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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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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모기업 관련 정보 파일:소프트뱅크 그룹 로고.svg 소프트뱅크 그룹
일본시리즈 우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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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 우승
(2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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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시픽리그 전·후기 우승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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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초창기(1938~1949)
2.1. 난카이 호크스 전성기(1950~1977)
3. 암흑기의 시작(1978~1988)
3.1. 구단 매각, 그리고 후쿠오카로의 연고이전(1988)
4. 새로운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시작과 계속되는 암흑기(1989~1997)5. 강팀으로의 재도약(1998~2003), 구단 매각(2005)6. 그리고 가을 야구의 비극(2004~2010)7. 2008년 이후의 동향
7.1. 2008년 시즌7.2. 2009년 시즌7.3. 2010년 시즌7.4. 2011년 시즌7.5. 2012년 시즌7.6. 2013년 시즌
8. 왕조를 넘어선 소프트뱅크 제국(2014~2020)9. 왕조의 황혼(2021년 시즌 이후)

1. 개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역사 및 시즌별 기록을 정리한 문서.

2. 초창기(1938~1949)

1938년, 난카이 전기철도를 모회사로 한 난카이군(南海軍) 이란 이름으로 창단했다. 현재는 후쿠오카를 연고지로 하지만 초기부터 1988년까지 긴 시간을 오사카에 거점을 둔 구단이었다.

초창기엔 난카이군이란 이름으로 운영했으나 1944년 모회사가 킨키 일본 철도와 통합되는 바람에 킨키닛폰군(近畿日本軍)으로 개명당했다가 1946년 그레이트링(グレートリング), 그리고 1947년 다시 난카이 전기철도의 이름으로 사업을 시작한 모회사에 의해 난카이 호크스(南海ホークス)로 개명되었다. 현재까지 구단 명칭 호크스는 이때 난카이로 바뀌면서 처음으로 붙은 명칭으로 난카이 전기철도의 표장에 들어가 있는 에서 유래했다.

2.1. 난카이 호크스 전성기(1950~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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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카이 호크스 시절의 구단기(1977년부터 1988년까지 사용)
파일:난카이 호크스 엠블럼.jpg
구단 엠블럼

난카이 호크스 시절인 1947년부터 1988년을 반으로 뚝 잘라, 전기를 전성기 후기를 흑역사로 구분하는 올드 팬들이 많다. 이는 모회사가 잘나갈 때 함께 잘나가다 몰락할 때 같이 주저 앉은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실제로 난카이 호크스는 23년 동안 장기 집권한 츠루오카 카즈토 감독 아래 1951년, 1952년, 1953년, 1955년, 1959년, 1961년, 1964년, 1965년, 1966년 퍼시픽 리그 우승과 1959년, 1964년 일본시리즈를 우승하는 등 1960년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하며 퍼시픽 리그를 휘어 잡았다. 당시의 대표적인 스타로는 스기우라 타다시, 히로세 요시노리, 노무라 카츠야 등이 있었다. 이 시절에 수립한 1955년 퍼시픽 리그 우승 당시의 99승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일본프로야구 한 시즌 팀 최다 승 기록이다. 하지만 일본시리즈 우승은 못 했다

3. 암흑기의 시작(1978~1988)

그러나 1973년 퍼시픽 리그 우승 이후 휘청하더니 1977년 당시 선수 겸 감독이었던 노무라 카츠야가 팀을 떠난 후[1] 저주에 시달려 모기업이 다이에로 바뀌어 후쿠오카로 이전한 이후인 1998년까지 단 한번도 A클래스에 못 올라갈 정도로 공인 퍼시픽 리그 동네북으로 전락한 아픈 과거가 있다. 참고로 구단 사상 B클래스 성적을 맞은 적이 32번인데 이 중 20번이나 차지하는 게 바로 이 기간이다!

3.1. 구단 매각, 그리고 후쿠오카로의 연고이전(1988)

1988년에 모회사인 난카이 전기철도가 구단 운영 포기를 선언하면서 소매유통업체인 다이에가 구단을 인수하게 되고 이미 팬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오사카를 뜨기로 결정했다. 창단 50주년을 맞는 해였지만 결국 창단 50주년 기념으로 구단을 매각해버렸다. 매각 조건에 '호크스'라는 팀명을 유지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사진을 보면 시즌 중반까지 매각이나 운영포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매각 작업이 상당히 급박하게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팔려고 내놓은 구단을 창단 50주년 드립을 치면서 기념을 할 리가.

이 급작스러운 구단 매각의 내막에는 구단주이자 난카이 전기철도 회장이었던 가와카츠 덴(川勝傳)의 노환으로 인한 사망이 있었다. 팀이 장기적인 부진에 빠지자 난카이 전철 이사회와 노조는 "적자만 내고 그룹 이미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 구단을 매각하라"라고 요구해왔다. 하지만 가와카츠는 꿋꿋하게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 까지는 절대 구단만큼은 못 판다."라고 완강하게 버티면서 호크스에 대한 애착을 보였다. 결국은 1988년 4월 23일 가와카츠의 눈에 흙이 들어가자마자 구단을 다이에에 팔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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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사카 구장의 열악했던 모습>
난카이 시절의 홈구장이었던 오사카 구장은 구단 매각 후, 시내 중심지, 난카이의 본거지인 교통의 요지 난바 인근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팀이 도망가면서 방치가 돼버린다. 가끔씩 타 팀들의 경기가 열리기도 했지만, 그 이외엔 쓸모없는 건물이 되어 버린 건 마찬가지. 심지어는 야구장 안에 '주택박람회' 같은 전시회를 해놔서 야구장 안에 견본 주택( 모델하우스)이 늘어선 정말 굴욕 아닌 굴욕적인 장면도 연출되었다.[2] 웃을 수만은 없는 것이, 한국 동대문운동장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청계천 지역에서 장사하던 노점상이 청계천 복원사업 이후 갈 곳이 없어지자 폐쇄된 동대문운동장에서 풍물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장사를 했었다. 구단 매각의 이유 중 하나가 간사이 국제공항의 개통에 따른 난바역 주변 재개발이라는 명목도 있었으나 거품경제 붕괴 후로는 손을 못 대고 방치에 방치를 거듭. 결국 1998년 11월에 와서야 헐리고, 지금은 난카이 그룹 계열 쇼핑 센터인 난바파크스(なんばパークス)가 자리잡고 있다.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66caa337.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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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카이 호크스 기념관
다만, 호크스에 대한 대우는 떠나간 프랜차이즈치고는 어느 나라보다는 대우가 후한 게 오사카 구장 부지에 들어선 난바 파크스 쇼핑센터에 난카이 호크스 기념관도 있고, 관중석 일부도 보존되어 있다.

