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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4:43:19

나쁜 페미니스트

도서명 Bad Feminist(英)
나쁜 페미니스트(韓)
발행일 2014년(원서)
2016년(역서)
저자 록샌 게이
(Roxane Gay)
노지양 역
출판사 Lippincott Massie McQuilkin(원서)
사이행성(역서)
ISBN 9791195716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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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및 출간 배경2. 목차 및 주요 내용
2.1. 챕터별 내용 정리2.2. 대중매체 속 캐릭터의 유형에 대한 성찰2.3. ' 근본주의' 페미니즘?2.4. 특권 있는 자, 말하지 말라고?
3. 본서에서 언급된 사건들4. 둘러보기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다. 나는 저 높고 위대한 페미니스트 왕좌에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다. 그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은 완벽한 인간 같은 포즈를 취해야 한다. 그러다 한두 번 대차게 말아먹으면 사람들이 달려들어 가차 없이 끌어내린다. 문제는 나는 허구한 날 실수하고 넘어지고 대차게 말아먹는 인간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나는 진즉에 끌어내려졌다고 보면 될 것이다.

나를 따라다닐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꼬리표를 환영한다."
- p.14 (서술 순서는 나무위키에서 임의로 바꿈)

1. 소개 및 출간 배경

본서는 규범화된 하나의 정통 페미니즘(Feminism)을 거부하고, 개인들이 자신의 삶으로 꾸려나가는 페미니즘들(feminisms)을 추구함을 천명한 수필이다. 본서는 〈 뉴욕 타임스〉 에서 베스트셀러로 선정되었으며, 한편으로 〈 타임〉 지에 따르면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매뉴얼"(a manual on how to be human)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다양한 종류의 페미니즘 관련 서적들 중에서도 본서는 특히 에세이스트의 글이라고 할 수 있으며, 문예비평을 다루기는 하지만 라캉철학이나 비평 관련 이론들로 독자를 괴롭히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그냥 유명한 영화 리뷰 블로거가 쓴 글을 보는 듯한 느낌으로 술술 읽히는 편. 그래도 서구사회를 달구는 사회적 이슈나 사건사고에 대해서는 상당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본서는 서문에서, 그리고 4장에서 자신의 글을 출간하게 된 배경을 암시하고 있는데, 서문의 표현을 달리 바꾸자면 복수명사로서의 페미니즘, 다시 말해 "하나의 유일한 페미니즘" 이 아니라 "다수의 다양한 페미니즘들" 을 제안하기 위함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우선 서구권에서 많은 여성들이 "I'm not a feminist, but..." 과 같은 표현을 선호한다는 사실부터 시작해야 한다. 즉, 여성들은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양성평등에는 동의하고 이를 추구할 용의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자기 자신이 페미니스트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개인이 페미니즘을 실천하느냐 마느냐와는 무관하게,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화(identification)가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어째서일까? 저자에 따르면, 페미니즘에 ' 근본주의적인 이미지' 가 있기 때문이다. 본서는 이 문제에 대한 저자 나름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하나의 가설이자 실천의 방식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페미니즘 진영에 대한 저자의 자성적이고 성찰적인 고민이 녹아들어 있다.

본서의 제목이 "나쁜 페미니스트" 라는 점이 영어권에나 한국에서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딱 좋은데, 본서에서 저자가 굳이 'bad' 라는 수식어를 쓴 것은 "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만하다" 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부족하다", "불완전하다", "되다 말았다" 정도의 의미에서 이런 제목을 달아둔 것이다. 그리고 하단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저자는 오히려 자신의 그러한 부족한 상태를 긍정하고 수용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페미니즘이 개개인의 이런 부족함까지도 포용할 수 있어야 함을 암시하기까지 한다.

저자 록산 게이(R.Gay)를 소개하자면 우선 아이티 미국인이며, 피부색은 비교적 밝은 편이지만 스스로를 흑인으로 정체화하고 있다. 현재는 퍼듀 대학교의 교수이자 소설가, 에세이스트이고, 문화비평가이자 출판인이기도 하며, 〈뉴욕 타임즈〉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다. 또한 활발하게 활동하는 트위터리안이며, 여기서 자신이 양성애자(bisexual)임을 커밍아웃하기도 했다. 작가로서의 주요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An Untamed State》(2014), 마블 코믹스 스핀오프 코믹스 《World of Wakanda》(2016)의 각본 공동참여,[1] 기타 등등이 있다.

