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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승부조작 관련 기자회견 장면. 왼쪽 하단의 고개를 돌린 인물이 사건의 장본인 나가야스 마사유키. |
1. 개요
黒い霧事件1969년 발생한 승부조작 사건으로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악의 사건이며, 가히 일본판 블랙삭스 스캔들이다. '검은 안개'를 뜻하는 일본어 '쿠로이키리'([ruby(黒, ruby=くろ)]い[ruby(霧, ruby=きり)])에는 '정계·관계·재계 등에 파급되는 직권 남용·부정·이권 추구 따위'라는 뜻도 있다.
2. 발단
1969년 시즌 도중, 니시테쓰 라이온즈의 외국인 선수 칼 보레스가 호치 신문[1]의 니시테쓰 담당 기자에게 은밀히 "경기 중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실책을 하는 동료가 있다"고 제보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이 제보를 받은 호치 신문 기자의 조사 결과 승부조작의 단서가 있음을 확인했고, 자매사인 요미우리 신문의 사회부와 공조하여 특별 취재를 진행해 나갔다. 그 결과 야쿠자가 프로야구 승부조작을 주도했고 니시테쓰의 투수였던 나가야스 마사유키가 야쿠자와 공모하여 조작 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3. 사건 경과
승부조작 사실이 폭로되면서 나가야스는 행방을 감추어 버렸다. 이후 야쿠자가 니시테쓰 구단주를 협박하여 나가야스의 도피자금을 뜯어내는 등 나가야스를 비호하려 들었지만, 더 이상 끌려다닐 수 없다고 판단한 니시테쓰 구단은 나가야스를 퇴출하기로 결정했고, 한편으로 일본 프로야구를 관장하는 커미셔너 위원회에서 그 해 11월 28일 나가야스에게 일본 프로야구 리그 영구제명 선고를 내렸다.하지만 상식적으로 나가야스 혼자서 승부조작을 저질렀다고는 믿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잠적 중이던 나가야스는 혼자서 독박을 쓰는 것은 억울했던지 이듬해인 1970년 4월 1일 주간 포스트의 기자 오오타키 죠지와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그리고 이 인터뷰가 후지TV의 심야 방송인 텔레비전 나이트 쇼를 통해 전파를 탔고, 방송 며칠 후에는 아예 텔레비전 나이트쇼의 앵커와 나가야스가 모처에서 직접 인터뷰를 하는 것까지 방영되었는데, 이 때 나가야스는 자신뿐만 아니라 여러 선수들이 승부조작에 개입되었다고 밝히면서 이 파문은 일파만파로 커지게 되었다.
나가야스가 승부조작에 연루되었다고 폭로한 선수들은 니시테쓰의 투수인 이케나가 마사아키, 요다 요리노부, 마스다 아키오와 포수 무라카미 기미야스, 내야수 후나다 가즈히데, 모토이 미쓰오, 다나카 미쓰구 등이었다. 이들은 커미셔너 위원회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이런 가운데 승부조작 사건뿐만 아니라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후지타 모토시 코치가 중의원 선거 때 야쿠자와 함께 선거운동에 참여하고 자신의 사업체에서 거래상 문제가 일어나자 이를 해결하려 야쿠자를 동원한 사실도 드러나 일본 프로야구의 검은 이면들이 수면 위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일본 국회에서도 문제를 제기할 정도의 사회 이슈로 떠오른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오토바이 레이스에서 경주 도중 위법행위로 체포된 한 오토바이 레이스 선수가 오토바이 레이스의 불법 도박에 프로야구 선수들이 개입되었다고 경찰에 진술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경찰 조사 결과 주니치 투수 출신 다나카 쓰토무, 다이요 훼일즈의 전직 선수였던 다카야마 이사오가 야쿠자와 함께 승부조작에 참가했다는 혐의를 포착하고 그들을 체포했다. 다나카 쓰토무는 이케나가 마사아키에게 100만엔을 주고 승부조작을 시켰다는 사실도 추가로 드러났다.[2]
1970년 5월 6일, 1967년 시즌 사와무라상 수상자였던 주니치 드래곤즈의 에이스 투수 오가와 겐타로도 오토바이 레이스 불법 베팅 사실이 드러나 체포되었고, 5월 9일에는 도에이 플라이어즈 소속 다나카 미츠구와 모리야스 토시아키도 승부조작에 연루되었다고 발표되었다. 그 외에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의 구단 직원이던 야마자키 아키라, 한신 타이거즈 내야수 카츠라기 타카오 등도 쇠고랑을 찼다. 또한 한신 타이거즈의 에이스 에나츠 유타카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았지만 혐의점이 부족하여 경고 조치를 받는 것으로 끝났다.