난카이 구단과 척을 진 레전드 노무라 카츠야의 경우는 한때 유니폼 한 조각, 사진 한 장[3]조차 전시하지 않고 있었으나, 노무라 사치요와 카츠야의 사후 아들 카츠노리가 아버지의 현역 시절 장비들을 기증하면서 전시했다. 타자들 중에서도 최고의 에이스에, 당시 투수 에이스인 스기우라 타다시와 함께 황금 배터리를 이루었다고 평가받는다.

난카이의 여담을 하나 더하자면, 도카벤으로 유명한 만화가 미즈시마 신지의 ' 아부상' 이라는 만화가 있는데, 여기 주인공이 난카이 호크스에 있는 것으로 설정이 되어 있어서 야구장에 광고판까지 있었다. 때문에 난카이 호크스 해단 관련 동영상에 작가가 꾸준히 등장하며, 마지막 경기 때는 중계도 함께 했다. 아부상은 호크스가 후쿠오카로 이전하고 다이에와 소프트뱅크의 손을 걸친 지 한참이 된 시기까지도 연재되었다가 2014년에야 완결이 났고, 주인공은 은퇴 뒤 현실에서 영구결번까지 되었다. 결과적으로 80년대까지는 칸사이 지방에 한큐 브레이브스, 긴테츠 버팔로즈, 난카이 호크스 의 퍼시픽 리그 3팀이 존재했으나, 지금은 그 조상도 애매해진 오릭스 버팔로즈(구 한큐 브레이브스)만 남아 있게 되었다.

4. 새로운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시작과 계속되는 암흑기(1989~1997)

파일:external/auctions.c.yimg.jp/sopeppp11-img600x504-14541260511454126051.811529890gux57k29890.jpg 파일: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엠블럼.svg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시절의 구단기와 로고

호크스 구단을 매입한 다이에는 당시 재개발 사업이 한창인 기류에 편승하여 1989년 후쿠오카로 연고지를 이전하여 팀명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福岡ダイエーホークス)로 개명하였고, 그 후 1993년 당시 돈으로 800억 엔을 투입하여 돔구장을 짓는 돈지랄을 과시하면서 헤이와다이 구장에서 지금의 홈구장인 후쿠오카 돔으로 홈구장을 옮겼다.[4] 또한 웬만하면 팀명이 바뀌지 않는 한 바꾸지 않는 응원가[5]를 갈아엎었다.[6]

잠시 새 연고지인 후쿠오카 헤이와다이 구장에 대해 설명하자면 1950년 일본프로야구 양대리그 체제 시작과 함께 서일본 철도 서일본 신문이 각각 퍼시픽 리그 니시테츠 클리퍼스 센트럴 리그의 니시닛폰 파이리츠로 일본프로야구에 참여, 같은 헤이와다이 구장을 홈구장으로 쓰며 리그에 참가했다. 그러나 1년 만에 니시닛폰이 구단운영을 포기하면서 클리퍼스가 파이리츠를 흡수합병하여 니시테츠 라이온즈가 탄생했고, 미하라 오사무 감독의 지휘 아래 나카니시 후토시, 이나오 카즈히사, 오기 아키라, 토요다 야스미츠 등의 맹활약으로 1956~1958년에 3년 연속으로 미하라의 라이벌 미즈하라 시게루가 이끌던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누르고 일본시리즈를 제패하는 황금기를 누렸으나 1963년 퍼시픽 리그 우승을 끝으로[7] 점점 팀이 약체화되어가다 소속 선수들이 승부조작을 자행한 것이 발각된 검은 안개 사건으로 주요 선수들이 영구제명 등의 처분으로 팀을 떠나는 등 구단이 나락으로 떨어진 끝에 결국 1972년 서일본 철도이 구단 운영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 뒤 팀은 명명권 판매 등으로 "타이헤이요 클럽(1973~1976)-크라운 라이터(1977~1978) 라이온즈"로 이름을 바꾸며 어찌저찌 연명했으나 1979년 세이부에 매각되어 세이부 라이온즈로 이름을 바꿈과 동시에 연고지를 사이타마로 이전하여 후쿠오카를 떠나게 되면서 큐슈 팬들은 오랫동안 응원했던 야구단을 잃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참고. 물론 그 10년 사이에 후쿠오카에서 그냥 멍하니 있었던 건 아니었고, 어떻게든 새 구단을 유치하기 위해 서명운동 등의 방법을 동원한 그 결과 후쿠오카에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 연고이전 이후 10년 만에 프로야구단이 생겼다.

원래 후쿠오카 라이온즈의 연고지였고, 호크스는 난카이 시절 라이온즈와 치열한 라이벌 관계였던 탓에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10년 만에 후쿠오카에 프로야구 구단이 들어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환영 무드가 더 컸다. 하지만 이 시절의 호크스는 1978년 이후로 계속 비밀번호를 찍었던 탓에 점차 관중석에 빈 자리가 속속 보였다. 심지어 이 전 후쿠오카의 주인이었던 라이온즈의 원정 시합에서는 라이온즈 팬의 비율이 더 많을 정도였다.

