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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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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ecd21>
李嚴
이엄 | Li Yan
작위 <colbgcolor=#fff,#000>도향후(都鄉侯)
최종직위 표기장군(驃騎將軍) 겸 가절(假節)
본관 (李)
(嚴)→평(平)[1]
정방(正方)
생몰연도 ?년 ~ 234년
고향 형주(荊州) 남양군(南陽郡)
사망지 익주(益州) 자동군(梓潼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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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 유표)
남양군(南陽郡)의 관리 →
자귀현(秭歸縣)의 관리[2]
후한( 유장) 성도현 현령(成都縣令)→호군(護軍)
촉한,( 유비 유선), 비장군(裨將軍)→건위태수(犍為太守)겸 흥업장군(興業將軍)→겸 보한장군(輔漢將軍)→상서령(尚書令)→중도호(中都護)[3]→겸 가절(假節), 광록훈(光祿勳)→겸 독영안사(督永安事)→전장군(前將軍)[4]겸 가절(假節)→ 표기장군(驃騎將軍)겸 가절(假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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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초기2.2. 탁고2.3. 탄핵2.4. 이엄의 처벌
3. 평가
3.1. 능력3.2. 이엄의 파벌 문제
3.2.1. 이엄은 익주 세력인가3.2.2. 촉 내에 파벌이 있었는가3.2.3. 왜 이런 논의가 벌어지는가
4. 삼국지연의5. 기타6. 미디어 믹스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촉한의 인물이며 는 정방(正方)으로 형주 남양군 사람이다. 230년에 이름을 이평(李平)으로 개명했다.

2. 생애

2.1. 초기

젊었을 적에 남양군(南陽郡)의 관리가 되었고, 재주가 뛰어나 칭찬받았다. 유표가 여러 군현의 장을 맡도록 보냈다. 이엄은 자귀현(秭歸縣)을 다스리고 있다가, 조조가 형주로 들어오자 촉 땅으로 달아났다. 유장 성도 현령으로 임명했으며, 또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213년에 호군(護軍)으로 임명하고 면죽에서 유비를 막기 위해 보냈는데, 오히려 군사들을 이끌고 투항했다.[5] 유비는 이엄을 비장군(裨將軍)으로 임명했고, 성도를 평정한 뒤에는 건위 태수(犍為太守), 흥업장군(興業將軍)를 맡겼다.

218년, 한중 공방전 때에 도적 마진 고승 등이 무리 수만을 모아 처에서 비롯하여 자중현으로 진격했다. 모든 정규군이 한중으로 가 있었으므로 병사를 더 징발할 수 없었는데, 이때 이엄은 그 군의 군사 5천만을 이끌고 적을 토벌하고, 그 우두머리들을 베었다. 흩어진 나머지 무리들은 민적[6]으로 모두 돌아왔다.

같은 때에 고정이 이끄는 월수의 만족이 신도현을 포위했는데, 이엄이 기병을 이끌고 달려가 도왔고 이에 적은 모두 달아났다. 이에 건위군을 다스리는 것은 같았으나 보한장군(輔漢將軍)을 더했다.

219년 여름, 유봉, 맹달과 함께 상용에서 신탐을 공격해 항복을 받아냈다.

2.2. 탁고

222년 유비가 이엄을 불러 상서령(尚書令)으로 임명했다. 다음해에 제갈량과 함께 탁고의 유조를 받았는데, 유비는 제갈량에게 황제가 돼도 좋다고 하면서도, 이엄에겐 중도호(中都護)란 군직을 새로이 만들어 주고, 안팎의 군사들을 통솔케 해 군권을 물려주었다.

곧이어 유선이 즉위하자 가절(假節), 광록훈(光祿勳)을 더하여 도향후(都鄉侯)로 봉하고 독영안사(督永安事)로 삼았다.