또한 저자는 〈 가디언〉 과의 인터뷰 중에, 자신이 만12살 때 성폭행을 당한 적이 있으며 이것이 자신의 작품 《Hunger》 에 반영되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본서에서도 61~65페이지를 읽어보면 그 당시의 상황이 담담하면서도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2] 사건을 요약하자면 저자의 첫사랑이자 풋사랑이었던 동급생 남자친구가 하필이면 인간 말종이어서, 동료 소년들과 함께 숲 속 헛간으로 저자를 유인해서 수 시간 동안 맥주를 마시며 집단강간을 저질렀고, 그 이후 학교에서 내내 " 걸레" 라며 저자를 놀려댔다는 얘기다. 저자는 강간을 당한 이후조차도 부모님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서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행동했지만, 그때 이후로 '살이 찌면 아무도 날 강간하지 않겠지' 라는 강박관념에 빠져서 폭식증을 앓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여러모로 시사점을 주는데, 특히 "내게 이 있는데 그 딸에게 나도 모르는 새 이런 일이 생긴다면?" 과 같이 진지하게 접근했을 때 간단치 않은 문제임을 보여준다. 저자의 부모는 "풍부한 사랑", "단단한 유대감", "완벽하진 않지만 훌륭한 가정"(이상 p.59)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저자를 반듯하게 키웠다. 저자의 아버지가 가장 강조하는 가치 중 하나는 바로 '절제' 였으며, 어지간한 한국인 부모 수준으로 철저하게 자녀 공부를 시켰다. 저자 역시 매주 독실하게 교회 주일학교에 다니던 품행 방정한 여학생이었고, 요란하게 꾸미기는커녕 항상 단정한 옷차림이었으며, 육감적인 몸매는커녕 심히 깡마른 체격이었고, 항상 반에서 모범생이었으며 올A를 받았던 행실 반듯한 소녀였다. 그랬기 때문에 (혹은 그와는 무관하게), 저자는 집단강간의 표적이 되었다.[3] 이는 비극을 피하기 위해 여성과 그 가족 개개인이 " 노력" 하고 조심하는 것만으로는 세상의 문제와 비극이 간단히 해결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2. 목차 및 주요 내용


2부 소제목 중에서 "에이미 하우스" 라고 적힌 부분은 역자의 오기로 보이며, 정확한 이름은 " 에이미 와인하우스"(A.J.Winehouse)이다. 이 인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해당 문서를 참고.

책의 전체 내용을 세줄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2.1. 챕터별 내용 정리

각 챕터의 내용들을 각각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책에서 전반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하단에 간략히 정리할 것이다. 먼저 저자가 대중매체를 리뷰하고 비평하는 내용들 중에서 특별히 길게 논의된 바 클리셰적인 캐릭터의 유형들을 몇 가지 살펴보고, 이것이 어떻게 페미니즘적으로 비평될 수 있는지 확인한다. 다음으로 페미니즘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길을 주장하는 이른바 ' 근본주의 페미니즘' 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정리한다. 그 다음에는 소위 '남성 특권' 이라는 개념이 대중의 입말에서 어떻게 남용되고 있는지, 특권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자성적인 관점을 취하는 것을 소개한다. 마지막으로는 본서에서 언급되는 몇몇 사건들을 배경지식을 위하여 잠시 정리하겠다.

2.2. 대중매체 속 캐릭터의 유형에 대한 성찰

저자는 본서에서 다수의 영화비평을 하고 있는데, 특히 그 중에서 클리셰가 되어 버린 캐릭터의 유형을 비판하는 지점들이 몇 가지 있다. 나무위키에서도 저자가 이들 클리셰에 대해서 어째서 상상력이 부족하고 정형화되어 있다고 생각하는지 비판하는 이유를 소개한다면, 차후 창작물을 생산하거나 소비하는 데 있어서 좋은 참고가 될 수 있겠다.

우선 1부에서 저자는 《여성 캐릭터는 왜 항상 호감만 연기해야 하는가》 에서 호감형 여성 캐릭터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다. 물론 비호감 여성 캐릭터가 무조건 "옳다" 거나, 그런 캐릭터만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 호밀밭의 파수꾼〉 의 홀든 콜필드처럼 비호감 남성 캐릭터는 그 비호감적인 면이 하나의 매력 포인트가 되고 공감대를 일으키지만, 비호감 여성 캐릭터는 그냥 작품에 쏟아지는 혹평의 원인이 되고 만다. 그 결과 여성 캐릭터들은 독자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서 " 아무 이유 없이 지루하게 착한 캐릭터"(p.85)라는 가장 진부한 캐릭터가 되고 만다. 하지만 이것은 비인간적인 캐릭터화다. 여성 캐릭터를 비호감이라고 규정하게 만드는 여러 성격 특질들은 사실 더할 나위 없이 인간적인 특질이기도 하며, 반대로 소위 호감이라고 불리는 성격이야말로 "매우 정교한 거짓말이며 기술적인 연기이고 이 사회가 강요하는 행위 규범"(p.81), 즉 성 역할 내지는 페르소나라는 것이다.[4]

