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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9 20:03:44

남성성/들

패권적 남성성에서 넘어옴
도서명 남성성/들(한)
Masculinities(영)
발행일 1995년(초)
2005년(재)
저자 래윈 코넬
(Raewyn W. Connell)[1]
출판사 Polity Press Ltd.
ISBN 9791155310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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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목차 및 주요 내용
2.1. 챕터별 내용 정리2.2. 남성성을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역사와 접근들2.3. 남성의 신체와 몸 실천2.4. 남성성의 분류
2.4.1. 패권적 남성성2.4.2. 종속적 남성성2.4.3. 공모적 남성성
2.4.3.1. 에페미니스트와의 대비
2.4.3.1.1. 관련 문서
2.4.4. 주변화된 남성성
2.5. 기업가적 남성성?2.6. 백래시 담론
3. 학계의 반응과 비판들4. 기타
4.1. 마스큘리즘에 대해4.2. 심리학과 분석 수준들4.3. 실증주의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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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성성(masculinity)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학술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사회학 문헌.

2003년 호주 사회학회가 선정한 "호주 사회학 10대 저서"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초판은 호주, 뉴질랜드, 영국, 미국에서 출간되었다가, 이후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스웨덴,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중국, 일본에서도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국내 번역본은 2010년에 이매진북스 출판사에서 안상욱 & 현민 번역가를 통하여 소개되었다. 주제가 젠더인 만큼 man, male, masculine 같은 단어들의 정확한 번역이 크게 중요하며, 이를 잘 살리기 위한 역자의 고민 역시 잘 드러나 있다.

저자 래윈 코넬(Raewyn W. Connell)은 1944년 1월 3일생의 호주 사회학자로, 시드니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며,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남성성을 분석하고 퀴어 담론에도 호의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 이 책을 저술한 뒤, 코넬은 60대의 나이에 성전환수술을 받고 트랜스여성으로서 살아가고 있으며, 이 책에도 퀴어 담론을 바탕으로 하는 남성성의 묘사가 짙게 배어 있다. 호주 사회학계에서는 학술적 영향력이 큰 연구자들에게 그의 이름을 따서 래윈 코넬 상을 수여하기로 제정하였다.

이 책이 출간된 배경은 소위 "남성성의 위기"(crisis of masculinity) 담론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끄는 동안, 이에 정면으로 반박하기 위하여 저자가 집필한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남성성 중에서도 유독 지배적인 위치를 갖는 패권적 남성성이 존재하며, 이들은 다양한 '위기' 국면에서도 끊임없이 재구성되면서 자신의 위치를 지켜 왔다" 고 주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페미니즘 호모포비아, 마스큘리즘에 대한 논의가 다수 포함됨에 따라, 이들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다른 연구자들도 참고할 만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 운동 관련된 책 중 하나이기 때문에 운동가들도 탐독하는 책 중의 하나지만, 기본적으로는 학술적 논의를 하기 위한 책이기 때문에 페미니즘 등의 서적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끓어오르는" 강렬한 명문장들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냥 저자가 생각하는 남성성에 대해서 차분한 어조로 설명하는 느낌. 사회학의 여러 담론들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상당한 진입장벽을 느낄 수도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신분석학을 활용한 비평까지는 어찌어찌 따라가더라도, 라캉철학을 건드리는 순간 독자의 멘탈은 이미...

2. 목차 및 주요 내용


총 3부의 구성에 후기가 덧붙어 있는 형태로, 1부와 3부는 추상적인 수준에서 젠더사회학적인 이론을 다룬다면, 2부는 면접법을 활용한 생애사연구[2] 및 사례연구를 다루고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연구들은 국립 호주 연구보조금위원회에 의해 연구비 지원을 받고 있었으나, 보수 정권이 지배중일 때 연방의회에 의해 "공적 자금을 낭비한 방만한 연구활동" 의 한 사례로 비판받은 바 있다고 한다(…).

이 책의 전체 내용을 세줄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2.1. 챕터별 내용 정리

각 챕터의 내용들을 각각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으며, 책에서 전반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몇 종류로 추려서 하단에 다시 챕터 구분 없이 소개할 것이다. 여기서는 남성성과 그 이론의 역사 및 학술적 접근방식, 남성의 신체와 남성성, 네 가지 남성성(패권/종속/공모/주변화), 신자유주의와 기업가적 남성성, 백래시 담론과 손익의 대차대조표라는 다섯 가지 주제를 우선 소개한다. 그리고 저자가 5장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페미니즘에 우호적이고 남성성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는 남성들의 생애사를 공모적 남성성과 간단히 대조해 보기로 하겠다.

참고로 아래의 내용은 독자에 따라서는 좀 많이 어려울 수 있다. r.1 기준으로 나무위키에 한정하여 가능한 한 쉽게 요약하고 쉬운 예시를 들어서 설명하기는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에 잘 와닿지 않는다면 논의 자체가 원래 신선놀음 수준으로 추상적이어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넘기자(…).

1부. 지식과 그 밖의 문제들

2부. 남성성의 역학에 관한 네 편의 연구

3부. 역사와 정치

후기: 오늘날 남성성의 정치

2.2. 남성성을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역사와 접근들

우선, 젠더 및 남성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코넬이 어떻게 설명했는지를 먼저 제시하자면 다음과 같다. 젠더(gender)란 사회적 실천(practice)으로서 생물학적 조건에 의존하긴 하지만 그것으로 환원되지는 않는 것을 의미한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이러한 젠더를 실천하기 위한 배열(configuration)에 붙여진 이름이다. 젠더는 그 실천에 있어 구조화되며, 특히 젠더 구조가 도전을 받을 때에는 더욱 분명해진다. 예를 들자면, 군 내에서 동성애자를 색출하는 것과 관련된 논쟁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군인들은 특정한 남성성을 명확히 정의해야만 군의 집단적 결속력이 더 증가할 것이라고 믿고 있을 수 있다.

코넬에 따르면 젠더 구조는 3층의 구조를 갖는다. 구체적으로 소개하자면, 1) 가부장제라는 이름의 권력, 2)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생산,[3] 3) 카텍시스(cathexis)라는 이름의 욕망의 투사가 그것이다. 여기서 카텍시스는 정신분석학에서 나온 용어로, 정서적 결합구조(emotionale Bindungsstruktur)를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풀자면, 특정 대상에 대해서 리비도 에너지를 집중적으로 투사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억압된 리비도는 만족을 찾아서 정서적 에너지를 어딘가에 투사하게 되며, 이것이 외부일 때에는 "대상 카텍시스", 내부일 때에는 "자아 카텍시스" 가 된다. 국내 번역판에서는 이 용어를 번역할 때 '카섹시스' 라고 표기했는데, 이쪽은 어감이 영 좋지 않으므로(…) 많은 문헌들에서는 카텍시스라고 표기하는 듯하다.

코넬은 젠더 구조가 필연적으로 인종이나 노동자 계급과 같은 다른 사회적 구조들과 관련되어 있다고 분석하면서, 그 이유는 젠더 역시 사회적 실천을 구조화하는 방식 중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남성성이라는 젠더를 이해하려면 결국 인종이나 노동자 계급 같은 주제들까지 건드려야 한다는 것.

이제 여기서부터 남성성을 정의해 볼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남성성은 언제나 반드시 여성성과 함께 견주어 보아야 하는 관계적인 개념이다.[4] 남성성은 젠더화된 삶 속의 과정과 관계로서, 그 관계 속의 장소이자, 그 장소 속에서 나타나는 실천이고, 그 실천 속에서 나타나는 효과이다. 기존의 여러 사회과학 생물학 분야들에서 시도되었던 남성성의 정의는 네 가지 방식들로 나누어질 수 있는데, 1) 남자다움을 정의하는 무언가를 특징지은 뒤 그것으로 남성들의 삶을 설명하는 본질주의, 2) 남성들에게서 관찰되는 특정 패턴을 파악해서 그것으로 남성성을 정의하는 실증주의,[5] 3) 남성성이 젠더 역할로서 행동의 규범이 되어야 한다고 보는 규범적 관점,[6][7] 그리고 마지막으로 4) 여성성과 대비되는 상징적 차이의 세계로 남성성을 정의하려는 기호학적 관점이 그것이다.