226년에 전장군으로 전임되었다. 이때가 제갈량이 처음 군을 이끌면서 남정하던 때였으니, 전임하면서 제갈량에게 군권을 넘긴 듯하다.[7]

227년, 제1차 북벌이 일어나자 이엄은 영안에서 강주로 돌아왔고, 영안에는 호군 진도를 남겨 모두 이엄의 통솔 아래에 두었다. 파군에 큰 성을 쌓았는데 매우 좋게 전한다. 치수도 같이 벌이고자 했으나 제갈량이 허락하지 않았다.
後都護李嚴更城大城,周回十六里。欲穿城後山,自汶江通水入巴江,使城爲州。求以五郡置巴州。丞相諸葛亮不許。亮將北征,召嚴漢中。故穿山不逮。然造蒼龍、白虎門。別郡縣倉皆有城。嚴子豐代爲都督。
이후에 도호(都護) 이엄이 다시 큰 성을 건설했는데 둘레가 16리였다. 성 뒤의 산을 뚫어 문강(汶江)으로부터 물길을 파강(巴江)으로 통하게 하여 그 성이 하주(河洲)위에 건립되도록 하고자 했다. 또한 5개군으로 파주(巴州)를 설치하고자 했는데 승상 제갈량이 허락하지 않았다. 제갈량이 장차 북벌하던 때에 이엄을 불러 한중에 주둔시켰기에 산을 뚫는 일은 끝내 하지 못하게 됐다. 그러나 창룡문(蒼龍門)과 백호문(白虎門)은 이미 만들었다. 성중의 창고 속 식량은 다른 군현보다 많았고 모두 밖에 성을 쌓아 보호하고 있었다.
『화양국지』

왕충은 강주에서 이엄 아래에 있었는데, 미움을 받았으므로 처벌될 것이 두려워 위나라로 투항했다.

맹달을 회유할 때 제갈량과 같이했는데, 이엄은 맹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저는 제갈공명과 함께 유비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책임이 막중한 것이 걱정입니다. 좋은 동반자를 얻고 싶습니다.
진수, 『 정사 삼국지』,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

제갈량 또한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을 처리하는 것이 마치 물흐르듯하여, 해야할 일과 버려야 할 일을 결정할 때 주저함이 없는 것이 정방의 성격입니다.
진수, 『 정사 삼국지』,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

그리고 위나라에서 조진이 공세를 펼쳤을 때는, 한중으로 이동하여 이를 격퇴하는 역을 맡기도 하였다.

이후 230년, 대장군과 동급인 표기장군으로 승진하여 황제 유선과 승상 제갈량을 제외하면 촉한 내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졌고, 아들 이풍은 강주 도독이 되어 강주의 군대를 통솔하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제갈량은 북벌을 앞두고 이평[8]에게 중도호의 신분으로 승상부의 일을 맡도록 하였고, 동시에 북벌 부대에 물자를 보급해주는 임무를 부여했다.

하지만 이 사이에 이평은 , 파동, 파서, 탕거, 부릉, 다섯 개 군을 따로 떼어 파주라는 이름의 주를 창설하고[9] 자신을 그 자사로 삼아달라는 요구를 하거나 제갈량에게 구석을 받고 왕(王)이 되라고 권하는가 하면[10] 제갈량이 이엄에게 한중의 사무를 맡기려하자 (자신과 같은 표기장군이었던) 사마의 등은 관부를 설치하여 관리를 임명하고 있다고 하며 은근슬쩍 부(府)의 설치를 요구했다.[11] 어쨌거나 그럼에도 제갈량은 이엄의 요구를 자신이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서 들어주면서 그를 다독였다. 실질적으로 제갈량이 견제 못할 권신이었으면 이엄은 제갈량이 진작에 처리했겠지만 이엄이 이런 소리를 하는데도 제갈량이 참고 다독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엄의 권위나 권력도 만만치 않았음을 시사한다. 제갈량이 이엄을 처리하는 것도 이엄의 중대한 실책+그로 인한 전 조정의 신하들을 다 동원해야만 가능했다.

2.3. 탄핵

231년, 4차 북벌의 노성 전투에서 사마의를 격파하고 후방을 기습한 장합까지 물리친 제갈량은 높아진 기세를 이용해 위군을 무찌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엄이 자연재해로 물자수급 및 수송에 차질이 빚어지자 이를 이유로 물자를 보낼 수 없다고 통보했고, 적진에서 물자가 떨어질 것을 걱정한 제갈량은 부대를 물려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제갈량은 그야말로 눈물을 머금으며 퇴각하게 된다. 그리고 사마의는 퇴각하는 촉군의 뒤를 치려다 장합을 잃게 된다.

