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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2 03:27:14

하앙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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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김두봉 허헌 유성훈 하앙천 황장엽
(대수미상)
지창익 박관오 성자립 태형철 최상건
(대수미상)
리국철 김승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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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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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河仰天

한국의 독립운동가 출신의 북한의 정치인.

2. 생애

1903년 혹은 1907년 강원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뒤에서 밝히듯이 1906년생으로 보인다. 초기 자료는 매우 혼란스러운데, 1925년에 중국에서 중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김중생의 연구에 따르면 1936년에야 중국으로 망명하였다고 한다. 중국공산당 산하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43년, 산서성 태악산에서 팔로군 적군공작부로 활동했다.

해방 이후 1945년, 김두봉 등과 함께 조선독립동맹 중앙집행위원 자격으로 1차로 입북하였으며, 신민당 조직에 참여하지 않고 즉시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다. 함흥시 당위원회 부장으로 사업하다가, 1948년 3월, 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50년, 조선로동당 간부학교 교육부장을 맡았으며 1953년 11월, 내각 산하 도서검열부장을 맡았다고 한다. 김일성의 개인 비서로 일하다가 1954년 3월 전원회의에서 김창만의 뒤를 이어 선전선동부장에 임명되었다. 1954년 11월 전원회의에서 박영빈에게 선전선동부장 자리를 물려주고 사회과학부장으로 이동했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 과학부장에 유임되었다.

1956년 9월 1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당중앙위원회 과학부장 자격으로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와 공화국의 과학문화사업을 강화발전시킴에 공훈을 세웠다"는 이유로 50세 생일 기념 로력훈장을 받았다. 이를 보면 1906년 생이다. 1956년 9월, 중국공산당 제8차 대회에 최용건, 림해, 리주연과 함께 조선로동당 대표단으로 파견되었다. 이후 학교교육부장 리신팔이 소련 대사에 임명되면서 후임 학교교육부장에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최고인민회의 2기 1차 회의에서 상임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8월 종파사건과 그 이후의 대숙청 과정에서 김일성종합대학을 반마르크스주의적, 반당분자들이 장악하고 있다면서 교육 부문의 숙청을 주도했고 동시에 당이 엘리트 정책에 엄청난 성과를 거두어 구시대 지식인들을 인민민주주의의 지식인들로 개조했다고 자화자찬하였다.

1957년 12월, 조국전선 중앙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58년 1월, 조쏘 친선협회 중앙위원에도 선출되었다. 1958년 3월, 1차 당대표자회 이후 상무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승진했다. 1958년 9월 7일, 김일, 박정애, 김달현, 정준택, 김익선, 홍명희, 박금철, 림해, 리주연, 정일룡, 김창만, 리효순, 한상두, 남일, 홍기황, 김광협, 리종옥과 함께 북한 건국 10주년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1958년 10월, 조중 친선협회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60년 3월 25일, 조선로동당 국제부장 박용국과 소련대사관 제1서기관 율린의 대화에 따르면, 1960년 초, 당중앙위원회 직속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원이 설치되면서 학원장을 맡았으며 동시에 중앙당학교 교장도 겸임하였으며 이에 집중하기 위해서 학교교육부장 자리는 고혁에게 물려주었다. 1960년 4월, 박달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0년 12월, 김일성종합대학교 총장에 임명되었는데 황장엽 회고록에 따르면 이는 김일성이 김정일의 대학 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고급 간부를 총장에 임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제는 김정일이 하앙천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재선되었다. 1962년 10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으로 재선되었다.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 1963년 5월, 강진건 장의위원을 지냈다.

이정식, 로버트 스칼리피노의 연구에 따르면 1966년 10월, 2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강등당했다고 하지만 정확한 출처를 찾을 수 없다. 소련 외교문서에 따르면 2차 당대표자회에서 김창만과 함께 중국 사상을 북한에 유입시킨 혐의로 숙청되었다. 확실한 것은 1965년에 황장엽에게 총장 자리를 물려주고 해임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대남 분야로 보내져 중앙위원회 연락국 부국장에 임명되었다는 정보도 있으나 확인할 수는 없다. 일부 문헌에서는 1967년 4월, 갑산파가 숙청되면서 같이 날아간 것으로 적고 있으나, 소련 외교문서 등을 살펴보면 이미 1965년에 숙청상태였던 것이 확실하다.

황장엽 회고록에 따르면 하앙천의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해임 계기는 김정일이 대학을 졸업한 후 김경희가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하였고, 연이어 김성애의 자식들도 입학하였는데 이에 김정일이 황장엽을 추천하면서 교체되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뭘 잘못해서 숙청된지는 몰라도 복권도 되지 못해서 애국렬사릉 안장자 명단, 조선대백과사전에도 실리지 못했으며, 김일성종합대학 역대 총장 목록에서도 삭제되어있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