흔히 많은 논객들이 남성성의 위기 담론을 설파하고 있으며, "잃어버린 남성성 되찾기" 같은 심리치유 프로그램들이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는 것에 대해 저자는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낸다. 남성성은 위기에 처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남성성은 젠더의 한 종류로서 사회적 변화에 따라 그 자신도 유동적으로 변화해 간다. 오히려 지금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은 전통적인 젠더 질서라고 할 수 있다. 다시 3층구조로 돌아가 보면, 1) 페미니즘의 도래로 인한 권력 관계의 위기, 2) 여성의 사회 참여로 인한 생산 관계의 위기, 3) 동성애의 가시화로 인한 카텍시스 관계의 위기가 한꺼번에 탐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지학의 연구에 따르면, 전지구적 연결을 통해서 남성성이 제국주의적 팽창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북미 이외의 제3세계 지역의 청소년들이 카우보이 인디언 간의 전쟁을 재연하는 놀이를 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근대적 젠더 질서를 형성하기 위한 사회적 실천의 배열로서 남성성은 근대의 산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유럽권에서의 종교적 권위의 붕괴와 개인주의의 강조, 제국주의의 도래와 식민지 정복 및 학살, 상업 자본주의 정신의 발달과 노동의 젠더화, 17-18세기경의 유럽의 많은 혁명들로 인해 흔들렸다가 반동하며 견고해진 젠더 질서를 배경으로, 근대적인 남성성은 18세기 젠트리 계급으로부터 출현했다. 남성성의 첫 전형으로서의 젠트리는, 가문의 명예와 국가 행정 등에 밀접히 결합되었고, 엄벌주의적 사법 질서, 가정에서의 권위주의, 개인들의 성적 방종과 함께 나타났다. 예컨대 《 소돔 120일》 과 같은 작품들에서 그 성적 방종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19세기 이후 남성성은 변화에 직면했다. 서프러제트 운동을 통한 여성들의 도전, 공장 체계의 발전과 함께 나타난 노동자 계급의 존재, 프로이센 장교단 등 국가적으로 체계화된 폭력 및 파시즘의 도래가 변화의 원천이 되었다. 이때 이후로 남성성은 힘에 의한 남성성(야성)과 기술에 의한 남성성(전문성)이 서로 경합하는 구조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남성성은 1) 조직화되고 잘 통제된 남성성, 2) 거칠고 무질서한 남성성의 두 종류로 갈라졌다. 한 사례로, 미국에서 폭력과 개척의 거친 남성의 이미지는 도시에서 추방당해 서부 개척의 이미지로 옮겨 갈 수밖에 없었다.

현대의 남성성은 젠더 배열의 다양성의 감소를 우선 거론할 수 있다. 서구화(westernization)로 인하여, 비서구권의 토착적 젠더 배열들은 이미 거의 다 파괴되었다. 흥미롭게도 젠더 질서의 위기는 세계 어느 곳보다도 부유한 국가들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사회적 변화도 그에 맞게 나타나고 있다. 가부장제의 정당성이 위협받는 "젠더 질서의 위기" 속에서, 수많은 남성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런 변화에 협상하는 과정에 있다. 이들은 인류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권력을 통해 미래를 형성할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남성성의 의미와 종류, 본질, 범위에 대한 모든 것이 논쟁의 대상이 되는 혼란을 경험하고 있다.

2.3. 남성의 신체와 몸 실천

남성성에 대한 논의 중에서 특기할 만한 것이 생물학적 결정론이다. 서구의 근대적 젠더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진정한 남성을 정의하는 것은 다름아닌 남성의 생물학적 신체에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사회 구성주의자들은 "기계로서의 몸" 논리를 거부하면서 오히려 "기호로서의 몸" 의 논리를 펼쳤지만, 저자의 관점에 따르면 남성의 몸은 상징성도 있지만 물질성 역시 존재하기에 양쪽 모두 틀렸다. 그리고 이후 양쪽의 타협이라고 할 수 있는 절충론은 생물학과 문화가 상호작용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에 대해서도 "잘못된 분석 두 가지가 합쳐지면 또 다른 잘못된 분석을 낳을 뿐" 이라며 비관적으로 전망한다. 특히 생물학과 사회학의 통섭을 시도할 때 언제나 생물학에게 설명의 우선권이 주어진다는 점, 두 분석 수준이 조화를 이룬다고 보기도 어렵다는 점을 들어서 절충론을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부 사회학자들이 인정해야 하는 것은, 저자가 강조하듯 "몸의 물질성은 피할 수 없다" 는 점이다.[8] 남성성의 문화적 해석은 육체 노동, 스포츠(에서 나타나는 신체적 활용과 경쟁의 관계), 존재의 성기로의 환원, 어른됨에 대한 육체적 판타지의 연결 등을 통해 체현되어 나타난다. 뒤집어 말하면, 육체적으로 쇠약해지면 그 남성은 자신의 남성성이 위협받는다고 느낀다. 예를 들어, 노화나 장애가 찾아온 중년 남성들은 몸이 예전같지 않음을 느끼고는 정력에 좋다는 스태미너 음식들을 찾아다니거나 섹스 테크닉에 광적으로 골몰하게 될 수 있다.

노화를 봐도 알겠지만, 이처럼 남성의 몸은 다양하게 변화할 수 있으며, 그 사람이 사회적 삶에 참여하는 것을 촉진하거나 제약한다.[9] 심지어 어떤 몸들은 그 사회의 배열 자체에 저항하여 전복시키기도 한다. 직관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한 사례는 다름아닌 성전환자(trans-sexual)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들의 사례는 언뜻 상징계가 인간의 신체에 대해 승리를 거두는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이들조차 몸이 갖는 물질성을 자주 경험한다는 것이다.

물질로서의 몸이 사회적 과정으로서 호명되는 것은 재귀적 몸 실천(reflexive body practice) 때문이다. 이런 몸 실천은 세계를 형성할 수 있지만, 때로 그 세계는 몸에 적대적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일부 서구의 청소년들은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기 위해 마약에 손을 댔다가 그만 몸을 망치는 경우가 있다. 재귀적 몸 실천으로 형성된 세계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투쟁의 장으로서, 이렇게 체현되는 남성성에는 하단에 설명된 바 여러 유형들이 존재한다.

2.4. 남성성의 분류

면접법을 통한 네 편의 연구에서, 저자는 젠더 관계의 위기가 권력 관계에서 나타나는 경우와 (ex. 환경주의자) 생산 관계에서 나타나는 경우, (ex. 노동자 계급) 그리고 카텍시스 관계에서 나타나는 경우를 (ex. 동성애자) 모두 살펴보았다. 이런 질적 연구의 방법론을 소개하자면, 응답자들의 면접은 서사(narrative)를 말해 달라는 개방형 요청으로 이루어졌으며, 비구조화된 상태로 진행하였다. 녹취된 증언의 분석은 사건의 서사적 순서를 통한 분석, 3층 젠더구조의 관점에서 본 분석, 남성성의 형성 및 파괴에 관련된 젠더 프로젝트의 분석으로 이루어졌다. 그 외에도 응답자들의 사회적 위치와 삶의 궤적이 사회 전반과 얼마나 유사할지에 대해서도 함께 고려하였다.

간단히 각각을 정리하자면 "패권적 남성성" 은 우리 사회의 남성들의 젠더 실천의 기준을 제시하고, "종속적 남성성" 은 패권적 남성성에 의해 추방당한 여성성들의 영토이며, "공모적 남성성" 은 패권적 남성성에 저항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그들과 함께하며 이익을 챙기는 실천이고, "주변화된 남성성" 은 사회적 계급이나 인종에서 차이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패권적 남성성의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 봉사하지만 어떤 이익을 챙기지도 못하는 남성성이다.

2.4.1. 패권적 남성성

파일:hegemonic-masculinity.jpg
Men's Health》 지의 표지를 장식한
미식축구 선수의 모습.( #출처)
Hegemonic Masculinity[10]

본래 이는 안토니오 그람시(A.Gramsci)의 계급관계 분석에서 기원한 것이다. 이는 가부장제의 정당성에 대해 수용되는 답변을 체현해 보이는 젠더 실천의 배열이며, 사회적 삶에서 지배적 위치에 있는 집단의 삶을 의미한다. 패권적 남성성은 문화와 제도의 합작품으로서 매우 견고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유동적으로 존재하며 사회적 변화에 따라 패권 역시 바뀌어 갈 수 있다.

패권적 남성성은 단순히 신체적 공격성으로 동일시될 수 없으며, 탈신체화된 상태로서 소위 '이성의 힘',[11] '효율화', '조직화' 와 같은 문명의 발전 동력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우리 사회 그 자체의 이해관계를 대표한다. 상단에 서술했듯이, 패권적 남성성은 크게 보아 지배의 남성성과 기술의 남성성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관계에 있다. 다시 말해, 기업 경영이나 군사 집단과 같은 맥락에서는 직접적이고 권위적인 지배의 형태로 패권적 남성성이 드러나지만, 기술/공학 분야나 전문직 등의 직종에서 조직되는 패권적 남성성은 개인이 갖고 있는 전문성에 근거하여 드러난다.

남성들이 권위주의적 지배를 실천하건 아니면 전문성을 발전시키건 간에, 그들이 종사하는 삶의 영역은 모두 남성적으로 젠더화되어 있다. 코넬은 그 특징을 "합리성" 이라는 남성적 덕목에 입각하여 설명하고자 시도한다. 남성적 직종이 구조화되고 배치되는 방식은 개인의 합리성의 수준이나 합리적이고자 하는 노력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으며, 단지 업무가 합리적으로 처리될 수 있는 방식을 따른다. 다시 말해, 조직의 합리성은 권위적 질서와 빈틈없는 통제를 통해 달성된다. 합리성이 강조되는 남성성은 섹슈얼리티를 다룰 때 위협 받게 되는데, 이는 그것이 비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공모적 남성성에 대한 논의에서 이어진다.)

9장에서 저자는 패권적 남성성이 위협을 받을 때 어떤 식으로 그것이 수호될 수 있는지를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예를 들어 설명했다. 1) 먼저, 개인의 총기소지를 위한 로비와 같이, 다양한 형태의 "남성적 폭력" 의 발현이 있다. 여기에는 전쟁과 같은 집단 간, 심지어 국가 간의 폭력까지도 포함될 수 있다. 2) 패권적 남성성의 다른 사례는 "모범적 남성성" 을 홍보하는 것이다. 패권적 남성성은 이때 남성성의 기준을 정하고 이에 못 미치는 남성들에게는 망신을 주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코넬은 그 기준으로서 서부극, 스릴러, 스포츠, 백만장자, 군대의 신병 훈육법, 할리우드 스타 등[12]을 들었다. 3) 패권적 남성성은 조직 경영 과정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조직 내에서 다양한 남성들이 의사결정 과정에서 충돌하는 동안, 가장 많은 충돌은 전문적 남성성의 도전에 맞서는 권위적 남성성의 방어의 형태로 나타난다.

