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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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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적 배경3. 독일 내 주도권 갈등4. 진행 양상 (1866)5. 결과6. 둘러보기

1. 개요

독일어: Deutscher Krieg(독일전쟁), preußisch-österreichischer Krieg
영어: Austro-Prussian War, Seven Weeks' War(7주전쟁)
한국어: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보오전쟁(普墺戰爭)

1866년 6월에서 7월까지 7주간에 걸쳐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을 중심으로 이탈리아 왕국 및 군소 독일 국가들이 참전한 전쟁. 독일 연방에서 '오스트리아 위주의 대독일주의냐, 프로이센 위주의 소독일주의냐'의 주도권 다툼의 '마지막 과정'으로, 최종적인 독일 통일을 위한 한 과정이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연장선상에 있는 예방전쟁의 성격을 띤다.

한자로 프로이센이 보로서(普魯西), 오스트리아가 오지리(墺地利)이므로[1] 앞 글자를 따서 보오전쟁이라고도 한다. 보어 전쟁과는 다르다.

2. 역사적 배경

독일어권에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주도권 경쟁은 멀리 16세기 종교 개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스트리아 대공국 합스부르크 가문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를 상속받아 합스부르크 제국을 형성해 동유럽을 호령할 무렵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을 통치하던 호엔촐레른 가문은 종교 개혁으로 수도원 재산을 몰수해 재정을 튼튼히 하고 프로이센 공국 상속 준비를 하는 등 착실하게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북독일 개신교 제후들의 성장과 더불어 17세기 중반 30년 전쟁으로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2]가 북독일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18세기 중반 마리아 테레지아 프리드리히 대왕 시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으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간의 주도권 경쟁이 본격화되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이 남계 단절로 일시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잃었을 때 북독일에서 성장한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을 점유하며 북독일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를 완전히 없앴다. 7년 전쟁에서는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프란츠 1세가 1757년 제국 의회에서 평화 유지 의무를 저버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을 상대로 제국집행을 선포했지만 중요 동맹세력이었던 러시아 제국 표트르 3세의 즉위로 발을 빼버린 탓에 또 다시 프로이센이 승리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으로 1806년 8월 6일,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되었다. 나폴레옹의 몰락 후 질서 복원을 위해 열린 빈 회의에서 승전국인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나란히 영토를 확장했다.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견제에만 치중하고 외지오스트리아(Vorderösterreich)로 알려진 역외 영토[3]를 전부 포기하는 대신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 수립, 토스카나 대공국 모데나 레조 공국의 합스부르크 가문 방계 군주 옹립 등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서 실리를 챙기고자 했는데[4] 이는 프로이센의 독일 내 지분만 확장 시키는 역효과를 낳았다.

프로이센은 프랑스령 또는 프랑스 위성국령인 라인란트 베스트팔렌 지방을 얻었는데 작센 왕국으로부터 얻은 영토와 합쳐 북독일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프랑스령과 인접한 영토는 경제력이 높은데다 산업 혁명 당시 급속도로 발전했기 때문에 농업 중심의 도나우강 연안 영토를 지닌 오스트리아보다 경제력에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이로써 프로이센은 높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독일 관세동맹을 주도하며 소독일주의에 기반한 독일 통일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3. 독일 내 주도권 갈등

1795년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프랑스 제1공화국과 바젤 조약으로 강화를 하며 프로이센은 일찍 대프랑스 적대를 해소한 대가로 오스트리아를 무시하고 마인강[5] 이북의 우위권을 인정받았는데 이후 1807년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나폴레옹에게 대패하고 1815년 빈 회의에서도 이 마인강을 경계로 하여 오스트리아에게 복수 주도권을 주장했다. 빈 회의에서 오스트리아는 독일어권보다는 헝가리 왕국과 이탈리아 반도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에 주력했으나 북독일에서 프로이센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오스트리아 위주의 독일 연방 질서는 위협받기 시작했다.

3.1. 독일 관세동맹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ZollvereinBIG_1834.png

경제적으로 독일 통일의 여건은 독일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가 주장한 관세동맹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국가의 많은 수입이 관세에서 창출되는 정황상 그의 의견이 채택되기 어려웠지만 1818년 프로이센에서 시작하여 1828년 프로이센 영향권의 군소제후국들과 시험적으로 시행하여 호평을 얻고 1834년 본격적으로 프로이센 경제권 주도하에 관세동맹이 결성되었다.

