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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3 00:53:40

김익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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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북한 정치인. 초대 최고재판소장.

2. 생애

1918년 경상북도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으나 소련에서 작성된 평정서에 따르면 1899년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태어났다. 1930년대에 적색농민조합운동과 조국광복회 활동을 하였으며 김광운의 연구에 따르면 혜산 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해방 이후에 석방되었다고 한다. 1936년부터 1945년까지 오랫 동안 투옥되어 있었다. 이 활동 때문에 갑산파의 일원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작 1967년 갑산파 숙청 이후에도 한동안은 잘 나갔고 박금철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는 증거는 없다.

해방 후 면당위원장을 시작으로 군당위원회 부위원장을 거쳐 1945년 10월, 소련 중앙당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귀국 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중앙위원회 부장을 지냈다고 한다. 1947년 내무성 문화국 선전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48년 3월, 평남 재판소장에 선출되었다. 1948년 7월, 당중앙위원회 검열위원이 되었다. 1948년 9월, 1차 내각이 출범하자 북한의 초대 최고재판소장에 임명되었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 1951년 8월, 허헌 장의위원을 지냈다. 1952년, 정부대표단장으로 루마니아에 다녀왔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로력훈장을 받았다.

1955년 1월, 인도 콜카타에서 열린 아시아 법률가 대회에 북한 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1955년 3월, 조성모에게 최고재판소장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 시기에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장도 겸한 것으로 보이나 얼마 안가서 연안계의 서휘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1955년 11월 29일, 리효순의 뒤를 이어 국가검열상에 임명되었으며 1955년 12월, 당 검열위원장 림해, 내무상 방학세, 민족보위상 최용건, 최고재판소장 조성모와 함께 박헌영을 사형에 처했다. 이후 림해의 뒤를 이어 검열위원장에 선출된 것으로 보인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 및 검열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56년 5월 11일, 국가검열상 자리를 박문규에게 물려주었다.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최고인민회의 법제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57~1958년 사이에 상무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다.[1] 1958년 2월, 민주법률협회 위원장을 겸하였으며 1958년 3월, 몽골인민혁명당 13차 당대회에 조선로동당 대표단장으로 파견되었다. 1960년 1월, 리송운, 서철, 김경석과 함께 비밀재판을 열어 박창옥, 최창익, 고봉기 등을 사형에 처하고 박의완에게 10년형을 선고했다. 1958년 9월 7일, 김일, 박정애, 김달현, 정준택, 홍명희, 박금철, 림해, 리주연, 하앙천, 정일룡, 김창만, 리효순, 한상두, 남일, 홍기황, 김광협, 리종옥과 함께 북한 건국 10주년 기념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1960년 4월, 박달 장의의원을 지냈다.

1960년 11월 24일 최고인민회의 결정에 따라, 다시 최고재판소장에 선거되었다. 1961년 5월, 조평통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상무위원회가 정치위원회로 환원됨에 따라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재선되었다.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법제위원장, 최고재판소장에 재선되었다.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 1963년 5월, 강진건 장의위원, 1965년 5월, 한동백 장의위원, 1965년 7월, 정로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6년 9월 30일, 폐지되었던 국가검열성이 다시 설치됨에 따라 다시 국가검열상에 임명되었다. 후임 최고재판소장에는 리국진이 선거되었다. 1966년 10월, 2차 당대표자회에서 검열위원장 자리를 김려중에게 물려주고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1967년 3월, 리봉수 장의의원을 지냈다. 1967년 12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는 한편 국가검열상에 유임되었다. 1969년 8월, 리주연 장의위원을 지넀으며 1969년 11월, 당정 대표단장으로 알제리를 방문하여 후아리 부메디엔에게 김일성의 선물을 전달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치위원회 위원 및 국가검열상 직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 집행부에 포함되었으나 중앙위원회에서 탈락하였으며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도 탈락하면서 공개석상에서 사라졌다. 박병엽은 그가 갑산파 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된 것이라는 증언을 남겼으나 갑산파의 몰락 이후에도 4년 가까이 잘만 활동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의심된다.

3. 참고문헌


[1] 소련 문서에 적어도 1958년 5월에는 상무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언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