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북한의 정치인.2. 생애
1906년 4월 28일, 함경북도 명천군 하우리[1]의 빈농가에서 태어나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일본 도쿄로 유학, 니혼대학에 입학하였으며 재학 중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에 입당, 1927년 4월,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선전부원을 지냈다. 1928년에 3차 조선공산당 사건 관련하여 체포되었고, 1930년 11월, 경성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형을 선고받은 후에 11월 5일에 서대문형무소에 입소, 1932년 12월 21일, 만기출소했다.해방 이후 조선인민공화국 건설에 참여,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내무부장 대리를 맡았다. 1946년 12월, 남로당 창설 때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48년 8월,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49년 6월, 남북로당 합당 이후 조선로동당에 합류했을 것으로 보인다. 남로당 동료들이 몰살당하는 와중에도 살아남아서 계속 경제 부문에서 사업하였다. 북한에서 숙청당하지 않고 그런대로 요직을 맡다가 사망하여 북한에서도 자료를 공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월북 이후 행적에 대해서 대부분의 문헌은 알수 없다고 대충 처리하고 있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당중앙검사위원회 위원 및 중앙검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내각 제품검사국장에 임명되어 사업하였다. 국기훈장 2급과 국기훈장 3급 2개를 받은 바가 있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검사위원회 위원 및 중앙검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재선되었으나 불과 2개월 후인 1961년 11월 14일, 병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김계림의 장의위원회는 간략한 부고를 발표하여 그가 독립운동에 참가하였으며 다년간의 사업으로 인해 국기훈장을 수차례 받았음을 지적하였다. 이때는 북한의 부고 패턴이 완성되기 전이라서 이전의 부고와 비교했을 때 많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김일성은 1970년 11월 2일, 5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김경석, 강진건, 강영창, 김은순, 리봉수, 김갑순, 김태근, 안룡각, 강상호, 리주연, 김원빈과 함께 김계림을 '당에 끝없이 충실하였으며 혁명을 위하여 몸 바쳐 투쟁한 동지'로 언급하였다.
이후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3. 참고문헌
- 강만길, 성대경,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서울: 창작과비평사,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