초기에 부정적이었던 독일 연방 국가들도 나중에는 늦게 참여한 걸 땅을 치고 후회하면서 가입하려고 줄을 섰다. 반면 농업 중심으로 산업력이 뒤떨어진 오스트리아는 관세 수입을 포기하기 어려웠고 뒤늦게서야 오스트리아 주도의 관세협약을 주창했지만 오스트리아에서 수입할 물건도 팔아먹을 상품도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프로이센 눈치를 보면서 가입하지 않아 거의 실효성이 없었다.

관세동맹은 프로이센에 극히 부정적인 남독일 국가들조차 정치적으론 프로이센과 대립하며 경제적으론 예속된 처지라 민심과 반대로 프로이센에 주도권에 순응하게 되었으며 많은 학자들이 장기적으로 프로이센의 주도권은 관세동맹으로 이뤄졌다는데 공감하고 있다. 프로이센은 관세동맹의 효력으로 독일내 영방들을 배제 혹은 가입으로 구스르거나 협박하며 영향력을 끼쳤고 독일 연방 가입국인 네덜란드[6]와도 간접적으로 관세동맹이 체결되어 독일 내 산업 혁명 시기 경제 성장을 이끄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3.2. 대독일주의 vs 소독일주의

1848년 혁명이 일어나고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소집되면서 독일 단일국가 형성에 관한 대독일주의와 소독일주의의 격렬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앞서 대독일주의는 오스트리아 위주, 소독일주의는 프로이센 위주로 설명하였는데 이 안에서도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여러 의견들이 나왔으며 여기에 독일 연방 내 여러 국가들의 국가원수를 세습제로 하느니 선출제로 하느니 과격 좌파의 공화제 주장까지 터져서 토론과 합의로는 절대 봉합되지 않을 갈등이 터져나왔다. 게다가 오스트리아 측은 헝가리-크로아티아 등 독일 연방 바깥의 영토를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었으며 다른 방안에 대해서는 논의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대독일주의는 물건너갔다. 이에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1849년 프로이센 국왕을 입헌군주로 추대하는 소독일주의 통일안을 제안하였으나 정작 당사자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거부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시민계급의 추대에 따른 독일 통일 방안은 거부하면서도 독일 연방 내 군주들이 추대한다면 받아들일 용의가 있음을 밝히며 대안으로 에어푸르트 연합안을 제시했으나 러시아의 지지를 받은 오스트리아의 강경책과 프로이센 편을 들어 줄 거라고 기대한 독일 지역 중간 규모 왕국들의 미온적인 반응에 실패했다. 결국 프로이센은 독일 연방에 무조건 복귀한다는 내용의 올뮈츠 협약을 맺어 사실상 외교적인 항복을 하고 마는데 이 사건을 올뮈츠의 굴욕이라고도 부른다.

3.3. 덴마크 위기

1848년 혁명 시기 덴마크에서는 동군연합이었던 슐레스비히 공국과 홀슈타인 공국[9]을 완전히 합병하려고 했는데 홀슈타인 공국은 독일 연방 소속이었고 슐레스비히 공국도 중부와 남부에서는 독일계 주민이 상당수였기 때문에 프랑크푸르트 의회에서는 민족감정이 폭발하면서 연방 내 두 강대국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게 군사적 대응을 촉구했다. 당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아직 혁명의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고 자국내 민족주의자들이 또 한 번 폭발할 것을 우려해 내키지는 않지만 덴마크에 무력 대응을 시도했는데 영국 러시아에서 크게 반발하며 나섰다. 결국 현상유지를 조건으로 덴마크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는 영국의 중재를 받아 후퇴하는데 민족감정이 일어난 국면이라 외국 군주의 치하에서 신음하는 동포들을 저버렸다고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사실 독일 연방군의 전력은 소국에 불과한 덴마크의 군대를 몰아내기엔 충분한 전력이었고 실제로 약체인 덴마크군을 쉽게 격파했으나 영국과 러시아의 강력한 반발로 알아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해군을 보내 북해 해상에서 무력시위를 했고 러시아도 빈 체제에서 채택한 군주 주권을 침해하는 국경 변경에 부정적이었다. 1차 덴마크 위기는 1848년 혁명이 거의 진압되고 영국과 러시아의 압력으로 현 상황 유지라는 조건 하에 흐지부지 넘어갔다.

