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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통 한복의 구성
1.1. 평복
기본적인 한복의 형태는 상유하고(上襦下袴)이다.- 저고리 - 한자로 유(襦)라고 한다. 엉덩이를 덮는 길이부터 무릎 아래로 긴 것까지 다양했으나 조선 시대가 되면서 선이 동정이 되고, 허리띠가 고름으로 옮겨갔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길이가 짧아졌다. 좌임, 우임, 합임 모두 상관 없이 그저 자기 편한대로 여미면 그만이었다. 여자는 속옷을 많이 껴입는 반면 남자는 겉옷을 많이 껴입었기 때문에 남자 저고리는 속옷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원래 속적삼-속저고리-저고리가 기본 세트로 셋을 묶어 '저고리 한 작'이라고 한다. 이 속적삼과 속저고리, 저고리를 항상 같이 입었기 때문, 특히 법도가 엄격한 사대부가나 궁중에서는 삼복 더위라 할지라도 모든 저고리를 갖추어 입었으며, 당의나 다른 겉옷을 입을 때에는 한 작을 완벽히 갖춰입은 위에 입었다. 현대에는 삼작저고리라고 잘못 부르는 경우가 많다.
- 치마 - 한자로 상(裳)과 군(裙)으로 구분한다. 상은 풍성하고 길이가 길어 화려하였으며, 군은 상에 비해 풍성하지 않고 땅에 끌릴 정도로 길지 않아 일상용에 적합하여 서민들이 많이 입었다. 치마허리 부분을 말기라 하며, 원래는 허리에 둘러서 입는게 정석이다. 주름이 자잘하든 큼지막하든 그것 역시 상관 없다. 고대 한복을 보면 전체적으로 주름이 잡힌 치마도 있다. 전통 방식 재단은 직사각형으로 자른 원단을 이어 만들기 때문에 H라인으로 나온다. A라인을 만들려면 주름 잡는 양과 형태를 잘 계산해서 A라인으로 만들던가, 사다리꼴로 재단해야 한다. 사다리꼴로 재단하는 방식이 흔하다. 현대의 조끼허리나 어깨허리로 인해 치마가 가슴 위로 올라오며 20세기 이후의 한복 치마는 포대자루가 따로 없게 되었으나[1], 전통식 띠허리는 가슴가리개를 착용하고 허리에서 두르기 때문에 허리선이 강조된다.
- 전단후장형(前短後長形)치마 - 치마의 앞부분을 일정량 접고, 옆으로 이어지는 부분에는 주름을 넣어 자연스레 이어지게 했다.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유물
- 접음단치마 - 밑단을 일정량 접어올려 이중단으로 만든 치마.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유물
- 치마
- 바지 - 한자로 고(袴)라고 한다. 폭이 넓은 관고와 좁은 세고를 비롯해 여러 종류가 있었다. 대님이 필수 요소는 아니었다. 오늘날 한복 바지 하면 떠오르는 패턴은 조선 중기 때 만들어진 것으로 16세기 이전의 바지하고는 세부적인 모양이 다르다. 임진왜란 전에는 전통적인 여자 속바지류와 비슷한 형태에 종류도 다양했으나, 옷감이 너무 많이 소비되며[2] 바지통이 너무 넓다는 이유로 지금의 사폭바지로 변했다. 즉, 16세기 이전을 배경으로 하는 창작물에 현대에 흔히 아는 남자 한복 바지(사폭바지)가 나오는 것은 고증 오류이며 전통 여자 속바지류와 유사해야 한다.
- 행전 -넓은 바짓자락을 묶는 것. 무릎 정도에서 발목까지 오거나 그보다 짧은 길이이다.
- 대님 - 남자들이 바지를 입은 뒤에 그 가랑이의 끝 쪽을 접어서 발목을 졸라매는 끈을 말한다.
- 토시
- 완대 -활을 쏠 때 거추장스러운 도포자락을 고정시키는 장구. 우리말로는 팔찌라고 하나, 현대에는 장신구인 그 팔찌와 혼동될 가능성이 높다. '활팔찌'라고도 했다. 사극에서 넓은 소맷부리를 모아 묶는 그것. 습(拾)과 구(構)로 나뉘는데, 습(拾)은 부드러운 가죽이나 천으로 만들어 고급스러운 그림을 그리거나 수를 놓았고, 고리 부분은 상아나 대모같은 고급스러운 재료를 사용하여 줄을 엇십자로 잡아매어 거추장스럽거나 활을 쏠 때 시위가 줌손의 팔목을 치지 않게 했다. 구(構)는 가죽이나 천 혹은 광다회처럼 만드는데, 폭과 길이는 팔목에 세 번 정도 두를 수 있어야 하며 끼우는 부분은 대모 등의 단단한 재질로 만들었다. 사극에 나오는 것은 습을 변형시킨 것이라 보면 된다. 구 형태의 완대 습 형태의 완대
- 버선 - 발에 시는 의류로 족의(足衣)라고도 하며 한자어로는 말(襪)이라고 한다. 현대의 양말과 같은 기능으로 한자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양말(洋襪)' 자체가 '서양의 버선'이란 의미이다. 발을 따뜻하게 하고 모양을 맵시 있게 하기 위해서 천으로 만들어 신는 물건이다. 한국 특유의 것이며 남녀 모두 신었다고 한다.
- 야장의(夜長衣) - 궁중에서 잠옷을 일컫는 말. 이름대로 밤에 입는 긴 옷이다.
- 침의(寢衣) - 겉감을 홍황색으로 하고 흰 모시로 안감을 댄 옷으로, 안감이 겉감보다 크고 네 변두리가 각각 1척이 넘는다고 고려도경 29권에 언급되어 있다. 번역본
- 등거리 적삼: 서민층에서 입은 소매가 짧은 상의. 소매가 짧고 진동밑 옆선을 터 활동하기 편하게 만들었다. 솜을 두어 방한복으로 입기도 했으며, 적삼 밑에 받쳐입기도 했다. 농민들은 노동복으로 많이 입었다.
- 등거리: 등나무의 가는 가지를 엮어 조끼 형태로 만들어 성글게 엮어 조끼형으로 만든 것. 상류층에서 여름에 적삼 밑에 받쳐입었다.
- 잠방이: 가랑이가 무릎까지 내려오게 만든 짧은 홑고의. 고려시대의 기록에도 나타나며, 여름에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많이 입었다. 속고의 밑에 받쳐입거나 농민들의 노동복이었다.
- 목도리: 정확히는 목도리보다는 거의 숄에 가까운 물건으로, 한자어로 표(裱)라고 한다. 도입될 당시(통일신라)에는 방한보다는 멋내기용에 가까웠다.
1.2. 겉옷/외출복
- 민소매/반팔 계열
- 포袍 계열: 고대 한복은 겉에 걸치는 소매가 있는 겉옷을 모조리 포袍라고 한다.
- 포: 고대 한복(조선 이전)의 겉옷. 흔히 두루마기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좁은 의미의 두루마기와는 엄연히 다른 종류이다.
- 도포 : 선비의 상징이자 가장 아름다운 한복. 길게 옆트임이 있고 길 아래에 무[3]를 덧대었다.
- 두루마기: 두루 막혀있다 하여 두루마기. 도포가 옷감이 많이 들고 사치스러워서 조선 후기에 파생된 옷이다. 다만 트임이 없는 포를 총칭하면 고대부터 시작된다.
- 창의: 도포와 두루마기의 중간적 성격을 띈다. 뒷중심선 혹은 겨드랑이가 트여있다.
-
소창의: 길이가 짧고 소매가 좁으며, 양 겨드랑이부터 길게 트여있어 옷이 세 자락으로 나뉜다. 크게 만들지 않아 활동성이 좋았다. 양반의 시중이나 하급 관리들이 주로 입어 이러한 이들을 ‘창옷짜리’라 비하하기도 했다. 양반들은 활을 쏘거나 말을 타는 등의 활동적인 일을 할 때에 입었다.
- 중치막: 명나라 중단이 유입되어 변형된 옷으로, 조복이나 겉옷에 받쳐 입었다. 많은 유물이 남아있다. 소매가 넓고 양 겨드랑이가 길게 트여있으나, 무는 없다. 소창의보다 컸다. 소매가 넓다는 점은 대창의와 비슷하지만 뒷중심선이 트여있지 않고 무가 없으며, 양 겨드랑이만 트여있어 옷이 세 자락이라는 점은 소창의와 같지만 소매가 넓고 옷이 더 컸다.
- 대창의: 길이가 길고 소매가 넓다. 양 겨드랑이와 뒷중심선이 트여있으며, 소창의나 중치막과 달리 뒷길 아래에 무가 있다. 관복 아래에 입거나 평민들의 외출복이었다.
- 학창의: 대창의의 깃, 도련, 수구 등에 검은 가선을 두른 옷.
- 동달이: 음차하여 동다리(同多里)라고도 한다. 융복의 겉옷 안에 입는 옷으로, 소매가 좁아 움직이기 편하다. 길과 소매의 색이 다른 직령포다. 겉고름은 겉길과 같은 색으로 하고 속고름은 홑일 때는 남색, 겹일 경우는 안길과 같은 색으로 한다. 일반적으로 주황색 길에 대홍색 소매를 달지만 마병(馬兵)은 소매의 색을 다르게 해서 소속이나 직무를 나타내기도 했다.