10장에서 저자는 패권적 남성성을 통해 구성된 가부장제는 남성들과 강력한 이해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도, 패권적 남성성에 대한 남성들의 이해관계는 매우 복합적이고 이질적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저자는 7장에서 공모적 남성성과 함께 패권적 남성성을 소개했으며, 그나마도 서로 구분하여 소개하지 않았다. 패권적 남성성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미식축구 선수나 검게 그을린 피부를 하고 웃고 있는 해변의 서퍼처럼 특정한 이미지로 나타나기도 하나, 대개는 남성들이 도달해야 할 이상과도 유사하게 등장한다. 이는 흔히 생각하는 Bad Ass 카우보이 같은 이미지일 수도 있지만, 위에서 여러 차례 지적했듯이 전문성 및 기술성을 특징으로 하는 교수, 과학자, 남성 기술자, 프로그래머 같은 이미지 역시 패권적 남성성에 속할 수 있다. 또한 10장에서 저자는 패권적 남성성이 모든 면에서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하면서, 고대 신화에서의 영웅 서사, 스포츠 응원의 즐거움, 수학적 아름다움, 자기희생의 윤리 등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부분들이라고 언급하였다.

2.4.2. 종속적 남성성

Subordinate Masculinities[13]

6장에서 소개되는 종속적 남성성은 패권적 남성성으로부터 상징적으로 추방된 모든 것들의 하치장이다. 즉, 남성에게 있어서는 안 되는 모든 종류의 여성성들이 합쳐진 남성성이다. 이러한 종속은 다양한 배척과 학대, 폭력 등을 포함한다. 패권적 남성성은 종속적 남성성을 가리키는 다양한 언어적 혐오발언들을 활용하여 이 남성들에게 모욕을 가할 수 있다.

저자의 인터뷰에 응한 동성애자들은 그들의 성적 지향만이 동성애일 뿐, 다른 사회적 지위나 인구학적 특성들은 패권적 남성성과 동일하게 서구 백인 중산층이었다. 이들 중에는 기업체 고위 경영자, 보스적(bossy)인 정치 평론가, 특권층을 위한 학교의 졸업생, 학교 갱단에 소속되어 경범죄를 저지른 '터프한' 남성, 미식축구 선수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한 인물은 술 취한 아버지가 어머니를 학대하던 때 완력으로 아버지를 제압한 경험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공통적으로 이들은 평범한 이성애자 친구들과 어울리는 청소년기를 보냈으며, 성차별적인 내용의 전통적 성 관념을 교육받았다. 커밍아웃을 하지 않는 한, 부모와의 관계도 원만했다.[14]

코넬에 따르면, 아닌 게 아니라 고전적 연구의 전통은 동성애의 '원인'(?)을 찾기 위한 방편으로 젠더 비순응을 주로 탐구해 왔다. 예를 들어, 옛날 사회과학자들은 동성애의 원인으로 종종 " 어머니가 아들에게 종종 치마를 입혀 보았을 것이다" 같은 식의 설명을 제시했다. 하지만 코넬의 면접 결과는 전혀 달랐다. 게이 커뮤니티에 소속된 8명의 응답자 모두, 한결같이 유년시절에 패권적 남성성에 관여하고 실천하던 경험을 보고했다. 반수 이상은 첫경험을 이성과 해 보았으며,[15] 일반화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긴 하지만 어쨌거나 모두들 20대 초반 무렵에 들어서야 패권적 남성성을 버릴 수 있었다. 이들이 동성애자로서 자기탐색을 종료한 것은 성적 실천의 장기적 통합의 결과로서 설명될 수 있다.

다른 남성성들 사이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자면, 종속적 남성성을 가진 개인들은 패권적 남성성에 대응하여 스스로를 가장하는 몇 가지 방법들을 갖고 있다. 물론 이는 게이 배싱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아웃팅당한 후 받게 될 사회적 불이익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같은 불편함에 대해서 이들은 그저 "내가 감당해야 할 부분" 이라고 그러려니 하며 넘기는 경향이 있다. 어떤 이들은 개인적으로 패권적 남성성에 대해서 "촌스럽다" 고 여기고, 자신의 종속적 남성성의 이미지가 더 "도회적이고, 세련되고, 현대적이다" 라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상에 불과하다. 이들 역시 패권적 남성성이 갖는 사회적 권위에는 정면으로 대적할 수 없다.

패권적 남성성에 의해 가장 큰 고통을 받는 남성 집단은 바로 이들 종속적 남성성을 지닌 남성들이다. 패권적 남성성은 자신의 패권을 통하여 종속적 남성성의 '일반적임'(straightness)을 전복시키고, 동성애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동성애자들이 여성스럽다는 주장은, 필연적으로 동성애가 여성성의 결과라서가 아니라,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는 원래 동성애자들이 여성적인 남성성을 갖고 있다고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라고 설명되어야 한다.

동성애자들의 생애사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젠더 실천은 이성애자들과 마찬가지로 기존 젠더 질서에 맞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매우 적은 사회적 변화를 성취했고, 젠더 관계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힘든 위치에 있다. 패권적 남성성에 대한 동성애자들의 반감은 그 이미지를 거부함으로써 형성되지만, 코넬에 따르면 많은 게이 커뮤니티들이 갈수록 탈정치화되어 가고 있기에 당장 큰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는 물론 당장 에이즈의 전염을 막는 것과 같은 개인적인 시급한 문제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젠더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미 종속적이라 할지라도 대안적인 남성성이 안정적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회구조적으로 여러 모순들이 존재함을 생각할 때, 코넬은 장기적으로 변화의 징후가 나타날 수 있다고 기대한다.

동성애자들이 여성 및 페미니즘에 대해 갖는 태도는 의외로 이성애자 남성들의 태도와 비교하여 그 차이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이들은 온건한 사회운동을 개인적 수준에서 지지하지만 남성에 대한 멸시나 극단주의적 움직임에는 큰 반감을 갖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은 이성애 남성들이 페미니즘에 대해 보이는 가장 흔한 견해와 차이가 없는 것이다.

2.4.3. 공모적 남성성

Complicit Masculinities

7장에서 패권적 남성성과 함께 제시되는 공모적 남성성은, 패권적 남성성의 도달하기 어려운 특성으로 인하여 그것을 직접 체현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패권적 남성성을 적극 수호하려는 가부장제 전위대 같은 사람들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 패권으로부터의 이익, 즉 "가부장적 배당금" 이라고 불리는 다양한 사회구조적 혜택들에 대해서는 접근이 가능하다. 적극적인 합리화도 하지 않지만 적극적인 저항도 하지 않은 채 가부장제를 관망하는 것이다.

공모적 남성성을 지닌 남성들은 패권적 남성성에 대해서 "그래도 요즘은 세상이 바뀌어서..." 와 같은 식으로 뜨듯미지근한 거리두기를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직접적으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어정쩡하게 묵인하면서 그 패권적 남성성이 만들어 낸 사회구조적 질서에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순응한다. 이들 입장에서는 패권적 남성성에 완벽히 도달하지 못하는 현실임에도 어쩔 수 없이 노력이라도 해야만 하는 압력을 받으므로, 자신이 그 패권으로부터 딱히 어떤 혜택을 받는다는 자각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공모적인 위치에 놓인다. 이런 애매한 입장으로 인해, 이들의 내면에는 필연적으로 상충되는 이데올로기들이 존재하고,[16] 이러한 긴장의 상당수는 그것이 발견될 때까지 개인의 내면에서 미해결된 채로 잔존한다.

저자가 7장에서 인터뷰한 공모적 남성들의 생애사는 상당히 전통적이며, 사회적 변혁을 부담스러워하고 관습적인 삶을 선호한다. 피면접자들은 공통적으로 엄하고 권위적인 아버지와 따뜻하고 헌신적인 어머니 밑에서 유년기를 보냈다고 보고했으며, 가족 간에 존재하는 성 역할에 대해서는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 과 같은 전통적인 관점을 따랐다. 이들은 부모로부터의 사회화 등을 거쳐서 패권적 남성성에 성공적으로 관여하지만, 그와 동시에 폭력이란 나쁜 것이라는 교육 역시 받아 왔다.