1864년 제2차 덴마크 위기는 15년전 덴마크 올덴부르크 왕조의 상속문제가 겹쳐 또 한 번 폭발했는데 이번에는 영국과 러시아의 공조국면이 파토났기 때문에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 15년 전 러시아와 영국은 한 목소리로 '합법적 군주 주권을 침해하는 군사적 도발을 질타' 했는데 유럽 양대 강국은 크림 전쟁으로 사이가 크게 멀어진 데다 영국은 크림 전쟁으로 군비와 피해가 누적된 상태라 무력대응을 꺼렸고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에 이를 가는 데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친러 정책을 펴면서 대폴란드 정책에 협조하는 것에 매우 반가워했다. 따라서 비밀리에 크림 전쟁 패배 후 비무장으로 결정된 흑해 지역에 대한 재무장을 프로이센이 찬성하는지를 떠보았고 프로이센과 비스마르크는 묵시적으로 동의하면서 러시아를 기쁘게(?) 했기 때문이다.[10] 또 한 번 민족감정이 들끓어올라 독일계 주민이 다수인 독일 연방 내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을 합병하라며 국민적 감정이 일어났다. 사실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은 덴마크 왕실의 상속문제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나 이번에는 자발적 애국운동이 혁명 분위기로 번져나가는 것을 경계한 데다 독일 연방 내에서도 덴마크 국왕이 독일 연방에 속한 홀슈타인 공국을 멋대로 덴마크령으로 합병하는 것은 불법적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명분상 외국에 "국민적 열망에 따라 어쩔 수 없는데요." 하면서 덴마크를 털기 시작했는데 오스트리아는 이를 계기로 독일 연방 의장국으로 독일 연방 내의 영향권을 강화하는 기회로 삼으려고 했고 프로이센은 자국의 영토와 가까운 북해 연안에 새로운 영토를 확보하는 좋은 기회로 여겼다.

결국 1864년 10월 빈 평화 협정으로 덴마크는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공국(라우엔부르크 공국 포함)을 포기했고 1865년 8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양국은 프로이센이 슐레스비히를, 오스트리아가 홀슈타인을 각각 차지하기로 하는 가슈타인 조약을 체결하고 영토를 분할했다.

그러나 가슈타인 협정은 하루도 지켜지지 않았다.

일각에선 제2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에서부터 이미 비스마르크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위해 준비한 대규모 떡밥이라는 소리가 있는데 훗날 비스마르크 본인이 "그게 다 나의 계획대로였지 ㅋㅋ"라고 자랑한 것이라 곧이 곧대로 믿긴 어렵다. 비스마르크가 모든 걸 설계했다면 1862년에 맞춰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7세가 기적적으로 그 시기에 죽고 새로 덴마크 국왕이 된 올덴부르크 왕조의 방계인 글뤽스부르크 가문이 홀슈타인 공국을 독일 연방에서 분리하여 덴마크에 합치고 또 다른 방계 가문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아우구스텐부르크 가문(이하 아우구스텐부르크)이 글뤽스부르크 가문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령과 덴마크 왕위를 모두 계승하는 것을 반대하는 상황을 미리 만들었다고 보긴 어렵기 때문이다.[11]

오스트리아는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1848년 혁명 헝가리 독립 운동 진압, 두 번에 걸친 이탈리아 통일 전쟁으로 국력 소모가 컸고 군대는 투자는커녕 이전 수준으로 회복도 되지 않았으며[12] 재정은 파탄 상태였다. 더구나 도나우 강변은 라인강 지역과 달리 후진적인 농업지대라 북독일 산업지역을 바탕으로 공업력이 일취월장한 프로이센의 성장세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단순 인구는 오스트리아가 많았지만 제국에서 독일인( 오스트리아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많게 쳐줘야 1/4에 불과했고 독일 연방 지역에 속하지 않은 제국의 많은 지역은 독일 연방 내 오스트리아의 전쟁에 대해서 비협조적이라 과세와 군대 동원에 어려움이 따랐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과의 갈등에서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고 프로이센과 비스마르크는 이런 상황을 이용했다.

