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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16:04:04

류현우


<colbgcolor=#000><colcolor=#fff> 류현우
Ryu Hyun-woo
파일:류현우.jpg
출생 1973년 12월 ([age(1973-12-01)]세)
평양시[1]
가족 배우자[2], 딸
학력 평양외국어학원 (졸업)
평양외국어대학 (아랍어과 / 졸업)
경력 주 시리아 북한대사관 2등서기관
주 쿠웨이트 북한대사관 참사관 (대사대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고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 (제21기)

1. 개요2. 생애
2.1. 탈북2.2. 한국 생활
3. 언론 보도4. 방송 출연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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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前 외교관.

주 쿠웨이트 북한대사관 대사 대리를 지냈고, 2019년 9월경 탈북해 한국에 정착하였다.

2. 생애

1973년 평양에서 태어나 1995년 평양외국어대학 아랍어과를 졸업했다. 이후 조선인민군 공군에서 군복무를 한 뒤 외무성 중동국에 입부하였다.

김씨 일가의 금고지기라고 불리던 조선로동당 39호실의 실장 전일춘의 외동딸과 결혼하며 북한의 엘리트층과 혼맥으로 엮이게 되었다. 장인의 집에서 17년간 처가살이를 했는데, 그곳은 박남기, 오극렬, 김양건, 강석주, 김계관, 현철해 등 중앙당과 군부의 초고위층들이 거주하는 대동강구역의 ' 은덕촌'이라는 60평짜리 아파트 단지였다.

이러한 배경의 영향인지 류현우는 외무성 배치 7년 만인 2010년 시리아로 해외파견을 나가게 되었다.[3] 시리아는 한국과 수교하지 않은 국가[4]이기 때문에 다른 국가와 다르게 북한에서 안전대표(보위원)가 파견되지 않았고, 그래서 인터넷 사용과 한국 드라마 시청을 비교적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시리아에서 귀국한 뒤 3년간 북한에서 근무했고, 2016년 쿠웨이트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근무를 시작하여 2017년부터 쿠웨이트 대사대리를 맡았다.[5]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에 일시적인 훈풍이 불자, 평양에서 공식 전보로 한국을 쌀쌀맞게 대하지 말라는 내용이 오면서 남한 외교관과 소통을 많이 하게 되어 좋았다고 한다.

2.1. 탈북


탈북의 계기는 그림 한 장 때문이었다. 대북제재로 인해 쿠웨이트에서 외화벌이가 어렵게 되자 대사관 운영비를 아끼기 위해 작은 건물로 대사관을 이사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김일성 김정일이 그려진 선전화를 잃어버렸다. 처음에는 솔직하게 평양에 보고하기 위해 대사관의 세포비서였던 1등서기관과 이를 의논하였으나, 세포비서는 "보고하지 말고 덮어버리자"고 했고 류현우도 이에 동의하여 2년간 보고하지 않고 덮어두었다.

문제는 그 세포비서가 임기를 마치고 2019년 북한으로 돌아가면서 시작되었다. 조직지도부 당생활지도과에서 귀국한 외교관들을 재교육하기 위해 철저한 조사와 생활총화를 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세포비서는 선전선동부가 쿠웨이트 주재 북한대사관이 보유한 모든 선전 물품 목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용히 묻힐 줄 알았던 선전화 분실 문제는 물론이고 의도적으로 은폐한 사실까지 발각되어 가중처벌을 받을 것을 두려워한 세포비서는 이를 이실직고하며 모든 것을 류현우에게 뒤집어씌웠다.

류현우는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지만, 아내가 아버지인 전일춘의 은퇴와 심근경색 수술로 평양의 친정을 방문하면서 지인들로부터 이 소식을 듣게 되었고, 쿠웨이트로 돌아와 류현우에게 알렸다. 얼마 뒤 평양으로부터 "대사(류현우)가 직접 대사관 로비에 있는 유화 작품[6]을 가지고 평양에 들어오라"는 지시가 전보로 날아왔다. 유화에 그려진 김일성, 김정일의 인민복을 양복으로 바꾼 새로운 그림을 줄 테니 가지고 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잃어버린 선전화를 가져오라고 하면 눈치채고 도망갈 수 있으니 다른 그림을 가지고 오라고 지시를 내린 것이었다.