- 반수포: 이중깃에 겨드랑이선이 트여있는 포. 해인사 소장 반수포
- 백저포: 고려 원 간섭기 이전에 유행한 겉옷으로,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많이 입었다. 고구려의 포가 변형된 것으로 추측된다. 링크
- 직령
- 철릭
- 요선철릭(要線帖裏): 일반 철릭과 달리 허리에 요선(腰線)을 둘렀다. 깃은 몽골식으로 가운데 줄이 있고 여밈이 깊다. 속고름이 있다. 해인사 소장 요선철릭
- 여성용 겉옷 계열
- 쓰개치마: 조선 중기 이후 양반층 부녀자가 사용했다. 형태는 보통 치마와 같다. 치마허리는 얼굴 둘레를 감싸고 턱 아래에서 겹쳐잡을 수 있을 정도의 길이이다. 옥양목이나 명주로 만들었는데, 계절에 따라 겹으로 만들거나 솜을 넣었다. 머리에 쓴 뒤 치마허리로 얼굴을 감싸고 속에서 턱 아래를 여며 잡는다.
- 장옷: 여성들이 외출할 때 머리에 쓰는 옷. 두루마기 형태로 서민 층 여성들이 주로 입었다.
- 머리처네: 주로 시골 여자가 나들이를 할 때 머리에 쓰던 쓰개로, 두렁이와 비슷하지만 장옷보다는 짧고 소매가 없다.
- 면사: 면사포. 홑 혹은 겹으로 된 정사각형의 천으로, 한 변의 길이가 140~150cm 정도라 한다. 궁중에서도 사용하였으나 일반 궁녀들은 사용할 수 없었다.
- 몽수
- 말군(襪裙): 여자가 말을 탈 때 치마 위에 입는 통이 넓은 바지. 세종실록에 말군 없이 말을 탔다가 기녀로 오해받아 봉변당한 양반집 부인의 일화가 기록되어 있으며, 악학궤범에도 말군에 대한 내용과 삽화가 수록되어 있다.
1.3. 띠/고름
1.3.1. 허리띠
허리띠 - 한자로 대帶. 대구帶鉤(띠고리, 교구. 일종의 버클)가 달린 것도 있었다. 교구는 버클과 마찬가지로 허리띠를 잇는 역할을 하는데, 종류에 따라 화려한 교구와 밋밋한 교구가 같이 있는 허리띠도 있다. 이 경우는 화려한 교구를 앞에 둔다. 신분에 따라 옷감과 색이 정해지기도 하였으며, 폭이 넓거나 금속으로 만들고 화려한 장식을 드리운 장식성 허리띠가 있는가 하면 폭이 좁아 가느다란 허리띠도 있었고, 실을 엮어서 만든 사대絲帶(실띠)도 있었다. 고분벽화를 보면 묶는 위치가 앞이든 옆이든 뒤든, 어떻게 묶든 그런 건 상관 없었다. 당연하지만 고름이 생기기 전에는 상의 속옷을 허리띠로 여몄다. 행여나 허리띠로 속옷을 여미는 것을 보고 왜색으로 치부하지는 말자. 조선시대 이전의 한복도 한복이다.- 세조대 - 허리띠의 일종. 가느다란 끈에 술이 달려있다. 도포나 쾌자의 매력포인트.
- 광대 - 철릭이나 구군복 위에 착용한 폭 넓은 허리띠. 가느다란 고름이 달려있다.
- 전대
- 각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유물
- 옥대
- 서대
- 조아
- 전대(戰帶) - 전대띠라고도 한다. 철릭이나 구군복 위에 착용한다.
- 대대 - 폭이 넓은 허리띠. 복식에 따라 묶는 법이 다른데, 쌍고름으로 묶기도 했다.[4] 궁중 예복이나 조복에 입는 대대도 있는데, 그건 허리띠에 천이 늘어져 있다.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유물(조복에 착용)
- 요대
- 도포끈
- 광다회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유물
- 동다회
- 금제 허리띠 - 삼국시대에 상류층이 사용했던 금제 장식 허리띠.
- 포백대
- 과대
- 금은과대
- 교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유물
1.3.2. 옷고름
해당 문서 참조
1.4. 예복/ 관복
고려시대에는 관복제도가 제복, 조복, 공복으로 나뉘게 되었고, 조선시대에 와서는 더욱 세분화되어 제복, 조복, 공복, 상복, 시복, 융복 등으로 구별되었다.- 제복(祭服) - 종묘와 사직을 모시는 나라의 제사에 입는 복식
- 조복(朝服) - 나라의 대사(大祀)·경축일, 원단, 동지 및 조칙을 반포할 때나 진표할 때에 입었던 복식으로 '조근(朝覲)의 복'이라고 하여 왕이나 신하가 천자에게 나아갈 때 입는 옷이라는 뜻에서 나왔다.
- 공복(公服) - 관원이 조정에 나갈 때 입는 예복.
- 상복(常服) - 왕이나 백관이 평상시 집무 중에 입던 옷. 1610년 이후에는 바로 아래의 시복으로 명칭이 바뀐다.
- 시복(時服) - 문무백관이 입시할 때나 공무를 볼 때 입던 옷. 위의 상복에서 명칭이 바뀐 것으로 1610년 5월 경부터 시복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관복과는 달리 흉배가 없다. 원래 다양한 색상의 시복이 있었으나 흑색과 홍색을 거쳐 담홍색으로 통일되었다.[5]
- 융복(戎服) - 임금이나 관료 행차할 때 입던 외근복의 일종으로 기본적의 철릭+전립으로 구성되어져 있어 무관들이 근무할 때 입기도 하는 군복이었다.
- 소례복(小禮服) - 왕실의 매일 문안인사, 종친 및 외명부 접대 같은 일상 속 작은 행사나 의식때 입었던 옷. 현대로 치면 평상복과 약식예복의 중간쯤으로 볼 수 있다.
- 대례복(大禮服) - 국가제례, 왕실의 연회와 가례, 즉 성혼이나 책봉, 즉위 및 혼례와도 같은 큰 행사때 입었던 옷으로, 소례복보다 더 격식을 갖춰 입었다.
관복은 색깔별로 서열이 정해졌는데 노란색>빨간색/파란색>검은색>녹색>흰색 순서였다. 단, 노란색은 조선 초기 ~ 후기까지는 조선 사람은 입을 수 없었으며 명나라 또는 청나라의 천자만 입는 색깔이었다. 하지만 조선 말기 대한 제국 선포 이후에는 고종 부터 순종 때 까지 노란 옷을 입었다.
색 | 조정 | 군대 |
노란색 | 고종 이후 임금 | |
빨간색 | 임금[6], 임진왜란 이전 당상관 집무복 | 당상관 장군 |
파란색 | 성종 초 ~ 임진왜란 이전 당상/하관 대신 | 당하관 장군 |
검은색 | 임진왜란 이후 당상/하관 대신 | |
녹색 | 내시[7], 임진왜란 이후 당하관 집무복 | 포교 등 오늘날의 부사관급 군인 |
흰색 | 포졸, 병졸 |
- 곤복 - 임금이 있었던 최고의 대례복으로 면류관(冕旒冠)과 한 세트로 면복(冕服)이라고도 했다.
- 강사포(絳紗袍) - 임금의 붉은색 조복으로 원류관(황제는 통천관)함께 착용했다.
- 제복(祭服) - 종묘와 사직을 모시는 나라의 제사에 입는 복식으로 양관과 하여 양관복(梁冠服) 혹은 상의가 검은 적삼이라하여 흑삼(黑衫)이라고도 하였다.
-
조복 - 주로 왕실의 생일이나 새 임금의 즉위 등 경축일 외에도 정월 초하루와 동지 그리고 조칙 등을 반포할 때 입던 행사용 관복. 조선시대 관련 사극에서 가끔 보이기도.
금관이라는 모자와 세트로 착용하기 때문에 "금관조복"이라는 관용구로 흔히 불린다. 단, 금관조복은 신하들만 쓰며 임금은 금관이 아니라
면류관을 착용했으며 조복이 아니라 곤복을 입었다.
삼국지같은 중국 창작물을 보면 문관들이 이와 비슷한 디자인의 관복을 입고 있다.
왕이 입는 곤복과 강사포, 관료가 입는 제복과 조복은 옷의 구조에서는 비슷했지만 언제, 누가 입느냐에 따라 예장의 색상과 관모의 종류, 의복의 수와 문양이나 장신구의 형식 등에 세세히 구별이되었다.
- 곤룡포
- 단령 - 관리가 주로 조복 이외에 평상시에 입었던 근무복. 예복용과 직무용으로 나누어 색이 달랐으며,[8] 어떤 관직이나 신분이냐에 따라서 가슴과 등에 수놓거나 붙이는 흉배에 새겨진 동물이 달랐다. 왕족은 기린, 문관은 공작과 학, 무관은 백호를 수놓는데, 당상관(정 3품 이상)은 2마리가 그려져 있고, 당하관(그 이하)쪽은 1마리. 관복 착용 시에는 사모를 쓴다.