제갈량이 후퇴했다는 소식을 듣자 이엄은 거짓으로 놀라며 "군량미는 아직 충분하거늘, 어찌하여 돌아옵니까?"라며 자기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책임을 감추려고 했다. 또한 은폐를 위해 부하 잠술을 처형하려 했으며 유선에게는 '우리 군대가 거짓으로 퇴각한 것은 적을 유인하여 함께 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실제 여름부터 가을까지 계속 장마비가 쏟아졌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자연재해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엄은 자신의 이익을 채우기에 바빴다.[12]

이때 제갈량은 유선에게 이엄에 대한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제갈량이 이엄에게 느낀 배신감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제갈량이 올린 상소문을 쉽게 풀이하자면, "한중지키라고 하니까 군 떼서 파주자사를 시켜달라고 떼쓰지 않나, 전쟁나니까 사마의처럼 개부시켜 달라고 하질 않나" 즉, 기회를 타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했다는 것이다.
선제께서 붕어하신 뒤로 (표기장군) 이평은 자기 집안만 생각하며 작은 은혜를 베풀기를 즐겨했고 자신의 명예와 안일만을 추구하였으며 나라의 일은 근심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북벌할때 그의 군사가 한중을 지켜주기를 바랐건만 그는 온갖 어려움을 들어 한중으로 오지 않고 외려 다섯 개 군을 차지하는 파주자사를 시켜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작년에 신이 서정할 때 이평에게 한중의 사무를 맡게 했으나 이평은 사마의 등은 관부를 설치하여 관리를 임명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평은 천성이 비열하여 신이 출정할 때마다 신을 다그쳐 이득을 보려 했습니다. 그리하여 신은 이평의 아들 풍이 강주를 주관하도록 천거했고 그를 후하게 대우하여 군무를 완수토록 했습니다. 이평이 한중에 온 날에 신이 모든 사무를 그에게 위임하자 상하 군신들이 모두 이평을 너무 우대한다고 질책했습니다.

바야흐로 큰 일의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지 않았고, 한실이 쇠미해진 형편에서 이평을 질책하기보다는 그를 칭찬하는 것이 차라리 나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이같이 신은 이평의 속셈이 다만 명예와 이득을 추구할 따름인 줄로 여겼사온데, 이평이 이처럼 본말을 전도할 줄은 진정 생각 밖이었습니다. 만약 이 일을 제때에 처리하지 않고 내버려둔다면 화를 빚어낼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신이 불민한 탓이오니 더 말씀을 올린다면 신의 잘못만 더 많아질 것입니다.
이평은 대신이 되어 과분한 총애를 받으면서도 충성을 다하여 보답할 생각을 하지 않고 근거도 없는 낭설을 지어내고 방자하게 굴었으며 본인에게 불리한 일은 하지 않고 상하를 미망에 빠지게 했습니다. 재판을 함에 있어 법조를 버리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간사한 일을 하도록 이끌었으며 감정은 저열하고 뜻은 광망해 마치 천지가 없는 듯 했습니다. 스스로가 계획했던 간사한 일이 드러나자 의심이 마침내 생겨 대군이 장차 올 것이라는 것을 듣고서 병을 핑계대고 저현과 장현으로 돌아갔으며 군대가 다시 저현에 당도하니 돌연 강양으로 돌아가려 하였는데 이평의 참군인 호충이 간언하자 마침내 그만 두었습니다. 지금 찬탈한 도적들이 소멸되지 않았고 사직에 어려움이 많은데 국가의 대사는 오직 모두가 화합해야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포용하여 국가의 대사를 망쳐서는 안 됩니다.(중략)...등과 더불어 의논하였는데 막바로 이평을 해임하고 그의 관록, 절전(節傳,한조 관리의 신분증), 인수, 부책(符策, 군주의 관리 임명 조서)을 없애며 작위와 봉지를 박탈해야 합니다."

이 상소문을 통해 제갈량은 드물게 분노를 폭발시켰다. 이때 이루어진 4차 북벌은 상규에서 곽회와 비요, 노성에서 사마의와 장합을 격파하는 등, 전술적으로 촉군의 연전연승이었으며 이로 인해 기근으로 고생하던 옹주 현지의 인심이 크게 뒤흔들리는 등 촉의 우세가 점쳐지는 상황이었기에, 어이없는 이유로 퇴각한 데 대한 분노가 그만큼 컸다. 여기에, 제갈량이 북벌하기에 앞서 이엄으로 하여금 군량 수송임무를 맡기자, 한중의 일을 총괄하게 하였는데 사실상 제갈량이 한중에 있던 자신의 부를 이엄에게 양도한다는 뜻과 같았다.

