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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6 13:03:13

리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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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상
리용호
李容浩 | Ri Yong Ho
파일:리용호.jpg
<colbgcolor=#d6b534><colcolor=#FFF> 출생 1956년 7월 10일 ([age(1956-07-10)]세)
평양시
학력 남산고등학교 (졸업)
평양외국어대학 (학사)
소속 정당

선거구 황해북도 운하선거구 (제371호)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주 영국 대사 시절2.3. 외무상 시절2.4. 숙청
3. 일화4. 기타5. 경력6.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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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 외교관.

2. 생애

2.1. 초기 이력

1956년 평양에서 조직지도부 부부장을 지낸 리명제의 아들로 태어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평양외국어대학 졸업 이후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1979년 짐바브웨 주재 대사관 3등 서기관에 임명된 것이 확인되었으며, 1985년 스웨덴 주재 대사관 2등 서기관으로 옮겼다. 1988년, 외무성 국제기구국 2과 담당 지도원이 되었으며 1990년, 유엔에서 군축양성가 프로그램에 북한 외교관도 한명 보내달라는 요청이 들어오자 국제기구국 산하 군축과 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다가 자청해서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6개월간 미국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귀국했다고 한다. 이후 1994년 1차 북핵 위기가 터지자 NPT 탈퇴와 준전시 상태 선언을 통한 강경외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1차 북핵위기가 무사히 넘어가면서 1995년 외무성 참사에 임명되었다. 2000년 8월, 백남순 외무상의 홍콩 방문에 동행했으며 2000년 10월, 조명록의 방미도 수행하였다.

2.2. 주 영국 대사 시절

2001년 5월 17일, 하노이에서 개최된 아세안지역안보포럼에 북측 단장으로 참여했고, 2001년 9월, 유엔 인종차별철폐회의에 참석하여 연설하였다. 북한과 영국의 수교 이후 2003년 8월 30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초대 주 영국 북한 대사로 임명되었다. 태영호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이라크 전쟁으로 불안해진 김정일이 영국 측의 의사를 파악하여 미국이 북한을 침공할 가능성이 있는지 여부를 탐문하고, 1차 핵실험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2004년 2월 27일에는 아일랜드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봉정하면서 아일랜드 대사도 겸하였다. 영국 부임 후 2005년에 외교적 필요 때문에 대사관 직원들과 같이 골프를 배웠는데 하필이면 남한 골퍼에게 배운데다가 연합뉴스에서 그가 리명제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도한 것 때문에 김정일이 남조선 언론이 리용호가 리명제 아들인것은 어떻게 알았냐고 노발대발해서 다신 안하겠다고 싹싹 빌었다고 한다. 2006년 1차 핵실험 이후 목적을 달성한 그는 2007년 2월, 자성남에게 영국 대사 및 아일랜드 대사 자리를 물려주고 귀국했다.

2.3. 외무상 시절

이후 한동안 조용하다가 2010년 9월 23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외무성 부상에 임명되었고, 3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2011년 7월과 9월, 제1,2차 남북비핵화 회담에 참석했다. 2011년 12월, 김정일 장의위원을 지냈다. 이후 각종 외교업무를 보다가 2016년 5월, 전임 외무상 리수용이 국제부장 및 정치국 위원으로 영전하면서 후임 외무상에 임명, 7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2016년 5월, 강석주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2016년 6월 29일, 최고인민회의 13기 4차 회의에서 새로 설치된 국무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2017년 10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2차 전원회의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2018년 8월, 김영춘 장의위원을 지냈다. 그런데 어쩌된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김철만 장의위원회에서는 탈락했다. 2019년 3월에 1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4월 11일, 최고인민회의 14기 1차 회의에서 외무상 및 국무위원에 유임되면서 리수용과 더불어 북한외교의 투톱 중 한 사람으로 아주 잘 나가고 있었으며 2019년 6월 2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 추대 3주년 중앙보고대회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하노이 회담의 실패, 남북관계의 재경색 이후 결국 2019년 12월, 조선로동당 7기 5차 전원회의에서 외무상 해임되었으며 이후 조평통 위원장 리선권이 새 외무상에 임명되었다. 리선권은 외교관 경력이 전무한 군 출신 인물이라 굉장히 이례적인 인사로 평가받고 있다. 이후 2020년 4월, 최고인민회의 14기 3차 회의에서 리수용과 함께 국무위원에서 소환된 것이 북한 매체에서의 마지막 언급이었다.

