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농업부장
박훈일 Park Hun-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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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밀양 박씨 |
출생 | 1915년 1월 11일 |
경상북도
경산군
압량면 조영동 (현 경상북도 경산시 조영동)[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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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미상 |
미상 | |
국적 |
[[북한| ]][[틀:국기| ]][[틀:국기| ]] (1948 ~ 1971)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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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공산주의 독립운동가, 북한의 정치인.2. 생애
1915년 1월 11일, 연해주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적은 함경남도. 곧 훈춘으로 이사하여 어린 시절을 중국에서 보냈으며 1927년 소학교 졸업 이후 1931년까지 농사를 짓다가 만주사변 발발 이후 항일운동에 투신하였다. 1932년 간부학교에 입학, 군사정치를 연구했으며 1933년 동북인민혁명군에 참여했다. 193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이후 모스크바 유학을 떠나 모스크바 동방노력자대학을 졸업했다는 정보도 있으나 전문학교에서 교육이 끝이라는 얘기도 있다. 서동만의 연구에 따르면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졸업이 맞으며, 1938년에 방호산, 진반수, 림해 등과 함께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고 중국에 돌아왔다.중일전쟁 발발 이후 홍군이 국민당 영도 하에서 팔로군으로 개편되자 1938년 11월부터 1945년까지 팔로군 군사정치 부문에 종사했다. 종전 이후 귀국을 결정, 1945년 9월에 화북에서 동북으로 이동하면서 조선의용군에 가입했다. 12월에 조선의용군 제7지대장 겸 정치위원에 임명되어 길림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국공내전이 발발하자 동북조선의용군 제5지대 정치위원으로 중국 공산당 편으로 참전했다.
1946년에 입국, 8월의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 참석하여 주석단에 선출되었다.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북조선로동당 황해도 당위원장을 지냈다. 1947년 2월, 북조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47년 11월, 조선임시헌법제정위원회 산하 조선법전초안작성위원회에 참석하여 북한의 법률 초안 작성에 기여했다. 1948년 3월, 2차 당대회에서도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재선되었다. 당대회에서 무정과 최경덕이 토지개혁에서 우경적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했다. 1948년 8월,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48년 12월 2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강건, 김광협, 김달삼, 김웅, 김일, 전태룡, 최용진, 무정, 박달, 최광, 최현, 김경석과 함께 국기훈장 2급을 수여받았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즈음에는 내무성 경비국장으로 이동하여 보안 사업에 종사했으며 내무성 부상에 이르렀다. 1951년 12월, 정치위원회 결정에 따라 옹진 및 남연백군 농장 건설위원회 위원에 초빙되었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자유독립훈장 제2급을 받았다. 종전 후인 1954년 11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 농민부가 농업부로 개편되면서 초대 농업부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농업 집단화 정책에 참여했으나 연안계들은 농업 집단화에 있어 온건론을 지지하고 있었고 박훈일의 일처리도 나중에 농업부장이 된 현무광에 비하면 조심스러웠다.
1956년 4월에 개최된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 및 농업부장에 유임되었다. 8월 종파사건에는 가담하지 않았으나 강수봉의 회고에 따르면 중국과 소련의 개입으로 개최된 조선로동당 1956년 9월 전원회의에서 최창익, 윤공흠, 박창옥 등이 죄가 없는데도 당에서 쫓아냈으니 이를 주도한 무원칙한 자들을 당대열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격분해서 성토했다고 한다. 이는 중국과 소련 문서에서도 뒷받침되는 내용으로 그의 거침없는 발언에 김일성이 흥분하지 말라고 직접 제지하였으나, 그는 아랑곳않고 김일성까지도 비판했으며 박금철, 김창만, 한상두의 해임을 건의했다. 이 때문에 회의는 박정애의 제의로 휴회되어야 했다. 하지만 중국과 소련은 헝가리와 폴란드의 대소동을 보고 처음부터 김일성을 축출할 의도도 없었다. 여기에 이후 중소분쟁으로 중국과 소련은 김일성이 내부에서 어떤 대청소를 하든지 신경쓰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그는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1957년 2월, 농업 부문 열성자회 참석을 마지막으로 박훈일은 실종되었다. 8월 종파사건 관계자들을 실드치기도 했지만, 서동만은 박훈일이 배천바람에 관련한 당중앙의 방침에 반대했기 때문에 숙청되었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이후 1957년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서 김두봉이나 현정민같은 일부 연안계들이 일단 대의원에 선출된 것과 달리 대의원에서도 탈락했으며 1957년 10월 전원회의에서 농업부장은 현무광으로 교체되었다. 소련의 자료를 보면 농업성 고문으로 좌천된 것으로 보인다. 1958년 3월, 1차 당대표자회에서 출당, 제명당했다. 여정의 증언에 따르면 1958년 말에 체포되었다고 한다. 1959년에 이르러 박훈일은 반당종파주의자로 공개적인 맹렬한 비난을 받게 되었으며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수감되어 있던 여정은 1960년 4월, 감방에서 박훈일을 봤다고 한다.
이후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지만 교화소에서 비참하게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참고문헌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
-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서울: 도서출판선인, 2005).
- 여정, 붉게 물든 대동강(서울: 동아일보사,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