남일 장의위원, 1976년 5월, 홍원길 장의위원, 1976년 9월, 최용건 장의위원을 지냈다.

2.3. 몰락: 김동규 사건

그리고 전 대외조사부 부부장 박병엽의 증언에 따르면 1976년 6월, 정치위원회 회의에서 김동규가 김정일의 간부정책, 계급정책, 후계체제 확립과정의 문제에 대해 크게 비판했다고 하는 김동규 사건이 발생하였다. 박병엽은 리용무, 류장식, 지경수, 지병학 등이 김동규의 편을 들어 김정일을 비판했으며 김일, 오진우, 최현은 김정일을 지지하였고 김일성이 최종적으로 김정일 편을 들면서 김동규가 숙청되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박병엽의 주장과 다르게 김동규는 1977년 4월 24일,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45돐 중앙보고대회에 보고자로 출석하였으며, 6월 4일, 보천보 전투 40주년 기념보고대회에서도 보고자로 출석했다. 이후 1977년 9월 말까지도 매우 활발한 활동을 보였으며 1977년 10월, 폴 포트의 북한 방문 때도 나타났다. 그리고 리용무가 김동규의 편을 들어서 김정일을 공격했다는 주장은 리용무가 김정일의 최측근이었다는 여러 자료들을 볼때 신빙성이 부족한 주장이다. 자세한 것은 김동규 사건 문서 참조.

하지만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부주석에서 탈락하면서[1] 신변 이상 징후가 나타나더니 북한 공식매체에서 완전히 실종, 1980년 6차 당대회에서도 탈락하였다. 이후 김일성의 세기와 더불어에서도 이름 한번 언급되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기록말살당했다. 김길선 기자는 북한 내부에서 김동규가 항일 빨치산인줄 알았는데 경력조사를 해보니 사실 일본 간첩이었다는 내부 문건이 회람되었다는 증언을 남긴 바가 있다. 1980년 11월, 주북 헝가리 대사관은 김동규가 1977년, 김정일의 지시로 체포되었다는 보고를 본국에 보냈다. 결론적으로 이런 정황들로 볼때 그가 숙청당했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강명도의 증언에 따르면 1977년 리용무의 숙청 이후 김정일과 오진우의 관계가 좋아지면서 김정일이 때가 왔다고 생각하여 김동규를 항일운동 변절자로 음해하는 문서를 바쳤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동규는 숙청되어 함경북도 산골로 쫓겨났다고 한다. 하지만 전직 부주석의 위세로 지방에 내려가서도 으리으리한 집을 지어놓고 잘 지냈는데, 1980년에 함경북도로 현지지도를 간 김일성이 혁명화를 가서는 저러고 있다고 격노하여 김동규의 저택을 폭파시킨 다음에 그를 화성수용소에 처박아버렸다고 한다. 결국 화성 16호 수용소로 끌려가서 강냉이 농사를 지으며 영양실조에 시달리다가 1984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물론 강명도가 들은 풍문이니까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3. 참고문헌


[1] 최고인민회의 6기 1차 회의 직전인 1977년 12월 13일에 개최된 조선로동당 5기 15중전회는 조직문제를 다뤘지만 그 결과는 보도하지 않았다. 김동규가 이 전원회의에서 숙청되었을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