류현우는 아내에게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이것이 함정임을 간파하였고, 마침내 탈북을 결심하였다. 만약 평양으로 들어갔다면, 즉시 보위부에 체포된 후 최고지도자의 우상화를 소홀히 한 것도 모자라 은폐까지 한 정치범으로 몰려 최소 정치범수용소행 내지는 사형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류현우는 탈북을 계획하면서 아내를 어떻게 설득할지 고민이었는데, 아내 역시 이미 탈북을 결심한 상태였다. 아버지를 보러 귀국했을 때 목격하게 된 모습들로 인해 북한 체제에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평생을 김씨 일가에 충성하며 김정은의 최측근이었던 아버지 전일춘도 은퇴를 하니 은덕촌에서 나갈 수밖에 없었고, 이사 간 곳은 은덕촌 근처 은퇴 간부용 허름한 아파트[7]였다. 중앙당 고위층이 받는 배급 또한 일반 인민들이 받는 배급으로 바뀌어 6개월 치 식량으로 고작 감자 4kg을 배급받는 처지가 되었다. 전일춘은 강직한 성품으로, 김씨일가의 금고지기를 하면서도 비자금을 따로 빼돌리지도 않고 일생 배급만으로 생활해왔다. 그 덕분에 김씨일가의 측근으로 오래 살아남았지만, 따로 챙겨둔 것이 없어 은퇴 후에는 도리어 생활고를 맞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경험으로 아내는 북한에서의 삶에 희망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자녀의 미래를 위해 자녀에게 더 나은 삶을 주고 싶다는 생각 또한 탈북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마침 대사관을 다시 한 번 이사하게 되어 이삿짐을 싸는 척하며 자연스럽게 탈북을 준비하였고, 평소 일정대로 딸의 등교를 하는 척 자동차로 대사관을 빠져나와 주 쿠웨이트 한국 대사관으로 직행하였다. 탈북 신청 후 며칠 뒤인 2019년 9월 아내, 딸과 함께 한국으로 입국하였다.

2.2. 한국 생활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한국에 입국하여 조사를 마치고 2020년부터 대한민국 사회에 첫 발을 내딛게 됐는데 하나원에서 정착교육도 받지 못하고 바로 사회로 배출되어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8] 또한, 외교관 출신 탈북민들은 관례적으로 국정원 산하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 연구원으로 취직해 한국 생활을 시작하는게 대부분인데 당시 문재인 정부의 대북평화기조로 인해 그런 제의가 오지 않아 생활고에 시달렸다. 결국 2020년부터 2022년 여름까지 2년 반 동안 월 110만원을 받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았다.

다만 초기 몇년간은 정착지원금과 주거지원금이 나오기때문에 금전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탈북자들이 재입국을 결심하는 경우는 탈북 5~6년차 이후에 지원받을 건덕지도 없고 장기적인 일자리를 잡는데에도 실패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정부 연구소에서 프로젝트를 받아 수급자 신세를 벗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즈음부터 본격적으로 방송에 출연하고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등 공개활동을 시작하였다.

2024년 9월 26일, 민주평통 제21기 상임위원으로 위촉되었다. #

3. 언론 보도

4. 방송 출연

5. 여담


[1] 대한민국 헌법 제3조의 영토 조항과 국적법을 바탕으로 북한의 주민들과 그 후손들은 해외 국적을 따로 취득하지 않은 이상 태어날 때부터 한국 국적을 보유한다. 이에 따라 국적 표기를 하지 않는다. # [2] 김씨일가의 '금고지기'로 불리며 노동당 39호실을 총괄했던 전일춘의 외동딸이다. [3] 북한 외교관이 외무성에 입부한 후 처음 해외로 파견되기까지 보통 10년이 걸린다. [4] 시리아는 한국과 수교하지 않은 유일한 UN 회원국이다. 다만, 류현우가 시리아에 근무하던 당시에는 시리아와 더불어 쿠바도 한국과 수교하지 않은 상태였다. [5] 북한의 핵개발로 쿠웨이트가 북한 대사를 추방하면서, 참사관 직급으로 쿠웨이트 주재 북한대사관의 대사대리 직무를 맡은 것이다. [6] 잃어버린 출판 선전화와는 다른 물건이다. [7] 도태촌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8] 일반적으로 외교관이나 해외유학생과 같은 엘리트층 탈북민들은 하나원을 거치지 않는다. [9] 부인이 4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