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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리 그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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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리 그랜트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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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I 선정 가장 위대한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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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미국 영화 연구소(AFI)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남, 여배우 순위이다.
1위 2위 3위 4위 5위
험프리 보가트
캐서린 헵번
케리 그랜트
베티 데이비스
제임스 스튜어트
오드리 헵번
말론 브란도
잉그리드 버그만
프레드 아스테어
그레타 가르보
6위 7위 8위 9위 10위
헨리 폰다
마릴린 먼로
클라크 게이블
엘리자베스 테일러
제임스 캐그니
주디 갈런드
스펜서 트레이시
마를레네 디트리히
찰리 채플린
조안 크로포드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게리 쿠퍼
바버라 스탠윅
그레고리 펙
클로데트 콜베르
존 웨인
그레이스 켈리
로런스 올리비에
진저 로저스
진 켈리
메이 웨스트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오슨 웰스
비비안 리
커크 더글러스
릴리안 기시
제임스 딘
셜리 템플
버트 랭카스터
리타 헤이워드
막스 형제
로렌 바콜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버스터 키튼
소피아 로렌
시드니 푸아티에
진 할로우
로버트 미첨
캐롤 롬바드
에드워드 G. 로빈슨
메리 픽포드
윌리엄 홀든
에바 가드너
같이 보기: 영화, 사랑 영화, 뮤지컬 영화, 영감을 주는 영화, 배우, 영화 음악, 명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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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공로상 수상자
'''[[틀:아카데미 공로상 수상자|Academy Honorary A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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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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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1928년 1928/1929년 1929/1930년 1930/1931년
워너 브라더스 찰리 채플린 없음
1931/1932년 1932/1933년 1934년 1935년 1936년
월트 디즈니 없음 셜리 템플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시간의 행진
1936년 1937년
W. 하워드 그린
해럴드 로슨
에드가 버겐 W. 하워드 그린 현대미술관 영화도서관 맥 세네트
1938년
J. 아서 볼 월트 디즈니 디아나 더빈
미키 루니
고든 제닝스 외 10인 올리버 T. 마쉬
앨런 데이비
1938년 1939년
해리 워너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주디 갈랜드 윌리엄 카메론 멘지스 영화구호기금
1939년 1940년 1941년
테크니컬러 USA 밥 호프 네이선 레빈슨 월트 디즈니
윌리엄 가리티
존 N. A. 호킨스
RCA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와 그의 동료들
1941년 1942년
레이 스콧 영국 정보부 샤를 부아예 노엘 코워드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
1943년 1944년 1945년
조지 팔 밥 호프 마가렛 오브라이언 리퍼블릭 스튜디오
대니얼 J. 블룸버그
리퍼블릭 스튜디오 사운드 부서
월터 웡거
1945년 1946년
내가 사는 집 (영화) 페기 앤 가너 해롤드 러셀 로런스 올리비에 에른스트 루비치
1946년 1947년
클로드 자먼 주니어 제임스 바스켓 윌리엄 니콜라스 세릭
앨버트 E. 스미스
조지 커크 스푸어
빌과 쿠 (영화) 구두닦이 (영화)
1948년 1949년
월터 웡거 무슈 빈센트 (영화) 시드 그라우만 아돌프 주커 진 허솔트