물론 일상에서는 타인에게 호감을 주는 것이 사회생활에 중요하긴 하지만, 문예비평에서까지 등장인물이 '호감형' 이네 아니네 하는 것은 정말로 이상하다. 소설작법과 관련하여 제임스 우드(J.Wood)나 클레어 메수드(C.Messud)가 지적하듯이, 사람들은 소설 속에서 호감 가는 친구를 찾으려고 드는 경향이 있다. 독자는 소설 속에서 자신과 사귈 가상의 친구를 찾고, 그저 어떤 인물들은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을 뿐인데, 이상하게 여성 캐릭터가 기준에 맞지 않으면 비난이 쏟아진다는 것이다. 심지어 캐릭터에 정이 들지 않는다고 작품 자체를 박하게 평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캐릭터가 얼마나 생생하게 묘사되었는가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창작자의 한 사람으로서 캐릭터를 디자인한다는 것이 '작가 자신과는 다르면서도 실제로 존재하는 듯하고, 게다가 작중에서 겪는 온갖 역경을 견뎌낼 수도 있어야 한다' 는 점 때문에 쉽지 않다는 데 공감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제는 민폐형 캐릭터, 엉망진창 캐릭터가 생동감 있게 묘사되게 하자고 제안한다. 이 캐릭터들은 친구를 사귀려 자신을 치장하지 않으며, 그보다는 자신에게 더 중요한 다른 일로 인해 늘 바쁘다. 심지어 민폐랄 것도 아닌 것이, 생각을 조금만 바꿔 보면 이들은 담대하고, 결단력 있고, 자립심 있고, 주장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타인의 호감을 사려고 애쓸 생각이 없고, 자신에게 강요되는 역할을 수행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유형이다. 그렇다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이런 캐릭터 컨셉에 대해서 이중잣대를 동원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5]

지금까지 창작물 속 여성 캐릭터의 천편일률적인 모습을 비판했으니, 이번에는 여성 독자들이 창작물을 접하면서 남성 캐릭터에 대해 갖게 되는 판타지를 비판해 보자. 저자는 1부 말미의 《50가지 그림자와 동화 속 왕자님》 에서, 여성향 장르 매체에서 흔히 등장하곤 하는 '남주' 의 캐릭터 유형, 동화 속 왕자님 캐릭터를 비판한다. 왕자님 캐릭터는 〈 인어공주〉, 〈 백설공주〉, 〈 미녀와 야수〉, 〈 잠자는 숲 속의 공주〉 같은 오래된 이야기들부터 〈 트와일라잇〉 의 에드워드 컬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동화는 좋아하는 저자이지만 왕자님 캐릭터는 통 좋아할 수가 없다고 한다. 이런 '왕자님' 들은 무작정 멋있다고만 하지, 도대체 어디가 멋있다는 건지는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 특히, 저자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의 통제와 지배를 사랑으로 정당화하는 남주 캐릭터에 여성 독자들이 환호하는 것을 크게 우려한다. 흔한 사례를 들자면, 카베동은 로맨틱함도 아니고 카리스마도 아니며, 단지 상대방을 자기 뜻대로 복종시키기 위한 위협일 뿐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에리카 제임스(E.L.James)의 에로틱 로맨스 〈Grey: Fifty Shades of Grey〉 를 소개한다. 이 작품은 BDSM을 소재로 하는 에로티카(erotica)인데, 저자의 기준에 그 작품성은 한심할 수준이지만, 30-40대 여성들에게 많이 읽혔다는 이유로 인하여 언론에서는 " 엄마 포르노" 같은 호들갑스런 보도가 이어졌다고 한다. 이 작품에 대해 저자가 가장 비판하는 것은, 여주가 남주를 "동화 속 왕자님" 이라고 생각했다가 실제로는 "죄악 속에 빠진 소년" 임을 알고 구해주게 된다는 비현실적인 내러티브를 따른다는 것이다. 작품 속의 남주 캐릭터인 크리스천 그레이(C.Gray)는 여주 캐릭터를 통제하고 집착하며 지배하고 독점하며 학대하지만, 그 모든 권력의 작용은 달콤한 섹스 장면을 통해서 그럴싸한 동화 속 왕자님 같은 환상으로 포장된다. 여주는 또 자신이 남주를 '구원할 수 있다' 고 생각하고 그 모든 것을 선선히 수용한다. 하지만 그레이가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저지르는 모든 기행들은 실상 "열여섯 살 철부지 소년처럼 말 그대로 영역 표시를 하는 것"(p.186)일 뿐이라는 얘기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자신의 욕망을 관철시키며 여성은 지배당해야 한다는 논리는 심지어 〈 트와일라잇〉 의 에드워드 컬렌도 피해갈 수 없다. 여성을 자기 멋대로 다루면서도 "이것도 다 널 사랑해서야" 라고 달콤하게 속삭이는 남주 캐릭터는, 더 이상 '동화 속 왕자님' 이라고 불려선 안 되며 오히려 " 반은 미친 놈인 왕자님"(p.186)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서구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인종 관련 클리셰로 저자가 거론하고 있는 사례로 마법의 깜둥이(magical Negro)가 있다. 국내 내지 동아시아 창작물에서는 흑인이 그리 많이 나올 일이 없다 보니 흔치는 않지만, 이 클리셰는 〈 사랑과 영혼〉, 극장판 〈 섹스 앤 더 시티〉 에서도 활용되었으며, 심지어 1960년대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영화인 〈The Help〉 에서는 여기에 해당되는 등장인물이 무려 13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 클리셰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데, 청소부 하녀 등 온갖 수모를 겪는 하위 신분의 흑인 중년 여성으로, 자신의 내면적 힘을 통해서 철없는 백인 주인공을 감화시키고, 그들에게 영감을 주고 격려하고 발전의 계기를 제공하는 조력자형 인물이다.[6] 이 클리셰는 흑인들이 그런 비참한 처지에서 백인들에게 그만큼의 마음 씀씀이를 드러내기 힘들다는 점에서[7] 비현실적이기도 하지만, 과거의 인종차별 문제를 ' 순수했던 우리네의 그때 그 시절' 처럼 보이게 한다고 한다.

