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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14 21:40:48

박용국(1921)



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갑산파의 일원으로 1967년에 숙청되었다.

2. 생애

소련 외교문서에 따르면 1921년 11월, 원산의 농민가정에서 태어났다. 젊어서 농부, 노동자로 일하다가 반일운동에 참가, 1943년에 투옥되었다. 해방 후 민청 원산시 위원장으로 사업하였다. 이후 소련으로 유학, 1953년 로모노소프 모스크바 국립대학을 졸업했다.

귀국 후 1953년 당중앙위원회에 들어갔으며, 1956년 1월, 민주청년동맹 위원장에 임명되어 청년학생 대표단장으로 소련 및 오스트리아를 방문하였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56년 4월, 민청 중앙위원장에 임명, 1956년 5월, 조국전선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57년 6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 8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외교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58년 3월, 1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1958년 5월, 아시아, 아프리카 단결위원회 위원장에 임명, 1958년 7월, 대외문화련락위원회 중앙위원에 선출되는 등 계속하여 외교업무를 보았다. 1959년 10월 22일, 상무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전임 국제부장 박성철이 외무상으로 이동함에 따라 민청 위원장에서 물러나 후임 국제부장에 임명되었으며 루마니아, 소련 등을 방문하였다. 1960년 4월, 박달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0년 6월에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세계 공산당, 노동당대회에 김창만과 함께 북한 대표단을 이끌고 참가하여 흐루쇼프와 마오쩌둥이 개처럼 싸우는 것을 봐야했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겸 외교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66년 10월, 2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및 국제비서에 선출되었으며 1967년 3월, 리봉수 장의위원을 지냈으나 불과 2개월 후인 1967년 5월, 갑산파 사건에 휘말려서 숙청당했다. 일설에 따르면 이때 김영남이 그의 비리를 폭로하는 등 공격했다고 한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박금철, 리효순 등이 갑산파 사건 직전에 자취를 이미 감춘 것에 반해 박용국, 김도만, 고혁 등 같이 숙청당한 잔챙이 갑산파들은 직전까지도 행사에 나왔다.

나중에 1975년 12월 4일, 김일성은 정치위원회 회의에서 "사대주의, 수정주의사상에 물젖어있은자들인 박금철, 박용국이 우리의 대외사업을 다 망쳐놓았다"라고 다시금 박용국을 부관참시해버렸다.

3. 여담

황장엽이 김도만과 더불어 김영주와 친밀했다고 증언한 인물인데, 소련 외교문서에도 언급되는 사실이다.

4.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