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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2 22:29:40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도서명 여성혐오를 혐오한다(韓)
女ぎらい: ニッポンのミソジニ(여혐: 일본의 미소지니)(日)
발행일 2010년(원서)
2012년(역서)
저자 우에노 치즈코
(上野千鶴子)
출판사 키노쿠니야서점(紀伊国屋書店)
은행나무
ISBN 9788956606217
#Amazon

1. 소개
1.1. 출간 배경 및 저자 소개
2. 목차 및 주요 내용
2.1. 챕터별 내용 정리2.2. 여성혐오 개념의 소개
2.2.1. 그것은 광범위하고 강력하다2.2.2. 그것은 호모소셜의 산물이다2.2.3. 그것은 근대의 산물이다
2.3. 남근중심주의: 여성지배를 위한 넷째 자원2.4. 도쿄전력의 그녀는 왜 성매매를 했는가?2.5. 물론 남자들도 힘들다... 호모소셜 때문에
3. 저자의 관점 정리4. 평가5. 관련 문서6. 둘러보기

1. 소개

여성학 분야 교양서 중에서 신드롬이라고 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바 있는 책으로, 2015년 이래 국내 사회에서 여성혐오가 이슈가 되자 덩달아 뒤늦게 화제가 되었다. 이 책은 여성혐오가 남성들 간의 동성사회성(호모소셜; homosocial)과 동성애 혐오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동함으로써, 일본인 남녀 모두에게 강하게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하는 이론서이다. 아주 새로운 이론을 제기하는 것은 아니고, 이미 서구의 페미니즘 이론가인 이브 세지윅(E.K.Sedgwick)이 세웠던 이론을 일본 사회에 맞게 도입한 것. 좀 의외일 수도 있는 사실인데, 이 책은 만악의 근원이 여성혐오라고 주장하는 책이 아니다! 이 책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문제삼는 것은 남성들이 의식하는 호모소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유지되는 남성성에 있다.

일본에서 나온 책이다 보니 당연히 일본 사회의 여러 사건사고들이 적극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4장의 아키하바라 무차별 살상사건, 12장과 13장에서 분석되는 도쿄전력 여직원 살인사건에 대해서는 대충 이런 사건이라는 것을 미리 배경지식으로 알고 있는 상태에서 독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저자가 일본 지성들 사이에서 알아주는 싸움닭(…)으로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인지라, 유명 문인들과 논객들, ( 젠더학 관련으로 국내에도 번역될 정도로 유명한 책을 몇 권씩 써낸) 사회학자들, 심지어는 일본 황실(!)에 대해서까지도 광범위하고 성역 없는 비판을 거침없이 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사회학자 아무개가 어디서 이런 말을 했는데 이건 논리적으로 이래서 틀렸고 저래서 틀렸다, 뭐 이런 이야기가 자주 나오므로(…) 일본의 오피니언 리더들이나 유명 사회학자들에 대한 배경지식이 많은 독자라면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겠다. 어떤 면에서는 참으로 일본답다(?)고 느낄 만한 소소한 점으로, 성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가능성으로서 2D 오타쿠 매체를 대안으로 슬쩍 거론하기도 했다(…). 물론 하단에 설명했다시피 저자 본인은 오타쿠 개개인에 대해서도 비판적이긴 하지만.

국내에는 나일등 역으로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2012년에 번역되어 들어왔다. 이 책에서 소위 ' 루저' 라고 번역된 부분은 원문에서는 '패배자 개' 를 의미하는 마케이누(負け犬)인데, 해당 역자의 정의에 따르면 "사회적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낙오자 그룹" 을 의미한다. 일본 젊은이들의 결혼 시장에서 노처녀들은 성적인 매력이 없어서 연애 경쟁에서 탈락하게 되었고, 그 울분을 페미니즘 활동을 하면서 푼다는 고정관념적 시선도 있다고 한다. 하여간 이런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자조적으로 (싸움에서 밀려난 뒤 멀리서 짖기만 하는) 패배자 개에 빗댄다는 것. 마침 '루저' 라는 영어단어의 뜻과도 묘하게 들어맞는다.

1.1. 출간 배경 및 저자 소개

"이 책은 많은 여성, 남성 독자들, 특히 남성 독자들에게 유쾌하지 않은 독서 경험으로 다가올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많은 남녀가 눈을 돌리고 싶어하는 것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내용을 줄기차게 적어놓은 것을 읽는 것이 기분 좋은 경험이 될 리가 없다. 불쾌함을 느끼며 책을 쓰고 불쾌함을 느끼며 독서해야 하는 책을 쓴 것은 어째서일까? 아무리 불쾌하다 하더라도 눈을 돌리면 안 되는 현실이 그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앎으로써, 설사 쉽게 달성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p.305, "글쓴이의 말" 中

저자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는 국내에는 여성혐오라는 단어를 만든 일본 사회학자라고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 우에노 본인은 그나마도 역어를 취하지 않고 그냥 "미소지니" 라고 적었다는 점에서 이는 엄밀히 말하면 사실이 아니다. 일단 저자 본인은 교토대학 사회학과에서 박사를 수료한 뒤,[1] 도쿄대학 사회학과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후 사회비평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한 번 걸려온 싸움은 절대로 피하지 않는 논객", "일본에서 가장 강한 여성" 으로 악명(?)을 얻었다. 실제로 모든 토론회 출연요청에 어김없이 승낙하는 걸로 유명하다고. 한편 이시하라 신타로는 그를 위험인물 제1호라고 지명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의 NPO인 WAN(Women's Action Network)의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근대 가족의 성립과 종언》(近代家族の成立と終焉)으로 1994년 산토리 학예상을 수상했다.[2] 지적인 스탠스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에 이론적 기초를 두고, 일본 사회에서 가족 간에 나타나는 여성 지원과 돌봄의 사회 시스템이 갖는 한계를 비판해 왔다. 역자 나일등 씨에 따르면, 그의 주요 연구주제는 개호(介護) 즉 '돌봄' 으로서, 특히 대표작으로 2011년의 《케어의 사회학》(ケアの社会学)이 있다. 국내 페미니스트와도 교류중으로, 조한혜정 교수와 함께 교환했던 서신 《경계에서 말한다》가 한일 공동으로 출간된 적이 있다.[3] 하술하겠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내셔널리즘과 젠더》(ナショナリズムとジェンダー) 등의 저술활동을 하기도 했다.

우에노는 처음에는 키노쿠니야서점 출판부의 요청을 받아, 회사의 계간 홍보지 《Scripta》 에 페미니즘 관련 연재를 시작했으며, 이렇게 시작된 연재는 장장 3년 반 동안 이어졌다고 한다. 처음에는 읽어주는 사람이 많지 않은 잡지라서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줄곧 하고싶은 말을 이어갔는데, 어느새 애독자들이 생겨났고, 정신을 차려 보니 이 홍보지에 "일본에서 가장 페미니즘적인 잡지" 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었다고(…). 연재를 이어가면서 저자는 이 주제로 자신이 말하고 싶었던 것이 너무 많았음을 깨달았고, 해당 출판사의 도움으로 이를 책으로 묶어 내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나온 책이 바로 본서.

저자는 이 책이 쓰기에도 마음이 불편하고, 읽기에도 마음이 불편한 책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아무리 불쾌하다 하더라도 결국 현실은 현실이기 때문에 그 불쾌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저술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을 읽고 난 독자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갈릴 수 있다고 하는데, 불쾌함과 황당함이 그것이다. 만일 불쾌함을 느꼈다면 이는 실제로 여성혐오가 존재함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고,[4] 여성혐오가 없는 사회에서 이 책의 내용은 독자들에게 오히려 황당함을 주게 될 거라고 한다. 성 평등한 사회에서는 오히려 "아니, 이렇게나 어처구니없는 사회가 존재한다니!" 라는 반응이 나오게 된다는 것.

2. 목차 및 주요 내용


연재물을 바탕으로 책으로 묶어서인지 전체적으로 보아 챕터가 굉장히 많지만, 크게 몇몇 부분으로 묶어볼 수 있다. 4-6장의 내용은 일본 사회의 다양한 측면들로부터 여성혐오의 존재를 도출하는 내용이고, 7-8장은 문화사와 풍속사를 통해서 여성혐오와 근대성을 고찰한다. 9-10장은 정신분석학을 바탕으로 하여 현대 일본 사회의 전형적인 가족관계의 구조를 분석한다.[5] 12-13장에서는 도쿄전력 여직원 살인사건을 둘러싸고 진범의 정체만큼이나 풀리지 않는 또 다른 미스터리,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이 어째서 헐값에 몸을 파는 여자가 되었나" 를 논의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일본 사회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는 여성혐오에 대한 예시화라고 할 수 있다.

책의 전체 내용을 세줄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2.1. 챕터별 내용 정리

각 챕터의 내용들을 각각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책에서 전반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몇 종류로 추려서 하단에 다시 챕터의 순서와 무관하게 소개할 것이다. 먼저 이 책에서 가장 빈번하게 언급하는 단어인 "여성혐오" 에 대해서 저자가 강조하는 부분을 세 가지로 나누어 소개한다. 즉, 저자가 이야기하는 여성혐오의 주목할 점은 그것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점, 남성 간의 관계로부터 나타난다는 점, 역사적으로 그 기원이 대단히 짧다는 점이다. 다음으로는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기 위해 동원하는 다양한 자원들 중에 '남근 페티시즘' 이 마지막 희망(?)으로 남성들에게 받아들여진다는 주장을 소개하고, 도쿄전력 사건과 관련하여 저자가 내놓는 성매매 여성들의 심리에 대한 독특한 제안을 다룰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우리 남자들도 힘들다!" 의 대답에 대한 저자의 입장을 짧게 인용한다.

역자 나일등 씨는 일본 왕가를 가리켜서 "황실", "황태자" 같은 단어들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나무위키 r.1 버전 기준으로, 이들 용어는 각각 "황실", "왕태자" 로 지칭하고, 본서의 목차를 직접 지칭하는 등의 부득이한 경우에만 역자의 표기를 따랐다.

