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립 해군 Regia Marina[1] Royal Nav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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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상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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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기 | 선수기[2] | }}} | |
존속기간 | 1861년 3월 17일 ~ 1946년 6월 18일 | ||
소속 | 이탈리아 왕국군 | ||
군종 | 해군 | ||
본부 | 팔라조 마리나, 로마 | ||
규모 |
210,000명 (1940) 295,000명 (19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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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 |
7주 전쟁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스페인 내전 알바니아 침공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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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립 해군, 통칭 이탈리아 왕립 해군 혹은 레자 마리나는 1861년부터 1946년까지 존속했던 이탈리아 왕국의 해군이였다. 7주 전쟁부터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전쟁을 치렀다. 활동 범위 역시 전세계를 무대로 했던 영국 해군보다는 좁았지만, 지중해, 대서양, 태평양, 야프리카, 흑해 등 웬만한 곳에서는 실전을 치른 적이 있다.흔히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과 엮여서 같이 폄하당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나름 강대한 전력을 갖추고 전쟁에서 나름대로 활약했다. 특히, 주특기였던 항구 침투 및 수중 폭파 등의 특수작전 분야에서는 역사적인 기록을 다수 세운 것을 넘어서 아예 이 분야의 기초를 확립한 수준이다.
1946년 국민투표를 통해 왕정이 폐지되었고, 이에 따라 이탈리아 왕국이 멸망하고 이탈리아 공화국이 세워지면서 자연스럽게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이탈리아 해군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 참전 전쟁
이탈리아 왕립 해군이 참여한 전쟁 | |
7주 전쟁 | |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 |
제1차 세계 대전 | |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 |
스페인 내전 | |
알바니아 침공(무력 합병) | |
제2차 세계 대전 |
3. 전력
3.1. 함선
제2차 세계 대전의 이탈리아 왕립 해군 군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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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양전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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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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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획함 |
순양함: 카타로
, 구축함: 프레무다 , 시베니코 , 류비야나 , 잠수함: 프란체스코 리스몬도 , 안토니오 바자몬티 , 기타 2차대전기 이탈리아 포획 함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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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활동
4.1. 7주 전쟁
7주 전쟁 당시에는 오스트리아 해군과 맞서 싸웠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1866년에 벌어졌던 리사(Lissa) 해전인데,[3] 이 전투에서 이탈리아 왕립 해군 함대는 어뢰정을 제외한 모든 전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나 함대의 지휘권을 놓고 갈등이 벌어진 데다, 오스트리아 해군의 교란작전에 넘어가 분산되었고 결국 하나둘씩 각개격파 당했다. 최종적으로 이탈리아는 이 해전에서 장갑함 2척을 잃고 620명이 사망하는 큰 피해를 입은 반면 적이었던 오스트리아 해군의 피해는 장갑함 2척 중파에 34명 사망이 끝이었다. 한마디로 완패한 것.4.2. 제1차 세계 대전
4.3. 전간기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스페인 내전, 이탈리아령 알바니아 확보등의 사유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군함들이 투입되는 등 활발한 작전을 전개했다.그리스 왕국을 대상으로도 선전포고를 하기 전에 그리스 해군 경순양함 엘리를 이탈리아 잠수함 델피노가 몰래 격침시키는 등 이미 조용한 전쟁을 개시하는 중이었다.
4.4.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활동은 세계 5위의 해군 열강 치고는 종합적으로 볼 때 미흡했는데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4.4.1. 연료 부족
가장 큰 문제는 해군이 사용할 연료가 매우 부족했다는 것이다. 영국과의 긴장이 크게 고조되고 나치 독일과의 관계가 밀접해지는 1940년 1월부터 석탄과 석유를 비롯한 중요 자원을 영국 해군이 차단하기 시작했고 이런 식으로 노획된 물자는 영국이 입수해서 써먹기 시작하였다.여기에 더해서 이탈리아 왕국 자체가 전혀 전쟁준비가 안된 상황에서 스페인 내전에 과도하게 개입하고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막대한 전비를 소모하면서 에티오피아를 점령하며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를 확장하는 등 보유하고 있던 자원도 마구잡이로 소모하던 상황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었으니 개전 초반부터 극심한 물자난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나마 연료를 확보하고 있던 이탈리아 왕립 해군에게 이탈리아 산업부나 이탈리아 왕립 공군등이 제멋대로 연료를 가져가는 바람에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활동 초기부터 연료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나치 독일에게 연료 공급을 추가로 받으려고 외부에 공표하는 연료량과 실제 내부에서 보고하는 연료량이 서로 다른 수치를 보이기도 했으며 최후의 순간에 사용할 비상용 연료의 확보에도 열중하게 되는 사태를 맞이하였다.[4]
1940년에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영국 해군과의 함대결전을 예상하고 단기전에 대비하여 해군용 연료유를 200만톤 정도 확보한다. 해당 분량의 연료유 정도면 1년에서 1년 6개월 정도는 군함을 가동하는 데 연료를 제한하지 않고 사용이 가능할 수준이었다. 따라서 장기전에 대비한 연료 축적같은 것은 전혀 없었단 상황이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그나마 대량의 연료를 확보한 것은 이탈리아 왕립 해군뿐 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영국을 주력으로 한 연합군에게 해상 무역로가 차단당하기 시작하면서 연료와 자원 확보에 비상이 걸린 이탈리아가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연료유에도 손을 대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당장 1940년 1월 첫째주부터 이탈리아 왕국의 산업부 장관이 산업용 + 이탈리아 왕립 공군용으로 25만톤의 연료를 자기 몫으로 멋대로 가져갔다. 그리고 이탈리아 왕립 공군은 연료탱크를 일반적인 강철 탱크가 아니라 주석을 사용하는 탱크를 사용했는데 유폭 위험도는 줄어들지만 섬세하게 제작하지 않으면 누출현상이 발생하므로 이탈리아 왕립 해군에게서 가져간 항공연료인 휘발유가 누출되었다. 그래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이탈리아 왕립 공군에 휘발유 5만톤을 추가로 더 빼앗겼다.