1949년 1950년
프레드 아스테어 세실 B. 드밀 자전거 도둑 (영화) 루이스 B. 메이어 조지 머피
1950년 1951년 1952년
말라파가의 벽 (영화) 진 켈리 라쇼몽 (영화) 메리안 C. 쿠퍼 밥 호프
1952년 1953년
해럴드 로이드 조지 미첼 조셉 M. 쉔크 금지된 게임 (영화) 20세기 폭스
1953년 1954년
벨 & 하웰 컴퍼니 조셉 브린 피트 스미스 부스 & 롬 컴퍼니 대니 케이
1954년
켐프 니버 그레타 가르보 존 휘틀리 빈센트 윈터 지옥문 (영화)
1955년 1956년 1957년
사무라이 i: 미야모토 무사시 (영화) 에디 캔터 영화 및 텔레비전 기술자 협회 길버트 M. 앤더슨 찰스 브래킷
1957년 1958년 1959년 1960년
B. B, 카헤인 모리스 슈발리에 버스터 키튼 리 드 포레스트 게리 쿠퍼
1960년 1961년
스탠 로렐 헤일리 밀스 윌리엄 L. 헨드릭스 프레드 L. 메츨러 제롬 로빈스
1962년 1963년 1964년 1965년 1966년
없음 윌리엄 J. 터틀 밥 호프 야키마 카넛
1966년 1967년 1968년 1969년
Y. 프랭크 프리먼 아서 프리드 존 챔버스 오나 화이트 케리 그랜트
1970년 1971년 1972년
릴리안 기시 오슨 웰스 찰리 채플린 찰스 S. 보렌 에드워드 G. 로빈슨
1972년 1973년 1974년
앙리 랑글로아 그루초 막스 하워드 혹스 장 르누아르 메리 픽포드
1976년 1977년 1978년
없음 마가렛 부스 월터 란츠 로런스 올리비에 킹 비더
1978년 1979년 1980년 1981년
현대미술관 영화과 할 엘리아스 알렉 기네스 헨리 폰다 바버라 스탠윅
1982년 1983년 1984년 1985년
미키 루니 할 로치 제임스 스튜어트 국립예술기금 폴 뉴먼
1985년 1986년 1987년 1988년
알렉스 노스 랄프 벨라미 없음 코닥 캐나다 국립영화위원회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구로사와 아키라 소피아 로렌 머나 로이 사티야지트 레이 페데리코 펠리니
1993년 1994년 1995년 1996년
데보라 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커크 더글러스 척 존스 마이클 키드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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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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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2002년 2003년 2004년
시드니 푸아티에 로버트 레드포드 피터 오툴 블레이크 에드워즈 시드니 루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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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 센터 공로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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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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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 1978년 <colbgcolor=#fff,#1f2023>매리언 앤더슨, 프레드 아스테어, 조지 발란신,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리처드 로저스
1979년 에런 코플런드, 엘라 피츠제럴드, 헨리 폰다, 마사 그레이엄, 테네시 윌리엄스
1980년 레너드 번스타인, 제임스 캐그니, 애그니스 데밀, 린 폰탠, 리언타인 프라이스
1981년 카운트 베이시, 케리 그랜트, 제롬 로빈스, 헬렌 헤이스, 루돌프 세르킨
1982년 조지 애벗, 릴리안 기시, 베니 굿맨, 진 켈리, 유진 오르만디
1983년 캐서린 던햄, 엘리아 카잔, 프랭크 시나트라, 제임스 스튜어트, 버질 톰슨
1984년 레나 혼, 대니 케이, 잔카를로 메노티, 아서 밀러, 아이작 스턴
1985년 머스 커닝햄, 밥 호프, 아이린 던, 앨런 제이 러너, 프레더릭 로, 베벌리 실즈
1986년 루실 볼, 레이 찰스, 제시카 텐디, 험 크로닌, 예후디 메뉴힌, 앤서니 튜더
1987년 페리 코모,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베티 데이비스, 네이선 밀스타인, 알윈 니콜라이
1988년 앨빈 에일리, 조지 번즈, 마이어나 로이, 알렉산더 슈나이더, 로저 L. 스티븐스
1989년 해리 벨라폰테, 클로데트 콜베르, 알렉산드라 다닐로바, 메리 마틴, 윌리엄 슈만
1990년 디지 길레스피, 캐서린 헵번, 라이즈 스티븐스, 줄리 스턴, 빌리 와일더
1991년 베티 콤덴, 로이 에이커프, 아돌프 그린, 헤럴드 니콜라스, 로버트 쇼, 그레고리 펙