이것은 제갈량이 자신의 권력까지 포기한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는 일이어서, 당시 제갈량 휘하의 막료들은 모두 한결같이 이엄에게 너무 후하게 대한다며 이를 반대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은 굳이 이엄에게 후방을 맡겼다. 자신과 함께 선제 유비의 탁고유신이었으니 믿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때 제갈량이 받은 충격은 꽤 컸으며, 가장 아끼는 막료들인 승상장사 장완과 시중 동윤에게 편지를 써서 이러한 심기를 간접적으로 드러내 보였다.
진효기가 이전에 오나라로 갔을 때, 나에게 정방(이엄)은 뱃속에 비늘 갑옷이 있어 마을 사람들 모두 접근할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비늘 갑옷이 있는 사람은 단지 그것에 부딪치지 않으면 될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의도치 않았음에도 다시 소진과 장의처럼 궤변을 늘어놓는 일이 또 돌연 뜻하지 않게 나타났으니, 효기에게 이것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엄은 자신의 실책에 대해 감추기에 급급했지만 이후에 제갈량이 이엄과 주고받은 모든 편지가 공개되자, 이엄이 자신의 책임을 감추기 위하여 거짓 보고를 한 것이 드러나게 되었고, 결국 유선 앞에서 엎드려 사죄할 수밖에 없었다. 제갈량을 비롯한 촉한의 신하들은 전부 이엄의 막장짓에 분개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제갈량 주도하에 촉한의 신하들 대부분이 지위고하, 출신을 가리지 않고 단체로 군부의 실력자이기도 한 이엄을 연명으로 탄핵하게 된다.[13]

이에 결국 후주 유선은 이엄을 폐서인시키며 서인으로 강등했고 유폐를 하나 산골짜기나 남중에 있는 지역이 아니라 쓰촨 분지에 있는 재동군에 보냈다. 이러한 유선의 관대한 처리에 대해 불구하고 본인도 잘못했다고 느낀 게 있었는지 이후 이엄은 반성하면서 제갈량이 다시 자신을 쓸 날을 기다렸다. 그러나 제갈량은 이엄을 다시 부르기 전에 오장원에서 숨을 거두었고 이러한 소식을 들은 이엄은 결국 분노하다가 죽음을 맞이하였다.

화양국지》에 따르면 본시, 요립과 이엄은 제갈량이 폐하였는데, 세월이 지나는 것을 즐거워하고 있었으니, 이는 제갈량이 복권시켜줄 것으로 늘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단순히 자신감 문제만은 아니고 촉의 인재 부족이 심각해서 그 양의조차 재기용할 정도로 인재를 끌어다 쓴 것이 제갈량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엄의 병크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 역시 제갈량이고, 그가 촉에서 지닌 권위를 생각해보면 일단 제갈량이 용서하겠다고 하면 복직에는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죽으면서 용서받을 기회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엄의 후사는 그의 아들 이풍이 이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엄이 잘리고 그의 아들 이풍이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아 그 역할을 계속하게 했다는 언급이 있지만, 실제 기록으로 보면 이풍은 강주도독으로 있다가 병권을 박탈당하고 종사중랑으로 임명되었다. 어쨌든 그동안 부여되었던 실질적인 권한을 빼앗긴 쪽에 가깝다. 이풍의 관직은 주제태수에까지 이르렀다.

2.4. 이엄의 처벌

이엄은 제갈량에게 황권을 모욕할 것을 권했고, 비상시국에 권력을 나눠달라며 태업을 했고, 제갈량의 승상부 사무를 빼앗았고, 국가사업인 북벌을 망치면서 제갈량을 음해하려고 했다. 이는 분명히 유비의 기대를 저버린 행동이고, 국가의 중신으로서의 자격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최소한 이엄은 황제에게 칼을 들이대지는 않았고, 죄가 있다 해도 죄와 벌에 대한 재판을 받아야 했으며, 선제의 유지를 받든 몸에 따르는 특별 대우는 여전하다. 판관 포청천에서 포청천이 늘 고생하는 게 선대 황제가 신변보증한 자들이 죄 저질렀을 때 그거 재판하는 거랑 비슷한 상황이다.