결국 후쿠오카 이전 이후에도 1997년까지 B클래스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결과적으로 전신이었던 난카이 호크스 시절 노무라 카츠야가 팀을 떠난 1978년부터 무려 20년 동안 A클래스(1위~3위)에 한 번도 못 올라갔다. 이 정도면 암흑기 엘롯기는 장난에 불과한 수준이다. 숫자로 써보자면 6-5-6-5-6-5-5-6-6-4-5-4-6-5-4-6-4[8]-5-6-4. 참고로 센트럴 리그, 퍼시픽 리그 모두 각각 6구단 체제이니 6이 꼴찌.

참고로 20년 연속 B클래스는 도통 깨질 기미가 안 보이는 일본프로야구 최다 기록. 한때 그 기록을 깰 가장 유력한 후보로 센트럴 리그의 동네북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와 사실상의 자급자족형 시민구단 히로시마 도요 카프가 거론되었으나, 2010년대 초중반부터 두 팀 모두 모기업의 투자 성공 및 자체 육성 성공으로 히로시마는 15년, 요코하마는 10년 만에 B클래스 탈출에 성공하였고, 둘다 앞으로 몇년은 먹고 살 전력이 갖춰진 상태라 향후 몇 년간은 다시 불멸의 기록 취급받게 생겼다. 옆 동네에 이 기록을 깨버릴 듯한 유망주 현직 구단주 본적팀이 있었으나 두 팀 다 탈출하면서 여전히 연속 기록이 깨질 날은 요원해 보인다. 아직 하나 남았다..

5. 강팀으로의 재도약(1998~2003), 구단 매각(2005)

파일:호크스1999리그우승.jpg 파일:1999일본시리즈.jpg
호크스의 부활을 알린 1999년의 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

그러다가 1993년에 취임한 이 팀의 GM 네모토 리쿠오 전무[9]의 공격적인 선수 영입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세이부 라이온즈의 투타의 주축이었던 쿠도 키미야스를 FA로, 아키야마 코지를 대형 트레이드로 영입한 것이나, 큐슈 지역 거물 유망주였던 조지마 겐지를 과감하게 영입한 것은 현재도 자주 회자되는 얘기.

또한 오 사다하루 감독의 지도력으로 난카이 시절의 암흑기에서 벗어나면서 팀이 다 리빌딩된 이후 충실한 유망주 육성으로 많은 프랜차이즈 스타를 배출하며 퍼시픽 리그의 강호로 떠올랐다. 1998년부터 현재까지 그간의 울분을 풀듯, A클래스에 연속으로 들어가며 완전한 부활에 성공한다. 1978년부터 1997년까지 20년 연속으로 B클래스에 머물던 팀이 1998년 이후 2017년까지 20년 동안은 딱 2번을 제외하고는 전부 A클래스를 기록했다. 그나마 그 두번의 B클래스도 9월까지 2위를 유지하다가 시즌 막판 1달 동안 분위기를 잘못 타서 최하위로 떨어진 2008년[10][11]과 3위와 불과 1게임 차이로 4위로 밀린 2013년.

1999년 선동열, 이종범, 이상훈 등의 한국인 삼총사가 있던 주니치 드래곤즈를 물리치고 1964년 이후 35년 만에 자칭 V1[12] 일본시리즈 우승을 한 것을 시작으로,[13] 2000년 퍼시픽 리그 우승,[14] 2003년 호시노 센이치 감독의 한신 타이거즈와 7경기까지 가는 접전[15] 끝에 다시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한다. 현재도 '산요(山陽) 신칸센 시리즈',[16] '호응(虎鷹) 시리즈' 등으로 불리며 역대 일본시리즈 명승부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 시기의 성적은 3-1-1-2-2-1. 그 전까지 20자리 비밀번호를 찍었던 팀이라는 게 안 믿어질 정도로 환골탈태했다. NPB 최고의 투수 친화 홈구장에 걸맞지 않게 고쿠보 히로키, 마츠나카 노부히코, 시바하라 히로시, 죠지마 켄지, 이구치 타다히토, 페드로 발데스, 훌리오 줄레타 등 강타자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막강한 타선이 특징이었다. 특히나 2003년엔 강타자들이 포진한 일명 다이하드 타선을 앞세워 퍼시픽 리그와 일본시리즈를 제패했는데, 이 당시 세운 기록이 일본프로야구 최고 기록인 시즌 팀 타율 .2972명의 30+홈런 타자를 포함한 4명의 20+홈런 타자 겸 4명의 100+타점 타자[17]를 비롯한 8명의 50+타점 타자, 6명의 3할 타자를 배출해냈다. 심지어 시즌 중반에 입단해서 시즌 절반도 안되는 67시합 출장에 그친 외국인 타자 훌리오 줄레타까지도 13홈런 43타점을 기록했다.[18]

그러나 거품경제가 붕괴되고 일본에 불경기가 찾아오면서 소매업이 주력이었던 다이에가 파산하게 되고 이온으로 흡수되면서 구단 매각을 선언[19], 2004년 시즌이 끝나고 재일동포인 손정의 소프트뱅크 오너가 구단 운영을 선언하여 2005년 시즌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탄생하게 된다.

2003년 훗날 감독이 되는 고쿠보 히로키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무상 이적을 했는데 베일에 쌓여 있었다가 고쿠보의 자서전이 출판되고 나서 비로소 진실이 밝혀졌다. 트레이드를 원한 것은 본인으로, 단순히 수술비만의 문제는 아니었다고 한다. 다이에 호크스의 운영진들은 선수들만 출입할 수 있는 공간에도 화류계 여성들을 불러들이고, 심지어 경기가 끝난 다음 수훈 선수와 그런 여성들이 사진을 찍도록 하는 등 구단 운영이 막장으로 치달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선수의 성적이 아닌, 선수 굿즈 판매 실적을 연봉 협상에 반영하겠다는 등 도를 넘는 짓들을 일삼았다.