- 구군복
- 철릭
- 포졸복
- 청금복 - 성균관의 교복. 중국 시경의 '靑靑子衿 悠悠我心(청청자금 유유아심, 푸르고 푸른 임의 옷깃, 기나긴 것은 이내 마음이로다)'이라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태종11년(1411년)에 처음 제정되었고, 성종 8년(1477년)에는 경국대전에 명시된다. 처음 태종 때에는 '청금난삼'이었으나 세종 때에는 '진사들이 모두 흑령을 입고 유건을 썼다'는 기록이 있다. 성종 때에는 '청금단령'으로, 명종 때에는 '청색 옷에 검은 금을 단 유복'으로, 선조 때에는 벽색 옷으로(처음과 유사한 청금난삼으로 돌아갔다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바뀌었다. 임진왜란 이후 기강이 문란해져 유생들의 복식마저 개판이 되었고, 영조가 가벼운 일에는 '홍단령'을, 성균관의 공식 행사나 재례에는 '청단령'을, 더욱 중요한 일에는 '흑단령'을 입도록 했다. 참조 참조 참조 청금복을 입는 것은 왕세자라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 심의(深衣)
- 난삼(幱衫)
- 앵삼: 과거시험에서 생원시나 진사시에 급제했을 때에 입었던 초록색 예복. 석주선기념박물관 유물
- 대삼 - 명이 조선에 칠적관과 함께 사여한 의복. [9] 조선 초기 왕비와 세자빈의 대례복이었다. 병자호란 이후 이자성의 난으로 명이 완전히 망한 이후부터는 대삼을 다시 받아오거나 만들수 없어졌기 때문에 대삼을 바탕으로 흉배와 수원적을 부착해 국속화한 적의를 대례복으로 입기 시작했다. 참고
- 적의 - 고려말 조선 건립시기와 조선 중후기의 왕비의 예복. 상당히 복잡한 구조로서 조선시대 왕비옷을 검색해보면 감상할 수 있다. 속옷을 대슘치마까지 모두 착장한 뒤 저고리, 남대스란치마, 당의, 전행웃치마, 중단, 적의를 입고 후수, 대대, 폐슬, 하피, 옥대, 패옥을 착용하며 청석을 신고 손에 옥곡규를 들었다. 흔히 아는 심청색 적의 순정효황후의 12등 적의 출처는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명나라의 디자인을 그대로 적용해 꿩과 왕실의 상징인 이화문을 배치하고, 그 위에 용보만 단 것인데 꿩무늬에 따라 12등 적의와 9등 적의로 나뉜다. 12등은 황후의 것이라 용을, 9등은 태자비의 것이므로 봉황을 수놓는다. 관련 조선 왕비의 적의는 명나라 멸망 이전에 사여된 대삼을 바탕으로, 영조 이전까지는 원적문을 36개, 그 이후부터 대한제국 선포 이전까지는 51개를 배치하고, 깃에 금박을 붙인 대홍색 치적의(대홍적의) 사진 ☜출처 사진를 입었다. 대비는 구성이 왕비와 같은 자적색 치적의를, 세자빈은 원적문 36개를 배치한 아청색(검은색이 도는 청색. 검은파랑.) 적의를 입었다. 여담으로 혜경궁 홍씨같은 경우에는 정조의 친모이기는 했지만 대비나 중전의 예도, 세자빈의 예도 들기 뭣해 천청색 적의를 입었다고 한다. 중전은 백옥규를, 세자빈과 세손빈은 청옥규를 들었다. 재현한 인형을 볼 수 있는 곳 관련 관련 적의에 하는 대수머리 사진 ☜출처는 원래 턱 밑에서 묶는 것이 아니다. 왕비의 치적의와 대수머리. 대수머리에 끈이 달린 것과 후궁의 자적원삼 색이 틀렸다는 것을 감안하고 봐야 한다.
- 단삼 - 명나라의 원령포에서 파생된 여성용 단령이자 고려말에서 임진왜란 이전까지 왕비가 입었던 예복이자 평상복.[10] 대왕세종에서 단삼을 잘 고증했다. 기성군부인 평양이씨 단삼( 복원 밑 재현복)
- 노의
- 장삼 - 길이가 길고 품과 소매가 넓은 겉옷. 여인의 예복이자 승려의 겉옷이다. 대왕세종에서 잘 고증했다.[11] 하연 부인 이씨의 초상화에서도 볼 수 있는 앞섶을 꺾고, 소매를 접어올린 그 겉옷도 장삼이다. 그중에서 홍장삼의 경우 단삼 이외의 왕비의 평상복으로, 병자호란 이후에는 노의 다음가는 예복으로서, 가슴과 등에 사각 봉황흉배를 부착하고 대대를 둘렀다. 왕비의 수의로 입히는 경우에는 겹으로 짓고 흉배를 붙이지 않았다. 왕비의 것 이외의 소매가 넓은 쌍봉문과 자수를 넣은 것의 경우에는 공주나 옹주의 활옷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 원삼 - 병자호란 이후에 단삼이 리폼/변형되어 대체된 내 외명부 여성들의 예복. 초반에는 단삼, 단령과 같이 깃이 둥글고 옆으로 여며입는 형태였다가 깃 모양이 마주보는 대금형으로 변하고, 색동과 한삼, 동정을 달았다. 왕비, 세자빈, 세손빈은 소례복으로, 부부인(대군의 부인) 이하 외명부와 궁녀 및 관료들의 처 등 후궁을 포함한 왕족 이하 신분은 대례복으로 입었는데, 평민층은 일생에 한 번 혼례 때 입을 수 있었다.[12] 황후의 황원삼, 왕비와 황태자비의 홍원삼, 공주와 옹주, 세자빈, 세손빈, 궁녀, 반가 부녀자의 녹원삼, 비빈(후궁)[13]의 자적원삼 출처이 있다. 궁중 왕녀의 녹원삼과 그 이하 신분의 녹원삼은 당연히 차이가 있었다. 상궁의 녹원삼 사극에서 자적원삼이 연보라색이나 일반 보라색으로 많이 나오는데, 실제로는 이런 색이다. 대한제국 이후에는 호칭과 함께 예복도 격상하여 황태자비가 홍원삼을 입게 되고, 그 위에 오조룡보를 부착하게 된다.
- 당의 - 평복을 모두 착장한 위에 입었다. 소례복이자 궁중의 일상복. 일상복으로 입었던 기존의 장저고리를 임진왜란 이후에 광해군 때 예복으로 리폼한것이 이것으로, 단삼을 대체했다. 시대에 따라 형태가 다르며, 홑으로 지어 입기도 했다. 폐비 유씨(광해군비) 당의 해평윤씨묘 출토 당의 해평윤씨묘 출토 당의 청연군주(사도세자 딸) 아동 당의 1800년대 나인 당의(덕온공주 혼례 때) 덕온공주 당의 덕온공주 홑당의 철종 국상 때 왕실 당의 깎은당한삼
- 활옷 - 조선 중후기 왕녀[14]의 대례복. 결혼식 복장이기도 하다.
- 고려도경 20권 귀부(貴婦)조에 고려 왕비와 귀부인들이 홍색을 숭상하여 그림을 수놓아 입었는데, 관리나 서민의 부인은 입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읽어보기
- 국의 - 조선 초기 왕비가 친잠례를 행할 때 입었던 옷으로 폐비 윤씨부터 입기 시작한 예복이다. 뽕나무의 색을 본떠 황색계열의 색인 상색을 사용했으며 그 외의 내외명부 일원들은 아청색의 국의를 입고 흉배를 달았다. 이때 왕비의 흉배는 한 쌍의 봉황을 새겼다. 광해군 대에는 왕비의 국의만 유청색으로 바꿨으나 다시 영조 대에 들어서서는 성종 때의 관례대로 행하였다가 이후엔 원삼이나 당의로 간소화되어 사라졌다.
- 폐슬 - 무릎가리개.
- 운견 - 한자로는 雲肩.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본래 여인들이 방한용으로 어께에 두르던 것으로 서양옷의 망토와 유사한 용도의 옷이다. 중국에서는 수나라 이후 형성된 이래로 크게 유행하여 청나라 때는 민간에까지 퍼졌고, 한국에서는 발해시대 귀족 여성 조각상이나 고려시대 노국공주 초상화( 그래픽 복원)에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쇠퇴하여 중국에서 보내는 의례복 관련 기록이나, 정재 무용 무산향의 무복(舞服), 불교미술품인 동자상에서나 보인다.
- 소의(염의) - 조선 초기 여성들의 예복으로 겉은 검은색이나 안감은 흰색이고 외곽선이 붉은 커다란 검은 띠인 조대를 리본으로 묶고 오방색을 꼬아 만든 조대와 매듭노리개를 단 옷이다. 아는 사람이 굉장히 드물지만 다소 이색적이면서도 검은색과 붉은색이 주는 우아함 때문에 소의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1.5. 한국 갑옷
자세한 내용은 한국 갑옷 문서 참고하십시오.1.6. 속옷
여성용 속옷.[15]
남자는 속고의와 속적삼이 전부라[16] 여자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간소한데, 대신 겉옷을 많이 껴입으니 피장파장. 조선 전기에는 남자 역시 개당고, 합당고, 세가닥바지 등을 겹겹이 껴입은 위에 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껴입는 겉옷이 많기에 저고리와 바지도 사실상 속옷 취급을 받았다. 석고대죄를 할 때 저고리와 바지 차림인 게 괜한 것이 아니다.