서구 문화매체에서 흑인들의 삶이 주인공급으로 묘사될 때, 많은 감독들과 작가들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남북 전쟁 시기나 흑인 노예들의 생활을 주제로 삼는다고 한다. 저자가 본서에서 리뷰한 영화들 중 다른 예로는 〈 장고: 분노의 추적자〉, 〈 노예 12년〉 같은 것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고난의 서사" 는 역설적으로 흑인 영화의 서사적 다양성을 해치고 있으며, 어떤 작품을 보나 다 그게 그거인(…) 문제를 초래한다. 저자는 이런 영화를 보면 어떤 서사적 통찰력이나 창의성, 실험정신보다는 오히려 잔인함, 흉폭함, 무감동함으로 인한 정신적 괴로움만을 느낀다고 한다. 이처럼 "흑인 여러분, 흑인들이 이렇게 처참하게 당하고 살았습니다!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라고 앵무새마냥 외치는 듯한 작품들만 몇 트럭씩 쌓여 가고 있기 때문에, 갈수록 흑인 영화의 시장에 악영향이 커지고 있다는 것. 따라서 저자는 흑인 영화에 더 많은 예술적 실험이 필요하며,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흑인들의 생생한 경험이 드러나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 맥락에서 저자는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Fruitvale Station)를 굉장히 호평하고 있는데, 자세한 리뷰가 필요하다면 본서 3부의 《한 흑인 청년의 마지막 하루》 를 참고할 수 있다.

2.3. ' 근본주의' 페미니즘?

"근본주의 페미니즘이 실제로 있거나 혹은 내가 무언가를 근본주의로 인식하고 있을 수도 있다. 즉 페미니즘 안에도 옳고 그름이 있고 페미니즘을 잘못 시행하면 나쁜 결과가 따른다는 개념이다. 근본주의 페미니즘은 곧 분노, 유머 감각 없음, 공격성, 확고부동한 원칙을 나타내며 적합한 페미니스트 여성이 되는 방법, 적어도 적합한 백인 이성애자 페미니스트가 되는 방식을 규정한다. 포르노그래피를 싫어하고 여성의 대상화는 무조건 매도하고 남성들의 시선에 부응하지 않고 남자를 미워하고 섹스를 싫어하고 일에만 열중하며 제모를 하지 않는다."
- pp.356-357

앞에서도 잠깐 말했지만 저자는 " 페미니즘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유일한 길" 같은 논리를 굉장히 경계한다. 사실 국내에서도 이것은 종종 이슈가 되곤 했으며, 심지어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탈코르셋을 하지 않고 화장을 하는 여성은 페미니스트로 불려서는 안 될까? 직업여성이 자신의 진취성과 전문성을 드러내기 위한 '진하고 강한 화장' 을 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실천일까, 아니면 페미니즘에 대한 "배신" 일까? 엠마 왓슨처럼 가슴골이 깊이 파여 있는 상의를 입고 공식 석상에 오르는 것은 자기 자신의 표현의 방식일 뿐일까, 아니면 자기 몸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것일까? 기혼 여성이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면서도 남편과의 이혼만큼은 하지 않는다면, 이런 페미니스트는 부부 간 성 역할의 개혁을 자기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일까, 아니면 여성 간의 자매애(sisterhood)를 무시하고 남성을 통해서만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통념에 공모하는 " 가부장제의 부역자" 인 걸까? 페미니스트가 소위 ' 유니콘남' 이라 불리는 남자친구를 사귄다면, 이것은 양성평등을 위한 남녀 간의 협동의 가능성일까, 아니면 " 남성 권력의 시혜를 잃지 않으려는" 비겁한 전략일까? 아직까지 대개의 중론은 이런 질문에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독 일각에서는 "페미니스트가 어딜...", "당신이 그러고도 페미니스트냐" 같은 불만이 나온다.