2.2. 여성혐오 개념의 소개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실상 여성혐오(misogyny)라는 단어는 우에노가 본서에서 처음으로 제안한 것이 아니다. 이 용어는 이브 세지윅이 《Between Men》 이라는 자신의 저작을 통하여 처음으로 내놓은 것이고, 여성혐오가 호모소셜의 성립 및 유지에 봉사한다는 핵심적 논리가 바로 그 책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저자 우에노가 특별히 더 강조한 몇몇 측면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는 저자가 강조한 포인트를 기준으로, 여성혐오를 학술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살펴본다.

2.2.1. 그것은 광범위하고 강력하다

저자는 우선 여성혐오라는 개념에 대해서 "여성 멸시" 라고 일차적으로 언급하면서,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객체화, 그리고 여성에 대한 여성의 자기혐오로서 개념화한다. 제1장에서부터 저자가 힘주어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마치 중력과도 같이 우리 (일본의) 사회에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것으로서, 의식하지 않으면 그 존재를 알아차리기도 힘들고, 노력한다고 해서 쉽사리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알든 모르든 간에 모든 사람들이 그 영향을 실시간으로 받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저자는 여성혐오의 메커니즘이 인간의 욕망 깊은 곳에 뿌리내려서 직접적으로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건드리기 때문에 쉽게 극복되기 어렵다고 본다.

저자는 이에 대한 일차적인 반응으로서, "하지만 남성들이 여자를 그렇게 '싫어' 한다면, 어떻게 영웅호색이니 바람둥이니 하는 개념들이 사회에 존재할 수 있겠는가?" 를 상정한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사실은 호색한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일수록 극심한 여성혐오를 보이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일본 문단에는 여자 밝히기로 이름이 나 있는 몇몇 인사들이 있어 왔는데, 저자가 거론하는 이름을 들자면 요시유키 준노스케(吉行淳之介), 나가이 가후(永井荷風)가 있다. 이들은 유곽에서 유녀들에게 인기가 많기로 유명했는데, 이들이 성매매 여성들과 맺은 긴밀한 친분은 특히 작중에 등장하는 유녀들의 언행과 심리를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면서 남성 문인들이 격찬했다(…). 그러나 저자가 비판하는 것은 이들이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망상을 문학으로 구현했다는 것. 이들이 묘사하는 여성들은 언제나 남성을 "먼저 유혹하며", (또는 적어도 남성이 섹스를 시도할 당위성을 만들어 주고,) 결국에는 언제나 " 쾌락에 지배당한다". 이는 저자가 보기에 포르노가 갖고 있는 두 가지 전형적인 특징이다. 페미니스트 문학자 미즈타 노리코(水田宗子)에 따르면, 이런 텍스트는 여성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남성이 여성에 대해 믿고 싶어하는 판타지를 그려냈을 따름이다.

일부 남성들은 여성혐오의 보편성에 대해 이렇게 반론한다. "하지만 저는 제 어머니와 누이들, 제 여친을 몹시 아껴준다고요!" 하지만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무리 극성의 여성혐오자라도 자기 어머니 모성애만큼은 있는 힘을 다해 신성시한다고.[6] 이 여성은 아껴주고 저 여성은 함부로 멸시해도 된다고 믿는 '성적 이중잣대' 가 발현되는 것은 그 자체로 여성혐오와 깊은 관련이 있다. 다나카 미츠(田中美津) 등의 여성운동가들에 따르면, 남성들은 자신들이 보호할 만한 성녀, 어머니, 결혼 상대, 성적 아마추어에 분류될 여성을 정하고, 자신들이 죄책감 없이 욕망을 풀 수 있는 창녀, 놀이 상대, 성적 프로로 분류될 여성을 정한다. 이들은 성녀에 대해서는 생식용 여성으로 생각하여 가문의 대를 잇고 자손을 재생산할 임무를 완수하게 하도록 있는 힘을 다해 숭배하려 하는 반면, 창녀에 대해서는 쾌락용 여성으로 생각하여, 호모소셜한 사회 속에서 남들보다 많은 여성들을 '섭렵'(?)하여 동료 남성들의 경탄을 받기 위한 용도로 거리낌 없이 사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구분법에서 가장 거슬리는 존재는 '애 딸린 창녀'(…)일 것이라고.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성녀-창녀 이분법은 여성에게는 순결을 요구하면서도 남성들은 성적으로 방종하고 경험이 많을수록 환영을 받는다는 상황을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일부 여성들이 창녀 역할을 도맡으며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사회의 모순으로부터 등장한 것이라고 한다.

저자의 여성혐오 담론에 반대되는 여성들도 있을 수 있다. 일부 여성들은 페미니스트들이 막연히 생각하는 것처럼 늘 그렇게 '평등' 한 관계 속에서 사랑을 나누거나 결혼하고 싶어하지 않기도 한다. 저자에 따르면 심지어 페미니스트를 자칭하는 여성들도 그런 것을 선호할 수 있다고.[7] 이런 이들은 남성에게 먼저 자발적으로 "평생 당신만을 따르겠습니다" 라며 숙이고 들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코르셋을 평생 차던 사람이 코르셋을 벗으면 걷지 못하고 주저앉는 것과 같이, 관습적인 생활 습관과 성애의 방식은 개인의 사고와 감정을 크게 좌우할 수 있다고 한다. 하단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저자는 이것이 근대 이후로만 관찰되어 온 패턴이라고 분석한다. 전근대 사회였으면 아내가 바지런히 남편의 도시락을 싸 주며 내조하는 것을 보고 "참으로 정숙한 아내다!" 라며 칭찬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아내된 몸으로서 하녀처럼 저게 뭐 하는 짓이냐?"(…) 라고 비판하게 된다는 것.[8] 즉 남편에게 봉사하고 내조하며 순종하는 여성상은 근대에 확립되어 학습되어 온 가치관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저자는 일본 개화기의 관련 문헌들도 인용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세상에는 위와는 정반대의 의미로 여성혐오의 보편성의 반례가 될 것 같은 여성들도 있다. 일부 여성들은 "글쎄요, 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제가 딱히 여성이라고 불이익을 받는 것에 대해 크게 의식한 적이 없는데요?" 라고 말하기도 한다. 저자는 이에 대해 14장에서 분석을 시도한다. 이런 자칭 '예외적 여성' 들은 자기 자신이 일반적인 여성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믿으면서 여성을 향해 가해지는 멸시와 폄하를 피해 간다. 저자에 따르면 여기에는 2가지 전략이 있는데, 첫째로는 다른 여성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며 남성들의 비난에 동조하는 "출세 전략" 이 있고, 둘째로는 자신이 애초에 다른 여성들보다 못났다고 생각하며 남성들이 뭐라 하든 개의치 않는 "낙오 전략" 이 있다. 전자는 아마도 여왕벌과 같은 성공한 커리어우먼을 사례로 들 수 있을 것이지만, 본서에서 저자는 전자보다는 후자에 더 주목한다. 일본 사회에서 낙오 전략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 바로 소설가 하야시 마리코(林眞理子). 그녀의 작품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치졸하고 하찮은 군상들이 등장하며, 여성에 대한 냉소와 여성성의 추레함(…)에 대한 고발이 이어진다.[9] 하야시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소위 '잘나고 예쁜 여자' 들을 신나게 비웃고, 독자들은 그 인물들에 공감하는 게 아니라 작가의 시선에 공감하면서 "맞아요, 제 친구도 저렇더라고요!" 라는 독자 편지를 보낸다고. 저자 우에노가 보기에 이것 역시 여성불신에 대한 여성들의 공모이며, 이런 자발적 낙오자들은 결국 남성들의 호모소셜한 연대를 다지기 위한 여성 멸시에 합작하는 셈이다. 가해자 역할을 하기에 피해자라는 자각이 없는 것.

2.2.2. 그것은 호모소셜의 산물이다

남자가 받을 수 있는 최대의 평가는 같은 남자가 내뱉는 "제법인걸!" 이라는 칭찬이 아닐까? 시대극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호적수와 칼과 칼을 맞대고 힘겨루기를 하다가 얼굴과 얼굴이 가까워졌을 때 귓바퀴 언저리에 대고 읊조리는 "제법인걸!" 이란 말보다 더 가슴 요동치는 쾌감이 있을까... (중략) ...남자는 남성 세계의 패권 게임 속에서 다른 남자들로부터 실력을 인정 받고, 평가 받고, 칭찬 받는 것을 좋아한다... 승자가 되기만 하면 여자는 전리품처럼 자동적으로 따라오게 된다...

...이상의 논의를 간결한 말로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서로를 남성으로 인정한 이들의 연대는, 남성이 되지 못한 이들 여성 배제하고 차별화함으로써 성립한다.
- pp.30-31; 37

사실 여성혐오에 대해 이해하려면, 그리고 여성혐오의 존재 여부나 광범위함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먼저 저자가 언급한 동성사회성, 즉 호모소셜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한다. 저자가 인용하는 이브 세지윅의 이론 자체가 "우리 사회에서 나쁜 남성들이 불쌍한 여성들을 이렇게 억압하고 있다!" 의 단순한 비분으로부터 출발했다기보다는, "남성들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호모소셜) 자체가 남성들로 하여금 여성을 억압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의 통찰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 즉 세지윅과 우에노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여성혐오는 여성들을 억누르며 강자의 유열을 느끼는 특권층 vs. 남성들에게 착취당하며 모든 걸 다 빼앗기는 불쌍한 피지배층 구도가 의외로 아니다.

먼저 이 호모소셜, 한자어로 번역할 경우 동성사회성이 될 수 있는 개념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일단 남성들 사이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경쟁의 맥락을 따른다. 남성들은 경쟁에서 승리하기를 원하고, 이는 동료 남성들에게 자신의 우월함, 특별함, 유능함, 전문성, 독창성, 기타 등등을 인정 받음으로써 보상 받게 된다. (저자는 여성들의 경우 이런 방식으로 동성의 타인을 평가하지 않는다고 논의를 제약한다.) 이런 남성들 사이의 독특한 관계가 대체 무엇일까에 대해서 여러 식자들이 고민해 왔다. 저자가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고민의 효시는 심지어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로까지 잡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이 발견한 바에 따르면, 남성들은 칭찬이나 인정을 받아도 기왕이면 동료 남성에게서 받고 싶어하지, 여성이 해 주는 승인은 그 희열에 있어서 아무래도 남성만 못하다는 것이다. 처음에, 뤼스 이리가레(L.Irigaray) 등의 어떤 사람들은 남성들이 자기들끼리만 인정해 주고 승인해 주려는 경향이 동성애적(homosexual)인 것이 아닐까 하고 짐작했다. 남성이 남성을 향하는 성적 지향이 그런 식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했던 것. 이것은 《 하나이지 않은 성》 에서 여성거래 시장의 개념으로 소개되었다.