난카이 시절 경험이 있던 현역 선수들은 2010년 오미치 노리요시를 끝으로 이미 모두 은퇴하였고, 다이에 시절 경험이 있는 현역 선수도 2024년 시즌 종료 후 와다 츠요시 가 은퇴하면서 모두 은퇴하였다.

6. 그리고 가을 야구의 비극(2004~2010)

그놈의 포스트시즌제도가 문제인데, 2004년에 퍼시픽 리그에 1973년~1982년 시행하다 중단했던 플레이오프 제도가 재도입된 이래[20] 2008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포스트시즌에 참가했는데 2010년까지 단 한번도 일본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다. 이를 두고 호크스 팬들은 플레이오프의 비극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다른 팀 팬들은 가을의 풍물시라고 비웃는다 2004년, 2005년에는 정규 시즌 1위였으나 각각 세이부 라이온즈, 치바 롯데 마린즈에게 두 번 다 2승 3패로 일본시리즈 진출권을 내주는 참사가 벌어졌다. 게다가 당시 1승 어드밴티지는 1위와 2위가 5게임 이상 벌어져야 주어지는 것이었는데 두 시즌 모두 2위와 4.5게임 차로 시즌을 마쳐서 1승 어드밴티지를 못 얻었고, 이게 플레이오프에서 그만. 그리고 2005년 그렇게 올라간 마린즈는 한신에게 이것보다 더한 짓을 했다

퍼시픽 리그 측에서는 "이거 1위 하고 두 번이나 마지막 경기까지 가서 발리니 불쌍하지 않음?"이라고 해서 정규 시즌 1위 팀에게는 게임 차와 관계없이 플레이오프 때 무조건 1승을 주는 어드밴티지를 적용하는 계기가 되었다.[21] 근데 2006년에는 역으로 작년 5위였던 닛폰햄이 1위 등극. 그러나 작년 1위였던 호크스는 리그 3위. 이건 뭐 제도가 바뀌니 역으로 호크스에 불리한 규정이 되고 말았다. 결국 2006년도는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 격돌했으나 어드밴티지로 인한 자동 1패 포함, 3연패로 패퇴했다.

역사적 명승부로 꼽히는 2006년 플레이오프 최종전에서는 유리어깨로 소문난 에이스 사이토 가즈미가 4일 휴식 후에 등판을 강행하며[22] 최후까지 저항했지만 사이토의 역투에도 불구하고 양팀 모두 9회까지 1점도 내지 못했고, 결국 9회말 투아웃 1,2루 상황에서 닛폰햄의 이나바 아츠노리의 2루방향 타구를 2루수 나카자와 타다아츠가 호수비로 막아냈지만 2루 송구가 옆으로 빗나가며 1루 주자였던 오가사와라 미치히로가 2루에 세이프되는 사이 2루 주자 모리모토 히초리가 그대로 홈까지 내달려 결승점을 얻으며 그대로 닛폰햄이 끝내기 승리를 거두었고, 소프트뱅크는 또다시 3년 연속으로 가을야구에서 주저앉고 만다.[23]

파일:2006斉藤 和巳.png
사이토는 닛폰햄이 끝내기 결승점을 얻으며 팀의 패배가 확정되는 순간 마운드에 주저앉아 무릎꿇고 대성통곡했고 팀동료들이 부축해주기 전까지 일어나지도 못하는 찡한 장면을 연출했다. 포수 마토바 나오키는 홈플레이트에 주저앉은 채로 울음을 터뜨렸고 4번 타자 마쓰나카 노부히코는 그라운드에 무릎을 꿇고 망연자실한 채 그라운드를 떠나지 못했다.
파일:attachment/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saitoh2.jpg
통곡하면서 동료들의 부축으로 간신히 그라운드를 떠나는 사이토[24]

2007년에는 치바 롯데 마린즈에게 밀려서 아예 1스테이지에서 탈락. 2008년은 9월 1일까지 2위를 달리고 있었으나 9월 이후로 6승 21패란 충격적인 성적을 기록해 꼴찌까지 수직 낙하하면서 진출은커녕 다이에 시절인 1996년 이후 12년 만의 리그 최하위란 치욕을 당해야 했고 2009년엔 또 다시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 후 이와쿠마 다나카 단 두명의 투수에게 틀어막히면서 도호쿠 라쿠텐에게 1스테이지에서 발렸다.

그 절정은 2010년으로 정규 시즌 1위로 7년 만에 리그 우승을 달성, 1승 어드밴티지까지 먹고 진출했으나 3승 1패로 바라고 바라던 일본시리즈 진출까지 단 1승만 남긴 상황에서 충격의 3연패로 또 일본시리즈에 못 갔다. 이로써 호크스는 04년부터 10년까지 7년간 2008년(최하위)을 뺀 총 6번을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단 한 번도 일본시리즈에 가지 못했다. 결국 2010년 시즌 끝나고 긴장감 없는 요코하마로부터 FA를 선언한 우치카와 세이이치와 사이타마 세이부의 주전 포수 호소카와 토오루, 오릭스에서 자유계약으로 풀린 알렉스 카브레라 등을 지르면서 절치부심. 우치카와가 역대 FA 최고 성공 사례 중 하나라고 해도 무방할 만한 성적을 찍어주면서 팀 타선의 중심으로 활약한 덕분에 7수 만에 일단 클라이맥스 시리즈의 저주는 풀었다.

결국 2011년에서는 일본시리즈의 저주도 풀었지만 정작 아시아 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일본 프로 팀이 단 한 번도 내준 적이 없던 아시아 시리즈 우승컵을 내준다. 이것도 저주라면 저주겠다.

7. 2008년 이후의 동향

7.1. 2008년 시즌

오 사다하루 감독이 마지막 해를 선언한 이해에 팀 주력들의 줄부상 및 부진과 베이징 올림픽 차출 여파로, 9월부터 시즌 끝날 때까지 한 달 동안 6승 21패의 기록적인 수직 낙하를 보이며, 2위에서 한 달 만에 6위까지 굴러 떨어지는 역사적 수모를 기록 2008년에는 결국 최하위로 시즌을 끝내고 말았다. 이에 대한 책임 및 건강상의 이유로 인해 오 사다하루 감독이 사임하고 후임 감독으로 아키야마 코지가 부임하게 된다.