1992년 라이어널 햄프턴, 폴 뉴먼, 조앤 우드워드, 진저 로저스,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폴 타일러
1993년 자니 카슨, 아서 미첼, 게오르그 솔티, 스티븐 손드하임, 매리언 윌리엄스
1994년 커크 더글러스, 아레사 프랭클린, 모튼 굴드, 해럴드 프린스, 피트 시거
1995년 자크 당부아즈, 메릴린 혼, 비비 킹, 시드니 푸아티에, 닐 사이먼
1996년 에드워드 올비, 베니 카터, 조니 캐쉬, 잭 레먼, 마리아 톨치프
1997년 로렌 바콜, 밥 딜런, 찰턴 헤스턴, 제시 노먼, 에드워드 빌렐라
1998년 빌 코스비, 프레드 엡, 존 칸더, 윌리 넬슨, 앙드레 프레빈, 셜리 템플
1999년 빅터 보르게, 숀 코너리, 주디스 재스민, 제이슨 로바즈, 스티비 원더
2000년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척 베리, 플라시도 도밍고, 클린트 이스트우드, 안젤라 랜스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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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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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 2001년 <colbgcolor=#fff,#1f2023> 줄리 앤드류스, 밴 클라이번, 퀸시 존스, 잭 니콜슨, 루치아노 파바로티
2002년 제임스 얼 존스, 제임스 리바인, 치타 리베라, 폴 사이먼, 엘리자베스 테일러
2003년 제임스 브라운, 캐롤 버넷, 마이크 니콜스, 로레타 린, 이작 펄만
2004년 워렌 비티, 오시 데이비스 & 루비 리, 엘튼 존, 조앤 서덜랜드, 존 윌리엄스
2005년 토니 베넷, 수잔 파렐, 줄리 해리스, 로버트 레드포드, 티나 터너
2006년 주빈 메타, 돌리 파튼, 스모키 로빈슨, 스티븐 스필버그, 앤드루 로이드 웨버
2007년 레온 플라이셔, 스티브 마틴, 다이애나 로스, 마틴 스코세이지, 브라이언 윌슨
2008년 모건 프리먼, 조지 존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트와일라 사프, 더 후
2009년 멜 브룩스, 데이브 브루벡, 그레이스 범브리, 로버트 드 니로, 브루스 스프링스틴
2010년 멀 해거드, 제리 허먼, 빌 존스, 폴 매카트니, 오프라 윈프리
2011년 바바라 쿡, 닐 다이아몬드, 요요마, 소니 롤린스, 메릴 스트립
2012년 버디 가이, 더스틴 호프먼, 레드 제플린, 나탈리아 마라코바
2013년 마티나 아로요, 허비 행콕, 빌리 조엘, 셜리 맥클레인, 카를로스 산타나
2014년 알 그린, 톰 행크스, 퍼트리샤 맥브라이드, 스팅, 릴리 톰린
2015년 캐롤 킹, 조지 루카스, 리타 모레노, 오자와 세이지, 시실리 타이슨
2016년 마르타 아르헤리치, 이글스, 알 파치노, 마비스 스태플스, 제임스 테일러
2017년 카르멘 드 라발라데, 노먼 리어, 글로리아 에스테판, LL 쿨 J, 라이오넬 리치
2018년 셰어, 필립 글래스, 레바 매킨타이어, 웨인 쇼터, 해밀턴 팀 ( 린 마누엘 미란다, 토마스 카일, 알렉스 라카뫄르, 앤디 블렝큰불러)
2019년 어스, 윈드 앤 파이어, 세서미 스트리트, 샐리 필드, 린다 론스태드, 마이클 틸슨 토머스
2020년 데비 엘렌, 조안 바에즈, 가스 브룩스, 미도리, 딕 반 다이크
2021년 저스티노 디아즈, 베리 골디, 론 마이클스, 베트 미들러, 조니 미첼
2022년 조지 클루니, 에이미 그랜트, 글래디스 나이트, 타니아 레온, U2 ( 보노, 디 에지, 애덤 클레이튼, 래리 뮬렌 주니어)
2023년 퀸 라티파, 르네 플레밍, 빌리 크리스탈, 디안 워윅, 배리 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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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10px -10px" <tablewidth=90%><tablebordercolor=#fff,#1f2023>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로고.svg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로고 화이트.svg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Hollywood Walk of Fame Stars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d4a1a1><colcolor=#FFD700> 이름 케리 그랜트
Cary Grant
분야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영화 심볼.jpg 영화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위치 1610 Vine Street
}}}}}}}}}}}} ||