그런데 이브 세지윅이 자신의 이론을 펼쳐, 남성 간의 배타적 승인은 동성애가 아니라 동성애와는 차별화되는 다른 무언가, 즉 동성 간의(homo) 사회적 관계(social)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지적하는 페미니즘 도서가 바로 《Between Men》. 즉 남성들 사이에는 성애적이지 않은 형태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으며, 이것이 호모소셜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호모소셜은 동성 간에 나타날 수 있는 일체의 성적 욕망을 억압한 상태에서 나타난다. 저자는 정신분석학 용어를 들어 구체화하는데, 여기서 억압되는 것은 " 갖고 싶은 욕망" 을 의미하는 카텍시스(cathexis)일 뿐이지, " 되고 싶은 욕망" 을 의미하는 리비도(libido)는 억압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를 대놓고 말하면 남성들은 동료 남성에게 "난 죽었다 깨도 너를 '따먹고' 싶은 욕망은 없다. 하지만 나도 너처럼 남자다운 '싸나이' 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의 메시지를 서로 주고받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세지윅에 따르면, 리비도와 카텍시스는 그렇게 딱 잘라 명료하게 구분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연속선 내지는 미끄러운 비탈길과도 같은 관계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들은 지금 자신이 교류하는, 혹은 앞으로 교류하게 될 남성들 중 누군가가 자신을 '따먹고 싶어할지도 모르는' 혹시라도 벌어질지 모르는 소방차 게임에 대한 불안감을 갖게 되고, 눈에 불을 켜고 기를 쓰면서 그런 ' 느끼한 시선에 유혹하듯이 속삭이는' 남성들을 색출하려 한다. 마찬가지로 소위 '계집애 같은 남자' 역시 자신을 유혹(…)하고 있는 게이라고 판단하여 색출의 대상이 된다. 저자는 남성이 남성답기 위한 개념적 경계선이 의외로 흔들리기 쉽기에 그만큼 남성들이 게이를 배척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남성은 어떤 일이 있어도 남성에게 '따먹히는' 존재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좀 더 섹슈얼리티에 입각한 용어를 쓰자면(…), 남성들은 자신들이 다른 남성들에게 성적으로 객체화되는 것을 거부한다. 이것이 바로 꼴마초일수록 동성애에 대한 반감이 큰 이유이다.

성적 주체화와 객체화의 문제를 이해하는 것은 호모소셜의 유지를 파악함에 있어 중요하다. 주체성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이미 시몬 드 보부아르의 《 제2의 성》 과 같은 문헌들에서 빈번하게 확인되는데, 남성들은 자신이 성적으로 주체가 되고 싶어하지, 타인의 욕망의 시선을 받는 존재, 타인의 욕망을 해소하는 도구로서의 존재, 타인에게 육변기 내지 오나홀 취급을 받는 존재가 되기는 원하지 않는다. 남성들은 오히려 타인을 욕망하는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 따라서 남성들은 자신의 욕망이 타자(객체)에게 향하고 있음을 과시하고 확인 받으려는 모습을 보이며, 그렇기에 너도나도 여성을 객체화함으로써, 다시 말해 여성을 자신의 욕망의 시선으로 샅샅이 해부하는 경향을 과시해 보임으로써 "이야, 너도 싸나이구나!" 라는 동료 남성들의 승인을 받고자 한다. 즉, 호모소셜이 여성을 객체화하는 공통점을 공유하는 남성들 사이에서 성립된다면, 그 관계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는 것은 그 집단 내의 남성들 중에서 상대방을 객체화할 수 있는 위험 분자들을 얼마나 빨리 색출하느냐의 여부다.

저자는 여기서 전시에 벌어질 수 있는 집단강간의 문제를 예로 든다. 가볍게 생각하면, 이 군인들은 일견 적성국의 여성들을 포악하게 강간하면서 '영원한 압제자, 승리자, 독재자로서 여체를 발 밑에 짓밟고 군림하는'(?) 남성성을 자기네들끼리 한껏 만끽하는 중일 수 있다. 하지만 세지윅과 우에노가 말하는 여성혐오그런 게 아니다! 여성혐오에 대한 이해에 호모소셜에 대한 이해가 빠졌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알 수 있는 부분. 호모소셜이 여성혐오를 유지시키는 모든 일의 원흉의 원흉이라는 점을 논의에 대입해 보자. 이 군인들은 어찌 됐건 그 상황에서 발기시켜야 한다. 동료 전우가 허리를 흔드는 꼴을 보고 자신의 발기가 안 되더라도, 그래도 한껏 자신의 발기를 과시해야 한다. 그 상황에서 혼자 강간에 실패하면 자신은 남자 취급도 못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장의 모든 군인들이 암묵적으로 똑같은 불안을 공유하고 있고, 결국 집단강간이 저질러지게 된다는 것. 국내에서 이슈가 되었던 소라넷으로 배경을 옮겨 보자. 집단강간 모의가 벌어지고 있을 때 "난 빠지겠소" 라고 용감하게(…) 누군가가 말한다면 그 사람은 남자 구실도 못 하는 고자 취급을 받을 위험이 있다. 여자 몸이 앞에 있으면 당연히 '따먹을 줄' 알아야 남자(보다 정확히는, 성적 주체)라는 생각이 통용되는 것이다. 여성혐오라는 이름의 무대에 오르는 등장인물들은 의외로 남성들뿐이다.

먼저 극단적 사례인 전시 집단강간을 설명한 뒤, 저자는 곧이어 보다 일상적인 사례, 즉 음담패설로 넘어간다. 아마도 저자는 "여성혐오가 남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나온다니, 그 증거가 어디 있느냐" 는 반응에 대해 제일 먼저 음담패설을 거론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남성들은 섹슈얼리티를 입에 잘 올리지 않지만, 그나마 입에 올리는 섹슈얼리티 담론은 태반이 음담패설이다. 우에노는 음담패설이 남성들이 함께하고 있을 때 서로의 남자다움을 인정하고, '내 욕망대로 타인의 몸을 범할 수 있는' 성적 주체임을 재확인하는 일종의 의례적 커뮤니케이션에 가깝다고 한다. 음담패설을 공유함으로써 얻는 것은 성욕의 충족이 아니며, 그 말을 입에 올린 동료 남성이야말로 "저놈은 진짜 남자 맞구나" 의 인식이라는 것이다. 저자 왈,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음담패설도 잠재적 청자를 여성으로 설정한 경우는 없다고... 일본 사회학계에서 이런 커뮤니케이션은 일명 '남자 말하기'(男語り)로 불리는데, 여성들은 음담패설을 통해 서로의 여성성을 확인한다거나 하는 경향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위와 마찬가지로, 이런 자리에서 혼자만 당당히 "이런 대화에는 별로 끼고 싶지 않다" 고 말한다면? 저자는 곧바로 그 사람이 '남자답지 못한 남자', 혹은 '여자 같은 남자', 즉 스테레오타입적인 게이로 싸잡혀 몰리게 될 거라는 불안감에 노출될 거라고 설명한다. 그렇지 않으려면 별 수 없이 그 대화에 공모하여 맞장구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사실을 모두가 알고 불안해하기 때문에, 욕구불만인 남성 하나가 불쑥 음담패설을 꺼내면 다른 모두는 불편한 마음을 안고도 그것에 억지로 맞장구쳐 줘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것이 남성들 사이에 여성혐오가 지속되는 양상이다. 여성혐오는 여성을 미워하는 마음에서 나온다기보다는, 오히려 남성들 사이에서 배척당하지 않기 위해 남성들이 취하는 여성 타자화의 생존전략이다.

호모소셜이 여성혐오로 성립되고 호모포비아로 유지된다면, 일부 남성들이 남성향 쇼타콘 장르에 빠져들거나, 반동성애 운동가들이 어린 남창 에스코트를 부리다가 발각되거나, 예쁘장한 여장남자에 성적 매력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지에 대해서도 설명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저자는 5장 후반부에서 간략하게 정리한다. 애초에 이런 "뚫리는"(be penetrated) 역할의 남성은 호모소셜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남자도 아닌 남자' 이기에 문제없다고 느낀다는 것. 이런 성학대 피해자들은 남성이냐 여성이냐가 문제가 아니며, 대부분 자기 의사가 확고하지 않고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는 미성년자라는 점이 더 중요하다.[10] 저자에 따르면 이런 어린 피해자들은 호모소셜의 타인을 객체화하지 않고서도 가해자를 성적 주체화할 수 있고, 대개 무력하고 저항하려 하지 않으며, 일이 잘 되면(?) 가해자에게 자발적으로 협조하기까지 한다고. 피해자 역시 자신도 나중에 성장하고 나이가 들면 어차피 성적 주체로서 거듭날 수 있다는 인식이 있기에, 지금 당장 잠시간 객체화를 당하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니라고 느낀다고 한다.