이렇게 개전 초기부터 연료 부족사태가 일어나는데도 불구하고 베니토 무솔리니를 비롯한 이탈리아 왕국의 수뇌부는 단기전으로 전쟁이 끝날 것이므로 위에 언급한 것처럼 내부에서 적당하게 융통하면 끝이라고 생각했고 앞서 언급했듯이 이탈리아 왕립 해군도 단기전을 생각했으므로 연료 사용에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 침공으로 나치 독일에게 프랑스 제3공화국이 붕괴되던 시기에 이탈리아의 프랑스 침공으로 1940년 6월 10일에 이탈리아가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을 때 이미 이탈리아 왕립 해군이 보유한 연료량은 180만톤으로 줄어들었으며 1941년 2월까지 무려 100만톤을 소비해버렸다. 그리고 연료 소모량도 전쟁상태라서 군함이 계속 출격하기 때문에 점점 늘어나서 1941년 1월부터 2월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671,560톤의 연료유가 소모된다. 덕분에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훈련까지 축소해야 할 상황에 몰렸고 추가적인 연료 보급이 없다면 1941년 여름쯤 가면 모든 활동을 중단해야 할 지경에 몰린다.
이런 와중에 이탈리아 왕국으로 오는 연료는 수량도 부족한데다가 대부분은 엉뚱한 곳으로 간다. 루마니아 왕국에게서 오는 5만톤은 이탈리아 왕립 육군과 민간용으로 투입되었으며 이탈리아령 알바니아에서 나오는 품질이 안좋은 연료유 20만톤은 이탈리아 왕립 공군용으로 전환되었다. 그래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이탈리아 국내에서 나오는 저질 연료유 생산을 연간 1만톤(월간이 아니라 연간임)이라도 늘려서 먹어보려고 시도하기까지 하는 처절한 지경에 몰리다가 간신히 루마니아에서 온 15,000톤의 연료유를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1941년에는 루마니아 왕국에서 카롤 2세를 몰아내고 미하이 1세를 재옹립한 쿠테타를 일으킨 사실상의 독재자인 이온 안토네스쿠와 지지세력이었던 철위대간의 마찰이 격화되다가 철위대가 쿠테타 시도를 일으켰다가 실패한다. 이탈리아 왕국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해당 쿠데타를 지원한 세력이 이탈리아 왕국이라는 것은 이미 상식수준의 일이었으며 루마니아산 연료유 수입이 전면중단되었다.
따라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더 이상 연료유 공급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몰렸으며 이 왕중에 이탈리아 왕국 산업부는 자신들이 확보한 25만톤의 해군 연료유를 그대로 움켜쥔 채 추가로 34,000톤을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연료탱크에서 추가로 압수해간다. 따라서 1941년에 이탈리아 왕국은 고작 60만톤의 연료유를 수입할 수 있었고 그 중에서 고작 163,000톤만 이탈리아 왕립 해군에게 공급되었다.
그런 이유로 인해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월간 연료 소모량은 6만톤까지 급격히 축소되었다. 원래는 월간 11만톤에서 17만톤까지 사용해야 전쟁시에 해군을 운용할 수 있는데 이렇게 연료 사용량이 줄어드니 제대로 된 활동이 불가능했으며 1941년 연말에 도달하면 그동안의 절약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보유 연료량은 20만톤으로 급격하게 감소했으며 재건조라는 명칭을 붙일 정도로 대규모 개장을 한 구식 전함인 콘테 디 카보우르급 전함과 카이오 두일리오급 전함들이 임무에서 제외되면서 해군 전력까지 크게 감소된다.
이런 외중에 1942년 11월에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영국군이 반격을 시작하자 베니토 무솔리니를 위시한 이탈리아 앙국의 수뇌부는 이탈리아 왕립 해군에게 이탈리아령 리비아로 향하는 해상수송을 호위할 것을 지시하여 연료소모량이 더 늘어나게 된다. 그나마 나치 독일이 독일 아프리카 군단의 보급로를 지키기 위해 이탈리아 왕립 해군에게 1942년 연말에 8만톤의 연료를 보급함으로서 간신히 해군력 가동이 가능해졌다.
1942년 1월 10일에 이탈리아 왕립 해군 제독인 Riccardi는 나치 독일에게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연료유 재고가 9만톤까지 떨어졌다고 통보한다. 이탈리아 왕립 해군 제독인 De Courten은 회고록에서 사실 그때 진짜 재고량은 20만톤이었다고 서술했는데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연료탱크에 20만톤이 있는 것이지 그 중에서 13만톤은 이탈리아 산업부가 움켜쥔 후 해군이 사용하지 못하게 처리한 분량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함의 연료탱크에 있는 양까지 감안하면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사용가능한 연료량은 9만톤이 맞다.
그러나 나치 독일도 연료 수급이 부족한 실정이었고 이탈리아 왕립 해군이 계속 활동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몇 달후에 이탈리아 왕립 해군이 보유한 연료량은 14,000톤까지 내려가면서 사실상 활동이 중단되기 직전까지 몰린다. 설상가상으로 나치 독일이 보내준 연료유 9천톤은 도무지 어디에도 써먹을 수 없는 초저질이라 사용이 불가능해서 더 문제가 컸다. 이 정도로 연료의 품질이 나빠지면 군함의 보일러에 투입하면 동력부에 손상을 가할 위험성이 높다.
다행히도 1942년 4월말에 루마니아에서 월 5만톤의 연료 수입이 다시 가능해졌다. 순양함에 의한 호위와 기뢰를 소해하는 작업을 미루면서 연료 소비도 줄였다. 이러한 노력 끝에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1942년 6월에 지중해의 서쪽과 동쪽에서 동시에 작전을 수행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왕국 전체에서 연료난이 심해졌으므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공급받은 연료 중에서 4만톤을 다시 빼앗겨야 했으며 나치 독일이 보내준 연료도 일부 빼앗겨서 1942년 7월에는 1만톤만 입수하였고 9월에는 23,000톤만 간신히 확보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순양함 몇 척 정도를 1942년 8월 중순에 운용할 수 있었다.