7.2. 2009년 시즌

2009 시즌에는 2위를 줄곧 유지하다 시즌 막판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 역전을 허용하면서 3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리고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또 1스테이지 참패. 라쿠텐에서 내보낸 투수는 딱 두 명. 이와쿠마와 다나카. 이 정도면 저주다.

7.3. 2010년 시즌

2010년 시즌 역시 투타 모두 안정적인 성적을 보이며 상위권을 엎치락뒤치락하더니, 막판에 수위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 직접 대결 3연승으로 한방에 추격 후 계속해서 연승 + 사이타마 세이부의 캐삽질 6연패로 4.5게임 차를 뒤집어, 2010년 퍼시픽 리그 우승 팀이 되었다. 참고로 직접 대결 3연승 직전에 세이부는 매직 넘버 4를 남겨두고 있었다. 그리고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1차전에서 혈전을 벌이고 기어 올라온 3위 치바 롯데 마린즈를 맞아, 어드밴티지 1승을 가졌고 홈에서 모든 경기를 하는 상황에서 3승 1패로 1승만 더 하면 드디어 저주를 깨는 일본시리즈 진출 직전까지 갔었으나 4차전부터 포풍 3연패를 당해 최종 스코어는 어드밴티지 1승 먹고도 3승 4패로, 또 일본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이 정도면 굿이라도 해야 할 지경이다.

시즌 종료 후 FA로 풀린 우치카와 세이이치와 교섭하여 입단시키는 데 성공했다.

참고로 치바 롯데와 클라이맥스 시리즈를 벌이던 당시, 구단주인 손정의 회장이 직접 구장을 방문해 "이기면 페라리 쏜다"라고 말한 사건도 유명하다. 결국 포풍 3연패로 페라리의 주인은 안 나타났다.

7.4. 2011년 시즌

시즌전부터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힌 팀 답게 초반부터 선두를 달렸다. 특히 교류전에서는 10연승을 깔고 시작해서 끝나고 나니 18승 2무 4패. 승률 .858 이라는 캐사기 우승을 달성했다. 단 교류전에서 힘을 좀 뺐는지, 이후 조금 버벅이면서 전반기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 동률 선두로 마감했다. 후반기도 사실상 이 두 팀의 싸움이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도 그럴 게 전반기 종료 시점 기준으로 2위와 3위인 치바 롯데 마린즈와 승차가 12.5.

그러나 막상 후반기 되니 홋카이도 닛폰햄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수직낙하에 가까운 곤두박질을 치기 시작하여 일찌감치 매직넘버를 켰고, 결국 10여경기 남은 시점에서 우승을 확정짓고 정규 시즌 2연패를 달성하였다. 오프시즌의 대형 영입인 우치카와 세이이치는 투고타저 시즌이 무색하게 .338의 고타율로 수위 타자를 차지하며 MVP를 차지했고 마츠다 노부히로도 리그 2위인 25홈런[25]에 25도루를 기록하며 20-20 클럽에 가입했으며 가와사키 무네노리, 혼다 유이치의 테이블 세터-키스톤과 고쿠보 히로키, 마쓰나카 노부히코, 타무라 히토시 등의 베테랑들도 타선에서 어느 정도 몫을 해 주었다. 스기우치 토시야, 와다 츠요시, 데니스 홀튼, 셋츠 타다시 등이 포진한 선발진도 난공불락. 을 시즌 종료 후 2위인 홋카이도 닛폰햄과의 게임 차만 무려 17.5, 3위인 세이부와는 20.5. 이로써 7번째 플레이오프 진출 확정.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예상을 뒤집고 홋카이도 닛폰햄을 2연승으로 꺾고 올라온 3위 사이타마 세이부를 상대로 한단계 위의 전력을 과시하면서 깔끔하게 3연승으로 일본시리즈 진출확정. 플레이오프, 클라이맥스 시리즈 7수만에 돌파에 성공하면서 일단 클라이맥스 시리즈와 관련된 저주는 풀었다. 그리고 맞붙는 상대는 주니치 드래곤즈. 12년 만에 리턴 매치다! 치열한 투수전 끝에 7차전 홈에서 승리하며 8년 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성공했다. 시리즈 MVP 고쿠보 히로키는 99년의 팀 선배 아키야마 코지를 넘어서는 최고령 일본시리즈 MVP가 되었다.

2011 아시아 시리즈에서는 퉁이 라이온즈에 6 대 5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삼성 라이온즈에 9 대 0 완승, 오스트레일리아의 퍼스 히트를 3 대 2로 누르고 결승전에 진출했다. 그러나 결승전에서는 심판의 오심 도움( 김상수 2루 세이프 과정)에도 불구하고 백업 요원 정형식에게 역전타를 얻어맞아 5 대 3으로 패해 2007년 SK 와이번스 이래 4년 만에 예선에서 3경기 전승하고도 준우승하는 팀이 되었다. 더군다나 기자들과 네티즌들에게 신나게 까였는데 기자들은 " 대한민국 왕자의 ‘하극상’에 무너졌다", 이에 네티즌들은 " 일본 야구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다", "1년간 쌓아온 것이 단 1경기에 무너졌다" 게다가 이번 아시아 시리즈에서는 지금까지 4번의 우승을 일본 팀들이 모두 차지했기 때문에 이번 결승전 패배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결승전이 열리기 직전에 선수들이 흡연을 해버리는 것이 들통나 더욱 까였고 일본시리즈 우승 팀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야구 팬들에게 두고두고 씹혔다. 그나마 오승환을 상대로 2점을 내긴 했지만 무사 만루에 분위기 한창 올랐을 때 병살타를 치고 2점밖에 못 낸 것이었다.[26]

문제는 투수 왕국 호크스가 1, 2, 3선발 스기우치, 와다, 홀튼이 전부 한 번에 이적하는 바람에 다음 해 투수진이 절망적인 수준으로 추락했다는 것이다. 1선발을 2011년 처음 선발 전환한 셋츠 타다시에게 맡겨야 할 실정. 세이부의 FA 호아시 카즈유키를 따내는 데 성공해서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이긴 했는데 그래도 구멍을 메우기엔 부족한 느낌을 감출 수 없다. 2011년에 우승해서 정말 다행인 듯.