이는 마치 수줍음 많은 남성에게 "남자가 되어 가지고 그게 뭐냐", 활발한 여성에게 "여자가 무슨 머스마같이..." 라고 훈계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바로 이 때문에 저자는 4부의 첫 부분에서 주디스 버틀러(J.Butler)의 젠더 수행성(gender performativity) 개념을 가져온다. 세상에 성 역할이 있는 것처럼, 페미니스트들도 페미니즘 실천의 "옳은 방법", "본질적 기준", "올바른 길" 이 있다는 생각에 빠지곤 한다. 그리고 어떤 것이 그 길에서 벗어난다고 여겨지는 순간, 곧바로 지능적 여혐러로 몰거나, 가부장제에 부역하는 명예 남성이라는 도덕적 비난을 가하며 페미니즘의 적으로 라벨링한다. 저자는 특히 엘리자베스 워첼(E.Wurtzel)이 "진정한 페미니스트라면..." 의 언설을 좋아한다고 비판하면서, 이들이 진짜/가짜 페미니스트를 편가르기하려고 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페미니즘 ' 근본주의자' 들은, 개인적 특성이나 인간의 복잡한 경험, 상이한 관점을 용납하지 않으며, 매사 싸잡아 말하면서 분류하고 범주화한다.

근본주의 페미니즘의 낙인 효과는 페미니즘이 그 실천에 있어서 평범한 여성들은 엄두도 못 낼 만한 사상이라고 느껴지게 하며 "특별한 소수나 하는 것" 이라고 여기게 만들어서, 여성들이 "나도 페미니스트입니다" 라고 말하게 하는 것을 저해한다. 짧게 말해, 개인이 페미니즘을 받아들이고 정체화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소위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온갖 까다로운 품질 검사(?)를 거쳐야 하고, 거기서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부분이 발각되는 순간, 그 사람은 한때 페미니스트였지만 이제는 시대착오적 성차별주의자가 된다. 아니, 여성운동의 진보를 무너뜨리기 위해 양의 탈을 쓰고 숨어들어온 이리 같은 취급을 받는다. 상황이 이럴진대, 과연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감히' 자신을 페미니스트라는 '위대한 일부 여성들의 존명' 으로 참칭할 수 있겠는가?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목표에는 동의하지만 페미니스트로서 살아갈 자신까지는 차마 없는 이 여성들은, 이제 스스로를 소개할 때 "I'm not a feminist, but..." 으로써 입을 열게 된다. 이들에게 있어서 페미니즘은, 일상적 실천의 방식이기는커녕 자신과 하등 관계가 없는 거창한 공적 프로젝트일 뿐이기 때문이다.

근본주의 페미니즘이 여성들에게는 점점 대중적 거리감을 유발시킨다면, 우리 사회에는 또 다른 고정관념을 만들어낸다. 너도나도 그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 집단극화가 일어나면서, 점점 극단주의적인 양상이 대중의 눈과 귀에 가시화된다. 페미니스트들은 모두들 잔뜩 화가 나 있고, 브래지어를 불태우며, 언제나 전혀 화장을 하지 않고, 머리는 투블럭 내지는 아무리 못해도 보브컷이어야 하며, 정장을 입어도 치마는 절대로 안 되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듯하며, 일에 미쳐서 일밖에는 모르고, 아기 돌보기를 싫어하며, 아무리 농담을 해도 웃기는커녕 " 그거 불.편.하.군.요." 라고 따박따박 쏘아붙이고, 늘 드라마를 보나 영화를 보나 오만상을 찌푸리며, 타인에게는 " 이제 그만 본인의 특권을 인정하시죠?" 라며 다그치는 무례한 태도로 일관한다는 것이다. 물론 정말 교과서적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가 대중에게 익숙해지면서,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페미니스트들에게까지 엉뚱한 질문이 들어온다. "너는 페미니스트라면서 왜 겨드랑이 털을 제모하는 거야?" 결국 극소수의 교과서적인 사례에 해당하지 않는 수많은 평범한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 진영 내부에서건 외부에서건 늘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다.[8]

독자들을 격려하기 위함이었는지는 몰라도, 저자는 4부 말미에서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저자가 밝히는 바에 따르면 저자는 비-페미니스트들의 관점에서조차 "...그러고도 당신이 페미니스트라고?"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 정도.[9] 그런데, 한때 저자 역시 자신이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자신은 다른 이들이 막연히 생각하듯이 '완벽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림으로 그린 듯이 흠잡을 데 없는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려던 저자의 노력은 완전하게 실패했다. 그런 가면을 쓰고 고생스런 연기를 한 경험 이후로, 저자는 이제 스스로에 대해서 "그저 나를 받아들이고 내 신용 평점을 받아들이려 애쓰는 30대 여성일 뿐"(p.373)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페미니스트가 "전투적이고 정치적이며 인간으로서 완벽하고 남자를 증오하고 유머가 없는 사람들"(p.375) 같은 특이한 부류의 여성이 아니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면서도 저자는 "I'm not a feminist" 표현을 쓰는 것을 긍정하지는 않는다.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되, 그저 '되다 만', '조금 부족한', '불완전한'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면 된다는 것이다.