더군다나 이엄 사건의 경우, 현대식으로 풀어볼 때, 이엄이 저지른 그 동안의 죄는 심증/증인(제갈량)은 있지만, 그 증인의 성격상, 그것을 증거로 할 경우 오해를 받기 쉽고, 물증은 없었다. 물증이 드러난 게 231년 북벌의 일이고 그리고 그 증거가 다 밝혀지고 탄핵이 이루어질 때야 비로소 제갈량이 이엄의 그간 행각에 대한 증언을 한다. 현대 재판으로 봐도 이건 딱히 흠잡을 데 없는 재판이다.

양의와 위연도 이런 식의 정치싸움을 했지만 장완이 없었다면 수습도 미지수였을 것이다. 하지만 장완도 양의를 죽이지는 않았다. 삼국의 정쟁에서 정적이 살해당하지 않고 유배로 그친 나라는 촉이 유일하고, 권력다툼이 게재되지 않은 나라도 촉이 유일하다. 이건 촉이라는 나라의 특수성과 제갈량-장완의 품성이 결합된 운 좋은 예지만, 이엄의 아들 이풍이 계속 관리로 임용시킴으로써 제갈량은 이런 식으로 나라의 힘이 소모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한 것이다.

섭섭한 마음을 표현하면서도, 제갈량은 이엄을 완전히 제거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 아들 이풍에게 제갈량은 편지를 써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와 그대 부자가 마음을 합쳐 협력하여 한실을 보좌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알 뿐만 아니라 하늘도 다 알고 있는 일이네.

나는 표문을 올려 도호[14]가 한중을 주관하게 하고 동관(강주)를 자네에게 맡겼었네. 이것은 다른 사람과 상의하지 않고 한 일이요, 진심은 사람을 감동시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확보할 수 있다 하는데, 누가 이리도 중도에서 어그러질 줄 알았겠는가!

지난날 초나라 영윤[15]은 수차례나 파면되었으나 복직될 수 있었다 하는데, 여기서 올바른 도를 생각하면 복을 받고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네.

바라건데 도호를 잘 위로하여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치게 하시게. 지금 비록 관직에서 해임되어 직무와 권세와 가업이 원래보다 못하다 하나 노복들과 빈객들이 1백여 명이나 있고 자네가 중랑장 참군으로 승상부에서 일하고 있으니 동류들과 비기면 그래도 처지가 나은 셈이 아닌가.

만약 도호가 죄과를 반성하고, 한마음으로 나라에 보답하며, 자네가 공염(장완)과 서로 믿고 같이 일한다면 막혔던 길은 다시 트일 수 있고 잃었던 것도 다시 얻을 수 있을 것이네. 이상의 말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나의 정성스러운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니. 이제 다 쓴 서신을 앞에 놓고 긴 한숨을 지으며 눈물만 흘릴 뿐이네.

이풍은 좌천되었으나 재산을 몰수당하지는 않았고, 제갈량 직속으로 승상부에서 근무했다. 이때 제갈량이 이풍을 성도나 강주가 아니라 승상부에 둔 것은, 당시 제갈량이 한중에 사실상 상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풍이 한중에 비교적 가까운 재동에 있는 아비 이엄을 모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이엄은 끝내 복직되지 못하고, 제갈량이 숨진 이후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만다. 제갈량이 숨진 사실을 알고 제갈량의 후계자는 이런 기회를 주지 않을 것임을 헤아렸기 때문에 격분하여 결국 병들어 죽은 것이다.

3. 평가

3.1. 능력

유비 사후의 촉한의 명백한 중심인물 중 하나였고 상당히 오랜기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활약했지만, 말년이 좋지 않았던 인물. 당연히 이는 본인의 잘못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엄도 탁고대신이었던 만큼 제갈량도 이엄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이엄은 형식상으로는 제갈량과 동급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제갈량이 촉한의 권력을 모두 가지고 있음에도 단독으로 이엄을 파직시키거나, 형벌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런만큼 제갈량은 이엄을 탄핵할 때 당시 종군했던 거의 모든 무장, 문관들을 모아서 연명 상소를 냈다. 물론 그 중심이 된 것이 제갈량이라는 것은 틀림없지만 제갈량을 비롯한 많은 신하들이 연명하여 탄핵해서 물러나게 했으니 이엄을 탄핵한 조치의 의의는 그만큼 컸던 것.