가슈타인 협정의 내용을 살펴보면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두 공국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공동관리구역에서 슐레스비히는 프로이센, 홀슈타인은 오스트리아가 관리하기로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오스트리아는 홀슈타인 공국 내 라우엔부르크 공국에 대해서 250만 덴마크 탈러를 받고 프로이센에 영토를 팔아 버렸다. 그리고 홀슈타인 공국내 (Kiel) 항구를 프로이센 해군에 조차하여 독일 연방 소속 해군함대 기지로 하고 슐레스비히와 프로이센을 잇는 군사도로 2개와 킬 군항 접근 도로 부설권한마저 프로이센에 허가했는데 비스마르크는 여기서 오스트리아의 취약함을 눈치챘다. 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홀슈타인은 오스트리아가 관리하기는 전혀 불가능한 데다 이미 홀슈타인 주둔 병력의 유지비조차 버거워할 정도로 오스트리아가 허덕였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처음에 전혀 고려하지도 않던 아우구스텐부르크 가문의 홀슈타인 공국 통치권 떡밥을 흘리고 슐레스비히마저 독일 연방에 가입하면 좋지 않냐며 독일 연방국들에게 언플을 해 댔다. 문제는 홀슈타인은 원래 독일 연방 소속이었으나 슐레스비히는 남부에 독일계가 상당하지만 독일 연방 구성원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프로이센은 이 점을 꼬투리 잡아 독일 연방의회에 오스트리아를 배제하는 연방 개편안을 제출했고 이에 자극받은 오스트리아가 1866년 6월 17일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하고 몇몇 군소 제후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독일 연방 국가들이 오스트리아에 가담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4. 진행 양상 (1866)

오스트리아는 체면을 지키기 위해 선전포고했으나 전술한 대로 전쟁 준비는커녕 누적된 재정난과 군대 손실, 헝가리 진압 등 전쟁수행 능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에 독일 연방국에 기대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위주의 독일 연방에선 북독일 군소 제후국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나라가 오스트리아를 편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기간 전쟁 준비를 해온 프로이센의 공세를 막을 수 없었다.

국제정세도 변했는데 이미 프로이센은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고 남북에서 오스트리아를 협공하기로 합의한데다가 크림 전쟁 때 오스트리아에 뒷통수를 크게 맞은 러시아가 과거 전통적 우방이던 오스트리아를 버리고 친프로이센 정책을 펴기로 해서 프로이센이 매우 유리해졌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신생 이탈리아가 크려면 오스트리아의 기세를 꺾어 놓야야 한다고 오판하고 있었고 프로이센에 중립의 대가로 팔츠 지방 란다우, 프로이센령 자를란트, 독일 연방 요새인 룩셈부르크 벨기에 지역 일부 또는 전부를 원한다는 말도 안되는 협상안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비스마르크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고 나폴레옹 3세는 이를 묵시적 동의로 착각했다.[13]

대규모 상비군을 갖춘 프로이센 왕국군 철도[14] 이용하여 신속하게 병력을 전선으로 전개해 오스트리아 제국군을 거세게 몰아붙였으나, 오스트리아는 병력 동원에도 시간이 걸리고 철도 총연장도 형편없이 부족해 병력 전개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탈리아의 선전포고는 사실 몇 달 전에 이미 비스마르크와 약속된 것으로, 비스마르크는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비밀리에 공수동맹을 맺고 대신 오스트리아령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의 잔여 지역인 베네토 지역을 넘져주기로 했다. 오스트리아도 중립의 대가로 같은 제안을 했으나 오스트리아는 이미 이전에 이탈리아 통일을 두고 맞선 적국이었으며 미수복 오스트리아령 이탈리아인 우세지역[15]까지 탈환하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와 우호적 중립을 지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독일 지역에서는 프로이센이 예상대로 오스트리아의 동맹국들을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면서 쉽게 제압했다. 사실 전쟁 초기 하노버군이 프로이센군을 소규모 전투에서 격퇴한 적도 있지만 승전 이후 바로 항복했다. 이렇게 승리해놓고 바로 항복을 한 이유는 병력과 탄약이 떨어져서였는데 프로이센을 제외한 다른 중소국가들은 오랫동안 비전시 상황이었던 탓에 대병력을 유지할 필요성을 못느꼈던지라 보오전쟁 시점에선 동원할 병력이 부족했고 장비 가동도 당연히 형편없었다.