앞서 미처 설명하지 않았던 부분으로, 이들의 직장생활은 '합리적' 인 패권적 남성성이 마련해 놓은 방식을 고스란히 따라간다. 그러다 보니 섹슈얼리티와 같은 비합리적인 것에 대해서는 혼란과 붕괴를 경험하게 된다. 공모적 남성성을 지닌 남성들은 가부장적이고 성적인 이야기는 거의 꺼내지 않을 만큼 보수적인 가정환경을 공유하고 있으며, 특히 금욕주의적인 교육 분위기 속에서 성장해 왔다. 그러다 보니 성(性)에 대해서라면 입을 여는 것조차 쉽지 않다고 느끼게 되는 것. 이런 주제에서는 패권적 남성성이 자신들을 가이드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동성애자들에 대한 멸시와 적나라한 혐오발언을 솔직하게 털어놓았지만, 유독 여성에 대한 문제만큼은 상식과 교양에 입각한 관점을 취하고 있었다. 섹스의 원칙에 대해서 말해 보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공모적 남성성을 지닌 남성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섹스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며, 생각이 다를 때에는 협상이라도 하는 것이 좋다, 쾌락은 어디까지나 상호주의적인 것이어야 하지, 남성만 좋다 끝나는 섹스는 옳지 않다" 고 답변했다. 이들 중에는 심지어 포르노 잡지사에서 근무하는 응답자도 1명 있었는데, 저자에 따르면 이 사람조차 "이 바닥에서 조금만 일해 보면 (포르노 배우들에 대한 남성적 판타지에 대해) 금세 넌더리를 내게 될 것" 이라고 시큰둥해하고는, 실제 섹스는 자기 잡지에서 묘사하는 것과 분명히 다르며 사람과 사람이 대등하게 맺는 인간적인 관계라는 것을 자신 역시 계속 스스로에게 강조하고 있다고 말했다.[17]

기본적으로 이 사람들은 젠더 이슈에 대해서는 개인이 상대편 개인에게 보이는 정중한 태도의 수준에서 이해하는 데 그친다. 그 결과 젠더 관계가 사회적으로 변화하는 것에 부정적이며, 그보다는 전통적 성 역할을 더 편안하게 느낀다. 대외적으로는 "극단적이지만 않으면, 저는 페미니즘에 대해 관용하고 지지할 수도 있습니다" 라고 선언하지만, 패권적 남성성의 가이드에서 벗어나는 상황에서는[18] 내면의 남성성이 상처를 입는다는 것이 코넬의 주장이다. 이 사람들은 실제로 가사노동, 바느질, 요리 등에도 관심을 갖고 참여할 의향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에 비해 여성들은 (나무 베기, 망가진 기계 고치기, 자동차 유지관리하기 등의) 남성적 활동들을 하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종합적으로 보면 공모적 남성성을 가진 남성들은 스스로의 남성성이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있지만, 이 개혁은 근본적이지 못하고 언행불일치적이거나 모순되는 면모도 가지고 있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이는 이 사람들은 자신이 관여하는 패권적 남성성에 대한 구조적 성찰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남성성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혼란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설명된다. 이러한 경향은 하단에 설명할 에페미니스트(effeminist)들의 일부 역시 경험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 코넬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남자들은 기대와 태도, 개인적 스타일과 대면적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추지, 경제적 불평등이나 제도화된 가부장제 또는 정치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 R.W.Connell, p.195
2.4.3.1. 에페미니스트와의 대비
Effeminist

저자는 5장에서 에페미니스트로 불릴 만한 친-페미니즘적 남성들의 생애사를 함께 인터뷰하고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4가지 남성성의 분류에는 어떤 범주에 넣어야 할지 매우 애매한 경우인데, 사실 이들이 지향하는 바를 대안적인 남성성으로서 정착시키는 것은 이들의 과제이기도 하다.

에페미니스트들은 HeForShe와도 개념적으로 비교해 볼 수 있는데, 정의하자면 페미니즘을 접하게 된 후 자신이 추구하던 이상적 남성상을 버리고, 남성성 자체에 대한 죄책감과 부채의식을 갖고 있으며, 이 때문에 자신의 남성성을 덜 차별적인 방향으로 개혁해 나가고자 애쓰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이 한때 갖고 있었거나 추구하고 있었던 남성성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으로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 방법을 찾는다면, 이들은 언제든지 새로운 형태의 남성성을 취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들 역시 공모적 남성성을 지닌 남성들처럼 안정적이고 전통적인 가족적 배경을 갖고 있었으며, 아버지 혹은 친형으로부터 패권적 남성성을 성공적으로 전수받았다. 이들도 남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여성에 대한 타자화를 했고, 저자가 " 이성애적 감수성" 이라고 부르는 성적인 감각적 각성을 경험했다. 하지만 이후 이들의 삶의 궤적은 변화했고, '오이디푸스적 분리' 라고 부를 만한 패권적 남성성과의 결별이 나타났다.

에페미니즘적 응답자들은 공통적으로 환경운동, 정치운동, 대항문화(counter-culture)의 참여 등을 통하여 패권적 남성성에 도전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이 녹색정치, 젠더정치에 대해 몰두하면서 자신이 무엇을 배웠고, 자신의 삶에 어떤 변화가 나타났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이들은 저마다 나름대로 평등주의를 실천하려 하거나, 집단 속의 연대의 경험이 있거나, 페미니즘 등을 통하여 개인적 성장을 경험했거나, 자연주의와 인간소외의 회복을 위한 노력에 관여했거나 하는 등의 노력을 했다.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이들은 일상 속에서의 가부장제의 작용에 대해서는 소소하게 거부하고 저항했다. 이를 통해 이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지속가능한 페미니즘" 을 형성했으며,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일상적으로 전복시키는 경험을 누적시켜 왔다.

대조적으로 공모적 남성성의 남성들은 이러한 노력과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원론적으로는 이런 활동을 하는 것이 개인과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삶 속에서의 실천의 경험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 에페미니스트들이 적극적으로 페미니즘 단체와 개인, 강연 등에 참석하면서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반면, 공모적 남성성의 남성들은 (페미니스트들과 교류 자체를 거부한 건 절대 아니지만) 딱 업무 상 필요한 만큼만 교류했고, 패권적 남성성이 가이드하는 범위 내에서만 그 영향을 받아들였다.

에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을 처음 접했을 때 다른 남성들이 으레 그렇듯이 상당한 스트레스와 괴로움을 경험했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그 다음의 이들의 반응은 공모적 남성성의 남성들과는 전혀 달랐다. 이들은 이 스트레스의 결과로 깊은 죄책감과 연대의식을 경험했다. 응답자들은 비록 쉽지는 않았더라도 조금씩 조금씩 여성들의 관점을 수용해 나가려 했다고 말했다. 대조적으로, 코넬에 따르면, 공모적 남성성의 남성들은 그 스트레스의 결과로 자신의 당황스러움과 억울함을 줄이고 스트레스에도 안도감을 줄 수 있는 대응방법을 찾아 나섰다. 즉, 에페미니스트들이 성평등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이들은 통렬한 자책과 자기반성의 의미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반면, 공모적 남성성의 남성들은 성차별의 문제를 비난하면서도 자신까지 그 비난에 엮여들지는 않으려 하며, 성평등을 비롯한 젠더 이슈들을 자신에게 일체의 스트레스가 되지 않는 방향으로 재해석한다는 것.[19][20]

에페미니스트들이 겪는 문제는, 상기한 바와 같이 패권적 남성성과 선긋기를 하고 그것을 거부한 이후에 대안적으로 채택할 다른 남성성이 없다는 점이다. 이들은 주류 사회의 규범으로부터의 단절, 완전히 새로운 인간관계의 형성, 전면적으로 달라지는 일상을 각오하고서 패권적 남성성을 거부했지만, 정작 그 대신에 추구해야 할 지향점은 마련해 놓고 있지 못하다. 게다가 뿌리 깊은 호모포비아적 문화 속에서, 이들은 동료 남성들과 건강한 대인관계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페미니즘 역시 "남성들은 동성 간 인간관계를 어떻게 형성하고 유지해야 하는가?" 에 대해서는 가이드라인을 주지 못한다. 패권적 남성성의 폐기는 이후 그들을 대인관계 상에서 가이드해 줄 남성성이 없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므로, 관계적 가이드의 상실감으로 인한 답답함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개인적으로 전체론 철학 같은 대항문화에 헌신하거나, 여성과의 감정적 동일시 (혹은 어머니에 대한 오이디푸스적 동일시) 등을 통한 양성적 이행 내지 탈젠더화를 추구한다. 상기 서술했던 공모적 남성성의 남성들이 겪는 것과 유사하게, 이들 역시 일부는 내적인 모순과 부조리함에 대해 갈등하는 경우가 있다. 패권적 남성성을 소멸시키려는 이들이 구조적 성찰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혼란과 표류를 경험하는 것은, 저자에 따르면 이들이 집합적 실천을 통해 새로운 대안적 남성성을 개발하는 길로 나아갈 생각을 못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참고로 저자에 따르면, 페미니즘 분야에서는 에페미니스트들이 젠더 평등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런 남성들의 행보는 젠더 불평등을 일으키는 구조 자체를 전복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불평등의 양상을 더욱 "세련되게", 그리고 "교묘하게" 현대적으로 치장하게 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 HeForShe 문서에서도 보듯이, 이런 사람들이 어디까지 도움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한 사안이다.
2.4.3.1.1. 관련 문서

2.4.4. 주변화된 남성성

Marginalized Masculinities

저자는 4장에서 제일 먼저 이들의 이야기를 설명했다. 주로 흑인 혹은 노동자 계급을 통해 설명되는 이 남성성은, 다른 남성성들과는 달리 인종이나 경제적 측면에서의 다른 사회구조와의 상호작용의 결과다. 물론 흑인 스포츠 스타와 흑인 강간범(…)을 동일한 남성성으로 놓을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사회적 약자들이 주변화된 남성성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패권적 남성성을 강화하는 아이콘과도 같은 일부 남성들이 그들의 인종 때문에, 혹은 계급 때문에 부당한 착취를 당한다는 점을 밝혔다는 의의가 있다.