<colbgcolor=#fff8ed><colcolor=#000> 케리 그랜트
Cary Grant
파일:Cary Grant.jpg
본명 아치볼드 알렉산더 리치
Archibald Alexander Leach
출생 1904년 1월 18일
잉글랜드 브리스틀 호필드
사망 1986년 11월 29일 (향년 82세)
미국 아이오와주 데븐포트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미국|]][[틀:국기|]][[틀:국기|]]
신장 187cm
데뷔 1931년 <디스 이즈 더 나이트>
활동기간 1932년 – 1966년
직업 배우
부모 아버지 일라이어스 제임스 리치(1873 ~ 1935)
어머니 엘시 머리어 리치(1877 ~ 1973)
배우자 버지니어 체럴 (1934 결혼 – 1935 이혼)
바버러 허튼 (1942 결혼 – 1945 이혼)
벳시 드레이크 (1949 결혼 – 1962 이혼)
다이언 캐넌 (1965 결혼 – 1968 이혼)
바버러 해리스 (1981 결혼 – 1986 사별)
자녀 딸 제니퍼 그랜트(1966년생)
링크 파일:IMDb 로고.svg / 팬페이지 'carygrant.net'

1. 개요2. 인기 및 위상3. 생애 및 활동4. 주요 출연 작품5. 사생활
5.1. 결혼과 이혼5.2. 성 지향성 문제
6. 여담

[clearfix]

1. 개요

파일:캐리그랜트.gif
모든 사람이 캐리 그랜트가 되고 싶어 합니다. 심지어 나조차도 캐리 그랜트가 되고 싶다니까요![1]
- 캐리 그랜트

영국 태생의 미국 배우.

2. 인기 및 위상

자신이 직접 지은 예명으로 사회 밑바닥에서 올라온 자수성가형 배우다. 제임스 스튜어트, 클라크 게이블 등과 함께 30년대 후반부터 50년대 까지 할리우드의 황금기를 이끌었으며, 187cm의 큰 키에 구릿빛 피부, 잘생긴 외모를 지녀, 당대 최고의 미남 배우로 통한다. AFI 선정 가장 위대한 남배우 2위로 선정되었을 만큼 큰 인기와 영화사에 인상적인 업적을 남겼다.

당대엔 상류층과 배우들 사이에서 미국식 영어와 영국식 영어를 섞은 미드 애틀랜틱이란 억양이 우아하게 들린다며 각광받고 있었는데, 캐서린 헵번, 타이론 파워 등은 인위적으로 이 말투를 배워 연마했지만, 원래 영국인인 그랜트는 16살 때부터 미국에서 살았던 덕에 우연찮게 이에 가까운 언어 습관을 자연적으로 구사했다. 이는 그랜트의 여유롭고 점잖은 태도와 함께 신사 이미지에 일조했다.[2]

3. 생애 및 활동

파일:Mother_grant.jpg
파일:Father_grant.jpg
어머니 아버지
파일:20220920_112929.jpg

본명은 아치볼드 앨릭잔더 리치로, 1904년 1월 18일 영국 브리스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일라이어스 제임스 리치[3]는 의류 공장에서 압착기를 담당하는 노동자였고 집안은 가난에 시달렸다. 재봉사인 어머니 엘시 머리어 리치[4]는 춤, 노래, 피아노를 가르쳐주고 극장에 자주 데려가 영화를 접하게 해준 사람이었지만, 원체 몸이 약했던 형 존이 아기 때 죽은 뒤로 이를 자책하며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아치볼드 리치가 9살이 됐을 때 인근 정신병원에 영구 수용되었다. 이때 아버지는 어머니가 피서객이 많이 찾던 해안가 마을인 웨스턴슈퍼메어(Weston-super-Mare)로 혼자 놀러나갔다고 했다가, 곧 죽었다고 속였다. 아치볼드 리치는 1935년 31살이 되어서야 아버지의 사망 직전 고백을 통해 어머니가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돼 재회했다. 이는 평생 트라우마로 남았다.

