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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3478,#C39335> 내각 부수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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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 홍명희 | 김책 | 허가이 | 최창익 | |
<rowcolor=#003478,#C39335> 8월 전원회의 | |||||
최창익 | 박창옥 | 김일 | 정일룡 | 박의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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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건 | [[남일|남일]] | 정준택 | 박수완 | 리종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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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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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림 | 연형묵 | 연형묵 | 김윤혁 | 홍성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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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면수 |
2대 김성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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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김용진 |
5대 정일룡 |
6대 강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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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강현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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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김만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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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 윤기복 |
12대 박승일 |
13대 서윤석 |
14대 강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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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강현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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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박관오 |
20대 량만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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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차희림 |
22대 최희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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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 철강 테크노크라트.2. 생애
1912년 7월 3일에 함경남도 영흥군에서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고 하는데 북한에서는 그가 가난해서 공부를 전혀 못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농사를 짓다가 1937년부터 문평제련소에서 일하기 시작, 흥남제련소에서도 용광로공으로 일했다. 해방 이후 문평제련소 관리위원이 되어 공작 복구에 힘썼고 1945년 10월 14일에 문평제련소에서 다시 철을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46년 10월, 문평제련소 지배인이 되었으며 1947년 인민경제계획을 8월도 되기 전에 초과수행한 공로를 인정받아 1947년 9월 북조선인민위원회 산업국 부국장에 발탁되었다. 김일성은 1947년 7월 8일, 정일룡이 노동계급 출신이지만 일을 잘 할수 있을것이라고 직접 만나서 격려하였다. 이후 정일룡은 김일성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쳤다고 한다. 김일성은 세기와 더불어에서 정일룡이 일본인 십장들에 맞서 지하투쟁을 한 항일열사라고 추켜세워주었다.김일성의 배려로 중앙고급지도간부학교에서 공부한 이후 1948년 3월, 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 및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8월,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9월에 내각이 출범하면서 산업성 부상에 임명되었다. 1949년 1월 28일부터 2월 1일 사이에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1기 2차 회의에 참석하여 허성택, 김점권, 백남운, 리기영, 최승희와 함께 2개년 인민경제계획을 토의하였다. 1949년 6월, 남북로당이 합당하면서 상무위원회가 폐지됨으로 상무위원 자리를 잃었다. 산업성 부상으로 재직하면서 유일관리제를 도입하여 노동규율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1951년 2월, 부수상 겸 산업상인 김책이 갑작스럽게 죽은 이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2월 6일, 후임 산업상으로 승진하였다. 김일성은 그에게 김책이 했던 것처럼 로동계급 출신의 상으로 산업성 사업을 잘 하라고 교시하면서 그를 현지지도에 동행시켰다고 한다. 산업상으로 일하면서 전선에 포탄 공급을 늘리기 위해서 똥꼬쇼를 하였다고 한다. 이후 7월 27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산업성이 경공업성과 중공업성, 건재화학공업성으로 분리되면서 초대 중공업상에 임명되었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 1951년 8월, 허헌 장의위원을 지냈다.
1952년 11월 18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최창익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에 임명되었다. 중공업상 자리는 김두삼이 물려받았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6.25 전쟁 중의 공을 인정받아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1953년 8월 전원회의에서 상무위원회가 부활하면서 다시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53년 9월, 박정애, 남일, 정준택, 김회일, 허정숙 등과 함께 소련과 중국에 원조를 청하기 위한 김일성의 해외순방을 동행했다.
1954년 3월 전원회의 이후 김일성의 3개년 계획 추진을 위해서 다시 중공업상을 겸하게 되었다. 김두삼은 신설된 전기상으로 이동하였다. 새로 부수상 겸 국가계획위원장에 임명된 박창옥과는 관계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1954년 11월 전원회의에서 3개년 계획 조기수행이 결정된 이후 열정적으로 중공업화 노선을 지지하였다. 1955년 6월 25일, 중공업성이 금속공업성으로 개편됨에 따라 초대 금속공업상에 유임되었다. 11월 27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금속공업상 자리를 강영창에게 물려주었다.
1955년 9월에 갑자기 병을 얻어서 수술을 받았는데 김일성이 직접 문병오고는 산삼과 녹용을 하사했다 카더라. 김일성은 이렇듯 정일룡을 자파 사람으로 보고 아꼈으며 3차 당대회에서 정치위원회를 폐지하고 소련의 간부회처럼 더욱 거대한 상무위원회를 설치하기로 결정한 후 즉시 정일룡을 그 멤버로 내정, 소련에 명단을 통보했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이 예고한대로 상무위원회 위원, 조직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최창익, 윤공흠, 박창옥 등이 8월 종파사건 도중 정일룡은 공부도 못한 무식한 노동자인데 어떻게 당과 국가의 주요간부가 될 수 있겠냐고 마구 비난했다는데 글쎄?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1956년 5월 11일 내각 부수상에서 해임되었다가 8월 종파사건이 끝난 후인 9월 4일에 다시 부수상으로 복귀한다.