결국 1942년 11월 말에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연료유 보유량은 7만톤 + 군함의 연료탱크에 탑재된 분량이 전부가 된다. 이탈리아 해군이 전력출격을 1회만 가능할 정도로 연료가 바닥난 것이다. 그래서 1942년 12월 말에는 구형 전함들(Cesare, Duilio and Doria)이 임무에서 해제되고 사실상 퇴역하였으며 해당 전함들의 승조원들은 이제 막 배치된 호위함들로 전속된다.
1943년에 횃불 작전으로 연합군이 북아프리카 서쪽에 연합군이 상륙하면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활동을 증가시켜야 했으며 연료 소모가 2배로 늘어났다. 그나마 튀니지 전투에서 전투하는 나치 독일군과 이탈리아 왕국군의 보급을 해야 했고 이탈리아령 리비아를 상실하면서 보급선이 단축되었기에 나치 독일이 보내준 고급 연료유 4만톤으로 일단 이탈리아 왕립 해군을 가동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연료 부족은 어쩔 수가 없어서 1943년 1월에는 신형 전함인 리토리오급 전함 3척까지 임무에서 해제하고, 전투서열에서 지우는 식으로 사실상 퇴역처리에 가까운 조치를 취해야 했으며 이 시점에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가동 가능한 유일한 함대는 La Maddalena의 제3함대뿐이었다.
나치 독일의 연료 보급량도 줄어들기 시작해서 1942년 2월에서 4월까지의 연료 보급량이 고작 매달 3천톤이라서 신형 구축함들도 임무에서 해제하는 식으로 사실상 퇴역한다. 1942년 4월 10일에는 차라급 중순양함 3번함 고리치아와 트렌토급 중순양함 2번함 트리에스테 등 그나마 남은 가동 가능한 군함들도 연합군의 공습으로 격침당하거나 대파당해서 제3함대도 개박살난다.
결국 연합군의 이탈리아반도 상륙에 대비하여 함내 연료탱크의 절반을 혼유로 인한 동력기관 손상을 각오하고 잠수함용 연료인 경유로 채우는 방식을 사용하여 아직 남아있는 전함과 구축함을 재가동시키는 막다른 길까지 몰리게 된다. 이런 식으로 1942년 4월에는 제7함대와 제9함대가 재가동했으며 구축함들은 호위업무에 종사한다. 해당 시점에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연료 보유량은 0가 되었다.
하지만 나치 독일이 비시 프랑스를 접수하고 1942년 11월 27일에 툴롱 프랑스 함대 자침이 발생하면서 나치 독일은 비시 프랑스가 현지에 보유한 8만톤의 연료유를 확보한 후 이탈리아 왕립 해군이 재가동하도록 6만톤을 이탈리아 왕립 해군에게 빌려준다. 해당 연료는 몇 차례의 훈련과 실전 투입에 사용될 예정이었고 1943년 6월 말에는 트리에스테 항구에 있던 전함 2척(Doria and Duilio)을 오버홀하면서 다시 전력으로 투입할 준비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베니토 무솔리니가 실각하면서 나치 독일과의 관계가 무너졌으며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에 참가를 거부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주력은 1943년 9월 8일에 몰타로 항해하여 연합국에게 항복한다. 나치 독일이 공급한 연료유 6만톤이면 신형 전함 3척을 재가동할 수 있으며 제7함대와 제8함대에 소속된 경순양함도 같이 재가동이 가능한 분량이었고 훈련이 계속 미루어지면서 연료 소모도 거의 없다시피했으므로 탈출에 충분한 연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분노한 나치 독일은 프리츠 X로 리토리오급 전함 3번함인 로마를 격침시키고 1번함인 리토리오도 중파시켰으나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탈출을 막을 수는 없었다.
종합하자면 단기전만을 염두에 두고 적은 분량의 연료유만 확보한 것이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상황이었으며 그나마 이탈리아 왕립 해군이 가장 연료를 많이 확보했기 때문에 산업부나 공군, 해군이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연료를 강탈하는 바람에 항상 연료 부족에 시달려서 제 능력을 절반도 못낸 것이 당시의 이탈리아 왕립 해군이었다는 점이다. 출처 번역
4.4.2. 지중해 방위 전용 해군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군함을 건조할 때 선택한 독트린이 지중해안에 있는 이탈리아 본토만 방위하는 목적으로 지중해의 이탈리아반도를 중심으로 단거리만 출격하고 다시 모항으로 되돌아오는 식의 운영을 하려고 했기에 포신수명이나 항속거리같은 것은 일단 뒷전으로 넘긴 것이다. 어차피 자주 모항으로 되돌아오니 신속하게 부품 교체하고 연료 보급하면 된다는 이야기였다.하지만 엄연하게도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같이 원거리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서 만든 식민지가 있고 20여만명의 대군이 주둔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식의 수세적인 운영을 할 경우에는 순식간에 이탈리아 왕국은 식민지를 구원하지 못하고 손가락만 빨다가 모든 식민지를 다 상실해버리게 되는 것이다. 상대방 국가는 자신들의 식민지에서 얻는 물자를 가지고 우월하게 전쟁을 이끌어가는데 이탈리아는 혼자서 지중해 안에 가두어진 본국의 힘만 가지고 싸워야 하니 점점 불리해지게 된다.
이는 가상적국으로 삼던 프랑스 제3공화국보다도 못한 결과인데 적어도 프랑스는 정치의 혼란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요 군함들의 항속거리는 자신들의 식민지를 보호하거나 통상항로를 보호할 수 있을 수준으로 적절하게 늘려놓은 것이다. 따라서 영국이 중립을 지키는 상황에서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1대 1로 전쟁을 한다는 이탈리아의 예상이 맞아떨어지더라도 프랑스가 지중해에서 견제를 하면서 나머지 함대를 해외로 파견할 경우에는 이탈리아는 도저히 대응할 수가 없어서 순식간에 이탈리아는 본국만 남고 지중해 안에 가두어지게 된다.