- 가슴가리개 - 가슴부터 허리 부분을 가리는 여성 속옷. 한자로는 대자帶子라고 한다. 기능은 초기의 브래지어와 유사하다 볼 수도 있다. 조선시대가 되면서 저고리가 짧아지자 탄생한 상의 속옷. 원래 치마를 비롯한 하의류는 허리에 입는데, 저고리가 짧아지자 이로 인한 노출을 방지하고 가슴선을 정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어 저고리가 극단적으로 짧아지면서 팔을 들면 아예 겨드랑이가 노출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기생들이 여기에 자수를 놓았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수를 놓은 가슴가리개는 발견되는 유물이 없고, 이영희 디자이너의 자서전에 따르면 스승 석주선 복식학자가 세운 박물관에서 전시되어 있던 기녀 복식을 보고 허전함을 느껴 고안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가슴이 큰 여자를 영 좋지 않게 인식했기 때문에 [17]가슴가리개로 꽉꽉 조였다. 한복은 가슴이 작아야 입었을 때 더 멋나기 때문에 현대에도 가슴이 큰 여자들이 한복을 입을 때 가슴을 조이기 위해 입는 경우가 있다. 치마말기와 자주 혼동되는데, 치마말기는 치마를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 치맛허리 부분을 말한다. 치마는 원래 허리에 둘렀다. 그러니 말기는 당연히 허리에 위치하며, 폭 역시 가슴가리개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좁다. 가슴가리개는 실제로 보면 가슴뿐 아니라 배허리까지 가릴 정도로 넓다.[18] 출처 영친왕비의 가슴가리개 현대에는 가슴둘레를 감안하여 조이지 않게 만들거나, 두를 때 안조이게 입는 경우가 많다. 가슴가리개는 영친왕비 유물만 봐도 길이 110cm, 너비 30cm에 이를 정도로 길고 넓다.
- 적삼 - 속적삼이라고도 한다. 매듭단추로 여민다. 남자와 여자 공통적으로 입는 상의 속옷이다. 모시 속적삼(여자)
- 속저고리 - 저고리보다 약간 작고 짧게 만들었다. 겉에 입는 저고리와 마찬가지로 목판깃, 칼깃 등 옷깃이 다양했으며, 곁마기가 달려있다. 속저고리 조선 중기의 속저고리 설명
- 다리속곳 - 가장 안쪽에 입는 여성 속옷. 속속곳이나 바지가 더러워지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다. 홑으로 된 긴 천에 띠를 달아 착용했다. 흰 무명이나 모시, 베 등을 사용해서 흡습성이 좋도록 만들었다. 생리대(개짐)고정용이라는 추측이 있다. 다리속곳이 생리대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으나, 말도 안되는 소리다. 생리는 이런 작고 앏은 천쪼가리로 절대 감당할 수 없다. 생리할 때 팬티 한 장으로 버틸 수 있다면 애초에 생리대가 발명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리속곳은 개짐 위에 덧입는 식으로 착용했다는 것이 가장 신빙성 있는 추측이다. 설명 설명2 다리속곳 다리속곳
- 개짐 - 상술했듯 다리속곳 안쪽에 덧입는 생리대로, 천기저귀와 비슷하게 광목천을 접어 사용했는데, 형태는 약간 달랐다. 개짐만 입는 것은 여러모로 어렵기 때문에 고정을 위해 다리속곳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 개짐의 형태)
- 속속곳 속속곳
- 속바지 속바지
- 단속곳 - 속속곳과 형태는 같지만 가랑이가 넓고 치마보다 짧다. 양반들처럼 너른바지와 무지기치마를 지어입을 여력이 안되는 평민들의 경우 이 위에 치마를 입었다. 단속곳
- 고쟁이 - 여름용 여자용 속옷. 속바지를 입는 차례에 입었다. 고쟁이
- 살창고쟁이 - 여름에 입었던 여자 속옷 중 하나로, 바지에 길게 창이 나있다. 뒤여밈 살창고쟁이
- 너른바지 너른바지
- 무지기치마 - 열두 폭의 모시를 각각 길이가 다르게 하여 한 허리에 달아 만든 속치마. 단 수에 따라 3합, 5합, 7합이 있었으며, 단은 홀수로 달았다. 젊은 여자들은 각 단을 색색깔로 염색하였지만 나이든 여자들은 단색으로 염색했다. 겉치마보다 짧으며, 전통식 치마 재단(직사각형)이기 때문에 H라인이며, 항아리 형태로 허리 부분을 띄워주고 치마를 풍성하게 한다.[19] 전통 방식대로 만들면 신윤복 필 미인도의 그 모습처럼 풍성하게 띄워준다. 삼합무지기치마
- 대슘치마 - 궁중에서 무지기치마 위에 착장하는 속치마였다. 일반적으로 치마를 풍성하게 지을 때 12폭으로 만드는데, 대슘치마는 속치마임에도 12폭~14폭을 사용하고 아랫단에 4cm 가량의 빳빳한 백비[20]나 창호지를 덧대어 만들었다.[21] 안에서 양반다리를 해도 모를 정도로 풍성하다고 한다. 빳빳한 아랫단은 치마가 자연스럽게 퍼지게 만든다. 대슘치마
- 속고의 - 남자의 하의 속옷.
- 마미군(馬尾裙) - 고려시대에 존재한 속치마로, 말총을 솜처럼 넣어 부풀렸다. 말총을 엮어서 넣었다는 설명도 있다. [22] [23] 치마를 더욱 부풀리기 위해 마미군을 두 겹 이상 껴입기도 했다. 고려양으로 인해 원나라로 건너가기도 했다. 물론 이후에 중국에서 고려양이 까이면서 마미군도 싸잡아 디스당한다.
- 선군(旋裙): 고려 시대의 속치마로, 치마폭을 넓게 하기 위해 착용했다. 길이가 다른 치마를 겹겹이 이은 것으로, 이것이 발전하여 무지기치마가 된다. 선군 위에 입는 겉치마는 8폭인데다 길이도 길어서 걸을 때 겨드랑이에 끼고 다녔다고 한다. 당시의 상류층은 7~8필 가량의 옷감을 들여서 지어 입었다.
- 내의(內衣): 삼국시대의 속저고리. 삼국사기 색복조(色服條)에 흥덕왕 대의 복식금제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여기에 ‘표의(表衣)’·‘단의(短衣)’·‘내의(內衣)’라는 명칭이 언급된다. 표의가 겉에 입는 겉옷인 포를, 단의는 저고리를 뜻한다고 해석되기 때문에 자연히 내의는 속저고리 종류를 의미하게 된다.
- 내상(內裳): 삼국시대의 속치마. 내의와 마친가지로 삼국사기 색복조 흥덕왕 대의 복식금제에 대한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표상(表裳)’이 겉치마를 의미하기 때문에 자연히 내상은 속치마가 된다.
- 문릉관고(文綾寬袴): 고려시대의 속바지. 생초(生綃)로 안을 받쳐서 넉넉하게 만든 것으로, 조선시대의 너른바지같은 역할을 한다.
- 저의(紵衣): 고려시대의 속옷. 속에 입는 홑옷인 중단(中單)이며, 목욕할 때에도 입었다. 가장자리에 선을 두르지 않고, 옷깃도 없다고 한다. 신분과 성별을 막론하고 저의를 입었다고 고려도경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속적삼과 비슷한 것이라 추측된다. 고려도경 29권에 언급된다. 번역본
- 저상(紵裳): 고려시대의 속옷. 저의와 함께 입는 치마로, 겉과 안이 여섯 폭, 한 가랑이는 세 폭이며, 말기는 없고 끈을 두 개 달아서 입었다. 저의와 마찬가지로 목욕할 때에 입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처럼 옷을 입고 목욕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목욕 가운처럼 입은 것이다. 개천에서 옷 다 벗고 혼욕을 했을 정도로 개방적이었으며[24], 평범하게 옷을 벗고 씻었다. 고려도경 29권에 언급된다. 번역본
- 등거리적삼: 소매가 짧고 진동밑 옆선을 터놓은 적삼. 겨울에는 솜을 두어 방한복으로 입기도 했다. 적삼 밑에 속옷으로 입기도 했다.
- 잠방이: 길이가 짧은 홑고의. 속고의 밑에 입는 속옷 역할을 하기도 했다.