주 전장인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선에서는 개전 초기 작은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이 프로이센군에게 연달아 패하고 결국 프로이센군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간의 국경지대까지 진격했다. 이에 오스트리아군은 작센군과 연합하여 21만의 대군으로 보헤미아 쾨니히그레츠(Königgrätz)에서 결전을 시도했다. 그러나 7월 3일 헬무트 폰 몰트케가 직접 지휘한 28만의 프로이센군이 적지에서 오스트리아-작센 연합군을 맞아 압승을 거두었다. 프로이센의 전사자가 2,000명도 채 안 되는 데 비해 오스트리아-작센 연합군은 약 13,000명에 달하는 전사 및 실종자에 22,000여 명의 포로까지 발생하면서 전황은 순식간에 기울었다.

이 전투는 전장식 소총을 이용한 오스트리아군과 후장식 소총으로[16] 장비를 교체한 프로이센군의 대결로 유명하다. 후장식이 전장식보다 더 좋은 점은 일단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 장점은 뒤에서 장전하므로 엎드려서 장전 및 사격이 가능, 즉 엄폐하면서 사격이 가능해졌다는 것이고 두 번째 장점은 전장식에 비해 무려 6배나 빠른 연사력을 가진다는 점이다. 결국 보병간의 사격전에서는 프로이센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는 점이다. 다만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양군이 장비한 소총의 질적 차이가 전투의 승패를 결정 지은 것은 아니었다.

사도바 전투[17]를 지휘한 몰트케는 병력 이동은 분산해서 진행하다 전투가 시작되는 타이밍에 맞춰서 결집하는 방식을 썼는데 이는 철도와 전신 이용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시간과 공간을 배분한 병력 이동과 배치는 이전에 쓰이지 않은 전술이었기 때문에 당시 군인들은 철도 통신의 수단의 위력을 잘 알지 못했으며 몰트케의 병력 이동과 배치를 매우 위험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몇시간만 늦었어도 졌다 ㅎㄷㄷ"이라는 것이지 이미 작센과 슐레지엔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작센군은 개박살이 나서 보헤미아까지 추격당한 패잔병이었고 적지임에도 프로이센군의 병력과 화력이 오스트리아를 압도했던 것이다. 실제로 사도바 전투 이전 십수번의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가 이긴 건 달랑 한 번 뿐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인 베네데크 장군은 전략적 능력은 떨어져도 전술적 능력은 훌륭했고 스스로의 능력을 잘 아는 그는 자신의 능력을 살리기 위해 쾨니히그레츠 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했고 희망을 걸었다. 그리고 전투 초반 프로이센군이 초반에 엄청 고전했다. 비스마르크와 몰트케의 담배 야사[18]가 생긴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대로만 진행되었다면 오스트리아가 이기거나, 프로이센이 이기더라도 엄청난 피해를 입고 끝났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양군이 맞선 가운데 프리드리히 왕태자가 이끄는 프로이센 2군이 전선 측면에서 나타나자 오스트리아군은 혼비백산해서 전투를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19]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나름대로 선전하며 방어전을 수행했고 특히 리사 해전에선 양적 열세인 해군력으로 이탈리아 함대를 격파하는 등 선전했다. 리사 해전은 도시전설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에도 올라온 것처럼 이탈리아군의 삽질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굳이 이탈리아를 변호하자면 당시 이탈리아는 통일 국가를 이룬 지 10년도 안된 신생국이었다. 통일 이탈리아의 전신인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오랫동안 항구가 니차 하나뿐이었고 제노바가 있는 리구리아 지역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빈 회의에서 얻었던지라 해군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반면 오스트리아는 내륙강국이라 할지라도 수십년 동안 해군을[20] 운용해 본 경험이 있고 따라서 그 질이 상당했는데 그 우세를 잘 이용해서 충각 돌격을 절묘하게 활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선전에도 불구하고 주적인 프로이센군이 파죽지세로 보헤미아를 석권할 기세를 보이자 오스트리아는 7월 26일에 황급히 휴전조약을 체결했다. 7주만의 일이었다.