7.5. 2012년 시즌

2012 시즌에 앞서 팀 선발진의 원투쓰리 펀치와 부동의 톱 타자가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헬게이트가 펼쳐졌다. 에이스 스기우치 토시야와 외국인 투수 D.J. 홀튼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 좌완 선발 와다 츠요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건너갔으며 이치로 빠돌이 주전 유격수 가와사키 무네노리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애틀 매리너스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저 선수들이 빠져나간 대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119승 & 다승왕 출신이라는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브래드 페니를 연봉 400만달러 + 옵션 350만 달러[27]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조건으로 영입했고[28] 타선엔 파워 툴만큼은 미국에서도 최고로 평가받던 공갈포 AAAA리거 윌리 모 페냐를 추가했다. 강력한 타선과 불펜만큼은 건재하니 새롭게 개편된 선발진의 활약 여하에 따라 여전히 상위권을 노릴 수 있는 전력으로 전망되었다.

메이저리그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1, 2, 3 선발에 주전 유격수까지 털린 채로 지난 해 4선발이었던 셋츠 타다시를 에이스로 내세워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그래도 처음에는 오릭스와의 개막 3연전을 싹쓸이하면서 선두권을 유지했으나 다승왕이었던 홀튼과 좌완 에이스 와다, 스기우치의 공백을 메워줄 것을 기대하고 데려온 브래드 페니와 호아시 카즈유키는 사이 좋게 먹튀 인증. 철벽 계투조를 형성했던 마하라와 폴켄보그가 부상으로 각각 시즌 아웃과 시즌 도중 장기 이탈. 2011년에 양대 리그 수위 타자에 MVP를 획득하면서 돈이 아깝지 않은 활약을 보여줬던 우치카와 세이이치마저 이유를 알 수 없는 부진의 늪에 빠지는 등 악재가 연달아 터졌다. 그러면서 그동안 호크스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던 인터리그에서 간신히 꼴찌를 면하는 등 리그 5위까지 추락. 2011년의 성과는 현실에서 프로야구 매니저를 하는 듯한 사기에 가까운 선수발 덕분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샀다.

그러나 7월경부터 젊은 야수들을 과감하게 기용하면서 전열을 재정비했다. 스기우치, 와다, 홀튼의 이탈에 페니와 호아시까지 먹튀가 된 선발진은 부상에서 부활한 오토나리 켄지와 진짜 에이스가 된 셋츠 타다시[29], 갑툭튀한 고졸 신인 다케다 쇼타의 맹활약으로 메우고 마하라와 폴켄보그의 연달은 부상으로 생긴 마무리 공백을 전년도 일본시리즈에서 MVP급의 활약을 보여준 모리후쿠[30]로 대체하는 등 수습에 들어가 8월 중순부터 7연승을 거두면서 폭풍 질주, 다시 순위 경쟁에 뛰어들었다. 한대 선두권도 넘보기는 했으나 8월 말에 사이타마 세이부가 질주를 하고 9월달에 홋카이도 닛폰햄이 상승세를 타면서 결국은 3위로 정규 시즌을 마감. 클라이맥스 시리즈 제1 스테이지에서는 2위였던 사이타마 세이부를 꺾고 파이널 스테이지에 진출했으나,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또다시(!) 홋카이도 닛폰햄에게 스윕을 당하면서 탈락했다.

7.6. 2013년 시즌

전년도 시즌 후반기에 혜성과 같이 나타나서 팀을 구원했던 고졸 신인 다케다 쇼타가 2년차 징크스에 빠지고, 투수진의 한 축을 이루던 오토나리 켄지가 부상으로 1, 2군을 왔다갔다하는가 하면, 20홈런을 날리면서 쏠쏠하게 활약해준 윌리 모 페냐도 예전의 공갈포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게다가 어려운 상황에서 팀의 정신적 지주가 됐던 고쿠보는 은퇴한 상황. 팀 순위도 한 때 최하위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교류전에 들어오자 전년도에 FA 먹튀가 된 호아시가 귀신같이 부활하고 윌리 모 페냐의 공백은 신 외국인 브라이언 라헤어가 메워줬으며, 그동안 약간 실망스러운 성적이 이어진 중견수 하세가와가 교류전에서 4할대 타율을 기록하면서 수위 타자를 차지했다. 시즌 초에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외야수 야나기타, 요시무라, 투수 이와사키 등이 적절하게 활약해 주면서 2년 만에 교류전 우승을 차지하고 다시 상위권으로 뛰어 올랐다. 교류전 종료 후에는 라쿠텐, 롯데와 더불어 상위권을 형성했으나, 2012년에 팀 투수진의 주축들이 빠져나간 공백은 여전히 메우지 못했고 올스타 브레이크 때는 다시 5위로 추락했다. 올스타전 이후 8월 초에 잠시 반짝했지만 에이스인 셋츠 타다시 외에는 믿을만한 투수가 없는 상황에서 서서히 힘이 빠지면서 3위 싸움으로 밀려났다. 그래도 나름 9월말까지 잘 버텼으나 세이부와 롯데의 연승으로 3위와 1게임 차로 4위로 추락함으로써 시즌을 마감한다.