늘 불륜을 저지르며 가정을 등한시하던 알코올 의존증아버지는 아치볼드 리치가 10살 때 아치볼드를 정신병동의 아내 밑으로 서류상 넘겨놓고 재혼을 하면서 아치볼드를 아예 버려버렸다. 이때 조금이라도 도와준 친척이나 주변 어른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5] 네 번째 아내 다이언 캐넌은 어린 아치볼드 리치가 이 시기에 겪은 일들은 자신이 들어본 부랑아 사연 중 가장 끔찍한 사례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는 수 없이 비셥 로드 초등학교[6]에 다닐 때부터 지역 극장 히퍼드러움(Hippodrome)에서 잡역부로 일하면서 스스로 돈을 벌어야 했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학교 수업을 늘 빼먹다가 1918년 14살에 고의로 말썽을 일으켜 장학금까지 받고 입학했던 페어필드 중등학교[7]에서 퇴학을 당한 뒤 유랑 희극 극단인 봅 펜더 공연단[8]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촌극, 곡예 등을 하며 다양한 공연 실력을 다졌다. 심지어 대말(竹馬)[9]도 탔다.
파일:2da00b6a9f27c55efffd6585fdac8bd6.jpg

1920년 이 극단이 2년 짜리 미국 순회 공연을 하게 됐을 때도 같이 갔다.[10] 필요했던 서류들에 아버지 서명을 위조했다는 얘기가 있다. 순회 공연이 끝나고 나서도 뉴욕에 남아 연기자를 지망하기로 했지만, 캐스팅은 늘 불발됐다. "파커랑 랜드랑 리치"(Parker, Rand, and Leach)란 이름의 삼인조 보드빌 공연팀을 꾸리는가 하면 주말마다 코니 아일랜드에서 대말 공연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아치볼드 리치가 이 팀에서 나가면서 1921년에 새로 들어온 멤버가 바로 제임스 캐그니였다. 캐그니가 들어온 뒤로는 이 팀의 이름은 "파커랑 랜드랑 캐그니"(Parker, Rand, and Cagney)가 된다.

1923년부터는 뮤지컬 "Golden Dawn" 등에서 작은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1928년 영화사 카메라 테스트 기회를 얻었지만 실패했다.
파일:2003_CSK_09771_0070_000(070323).jpg
"Golden Dawn" (1927-8)

1931년 연극 "Nikki"의 공연에서 할리우드 스타 페이 레이의 상대역을 하며 운이 텄다. 이 공연에서 할리우드 관계자들의 주목을 받았고, 공연이 막을 내린 뒤 LA로 거처를 옮겼다. 파라마운트 픽처스와 5년 계약을 맺었다. 주급은 450 달러였다. 본명인 영국 이름 아치볼드 리치 대신 게리 쿠퍼처럼 미국적으로 들리는 이름이 필요하다는 파라마운트의 요구에 예명을 지었다. '캐리(Cary)'는 자신을 영화계에 데뷔할 수 있게 해준 연극 "Nikki"에서 연기했던 인물의 이름인 캐리 락우드(Cary Lockwood)에서 따온 것이었고, '그랜트(Grant)'는 회사에서 지정해서 제시한 성 가운데서 골랐다.

이렇게 '캐리 그랜트'가 된 아치볼드 리치는 1932년 데뷔작 <디스 이즈 더 나이트>부터 호평 받았지만 <마담 버터플라이>(1932), <금발의 비너스>(1932)에 이르기까지 흥행작은 없었다. <Sinners in the Sun>(1932)을 찍던 중 촬영장에서 랜덜프 스캇[11]을 만나 동거인이 되었고 그 뒤 12년 간 같이 살았다.
파일:cary_Madame_Butterfly1.jpg
파일:cary_Madame_Butterfly3.jpg
<마담 버터플라이> (1932)

스타 메이 웨스트의 눈에 들어 웨스트와 함께 하게 된 첫 메이저 영화 주연작 <다이아몬드 릴>은 메가히트작으로, 파산 위기였던 파라마운트 픽처스를 구원해주었다. 그 다음에 또 같이 출연한 <나는 천사가 아니다>(1933)는 아예 메이 웨스트가 대본까지 직접 쓴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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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사가 아니다>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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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rty Day Princess> (1934)

<Thirty Day Princess>(1934) 등의 작품을 거쳐, 그랜트는 1935년 어느새 주급 3,500달러의 대우를 받게 됐음에도 파라마운트와 갈라서게 된다. 이유는 MGM으로 자신을 대여해 < 바운티호의 반란>(1935)에 출연하게 도와달라는 요구를 파라마운트에서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그랜트의 예상대로 해당 영화는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쓸었다. 그렇다고 다른 영화사를 찾지도 않았고, 에이전트를 통한 영화 건당 계약이라는 당시로서는 큰 모험을 하게 되었다.