5. 결과


프로이센군은 쾨니히그레츠(사도바) 전투로 결정적인 승리는 얻었지만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모라바 니콜스부르크에서 회담을 진행중이었는데 프로이센은 회담과 별도로 점령전으로 나섰다. 북독일 거의 전역을 석권하고 바덴과 뷔르템베르크, 바이에른 영토 깊숙히 진군했고 오스트리아 전선에서는 보헤미아를 석권하고 빈 60킬로 근방의 헝가리 프레스부르크까지 진격했다.

프로이센 군부는 오스트리아로부터 영토 할양을 받아야 된다는 주장도 있었고 빈에 입성하는 것은 단순 영토 할양의 대가를 구하는 차원이 아니라 오스트리아군을 일소하여 재기불능 상태에 두려는 욕심도 있었는데 비스마르크가 어차피 오스트리아를 독일 연방에서 축출한 마당에 프로이센의 영토적 이익은 독일 연방 제후국으로부터 얻는 것이 옳고, 프로이센군이 빈 근처에서 진격을 멈추면 오스트리아가 고마워할 것이라며 말렸다. 더 진군한다면 오스트리가 결사항쟁을 할 것이고 그러면 그 다음의 적을 상대하기 매우 힘들어 질것이다. 하지만 빌헬름 1세는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승전 퍼레이드를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나[24] 프리드리히 왕태자도 비스마르크 편을 들자 결국 뜻을 꺾었다. 이 때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1세가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겠다는 협박까지도 했다.

사실 쾨니히그레츠 전투 이후 니콜스부르크에서 예비평화회담으로 전쟁 종료전 조건은 이미 거의 확정이 되었지만 이 사실을 잘 모르는 프로이센 여론은 똘똘 뭉쳐 비스마르크를 비난했지만 비스마르크는 늘상 하던 대로 국왕의 강력한 신임을 얻어 반발을 무시했고 현실 정치를 들어서 반대했다. 비스마르크로서는 오스트리아를 완전히 몰락시키기보다는 적당한 선에서 우위만을 인정받게 하는 게 장기적으로는 프로이센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현실적으로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길게 공유한 데다 프로이센의 독일 내 우세권이 특히 남부 연방국에서 인정받지 못한 상황에서 오스트리아에게 가혹한 조건을 제시하면 궁극적으로 독일 내 국가들에게 거부감을 줄 우려도 있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를 장기적으로 최소한 우호적인 중립국으로 묶어둘 필요성이 있었다. 독일 통일을 방해하는 더 큰 강적을 격파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때는 적의 수도를 털 수 있었는데 이는 비스마르크가 오스트리아군을 철저하게 격파하는 것을 반대한 이유다.
오스트리아를 우호적인 동맹국으로 남길 계획인 만큼 오스트리아의 군사력을 일정 부분 보존하는 편이 오히려 프로이센에게 유리했으며 오스트리아가 독일에서 배제되면 오스트리아 영토 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이민족 인구 구성상 패전 후 독일계 국가에 더 의존하리라 예상한 것도 있다.

처음에 오스트리아는 비스마르크의 자비로운 대우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에 복수하려고 이를 갈았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직후 대타협을 통해 기존의 제국을 이중제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재편하여 헝가리인에게 통 크게 양보한 것도 골치아픈 헝가리 문제를 빠르게 끝내고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대패를 설욕하는 데에 집중하고자 하는 의도였으며 심지어 크림 전쟁으로 관계가 악화된 러시아 제국에게도 손을 내밀어 발칸반도의 영향력을 넘겨주는 대신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프로이센에 복수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러시아 군부도 오스트리아의 제안에 호응했는데 러시아 정계가 거부했다. 러시아가 정말로 발칸 반도를 장악하면 이를 두고 볼 수 없는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해 제2의 크림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비스마르크가 원하던 대로 프로이센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쟁의 경험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승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프로이센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치른 첫 대규모 전쟁이었고 이 전쟁의 경험을 철저히 연구했다. 포병 부족으로 전투에서 패배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었으며, 실제 철도 운영 중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 등을 연구해 프로이센군의 전투력을 더 강력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육군이라는 강적을 쉽게 이길 수 있었다. 프랑스군도 이 전쟁을 보고 더 좋은 소총을 도입하는 등의 노력을 했지만 신무기 도입 외의 노력은 하지 않았다.[25]

