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북한의 정치인.2. 생애
6.25 전쟁 전사자 가족 출신으로, 김일성종합대학 졸업 이후 선전선동부에 배치되어 일했다고 한다. 1970년 4월, 내각 출판지도국장을 하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윤승관 본인의 수기에 따르면, 1971년 11월 김정일의 호출을 받고 입체인쇄부문 창설에 대한 지시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1972년 초부터 입체인쇄기지 건설을 위해 똥꼬쇼를 하여 첫 입체사진인 <만경대생가>를 촬영하였다. 이에 김정일이 첫 입체사진으론 괜찮다고 칭찬하면서 보천보 전투 승리 35주년을 기념하여 김일성 입체사진 촬영을 성사시키라고 지시하였고, 량강도 혜산으로 현지지도를 간 김일성을 따라가서 <삼지연을 찾으신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를 촬영하는 공을 세웠다. 김정일은 이를 1972년 12월, 국가주석으로 추대된 김일성에게 선물로 바쳤고, 윤승관은 그 공으로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선전선동부 예술지도과에서 일하면서 당시 예술지도과 과장이었던 김정일의 측근이 되었다고 한다.1973년 9월, 김정일이 선전비서, 조직비서, 선전선동부장, 조직지도부장을 모두 겸직하게 되면서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발탁되었다. 1982년 2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85년 즈음에 조직지도부 부부장에 임명, 이후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에 이르렀다. 1987년 4월, 김일성 75세 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8년 3월, 조선로동당 6기 13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보선되었다.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강명도의 주장에 따르면 80년대 후반부터 조직지도부장을 맡을 정도로 김정일의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1991년 5월, 1차 당세포대회에 보고자로 출석하면서 슬슬 공개석상에서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김정일의 신임을 너무 믿은 나머지 지나치게 오만방자하게 굴었고, 1990년대 초에 자신의 명백한 상급자인 정무원총리 강성산을 자신의 하급자로 취급하는 사건까지 일으켰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설 자리와 앉을 자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인물로 크게 비판을 받고 또 다른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고갑종과 함께 숙청당했다고 한다.
이후 일체의 동정보도는 없었다. 하지만 처형되거나 한 것은 아닌지 2000년에 출판된 주체세계를 빛내이시며 3권에 윤승관의 글이 수록되었다. 다만 글 자체는 1976년 10월에 작성된 것이다.
3. 참고문헌
- (最新)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
-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한반도 절반의 상속인 김정일(서울: 중앙일보사, 1994).
- 현성일, 북한의 국가전략과 파워엘리트: 간부정책을 중심으로(서울: 선인,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