참고로 생각해 볼 만한 점은, 그렇다면 과연 여성들 사이에서도 호모소셜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느냐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물론 미국의 시인이자 페미니스트 에이드리언 리치(A.Rich)는 레즈비언 연속체(lesbian continuum)를 제안한 바 있으며, 세지윅 역시 그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이들에 따르면, 남성들은 호모소셜과 호모섹슈얼을 극명하게 구분지으려 하지만, 여성들의 우애의 양상에서는 일정 부분 동성사회적인 측면과 동성애적인 측면이 섞여 있다. 하지만 저자는 개인 수준에서는 여성 간의 끈끈한 우정이 가능함을 인정하면서도, 남성들이 형성하는 상호인정의 사회적 관계에 준하는 여성들 사이의 구조적 연대는 존재하기 어렵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여성들은 권력을 형성할 수 있는 자원이 남성에 비해 부족하기 때문에, 개별 여성들로서는 같은 동료 여성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보다 상대방 남성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편이 훨씬 더 이득이 크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라는 것. 저자는 또한, 여성이 동성의 타인을 평가하는 기준은 남성들의 그것에 비해서 훨씬 다차원적이고 복잡 미묘하기 때문에 명확히 서열화할 수도 없다고 보았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여성들 간의 물밑전쟁과 암투는 남성들의 경쟁보다 훨씬 더 복잡 미묘하다는 말이 되며, 저자는 실제로 11장에서 이를 바탕으로 일본의 소위 '여학교 문화' 를 설명하고 있다.

2.2.3. 그것은 근대의 산물이다

이제 다시 여성혐오로 되돌아가자. 정신과 전문의이자 작가인 사이토 다마키(斎藤環)[11]를 비롯하여, 간혹 여성혐오의 심각성을 강조하려는 어떤 사람들은 여성혐오가 인류 역사에서 내내, 혹은 (그보다 좀 더 흔하게는) 농경 사회가 시작된 이래로 내내 만연해 왔던 현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 우에노 치즈코는 여기에 정면으로 비판의 날을 세운다. 여성혐오는 근대에 와서야 새롭게 확립된 섹슈얼리티의 '상식' 이자 사회적 질서라는 것. 전근대 사회에도 여성혐오의 징후가 없었던 것까지는 아니지만, 그것이 상식이 되고 질서가 되고 제도화되는 과정에는 소위 "개화" 내지 "근대화" 라는 이름의 그럴싸한 명분이 있었으며, 그나마도 그 과정에서 전근대의 성생활에 비하면 대단히 열화된 양상으로 확립되었다고 한다. 즉 저자는 여성혐오가 우리 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영향을 끼치는 강력한 질서라고 말하지만, 그 역사는 의외로 대단히 짧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는 여성들의 여성혐오 양상인 자기혐오가 어떻게 여성들에게 내면화되는지를 설명하기에 적절하다.

저자가 미셸 푸코(M.Foucault)의 《성의 역사》 를 읽게 된 계기로 일본 풍속사와 민속 사료들을 검토한 결과는 충격적이었는데, 전근대 일본 사회에서 오늘날 통용되던 성애의 상식, 즉 이성애는 자연의 섭리에 따르는 것이니 동성애보다 더 우월하다거나, 부부 간의 성관계는 혼외정사보다 더 도덕적이라거나, 성관계는 내밀한 프라이버시에 속하므로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가져야 한다는 식의 사고방식 자체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이성애중심주의적 경향이 나타나지 않았고, 혼외정사로 아이가 생겼을 때에는 간단히 양자로 들였으며, 딱히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으로 섹슈얼리티를 국한시키지 않고 야외를 포함한 다양한 공간에서 성을 탐닉했다.[12] 에도 시절의 문헌들과 춘화들(…), 각종 사료들을 모아 볼 때, 당시 사람들이 극찬하던 섹스는 부부 간의 결합이 아니라 유곽에서 통인들을 섭렵하던 유녀의 프로페셔널한(…) 테크닉에 있었고, 마을 공동체에서 영혼 결혼식을 거행할 정도로 결혼의 목적이 자손 재생산이라는 인식이 희박했으며, 그 당시에는 가정폭력을 저지르는 남편이 자신의 행위를 " 사랑해서 그랬어" 라고 정당화하는 사례도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푸코에 따르면, 근대 사회는 개인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고 조직화하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자손 재생산이 가능한 이성애 남녀 간의 결혼에 "뒤늦게" 정통성이 부여되고 특권화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일본 사회가 개화기에 들어 급속히 근대화되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근대 일본의 가족 구성은 에토 준(江藤淳)이 선명하게 묘사했던 것처럼 "비참한 아버지, 답답한 어머니, 한심한 아들, 신경질적인 딸" 로 대변되었다. 사회가 발전하고 변화하면서, 아들이 아버지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믿어지는 순간 아버지의 모습은 지배적이고 위풍당당한 가장이 아니라 위축되고 부끄러워하는 가장이 되었다는 것이다.[13] 가족 간 관계의 변화는 가장 직접적으로는 가정 내의 여성들에게 닥치게 되었다. 가장 크게 위협을 받은 관계는 다름아닌 모녀관계인데, 아버지의 '비참함' 에 답답해하는 어머니를 보면서도, 딸은 자신이 여성으로서 아버지의 사회적 성취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현실 속에 불만스러워하며 '신경질을 내는' 위치에 선다. 어머니의 무력감과 공허함은 딸의 무력감과 공허함이 된다. 그런 딸들을 향해 어머니들은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소망을 대신 이루어 주기를 바라면서, 딸을 향한 자신의 이기적인 아집과 집착을 애정, 관심, 사랑, 자기희생 등으로 포장하여 딸들이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자신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심지어 딸이 사회적으로 성공할 경우에나 훌륭한 신랑감과 결혼하는 경우에, 어머니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딸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게 저자 우에노의 도발적인 분석.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딸들은 이전의 ' 출가외인' 이미지에서 벗어나서 점차 부모의 노년을 책임져 줄 소중한 자녀의 이미지로 변해가고 있으며, 사회적 활동에 더하여 딸들이 도맡아야 할 돌봄노동은 증가 추세에 있다.[14] 이런 난맥상 속에서 일부 어머니들은 "이 나이에 딸의 신세를 지는 내 팔자도 참..." 이라고 말하여 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한다. 특히 다지마 요코(田嶋陽子)의 분석에 따르면, 가정폭력이 벌어질 때 딸들은 어머니의 편을 들어서 가정 내 약자의 편을 대물림하기보다는 아버지의 폭력적 언어를 내면화하는 엘렉트라 콤플렉스를 선택한다. 여성들의 자기혐오는 가족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근대적 가치가 일본 사회에 빌트인되면서 가능해졌다.

가족 내 여성들을 자기혐오에 빠지게 만드는 원인은 결국 그 가족 내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기원한다. 즉 내 자신이 '한 남성의 아내' 라면, 혹은 '아버지의 딸' 이라면, 결국 아내답게 혹은 딸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규범적 압력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무력한 자기 자신에게 불만스러워하면서도 그런 자신을 한편으로는 자책하는 데 머무른다. 그러나 저자는 여성들이 아버지됨, 어머니됨, 아들됨, 딸됨에 대한 통념을 거부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면서, 오늘날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는 가족 관련 가치관들과 역할 규범들, 성애에 대한 상식들이 실상은 근대 들어 인위적으로 계몽운동을 통해 전파되고 홍보된 결과물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당장 가정폭력만 해도 "당신을 사랑해서 때렸다" 는 말은 전근대인들이 볼 때 얼토당토않은 헛소리(…)이며, 마찬가지 맥락에서 그 당시 자녀들도 " 너 잘 되라고 때린 거다" 의 합리화의 말 자체를 낯설게 느낄 것이고, 그 속에서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사랑의 마음을 찾으려 들지도 않았을 거라는 것.

2.3. 남근중심주의: 여성지배를 위한 넷째 자원

7장에서 저자는 일본 춘화에 대한 분석을 진행하다가 흥미로운 점 하나를 발견했다. 여러 춘화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공통적으로 남성의 페니스가 삽입되어 있을 때 극상의 쾌락을 맛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물론 모든 춘화들에 전부 페니스가 등장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페니스가 없는 춘화에서 여성들은 매우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손가락, 혹은 딜도와 같은 도구를 활용해 그 페니스를 대신하려 하고 있는 공통점이 나타났다. 에도 후기로 접어들면서, 일견 평화로워 보이던 춘화의 세계에도 어느새 BDSM이나 속박 플레이(…) 같은 하드코어한 장르들이 등장했다고 하는데, 여기서도 역시나 핵심은 페니스였다. 옛 춘화의 메시지는 언제나, "페니스의 질내삽입이 제공하는 강렬한 쾌감만이 여자를 보내버릴 수 있다" 였다. 그런데 한 가지 걸리는 점은, 정말로 여성들은 질내삽입이 아니고서는 전혀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15] 저자가 보기에 이것 역시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요 희망사항이 아닐까 하는 지점이었다.

저자는 남성들이 페니스의 질내삽입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고 분석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남성들이 여성을 지배하기 위해 4가지의 동원 가능한 자원들이 존재함을 이해해야 한다. (물론, 여기서 '지배' 한다는 말은 지배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여성을 지배하고 있음을 동료 남성들에게 확인받음으로써 진정한 남성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목적에서 추구되는 것이다.)[16] 첫째, 남성이 동원하는 가장 원시적인 자원으로 물리적 완력을 통한 폭력이 있다. 여성이 자신의 뜻대로 따르지 않으면, 어떤 남성들은 손부터 올라간다는 것이다. 이들은 여성이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바닥에 널부러져 싹싹 빌며 살려달라고 비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진정으로 이 여자를 소유한다고 믿는다. 둘째, 이보다는 좀 더 나은 자원으로, 권력이 있다. 어떤 사회에서 이 권력이라는 자원은 폭력을 통해 확보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지위를 통해 확보되며,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처럼 기본적으로 그 불안정성이 크다. 그래도 어쨌건 동서고금의 권력자들은 남들보다는 많은 여성들을 부릴 수 있었다. 셋째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재력이다. 오늘날 돈이 있다면 폭력도 '구입' 할 수 있고, 권력도 '구입' 할 수 있다. 재력이 갖는 가장 좋은 점은 그 가치의 범용성이 크다는 것으로, 돈만 있다면 여성의 몸에 다가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서로 알아가기' 의 대인관계의 과정을 모두 생략하고 단숨에 상대방의 질에 도달할 수 있다.