주변화된 남성성은 패권적 남성성에 대한 권위부여(authorization)를 통해 봉사하지만, 그러고도 어떤 배당금도 받지 못하고 착취당한다. 공모적 남성성이 딱히 패권적 남성성에 대해 실드를 쳐 주지 않으면서도 배당금을 타 가는 반면, 주변화된 남성성은 패권적 남성성에 철저하게 봉사하면서도 아무런 배당금을 타지 못한다는 대조가 가능하다. 유명한 흑인 농구선수, 혹은 거친 인상의 건설 노동자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자. 이들은 그 존재 자체로 그 사회가 추구하는 패권적 남성성의 이미지를 더욱 강화하며, 패권적 남성성이 보기에도 이들은 긍정적인 존재로 취급된다. 하지만 딱 그뿐, 그들에게 그만큼의 제도적 혜택을 주려고 하지는 않는다.[21]

저자가 인터뷰한 노동자 계급 응답자들은 대개 저소득 저학력의 배경을 가진 전과자들이었으며, 마약을 복용하는 클럽이나 심야 오토바이 클럽 등의 집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들의 가족구조와 가정 내 질서는 가히 " 포스트모던적" 이라고밖에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 또한 이 응답자들은 카를 마르크스가 정의했던 바 '추상노동' 에 관여하고 있었으며, 대부분이 노동 시장에서 권력을 점유할 기술, 지위, 수단, 재주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생산활동이 단조롭고 누구에게 맡겨도 할 수 있는 것들뿐이니, 그만큼 일자리도 불안정할 수밖에 없고, 오래 일한다고 해서 기술이 습득된다거나 숙련된다거나 하는 개념 자체가 공유되지 않았다. 직업을 갖게 되는 경로는 아버지의 지인을 통해 소개받는 등의 사적인 경로가 많았으며, 노동자 계급인 주제(?)에 노조 활동이 생계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될 경우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이들은 범죄 역시 생계형 범죄에 가까웠다.

이들의 남성성에서 폭력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 이미 이들은 어릴 때부터 일상화된 폭력에 노출되었으며, 대인관계를 맺고 유지하고 끊는 것이 폭력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들 역시 폭력이 나쁘다는 것은 알지만, 정당방위와 보복의 중요성이 함께 강조되었다. 쉽게 말해 "먼저 잘못한 놈이 누군데?" 라고 생각한다는 것. 물론 이들은 학창시절 이후로 국가의 공권력을 마주하고 불편함을 느끼며, 멋모르는 사춘기에는 공권력(교권)에 대항하는 존재로서의 자신의 남성성을 정의한다. 그러나 이들은 개인이 국가 권력에 대항할 수 없다는 현실을 곧 깨닫게 되며, 사회에 진출한 후에는 가능한 한 경찰과는 엮이지 않으려 하며 좋게좋게 해결하려는 버릇을 갖게 된다. 나이가 들어서는 오토바이 클럽 같은 소속집단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폭력성을 관리하며, 집단 내에서만 남성성을 드러내는 것이 용인된다.

저자에 따르면, 적어도 주변화된 남성성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동일시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이들을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알프레드 아들러가 제안했던 "항의하는 남성성" 이라는 것.[22] 항의하는 남성성은 열등감과 무력감에 대한 대응으로서 집합적이고 강인한 남성성을 형성한다. 이들은 겉으로는 순응적이고 따로따로 만나서 대화해 보면 한없이 정중하지만, 뭉치면 뭉칠수록 대담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의 내면은 부자연스럽고 비체계화되어 있으며, 내면적 긴장과 모순을 통합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이런 종류의 남성성은 갱단이나 소수민족 등 사회의 주변부의 남성들이 갖는 특징에 가깝다.

사회의 주류 남성성의 정치를 향한 이들의 항의와 분노는, 패권적 남성성에 정면으로 맞서기에는 한없이 취약하다. 예를 들어, 갱단 최고의 싸움꾼도 일단 공권력 앞에서는 한낱 범죄자의 신분으로 판사의 판결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신세다. 결국 이들이 제시하는 남성성은 자신의 주변화된 지위와 낙인을 멋지게 수행하는 퍼포먼스이다. 예컨대 이들은 광란의 오토바이 질주를 즐기면서 일종의 "웰메이드 저예산 제작물" 을 한 편 찍는 것으로 자신의 남성성을 확인한다. 그럼에도 일종의 의의를 찾는다면, 이 역시 패권적 남성성과의 결별에 속한다는 점이다. 내면이 비체계적이기 때문에 젠더 평등에 대한 생각과 여성혐오가 공존하고, 젠더상(像)에 대한 이상적 이미지들은 서로 충돌한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기 때문에, 이들을 통하여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대중운동이 나타날 가능성은 적다.

이들이 증언하는 섹스는 그야말로 하찮고 간단한 쾌락거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성애는 강제적이고 의무적인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들 역시 종속적 남성성인 동성애에 대해서는 극도의 배타성을 보이고 저항했다.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이들은 높은 여성인권 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

2.5. 기업가적 남성성?

개정판의 후기에서 저자는 최근 들어 나타나고 있는 세계적 변화에 주목하였다. 세계화가 진전되고 21세기가 도래함에 따라, 갈수록 국제정세가 중요해지고 개인의 삶에 신자유주의가 깊숙이 들어온 것이다. 이에 따라 패권적 남성성 역시 범문화적이고 세계적인 수준에서 천천히 두 가지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데, 1) 패권적 남성성이 국가 간 외교 수준에서는 점차적으로 부드러운 이미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 그리고 2) "기업가적 남성성" 이 패권적 남성성 내부에 새롭게 포섭되어 왔다는 점이다. 특히 국제적 리더십에 있어서는, (스탈린주의를 제외하면) 지금껏 많은 국가들의 수장들이 예외 없이 기업가적 남성성의 특성을 따랐다는 것이다.

기업가적 남성성은 개인주의, 신자유주의, 그리고 탈가부장주의를 배경으로 새롭게 나타난 현대에 들어 새롭게 나타난 패권적 남성성이다. 성취 지향적이고 경쟁적이고 적극적이며, 야망에 차 있고 의욕에 불타고 있으며, 극도로 유능하고 수완이 좋은 인물을 상상한 뒤, 이 사람이 남성이라고 가정해 보자. (물론 많은 사람들은 이런 성향을 지닌 사람은 으레 남성일 거라고 익숙하게 이미지화할 수 있다.) 어쨌거나 이것이 기업가적 남성성의 대개의 이미지라고 보면 된다. 코넬에 따르면, 기업가적 남성성은 여러 남성성들 간의 관계에 또 다른 뜻밖의 변화를 가져왔다. 종속적 남성성에 대한 배척을 약화시켜 왔다는 것. 예컨대 팀 쿡과 같은 유명 대기업 경영자가 커밍아웃을 하는 것이 소비자들의 반감을 잘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을 들 수 있다. 소비자들은 이를 접하고 나서 " 지가 남자랑 자건 말건 자기 맘이지", " 게이면 어떠냐, 신제품 잘 만들면 그만이지" 같은 반응을 보이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자체의 성격을 크게 빼닮았기 때문에, 기업가적 남성성은 사회학의 관점에서 보면 신자유주의의 사회구조적 특징들을 다수 공유한다. 신자유주의는 젠더 이슈에 대해서 딱히 별 통찰을 주지 않는다. 그 자체로 이미 젠더 중립적이고 탈가부장적인 제도이기 때문. 예컨대, 신자유주의자의 입장에서는 " 근로에 대한 임금은 남성이냐 여성이냐를 따질 게 아니라, 가장 우수한 직원에게 가장 많이 지급되어야 하는 것이다" 고 말할 수 있다. 기존의 여러 여성해방 운동의 결과로 마련된 고용기회 균등(EEO; equal employment opportunity) 관련법들은 젠더블라인드를 채택했고, 결과적으로 이런 제도화는 젠더 이슈의 개인화를 초래했다는 게 코넬의 생각이다. 이처럼 젠더에 대해 무표정한 만큼, 평등과 정의에 있어서도 중립적이며, 사회적 약자들을 돕기 위한 노력에 부정적이다. 패권적 남성성에 기업가적 남성성이 추가된다는 것은, 남성성이라는 사회적 실천이 관계적이고 변화무쌍하며 세태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저자의 아이디어로 미루어 보면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기존의 가부장제가 동성애에 극도의 배척을 보인 반면, 신자유주의는 동성애를 개인의 선택으로 치부하고 방관한다. 그 결과 기업가적 남성성이 편입된 패권적 남성성은 동성애에 대한 배척이 감소하게 되었고, 이는 다수의 남성성들이 서로에 대해 갖는 관계가 안정적이지 않다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

2.6. 백래시 담론

개정판 후기에서 저자가 언급한 또 다른 하나는 백래시(Backlash) 담론에 대한 것이다. 수전 팔루디(S.Faludi)에 따르면, 백래시란 사회구조의 변화로 자신의 권력이 감소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다수 집단이 그 변화에 격렬하게 반발하는 현상을 말한다. 서구권에서는 최근 들어 "남성들은 설령 가부장제로부터 어떤 혜택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가부장제로 인해 치러야 하는 다양한 불이익과 희생들이 훨씬 더 크다!" 는 주장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는 저자의 개정판 출판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서 마침내 현대의 MGTOW와 같은 대강의 군집으로 개념화되었다. 저자는 이런 흐름에 대해서 자신의 다른 저서 《Gender》 에서 정리한 바 있었다.