게다가 이탈리아의 예상도 매우 안일한 예측이었다. 프랑스가 단독으로 싸울리가 없고 영국을 끌어들일텐데 그러면 대책이 안서는 것이다. 이미 1923년 8월에 일어난 코르푸 사건(Corfu incident)에 대한 영국의 대응으로 인해 베니토 무솔리니가 분노한 사건이 있을 정도로 영국도 서서히 이탈리아와 관계가 험악해지던 상황이었고 이탈리아 왕립 해군에서도 일부 인사들이 영국 해군에도 대항할 목적으로 고속을 가지는 군함을 건조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였다. 따라서 전략 독트린을 개선해야 했으나 그러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영국이 적이 될 것이 확실해진 순간 지중해의 양쪽 출구인 지브롤터와 수에즈 운하가 막히게 되는데 두 곳의 방어태세가 만만치 않았다. 대서양으로 나가는 입구인 지브롤터는 당시 시점으로는 완전히 요새화 되어있었고, 불침항모인 지브롤터 공군 기지까지 있었으니 이곳을 손실없이 통과하거나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인도양으로 가려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야 했는데, 이곳을 추축군 전함이 통과하려면 알렉산드리아를 공략해야 했다. 물론 이곳은 영국 해군의 지중해 최대 거점이었고, 지브롤터, 몰타와 함께 사력을 다해 지키던 지중해 항로의 요충지였다.
그러므로 독일처럼 대서양 등 넓은 대해로 진출해서 통상파괴전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며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전력을 생각해보았을 때 작전이 최고로 잘 풀리는 상황이래봐야 지브롤터와 알렉산드리아를 공략하는데 성공해서 지중해 항로를 끊고 과거 로마 제국의 영토를 이탈리아 것으로 날름하는게 전부였으니 여기까지라면 리토리오급 전함의 항속거리는 충분했다. 계산을 해보자면 이탈리아 해군기지인 타란토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는 1,500km 가량 떨어져 있고, 리토리오급 전함의 항속 거리는 20노트로 7,300km, 16노트로 8,700km이니, 전투까지 한다고 해도 무보급으로 충분히 왕복 가능하고도 남는 거리였다.
하지만 애초부터 고속전함같은 최신예 1급인 전략적 군사유닛이 지중해 안에 가두어진 것 자체가 문제였다. 타국의 전함같으면 항속거리가 충분하니 개전 전에 미리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같은 지역에 호위함과 같이 배치해놓았다가 이탈리아 본토의 함대와 같이 협공을 가하거나 독자적으로 통상파괴전에 나서거나 인도 제국같은 영국의 심장부급 식민지를 직접 공격한다던지 하는 다양한 대응이 가능한데 그걸 못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전략적인 열세에 놓이게 된다.
당장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막시밀리안 폰 슈페 제독이 이끄는 독일 제국의 태평양전대는 전력도 빈약했고 목표도 본국으로의 귀환이었으나 영국 해군이 대처하기가 힘들어서 코로넬 해전에서 대참패한 끝에 포클랜드 해전에서 본토함대에서 빼온 순양전함 2척까지 투입한 끝에서야 해결을 보았다. 설상가상으로 본대에서 분리된 SMS 엠덴이 인도양에서 통상파괴전을 펼쳐서 벌어진 대혼란상황은 상당한 피해를 영국에게 주었다. 그러므로 고작 장갑순양함 2척과 호위함으로 구성된 미약한 전력이 밖으로 나온 것에도 이렇게 방어하는 일이 매우 힘들어질 정도이므로 해군전력을 미리 외부로 배치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해군전력을 미리 외부로 배치하려면 항속거리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항속거리가 짧으면 배치된 곳의 항구를 멀리 벗어나지도 못하고 있을 곳이 뻔해서 포위당하기 딱 좋으며 유사시 탈출하기도 힘들어진다. 공격적으로 운영하려고 해도 항속거리 문제로 인해 공격할만한 곳이 한정되며 우회로를 택하기도 곤란해진다. 그래서 항속거리가 짧은 장비들은 운용의 묘를 살리기가 어려워진다.[5]
따라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주력함이 구식이며 1척 수준의 소수라도 일단 지중해 밖에 나와있을 수 있다면 그렇게 허무할 정도로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가 순식간에 함락당하면서 20만의 대군이 괴멸하지 않았을 것이며 최악의 경우라도 뭔가 제대로 싸워보기라도 했을 것이다. 굳이 지브롤터나 수에즈 운하를 직공하지 않아도 추축군에게 석유 산지인 중동을 공략할 기회가 생기고, 인도의 반영 세력의 협조도 기대해볼 수 있으니, 전략적인 관점에서도 비용이 덜 들어가면서도 효과도 충분하다. 만일 수세에 몰리더라도 일본 제국같이 이탈리아 왕국과 우호적인 곳으로 탈출을 시도할 수도 있고 이런 식으로 지중해 밖에서 얼쩡거리는 세력이 늘어날수록 연합국이 매우 골치아파진다.
하지만 리토리오급 전함을 비롯하여 콘테 디 카보우르급 전함이나 카이오 두일리오급 전함같은 주력함은 말할 것도 없고 순양함과 구축함같은 보조함들의 항속거리가 모두 짧으니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해군전력이 지중해 안에 가두어지는 바람에 수세적인 작전만 하다가 결국에는 밀려버리는 것으로 끝난 것이다. 세계 5위의 해군 열강국이며 상당한 수준의 해군전력을 보유한 국가가 잘못된 해군정책을 고수한 결과가 이렇게 참담한 것이다.