안타깝지만 위의 3가지 자원들은 모든 남성들에게 골고루 만족스럽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물론 셋 중 어느 하나만 만족스럽게 갖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남성은 여성을 지배하는 자신의 남성다움이 충분하다고 느낄 수 있다. 문제는, 저 셋 모두 보잘것없는 흔한 남성들은 막대한 박탈감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돈도, 권력도, 그렇다고 여성을 힘으로 억누를 무모함도 없는 평범한 남성들은, 결국 여성을 지배하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남성성을 확인 받지 못하는 위기에 봉착한다. 심지어 이런 자원들을 기존에 갖고 있던 남성들도 일시적으로 그것을 잃었을 때에는 똑같은 절망을 경험한다. 여기서 저자는 넷째 자원이 이들 남성들에게 마지막 희망이 된다고 제시한다. 이 마지막 넷째 자원이라는 것이 다름아닌 페니스이다. 좀 더 흔한 말로 하면 " 정력", "잠자리 기술" 등등의 표현에도 대응될 것이다. 예컨대, 돈도 많고 권력도 많고 덩치들도 좋은 상남자들 사이에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남성이 움츠러들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이 남성은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말함으로써 단숨에 그 '싸나이' 들의 선망과 동경을 받을 수 있다! "제가 요즘 다니는 빡촌이 있는데, 다들 저를 만날 때마다 천국이랍디다. 제 자지 맛에 반해서 저랑 한시도 떨어지기 싫다는데, 다들 아주 일단 한번 박아주면 꼼짝도 못 하고 숨이 넘어가도록 좋아하지 뭐요."(…)

결국, 다른 가진 자원이 일시적으로 혹은 장기적으로 부족한 남성들은, 여성을 지배하기 위해,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여성을 멀쩡히 지배할 줄 아는 성적 주체임을 동료 남성들에게 확인 받기 위해 어떻게든 자기 페니스를 활용해서라도 여성을 매료시키려 들게 된다고 한다. 이마저도 부정된다면 정말 이들에게 남겨진 길은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비록 잘난 것 하나 없지만 자신과의 잠자리를 여성이 간절히 원하고, 자신의 테크닉에 기뻐해 줄 것이라고 믿고 싶어하게 된다는 것. 저자가 보기에, 이 넷째 자원은 다른 것들에 비해 더 자발적이고, 더 진심 어린 복종을 가능하게 하여, 남성의 여성지배를 안정화할 수 있다고 믿어지곤 한다. 폭력은 함부로 쓸 수 없고, 권력도 돈도 언젠가는 사람의 손을 떠날 수 있지만, 정력만큼은 그래도 여자가 자기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매달리게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얘기다. 이런 장점들이 있기에 페니스라는 자원은 쓰기에 따라서는 오히려 다른 셋을 모두 가진 남성보다도 단숨에 더 우월해지게 할 수 있다고 믿어진다는 것. 이렇게 페니스의 가치를 고평가하는 남성들은, 페니스를 통해 여성들의 복종이 가능하다고 믿음으로써, 마치 페니스 없이는 여성들이 진정한 쾌락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까지 지레짐작하게 했다. 그러나 정작 여성들은 페니스 없이도 음핵이 있고, 그 전에 어차피 귀나 턱, 목덜미, 쇄골 등을 통해서도 충분히 쾌락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상황인 것.[17] 남성이 페니스로 여성을 지배하려 한다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

물론 저자는 일본 춘화들 중 저 유명한 《문어와 해녀》 와 같은 사례들도 빼놓지 않는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여성 고객들을 위해 제작된 춘화로서, 거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싶을 정도로 천편일률적인 페니스의 질내삽입 구도를 탈피하고, 촉수괴물과도 같이 그려진 문어가 해녀의 하반신을 덮은 채 음핵을 애무하고 있는 동안 해녀는 행복해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것을 통해 볼 때, 이런 일부 춘화들은 에도 시대의 모든 춘화들이 남성들의 남근중심주의를 투영했다는 가능성에 대해 반례가 될 수 있지만, 저자는 어차피 이 춘화를 남성이 구입하거나 소유하거나 즐기는(…) 경우에도 남성이 시선을 '소유' 하게 됨으로써 젠더 관계가 약화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쨌거나 상기한 바와 같이 "여성은 오직 페니스를 통해서만 기쁨을 얻을 수 있다" 는 남근중심주의적 발상은, 여성혐오가 제도화되기 이전의 전근대 일본 사회의 남성들 사이에서도 암묵적으로 통용되던 것으로 보인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2.4. 도쿄전력의 그녀는 왜 성매매를 했는가?

1997년 3월 19일에 도쿄전력 여직원 살인사건(東電OL殺人事件)이 벌어지자, 수많은 언론매체에서 앞다투어 이 사건을 보도했다. 시부야 거리 한복판에서 발견된 여성은 도쿄전력의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이라고 믿어지던 인물)이었고, 알고보니 그녀는 낮에는 직업여성, 밤에는 매춘부가 되어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남성 행인들을 대상으로 성매매를 하지 않겠느냐고 직접 호객행위를 하는 이중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그녀는 아마도 성매매 직후 고객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보였는데, 처음에는 곧바로 외국인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라고 여겨졌지만, 뒤늦게 DNA 검사를 해 본 결과 무고한 사람을 몰아갔다는 게 밝혀져서 진범은 알 수 없게 되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이 사건은 저널리스트 사노 신이치(佐野眞一)가 논픽션을 써서 다시금 주목을 받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나무위키 문서도 함께 읽어보자.

이 사건에 얽힌 미스터리는 2가지였는데, 첫째로는 어째서 멀쩡하게 사회생활을 하던 엘리트 여성이 남몰래 성매매에 중독되어 갔는지, 둘째로는 그녀를 죽인 범인은 대체 누구인지의 의문이 해소되지 않던 상태였다. 사노의 책에서는 2가지를 모두 언급하면서도 우선적으로는 후자에 관련된 법정 공방에 더 초점을 맞추었는데, 전자의 의문에 대해서도 정신과 의사와의 대담을 통해서 모색하기는 하지만 사노 본인조차 알쏭달쏭해하는 상태로 책을 마무리했다.

피해자의 학력과 경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고, 피해자의 경제적 사정 역시 불가피하게 장기적으로 성매매에 나서야 할 정도로 열악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일터에서도 여성 고급 인력으로서 안정적인 지위를 갖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거식증을 앓고 있었고, 늘 회사에서 칼퇴근을 한 뒤에는 짙은 화장에 트렌치코트 차림으로 밤거리를 돌며 자신과 잠자리를 가질 남성을 구하러 다녔다.

보통은 5천 엔 정도를 부르긴 했지만, 남성 측이 돈이 없어 보일 경우에는 자발적으로 2천 엔까지도 가격을 흥정했다. 어느새 성매매는 그녀의 새로운 일상이 되어 갔고, 마침내 회사 사람들도 그녀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게 될 무렵에 괴한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이렇게까지 성매매에 탐닉해야 할 이유를 도저히 찾지 못했다.

사노의 논픽션 《도쿄전력 OL 살인사건》 등 몇몇 문헌들을 참고할 때, 많은 사람들은 "그녀는 현대의 여성으로서 개인적인 직업적 성취도 이루어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성으로서의 '본분' 역시 다해야 한다는 이중의 중압감 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보았다.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기리노 나쓰오(桐野夏生)의 《그로테스크》 에서도 최고의 자리를 향한 여성 간의 경쟁과 권력 암투가 묘사되는데, 피해자가 '여성들 사이에서 받는 인정'과 "남성들 사이에서 받는 인정'이라는 2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또한 사노 신이치는 정신과 의사의 자문을 받아서 그 동기를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하려 한다. 아버지에게 고착된 딸이 자기처벌을 하려는 욕망이라는 것. 그에 따르면, 딸들은 아버지를 본받고 싶어할 때 자기 자신의 육체가 진정한 아버지의 상에 도달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을 발견하고, 이 때문에 자신이 아버지의 기대를 배신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때 딸들이 자기 자신의 신체를 처벌하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고의적으로,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함으로써 스스로의 신체의 가치를 시궁창에 버리는 것으로, 일본의 많은 정신분석학자들은 청소년 성매매 문제를 다룰 때 실제로 청소년들의 심리를 이 관점에서 분석한다고 한다.[18]

여기서 저자는 제3의 의견을 제시하기 위해, 먼저 피해자가 당시 성매매 여성들의 평균 시세에 한참 못 미치는 헐값을 선제적으로 제시했다는 데 주목한다. 당시 일반적인 성매매 여성들은 하룻밤에 3만 엔, 그 지역의 청소년 원조교제의 경우에는 하룻밤에 5만 엔[19]에 달했지만, 피해자가 선제시(?)한 자신의 몸에 매긴 가격은 불과 5천 엔, 심하게는 2천 엔까지 기꺼이 내릴 수 있을 정도의 헐값이었다.

이 금액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저자는 여성 대중들이 짐작하는 이유가 남성 대중들이 짐작하는 것과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다. 남성들은 이런 금액을 보고 " 자기 신체에 대한 처벌입니다" 라고 설명하려 했지만, 사노의 논픽션에 대해 독자 투고 편지를 보낸 한 여성은 오히려 "그녀는 상대방 남성의 욕망에 가격을 매기고 있었던 거겠죠" 라는 새로운 관점을 내비쳤다. 저자에 따르면 "그녀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는 여성들의 편지가 일본 전역에서 빗발쳤다고.

저자가 보기에 성매매 여성들은 성매매 행위에 임하는 순간에나마 일시적으로 성적 주체가 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그 행위의 대가로 자신이 금전적 보상을 확실히 받을 수 있다는 전제가 따르며, 어디까지나 누군가의 아내로서의 평범한 여성들과 비교할 때 더 주체적이라는 의미다. 저자에 따르면, 아내들은 남편의 섹스 요구에 응해야 할 (근대적으로 확립된) 도덕적 의무를 갖지만, 성매매 여성들은 손님이 만족스러운 금액을 내놓기 전까지는 얼마든지 "No" 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카무라 우사기(中村うさぎ)는 《나라고 하는 병》 에서 "설령 남성들의 욕망의 대상이 된다 해도, 나는 그렇게나마 주체적인 인간이 되고 싶다" 는 여성들의 심리를 잘 그려낸 바 있다. 성매매를 성립시키기 위해, 성매매 여성들은 자신이 바라는 금액을 제시할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막상 그 권력을 가진 여성들이 어째서 자신의 신체를 그렇게 헐값으로 부르게 되는 것인가? 저자는 앞서 언급한 독자 투고 편지가 옳았다고 말한다. 남성이 여성에게 지불하는 돈은 남성이 자신의 성매매 행위에 매긴 가격이기도 하며, 성매매 여성의 성적 매력을 값싸게 부를수록 그런 성매매 여성에게 성욕을 느끼는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도 값싸게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처벌 가설만으로는 온전한 설명이 못 된다.