그리고 이 조치를 되물릴 수 있는 정치력도 제갈량만이 가지고 있었다. 제갈량의 뒤를 이은 장완, 비의는 여러 모로 제갈량의 권위를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제갈량의 정책을 답습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제갈량이 생전에 직접 주도한 탄핵 조치를 되돌릴 수 있는 정치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느 정도 정책을 조정할 수는 있어도 제갈량은 촉한의 '모범'이 되는 인물이었으므로 제갈량의 정책을 정면으로 거스를 수는 없었다. 더욱이 이엄은 제갈량도 제어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비록 위험분자이기는 했지만 그는 뛰어난 인재였고 후에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였으니 강유의 북벌에 종군했으면 좋았겠지만, 강유가 북벌을 할 때면 이엄의 나이를 알 수 없지만 활동 연대를 봤을 때 이엄은 잘 해봐야 할아버지다. 어쨌든 실제로는 제갈량 사후 1년 뒤 죽었으니. 어쨌든 이엄은 제갈량의 4차 북벌까지 오나라 방면 방어나 후방 군량수송과 같은 중요 요직을 책임졌던 인물인 만큼, 능력은 상당했던 인재로 보아야 한다.

계한보신찬의 평가는 냉담하다. 이엄은 선주에게 유명을 받아 후세의 기강 정립에 참여했는데, 의견을 서술하지도 않았고, 협조하지도 않았다. 이단을 만들어 그 시대에서 쫓겨나게 되었으므로 임무나 공적도 없어졌다고 한다.

3.2. 이엄의 파벌 문제

이엄과 관련해서 가장 심하게 논쟁이 되는 것은, 제갈량의 유비 친위파와 이엄의 익주 호족파가 양대 파벌로 촉 내에 있었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드라마 삼국 등에서도 이 소재를 많이 다루고 있으며, 이엄은 매체에서 익주파의 중심 인물로 나온다.

3.2.1. 이엄은 익주 세력인가

출신 지역만으로 보면, 이엄은 본디 형주 사람이고 적벽대전을 계기로 익주에 들어선 것이라 정확하게 무슨 파벌로 구분 짓기도 애매하다. 그나마 친하게 지냈다는 비관은 형주사람으로 유장의 친인척으로 익주에 들어 온 거라서 익주 토박이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유비의 형주 시절 세력 못지 않게 외부 출신이였다.

다만 문제는, 당시 유장 진영 측에 속한 인원들을 살펴보면 익주 출신 인물이 생각 이상으로 없다. 촉서에 이름이 거론된 유언-유장 세력 내 이름 있는 장수들을 쭉 늘어놓고 살펴봐도, 법정, 맹달 등은 중앙인 사례 출신이고 유언과 사돈이자 유비의 장인이 된 오의는 연주 진류군 출신이다.

유비 입촉을 가장 결사반대한 황권과 왕루, 유비 입촉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하다 죽은 장송 정도가 익주 출신인데, 유비가 사망할 시점을 보면 장송은 유비와 내통하다 처형, 황권은 위에 투항, 왕루는 자살한지 오래된 시점이다. 심지어 그나마 익주 출신인 동화는 형주에 있다가 익주로 되돌아온 사례이다.

오히려 소위 익주 출신이면서 기록이 남은 인물들은 마충, 이회, 여개, 윤묵, 초주, 장억, 장익 등 유비 입촉 이후 유비-제갈량의 영향력 아래 발탁된 인물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따라서 애초에 익주 파벌이란 존재를 찾기에는 익주 세력 자체가 이미 유언-유장 시대부터 거의 없었거나 흡수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3.2.2. 촉 내에 파벌이 있었는가