2.4. 숙청

7기 5차 전원회의에서 해임된 이후 같이 해임된 리수용과 달리 두문불출하였는데, 2023년 1월 3일, 요미우리 신문 등 일본 언론은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그가 2022년 중에 4~5명의 다른 외무성 관계자들과 함께 처형되었다고 보도했다. # 대한민국 정부는 사실관계 확인에 들어갔으나 북한의 특성상 확실하게 알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태영호 의원은 이 소식에 대해 그가 정말로 처형되었다면 협상파들의 입지가 더욱 좁아졌다는 의미로 우리 대북외교 전략도 그에 맞게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분석하는 한편, 개인적으로 그와 인연[1]이 있는만큼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

2023년 1월 5일, 국정원은 리용호가 숙청된 것이 맞다고 발표했다. 처형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

2024년 류현우 전 쿠웨이트 북한 대사대리에 따르면, 리용호는 북미회담 실패를 이유로 숙청된 것이 아니라, 조성길 류현우 자신의 잇따른 탈북으로 외무성 수장인 리용호가 연대적 책임을 지고 숙청된 것이 아닐까하는 의견을 밝혔다. 2019년 3월에 하노이 노딜에 책임을 지고 외무성과 통일전선부 사람들이 이미 처벌을 당해서 리용호가 그 건으로 처벌받을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한다.

2024년 7월 16일 조선일보 단독 기사에 따르면, 2023년 11월에 탈북한 주 쿠바 북한 대사관 리일규 참사의 인터뷰를 통해 자세한 전말이 확인되었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리용호는 주중 북한 대사관 서기로부터 뇌물을 받아먹은 비리 혐의로 숙청됐으며 이에 2019년 12월 온 일가족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고 한다. 김정은이 얼마나 리용호를 조졌는지 그때 외무성에서는 외무성이 없어지는 줄 알았다고 벌벌 떨었다고 한다. 또한 리일규는 김정은이 명백히 외무성보다 통전부를 총애했다고 하는데, 이를 보면 외교 업무 경험도 없는 리선권이 낙하산처럼 후임 외무상으로 임명된 것이 상당수 설명된다.

3. 일화

리용호의 아버지는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을 지낸 리명제이고 어머니는 이름은 알 수 없으나 김일성종합대학의 교수였다고 전해진다. 리용호의 어머니는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였다고 하는데, 김정일의 처조카인 이한영의 수기 '로열패밀리'에 자세한 사정이 서술되어 있다.
1979년경으로 생각이 된다.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측근자파티의 비밀을 흘린 아내를 남편이 사살한 사건이다. 김정일과 이명재(리명제) 부부장 부부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이명재 부부장은 측근들 중에서도 김정일의 신임이 두터운 사람이었다. 파티에 참석하는 40명 정도의 측근 부부장 중에도 특별히 총애받는 사람이 있다. 이명재 부부장을 필두로, 최익규 부부장, 김용순 부부장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명재 부부장 부인은 김일성대학 교수다.

남편이 파티 때마다 새벽 서너시에 떡이 되어 들어오고, 어느 때는 머리를 잘려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술 취했을 때 가끔 주정하는 것을 들어보면파티가 상당히 난잡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수, 토요 파티라는 게 김정일이 측근들을 모아놓고, 여자들 앉혀 놓고 남조선 노래도 부르고 난잡하게 파티한다는 감을 잡았다. 그 부인은 '한 나라의 미래를 이끌어가야 할 지도자 동지가 이래서야 되겠느냐,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니 수령님께서 지금이라도 바로잡아 달라' 고 투서를 했다. 필적을 감추기 위해 왼손으로 썼다고 한다. 편지를 두 통 써서 한 통은 김일성에게 보내고, 한 통은 김경희에게 보냈다. 부인이 생각하지 못한점은 그 편지가 김일성에게 올라가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1979년이면 이미 김일성에게 올라가는 모든 보고가 김정일의 손을 거치던 때였다. 모든 서류는 먼저 김정일에게 보고됐고, 김정일이 지시해야 김일성에게 올라갔다. 김정일의 비준을 거쳐야 김일성에게 보고되는 것이었다. 당시 이미 김일성은 상징적 존재였다. 큰 외교 사항이나 보고받지, 국내의 일은 김정일이 비준하던 때인데 편지가 올라갈 리 없었다.

편지는 우선 정치보위부에 걸렸다. 김정일과 관련된 비방이나 음해를 조사하는 기관이 정치보위부 2국이다. 반당 불순분자 음해요소들을 발본색출해서 처형까지 전담하는 기구이다. 2국은 김정일의 지시하에 조사에 들어갔다. 2국이 발칵 뒤집혔다. 발신인이 없으니 은밀하게 조사에 들어갔다. 수사대상은 많지 않았다. 측근자파티를 아는 사람이 썼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을 빼고 모든 참석자가 정치보위부 2국에 불려갔다. 가족들까지 엄중한 조사를 받았다. 근 두 달 동안 파티 참석자들이 시달렸다. 그 동안 파티는 중단됐다.