그에 더해서, 가격을 낮게 불렀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자신의 몸을 사는 남성의 가치 또한 여성이 그만큼 낮게 본다는 것이며, 자신의 신체를 처벌하는 동시에 상대방 남성의 욕망까지도 처벌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보아야 한다. 쉽게 말해, "너는 내가 그런 헐값을 주어야 할 만큼 아름답지 못한 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내 몸이라도 필요할 만큼 네 갈급한 욕망이 하찮은가 보구나" 라는 성매매 여성들의 일시적인 우월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정반대의 예를 들어 보자. 성노동자 업계에서 소위 '프로' 로 통하는 몇몇 절륜(?)한 여성들이나, 혹은 높으신 분들의 전용 에스코트를 맡는 고급 ' 콜걸' 들은 정말 부르는 게 값인 경우가 많다. 물론 이것은 일차적으로 그녀들이 제공할 수 있는 성적 서비스들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엄청나다는 것을 의미한다.[20] 하지만 이런 여성들이 비싼 돈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몸이 욕망의 대상이 되기에 가치가 크다는 것을 넘어, 그 이상의 다른 사회적 신호도 갖게 된다. 즉, 그런 가치 있는 몸을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 상대방 남성의 지위가 높다는 것, 상대방이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 높으신 분이라는 것, 자신의 몸조차 허용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욕망이라는 것을 인정해 주는 의미도 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성기환원주의에 입각하여 분석을 시도한다. 성매매 여성과의 섹스에 매겨지는 화대는 여러 가치들에 대한 금전적 환산의 합이 될 수 있다. 즉 위의 콜걸의 사례의 경우 눈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몸의 가치, 정서적인 대화(라고 믿어지는 립서비스)의 가치, 우월한 성적 테크닉의 가치, 그리고 남성이 가장 원하는 로서의 가치의 합산이 그녀의 가격이 된다. 성매매 여성에게 매기는 값어치가 감소한다는 것은, 곧 질로서의 가치를 제외한 다른 모든 부가가치들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쿄전력 여직원이 2천 엔을 불렀을 때, 이 금액은 순전히 그녀의 질이 갖는 성적 가치 그 자체였을 수 있다고 하는데, 저자에 따르면 그녀는 거식증 환자였기에 막상 섹스를 시도하던 남성들도 그녀의 깡마른 몸을 보고는 놀라서 한 발짝 물러서게 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정말 질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면 상대해 줄 이유가 없었던 성노동자였던 것. 부가가치가 제외된 질 그 자체, 여성들이 자조하는 '고깃덩이로서의 몸', 일부 꼴마초 남성들이 생각하는 "어차피 창녀들은 전부 남자가 먹어 주기를 기다리는 보지들에 불과해" 라는 인식, 이런 것들은 한 명의 여성의 가치를 단순히 남성의 페니스가 삽입되어야 마땅할 장소인 질의 가치로서만 환원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매매 여성들을 향한 성매수 남성들의 멸시다.

그런데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취급을 받는 성매매 여성들도 남성들을 멸시한다" 고 제안한다. 입장을 바꾸어 보면, 페니스의 질내삽입만을 원하여 2천 엔이라는 헐값조차 감수하고 섹스를 시도하는 남성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그때 그 남성의 존재 의의는 오로지 페니스 외에는 없어지게 된다. 하잘것없는 값싼 욕망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들어온 이상, 그 남성의 페니스(가 갖는 흥분 및 욕망)의 가치 역시 2천 엔밖에는 되지 못한다는 것.

성노동자들은 손님으로서 남성을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욕망을 맞아들인다. 다시 말해, 성노동자들의 시각에서 보면, 자신들의 침실로 들어오는 손님은 한 명의 온전한 인간이 아니며, 욕망을 그득 담고 있는 남성의 페니스가 걸어들어오는 것일 뿐이다. 성매수 남성이 성매매 여성을 성기로 환원할 때, 성매매 여성도 성매수 남성을 욕망 덩어리로 환원한다. 이를 바탕으로 저자는 성매매 현장에서는 남녀가 상호간에 멸시하는 양상이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남성에게도 권력이 있고 여성에게도 권력이 있으니 양측이 서로를 상호간에 혐오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성이 여성을 혐오하는 동안 그 여성도 남성을 혐오하게 되는 비극적인 쌍방 혐오의 현장이 바로 성매매인 것.

이를 바탕으로 정리해 볼 때, 도쿄전력 여직원은 물론 자기처벌적 동기도 있었을 것이고[21] 상반되는 기대에 모두 부응하기 위해서 애써야 했지만,[22] 구태여 초저가의 화대를 불러 가면서 남성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몸을 함부로 팔았던 이유에는 그런 문란한 삶을 통해서 자신에게 헐떡이는 남성들의 욕망을 조롱하고, 자신을 직장에서 멸시하던 남성들을 자신이 멸시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 위해 스스로 선택했던 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회사에서 고립되어 갈수록 더더욱 강박적으로 성매매에 탐닉했던 것, 마지못해 값을 깎은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 쪽에서 필사적으로 가격을 깎고 싶어서 애를 썼던 것 등이 그 징후라는 것. 이것이 이 사건을 바라보는 뭇 여성들의 어렴풋한 공감대, 특히 성매매 여성들의 경험담과 회고 등에 더욱 정확하게 어울린다는 게 저자의 제안이다.

2.5. 물론 남자들도 힘들다... 호모소셜 때문에

저자는 마지막 챕터인 16장의 제목을 "여성 혐오는 극복될 수 있는가" 로 정하고, 그 소제목 중에 "여성 혐오를 넘어" 로 정한 지점이 있다. 여기서 저자는 페미니스트들의 노력을 통하여 호모소셜이 혁파될 것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그 이후, 다시금 소단락이 하나 더 등장한다. "남성의 자기혐오" 라는 제목을 통해서, 남성들이 항변하곤 하는 "남자로 사는 것도 힘들다" 는 내용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대표적으로, 남성성 연구로 유명한 철학자 모리오카 마사히로(森岡正博)는 남성 역시 가부장적 사회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억지로 가해자의 위치에 서 있었다고 생각해 왔지만 실상은 자신들도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여성혐오에 대한 세지윅의 이론을 적용해 보면, "남자들도 힘들다" 는 말을 이론에 맞게 바꿀 경우 "남자들도 자기혐오를 한다" 는 재개념화가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는 그 말이 갖는 의미를 좀 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남성이 자기혐오를 한다고 남성들이 말할 때,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여성들이 겪고 있는) 젠더의 벽을 넘는 탈신체화적 소망이 아니라, 이상화된 남성상에 대한 동일시의 소망일 수 있다. 즉, 젠더의 굴레 속에서 남성들도 고통 받는다는 말은, 자신이 여성이 아니라 '하필 남성이어서' 고통 받는다는 말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충분히 남성답지 못한 남성이 아닐까 하는 사회적 압력으로 인한 불안을 겪는다는 말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에 따르면, 남성들은 우선 자신들을 진짜 남성과 가짜 남성으로 억지로 나누려 하는 호모소셜의 압력부터 거부하고 이겨내야 한다. 모리오카에 따르면 페미니즘은 남성의 존재의의 자체를 부정한다고 하지만, 실상 페미니즘이 목표로 삼는 과녁은 개별 남성의 존재의의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강요하는 이상화된 남성성이다. 그러나 저자는 모리오카의 주장에 일견 음미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예컨대 그는 "남성은 자신의 신체를 타자화한다" 고 주장했는데, 실제로도 폭주족이나 치킨 게임 등에서 보듯이, 남성들은 자신의 신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행동을 해야 남자답다는 평을 듣고, 자신의 안전을 염려하고 몸을 사리는 얌전한 남성은 '계집애 같은 놈', '겁쟁이', '나약하다' 등의 혹평을 듣게 되기 때문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일리가 있다는 것. 여성들이 여성 운동을 하는 동안, 남성들도 그런 남성성을 전복시키는 남성들만의 운동을 한다면 호모소셜과 그 여성혐오도 극복될 수 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남성들의 반발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예컨대 많은 남성들은 역차별로 인하여 이제는 남성들이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각종 불이익을 겪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일본에서도 이런 여론은 예외가 아니라서, 《하류사회》, 《격차고정》 등으로 유명세를 얻은 사회학자 미우라 아츠시(三浦展) 이외에도, 상단 각주에서 언급했던 사회학자 미야다이 신지, 아카기 도모히로(赤木智弘), 야마다 마사히로(山田昌弘), 기타 등등의 논객들이 본서에서 거론되고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서 "이제 일본 사회에서 남성들은 사회적 약자가 되었다" 고 주장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런 인물들과 정면으로 키보드 배틀(?)을 하면서 지금까지 논객으로서의 악명(…)을 떨쳐 왔으며, 그 논리는 본서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남성이 약자라는 담론은 주로 일본의 정신과 의사들이나 사회학 교수, 저널리스트들이 자주 제기하는 것으로, 이들이 의도하건 의도치 않았건 간에, 저자에 따르면, 스스로가 약자라고 정체화하는 남성들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고 여성에 대한 반감과 적개심을 불지필 수 있는 효과를 갖는다. 이런 사람들은 남성들이 사회의 다양한 영역들에서, 특히 결혼 시장에서 갈수록 연애 권력을 상실해 가고 있음을 지적하는데, 심지어 미우라는 자신의 문헌들 속에서 "차라리 과거의 중매결혼이 좋았다, 그때는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는 없었어도 최소한 누구나 결혼할 수는 있었다" 고 탄식하기도 했을 정도.