과거 영국과 100년 넘게 동군연합을 이루었다가 빅토리아 여왕 즉위 후 영국과 별도의 국왕이 즉위한 하노버 왕국은 오스트리아를 편들었다가 망했다.[26] 그 외에도 헤센 선제후국이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나사우 공국[27],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자유시가 프로이센 왕국으로 합병되었지만 작센 왕국은 프랑스의 견제로 북독일 연방에 가입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여담으로 당시 리히텐슈타인도 오스트리아 측에 총 80명의 병력을 파병했다. 공국을 다스리는 리히텐슈타인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하로 종주국의 전쟁에 종군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리히텐슈타인군 부대는 티롤 지역에 별다른 교전 없이 주둔했다가 전쟁이 끝난 후 귀환했다. 복귀할 때는 병력이 81명이었다고 하는데 이탈리아 왕국군에서 탈영한 군인 1명이 같이 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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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 중국어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각각 西 대신 士, 墺 대신 奥를 써서 普鲁士, 奥地利라고 부른다. 보오전쟁도 普奥战争으로 표기한다. 보불전쟁은 중국어로 프랑스를 法国이라고 하므로 普法战争(보법전쟁)이라고 부른다. [2] 15세기 중반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후보자를 배출해 왔다. [3] 라인강 알자스 슈바벤에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월경지 영토들로 13세기 스위스에 집착한 이유도 본거지인 오스트리아 공국과 경제력이 높은 라인강변 영토들을 연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본토와 너무 멀어 심심하면 프랑스 왕국에게 털렸고 레오폴트 1세 때부터 라인강변 영토는 포기하고 본토와 가까운 곳에서 확장에 치중했다. [4] 정작 빈 회의에서 이탈리아 반도 북부의 강력한 세력이었던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게 옛 제노바 공화국 리구리아 지역을 내어주며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5] 라인강의 지류로 프랑크푸르트에서 라인 강과 합류한다. 한반도 대운하의 모델이 되었던 독일은 물론 유럽내 양대 하천인 라인강과 도나우강을 연결하는 라인-마인-도나우(RMD) 운하가 개통되어 있기도 하고 현재도 남북 독일의 지리적 경계점이다. [6] 룩셈부르크뿐만 아니라 현 마스트리히트 지방 림부르크도 포함되었다. [7] 일명 대오스트리아주의. [8] 이 경우 신성 로마 제국 시절의 오스트리아 대공국 잘츠부르크 대주교령, 보헤미아 왕국만 포함된다. [9] 홀슈타인 내 라우엔부르크 공국 포함. [10] 흑해 비무장 파기는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털 때 프로이센과 이탈리아의 동의를 얻어 파기했다. 프랑스는 전쟁 중에 털리느라 정신이 없었고 영국과 오스만 제국은 내부적으론 반발했지만 침묵을 지켰다. [11] 아우구스텐부르크 가문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령을 통치권을 얻진 못했지만 프로이센 왕실과 사돈을 맺는 것으로 타협했다. 빌헬름 2세의 황후가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의 장녀이며 공작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때 프로이센 군영에서 종사했다.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가는 덴마크 왕실의 일원이기 때문에 통치가문으로 동등결혼이다. [12] 실제로 1848년 헝가리 혁명 당시 러시아 니콜라이 1세가 11만 병력을 파견하지 않았다면 진압이 불가능했다. [13] 라인란트 전체 병합을 제시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14] 프로이센은 전쟁 전 철도 5개를 완공하여 엄청난 통신과 수송 효율성을 보여준 반면 오스트리아는 전쟁 도중 프로이센군을 상대로 사용할 수 있었던 철도가 단 하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이미 프로이센 군부는 철도의 유용성에 주목하여 철도 통제권을 군이 보유하고 있었기에 평시에도 원활한 작전수행과 훈련이 가능했다. [15] 트렌티노알토아디제 트렌토, 트리에스테, 이스트리아 반도, 달마티아 등이 있다. [16] 프로이센군이 이용한 드라이제 니들건이 대표적이다. [17] 전투가 쾨니히그레츠(Königgrätz)와 사도바(Sadowa) 근방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쾨니히그레츠 전투라 하기도 하고 사도바 전투로 부르기도 한다. 