4. 사건 결과와 처분
조사 작업을 거친 커미셔너 위원회는 승부조작에 개입한 선수들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처벌을 내렸다.성명 | 소속팀 | 포지션 | 죄목 | 처분 |
나가야스 마사유키 | 니시테쓰 | 투수 | 승부조작 행위 실행 | 영구제명[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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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테쓰 | 투수 | 승부조작 의뢰를 받고 현금 수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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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다 요리노부 | 니시테쓰 | 투수 | 승부조작 행위 실행 및 권유 | 영구제명 |
마스다 아키오 | 니시테쓰 | 투수 | 승부조작 행위 실행 및 권유 | 영구제명 |
오가와 겐타로 | 주니치 | 투수 | 오토바이 레이스 도박 참가 | 영구제명[5] |
모리야스 도시아키 | 도에이 | 투수 | 승부조작 의뢰를 받고 현금 수수 | 영구제명[6] |
무라카미 기미야스 | 니시테쓰 | 포수 | 승부조작 권유를 받고 보고하지 않음 | 출장정지 1년 |
후나다 가즈히데 | 니시테쓰 | 내야수 | 승부조작 권유를 받고 보고하지 않음 | 출장정지 1년[7] |
가쓰라기 다카오 | 한신 | 내야수 | 오토바이 레이스 도박 참가 | 출장정지 3개월[8] |
구와타 다케시 | 야쿠르트 | 내야수 | 오토바이 레이스 도박 참가 | 출장정지 3개월[9] |
나리타 후미오 | 롯데 | 투수 | 야구도박 의혹이 있는 야쿠자와 교류 | 근신 1개월[10] |
사카이 쇼지 | 다이요 | 투수 | 야쿠자와 교류 | 무기한 출장정지 및 감봉 |
에나츠 유타카 | 한신 | 투수 | 야구도박 의혹이 있는 야쿠자와 교류 | 경고조치 |
미우라 기요히로 | 난카이 | 투수 | 승부조작 권유를 받고 보고하지 않음 | 경고조치 |
다나카 미쓰구 | 도에이 | 투수 | 승부조작 권유를 받고 보고하지 않음 | 엄중 경고조치 |
모토이 미쓰오 | 니시테쓰 | 내야수 | 승부조작 권유를 받고 보고하지 않음 | 엄중 주의조치 |
다카야마 이사오 | 전 다이요 | 투수 | 오토바이 레이스 도박 참가 및 권유 | 없음[11] |
다나카 쓰토무 | 전 주니치 | 투수 | 오토바이 레이스 도박 참가 및 권유 | 없음 |
사토 기미히로 | 전 난카이 | 투수 | 오토바이 레이스 도박 참가 및 권유 | 없음 |
이 중 다카야마 이사오, 다나카 쓰토무, 사토 기미히로는 사건 발각 시점 기준으로 이미 은퇴했던 상태였기 때문에 기구에서의 처벌은 없었다. 그러나 당연히 이 이후로 야구 관련 일자리에 두번 다시 종사하는 일은 없었다. 사실상의 영구추방.
사카이 쇼지는 무기한 출장정지라고는 적혀 있지만 얼마 안가 처분이 해제되어 복귀했고, 1971년 당해 바로 복귀해서 경기에 뛰었다.
덧붙여 야쿠자와의 교류가 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투수 코치 후지타 모토시는 커미셔너 위원회 징계까진 받지 않았고 구단 자체에서 근신 1개월의 조치를 내렸다.