원래 병기의 항속 거리는 상정되는 전장에서의 요구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만 어느 정도의 평균 수준은 유지해야 한다. 애초에 소요군의 전략전술이 잘못된 상황이라면 요구도 잘못될 것이며 이렇게 될 경우에는 뒤늦게라도 전략전술을 바꾸려도 해도 이미 장비가 특화된 상태라서 답이 없어진다. 당장 점감요격작전에 특화한 일본 제국 해군의 장비들이 진주만 공습이나 남방작전같은 공세작전에 투입될 때 현장에서 임기응변으로 항공모함의 비행갑판에 연료가 담긴 드럼통을 적재하고 가는 식의 위험천만한 방법을 동원해야 할 정도로 일이 힘들어진 전례가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각국의 상황과 독트린을 감안하면서도 세계적인 평균과 범용성도 동시에 생각해서 각국의 병기들을 비교하는 것이다.
당장 이탈리아가 연합국으로 돌아선 후에는 리토리오급 전함을 비롯한 이탈리아 왕립 해군 군함들의 짧은 항속거리가 큰 문제가 되었다. 연합국 측에서는 해당 군함들의 빠른 속도를 살려 항공모함 호위에 쓰려고 했으나 짧은 항속거리 때문에 결국 사용되지 못했다. 방치하기에는 아까운 군함을 제대로 써먹지 못한 것이다.
이에 비해서 리슐리외급 전함은 항속거리가 충분했으므로 태평양까지 진출해서 일본 제국과의 전투에 참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 리슐리외급 전함만의 일은 아니라서 프랑스 침공으로 프랑스가 패배하기 전까지는 베아른급 항공모함이나 됭케르크급 전함이 영국 해군과 협동작전을 벌이면서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3번함 아트미랄 그라프 슈페를 추적하거나 통상항로를 보호하는 작전에 협조하고 있었고 성과도 있었다.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리토리오급 전함 뿐 아니라 다른 군함들의 항속거리도 짧게 만들었는데 그 결과로 호위받을 주력함과 호위할 보조함간의 항속거리 차이 문제도 만들어냈다. 특히 구축함. 오리아니급 구축함, 솔다티급 구축함같은 신형 구축함들은 2,000해리대가 많았다. 그래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구축함이 식민지에 배치된 사례는 있으나 개전시에는 너무 짧은 항속거리 때문에 본국으로 탈출하거나 최소한 중립국으로 갈 수도 없어서 전투 한번 못해보고 현지에서 자침하는 처참한 상황을 맞이하고 만다. 이런 식으로 날려먹은 구축함만 5척이다.
어떻게 보면 아이러니한데 타국과 비교하면 짧은 항속거리지만 정작 리토리오급 전함은 호위함이 못 따라올 정도의 항속거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같은 사태가 발생하면 여유가 있는 자신의 연료탱크에서 연료를 뽑아서 구축함에 공급해주는 방법으로 해결이 가능하기는 하다. 하지만 리토리오급 전함의 연료적재량도 여유가 있는 편이 아니니 함대 전체의 작전반경이 상당히 줄어들게 된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잠수함중 상당수는 의외로 항속거리가 길어서 지중해를 빠져나가서 활동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U보트와 협동해서 대서양 전투를 치르기도 했고 일부 잠수함들은 일본 제국까지 건너가서 중요 물자를 수송하고 인도양에서 합동작전을 전개하기도 했다.
대서양 전투만 살펴봐도 이탈리아군의 잠수함은 대양작전능력이 떨어지고 울프팩 전술에 적합하지도 않아 카를 되니츠로부터 혹평을 듣기도 했으나 나름대로 전과를 많이 올려서 1940년 8월에 27척의 이탈리아 잠수함대가 보르도에 전개하여 작전을 개시했다. 이들은 이탈리아가 항복하는 1943년 5월까지 109척 593,864톤을 격침시키고 잠수함 17척을 잃었다. 대표적인 수훈함으로는 17척, 120,243톤을 격침시킨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18척, 96,165톤을 격침시킨 엔리코 타촐리가 있다. 두 배 모두 지중해가 아닌 대서양에서 작전했고, 독일 잠수함들처럼 카리브해나 남미 일대까지 진출하여 전과를 올렸다. 엔리코 타촐리의 함장 카를로 카사토는 이 전공으로 인해 외국인으로서는 받기 힘든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따라서 이탈리아군의 잠수함들은 항속거리가 충분했기 때문에 다른 조건들이 불충분해도 지중해 밖에 나가서 공적을 세우고 연합군에게도 타격을 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탈리아 해군의 잘못된 독트린이 얼마나 치명적으로 자국 군함들의 운용에 안좋은 영향을 주었는지 스스로 입증해주었다.
4.4.3. 이탈리아 왕립 공군과의 대립
이탈리아의 잘못된 정책은 아퀼라(항공모함)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해군과 공군간의 알력다툼으로 인해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정찰기만을 운용가능했고 항공모함을 제대로 준비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공군이 상호소통의 부족으로 인해 제대로 군함을 엄호하지 못함에 따라 타란토 공습이나 마타판곶 해전에서 영국 해군의 함재기들을 제대로 막지 못해서 패배하는 상황을 만들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이탈리아반도가 불침항모라는 말도 안되는 억지 독트린도 붕괴된다.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항공모함을 패전 때까지 완성하지 못했고 리토리오급 전함은 Reggiane Re. 2000라는 육상용 전투기를 캐터펄트에서 사출시킬 수 있도록 추가적인 개조를 한 후 전함에 탑재하는 궁여지책을 동원해야 했다. 해당 항공기는 전함에서 캐터펄트를 사용해서 이륙은 가능하지만 수상기가 아니었으므로 리토리오급 전함이 자체적으로는 회수할 방법이 없었으며 근방의 지상 항공기지에 착륙해야 했다. 그러므로 전장과 가까운 곳에 이탈리아군이 운용하는 비행장이 없으면 사실상 전투기를 1회용으로 써먹은 후 항공기는 바다에 불시착하고 조종사도 빨리 보트를 보내서 구원하지 않으면 바다에 빠져죽는 참사가 발생하는데 이런 단점을 각오하고 육상용 전투기를 리토리오급 전함에 탑재한 이유는 자체적으로 몇 대라도 전투기를 머리 위에 올려놓고 상공엄호를 해야 페어리 소드피시같은 영국의 함재기를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4.4.4. 지중해
마타판곶 해전 당시 발포하는 리토리오급 전함 리토리오와 비토리오 베네토[6]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지중해에서 영국 해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사실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으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규모까지 같이 평가절하되는 경항이 있는데, 2차대전 개전 당시 이탈리아 해군의 전력은 전함 6척[7], 순양함 22척, 구축함 160척, 잠수함 100척에 달해 서류상으로는 영국 지중해 함대에 도전할 수 있는 규모였다. 그리고 실제로 전쟁 초반에는 홈 어드벤티지와 나치 독일의 지원을 적극 받은 이탈리아가 유리했다.