여성용 속옷의 경우 상의는 가슴가리개→ 속적삼→ 속저고리. 하의는 다리속곳→ 속속곳→ 속바지→ 단속곳→ 너른바지→ 무지기치마→ 대슘치마[25] 순으로,[26] 치마의 볼륨을 위해 바지형 속옷을 여러 벌 겹쳐 입은 것이 특징적이다.[27] 위는 기본적인 순서로, 속바지 대신 고쟁이를 입기도 하는 등 약간의 변화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저렇게 껴입는 것은 여전하다. 하의 속옷은 밑이 뚫려있는 바지인 개당고와 막혀있는 바지인 합당고로 나뉜다. 우측의 다리속곳처럼 굉장히 앞서간 형태도 보인다. [28] 당연한 얘기지만 평민이나 천민들이 저 많은 속옷을 일일이 챙겨입기는 힘들었다. 속옷 역시 값비쌌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평민층은 속바지나 단속곳까지, 양반들은 너른바지나 무지기치마까지 입었으며, 대슘치마는 위에 서술했듯 궁중에서만 입었다. 속바지들의 경우 형편에 따라 간혹 치마 아래로 보여지는 아랫단만 좋은 옷감으로 만들기도 했다.
남자의 경우 바지와 저고리도 사실상 속옷 취급을 받는다. 남자 한복도 여자 못지않게 상당히 많이 껴입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
고분벽화 속 한복의 모양새와 발달 과정상 삼국시대에도 속옷을 여러 겹으로 입었을 거라 추측되고 있다. 고려시대에도 당연히 여러 겹으로 입었다. 한복 특유의 풍성한 모양새를 내려면 많이 껴입어야 한다.
조선시대 속바지류의 유물을 보면 간혹 어깨끈이 가운데에 하나만 덜렁 달린 것이 있는데, 예시 출처 전통적인 한복 속바지는 뒤가 완전히 트여 벌어지는 구조가 아닌 것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쪽이 맞다. 끈이 양쪽에 달리면 입다가 골반에 걸려 불편하게 된다. 만일 현대인들이 전통 속옷을 자주 입었다면 금방 이유를 알 수 있었을 부분.
한복에서 남성용 뿐 아니라 여성용으로도 바지 형태의 속옷이 일찍 발달한 것은 한반도 특유의 한랭건조한 기후 때문이라 볼 수 있다.
1.7. 특수복
- 사규삼: 남자 어린이가 관례 전에 입던 평상복이다. 땋은 머리에 복건을 쓰고 사규삼을 입으며 조대를 띤다.
-
기녀복: 기생만 입는 옷이 따로 있었던 게 아니다. 흔히 말하는 작고 좁은 저고리와 풍성한 치마 역시 한 시대의 유행이었을 뿐 기생만의 복식은 아니었다. 기생이란 일종의 트랜드세터이기도 했던지라 그들이 입는 양식의 옷과 장신구, 화장은 곧 유행이 되었다. 그러나 온갖 사소한 것까지 사치스럽다며 [29] 법으로 규정할 정도로 사치를 엄격하게 규제했던 조선에서[30] 몇 안되는 특별 예외대상이 바로 기생었다는 점으로 인해 민간에 그대로 퍼지지는 못했다. 조선시대의 복식금제를 보면 기생에 대한 특별대우가 굉장히 파격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옷의 재질이나 장신구 관련 규정은 종친과 양반조차 예외가 아님에도 기생[31]은 예외 대상이었다. 가체조차 자신의 재력에 따라 마음대로 올렸다고 하니.
- 무복: 무당들이 굿을 할 때 입는 옷. 각 굿거리마다 중심이 되는 신이 다르기 때문에 입는 무복도 달라진다. 다만 충청도 무속의 법사의 경우 강신이나 선굿보다는 독경과 앉은굿, 설위설경(設位設經)[32]이 중시되어 특별히 정해진 무복은 발전하지 않았고, 보통 두루마기나 개량한복에 모자를 쓸 경우 갓이나 고깔을 쓴다.
- 물옷: 재래식 해녀복을 말한다. 1970년대부터는 고무로 된 해녀복을 입는다. 엄밀하게는 물소중이만을 말하며, 넓게는 물소중이 위에 덧입는 물적삼, 머리를 감싸는 물수건, 헝겊모자인 까부리를 포함한다.
물옷의 이름들. * 자세한 사항은 해녀 문서 참조.
- 상복: 이미지 관련 장례시 유족이 입는 옷. 삼베는 흉복(凶服)의 소재로 쓰였기 때문에 상을 당한 죄인이라 하여 삼베로 지은 한복을 입었다.
- 습의(襲衣): 망자에게 입히는 평상복. 세상을 떠날 때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습의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 염의(殮衣): 망자의 습의 위에 덮거나 감싸는 여러 벌의 옷. 임금이 하사한 옷이나 귀인이 선물한 옷, 생전에 입던 옷 중 가장 좋은 옷을 염의로 삼았다. 선비는 심의를, 관리는 관복을 입히는 경우가 많았다. 원래 수의란 명칭과 이를 흉복인 삼베로 짓는 것은 일제강점기의 잔재로, 전통 장례 예법과 전혀 맞지 않는다. 삼베옷은 죄인의 상징이기 때문에 망자를 죄인으로 만드는 셈이다.
- 처네: 어린애를 업을 때 두르는 끈이 달린 포대기[33]. 혹은 이불 밑에 덧덮는 작은 이불. 머리처네도 줄여서 처네라 불렀다.
- 도롱이: 짚이나 띠를 엮어 만든 비옷. 주로 농촌에서 사용했다. 안쪽은 엮고 겉은 줄거리를 드리웠다. 당연하지만 어느정도 재력이 받쳐주면 우산을 사용했다. 폭이 넓은 삿갓을 비를 막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는 용의 눈물에서 잘 고증되었다.
- 탈: 상징적인 의미를 담아 주술적, 종교적인 물건으로 쓰거나 혹은 창작예술 행위에서도 널리 사용한다.
1.8. 모자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1.8.1. 관(冠)
-
변형모(弁形帽)
본디 북방계 방한모에서 비롯된 관모. 고구려에서는 절풍으로 불렀으며 소골[34]도 변형모로 보는 것이 대세.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민족에게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고깔모자. 한마디로 한국 관모의 기본형이라 할 수 있다. 머리둘레에 맞춰 쓰기도 하고 머리 위에 살짝 올려놓을 정도로 작게 만들기도 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은 새의 깃털을 꽂았다.(조미관, 조우관) 변형모는 일본의 관모 에보시(烏帽子)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보통 식물의 섬유나 비단, 말총 등으로 만들지만, 현재는 금 또는 금동으로 만든 유물들이 전해지고 있다. - 조우관
-
백라관 - 고구려의 왕이 쓰던 관모. 백라, 즉 희고 얇은 비단으로 만든 관이라는 것 외에 확정된 것이 없다. 백라관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안악 3호분의 정체와 깊은 관련이 있는데, 안악 3호분을 왕릉으로 보는 견해는 무덤 주인이 쓰고 있는, 내부에 책(幘)을 쓰고 흰 비단을 덮은 관모를 백라관으로 보며
근초고왕(드라마)에서는 이 설을 토대로 백라관을 재현해 호평을 받았다.
안악 3호분에 묘사된 추정 백라관
반면 안악 3호분을 중국 귀화인 동수의 묘라고 보는 견해는 이 관모는 백라관이 아니라 중국에서 유행한 원통형 모자인 농관(籠冠)류의 관모로 보며[35] 백라관의 구체적인 형태에 대해서는 절풍 등 고구려의 전통적인 관모와 같이 변형모가 아니었을까 추측하기도 한다.
- 금관(왕관) - 신라, 가야, 마한 등의 왕, 왕족들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금으로 만든 관모, 단 실제 착용 용도가 아닌 무덤 부장품이라는 의견도 있다.
- 면류관 - 우리가 흔히 황제의 모자라고 알고있는 모자. 그 시기마다 전부 다 달랐지만, 조선시대에는 1층짜리를 주로 사용. 즉위식이나 책봉식, 종묘 제례 의식 등 국가의 중요 의례시에 입는 왕의 최고 정장이다. 곤복이라는 복장과 세트로 착용한다.
- 복두, 사모 - 문무백관이 단령 등 관복을 입고 쓰던 모자. 고려 말기에 들어와 조선시대 정립. 지금도 전통 혼례식때 신랑쪽이 쓰기도 한다.
- 승관 - 한자로는 僧冠. 승려가 쓰는 둥근 관으로, 두툼한 털로 만든 방한용은 원정관이라 하여 현재도 종종 착용한다.
- 익선관 - 임금이 정무를 볼때 쓰던 모자. 중국 송나라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한국은 조선 세종때 들어와 정착. 곤룡포와 세트로 착용한다.
- 양관(梁冠) - 제갈량 모자로 유명한, 둥근 형상에 정수리 부위에 밭고랑 같은 돌출선이 장식된 모자. 아래에 나온 통천관, 원유관도 양관의 일종이다.
- 통천관 - 황제가 정무를 볼때 쓰는 관. 본래 중국에서 많이 쓰고 한국에서는 그렇게 많이 쓰던 모자가 아니지만 황제를 표방하던 고려 시대에는 종종 썼으며 고종도 대한제국 황제가 된 후 통천관을 썼다.
- 원유관 - 임금이 공식 행사에 참석할때 쓰던 모자, 황제의 것은 통천관, 왕의 것은 원유관이라 하며, 강사포라는 옷과 세트로 착용한다.
- 금관 - 조선시대 관리가 조복 착용시 쓰던 금박으로 장식된 관.