2008년 시즌 이후 오랜만에 B클래스로 떨어지면서 2013년 시즌 종료 후 구단에서 대대적인 투자를 할 것이란 소식이 알려졌고 실제로 45억 엔(약 450억 원)을 풀어서 외국인 선수와 FA선수를 잡을 것이란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MLB 보스턴 레드삭스 오클랜드 어슬레틱스등에서 뛴 베테랑 좌완 불펜투수 오카지마 히데키를 1년 5500만 엔에 잡았고 #, FA를 선언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포수 츠루오카 신야와 주니치 드래곤즈의 투수 나카타 켄이치를 영입하였다. 외국인 선수로는 올해 활약이 미미했던 비센테 파디야, 윌리 모 페냐( 오릭스 버팔로즈행), 브라이언 팔켄보그(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행)를 떠나보내고 한신 타이거스에서 준수한 활약을 한 선발투수 제이슨 스탠드릿지와[31],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선발 투수 브라이언 울프, 히로시마 도요 카프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구원투수로 활약한 데니스 사파테를 영입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최근 오릭스 버팔로스와 결별 후 MLB 진출과 NPB 잔류 사이에서 고민하던 이대호를 잡으려고 호크스가 3년 14~15억 엔을 제시했다는 보도가 나왔으며 #, 2013년 12월 3일 기준으로 이대호가 호크스와의 계약에 합의하고 세부 조정에 들어갔다는 보도가 나왔다. # 12월 23일 이대호와 3년 19억 엔 계약을 맺었다.

8. 왕조를 넘어선 소프트뱅크 제국(2014~2020)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 width=400><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000000> 파일: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엠블럼.svg (소프트뱅크 인수 이후)
일본시리즈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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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우승 엠블럼 V5.svg 파일: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우승 엠블럼 V6.svg 파일: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우승 엠블럼 V7.svg 파일: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우승 엠블럼 V8.svg 파일: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우승 엠블럼 V9.svg 파일: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우승 엠블럼 V10.svg 파일: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우승 엠블럼 V11.svg
2011년 2014년 2015년 2017년 2018년 2019년 2020년

2014년부터 전성기에 오른 소프트뱅크는 일반적으로 V9 시대인 1965~1973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함께 역대 최고를 다투는, 일본프로야구 최강의 야구단으로 꼽힌다. 한국프로야구로 치면 2010년대 중후반 두산 베어스나 2000년대 후반 SK 와이번스는 당연히 넘고, 2010년대 초반 삼성 왕조와 위상이 비슷한 수준이다.

2014년부터 2020년까지 양대 리그 통합 우승을 2016년 제외하고 전부 성공했으며, 2011년 우승까지 합쳐 10시즌간 일본시리즈 우승 7번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 횟수가 11번인데 그 절반 이상을 이 시기에 이루었다. KBO 리그에서 이런 짓을 한 구단은 없으며, 3대 리그를 통틀어 이 정도로 압도적이었던 구단은 1920~30년대 ' 올드 그레이트 양키스'와 1960-70년대 요미우리밖에 없다. 전체적인 리그 전력이 상승한 현대 야구에서는 더욱 탄생하기 어려운 기록으로 21세기에 이 정도의 왕조는 다른 리그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우수한 육성 팜 덕분에 이후로도 몇 년간 가을 야구를 연례 행사처럼 참여하며 일본시리즈 연속 우승을 밥 먹듯이 할 가능성이 매우 커서 현재 일본 내에서 타 팀 팬들 위주로 소프트뱅크 때문에 야구가 재미 없어진다는 불평이 나오고, 언론에서는 요미우리를 위시한 센트럴 리그의 질이 매우 하락되어 있어서 수준 차이를 좁혀야 한다는 사설이 있다. 게다가 수년간 퍼시픽 리그 우승으로 인해 매번 만원 관중과 이에 따른 100%에 가까운 구장 이익 지분 덕에 다른 팀의 외인이나 FA 선수 영입을 통한 타 팀 전력 약화도 언제나 가능한 상황이다. 실제로 마쓰자카 다이스케가 먹튀가 될 가능성이 높았음에도 다른 팀에 가서 부활하면 장애물이 되어 성가시니 차라리 우리가 가지고 있자는 식으로 영입한, 웃지 못할 썰이 있다.

그러나 2021년에는 유망주 육성과 리빌딩을 성공한 오릭스가 치고 올라오기 시작함과 동시에 본인들은 가을 야구에서 탈락하며 왕조가 끊길 위기를 맞았으며, 2022년엔 오릭스에게 패퇴하고 오릭스가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끝이 났다.

8.1. 2014년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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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2015년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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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2016년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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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2017년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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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2018년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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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2019년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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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2020년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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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왕조의 황혼(2021년 시즌 이후)