즉 위에서 말한 전투와 같다. [18] 전투가 한창 진행될 당시 몰트케의 지휘부에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1세가 방문했다. 이 때 비스마르크는 몰트케에게 담배갑을 건네며 한 대 피울 것을 권유했다. 그런데 이 담배갑에는 썩어서 맛이 간 담배와 정상적인 담배가 있었다. 몰트케는 이 중 정상적인 담배를 골라서 피우며 상황을 설명하였고,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1세에게 "이 전투는 이겼으니 돌아가시죠." 라고 말했다. 격렬한 전투로 아군이 피해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휘관인 몰트케가 맛난 담배를 골라서 피울 정도로 침착하게 지휘하고 있으니 승산이 크다고 비스마르크가 판단했다는 이야기다. [19] 소총은 프로이센이 확실히 우월했지만 포병에서는 오히려 오스트리아보다 뒤떨어졌고 이것도 초반 고전의 원인이 됐다. 따라서 종합하자면 이 전투에 한해서는 프로이센군이 우월해서 진 것이라기보다는 오스트리아군이 삽질해서 스스로 자폭한 것이 패배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오스트리아군의 삽질은 여전히 신분제 및 비효율적인 통신체계에 기초한 전근대적인 지휘체계를 가진 오스트리아군과 참모본부를 중심으로 한 지휘체계의 혁신을 달성하고 근대적인 통신망을 갖춘 프로이센군의 차이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20] 오스트리아 해군은 1797년 캄포포르미오 조약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을 합병한 뒤 베네치아의 잔여 해군 인프라를 바탕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21] 하노버 왕국, 나사우 공국, 헤센 선제후국, 헤센 대공국 북부 등이 있다. [22] 만토바, 페스키라 델가르다, 베로나, 레냐고가 있다. [23] 바덴 대공국 프리드리히 1세 빌헬름 1세의 사위여서 애초부터 북독일 연방에 끼고싶어 했으나 남독일 다른 국가의 눈치를 보느라 들어가지 못했다. [24] 1814년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추억을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 평생 공유했다고 한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도 이러한 승전 퍼레이드를 요구했고, 비스마르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관철했다. [25] 샤스포에서 많이 해결되긴 하지만 당시의 후장식 소총은 아직 문제가 많은 물건이었고 무엇보다 프로이센군의 승리 원인은 무기보다는 그 체계에서 있었다고 봐야한다. 이어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군은 구시대적 전략체계로 대응하다가 패배했다. [26] 옆나라 작센은 그래도 북독일 연방에 가입하는 형식으로 왕가가 사라지고 멸망하는 건 피했지만 하노버는 프로이센 왕국으로 완전히 합병당했다. 그 결과 왕족들은 오스트리아나 친척 동네인 영국으로 망명했는데 영국에서도 왕가의 뿌리이기도 하여 모른 척 할 수 없는 하노버 왕국의 동향에 대해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마침 자유당에서 보수당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등 내부에서의 격변이 심했던지라 결과적으로 대륙에서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다. 이때 하노버 왕국의 금고는 프로이센 왕국 주도의 북독일 연방이 고스란히 챙겼고 그 돈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바이에른 왕국 같은 남독일 연방 국가들을 구워삶는 데 쓰이는 등 잘 쓰고 다녔으며 이 돈으로 지은 유적지 중 하나가 바로 노이슈반슈타인 성이다. [27] 이곳을 통치하던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 아돌프 공작은 퇴위 당해 유유자적한 삶을 살다가 24년 뒤 먼 친척인 네덜란드 국왕 빌럼 3세만 남기고 사망하면서 졸지에 룩셈부르크 대공으로 즉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