- 주취칠적관 - 고려말에서 임진왜란 이전까지 썼던 왕족 여인의 모자. 홍무제의 정실 효자황후 마씨가 하사한것을 시작으로[36] 매번 새로운 왕과 왕비가 즉위할때 명나라에서 보내준것을 썼다.[37] 사진 밑 자료
- 화관
1.8.2. 갓
갓(모자) 문서 참조. 엄밀히 말하면, 갓 종류는 관이면서도 평상적인 복식에 들어간다. 초립, 패랭이도 마찬가지. 즉 갓은 관(冠):예식모자과 건(巾):두건 사이에서 생겨난 한국전통의 고유한 형태의 복식인 것이다. 실제로 한국 전통 의상에서 남성전용 모자라고 하면 대부분이 갓을 연상하거나, 여기에서 파생된 모자들이 많다. 한국에서 자생한 대표적인 전통모자는 대부분 갓(립)에 속한다!이런 형성사유에 걸맞게, 흔히 갓 종류로 분류하는 이런 고려중기-조선시대에 들어서, 몽고의 영향으로 목장이 늘어나고 말들의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대부분의 모자들의 재료가 말총으로 만들어진다. 이전에는 대나무와 종이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너울.
- 흑립, 백립, 주립 등. ( 갓(모자) 문서 참조)
- 전립 - 가죽으로 만든 갓으로서, 포졸들이나 구군복에서 쓰는 가죽제 갓. 전투용갓이라는 뜻으로서, 현재의 군용모자와 비슷한 역할이다.
- 사방관 - 정자관의 일종. 네모난 원통모양. 정약용 초상화의 모자가 이것.
- 동파관
- 정자관 - 흔히 훈장님모자라고 알고있는 모자. 이것 자체만 쓰는것이 아니고 망건위에 탕건을 쓰고 이것을 덧쓰는 방식이다. 5000원 지폐의 주인공이신 율곡 이이 선생이 쓰고 있는 것이 정자관이다.
- 삿갓
- 지삿갓: 말 그대로 종이로 만든 삿갓이나 햇빛이나 비를 피하거나 얼굴을 가릴 목적으로 만든, 종이와 대나무로 만들어진 모자를 뜻한다. 착용한 사진을 보면 크기가 상당히 크고 깊이 역시 몸을 가릴 정도로 깊다. 실제 착용한 모습을 찍은 옛 사진을 보면 아이의 몸이 상당히 가려질 정도로 깊으며, 설명 역시 직경이 1m 이상이라 비 올 때 등에 묶어놓고 비를 피하며 일 했다고 나와있다. 그러나 국립민속박물관 유물들을 보면 크기가 직경 74.5cm, 69cm 등으로 다소 작고 높이가 낮다. 지삿갓 착용 사진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유물 검색 가능
1.8.3. 건(巾)
건은 삼국시대부터 동아시아에서 남녀 보편적으로 두르던 복식이다. 한마디로 두건이라고 보면 되는데, 우리 조상들도 두건형태를 즐겨 썼다. 갓이 우리민족의 가장 대표적인 모자형을 이른다면, 건류( 두건)은 조상들이 가장 일상적으로 두르고 다녔던 모자류에 속한다. 즉, 일상적인 머릿수건.- 문라건 - 조선시대에 갓이 보급되기 전까지 거의 모든 남성들이 쓴 쓰개(두건)의 일종. 한국 사극에서 조선 건국 초기까지를 무대로 한 사극에서 등장인물들이 쓰는 두건이 바로 문라건이다.
- 망건 - 상투를 튼 머리가 흘러내리지 마라고 쓴 그물망 같은 머리끈. 물론 양반들만 그랬고 평민들은 그런거 없었다. 그냥 수건이나 천을 두를 뿐. 하지만 중인들도 갓을 쓰기 위해서 망건을 두르는 경우가 잦았다.
- 책(幘) - 건의 일종으로 머리 둘레에 맞게 두르며, 머리 뒷부분이 두 갈래 혹은 한 갈래로 솟아오른 형태를 하고 있다. 참조 그런데 고분 벽화에서 발견되는 책은 중국에서도 발견되는 관모이기 때문에 고구려의 책은 중국의 책과는 형태가 다르다고 하는 기록을 바탕으로 이는 중국에서 수입한 관모이지 고구려식 책은 아니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 복건 - 흔히 도련님모자 라고 부르는 모자. 유학자들이 쓰고 다니기도 했다. 1000원권 지폐의 주인공이신 퇴계 이황 선생이 쓰고 있는 것이 복건이다. 하지만 정작 퇴계선생은 복건이 스님들이 쓰는 모자와 비슷해서 싫어했고 대신 정자관을 쓰고 다녔다고 한다.
- 유건 - 유생들이 주로 쓰고다니던 모자. 정자관과 유사하나 전혀 다른 모자이다. 자세한 모양은 신윤복의 그림에 나와있다. 성균관 스캔들에 나오는 유생들이 쓰고 다니는 것이 다 유건이다.
- 건귁 - 여성용 전통두건류를 이르는 말. 현대에도 여성들이 목욕 후에(또는 시골의 경우 밭일할 때) 타월 등을 머리에 감은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런 형태를 바로 건귁이라고 한다. 당연히 두건류답게 일상적으로 두루 썼다.
- 호건 - 유아기 소년들이 쓰는 모자.
1.8.4. 방한모
- 이엄(耳掩): 모피로 만든 귀덮개. 겨울에 사모 밑에 착용하기도 했다. 설명
- 아얌: 이엄의 한 종류로, 귀는 덮지 않고 이마만 덮는다. 조선 초의 기록에 의하면 이서(吏胥)들이 착용했다고 한다. 즉, 남녀공용이었다. 그러나 이 때의 아얌이 지금의 아얌과 같은 형태인지는 알 수 없다.
1.8.5. 여성용
조선시대 여성들의 모자 | ||||
굴레 | 남바위 | 볼끼 | 너울 | 아얌 |
장옷 | 전모 | 조바위 | 족두리 | 화관 |
1.8.6. 기타
1.9. 전통 신발
신목의 유무에 따라 화靴와 이履로 나뉜다. 화는 북방계에서 유래되었고 이는 남방계에서 유래되었다.참조
화(靴)를 만드는 장인은 화장(靴匠), 혜(鞋)를 만드는 장인은 혜장(鞋匠)이라 하며, 화와 혜를 모두 만드는 장인을 화혜장(靴鞋匠)이라 한다. 주피장, 갖바치라고도 일컫는다.
- 짚신
- 단총박이 - 짚의 속대로 꼰 총을 박아 삼은 짚신.
- 왕얽이짚신 - 볼품없이 마구 삼은 짚신.
- 꽃짚신 - 신총이나 신 바닥을 여러 빛깔로 꾸미어 만든 짚신.
- 세코짚신 - 발을 편하게 하기 위해 앞의 양편에 약간씩 총을 터서 코를 낸 짚신.
- 석새짚신 - 총이 매우 성글고 굵은 짚신.
- 피초혜(皮草鞋) - 가죽을 대어 삼은 짚신.
- 미투리 - 날을 여섯 개로 하여 삼, 왕골, 면사 등을 이용하여 짚신처럼 삼은 신.
- 지혜(紙鞋) - 종이를 꼬아 삼은 미투리.
- 나막신 - 나무를 ㅠ자 모양으로 깎거나 파서 만든 신으로, 우천시 신었다. 격자, 삽자, 극자(極子), 목극(木極)[38], 목리(木履)[39]라고도 한다.
- 피결신 - 피나무 껍질로 삼은 신.
- 갖신 - 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뜻한다. 장화처럼 목이 긴 신발과 짧은 신발이 있다.
- 꽃신 - 여성들이 주로 신었다. 이름대로 아름답고 화려한 장식이 되어 있다.
- 당혜(唐鞋) - 말이나 소가죽에 비단을 감싸고 신코와 뒤축에 눈을 새겨붙여 신울을 마름질한 뒤 안쪽에 백마피를 대어 둘레를 친 다음 신울과 밑창을 꿰어 신 골을 넣고 형태를 잡아가며 만들었다. 태사(太史), 완자(卍)[40], 당초문을 수놓거나 무늬가 있었고, 신울과 눈의 배색은 다양했다.
- 운혜(雲鞋) - 앞코가 제비부리 모양이라고 하여 제비부리신이라고도 불렀다. 바닥에 가죽을 대어 징을 박고 겉은 화려한 비단으로, 안은 융을 대었으며 신코에는 앞 머구리를 대어 죽엽을 새겨 붙였으며, 뒤꿈치에는 뒷 머루기를 대고 굼벵이를 틀에 끼워 붙였다. 조선 여인들의 가장 아름다운 신이었다. 신울 윗변과 아랫변에 앞 머구리와 같은 색의 비단을 둘렀다. 붉은 바탕에 청문을 놓은 것을 홍록댕기라 하였다. 혼례 시 어염집 여인들도 신을 수 있었다.
- 태사혜
- 적석/ 청석 - 예장( 면류관, 곤복, 적의 착용)시 왕과 왕비가 신던 신발. 왕은 적석, 왕비는 청석을 신었다.