9.1. 2021년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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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2022년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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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2023년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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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2024년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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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무라 카츠야는 1970년부터 1977년까지 난카이 호크스의 감독, 포수, 4번 타자라는 3가지 중책을 맡으면서 팀을 이끌었다. 1973년에는 난카이에게 마지막 퍼시픽 리그 우승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러나 1977년 시즌 2경기를 남겨둔 상황에서 아내 노무라 사치요의 막장행각으로 인해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난카이 선수들 가운데 노무라의 감독 해임에 반대하고 있던 가시와바라 준이치와 에나츠 유타카는 각각 닛폰햄 파이터즈,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이적했고 코치 다카바타케 미치히로도 난카이를 퇴단하여 노무라와 함께 롯데 오리온즈로 이적했다. [2] 소설 화차에 이런 기묘한 상황이 등장하기도 한다. [3] 우승 사진에서조차 노무라만은 지워버릴 정도였다. [4] 홈구장으로 쓰던 헤이와다이 구장에서 보수공사 중 옛 고료칸 유적지가 발견된 탓도 있었다. 결국 헤이와다이 구장은 호크스가 후쿠오카 돔으로 홈구장을 옮긴 후 고교 야구나 사회인 야구 예선전 등에 쓰이다가 호크스의 20년 비밀번호 마지막 해인 1997년을 끝으로 철거. 현재는 그 자리에 역사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5] 훼일즈가 요코하마로 이전한 후에도 베이스타즈 시대 전까지 응원가는 그대로였고, 더 최근으로 보면 파이터즈가 도쿄에서 홋카이도로 갈 때도 응원가를 그대로 유지했다. [6] 그러나 이때 새로 나온 구단가인 다이아몬드의 매(ダイヤモンドの鷹)는 좋은 평가를 듣지 못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군가, 행진곡풍 위주의 곡이 다수인 NPB 대다수의 구단가와 다른 스타일의 곡이었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수단 쪽에서도 불만이 나왔을 정도. 거기다 팬들을 대상으로 한 일반 공모 형식으로 나온 응원가 나아가라 보라매 군단(いざゆけ若鷹軍団)이 훨씬 더 인기를 끌어서 1999년 리그 및 일본시리즈 우승 때가 되면 아예 다이아몬드의 매가 틀어진 경우가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위상이 추락. 결국 소프트뱅크가 인수하면서 다이아몬드의 매는 공식 구단가에서 완전히 퇴출되었다. 그 후 나아가라 보라매 군단은 가사를 일부 바꿔 현재까지 쓰이고 있다. [7] 그 해 일본시리즈에선 미하라의 후임으로 취임한 카와카미 테츠하루가 이끌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패배했다. [8] 이때는 참 안타까운게 시즌 막판까지 상위권 싸움을 벌이다가 후반기 26승 8패를 기록하며 폭주를 한 킨테츠 버팔로즈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공동2위를 기록하는 바람에 고작 6모차(공동2위 오릭스와 킨테츠는 승률 .5354를 4위 다이에는 .5348를 기록했다.)로 4위에 그쳤다. 그래도 비밀번호를 찍는 기간동안의 유일한 5할승률 이었다. [9] 이전에는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세이부를 강팀으로 육성한 바가 있었다. [10] 참고로 같은 기간 동안 A클래스를 딱 2번 기록한 오릭스 버팔로스의 2000년대의 처음이자 마지막 A클래스가 이해이다. [11] 이것 때문에 오 사다하루는 그해를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너무 많은 연세 탓과 무엇보다 2006년도에 위암 수술을 했던 점도 있었지만. [12] 우승 확정 후 자막을 자세히 보자. 3분경 자막이 初優勝, 즉 첫 우승이라 되어 있다. [13] 그러나 정작 호크스를 강팀으로 만들어준 네모토 리쿠오는 그해 4월 급작스럽게 사망하여 이 우승을 보지 못했다. [14]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나가시마 시게오 오 사다하루가 일본시리즈에서 만나 "ON 시리즈"라 부를 만큼 드림 매치였다. 결과는 나가시마의 요미우리가 4승 2패로 우승했다. [15] 1~2차전에서 우승을 거뒀지만 이후 3연패를 당하며 역스윕을 당할 뻔했다. 그러나 6~7차전에서 겨우 우승을 하여 일본시리즈를 우승했다. 여담이지만 2009년 한국시리즈처럼 1~7차전 전부 팀이 승리한 경기였다. [16] 후쿠오카의 신칸센 정차역인 하카타역과 오사카의 신칸센 정차역인 신오사카역을 잇는 신칸센의 노선명이 산요 신칸센이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메이저리그의 ' 서브웨이 시리즈'에 빗댄 것. [17] 죠지마 켄지, 마츠나카 노부히코, 이구치 타다히토, 페드로 발데스. [18]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주포로 활약하여 2006년까지 팀 타선을 이끌었다(2004년 .284 37홈런 100타점, 2005년 .319 43홈런 99타점, 2006년 .281 29홈런 91타점). [19] 다이에의 매각과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의 해체 때문에 NPB 일각에서는 10개 구단으로 프로야구를 재편하고 단일리그제로 환원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때문에 2004년 선수회와 팬들을 중심으로 거센 반대운동이 있었다. 후루타 아츠야, 이와쿠마 히사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오릭스 버팔로즈 등 항목 참조. [20] 현행 클라이맥스 시리즈와는 다르다. 클라이맥스 시리즈는 2007년 센트럴 리그에서 이 플레이오프제를 도입하면서 양측에서 바꾼 이름이다. 이전엔 퍼시픽 리그에서만 단독으로 플레이오프를 도입했다. [21] 그 후 클라이맥스 시리즈로 개편되며 사라졌다가 센트럴 리그 리그 우승 팀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제2 스테이지에서 주니치 드래곤즈에게 패해 일본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하면서 부활하였다. [22] 당시 사이토는 마쓰자카 다이스케, 다르빗슈 유 등에게도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평가받는 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하나였지만, 고질적인 유리몸으로 인해 6일 로테이션을 엄수하고 있었다. [23] 이 결승점 득점 과정은 만화 다이아몬드 에이스 22권의 도쿄 지역예선 결승전 9회말에 그대로 오마쥬된다. 그리고 이 장면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곡이 Second Heaven이다. [24] 사이토 가즈미는 이후 어깨 부상이 악화, 2007년에 6승을 올린 후 5년간의 재활 끝에 은퇴하고 만다. 현재는 소프트뱅크 코치로 재직 중. [25] 근데 홈런왕인 세이부의 나카무라 타케야가 무려 48홈런이나 쳐내며 23개의 차이가 난다 [26] 삼성 라이온즈 연고지는 소뱅 구단주의 본적지인 대구광역시이고 400승 투수였던 김경홍의 본적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전기톱 돌아가듯이 혐한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27] 다음 해 연봉 450만 달러 옵션도 있다. [28] 개막전 1패 후 본인이 미국으로 돌아가 버리면서 매니 아이바, 브라이언 배니스터에 이은 초먹튀 인증. [29] 이 해 사와무라 상을 수상한다. [30] 전년도 일본시리즈에서 노아웃 만루를 무실점으로 막는 큰 활약을 보였다. 1, 2차전 홈 경기를 패배한 후 분위기를 다시 호크스 쪽으로 끌어오는 결정적인 활약이었다. [31] 스탠드릿지의 퇴단으로 빈 한신의 외국인 투수 슬롯에 오승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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