제작사와 다년 짜리 계약에 묶여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절이었고, 이전 시도자들은 모두 실패했던 길이었다.[12] 그랜트도 초반엔 꼭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캐서린 헵번이 나온 RKO의 <실비어 스칼럿>(1935) 주역을 따냈지만 영화는 흥행을 망쳤다. 진 할로우와 나온 <Suzy>(1936) 등 그 뒤에 바로 이어진 다섯 작품들도 작품성이 변변찮았고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1937년 MGM의 <타퍼>의 성공으로 기사회생하면서부터 그랜트는 곧 남들과 달리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개체로 살아남을 수 있는 그만의 경쟁력을 증명했다. 이후 10여년간 그랜트는 스타로서의 명성을 눈부시게 쌓아나간다. 그랜트는 영화 수익의 10%를 받는 계약을 협상한 최초의 할리우드 배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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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퍼> (1937)

속사포같이 내뱉는 말솜씨와 신사다운 목소리, 빼어난 외모, 매력적인 옷차림 때문에 곧바로 스타가 되었고,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젊은 시절에는 스크루볼 코미디에서 크게 두각을 보였다. 이 시기의 그랜트는 주로 뻔뻔해도 미워할 수 없는 바람둥이로 묘사되는데, 본격적인 시작은 아이린 던과 나온 <이혼 소동>(1937)이다. 부부가 각자 상대방이 바람을 폈다고 의심하며 이혼한 뒤 서로의 재혼을 방해하려고 애쓰는 내용이었다. 이 영화를 통해 그랜트는 감독 리오 맥캐리를 만났는데, 맥캐리의 세련된 패션, 행동거지, 말투를 면밀히 관찰해 모범으로 삼으면서 특유의 스타일을 완성했다.

캐서린 헵번 배리 피츠제럴드 그리고 니서(Nissa)라는 이름의 표범이 나오는 <베이비 길들이기>(1938), 제멋대로인 상속녀 캐서린 헵번의 첫 번째 남편으로 나와 현 약혼자는 물론 새롭게 등장한 기자 제임스 스튜어트와 헵번의 마음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 필라델피아 스토리>(1940), 능력있는 기자인 여주인공의 신문편집자 전 남편으로 나와 아웅다웅하는 <연인 프라이데이>(1940) 등도 대표적이다. 하워드 혹스, 조지 큐코어 등 내로라하는 거장들이 이러한 이미지를 부각시킬 수 있는 역할로 그랜트를 기용했다.

한편 40년대부터 앨프리드 히치콕은 <의혹>(1941)을 시작으로 그랜트의 내면에 숨어 있는 어둡고 속을 알기 힘든 모습에 초점을 맞췄다. 제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나치를 때려잡으려는 정부 요원 그랜트를 돕기 위해 잉그리드 버그먼이 잠입하는 내용의 < 오명>(1946)은 그 중 걸작으로 손꼽힌다. 그 외에 <나는 결백하다>(1955), <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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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백하다> (1955)

007 시리즈 원작자 이언 플레밍 로맨틱 코미디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서스펜스물 모두에 능한 그랜트가 1대 007이 되어주길 바랬지만 그랜트는 시리즈 1편 < 살인번호>가 제작된 1961년 이미 57살[13]이어서 이 제안을 거절했다. 그랜트는 나이를 고려해 한 편만 계약하고 싶어했고, 제작사는 시리즈로 계약하고 싶어해서 서로 뜻이 맞지 않았다. 대신 이 취향의 영향으로 제임스 본드는 그랜트 이미지처럼 키 180 중반 이상의 미남 배우를 쓰는 게 한동안 원칙이었다.

60년대에 들어서도 도리스 데이와 <댓 터치 오브 밍크>(1962) 같은 로맨틱 코미디물을 찍기도 했으며, 1966년 <뛰지 말고 걸어라>로 은퇴할 때까지 슬럼프 없이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상복은 없어서 <페니 세러네이드>(1941)와 <논 벗 더 론리 하트>(1944)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무관에 그쳤다. 그랜트는 자신의 연기가 외모 때문에 지나치게 저평가 받는다며 언론에 직접적으로 불만을 토로했고, 경력 내내 이를 고통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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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 세러네이드> (1941)

1966년 딸이 태어난 후 딸의 양육에 집중하기 위해 은퇴에 들어갔다. 이후 그랜트를 다시 영화계로 불러내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지만 전부 거절 당했다.