- 건혜(乾鞋) - 우리말로 마른신이다. 기름으로 겯지 않은 가죽신을 뜻한다. 마른 땅에서만 신는 신도 이렇게 칭한다.
- 진신: 바닥에 징을 박았기 때문에 징신이라고도 한다. 유혜(油鞋)라고도 한다. 진날에 신었으며, 물이 스며들지 못하게 기름에 결고 바닥에는 둥글납작한 징을 박았다.
- 유혜(鍮鞋) - 놋쇠로 만든 신으로, 놋신이라고도 한다.
- 기혜(妓鞋) - 기생이 주로 신던, 검은 가죽이나 비단으로 만든 외줄무늬 코의 외코신. 급이 높은 기생은 당연히 화려한 당혜나 운혜를 신었다.
- 계혜 - 볼이 넓은 어염집 여인용 신발.
- 조락신 - 조라기(삼 껍질 부스러기)로 만든 신.
- 궁혜(宮鞋) - 궁중 여인들이 신던 신. 왼궁혜[41]와 반궁혜[42]가 있다. 청옥당혜나 홍옥당혜를 신었다.
- 다로기 - 가죽의 털이 안으로 가게 하여 만든 방한용 긴 버선. 신발 대용으로도 신었다.
- 노파리 - 융단으로 만든 방한용 신. 일반인은 천 사이에 솜을 넣었다.
- 목화(木靴) - 나무나 가죽으로 바닥을 만들고 까맣거나 흰 사슴 가죽으로 목을 만들어 장화와 비슷한 형태를 띄었다. 관복이나 혼례시 신었다. 흔히 관리들이 신는 신발이 바로 흑목화. 물론 백목화도 있다.
- 설피(雪皮) - 살피라고도 한다. 눈이 많이 오는 경우에 신 아래에 덧신어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한다. 설명
- 흑혜(黑鞋) - 흑피혜라도고 한다. 모양은 태사혜와 같지만 태사문이 없다. 검은 가죽으로 신울을 대고 신코 중앙에 붉거나 흰 선을 대었다. 남자용은 신코가 넓고 뒷축이 높은데 반해 여자용은 신코가 뾰족하고 높다.
- 투혜(套鞋) - 방한, 방습을 위한 덧신.
[1]
붕어배래와 양장식 저고리가 추가되며 전체적으로 포대자루가 된다.
[2]
조선인 바지 한 벌 만들 옷감으로 명나라 바지 두 벌을 만든다는 비판이 있었다.
[3]
활동적인 활동을 할 때 속에 입은 옷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길(섶과 무 사이에 있는 넓고 긴 폭.) 아래에 덧댄 천.
[4]
쌍고름을
기모노에서 오비를 묶는 방식 중 하나인 '분코무스비(文庫結び/서고매듭)'나 '쵸우무스비(蝶結び/나비매듭)'와 혼동하나, 한복 고름과는 분명히 다르다. 오비는 묶는 방법이 어려워 관련 직업과 자격증이 따로 있는데 반해 한복 고름은 묶는 법이 오비에 비하면 훨씬 간단하다. 더군다나 대대의 경우, 실물을 보면 묶기 편하게 가느다란 끈이 같이 있다. 이 얇은 끈으로 먼저 묶은 뒤 대대를 보기좋게 묶어 늘어뜨리는 등의 장식성을 더하는 것. 대대는 의복에 따라 허리에서 한 번 묶은 뒤 아래쪽에서 느슨하게 한 번 묶거나 쌍고름을 매는 등의 차이가 있으며, 특별히 매듭법이 정해져 있지도 않다. 쌍고름은 기본적인 외고름에서 그냥 빼내는 고름도 고를 만들면 된다. 리본 묶을 때에도 많이 애용되는 방식이다. 대대를 묶는 법은 딱히 정해지지 않았다. 이는 다른 허리띠도 마찬가지다. 조선 이전의 벽화 등을 보면, 매듭짓는 위치도, 방식도 모두 자유롭게 나타난다. 자국 전통 문화에 대한 무지를
왜색으로 치부해서는 안되는 노릇이니 알아두자. 애초에 오비는 굉장히 폭이 넓고 길었다. 일상적으로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어 유카타에 어울린다는 나고야오비가 폭 34cm, 길이 356cm 이상이었으며, 한하바오비는 폭 15cm에 길이가 450cm에 육박했다.(묶는 법이 간편해 여행할 때에도 큰 불편함이 없었던 '츠쿠리오비'도 있긴 하지만, 말 그대로 활동성이 필요할 때에 사용했다.) 오비 위에 '오비다메, 오비지메, 오비아게'라는 장식끈을 매고 이를 고정하는 장신구인 오비도메를 착용하기도 했다. 이런 마당에 오비와 고름의 매듭법이 같을 수가 없다. 기모노의 오비를 매는 법은
여기에 잘 설명되어 있다.
[5]
조선 초에는 다양한 색의 단령을 입었다. 그러다 녹색과 홍색으로 좁혀졌고, 조선 중기에 이르면 홍색으로 굳어졌다. 임진왜란 때 들어온 명나라 관리들이 관료와 왕의 옷이 같다고 지적하면서 흑색 단령을 입었으나 흑단령이 지나치게 사치스럽다 하여 다시 홍단령으로 바뀌었는데, 왕의 복장과 색이 같다는 지적이 마음에 걸렸던지 짙은 홍색을 입지 않기로 하면서 담홍색으로 통일된다.
[6]
빨간색이라고 완전히 똑같은 색깔이 아니다. 임금용 집무복의 색은
다홍색이며 당상관용 집무복의 색은 노란색이 0.0000000001%도 들어가있지 않은 순적색이다.
[7]
다만 이미지와는 다르게, 현존하는 내시 초상화인 김새신과 임우의 초상화를 보면 내시들 역시 당상관 문관들이 입는 것과 같은 색과 흉배를 단 단령을 입었다. 즉, 사극에서의 고증 오류라고 볼 수 있다.
참고
[8]
당상관은 홍색 계열을 입는 경우가 많았고, 조선 말기인
고종 때 들어 간소화를 위해 예복/직무용 구분 없이 검은색으로 통일되었다.
[9]
심의와 마찬가지로 유래를 따라
한푸에도 해당된다.
[10]
사대부 부인들이 예복으로 입었을 경우에는 남편의 것과 같은 흉배를 수놓거나 달았을것으로 추정된다.
[11]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두루마기처럼 생긴 옅은 옥색과 노란색 옷이 장삼이다. 단령같이 생긴 분홍색 옷은 단삼.
[12]
평민층의 원삼은 왕족이나 사대부의 것들 보다 길이가 짧았고, 색동길이의 면적이 컸다.
[13]
비빈(妃嬪)은 후궁을 뜻한다. 명칭은 같은 빈이라 해도 무품이며, 왕의 며느리이자 세자의 정실로서 차기 왕비인 세자빈은 가장 높아봤자 정1품인 왕의 후궁보다도 높다.
[14]
공주, 옹주
[15]
위의 사진은 속치마와 개량바지, 허리띠(가슴가리개) 등 전통속옷과 거리가 먼 부분이 있으니 유념해서 봐야 한다.
[16]
등거리적삼이랑 잠방이를 추가로 입기도 했다.
[17]
가슴이 크면 무식하다고 여겼다. 추가로
주걱턱은 심성이 착하고 입술을 적시면 욕구불만이며, 양 미간이 좁으면 색녀일 수 있고, 목이 두꺼우면 처녀가 아니며 입술이 자색이면 건강하지 못해 자식을 낳는 데에 부적합하다고 여겼다. 이러한 말도 안되는 조건은 조선시대 궁중에서 왕비나 세자빈 간택할 때 뿐만 아니라 민간에도 퍼져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키가 크지 않고 머리선(이마와 머리카락 사이의 선)이 둥근 모양이며, 쌍꺼풀이 없고 눈꼬리가 처진 눈에 끝이 뾰족하지 않은 둥근 코와 얇은 입술, 길지 않은 목, 작은 손과 발, 큰 엉덩이, 희고 고운 피부라는 조건까지 붙었다. 앵무새 피를 떨어뜨려 처녀성을 판별하기도 했다.
[18]
해당 사진은 속옷 순서를 바꾸어 가슴가리개를 맨 위에 입은 것으로, 원래 가슴가리개는 다리속곳과 마찬가지로 맨 아래에 입는 속옷이다.
[19]
현대의 A라인은 사다리꼴로 재단한다.
[20]
전통 심지
[21]
대나무에 창호지를 감싸서 덧댄 유물도 있다.