두 달 만에 '범인' 을 찾아냈다. 이명재 부부장의 부인이었다. 부인은 정치보위부 사격장에서 부부장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형에 처하기로 결정됐다. 형장에서 이명재 부부장은 "저런 년은 내 마누라이기 이전에 원쑤같은 년이다. 저런 년은 내가 처단하겠다" 고 했다. 그는 정치보위부원에게 총을 달라고 해서 자기가 직접 권총으로 쐈다. 그리고는 김정일에게 권총을 주면서 "저도 죽여주십시오" 라고 했다. 김정일은 "너는 한번만 용서해준다" 고 말했다.

그 후에도 이명재는 김정일에게 상당히 총애를 받았다. 지도자 앞에서 그런 충성을 보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는 측근자파티에 계속나왔다. 이명재는 김정일의 배려로 중앙당에 근무하는 젊은 간호원과 결혼했다. 그 사람 마음속은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김정일이 아리따운 젊은 여자와 재혼까지 시켜줬으니, 고마웠을까? 그는 김정일의 행동을 비판하는 부인을 두었으니 북한 체제에서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케이스였다. 그러나 차마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행동을 한 탓에 구제되고, 총애를 잃지 않은 특이한 경우였다. 자식들은 어머니가 반당 반혁명분자로 처단되었다고 알고 있을 것이다. 설마 자기 아버지가 쏴 죽인 것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얘기를 최준덕에게서 처음 들었을 때 도저히 사실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 이한영, 《김정일 로열 패밀리》

다만 위의 일화에 대해서 김정일의 과외교사였던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김현식은 약간 다른 결말의 얘기를 언급한 바가 있다. 김정일의 눈앞에서 리명제가 아내를 쏘아 죽인 것이 아니라 김정일이 리명제를 불러다가 너는 마누라 관리도 못 하냐며 질책한 뒤 앞으로는 자신의 파티에 참석할 수 없다며 잘라내 버렸다는 것이다. 이에 리명제가 매일 같이 아내를 구박하며 폭력을 행사하였고 결국 아내가 정신병을 얻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그 일시에 대해서는 앞선 이한영의 이야기보다 1년 이른 1979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강명도의 책에도 위의 일화가 언급되는데, 김현식 교수의 증언과 비슷하다. 다만 여기선 리명제가 기쁨조와 같이 찍은 음란한 사진을 아내가 우연히 보면서 들켰으며, 아내가 이를 소문내고 다녔다고 한다. 이에 김정일이 리명제에게 집안 단속도 못 한다고 꾸짖었고, 리명제가 아내를 마구 구박하여 견디다 못한 아내가 목을 매어 죽었다고 한다. 이에 리용호와 그 여동생이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였다고 집을 뛰쳐나가 외가에 가서 자랐다는 이야기이다.

어느 쪽이든 리용호의 어머니가 남편 때문에 삶을 비참하게 마친 것은 사실인 듯하다. 이한영은 당 국제부 부부장이었던 최준덕에게서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고 했는데, 그 출처까지 명시하였고 김정일의 궁정에 직접 있어봤던 이한영의 증언이 가장 자극적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리명제의 자녀들이 아버지가 자기 손으로 어머니를 죽였을 거란 사실은 모른 채 소위 반동분자로 밝혀져 처형됐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을 거라고 책에 썼지만, 어느 쪽이 사실이건 리용호도 훗날 어머니의 죽음과 관계된 내막을 알게 된 모양이다. 그래서 리용호는 리명제와 김정일에 대한 원한이 굉장히 컸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아버지와는 평생 만나지 않았고 어차피 김정일 정권 시기만 해도 반동분자 어머니의 자식이라는 낙인 때문에 내부 요직으로 잘 진출하지도 못 하는 처지라 그저 해외를 떠돌았다고 한다. 하지만 태영호의 책에 따르면 리용호가 미국 연수를 갈때 김정일이 그가 리명제의 아들이란 보고를 받자마자 흔쾌히 재가를 해주었다고 한다.

4. 기타

5. 경력

임기시작 임기종료 비고
주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특명전권대사
2003년 8월 30일 2007년 2월 초대 주영대사로 임명
자성남에게 이임
내각 외무성 부상
2010년 9월 23일 2016년 5월 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임명
7차 당대회에서 외무상으로 승진
내각 외무상
2016년 5월 9일 2019년 12월 31일 7차 당대회에서 임명
최고인민회의 14기 1차 회의에서 유임
7기 5중전회에서 해임
조선로동당 7기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
2016년 5월 9일 2017년 10월 7일 7차 당대회에서 선출
7기 2중전회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
13,14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
2016년 6월 29일 2020년 4월 12일 최고인민회의 13기 4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14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14기 3차 회의에서 소환
조선로동당 7기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2017년 10월 7일 2019년 12월 31일 7기 2중전회에서 보선
7기 5중전회에서 소환

6. 참고문헌



[1]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영국 런던에서 함께 근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