1986년 뇌졸중으로 인한 사망 후 유언에 따라 장례식이 생략되었다. 유해의 행방에 대해선 명확히 공개된 적이 없다. 화장 후 캘리포니아주의 한 언덕에서 재를 흩뿌렸다는 추측이 있을 뿐이다.

4. 주요 출연 작품

5. 사생활

5.1. 결혼과 이혼

5번 결혼하고 4번 이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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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결혼도 그랜트가 1957년 소피아 로렌과 만나면서 위기에 빠진다. 로렌 역시 곧 남편이 될 유부남 카를로 폰티와 사귀고 있을 때였다.[16] 이때 드레이크는 그랜트의 촬영장이 있던 스페인에 그랜트를 보러 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승선했던 배에 사고가 났다. 다행히 구조되긴 했지만 이 소식을 듣고도 이미 마음이 뜬 그랜트는 아내를 살피러 가지 않고 그대로 스페인에 머물렀다. 심지어는 드레이크가 그랜트와 함께 출연하기 위해 직접 대본을 쓴 <달빛 아래서(Houseboat)>의 여주인공 역도 로렌에게 줘버렸다. 로렌은 이 작품으로 미국에서 인기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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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드레이크와 그랜트는 당시 심리 치료의 하나로서 실험 처방되고 있었던 LSD를 복용하기 시작했다.[17] 그러나 드레이크는 그랜트의 불륜을 극복하지 못했고 둘은 이혼했다. 드레이크는 그랜트가 양성애자인 기미를 긴 결혼생활 내내 전혀 느끼지 못했고 부부생활이 매우 활발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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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넌과는 결국 1968년 이혼했다. 나중에 캐넌은 정신적 학대와 강압적 태도가 문제였다고 말했다. LSD까지 전도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좋은 면도 많은 사람이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캐넌 역시 그랜트가 양성애자일 가능성은 없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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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성 지향성 문제

양성애자 혹은 동성애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랜 떡밥은 12년간 동거한 랜덜프 스캇과의 관계다. 다만 증인은 "내가 두 사람 집에 놀러간 적이 있는데 그냥 딱 봐도 사랑하는 사이 같더라"고 모호하게 말했을 뿐인 게이 디자이너 미스터 블랙웰[20] 같은 사람들 정도다. 블랙웰은 자신이 그랜트, 스캇, 타이론 파워와 잠자리를 가졌다고 주장해 이 세 사람의 게이설에 불을 지핀 장본인인데, 블랙웰이란 예명을 하워드 휴즈가 지어줬다는 등 다양한 허풍을 떠벌린 전적이 있어 말에 무게가 없는 인물이다. 반면 그랜트의 전 아내들은 스캇과 그랜트가 성적인 관계는 절대 아니었다고 방어해주었다. 더불어 최근 들어 스캇이 확고한 이성애자였다고 결론 내린 스캇 전기작가들도 있어서 그랜트와 연인 사이였다는 의심은 많이 줄어든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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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둘이 같이 나온 사진들은 거의 다 그랜트가 독신남성들끼리 이렇게 재미나게 산다고 보여주려고 일부러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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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덜프 스캇은 평생 두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 아내는 재벌 듀폰 가문 사람으로, 실화 바탕의 영화 < 폭스캐처> 중심인물인 존 듀폰(John du Pont)이 조카였다. 둘 사이에 아이는 없다. 두 번째 아내는 21살 연하의 배우였는데, 아이 둘을 입양해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았다.

그래서 현재는 게이임을 숨기지 않고 활동했던 유명 의상 디자이너 오리 켈리(Orry-Kelly)와 9년 동안 붙었다 떨어졌다 하며 동거했던 전적이 더 크게 부상해, 대중매체와[21] 언론에서 호명되고 있다. 스캇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증거나 증인은 없다. 스캇과 달리 같이 찍힌 사진 한 장조차 남아있지 않다. 그래도 성인 남성 둘이 다년간 동거를 했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의심스럽다는 추론이다. 그랜트는 켈리와의 깊은 친분을 숨긴 적이 없고, 켈리가 사망했을 때도 본인이 관을 운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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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런 브랜도, 하워드 휴즈와 관계가 있었다는, 확인되지 않은 주장도 있다.