그렇다면 젠더의 3층구조 및 상징계에 있어서 남성이 가부장제로부터 얻는 이익과 비용들을 대차대조표의 형식으로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저자는 해당 저서에서 그 초안을 소개하였으며, 여기서도 후기에서 한번 더 이를 언급했다. 하지만 저자는 "대차대조표는 B/C분석 같은 것이 아니며, 손익계산은 '어느 쪽의 피해가 더 큰가' 를 경쟁하는 건설적이지 못한 수사"라고 잘라 말했다. 보기에 따라서는 불이익이 아니라 이익을 얻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 대차대조표를 일부 다듬어서 나무위키에 소개하면 다음과 같은데, 국내에서도 최근 인기를 끄는 주장인 만큼 그 논리가 상당히 익숙할 수도 있다.
  이익 불이익
권력 기업과 국가에서의 지배적 지위
공권력 통제권
강간 및 가정폭력의 낮은 위협
범죄자 및 수감자 비율
살인 및 폭행의 높은 위협
경쟁의 빈번한 노출
카텍시스 우선시되는 남성의 쾌락
거대한 성 서비스 산업
소외된 섹슈얼리티
자녀양육에서의 배제
노동 높은 평균소득
경제적 참여와 기회 접근성의 우위
기술과 기계의 통제권
3D업종 노동자 비율
생계부양의 책임
더 높은 과세
상징 문화적 제도 통제권
남성우위에 대한 종교적 승인
자원접근성이 높은 분야 지배
학업성취도 역전
인문학으로부터의 소외
이혼 분쟁에서의 열위

이런 대차대조표가 많은 이들을 오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지적이 있는데, 코넬에 따르면, 남성이라는 범주 속에서 이익과 불이익이 불균형하게 분배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가부장제로 가장 많은 이익을 보는 남성이 가장 많은 불이익을 보는 구조가 아니다. 어떤 남성들은 불이익은 거의 겪지 않으면서도 이익만 잔뜩 챙기고, 어떤 남성들은 이익은 거의 챙기지 못하면서도 그 불이익만을 잔뜩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리고 보통 후자가 "가부장적 배당금" 논리를 접하면 펄쩍 뛰면서 흥분한다. 이러한 현실은 남성이라는 똑같은 범주로 분류되는 30억의 인구 속에서도 그 사이에 다양한 차이들이 존재하며, 이는 결국 남성이라는 범주의 이질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페미니즘의 역사에서 초기에는 남성이 예외 없이 가부장제를 통해 모든 여성들을 지배하고 억압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얼마 안 가서 에페미니스트들을 비롯한 남성해방 운동이 페미니즘으로부터의 남성의 수혜를 기대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물론 두 집단의 밀월관계는 1980년대 초엽까지만 지속되었다. 젠더의 대한 남성의 입장은 더 이상 일원화하기 어렵게 되었고, 공식적으로는 젠더 평등으로 천천히 이행한다 하더라도, 이에 대한 제도 및 대중의 동향은 매우 복합적이고 획일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저자가 보기에 가부장제는 남성들을 여성해방 운동 세력과의 정치적 '전투' 를 위한 '전장' 으로 내몰지 않는다. 남성들 역시 페미니즘과의 일대 격전(?)을 위하여 스스로를 무장하지 않는다. 백래시는 그런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저자가 생각하기에 백래시의 정체는 정치적 영역이 아니라 문화적 영역에 존재한다. 가부장제는 페미니즘에 대항하는 남성들로 무장시키는 대신, 남성들을 여성비하적인 문화 콘텐츠들을 요구하는 소비자들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옳다면, 여성해방과 백래시 사이의 전장은 다른 곳이었던 셈이다.

3. 학계의 반응과 비판들

우선 패권적 남성성이라는 좋은 이론적 조망을 얻은 연구자들은 이를 활용하여 다양한 남성 집단들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론을 적용한 사례로서, Kendall(2000)[24]은 인터넷 초창기 시절의 온라인 포럼 BlueSky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대다수가 이성애자 백인 남성으로 구성된 이들은 자기 자신을 " 너드" 로 정체화하고 있었으며, 여성성 및 여성적 남성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타자화하는 내용의 채팅을 반복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패권적 남성적 측면들에도 불구하고 (ex. 기술, 공학 등) 여성과의 낭만적 관계 및 성관계 자체를 포기하거나 두려워하여 물러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안상욱(2011)[25]의 석사논문에서도 지적하듯이, 국내의 " 안 생겨요" 와 같은 유행어들에서 볼 수 있는 자조적인 자평과도 궤를 같이 한다.

젠더심리학 분야에서의 적용 사례를 한 가지 들자면, Ricciardelli 등의 연구자들(2010)은[26] 2004-2006년 사이에 캐나다에서 출간된 8종의 남성 잡지의 기사들을 대상으로 내용 분석을 실시하였다. 연구에 사용된 남성지는 Men's Health, Esquire, Gentlemen's Quarterly, MAXIM, Stuff, OUT, Details, FHM이었다. 이들은 다양한 주제들에서 다양한 기사들을 내놓았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 메시지는 역시나 "당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당신의 신체와 옷을 보기 좋게 유지해야 한다" 는 내용의 패권적 남성성을 가리키고 있었다고 한다.

국내의 현실에 대해서 패권적 남성성을 접목하려는 시도 역시 있어 왔다. 우선 이 개념은 사회과학자들보다는 인문학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소개된 것으로 보인다. 정윤희(2008)가[27] 사실상 본 저서를 통째로 소개하다시피 하면서 알린 것이 시초격. 이 문헌에서는 독일 인문학적 배경을 바탕으로 여러 예술 작품들과 시대상을 들면서 사회주의자, 파시스트 등의 이미지로 나타나는 패권적 남성성을 제시하였다.

젠더학자 정희진(2011)[28]은 이 책과 유사하게, 남성성이 가변적이고 임의적이기에 다른 사회적 범주들과의 복합적 관계를 함께 볼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기존의 젠더 담론은 이에 비해 지나치게 일차원적이고 단일하며 불변하는 남성성을. 상정하기에 문제가 된다. 이에 대해 그는 "메타-젠더적 인식론" 을 제안하면서, 젠더 담론의 내용이 아니라 젠더화된 젠더 담론 자체를 문제시하자고 제안했다.[29] 여기서도 역시, 남성성은 다수의 이상들 사이의 변화의 과정이며 특히 급격한 변화가 발생할 때 사람들은 남성성에 "위기" 가 닥쳤다고 믿는다고 이해된다. 문화적 원인들과[30] 신자유주의의 영향에 의해, 남성과 남성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하고 있으며, 메타-젠더적 인식론을 통해 이를 인식해야만 남성성의 연속적 변화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이 문헌의 핵심이다. 본서와 상당히 유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도 본서는 한 번도 인용하지 않은 것은 특이한 점.

위에서 언급했던 안상욱(2011)의 경우, 한국사회에서 제시되는 패권적 남성성의 기준이 지나치게 높은 데다, 현실적으로 생계부양자 및 보호자로서의 남성성이 쉽게 기대할 만하지 않은 사회구조가 유지되고 있기에, 많은 남성들은 '루저문화' 를 통하여 자기타자화를 발생시킨다고 보았다. 이는 남성의 경제력에 대한 전망을 불투명하게 하여 이성애 연애 각본의 도달 가능성을 낮추며, 그 결과 가상적 쾌락으로의 도피와 반영적 새도매저키즘(reflexive sadomasochism)[31]을 나타냄으로써, 여성혐오적 방식의 남성성의 확인에 골몰한다는 의미다.

또한 패권적 남성성은 국내 맥락에서 군사독재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회평론을 할 때에도 동원될 수 있다. 그 근거가 될 만한 문헌으로서, 박이은실(2013)은[32] 소위 "아버지라는 이름의 무게" 로 대표되는 희생적 남성상이 한국적인 패권적 남성성이라고 보았다. 한국 근대의 패권적 남성성은 한때 식민지 경험 6.25 전쟁을 거치며 해체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유교적 가족주의와 함께 (예컨대, "내가 중동 사막에서 좀 고생해도 사랑하는 가족들을 먹여살릴 수 있다면...") "풍요로운 중산층" 이데올로기가 결합하면서, 중산층으로 도약하기 위하여 위험천만한 중노동도 마다하지 않는 가장의 모습이 패권적 남성성으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군사독재와 징병제는 남성들을 연대적 구조에 포섭하고 위계적 질서를 사회에 확립시키는 데 기여하였다고 본다. IMF 페미니즘의 도래 후 한국적 패권적 남성성은 다시금 위협을 받았으며, 기존의 단일한 '터프하지만 희생하는 남성' 이미지는 다층적이고 복잡한 형태의 남성의 이미지로 재구성되어 왔다고 한다.

코넬의 제안에 대해 학계에서 건설적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Demetriou(2001)[33]와 Jefferson(2002)[34]의 두 건의 논문을 근거로 하여 패권적 남성성에 대한 합당한 비판을 소개하기로 한다.