이처럼 일본에서는 결혼 시장에서 남성들이 좌절하는 경향이 크게 나타나서,[23] 저자의 초점 역시 일차적으로 '여성이 남성을 골라 결혼하는 사회' 에 대해 언급하는 쪽으로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저자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결국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키워라" 밖에는 없다. 어느 시대에나 남성이 팔짱 끼고 서 있으면 여성들이 결혼하기 위해 알아서 줄을 서거나, 최소한 자기 짝 정도는 남들이 알아서 찾아 줬던 시대는 아니었으며, 현대에 들어 변한 것이 있다면 남성들에게 대인관계 능력이 중시되었다는 점, 여성들에게 결혼이 선택지의 하나쯤으로 취급되기 시작했다는 점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남성들은 남성 간의 호모소셜한 관계에만 신경쓰다 보니 여성에게 인간 대 인간으로서 다가가는 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 커뮤니케이션의 부족을 자꾸 금전과 외모로 커버하려 하며, 그나마 돈이라도 있으면 그 돈으로 성매매를 함으로써 여성의 신체에 (골치 아픈 커뮤니케이션을 생략하고) 프리패스로 접근하려 한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저자의 강조는 실제로 일본 사회에서 (특히 서브컬처 애호가들 사이에서) 굉장히 유명하여, 우에노 치즈코 하면 반사적으로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키우세요" 부터 관련지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저자는 오타쿠 내지는 히키코모리, 사회 부적응자로 스스로를 소개하는 남성들이 " 저 같은 남자를 어떤 여자가 좋아하겠어요?" 라고 말하면 늘 이 대답부터 먼저 시작하고 들어간다(…). 저자는 아무리 금전과 외모가 받쳐 주는 남성일지라도 이 조언이 의미가 있다고 보는데, 여성과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커뮤니케이션을 할 줄 모르는 남성은 돈이 많아 봤자 어차피 자기 "여자친구" 와는 성매매와 유사한 관계밖에는 영위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 물론 저자도 대인관계에 있어서 이성교제만큼 불지옥급 난이도(…)의 관계도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24] 그렇지만 상대방에게 성적으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원래 필연적으로 먼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요구되고,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이름의 이 험난한 과정을 돈이나 외모 등을 빌어서 회피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연애라는 것은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알아서 제공되는 달콤한 위안이 절대 아니며, 이를 못 받아들이겠다면 연애를 포기하는 편이 차라리 낫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현실을 어떤 일본 남성들은 차마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모양인지, 저자는 4장에서 일명 "비인기남" 이라고 스스로를 일컫는 어떤 사람들을 조명한다. 지난 2008년경 일본을 떠들썩하게 했던 아키하바라 무차별 살상사건(秋葉原通り魔事件)의 경우, 범죄자 가토 도모히로(加藤智大)는 자신의 범죄의 동기 중에서 자신에게 이성친구가 없다는 것에 대한 분노를 토로했던 적이 있다. (이상의 논의를 잘 따라왔다면, 가토는 호모소셜한 관계에서 자신의 남자다움을 제대로 확인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이론적 적용이 가능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가토가 느꼈던 울분은 사실 동서고금 인류의 수많은 추녀들이 느껴 왔던 것이었지만, 유독 남성들은 동료들의 성적 불승인만큼은 견뎌내지 못한다고 말한다. 겉으로는 그가 "여성들이 나를 '선택' 해 주지 않을 만큼 못난 내 자신으로서는 어떤 희망도 없다" 고 말했지만,[25] 속으로는 여성들에게 선택 받지 못한 게 문제라기보다는, 여성들에게 선택 받을 만큼 자신이 의젓하고 어엿한 남성이라는 사실을 확인 받지 못한 게 문제였다는 것. 저자는 이런 사람들이 전형적인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부족한 사람" 이라고 진단한다. 저자가 보기에, 비인기남들은 남성의 발 밑에서 자신의 자존심을 세워 주고, 자신의 자기자랑에 귀를 기울이면서, 자신에게 끊임없이 위안을 주고자 내내 스탠바이를 하는 여성을 필요로 하지만, 이런 이상형은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부족한 남성의 전형적인 특징일 뿐이라는 것이다.

3. 저자의 관점 정리

본서에서는 그 이외에도 다양한 논쟁적 주제들에 대한 저자의 관점이 반영되어 있는데, 이하의 주제 중 일부는 저자가 실제로 한 챕터 전체를 활용하여 설명한 것도 있다. 우에노 치즈코라는 논객의 지적인 입장 자체로서 설명하기보다는, 여기서는 책에서 제시된 이야기들 위주로 몇 종류 소개해 보기로 한다.

4. 평가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과의 김윤실 교수는 책 뒷면의 서평에서 이 책의 독자들이 "힘들이지 않고 세지윅의 이론적 틀을 이해할 수 있다" 는 점을 고평가하며, 여성 이슈를 문제삼는 것이 어째서 우리 사회에서 그렇게 힘들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호평했다. 덧붙여서, 저자 우에노 치즈코가 이런 힘든 문제제기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하기로 결정한 것에 박수를 보낸다고도 하였다. 실제로 국내에서는 이브 세지윅의 《Between Men》 이 번역되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호모소셜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방법은 본서(의 번역서)를 읽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는 실정이다.

가톨릭대학교 인문사회연구소 소속의 정치학 박사 정인경 연구교수는 자신의 서평에서[34] 책의 전반적인 줄거리를 요약한 뒤, 여성에게 여성성에 관련된 요소들을 긍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부족한 것이 여성혐오적 문화의 문제점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 서평에서는 본서의 문헌적 가치와 이론적 진전에 대한 통찰, 주요 아이디어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적 문화에의 적용 가능성 등이 사실상 논의되고 있지 않기에, 냉정히 말하자면 사회학과 학부생들의 독후감 과제물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제기될 수 있다.