1957년 8월에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9월, 최고인민회의 2기 1차 회의에서 내각 부수상 겸 기계공업상에 선출되었다. 천리마운동이 시작된 이후 김책제철소에 파견되어 19만톤의 철 생산량을 27만톤으로 올리는 공을 세웠다고 한다. 당중앙상무위원회 결정에 따라 1957년 12월부터 1958년 1월까지 금속공업부문을 현지지도하면서 공업생산을 증산하기 위해 독려했다. 1958년 2월 13일, 최고인민회의 정령에 따라 기계공업상에서 해임되어 최재우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는 정일룡이 너무 많은 직책을 겸직하고 있어서 기계공업상 임무에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58년 5월에 소련을 방문하여 흐루쇼프를 만났으며 루마니아도 방문하였다. 1958년 9월 7일, 국기훈장 제1급을 수훈받았다. 1959년 6월, 중국을 방문하였다. 1958년 9월 7일, 김일, 박정애, 김달현, 정준택, 김익선, 홍명희, 박금철, 림해, 리주연, 하앙천, 김창만, 리효순, 한상두, 남일, 홍기황, 김광협, 리종옥과 함께 북한 건국 10주년 기념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이후 김일성의 대숙청 와중에 평양시 인민위원회도 종파주의의 온상으로 지목되어서 탈탈 털렸고 1959년 8월, 정일룡은 평양시 건설에 박차를 가할 겸 김용진의 뒤를 이어 평양시 인민위원장을 겸하게 된다.[1] 김용진은 평양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강등되었다. 1960년 4월, 박달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정치위원회가 부활하자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62년 8월 1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중공업위원회가 폐지되고 금속화학공업성, 전기석탄공업성, 기계공업성이 설치되자 초대 전기석탄공업상에 임명되었다. 전기석탄공업성 업무에 열중해야 하는 탓인지 1962년 8~9월 즈음에 강희원에게 평양시 인민위원장 자리를 물려주었다.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2년 10월, 최고인민회의 3기 1차 회의에서 내각 부수상 겸 전기석탄공업상에 재선되었다. 그런데 1963년 전기석탄공업성의 일이 형편없다고 로동신문의 비난을 받는 일이 있었다. 결국, 1964년 12월 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을 통해 전기석탄공업상에서 짤리고 김태근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한동안 공개석상에서 실종된다.
1966년 10월, 제2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위원에서 해임된 것으로 알려졌다. 1967년 11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12월, 최고인민회의 4기 1차 회의에서 건재공업상에 임명됨으로 생존이 확인되었으나 각종 외교활동에 나서면서 기세 등등했던 과거에 비해서는 무척이나 초라한 위상이었다. 1968~1969년 사이에 금속공업상으로 이동하여 1971년에 해임되었다는 정보가 존재한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에서 탈락했으며 1972년 12월, 5차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서도 탈락하였다. 그렇게 종적이 묘연해졌고 두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78년 1월 14일에 사망했다는 것이 나중에 애국렬사릉에 안장되면서 확인되었다. 북한 주장에 따르면 말년에도 열심히 일하다가 병환을 얻어 오래 투병했고, 김일성의 온갖 배려에도 불구하고 죽었는데, 그가 죽은 이후 김일성과 김정일이 모두 슬퍼하며 추모하였고 그의 장의식이 거행된 1월 16일, 김일성은 중앙인민위원회-정무원 연합회의를 2시간이나 일찍 끝내서 간부들을 그의 장례식에 참석시켰다고 이빨을 까고 있다. 하지만 북한 정권은 정일룡의 죽음에 대해서 일절 보도하지 않는 등 한때 잘 나갔던 그의 죽음에 매우 싸늘하게 대응했다. 실제로 북한 선전에서도 '지난 시기 수령님의 뜻대로 일을 쓰지 못하여 수령님께 걱정만 끼쳐드렸습니다'라고 적혀 있는 등 말년에 사고 쳐서 미운털이 박혔던 것이 분명하다. 조선대백과사전에서도 1966년 이후 정일룡의 생애에 대해서는 얼버무리고 있다.
북한의 설명에 따르면 1988년 12월, 김일성이 갑자기 "정일룡 동무가 기계공업상을 하였는데 그는 혁명성이 높았습니다. 정일룡 동무의 묘가 애국렬사릉에 있습니다. 그가 전후시기에 일을 잘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나중에 김일성이 옛정이 생각나서 복권해준 것으로 보인다. 1996년 9월 24일 로동신문은 정일룡을 추모하는 기사를 송고하였다.
3. 여담
4. 참고문헌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
-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서울: 도서출판선인, 2005).
- 이정식, 로버트 스칼라피노, 한국 공산주의운동사(서울: 돌베개, 2015).
- 조수룡 (2021), 북한의 제1차 5개년계획(1957~61) 초안과 탈소련화의 개시, 역사학보, 249.
[1]
김용진은 1959년 8월까진 평양시 인민위원장으로 활동했다가, 8월 말부터 부위원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