촉한의 지역감정, 갈등 운운은 사서에서 구체적인 증거를 찾을 수가 없다. 통치 체제가 미비하던 유장 시절까지 익주가 분열되어 있었던 것은 맞지만 유비와 제갈량이 국가를 정비한 이후 반란은 있었을지언정 신하들이 파벌로 갈라져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파벌이 아예 없었다고 부정하는 것도 어려운 것이, 조조군 또한 파벌에 대한 기록은 딱히 없지만 조씨 친위 세력과 순욱, 곽가, 정욱으로 이어지는 영천 출신 세력의 파벌이 분명 존재했다. 파벌로 갈라져 있다는 기록이 없긴 하지만,[16] 원소군처럼 극단적인 경우가 아닌 이상에야 파벌에 대한 기록은 그리 찾기 어렵고 그 원소 세력조차 출신지로 파벌이 완전히 갈리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이엄이 반드시 그런 파벌을 이끌고 있다는 확실한 사료적 근거는 없다. 보통 사료에 그 정도 내용이 담기는 경우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3.2.3. 왜 이런 논의가 벌어지는가

이 이론은 유비가 숨을 거둘 무렵 제갈량과 함께 이엄에게 탁고가 내려왔고, 이엄 파벌론은 그게 왜 하필 이엄인지에 대한 의문이 나올 수밖에 없는 과정에서 발생한 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익주 세력이라고 할 정도의 규모로 익주 출신 중 정치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한 인물은 황권 이외에는 유비 시대에는 아예 전무했으므로, 적어도 이 파벌이 익주 파벌이라고 볼 수는 없다. 실제로 이엄의 파면 당시에도 이엄을 공격한 건 형주, 익주의 출신 성분에 따라 나뉘지는 않았다.

따라서 이엄을 익주파로 볼 수는 없지만, 유비 입촉 이전까지의 유장 구 관료파와 유비 친위파의 파벌이 어느 정도 존재했을 가능성 자체까지 배제하기는 어렵다. 동시에 그렇게 설명하는 편이 유비 세력에 대한 충성심을 그리 보이지 않던 이엄에게 왜 유비가 탁고를 내렸고, 그럼에도 이엄이 왜 이질적으로 움직였는지에 대한 해석이 어느 정도 가능하기도 하다.

즉 애초에 파벌의 실체 여부도 확실치 않아 결론을 내기 어려운 문제이고, 대신 상황적으로 탁고를 2명에게 내린 시점에서 뭔가 있긴 있었을 거란 관점에서 나온 각색 방식 중 하나인 만큼, 그럴 가능성도 있었겠다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갈 문제일 것이다.

4. 삼국지연의

연의에서는 무려 황충과 50합을 겨뤄서 무승부를 내는 용장으로 등장한다. 제갈량도 힘싸움으로 잡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계략으로 잡았을 정도.

이후 탁고대신으로서의 지위는 반영되지 않았으나, 제갈량이 북벌을 나가는 동안 유선과 대신들이 오나라의 통수를 걱정할 때 이엄이 육손을 막아낼 수 있으니 걱정 말라며 제갈량이 띄워준다.[17]

제갈량을 퇴각하도록 한 거짓말이 정사와는 다른데, 무려 오나라가 침공해온다는 내용이다.