현재까지의 증거상으론 그랜트는 양성애자 의혹이 남았을뿐 게이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랜트와의 관계가 발각됐던 여배우나 사교계 인사 수가 상당히 많은데, 한 상류층 부인은 하필 그랜트와 밀회 중에 교통사고가 나는 바람에 언론을 탔다. 놀랍게도 여자들을 꼬실 때 게이라는 소문이 도는 걸 심리적으로 역이용 했다는 증언, 게이 소문을 재밌어했다는 증언들도 있다.

어쨌든 공공연하게 번진 소문이라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그랜트를 '호모'에 준하는 남자 동성애자 비하 용어인 팬지라고 뒤에서 조롱한 적이 있다. 1980년 코미디언 체비 체이스는 "그랜트는 호모에요. 참 대단한 계집애죠!"라고 모욕했다가, 그랜트에게 고소를 당한 뒤 자신의 발언을 취소했다.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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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고 1941년 법적으로 개명해서 진짜 캐리 그랜트가 되었다. [2] 그랜트는 게리 쿠퍼나 게이블이랑 달리, 유들유들한 이미지가 강했는데 조지 클루니가 이 계보를 이어받았다고 평가받는다. [3] Elias James Leach. 1872 - 1935. [4] Elsie Maria Leach. 1877 - 1973. [5] 전기 작가들이 계속해서 도움을 줬을만한 주변인들을 찾아보고 있지만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6] Bishop Road Primary School. [7] Fairfield Grammar School. 공부를 잘해야 들어갈 수 있었다. [8] Bob Pender Stage Troupe. [9] 이런 묘기다. 자료 사진 속 남자는 그랜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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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때문에 한창 윗세대이자 같은 노동 계급 출신인 찰리 채플린과 유사하게 영화계 진출 커리어를 밟았기 때문에 캐리 그랜트도 영국 영화랑 별로 연관관계가 없다. [11] Randolph Scott. 감독 버드 베티커와 제작자 해리 조 브라운, 각본가 버트 케네디 조합의 래나운 서부극으로 유명한 배우다. [12] 대표적인 저항자로는 베티 데이비스 올리비어 더 해빌런드가 있다. 더 해빌런드도 그랜트의 시도 8년 후인 1943년에야 소송을 시도했을 정도로 제작사 계약의 효력이 강력했던 시절이었다. [13] 우연하게 로저 무어가 역대 최고령으로 본드 역을 은퇴할 때 나이와 같다. [14] 배역처럼 작중 등장하는 표범을 무서워했다고 한다. 크라이테리온 콜렉션 블루레이로 출시되었다. [15] 낡은 집을 싼값에 사서 문이 문짝째로 떨어진다거나, 벽에 기대면 벽이 무너지는 등의 슬랩스틱 코미디물의 원조인 작품이다. 1986년 톰 행크스 주연에 〈 머니 핏〉이란 제목으로 리메이크되었다. [16] 정리하면, 유부남 두 사람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친 것이다. 그리고 로렌은 이혼하지 않은 상태의 폰티와 결혼식을 올려 중혼이 돼 한동안 이탈리아에서 쫓겨나 해외를 떠돌게 된다. [17] 당시에는 LSD나 기타 마약의 유해성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으며, 노년에 접어든 그랜트는 LSD를 훌륭한 치료제라고 주장했던 자신의 과오를 인정한 바 있다. [18] Phyllis Brooks. 1915 - 1995. [19] Torbert Hart Macdonald. 1917 - 1976. [20] Mr. Blackwell. 사실 디자이너로서의 성과는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며, 드레스 순위 매기기를 통해 여성 스타들의 외모를 재치있게 비하하며 유명해졌다. [21] 드라마 "레이 도노반" 5시즌 9화 등. [22] Frederick Brisson. 1912 - 1984. [23] 자신의 중독 정도면 일종의 joypop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24] 워렌 비티도 메소드 배우다. [25] 비평과 흥행에서 말 그대로 초대박을 친 워렌 비티 대표작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