먼저 Demetriou(2001)의 경우, 코넬과는 달리 동성애자들의 종속적 남성성이 때때로 패권적 남성성에 포섭될 수 있음을 입증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해 대안적 설명으로서 역사적 블록(historic bloc),[35] 그리고 혼종성(hybridity)[36]을 제시하고, 패권적 남성성이라는 조망이 이들 조망에 비해서 더 나을 것이 없다고 비판하였다. 예컨대, 패권적 남성성이 다른 남성성들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이 무조건 종속화 내지는 주변화하는 것 이외에는 없다고 어떻게 그렇게 장담하는가? 그런 관점이 본인의 저서에서 밝힌 패권적 남성성의 변화의 역사를 얼마나 잘 설명하는가? 코넬의 저서에서는 개념적인 미비함이 존재하고, 이는 이 저서를 인용하는 다른 2차 저작물들에서 패권적 남성성을 "모든 나쁜 것의 총체" 로서 잘못 정의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범죄학 문헌인 Jefferson(2002)의 경우에도 개념화의 문제를 심도 있게 비판하고 있다. 분명 코넬은 패권적 남성성이 관계적인 개념이라고 의도했던 것은 맞지만, 여러 이유들로 인하여 독자들을 오도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1) 패권적 남성성은 고정관념화된 남성적 속성들로 단순하게 귀인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2) 패권적 남성성이 마냥 부정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인식한 것 같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부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하고 있다. 3) 패권적 남성성이 맥락에 수반되지 않음을 암시하는 식으로 묘사되었다. 4) 인간의 정신적(psychic) 측면을 도외시한, 한 마디로 과잉사회화된 관점(oversociological view)에 입각한 남성성 담론이다. 특히 저자는 코넬이 자신의 분야인 사회학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오히려 정신분석학의 기여를 무시하는 오류를 저질렀다며,[37]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적 억압을 바탕으로 한 정신사회적(psychosocial)인 관점을 대안으로서 제시했다.

제퍼슨은 또한 이 책의 남성성 개념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남성성의 구현이기에 남성들은 그것에 대한 동경을 갖는다" 는 식으로 읽히는 것에 대해 범죄학자로서 불만을 표했다. 그에 따르면, 설령 가정폭력의 경우에도, 학대 남편은 범죄사실을 주위에다 자랑스럽게 떠벌리기는커녕 오히려 숨기려 하고, 자신의 폭력에 대하여 자주 후회하고 용서를 구하며, 사회적으로도 이들은 "감정 조절에 실패한 (따라서 여성적인) 사람" 으로 여겨져서 문화적 영웅으로 소비되지도 않는다. 더불어, 현대적인 의미의 패권적 남성성인 기업가적 남성성의 경우에도, 빌 게이츠와 같은 몇몇 성공적인 CEO들을 얼마나 잘 설명할 수 있느냐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4. 기타

이 책의 핵심적인 논제들에 대해서는 위에서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소개하였으나, 그 외에 나무위키에 한정하여 흥미를 끌 만한 지점이나 시사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소소한 이야깃거리들을 여기에 추가로 다루기로 한다.

4.1. 마스큘리즘에 대해

저자가 소개하는 남성 연구의 역사는 1960년대 여성 해방 운동의 흐름에서 함께 출발했다. 이때의 남성운동은 심리치료 분야를 중심으로 하여 리버럴 페미니즘 세력과 연대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목표는 카운슬링을 통하여 남성들이 양성성을 더 많이 촉진시키는 것이었다. 이때는 남성들이 남성성의 과잉과 여성성의 결여로 인해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관점이 많이 퍼져 있었다고.

그러다가 1980년대가 되자 페미니즘과 남성성 담론은 서로 결별하게 되었다. 과거의 여성운동에 대한 회의감과 탈진이 기존 페미니즘에 헌신하던 남성들 사이에서 폭넓게 확산되었고, 그 결과 "이제 남성들은 지쳤다. 우리가 대체 어디까지 공격받아야 하는가? 페미니스트들은 무력해진 남성들에 대한 부당한 비난을 그만두고, 남성들의 연약함과 취약함을 인정하라" 는 목소리가 크게 호응을 얻었다. 이제 심리치료사들은 남성들에게 여성성을 길러 주는 게 아니라, "잃어버린 남성성 되찾기"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이 무렵에 들어서 로버트 블라이(Robert Bly), 워런 패럴(Warren Farrell), 허브 골드버그(Herb Goldberg), 샘 킨(Sam Keen) 등의 논객들이 나타나서 남성성을 변호하기 시작했다. 현대에는 남성권익운동(MRM; men's right movement)이나 MGTOW가 그 흐름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저자가 보기에 이 새로운 움직임은 초기 페미니즘에 연대하던 시절의 움직임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초기의 분위기가 남성들에게 스트레스 죄책감을 안겼다면, 이후 "남성성 테라피" 가 결합된 새로운 움직임은 페미니즘의 비난에 불안해하는 남성들에게 해결책과 안도감을 제공했다. 이들의 활동을 통해 남성들은 양성평등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비난 받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만큼은 "우리 남성도 취약하고 손해 많이 보는 존재들이다!" 의 논리에 동참함으로써 피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이와 같은 "남성성 테라피" 운동은 공모적 남성성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위의 워런 패럴과 같은 인물들이 써낸 저서들이 타겟팅하는 예상 독자들은 가부장제의 영웅적인 수호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 저서들은 가부장제 하에서 침묵하면서 구조적 변화를 거부하고, 단지 자신이 어디에도 도덕적인 문제가 없는 선량한 시민이라는 것을 확인 받고 싶어하는 뭇 남성들을 겨냥하고 있다. 저자는 이와 같은 경향이 결과적으로는 안티페미니즘, 성소수자와의 연대의 소멸, 사회의 근본적 변혁의 실패, 그리고 남성성의 현대적 각색으로 귀결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나무위키에 한하여, 성재기의 사망 이후로, 한국사회에서도 남성성에 대한 수정주의적 움직임은 상당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4.2. 심리학과 분석 수준들

저자가 사회학자라는 배경이 영향을 끼쳤을 수 있지만, 저자는 1장을 비롯하여 여러 지점들에서 심리학이라는 학문 자체에 대한 깊은 회의감을 드러낸다. 저자가 이 책에서 그려내는 심리학자들은 크게 두 종류로,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그저 개인의 성적 욕망의 문제로 풀어내는 전통적인 정신분석학적 배경의 카운슬러들이거나, 반대로 모든 것이 뉴런 호르몬에 의하여 사실상 "결정" 된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주장하는 신경과학 환원주의자 내지 유전자 결정론자들이다. 그나마 책의 중간쯤에서 정체성(identity)이나 젠더 역할(gender role)과 같이 사회심리학에서 관심 갖고 연구하는 주제들이 슬쩍 언급되기도 하지만, 이미 상단의 각주에서 설명했듯이 저자는 이런 접근에 대해서도 사실상 비관한다.

사회학계에서 심리학에 대해 날선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의외로 드문 일이 아니며, 특히 사회구조나 문화에 대한 담론 내지 비평이 필요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 책의 경우에도, 심리학을 전공했거나 심리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다소간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나 그 비판의 지점이 심리학이라는 학문분야의 외연을 실질적으로 대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정신분석학은 심리학 중에서도 임상심리학의, 그것도 아주 일부분을 차지하는 접근일 뿐이며, 신경 환원주의 역시 한때 잠깐 주목받기도 했다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은 생물(생리)학적, 인지심리적, 사회맥락적 요인들을 균형 있게 고려할 것을 강조하고 가르치고 있다. 현직 심리학자들 앞에서 자신이 정신분석학에 대해 흥미가 있다고 말한다거나, 인간은 결국 유전자로 프로그램된 기계일 뿐이지 않냐는 식으로 말한다면 그 순간 레알 갑분싸(…)를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사회학에서 주로 관심을 갖는 사회구조라는 주제 자체가 심리학의 접근으로는 명백히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전 세계에 사회학과가 대학마다 심리학과와 나란히 개설되어 있고 연구비도 나란히 쏟아부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등하게 지적 자극을 주는 관계인 것이기에, 학문 간의 긴장을 유발하는 것은 불필요하다.[38] 누군가는 구조를 연구할 사람이 필요하고 누군가는 개인을 연구할 사람이 필요하다. 결국 문제는 분석 수준의 차별화이지, 어느 한 쪽이 옳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학제간 연구를 준비하는 사회과학자들이 유념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4.3. 실증주의에 대해

또 하나 언급할 만한 것으로는, 만일 독자 여러분이 사회과학의 엄밀한 과학성을 기대하고 이 책을 읽고 있다면 역시 상당히 마음이 편치 않을 수 있다. 지식사회학에 입각한 상태로, 저자는 사회 연구에 있어서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가설의 입증에 대해 근본적인 불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1장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과학이란 그 자체로 이미 남성적인 활동이며, 이미 서구의 자연과학은 완전히 젠더화되어 버린 상태라는 것이다. 이는 과학자들의 성비가 단순히 남초이기 때문인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과학자사회 내부의 권력구조와 소통구조, 조직문화가 남성성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과학자는 남성적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과학계는 남성적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남성성이 강하게 반영된 가부장제 그 자체, 그리고 가부장제가 영향을 끼치거나 가부장제와 이해관계가 얽히는 주제들을 연구하는 사회과학에 있어서, 현재의 과학계는 사회를 온전히 객관적이고 실증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때 사회과학계에 실증주의 및 양적 접근이 상당한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것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벗어날 때가 되었다는 생각과도 상통한다. 저자의 생각을 간결한 형태로 정리하면, "입장(standpoint) 없는 기술(description)이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연구자들이 자신이 은연중에 전제하는 "입장" 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비판적이고 전복적인 정신이 요구되는데, 그런 정신을 계발하고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은 사회학적인 접근이라는 것.