서문에서 저자는 일부 작가들이나 방송인들, 혹은 엠마 왓슨이나 브리 라슨 같은 여배우들, 이런 소위 "big mouth" 의 완벽함에 의해 결정되는 '셀러브리티 페미니즘' 을 비판한다. 사람은 완벽할 수 없고, 이들이 어떤 잘못을 저지를 수는 있지만, 셀러브리티 페미니즘은 이들의 잘못을 페미니즘의 잘못으로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세상에 모든 여성들의 행실을 완벽하게 지배하는 단 하나의 페미니즘 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페미니즘을 완벽하게 체화한 역할 모델 유명인을 찾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그 대신, 자기 자신이 페미니즘을 실천하기 위한 자기만의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은 천편일률적인 것이 아니며, 모두가 다양한 페미니즘들을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단 하나의 완벽하고 절대적이며 유일하고 본질적인 페미니즘이 존재한다는 관점을 "대문자 페미니즘"(Feminism)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며, 사람들이 따를 수 있는 다양하고 상대적이며 일상적이고 유연한 페미니즘을 모두 인정하자는 관점을 "페미니즘들"(feminisms)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10] 이런 대문자 페미니즘은 한편으로는 흑인, 성소수자, 트랜스젠더 등까지도 페미니즘의 진정한 이상에 맞지 않는다고 보아서 간과하거나 배제하거나 심하게는 배척해 왔고, 그 결과 수많은 잠재적 아군들이 페미니즘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결국, 페미니즘의 근본주의화는 페미니즘의 실패 사례가 되고 말았다는 것.

나무위키에 한하여 생각건대, "나는 뭘 해도 페미니스트로서 괜찮다" 라는 본서의 방법론적 아나키즘에 가까운 제안은, 자칫 극단주의자들에게는 "나는 뭘 해도 시민으로서 괜찮다" 고까지 확대될 위험도 있다. 워마드 등처럼 페미니스트로서 각종 악행을 저지르고도 정체화 수준에서는 자신이 여전히 페미니스트라고 믿을 수는 있지만, 사람들의 비난으로부터의 면책을 기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에는 교양 있는 시민으로서 개인에게 요구하는 최소한의 책임이 있는데, 본서는 그것까지 피할 논리를 제공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본서의 메시지는 페미니즘의 근본주의적 규율을 강요하는 세태를 경계하는 것일 뿐이지, 시민성이 결여된 악행에 대해서까지 자기합리화를 해 주지는 않는다. 즉, 일단 반사회적인 행동을 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나는 부족한 페미니스트니까 이런 터무니없는 행동일지라도 괜찮아" 라고 생각함으로써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지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사람이 " (도덕적으로) 나쁜 시민" 이라는 질타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2.4. 특권 있는 자, 말하지 말라고?

많은 문화비평가들과 페미니스트들이 목청을 높여서 소위 "남성 특권"(male privilege)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그들은 남성이 남성으로 생활하는 이상 무한한 특권을 누릴 수밖에 없으므로, 이들이 자신의 특권을 인정하고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이들이 입을 여는 순간 특권 없는 자들의 목소리는 가려지게 되기 때문에, 특권이 있는 자들은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그런데 이 특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사회적 의미가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대체 특권이란 게 무엇인가? 더 높은 귀속 지위인가? 더 많은 권력인가? 더 많은 임금인가? 더 많은 선택의 기회인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사는 데 지장이 없는 상태인가? 자신과는 다른 무언가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는 여유인가?

위의 아이디어들 전부 막연하게 관련성이 있긴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그런 손가락질을 받는 입장에서는 전혀 그런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 저자는 문화비평가들이 "특권을 지나칠 정도로 자주 공허한 방식으로 언급하면서 이 단어의 진짜 의미를 희석시켜 버리고 말았다"(p.282)고 말한다. 남성 특권이 사회 운동의 구호로 쓰이면서, 듣는 입장에서는 마침내 단 하나의 의미만이 남게 되었다. " 넌 정말 쉽게쉽게 살고 있구나, 차암 좋겠다!" 하지만 "어느 누구에게나 산다는 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p.284)에, 사람들은 특권이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방어적이게 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두 가지 특권으로 도덕적 비난에 직면했을 때 두세 가지의 상쇄 요인들을 늘어놓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서 " 나도 인생 사는 거 힘들거든!" 이라고 항변할 준비가 되어 있다. 본서에서 저자는 이런 식의 소모적인 논쟁을 가리켜서 특권 게임이라고 부른다. 이런 발상에는 승자가 없으며, 본인들만 자신이야말로 더 힘들게 산다면서 자기위로를 하는 데 그친다.