[22]
《寓圃笔记》:"发裙之制,以马尾编成,系于衬衣之内。体肥者一裙,瘦削者或二三,使外衣之张,俨若一伞。"
《菽园杂记》::“马尾裙始于朝鲜国,流入京师……于是无贵无贱,服者日盛。至成化末年,朝臣多服之者矣。阁老万公安冬夏不脱……。大臣不服者惟黎吏侍淳一人而已。此服妖也,弘治初始有禁例。” [23] 국어사전에는 말총으로 만든 바지라고 서술되지만 사료에는 말총을 넣어 만든 속치마라 나온다. 애초에 裙은 치마 군이다. [24] 고구려도 이러했다는 기록이 있다 [25] 국립고궁박물관의 자료나 '한복만들기-속옷편(안애영, 심해진 공저/미진사)', 여러 복식사 서적을 보면 무지기 위에 대슘치마를 입는다고 서술되어 있다. [26]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편찬한 '왕실문화도감-조선왕실복식'을 보면 삽화와 함께 예복을 갖춰입는 순서를 알 수 있다.(다리속곳부터 나타나지는 않고, 가슴가리개와 속곳을 착용한 단계부터 나온다.) 온라인 pdf로는 왕의 복식 일부만 볼 수 있다. 박물관 # [27] 변소에 갈 때 상당히 불편했을 것 같지만, 폭이 넓기 때문에 옷을 입은 채로 옷자락만 걷어서 볼일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개당고인 경우 가랑이가 트여있어 큰 문제가 없다. [28] 물론 반쯤은 농담. 겹쳐입은 속옷 수만 보더라도... [29] 서민은 스무 명 이상 모여 술을 마시지 못했으며, 요와 이불은 면포만을 사용하고 능금단자를 쓸 수 없었다. 결혼식조차 옷과 장식은 집에 있는 것을 사용하고 사리능단을 절대 쓸 수 없게 되어 있었다.(그래서 대대로 물려주거나 마을 단위로 한두 벌 장만해놓고 빌려서 사용했다.) 의복 관련해서는 형태, 재료, 종류 뿐만 아니라 허리띠, 머리 장식, 선, 단, 직물의 승수까지도 규제 대상이었다. 태조 3년에는 양부의 관원 외에는 사라능기로 된 의복을 입을 수 없고, 서인, 공상천례는 직품이 있더라도 은과 명주, 사피를 사용할 수 없는데 혼인할 때에도 직품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세종 11년에는 은 허리띠를 할 수 없는 사람은 혼인할 때에도 시관(時散)의 직품에 따라 각대와 실띠를 한다는 규정이 추가되었으며, 대소 부녀를 수종하는 여종은 말군을 입지 못하고 입모도 모시만 허용되며, 모첨의 길이도 주부의 것보다 절반이 되도록 했다. 이외에도 수많은 금제가 있다. 규제가 정말 많다. 참조 [30] 이전 시대에도 사치 금지법이 존재했다. [31] 의녀 포함인 규정도 있지만 그 의녀들이 기생 노릇을 하기도 했던 것을 생각하면…. [32] 충청도 무속에서 쓰는 무구. 종이를 오려 무속신이나 부적, 진법 등을 나타낸 것으로 설경(設經)이라고도 한다. [33] 어린 아이의 작은 이불. 덮고 깔거나 업을 때 썼다. 한자로 강보(襁褓)라 한다. 흔히들 말하는 '강보에 싸인 아기'에서 아기를 감싸는 강보가 바로 포대기다. [34] 자주색에 금은 장식이 되어 있다는 것 외에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으나, 오른쪽 그림의 맨 왼쪽에 있는 인물이 쓴 모자를 그 색깔로 보아 소골이라 추정한다. [35] 실제로 중국 고분 벽화에서 안악 3호분의 주인공이 쓴 관모와 거의 유사한 관모가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36] 다만 효자황후 마씨가 하사한 것은 칠휘이봉관(七翬二鳳冠)으로 주취칠적관과 달리 양쪽에 박빈(博鬢)이 달려있는게 큰 차이이다. 차이가 생긴 이유는 효자황후 마씨가 하사할 적에는 명나라도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국가였기때문에 그만큼 관복제도의 체계가 덜 잡혀있었기 때문이었고, 1403년 이후 주취칠적관이 하사될 때부터는 관복과 관제가 더 체계적으로 정비되면서 조선 또한 명나라로부터 기존과는 다른 대례복을 하사받게 된 것. [37] 병자호란 이후 명나라가 망하고 칠적관을 만드는 장인이 없는데다 기술을 전수해줄 사람도 없는지라 인조이후부터는 우리가 아는 대수머리를 제작해서 쓰기 시작했다. [38] 굽이 있는 것 [39] 굽이 없는 것 [40]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절대로 하켄크로이츠(卐)가 아니다!! [41] 솜을 두둑히 두어 버선과 같이 만든 신으로, 울타리가 높다. 노인용이다. [42] 앞코가 왼궁혜의 반이며 볼이 좁고 울타리가 낮아 맵시 있다.
《菽园杂记》::“马尾裙始于朝鲜国,流入京师……于是无贵无贱,服者日盛。至成化末年,朝臣多服之者矣。阁老万公安冬夏不脱……。大臣不服者惟黎吏侍淳一人而已。此服妖也,弘治初始有禁例。” [23] 국어사전에는 말총으로 만든 바지라고 서술되지만 사료에는 말총을 넣어 만든 속치마라 나온다. 애초에 裙은 치마 군이다. [24] 고구려도 이러했다는 기록이 있다 [25] 국립고궁박물관의 자료나 '한복만들기-속옷편(안애영, 심해진 공저/미진사)', 여러 복식사 서적을 보면 무지기 위에 대슘치마를 입는다고 서술되어 있다. [26]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편찬한 '왕실문화도감-조선왕실복식'을 보면 삽화와 함께 예복을 갖춰입는 순서를 알 수 있다.(다리속곳부터 나타나지는 않고, 가슴가리개와 속곳을 착용한 단계부터 나온다.) 온라인 pdf로는 왕의 복식 일부만 볼 수 있다. 박물관 # [27] 변소에 갈 때 상당히 불편했을 것 같지만, 폭이 넓기 때문에 옷을 입은 채로 옷자락만 걷어서 볼일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개당고인 경우 가랑이가 트여있어 큰 문제가 없다. [28] 물론 반쯤은 농담. 겹쳐입은 속옷 수만 보더라도... [29] 서민은 스무 명 이상 모여 술을 마시지 못했으며, 요와 이불은 면포만을 사용하고 능금단자를 쓸 수 없었다. 결혼식조차 옷과 장식은 집에 있는 것을 사용하고 사리능단을 절대 쓸 수 없게 되어 있었다.(그래서 대대로 물려주거나 마을 단위로 한두 벌 장만해놓고 빌려서 사용했다.) 의복 관련해서는 형태, 재료, 종류 뿐만 아니라 허리띠, 머리 장식, 선, 단, 직물의 승수까지도 규제 대상이었다. 태조 3년에는 양부의 관원 외에는 사라능기로 된 의복을 입을 수 없고, 서인, 공상천례는 직품이 있더라도 은과 명주, 사피를 사용할 수 없는데 혼인할 때에도 직품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세종 11년에는 은 허리띠를 할 수 없는 사람은 혼인할 때에도 시관(時散)의 직품에 따라 각대와 실띠를 한다는 규정이 추가되었으며, 대소 부녀를 수종하는 여종은 말군을 입지 못하고 입모도 모시만 허용되며, 모첨의 길이도 주부의 것보다 절반이 되도록 했다. 이외에도 수많은 금제가 있다. 규제가 정말 많다. 참조 [30] 이전 시대에도 사치 금지법이 존재했다. [31] 의녀 포함인 규정도 있지만 그 의녀들이 기생 노릇을 하기도 했던 것을 생각하면…. [32] 충청도 무속에서 쓰는 무구. 종이를 오려 무속신이나 부적, 진법 등을 나타낸 것으로 설경(設經)이라고도 한다. [33] 어린 아이의 작은 이불. 덮고 깔거나 업을 때 썼다. 한자로 강보(襁褓)라 한다. 흔히들 말하는 '강보에 싸인 아기'에서 아기를 감싸는 강보가 바로 포대기다. [34] 자주색에 금은 장식이 되어 있다는 것 외에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으나, 오른쪽 그림의 맨 왼쪽에 있는 인물이 쓴 모자를 그 색깔로 보아 소골이라 추정한다. [35] 실제로 중국 고분 벽화에서 안악 3호분의 주인공이 쓴 관모와 거의 유사한 관모가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36] 다만 효자황후 마씨가 하사한 것은 칠휘이봉관(七翬二鳳冠)으로 주취칠적관과 달리 양쪽에 박빈(博鬢)이 달려있는게 큰 차이이다. 차이가 생긴 이유는 효자황후 마씨가 하사할 적에는 명나라도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국가였기때문에 그만큼 관복제도의 체계가 덜 잡혀있었기 때문이었고, 1403년 이후 주취칠적관이 하사될 때부터는 관복과 관제가 더 체계적으로 정비되면서 조선 또한 명나라로부터 기존과는 다른 대례복을 하사받게 된 것. [37] 병자호란 이후 명나라가 망하고 칠적관을 만드는 장인이 없는데다 기술을 전수해줄 사람도 없는지라 인조이후부터는 우리가 아는 대수머리를 제작해서 쓰기 시작했다. [38] 굽이 있는 것 [39] 굽이 없는 것 [40]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절대로 하켄크로이츠(卐)가 아니다!! [41] 솜을 두둑히 두어 버선과 같이 만든 신으로, 울타리가 높다. 노인용이다. [42] 앞코가 왼궁혜의 반이며 볼이 좁고 울타리가 낮아 맵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