한편 국내의 재야 여성학자 정희진 씨는 자신의 한겨레 칼럼에서 본서에 대해 "제목의 선정적인 오역으로 인해 국내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일본 책"이라고 평하면서, "국내 사회의 동향에 정확히 대응되지 않는 일본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한 일본의 책이므로 국내 여론이 이 책에 의해 종속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 실제로 본서에서 일본 황실, 신화, 민속사, 문단, 논객들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기에, 이를 고스란히 국내 실정에 적용하기보다는 국내 문화에 대한 해박한 배경지식을 갖춘 채로 걸러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여성혐오 그 후: 우리가 만난 비체들》 에서 이현재(2016)는 이 책이 동성사회성에 기반한 여성혐오의 구조를 밝힌 것에 대해 칭찬하면서도, 억압의 구조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남성과 여성 모두 여성혐오를 강하게 내면화하여 마치 이를 극복할 수 없다는 듯한 비관주의가 느껴진다고 하였다. 즉 여성 개개인들이 전복적 기획과 실천을 시도하는 가능성만큼은 열어두어야 하는데, "여성혐오는 중력과 같다" 는 식의 발언들을 통해 우에노 치즈코는 거꾸로 여성혐오가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묘사했다는 것. 이현재(2016)는 남성들이 여성을 타자화하는 방식을 통하여 성적 주체가 되었다면, 여성들은 남성을 타자화하는 방식을 통해서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되며, 그 대신 비체(아브젝트; abject)-되기의 실천을 통해서 새로운 주체화를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맥락에서 미러링 역시 비체되기의 실천이 아니라 단순히 남성권력에의 동경과 타자화의 반복이라는 특성이 나타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저자 우에노는 본서에서 성매매 여성들이 성매매 행위를 통해서 일시적으로나마 성적 주체되기를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상기했듯이 여기에 여성계의 합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본서를 직접 인용하지는 않았으나, 김영옥(2018)의 저서 《이미지 페미니즘: 젠더 정치학으로 읽는 시각예술》 에서는, 성매매를 통한 성적 주체화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매개로 삼는 이상, 그것조차 전지구적인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종속적 지배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즉 성매매 여성들이 주체가 되는 기회는 금전을 받고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판매하는 경우에 국한되며, 이에 대해서는 여성의 성마저 상품화하는 남성들의 사회 구조를 공격하는 것이 온당하다는 것이다.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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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사 수료 신분이라는 점은 국내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인 정희진 씨와도 공통점이다. 물론 박사 수료라고 해서 학계에서 안 받아준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단지, 새로운 문제제기나 새로운 발견, 새로운 통찰을 통해서 학계를 진전시켰다는 전문성을 인정 받지 못할 뿐이다. 실제로 많은 박사 수료생들이 해외 선진국의 발전된 이론을 전파하거나 적용하는 활동을 우선적으로 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그 자체로도 학술적인 의의가 있다. 하지만 많은 대학원들에서는 대략 8년 정도의 시간 동안 학문의 외연을 넓히는 데 성공하지 못한 박사과정 학생에게는 학위를 수여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2] 이 약력은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것을 참고했는데, 해당 출판사의 소개글이 한국어 위키백과의 우에노 치즈코 문서 상단에 인용부호 없이 그대로 적혀있는 것으로 보인다. [3] 일본에서는 《ことばは届くか――韓日フェミニスト往復書簡》 제하로 출판되었다. [4] 후술되겠지만 저자가 공격하는 것이 바로 호모소셜을 바탕으로 하는 남성성이기 때문에, 호모소셜에 크게 의지하는 남성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가치와 신념이 공격당하는 것에 불쾌해할 것이라는 추론으로 보인다. [5] 사실 이 부분이 저자의 홈그라운드다. 참고로 10장에서 논의되는 "딸에 대한 아버지의 근친욕망" 에 대한 주장은 굉장히 민감하면서 과격하고, 사회적으로 많은 논의가 더 필요해 보인다. [6] 즉 허구한 날 여성들을 멸시하는 꼴마초 여성혐오자들일수록 자기 어머니를 성적으로 욕하는 걸 들으면 쉽게 이성을 잃고 흥분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본서에서 지네딘 지단의 저 유명한 박치기 사건을 들면서, 수많은 남성들이 그의 심정에 동정했을 거라고 지나가듯 언급했다. [7] 즉 남성이 "있는 힘을 다해 여성을 지켜줄 것" 이라고 말하는 것에 설레는 경향은 보편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저자는 일본 나루히토 왕태자의 결혼 선서와 한류스타 이병헌의 인터뷰를 예로 들었다. [8] 오늘날 서브컬처에서 흔히 통하는 메이드의 이미지나, 옛날 우리나라 부잣집의 식모나 유모 같은 사람들을 떠올려 보면 비슷할 듯하다. [9] 저자에 따르면, 문예평론가 사이토 미나코(齊藤美奈子)는 《문단 아이돌론》 이라는 자신의 유명한 저서에서 하야시의 시선을 옹호하면서, 어차피 자신이 경쟁할 대상이 아닌 사람을 비웃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한 바 있다. [10] 저자는 여기서 은연중에 피해자의 연령을 사실상 아동으로 한정하는 경향을 보인다. 저자가 의도했는지는 모르나, 실제로 텀블러 등에 서식하는 어떤 성 착취적인 사람들은 유달리 15~25세 사이의 남성을 상대로 관계를 갖는 것을 선호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바닥에서는 상대가 25살이 넘어가면 누구도 찾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는 이런 사람들이 동성이냐 이성이냐가 아니라 연소한 연령을 최우선으로 놓고 본다는 추론도 나오게 한다. 즉 이들 착취자들은 여성도 어릴수록 선호한다는 것. [11] 흔히 알려진 " 히키코모리" 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제안한 인물로 더 유명하다. [12] 우리나라의 경우도, 옛날에는 마을에서 신혼부부가 첫날밤을 보낸다고 하면 온 동네 남자아이들이 몰려가서 창호지에 구멍을 뚫고 지켜봤다거나, 스승님이 아내와 운우지정을 나누는 모습을 들어 이 체위는 유교적으로 좋다, 저 테크닉은 나쁘다 말하며 제자들끼리 이러쿵저러쿵 했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 온다. 당시에는 성관계가 남에게 보일 것을 어느 정도 전제하고 있었고, 청소년들에게는 그것이 성교육이었다는 것. 더 나아가면 당시에는 코흘리개 어린아이들이라고 성적인 것에 대해 눈을 가려주거나 하는 것도 없었을 수 있다. [13]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아버지의 축 처진 어깨" 같은 관용적인 표현들이 있는데, 이는 고도 산업화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문헌들에서 유독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14] 여성들이 사회 진출을 하는 것만큼 가사노동과 전통적 역할이 충분히 차감되지 않았다는 "이중노동의 문제" 는, 국내에서도 정희진 씨가 강조했던 바 있다. 양국의 사회상을 비교하는 것 역시 의미 있는 작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5] 실제로 저자에 따르면, 이 문제로 인해 서구의 페미니스트들은 질내삽입의 대안으로 음핵의 자극을 의식적으로 강조했다. 강경한 사람들은 '오로지' 음핵 애무가 아니라면 진정한 오르가즘에 도달할 수 없다고 강변했고, 온건한 사람들은 음핵도 질과 함께 중요한 성감대이지만 질내흡입(삽입)의 위상에 밀려 과소평가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16] 저자는 진정한 남성으로 인정 받는 것에도 남성 간의 서열이 작용하고 있기에, 가능한 한 더더욱 남성성에 대해 극찬을 받음으로써 더 높은 서열에 올라, 더 많은 (혹은 더 아름다운) 여성을 전리품으로 챙기고자 한다고 말한다. [17] 실제로 국내의 한 설문조사에서 "당신의 성감대는 어디인가요? 스티커를 붙여주세요" 라고 요청했을 때 여성들은 얼굴과 목에다 덕지덕지 스티커를 붙였고, 남성들이 "너네들은 세수하면서 오르가즘 느끼냐?"(...)라고 황당해하기도 했는데 이와도 무관하지 않다. 첨언하자면, 남성들은 분위기에 무관하게 페니스에 물리적 자극만 지속적으로 가하면 오르가즘을 느끼지만, 여성들은 분위기만 갖추어지면 손끝으로 귓가를 살며시 쓸어넘겨 주는 스킨십으로도 오르가즘에 도달하는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세수하다가 여성들이 가버릴(?) 일은 없다. [18] 남성성을 연구하는 사회학자 미야다이 신지(宮台眞司)는 원조교제에 대하여, 성매매에 나서는 청소년들이 가정과 학교에서 받지 못한 인정과 애정, 칭찬을 성매수 남성들로부터 얻으려 하는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하기도 했다. 물론 저자는 이 주장에 대해서 미성년자들을 범하려는 남성들이 자기 죄책감을 면책 받기 위해서 여자아이들의 심리에 대한 또 다른 판타지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대차게 깠다(…). [19] 시세에 2만 엔의 차이가 나는 이유에 대해 저자는 청소년의 신체가 "금기시된 몸" 이기 때문이라며,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근대적 믿음이 약한 시골 지역들일수록 청소년 성매매와 성인 여성 성매매 사이의 화대의 가격 차이가 감소하는 경향이 있음을 근거로 들었다. [20] 저자는 이런 사람들이 손님을 받을 때 남성에게 정을 주는 시늉을 하고 거짓 이야기를 지어내기 십상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오빠는 다른 손님들보다 젠틀하고 좋은 사람 같아요", "다른 손님들은 받아주기 싫은데 오빠는 기다려져요", "오빠한테는 저도 모르게 제 힘들었던 과거 이야기까지 다 털어놓게 돼요", "오빠가 격려해 주시는 것 같아서 고마워요" 같은 달콤한 말들을 속삭이는데, 그 바닥 업계의 상식에서 보면 그거 다 그만한 돈을 받았으니까 본심에도 없이 거짓으로 지어내는 립서비스라는 것(…). [21] 실제로 피해자는 도쿄전력 입사 시절에 성공한 회사원으로서의 아버지에 대한 동경심이 존재했으며, 가문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입버릇처럼 읊조렸다고 한다. 그러나 사노 등의 문헌에서도 보듯이, 도쿄전력은 여직원을 다루기 굉장히 곤란해하는 남성중심적 기업문화를 갖고 있었고, 피해자는 점차로 회사 내에서 고립되어 갔다고 한다. [22] 실제로 피해자는 독립해서 자기 삶을 꾸려 가며 지내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모시는 딸로서 생활해야 했다고 한다. [23] 국내에서는 이 문제가 크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취업, 승진, 데이트 비용 등등에서 여성들에게 제공되는 우대에 우선 초점이 맞추어지는 경향을 고려하면 양국의 문화적 차이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24] 저자에 따르면, 남성들에게 있어서 가장 난이도가 낮은 대인관계 중 하나가 바로 남학교나 남초 회사에서 발생하는 호모소셜한 관계라고 하며, 이런 대인관계만을 유지하면서 청소년기를 보낸 후 사회에 진출한 남성이 여성을 만나서 서로를 알아가는 게 굉장히 어렵게 느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점은 저자도 인지하고 있다. [25] 여기서도 흥미로운 문화적 차이가 존재한다. 페미니즘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미국의 유사한 사례인 산타바바라 총기난사 사건과 비교해 보면, 양측 모두 사회 부적응자들이 자신이 인정받지 못한 데 분노하여 저지른 묻지마 범죄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범죄자의 심리는 완전히 정반대이다. 엘리엇 로저는 "감히 매력 쩔어주는 우월한 나님을 네깟 년들이 무시해? 너희 패배자들 전부 죽어라!" 의 심리에서 총기난사를 했다면, 가토 도모히로는 "나처럼 내세울 것 없는 못난 놈이 아쉬울 게 뭐가 있겠어? 너희 승리자들 전부 죽어라!" 의 정반대 심리에서 학살극을 벌였다. 실제로 엘리엇의 회고에 드러나는 밑도끝도 없는 근자감 나르시시즘을 보노라면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 북미권의 소위 '인셀'(incel), 일본의 '비인기남' 사이에는 극명한 문화적 차이가 존재할 수 있는 것. [26] 이 사회적 기능을 달성하기 위해 포르노는 반드시 다음의 2가지 설정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첫째, 여성은 섹스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적어도 남성이 섹스를 시도해야 할 당위성을 마련해 주는 등, 남성의 죄책감을 면책시켜 줄 장치가 존재한다. 둘째, 이 여성은 마침내 남성의 도움을 받아서 절정의 쾌락을 경험함으로써, 여러 남성적 자원이 부족한 남성들이 페니스를 통해 남성성을 회복하도록 하는 결말이 존재한다. [27] 저자는 95페이지에서 이와 관련하여 "우리들은 상상력 속에서 줄기차게 살인을 저지름으로써 현실 속에서 누구도 죽이지 않고 있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 하였다. [28] 저자에 따르면 공학 여학생들과 여학교 여학생들이 함께 캠프에 갔는데, 공학 여학생들이 캠핑용 짐을 나르다가 무겁다면서 남학생들에게 투덜거리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여학교 여학생들은 바보 같다며 자기들끼리 비웃었다고 한다. [29] 실제로 저자의 제자가 발표한 사회학 논문 《남학생의 출현으로 여고생의 외견은 어떻게 바뀌었는가》 에 따르면, 한 여학교는 여학생들이 등하교 길에만 교복 치마를 입고 교실에서는 내내 체육복 바지 차림으로 지냈는데, 공학으로 변경된 바로 다음 해부터 이 여학생들은 교실에서 내내 치마를 입은 채 얌전하게 학창생활을 했다고 한다. 국내에서도 "여학교에서는 남녀공학처럼 얌전하지 않다"는 증언들이 있는 걸 보면 이 부분은 우리나라도 유사할 듯하다. [30] 저자는 그 사례로 여학교 출신의 개그우먼 야마다 구니코(山田邦子)를 들고 있다. [31] 물론 이 시기에도 예컨대 사이구(斎宮) 제도라 하여 결혼 상대가 없는 공주가 신처(神妻)라 하여 지방으로 내려가 평생 독신 종교인으로서 살게 하는 등의 여성차별적 요소가 존재했다고 한다. [32] 구로다 사야코, 센게 노리코, 모리야 아야코 [33] 쇼다 미치코와 결혼한 아키히토, 마사코 황후와 결혼한 나루히토, 가와시마 키코와 결혼한 후미히토 등. [34] 정인경 (2015). 타자화를 넘어, 서로 다른 두 주체의 소통을 전망한다: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아시아여성연구, 54(2), 219-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