그러나 영국 해군 역시 몰타를 거점으로 격렬하게 저항했고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과 U급 잠수함등 수많은 잠수함/항모들을 지중해에 파견해 이탈리아 해군을 막아냈다. 애초에 영국은 해양강국이었고 몰타나 이집트에 해군 기지와 각종 시설물을 미리 건설해놓고 군수품을 축적해놓아서 사실상 자기 본진처럼 썼던 관계로 이탈리아 왕국의 홈 어드벤티지를 상당부분 상실시켰다.
거기에 마타판곶 해전과 페데스탈 작전(주춧대 작전)[8] 등 대규모 전투를 치른 이탈리아 해군은 큰 손실을 입었다.
대표적으로, 이탈리아 해군의 치욕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마타판곶 해전에서는 이탈리아군 전함 1척이 대파되었고 중순양함 3척과 구축함 2척이 한번에 날아갔는데 비해 맞서 싸운 영국군의 피해는 매우 경미했다.(순양함 4척 소파, 뇌격기 1기 격추)[9] 거기에 영국에게 타란토 공습이라는 희대의 빅엿을 먹은 결과 전함 등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대형함들은 항복 직전까지 말그대로 항구에 틀어박혀서 지내게 되고, 자연히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전술도 전함 등 대형함 위주에서 항공기와 잠수함, 소형 어뢰정을 이용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다만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이탈리아 해군은 북아프리카로 향하는 호송선단 호위 임무를 상당히 잘 수행하였다. 전쟁 초기에는 이탈리아 왕립 공군이 독일이 공여해준 Ju 87과 자체개발한 폭격기 SM.79를 이용해 해군을 도왔고,[10] 특수부대 Decima Flottiglia MAS는 자폭보트와 인간어뢰 등을 동원하여 알렉산드리아 항을 습격, 영국군의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을 두척이나 중파시키는 대전과를 올렸다. 또한 항구에 틀어박혔다는 오명을 쓴 리토리오급 전함 등 대형함들도 큰 활약이 없어서 그렇지 지중해에서 나름대로 꾸준히 할 일을 하면서도 끝내 격침당하지 않으면서 영국 해군의 속을 벅벅 긁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전쟁 시작부터 영국군에게 질적으로 너무나도 밀렸고, 이후 든든한 뒷배 독일마저 전황 악화로 지중해에서 손을 떼자 사실상 영국 해군에게 지중해의 주도권을 내주게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결과적으로 횃불 작전 이후에 이탈리아 해군은 아직 싸울 전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11] 일찌감치 항복해버렸다. 소수의 해군 전력은 항복을 거부하고 독일군의 지원을 받으며 계속해서 저항하였으나, 영국 해군을 상대하는 것만 해도 힘들었던 이탈리아 왕립 해군에게 미 해군은 너무나도 강력한 존재였다. 또한 이탈리아 해군이 항복하는 과정에서 이탈리아 해군의 전함 전력이 연합군으로 넘어가는 걸 원치 않았던 독일군이 항복한 이탈리아 해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할 "이탈리아 항복 이후" 부분이나 로마 문서를 참조할 것.
4.4.5. 대서양
이탈리아 왕립 해군이 당장 본진인 지중해 지키기도 바쁜 상황에서 어떻게 대서양에 해군을 보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영국 본토 항공전 때와 비슷하게 이탈리아는 잠수함 전력 일부를 대서양으로 파견해 크릭스마리네의 U보트와 합류시켰다. 대서양 파견 잠수함들의 본거지는 프랑스의 보르도였다. 전쟁 내내 총 32척의 이탈리아 잠수함들이 대서양으로 파견되었고 이들은 도합 109척에 달하는 연합군 상선을 격침시켰다. 영국 본토 항공전때 도움 1도 안되고[12] 신나게 털린 이탈리아 왕립 공군에 비해 그나마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동맹국 독일에게 체면 치레라도 한 셈.그외 이탈리아는 1942년 12월 잠수정을 이용한 미국 뉴욕 항구 공격을 계획했으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계획은 차일피일 미뤄졌으며 결국 연합군이 북대서양의 제해권을 완전히 확보한 이후 자동으로 폐기되었다.
4.4.6. 홍해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를 구성하는 에리트레아와 소말리아가 홍해와 인도양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홍해에서도 활동했다. 홍해 전단의 본거지는 마사와였다.[13] 이들은 전쟁 초반에는 이탈리아 왕립 육군과 함께 영국령 소말릴란드를 침공하여 항구 몇 개를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얼마 가지 못한 1941년 4월, 홍해 전단은 영국과 영연방 해군에게 맹렬한 반격을 받았고, 결국 전단 전체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 과정에서 본거지 마사와 역시 영국이 탈환하였다.한편 홍해 전단의 최후가 임박해지자, 이탈리아 왕립 해군 지휘부는 잔존 홍해 전단 소속 함선들의 탈출을 명한다. 이에 마사와가 함락되기 2달 직전이었던 1941년 2월, 에리트레아급 포함 에리트레아와 무장상선 2척이 마사와를 탈출해 일본 제국으로 긴 대장정을 시작했다.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고베였다. 결과는 성공이었는데, 중간에 무장상선 1척이 뉴질랜드 해군 순양함에게 격침당하였으나 에리트레아와 나머지 무장상선 1척은 무사히 고베에 도착했다. 이후 에리트리아는 일본 제국 해군 소속이 되어 이탈리아가 항복하기 전까지 태평양에서 통상파괴전을 실행하다가 이탈리아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리랑카로 가서 연합국에게 항복한다.