물론 학계에서 잊을 만하면 끊임없이 문제가 제기되곤 하는 체계적 편향성이나 연구자 편향, 후원 편향, 확증 편향 등등을 고려한다면, 사회과학계가 꼭 그렇게 이상적인 방식으로 지식을 탐구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민망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과연 어디까지 포기하고 물러나야 할지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할 여지가 있다.[39] 이론의 실증을 포기하는 순간, 남는 것은 기존의 담론을 합리화하기 위한 새로운 담론들의 과포화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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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번 개명한 것으로, 이전 이름은 Robert William "Bob" Connell. [2] 저자에 따르면, 생애사 연구의 더 많은 방법론적 논의에 대해서는 Plummer(1983)의 《Documents of Life: An Introduction to the Problems and Literature of a Humanistic Method》 등을 참고할 수 있다. [3] 코넬은 성별 노동 분업 및 임금격차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미 자본 자체가 젠더화되어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역시 그 자체로 이미 젠더화된 축적 과정이라고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4] 이 지점에서 상당히 많은 학술적 비판들이 있었다. 하단의 서술을 볼 것. [5] 여기서 저자는 실증주의에 대한 깊은 회의감을 드러낸다. 저자에 따르면, 실증주의는 그 자체로 중립적인 서술을 보장할 수 없으며, 개념의 엄밀한 정의를 위해 먼저 개념의 상식적 정의에 의존하고, 경험적 존재의 방식을 바탕으로 접근하는 것은 맥락에 무관하게 존재하는 '남성적' 혹은 '여성적' 행동이나 태도를 파악하기에 어렵다고 한다. 실증주의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하단에 다시 조금 더 서술한다. [6] 여기서 저자는 성 역할, 젠더 역할에 대한 회의적 관점 역시 드러낸다. 저자에 따르면, 젠더 역할이라는 접근은 한때 환영받기는 했지만, 용어에 논리적 모호성이 존재한다는 점, 젠더 간 상호작용에 대한 부적절한 은유라는 점, 젠더 역할에 있어 행동은 사회적 수준보다는 생물학적 수준에 의존한다는 점, 그리고 규범에 관하여 행동과 기대를 구분하지 못하고 서로를 증거로 삼았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는 접근이다. [7] 참고로 저자가 정의하는 "역할" 접근은 다음을 만족하는 사회과학적 배경에서만 의미가 있다. 개인이 수행할 수 있는 잘 정의된 스크립트(각본)가 있을 것, 수행의 대상이 되는 명확한 관중이 존재할 것, 개인이 감수해야 할 몫이 지나치게 크지 않아서 특정 수행을 꾸준히 지속할 수 있을 것. [8] 이 맥락에서 저자는 뱅쿠오(Banquo)의 유령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여기서 뱅쿠오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비극 《 맥베스》 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이다. [9] 이 지점에서 저자는 "all complexities of mire of blood" 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사실 이것은 아일랜드 시인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B.Yeats)의 〈Byzantium〉 3연에 등장하는 싯구다. [10] Jefferson(2002)은 자신의 서평에서, 패권적 남성성이 항상 단수 명사로 제시되었다고 말하면서 이것은 코넬이 주장하고자 하는 남성성의 다양성 및 역동성에 위배되는 서술 방식이라고 비판하였다. 따라서 제퍼슨의 논리를 따르자면, 패권적 남성성은 hegemonic masculinities로 표기되어야 한다. [11] 재미있게도, 저자가 인터뷰했던 응답자들의 경우, 상당한 고학력자 내지는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많은 수가 의외로 미신이나 점성술 같은 것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국내 분위기에 맞게 비유하자면 매일 아침마다 토정비결 내지는 "오늘의 운세" 를 챙겨보는 전문직 남성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12] 저자가 직접 거론한 인물들로 실베스타 스탤론,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있다. 이들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패권적 남성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는 것. [13] 정희진(2017)은《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제하의 문헌에서 이 분류를 소개할 때 동성애자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열위의 계급에 있는 남성들을 (ex. 군미필 남성) 설명하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 넓은 피지배자 남성들을 설명하기에 "종속적" 이라는 표현은 부적절하며, 이상적인 남성성으로서의 패권적 남성성에 대비될 수 있는 남성성이기에 "주변적" 남성성으로 불려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경우, 하단에 설명될 주변화된 남성성과의 용어상의 혼동이 예상된다. [14] 코넬에 따르면, 커밍아웃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버지가 패권적 남성성을 적극 받아들이는 경우에 한정되었다. [15] 코넬에 따르면, 이 사실은 많은 이성애 남성들의 생애사 연구에서 "어린 시절에 동성 친구와 성적인 접촉을 해 보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이성애자이다" 라고 보고하는 것과도 상응한다. [16] 저자에 따르면 이들은 "어딜 가든 리더가 되어라" 와 같이 남성의 역할에 대해 과도한 기대를 거는 메시지에 부담을 느끼지만, 그와 동시에 "남성은 여성보다 리더에 적합하다" 는 생각에 동의하는 등 관습적 젠더 이분법을 선호한다. [17] 이처럼, 말만 들으면 도덕적으로 흠 잡을 만한 데가 없어 보이는 것이 공모적 남성성의 특징이다. 이들이 가부장적 사회질서에 '공모' 하는 것을 그만두려면, 저자의 기준에 따르자면, 이 응답자의 경우 당장에 잡지사를 박차고 나왔어야 한다. [18] 예컨대, 저자에 따르면, 직장에서 여성 상사가 자신이 내놓은 제안을 정면으로 기각하는 경우 등. [19] 사회심리학에도 유사한 흐름의 연구가 있다. 예컨대 마르고 몬타이스(M.J.Monteith) 등의 연구자들은, 평소 편견이 약한 평등주의자들은 자신이 편견을 갖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일반적 불편감(general discomfort)에 더해서 심한 죄책감과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이는 평등주의를 체현하는 것이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자 내적인 노력이기 때문. 하지만 평소 편견이 강한 개인들의 경우, 자신이 편견을 갖고 있음을 깨달으면 일반적 불편감만을 경험하며, 그마저도 잘 경험하지도 않는다. 이는 이들이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사회규범에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 참고로 Amodio 등(2007)의 사회신경과학 연구에서는, 평등주의자들은 자신이 편견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자책할 때 〈일상에서 편견을 줄이는 법〉 이라는 잡지 기사가 주어지면 그것을 관심 있게 읽었지만, 편견 심한 사람들은 자신이 편견이 있건 말건 그런 건 애초에 읽지도 않았으며, 이러한 차이가 뇌 영상 수준에서도 나타났음을 발견하였다. [21] 그 이상으로 이 남성성이 선망되면 곧바로 주류 사회에서 제지하게 된다. 한때 우리나라 문화계에 이슈가 되었던 "조폭미화물" 논란이 한 사례. [22] 아들러에 따르면, 남성 개인은 자신의 열등감이나 취약점을 인지했을 때 신경증을 일으키고, 그 결과 나타나는 내적 모순을 완화하기 위해 남성적 측면을 과장하고 강조하며 과잉 보상하려 한다. [23] 예컨대 마약중독자 재활원에서 직업교육을 받다가 알게 된 여성 강사 등. [24] Kendall, L. (2000). "Oh no! I'm a nerd!": Hegemonic masculinity on an online forum. Gender and society, 14(2), 256-274. [25] 안상욱 (2011). 한국사회에서 '루저문화'의 등장과 남성성의 재구성.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여성학 협동과정. [26] Ricciardelli, R., Clow, K. A., & White, P. (2010). Investigating hegemonic masculinity: Portrayals of masculinity in men's lifestyle magazines. Sex roles, 63, 64-78. [27] 정윤희 (2008). '남성성'의 사회적 구성과 현대 남성성의 변화 고찰. 젠더연구, 13, 145-163. [28] 정희진 (2011). 편재하는 남성성, 편재하는 남성성. 권김현영 편저, 남성성과 젠더 (pp.15-33). 자음과모음, 서울. [29] 한편 이 과정에서 정희진(2011)은 "양성평등" 이라는 용어에 담긴 체제순응의 압박, 양성이라는 개념이 갖는 남성중심적 사회의 은폐(혹은 탈정치화)를 들어서 해당 표현을 거부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가 궁금하다면 《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등을 볼 것. [30] 여기서 저자에 따르면 한국의 패권적 남성성은 서구 중산층 남성들이 떠올리는 그것과 같지 않은 "식민지 남성성" 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를 볼 것. [31] 자기 내부에 타자화된 여성성이 형성될 때 자기처벌을 함으로써 남성성을 확인하는 것. [32] 박이은실 (2013). 패권적 남성성의 역사. 문화과학, 76, 151-184. [33] Demetriou, D. Z. (2001). Connell's concept of hegemonic masculinity: A critique. Theory and society, 30(3), 337-361. [34] Jefferson, T. (2002). Subordinating hegemonic masculinity. Theoretical criminology, 6(1), 63-88. [35] 안토니오 그람시가 제시했던, 문화적 패권에 대한 마르크시즘적 접근의 맥락에서 나온 용어이다. [36] 호미 바바(H.Bhabha)가 제시한 용어이다. [37] 해당 논문의 70-73페이지를 볼 것. (영어) [38] 여기서 더 이상 자세히 언급하긴 어렵지만, 사회학이 심리학을 "구조맹(盲)" 이라고 비난한다면 심리학도 사회학을 "개인맹" 이라고 비난할 수 있다. [39] 예컨대 대니얼 카너먼이 언급했던 바 "적대적 협업" 을 활용한다거나, 동료평가 과정에서의 자기교정성에 의존한다거나, 서로 다른 배경의 연구자들이 반복검증을 해서 재현성을 확인한다거나 하는 등의 다양한 시도들이 있어 왔다. 이들 중 어떤 것도 백 퍼센트 "객관적" 이라거나 "중립적" 인 방식으로 인간만사를 논하는 것까지 보장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객관적이기 위한 일말의 몸부림만큼은 쳐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