특권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당장 대한민국의 특권층이라 하면 누구일까? 흔한 기준들을 전부 들어서, 서울에 거주하는 2030세대의[11] 시스 헤테로 남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도 미국 등지로 나가게 되면 어쩔 수 없는 유색 인종의 범주에 속하며, 아무리 잘해봐야 " 바나나" 취급을 받을 뿐이다. 정반대로, 지방에 거주하는 5060세대의 트랜스- 레즈비언 여성을 떠올릴 수 있다면(…), 이 사람은 어떨까? 그녀가 사지 멀쩡한 이상, 장애인에 비하면 여전히 특권층이다. 그럼, 장애인까지 포함시킨다면 특권층이 될까? 여전히, 그녀는 위도상으로 몇 도 정도 남쪽에서 태어나는 엄청난 특권 덕택에 적어도 사계절 내내 굶주리지는 않을 수 있다.[12] 북한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그녀는 적대계층이 아닌 이상 또 다른 특권을 누린다. 설령 적대계층이라 해도 인도 불가촉천민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특권이 있는 건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 모든 범주에 전부 정확히 들어맞는 사람들은 극소수이며, 이런 이야기를 더 늘어놓아 봐야 큰 의미는 없다. 이쯤에서 내놓을 수 있는 상식적인 대답은,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특권적 요소와 억압적 요소를 갖고 있다는 것뿐이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자신만의 (+) 요소들과 (-) 요소들이 있다.

저자는 이쯤에서, 특권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안한다. 기존의 특권에 대한 일차원적이고 단순한 몰이해는, " 흑인 남성 백인 여성 중에 누가 더 특권이 있는가", " 헤테로 여성 게이 남성 중에 누가 더 특권이 있는가" 같은 쓸데없는 '특권 게임' 에 빠지게 만들 뿐이다. 단지, 우리는 내 자신부터 어느 정도의 특권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모든 타인을 존중하면 되는 것이다. 자신의 특권을 인정한다는 것이 곧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세상에는 "당신이 전혀 감도 못 잡는 방식으로 이 세상을 헤쳐 나가고 경험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p.284)는 사실만 알아두면 된다는 것이다. 여성으로서의 삶은 남성들이 상상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고,[13] 흑인으로서의 삶은 백인들이 잘 이해하기 어렵다는 걸 일단 유념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기왕이면 특권이 있을 때 그 특권을 공익적으로 쓰자는 것이고, 탐욕스러운 '특권 수집가' 가 되지는 말자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저자의 제안은 '어려움에 처한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도와주세요' 같은 메시지에 마음을 여는 수준의 상식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권이 없는 자만이 말을 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저자는 의문을 표한다. 물론 앞서 언급했듯이 특권이 있는 사람은 특권이 없는 사람의 관점과 경험을 파악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권이 아예 없는 사람들만 일상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저자는 온라인에서 평범 일상물이 연재되던 훈훈한 사이트가 몇 명의 ' 특권의 감시단' 의 난입으로 인해 완전히 박살나 버리는 광경들을 목격했다. 이런 사람들은 "당신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기 때문에, 가진 것이 많기에"(p.285) 그런 일상으로 약자들을 짓밟는다고 물고뜯는다. 하지만 그들 역시 어쨌거나 인터넷에 접근할 특권 정도는 누리고 있지 않은가? 저자는 특권이 약한 사람들이 침묵당해 왔다고 해서 다른 이의 입을 틀어막을 권리도 없다고 본다. 타인을 침묵시키려 시도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그것은 그 당사자의 방어적 반응을 초래하여 새로운 '특권 게임' 에 불을 붙일 뿐이다. 저자는 우리가 "누가 많이 가졌고 누가 못 가졌는지 따지는 비교 올림픽을 열지 말아야 한다"(p.286)고 제안한다. 특권 게임 후에 남는 것은, 한때는 기운차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시민들이었으나, 이제는 모두들 저마다의 트리거와 트라우마와 불리한 귀속 지위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처참한 광경뿐이기 때문이다.