마찬가지로 마사와가 함락되기 직전, 홍해 전단 소속의 잠수함 4척 역시 탈출을 시도하였는데, 이들은 성공적으로 희망봉을 돌아 보르도[14]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이탈리아 상선 한두척 역시 비시 프랑스의 영토였던 마다가스카르로 탈출했다.
그러나 항속거리가 짧은 대다수의 군함들은 자침할 수 밖에 없었으며 여기에는 구축함 5척도 포함된다. 6월 11일, 이탈리아의 마지막 홍해 항구였던 아사브에 영국군이 입성했고, 이것으로 홍해 전단은 소멸하였다.
4.4.7. 흑해
1942년 5월, 독일군은 흑해에 이탈리아 함대를 파견할 줄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했고, 이에 회답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어뢰정과 잠수정으로 이루어진 20척 가량의 해군 전력을 흑해로 파견시켰다. 이들은 다뉴브 강을 통과해 최종적으로 루마니아 왕국의 콘스탄차 항을 통해 흑해로 진입했다. 흑해 전단의 본거지는 전술한 콘스탄차 항이었고 전단 자체는 주로 얄타와 페오도시아 부근에서 활동하였다.이후 이탈리아가 항복하고 추축국에서 탈퇴하자, 흑해 전단 자체는 1943년에 해체되었다. 살아남은 대부분의 함선들은 독일군이나 루마니아가 접수했고 크릭스마리네나 루마니아 왕립 해군 소속이 되어 활동했다. 그리고 흑해 전단은 1944년 본거지였던 콘스탄차 항이 함락되면서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때까지도 살아남았던 운좋은 일부 잠수정들은 모조리 루마니아 해군이 가져갔다.
4.4.8. 동아시아
놀랍게도,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적은 전력에도 불구하고 아시아까지 손을 뻗었다. 당시 이탈리아 왕국은 톈진을 식민지로 두고 있었는데, 톈진은 항구도시였기 때문에 잠수함이나 무장상선을 비롯한 소수의 해군 전력을 파견해 둔 상태였다. 이들 전력은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같은 추축국이었던 일본과 협력해서 통상파괴작전을 벌이며 싸웠다.그러는 사이 이탈리아 본토에서는 별도로 일곱 척의 잠수함을 동아시아로 파견했다. 다만, 이들은 그냥 잠수함은 아니었고 개조를 해서 무장을 떼어내고 물자를 수송하는 일명 "수송용 잠수함"들이었다. 이들은 일본에 전략물자를 전달하러 가는 길이었고, 독일의 몬순 전단[15]을 지원할 목적도 있었다. 또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추가적으로 지원할 로몰로급(Romolo-Class) 수송용 잠수함을 12척이나 건조시켰지만, 이중에서 고작 2척만이 종전 전까지 완공되었다. 게다가 이 2척 역시 진수식 직전 연합군의 폭격으로 항구 내에서 격침당하고 말았다.
4.5. 이탈리아 항복 이후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이탈리아 왕립 해군 역시 두 파로 찢어졌다.[16] 대부분의 잔존 해군 전력은 연합군에 온전히 넘어갔으나, 소수의 병력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살로 공화국 정부에 충성했다. 이건 특수부대도 예외는 아니어서, 소형함 중심으로 지중해에서 활동하며 영국 해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특수부대 Decima Flottiglia MAS 역시 두 파로 찢어져 활동는데, 이 중 연합군에 협력하였던 세력은 자폭 보트를 이용해 살로 공화국이 가져가 건조 중이던 항공모함 아퀼라를 공격해 대파시켰다. 추축국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는데, 독일 공군이 항복 후 연합군 점령지로 이동하던 이탈리아 전함대를 공격, 대함 유도 폭탄 프리츠 X를 사용해 전함 로마를 격침시키고 동급 전함 리토리오를 대파시키기도 했다. 또 살로 공화국은 한때 이탈리아 왕립 해군을 지휘하였던 이니고 캄피오니 제독을 자신들과의 협력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총살했다.로마의 유폭 순간 |
다만 말만 이렇지 대부분의 전력은 연합군 측에 붙었다. 당장 격침된 로마를 제외한 나머지 리토리오급 전함 2척이 모조리 연합군에 넘어갔고, 카이오 두일리오급 전함이나 콘테 디 카보우르급 전함 나머지 전함들도 전부 연합군측에 투항했다.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경/중 순양함 전력 역시 절대다수가 연합군에게 항복했다. 살로 공화국 해군에게 남았던 건 소수의 어뢰정, 자폭 보트, 반잠수정 그리고 극소수의 구축함이 전부였고 뿐이었고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연안 초계나 기뢰부설이 다였다. 애초에 이들의 규모는 연합군측에 붙은 이탈리아 해군의 20%밖에 되지 않는 실로 열악한 규모였다. 그나마 독일이 약간의 지원을 해주기는 했는데, 상황상 함정 원조는 꿈도 못 꾸고 수병만 조금 지원해준 게 다였기에 별 의미가 없었다. 살로 공화국 해군의 유일한 전과는 전쟁이 끝나기 몇 주 전인 1945년 4월 16일 자폭 보트로 프랑스 해군의 구축함 트롬베를 대파시킨 것이 전부이다.
헌데 의외로 살로 공화국측은 미완성 함정만 보자면 꽤나 강대한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리토리오급 전함 4번함 임페로나,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유이한 항공모함이었던 아퀼라나 스파르비에로는 모두 살로 공화국과 독일군에게 접수되었다. 이 외에도 몇 척의 구축함이 독일의 손에 들어가긴 했지만, 당시 살로 공화국이나 독일이나 저런 대형함을 완성할 여력은 없었고, 결국 저 함선들은 단 한 척도 완성되지 못하고 연습표적으로 소모, 항구봉쇄용으로 자침, 폭격으로 격침, 아님 그냥 종전까지 방치되었다가 스크랩되는 등 모두 비극적인 운명을 맞았다.