5. 이후
이 사건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팀은 가장 많은 선수들이 연루된 니시테쓰 라이온즈로 다수의 선수들이 영구제명과 출장정지를 당하는 바람에 팀 전력이 크게 약화되어 이후 리그 상위권인 A클래스(1~3위)에 들지 못하고 리그 하위권인 B클래스(4~6위)를 맴돌았다. 게다가 승부조작을 주도한 팀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관중 수도 격감한데다가 모기업인 서일본 철도의 경영 악화 등까지 겹치면서 결국 1972년 서일본 철도는 구단 운영에서 손을 뗐고, 그 뒤 네이밍 스폰서 방식으로 운영하며 다이헤이요 클럽-크라운라이터 시절을 거치며 힘들게 운영하다가 1979년 세이부 철도가 팀을 인수하여 후쿠오카에서 사이타마로 연고지를 옮기면서 현재의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로 출범했지만 1982년 시즌이 되어서야 1982년 일본시리즈 제패와 함께 일본시리즈 챔피언에 복귀할 정도로 그 후유증은 심각했다.[12] 게다가 승부조작에 연루된 선수들이 퍼시픽 리그에 많았기 때문에 가뜩이나 센트럴 리그에 비해 인기가 낮았던[13] 퍼시픽 리그의 인기는 더더욱 떨어졌다. 이 일이 벌어지고 난 전후 시기인 1970년대엔 관중 동원이 센트럴리그의 ⅓ 수준에 불과해 이 당시 '⅓리그'라는 굴욕적인 호칭까지 붙었었다.이런 이유로 일각에서는 이 사건이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음모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요미우리 신문 산하의 호치 신문이 요미우리 신문 사회부와 연계하여 이 사건을 적극 보도한 점, 요미우리에서는 사건 연루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점(물론 야쿠자와 연루된 코치는 있었지만) 등에서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이 있었지만 말 그대로 음모론 수준. 게다가 교진군의 구단주 와타나베 쓰네오가 2001년에 "기구는 언제까지 이케나가를 영구추방 시킬 셈인가?"라고 후술할 이케나가 복권을 언급했었기에 더욱 가능성이 없다. 사건이 있던 1969년~70년 사이 당시 니시테쓰 감독[14] 이나오 가즈히사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 주장을 강력하게 반박하였고, 한편으로 이나오는 같은 퍼시픽 리그임에도 불구하고 승부조작 사태 해결에 비협조적이었던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와 난카이 호크스를 맹렬히 비난하며 일평생 잊지 않겠다라는 발언까지 했다고 한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영구제명 처분을 받은 이케나가 마사아키에 대해서는 그의 가족과 스승인 이나오 가즈히사가 영구제명 처분을 취소해달라고 호소했다. 이미 이케나가는 2001년 은퇴 선수들의 리그인 마스터스 리그 가입이 허가되어 활동하고 있었는데 마스터스 리그에서 이케나가를 받아들인 이유는 승부조작의 대가로 금전을 받은 것을 보고하지 않은 다른 선수들은 엄중 경고만 받은 것에 비해 이케나가는 영구제명을 당했다는 점이 너무 가혹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또한 이케나가가 100만엔을 받은 것도, 이를 거절하면 선배들 체면이 상할까봐 어쩔 수 없이 받았다는 점이 알려지며 선배에 대한 의리를 다하려다가 어려움을 당한 이케나가에 대한 동정 여론도 조성되고 있었다.
결국 2005년 커미셔너 위원회는 협약을 개정하여 영구제명 처분을 받은 선수는 15년이 지나서 재심의를 신청할 경우 커미셔너가 판단해 영구제명 조치를 해제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이케나가는 바로 야구계 복귀에 대한 재심의를 신청하여 그 결과 2005년 4월 25일 영구제명 조치가 해제되어 35년 만에 야구계로 돌아왔고 지방 사회인 야구팀 감독과 해설가 등으로 활약하다 2022년 9월 암으로 별세하였다.
그러나 이케나가 외에 영구제명 당한 선수들의 복귀는 없는 상황. 이미 3명은 사망했고 살아있는 요다, 마스다는 택시 운전사로 전업. 애초에 이케나가의 경우는 과잉처벌 케이스였지 나머지 2명(2005년 협약개정 이전에 이미 사망한 3명은 논외)은 가담 사실이 명확한데다 둘 모두 7~80대의 고령이라 가능성이 낮다.
[1]
報知新聞.
요미우리 신문에서 발행하는 스포츠 일간지. 흔히 일본 야구에 관련하여 들어본 적 있을 현지 외신 중 하나인 스포츠 호치의 정식 이름.
[2]
사실은 다나카가 이케나가에게 현금을 억지로 안겨주고 승부조작에 참여할 것을 강권했지만 이케나가는 그 돈을 보관만 하고 조작질엔 관여하지 않았다. 단지 그 돈을 돌려주지 않고 승부조작 권유를 받은 사실을 보고하지 않은 것이 이케나가에겐
재앙으로 돌아왔다.
[3]
2003년
4월 사망하여 사실상 해제.
[4]
2005년
4월 사면 복권됨.
[5]
1995년
10월 사망하여 사실상 해제.
[6]
1998년
7월 사망하여 사실상 해제.
[7]
1992년
5월 지병으로 사망.
[8]
2013년
4월 노환으로 사망.
[9]
1991년
1월 지주막하출혈로 사망.
[10]
2011년
4월 간부전으로 사망.
[11]
1978년 수면제 복용으로 자살. 이 사건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고 한다.
[12]
세이부가 라이온즈를 인수하기 전에 A클래스 안에 든 해는 1975년 밖에 없었는데 그것 마저 58승 62패 10무, 승률이 4할 8푼 3리로 좋지 않았다.
[13]
심지어 그때는 센트럴 리그의 최전성기인 요미우리의 V9 도중이었다.
[14]
1969년엔
나카니시 후토시가 감독을 맡았다. 이나오는 나카니시가 물러나며 1970년 감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