3. 본서에서 언급된 사건들

본서는 저자가 문화비평을 자주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미국 및 서구권의 여러 사건사고들을 언급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간략한 소개 및 연결된 링크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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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7년에 상세불명의 사유로 계획이 취소되었다. 페미니스트들은 다양성(diversity) 요소를 강조하려던 저자의 관점에 ' 백래시' 가 발생하여 엎어진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마블 코믹스가 다양성을 조금씩 늘려가고 있는 행보와는 잘 맞지 않는다. [2] 본서를 완독할 시간적 여유가 없는 독자라 할지라도 이 범위만큼은 한번쯤 읽어볼 만하다. [3] 이쯤에서 생각해 볼 때, 저자와 저자의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이 강간을 피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적절할까? 저자에게 집단강간은 결국 인과응보였을까? 아버지는 자식 교육을 위해, 딸의 순결을 위해 "더" 노력해야 했었을까? 그럼 다음 강간은 막을 수 있을까? 만약, 딸이 강간당할지 여부를 예측할 수 없고, 아무리 최선의 가정교육으로도 예방할 수도 없다는 무력감이 든다면, 아버지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이런 질문들은 단순히 피해자를 위로해 주는 것 이상의 실질적인 대안을 내놓기에는 골치아픈 문제다. 이 때문에 어떤 이들은 강간 근절 운동을 돌파구로 삼기도 한다. [4] 비슷한 맥락에서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Firestone)도 연애 시절에는 한없이 호감가는 인상이었던 그녀가 결혼하고 나면 갑자기 ' 마누라' 가 되어 버리는(…) 상황에 대해, 그저 그녀가 착한 여성 연기를 그만두었을 뿐이며 가장 자기답고 자연스러운 본연의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5] 조금 생각해 보자면 모든 비난 받는 캐릭터들이 전부 비호감이기 때문에 비난을 받는 것도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가능성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저자의 포인트는, 여성 캐릭터가 다양하지 못하며 정형화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소설 속에서 자기 여친을 찾으려고 드는 경향' 에 있다는 것이다. [6] 서부극의 경우 이런 역할은 북미 원주민 캐릭터가 맡기도 한다. 원주민 남성이 잘 안 되는 영어로 무뚝뚝하게 더듬더듬, 그러나 지혜롭게 조언한 몇 마디에, 우리의 백인 주인공이 크게 깨달음을 얻어서 사건을 반전시킨다는 줄거리. [7] 저자는 그런 비참한 흑인들이 백인들에게 그렇게 헌신적이고 협조적이며 지원적이려면 마법의 힘이 아니고서는 안 될 것이라고 깠다. [8] 직장에서 여성들이 직장인으로서의 정체성에 위기를 겪는 사칭범(imposter) 현상에 대해 페미니즘은 늘 지적해 왔는데, 이런 그들이 정작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에까지도 "내가 정말 페미니스트라고 불릴 자격이 있나?" 하는 사칭범의 느낌을 갖게 만드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9] 저자는 타인이 챙겨주는 것을 선호하고, 울적한 감정에 깔리기도 하며, 여성비하적인 랩 가사를 들으며 즐거워하고, 분홍색을 좋아하고, 《보그》 잡지를 읽고, 명품 백과 커다란 의상실의 판타지를 갖고 있으며, 다리털 제모를 하며, 자동차에 대해 아는 바가 없고, 남성들을 매우 좋아하며, 사치스런 결혼식의 판타지가 있고, 잔디 깎기와 벌레 잡는 일은 남자를 시키고 싶고, 어떤 집안일은 남녀구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좋아하지 않는 남성과 섹스하면서 '느끼는 척' 을 할 수 있고, 아이를 갖고 싶고, 아이를 기르기 위해 커리어에 타협을 할 용의가 있고, 딩크(DINK)족이 되는 것이 두렵고, 자녀 육아를 위해 일을 줄일 의향이 있다고 한다. [10] 인문학 분야에서 이런 구분법은 상당히 폭넓게 적용되고 있고, 유용하기도 하다. 사학계를 예로 들면, 주류 실증주의 사학계에서는 역사를 단 하나의 관점(지배자의 관점)에서 연대기순으로 나열해서 그 역사적 평가를 확정하는 ' 국사' 접근법을 선호하지만, 구술사연구 등을 방법론으로 하는 마이너한 부류에서는 일반 민중이 겪는 다양한 경험들과 기억들을 역사'들'로서 복수의 형태로 다루고,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관점에서는 '대문자 역사관' 이란 그저 다수의 기억들 중 그 하나의 기억이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기억투쟁에서 승리했을 뿐이라고 본다. [11] 사실 노년층을 사회적 약자로 대하는 분위기와는 달리, 실질적인 사회적 권력은 젊은층보다는 중장년층~노년층에게 더 많이 주어진 경우가 많다. 심지어 노년기 후기의 오늘내일 하는 노인조차 엄청난 권력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우리 가족들도 제사는 그만 지내고 싶지만, 집안 할아버지께서 저렇게나 역정을 내시니 어쩌겠느냐, 할아버지 돌아가실 때까지는 우리가 참아야지" 라고 토로하는 중장년의 남성을 떠올려 볼 수 있겠다. 소위 '나이가 깡패' 인 문화권에서는 나이에 의거한 권력의 작용이 뚜렷하게 관찰되곤 한다. [12] 저자는 아이티계 미국인이기 때문에 종종 부모님과 함께 아이티에 방문할 일이 있었는데, 갈 때마다 빈곤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절절하게 깨달았다고 한다. 미국에서 흑인 여성으로 살면서 온갖 수모와 차별을 견뎌 왔다 해도, 선진국 국민으로서 살아가는 이상 자기 자신도 어쩔 수 없는 특권을 갖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13] 이 부분을 지적하는 것이 바로 레베카 솔닛(R.Solnit)의 저서 《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이며, 여기서 유래한 신조어가 바로 " 맨스플레인"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