5. 기타

6.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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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30년에 개명 [2] 자귀현을 다스렸다는 것으로 보아 현령(縣令)정도의 관리였을 가능성이 있다 [3] 새로이 만들어진 군직이며, 안팎의 군사들을 통솔할 수 있는 군권이 있다 [4] 이때부터 제갈량에게 군권을 넘긴 것으로 보인다 [5] 삼국지연의》에서는 황충과 호각으로 겨루다가 제갈량의 함정에 빠져 항복한다. [6] 民籍, 예전에, 호적을 달리 이르던 말. # [7] 같은 때에 조운이 중호군으로 임명되는데, 중호군과 중도호의 관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제갈량은 조운을 거쳐서 받은 것일 수도 있다. [8] 이 시점부터 이엄이 이평으로 개명했다. [9] 후에 이는 촉이 망하고 서진 때 촉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이루어졌긴 했다. '양주(梁州)'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10] 이에 제갈량은 '나(吾)와 족하는 서로 안 지 오래 되었는데, 어찌 서로 더는 이해하지 못하단 말이오! 족하는 신하의 길을 고집할 필요 없이 나라의 영광을 위해 마땅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안 된다고 나한테 가르치려 들고 있소. 나(吾)는 본래 동쪽의 낮은 선비로, 선제께서 틀리게 쓰셔서 이미 신하로서 높은 지위에 있고 많은 녹을 받고 있음에도 지금 적을 토벌하는 데 효력이 없어 자신을 알아주심에 보답하지 못했는데 제, 진(주나라를 도운 제후인 옛 제나라, 진나라)과 같이 귀하고 큰 자리에 앉는 것은 의가 아니오. 위를 토벌하여 조예를 처단해 황제께서 옛 도읍으로 돌아가시면 더불어 여러분(諸子) 모두가 높아지고(與諸子並升) 비록 십명(十命)이라도 받을 수 있데(雖十命可受) 하물며 아홉이랴(況於九邪)!'라고 말했다. 이는 북벌이 성공하면 참여한 제군 모두가 높아진다고 역설함과 동시에 십명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고로, 큰 공로로 받는 상에 대한 비유인 것이니 이엄에게 분명히 한실부흥의 의지를 보이고 왕위에 대한 거절을 위해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제갈량의 논지는 이미 시작할 때 다 나왔다. 어디 칭왕 및 구석이란 단어를 꺼내냐는 꾸짖음인 것이다. 십명을 논하는 것도 다른 신하 제군 모두가 더불어 높아져 십명(큰상)을 받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가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구석에 대한 무시 내지는 멸시에 가까운 것이다. 애당초 제갈량은 유비로부터 왕이 아니라 황제가 되어도 좋다고 유명을 받기까지 했고 그것을 거부하고 고굉지력을 다한 사람이다. 그걸 눈앞에서 보고 유비로부터 '내가 이 사람에게 이런 권한을 부여한 것을 기억해라'는 메시지를 받은 사람이 그 권한을 부여받은 사람더러 구석과 왕을 받으라고 논하는 것은 교묘한 말로 제갈량을 떠본 것이며, 아마도 제갈량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한 권모술수인 것으로 보인다. [11] 이릉대전 이후 유비는 탁고하면서 패잔병과 조운이 거느리고 있었던 후방 병력들을 아울러 이엄에게도 군권을 줬지만, 남만정벌 때 같은 공신인 조운을 중호군으로 임명하고 제갈량이 군권을 통수하게 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일 수 있다. 물론 제갈량 입장에서야 남정북벌은 선제 유비가 그에게 맡긴 국가의 대업이었기에 그가 군권을 통수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같은 탁고대신인데 그 군권에서 제갈량에게 밀리게 된 이엄 입장에서는 이런 욕구가 생길 만하다는 것이다. [12] 이와 같은 사실은 《 삼국지연의》에서 더 극대화되어 이엄의 수하인 구안이란 인물이 물자수송에 태만했다가 제갈량에게 곤장맞고 조위로 귀순해서 제갈량을 모함하는 가상의 장면의 빌미가 되었다. [13] 여기에 이엄을 탄핵한 신하들 중에 훗날 제갈량 사후에 제갈량이나 촉한에 대해 비난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사람인 유염, 위연, 양의가 여기에 포함되었고 이들도 역시 유봉, 팽양, 요립과 마찬가지로 정사 삼국지의 촉서에서 같은 열전에 분류되었다. 이는 이엄도 포함이다. [14] 이엄을 가리킨다. 중도호를 지낸 적이 있기 때문이다. [15] 춘추시대 투누오도를 의미. 영윤은 초나라의 재상격 관직이다. 투누오도는 3번 파면되고 복직되었으나 언제나 화를 내지 않고 후임에게 임무 인계를 했다고 한다. 공자가 충성스럽다고 칭찬했다. [16] 사실 기록이 없다고 하는것도 어불성설인게, 소위 말하는 청류파탁류파라는 용어가 파벌을 의미하는게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사실 '파벌'이라고 불리지만 않을 뿐, 조위에서도 영천 호족으로 일컬어지는 청류파들이 조위 황실을 져버리고 서진 황실에 충성함으로써 나라가 망한 것이였다. 내부적 요소로 망한 나라에 현실적으로 파벌이 없을 수는 없다. [17] 단, 이걸로 이엄과 육손이 동급이라고 단정할 순 없다. 이 평가는 유리한 위치를 가진, 수비하는 입장에서 말한 것이기 때문인데다, 전통적으로 오나라는 공성전이 약한 편이었다. 손권이 여러 번 합비에서 패배했던 것과 육항이 나헌에게 막혔던 것이 그 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