4.6. 종전과 해체
결국 2차대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고, 1946년 이탈리아가 공화정으로 전환되면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이탈리아 해군으로 바뀌었다.한편 신생 이탈리아 해군은 1947년에 맺어진 파리 조약으로 인해 중요 전력 대부분을 연합국에게 넘겨 주어야 함과 동시에 독일 등 다른 추축국들과 비슷하게 향후 핵무기, 전함이나 항공모함 등 대량살상무기나 대형함 보유를 제한받았다. 이로 인해 그때까지 어찌어찌 살아남았던 대형함들은 배상함으로 영국이나 미국 등의 승전국들에 넘겨졌으나, 이 중 영국이나 미국이 가져간 대형함 일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탈리아로 반환된 뒤 해체되었다.[17] 어뢰정이나 기뢰부설함, 구축함 등의 중소형 함선들의 경우, 이탈리아에게 시달렸던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알바니아 등의 발칸 반도 국가들이 배상함 형식으로 가져갔다.
참고로 소련도 승전국이었던 관계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함선들을 배상함 형식으로 받았는데, 이들 중 한 척( 전함 줄리오 체자레)는 사고를 가장한[18] 이탈리아군 특수부대의 파괴공작으로 침몰하였고 소련 역시 자국 내 사기하락 방지를 위하여 이를 은폐, 사고로 위장했다는 설이 존재한다. 이탈리아가 워낙 2차 세계 대전에서 Decima Flottiglia MAS 같은 걸출한 특수부대들을 많이 운용했고 실제로 아퀼라를 대파시키거나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2척을 중파시킨 전적도 있음을 고려하면 나름 현실성 있는 가설이기도 하다. 애초에 소련이 아무리 허술했어도 항구 내의 기뢰를 제거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현실성이 떨어지기에. 여담으로 소련 해군의 제독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역시 평생 이 사건은 이탈리아 특수부대의 공작이었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냉전이 터졌고, 공산화된 발칸 반도 국가들과 유사시 지중해로 내려오는 소련 흑해함대로부터 지중해 수에즈 운하 일대를 방어해야 한다는 이유로 이탈리아 해군은 다시 대형함 보유를 허용받았으며, 이탈리아 해군은 빠르게 예전 전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1]
레자 마리나
[2]
한 차례 개정된 문장으로, 1900년부터 해체될때까지 사용한 문장이다. 아래는 1861년부터 1900년까지 사용한 문장.
[3]
1811년에 있었던
영국 해군과
프랑스 해군의 리싸 해전과는 다른 전투이다. 참고도 당시에는 프랑스의 괴뢰국이었던
이탈리아 왕국은 이 전투에서도 프랑스와 함께 싸웠지만 패배했다.
[4]
1941년 2월, 멜라노 회담에서 이탈리아 왕립 해군 제독인 Riccardi가 "우리 해군의 연료유는 고작 61만톤 남았음"하고 언급했는데, 실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연료유 재고는 100만톤 이상이었다.
[5]
A6M같이 과도한 항속거리를 가지는 경우도 있으나 이런 경우도 항속거리가 길지만 기체의 내구도가 매우 낮다는 것 때문이므로 기체의 내구도를 올리고 항속거리를 줄이는 식으로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고 조종사의 비행시간을 줄이는 대응이 가능하다.
[6]
앞이 비토리오 베네토이고 뒤가 리토리오임에 유의. 참고로 이 해전은 이탈리아 측이 대패했다. 문서 참조.
[7]
다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는데 이들 중 개전 시점에 동원할 수 있었던 건 콘테 디 카보우르급 2척이 전부였다. 줄리오 체자레급 2척은 개장 중이었고 리토리오급들은 전부 건조 마무리 단계였기 때문.
[8]
주춧대 작전 자체는 추축국의 전략적 승리였지만, 이탈리아 해군이 입은 피해는 제법 컸다.
[9]
다만 이 경우는 예정되어 있던 독일의 항공자원이 오지 않아서 이렇게 참패한 것이긴 하다. 당시 이탈리아군은 뇌격기들을 상대하면서 간절히 독일군 항공기들을 기다렸으나, 관측된 건 전황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
Ju 88 2기 뿐이었다.
[10]
해군 항공대가 아닌 공군이 이 일을 도맡은 것은 이탈리아 왕립 해군이 자체적인 항공대를 보유하지 못했던 것도 한 몫 했다. 그 이유는 즉슨 공군사령관
이탈로 발보가 해군의 함재기 보유를 금지시켰기 때문이었다.
[11]
대표적으로 저 시점에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주력함 리토리오급 전함 3척은 모두 멀쩡히 남아있었며, 전함 전력 전체로 봐도 7척의 전함 중
콘테 디 카보우르급 1번함 콘데 디 카보우르가
타란토 공습으로 착저한 것을 제외하고서는 일체의 전함 손실이 없었다.
[12]
실제로 영국 본토 항공전 내내 이탈리아 왕립 공군은
루프트바페의 고위장군들과 파일럿 모두에게 골칫덩어리였다.
[13]
마사와는 한때
에티오피아의 항구도시였지만 1993년 이후
에리트레아의 도시가 되었다.
[14]
전술했듯이 이곳은 이탈리아 대서양 잠수함 전단의 본거지이도 했다.
[15]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을 도울 목적으로 독일 해군이 아시아에 파견한
유보트 전단을 이르는 말. 이들은 일본 해군과 합동 작전을 펼쳤다.
[16]
이 시점에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전력의 상당수를 잃은 후였다.
[17]
여기에 대해서는 유지비 문제로 그랬다는 설이 존재한다.
[18]
공식적으로는 제거하지 못한 기뢰로 인한 사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