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22:43:47

응답하라 1997/탐구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응답하라 1997
1. 개요2. 설정3. 재현 오류
3.1. 1화3.2. 2화3.3. 3화3.4. 4화3.5. 5화3.6. 6화3.7. 7화3.8. 8화3.9. 9화3.10. 10화3.11. 11화3.12. 12화3.13. 13화3.14. 14화3.15. 15화3.16. 16화
4. 옥에 티
4.1. 4화4.2. 7화4.3. 8화4.4. 13화4.5. 14화4.6. 15화
5. 관련 문서

1. 개요

응답하라 1997의 시대적 배경인 1997년에 나올 법한 사실이나 소재들이 매우 반영이 잘 된 편이지만, 사소한 오류들이 꽤 있다.

응답하라 시리즈 고증덕후들이 유독 많이 나오는 것은 그 당시( 1997년)를 직접 겪은 사람들[1]이 워낙 많아서 그렇다. 애초에 그 세대들이 인터넷 1세대이기 때문에, 한번 지적하게 되면 밑도 끝도 없다. 또한 시간적 배경이 1990년대로 방영 시점으로부터 꽤 오래 전인데다, 실제로 그 시기는 한국 사회가 여러 변화를 겪었던 시기였기에, 그 특성상 다소간의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소품적 오류들이 몰입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기에 시청자들에게 깨알같은 탐색의 즐거움을 줬기 때문에 다른 응답하라 시리즈의 탐구 문서같이 문서가 따로 독립될 정도로 오류가 많다고 다른 오류가 많은 창작물처럼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작품은 아니다. 그냥 절반쯤은 비교하고 따져보는 재미로 적는 것일 뿐, 완벽한 재현을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 그러므로 이 문서는 절반은 오류, 절반은 팬심으로 발견하는 옥에 티 모음 정도로 가볍게 즐기도록 하자.

그리고 그 당시 사회 분위기로 봐서 그렇게 웃고 낄낄댈 상황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던 시기다. 무엇보다도 1997년 겨울에 벌어진 외환위기는 단순한 경제위기가 아니라 나라가 통째로 망할 뻔했을 정도로 심각한 국가부도 위기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시대에도 예능 프로그램은 방송되기는 했으며, BJR 증후군같은 블랙유머가 자주 돌아다니기는 했다.

2. 설정


파일:attachment/yungdabhara1997okti1212.jpg

3. 재현 오류

3.1. 1화

파일:attachment/yungdabhara1997okti54.jpg

파일:attachment/replay1997error4.jpg
파일:attachment/yungdabhara1997okti323.png
파일:attachment/응답하라 1997/고증오류/응답하라19971.png

3.2. 2화


파일:attachment/y7_old.jpg

3.3. 3화

파일:attachment/응답하라 1997/고증오류/응칠3회지하철.jpg

3.4. 4화

파일:attachment/hodori.jpg

파일:attachment/replay1997error3.jpg

파일:attachment/replay1997error.jpg
파일:attachment/replay1997error2.jpg

3.5. 5화


파일:attachment/응답하라 1997/고증오류/r1997timepen.jpg

3.6. 6화

3.7. 7화

파일:external/s22.postimg.org/529b2ebb01bfb6decdb5.jpg

3.8. 8화

파일:attachment/yungdabhara1997okti8888.jpg

파일:attachment/1345266556.jpg

파일:attachment/1997_E08.001194493.jpg

3.9. 9화

3.10. 10화

파일:attachment/yungdabhara1997okti101010.jpg
파일:98음반판매량.jpg
* 골든디스크 시상식을 앞둔 H.O.T.와 젝스키스 팬덤의 싸움이 10화의 메인으로 다뤄지는데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은 일이다. 골든디스크의 시상 기준은 음반판매량으로, 젝스키스는 순위권 밖이었기 때문에 대상 후보가 아니었고, 따라서 대상 수상을 다투며 싸웠다는 내용은 완전한 허구이다. 정확히는 H.O.T.의 대상을 기대하고 있다가[44] 예상을 깨고 김종환이 수상한 것이 맞다.

두 팬덤의 실제 싸움은 시상식이 아닌 드림콘서트에서 현수막 배치 문제로 일어났다는 후문이 있다.

3.11. 11화


윤윤제를 형이 논술 준비하라고 깨우는데 자기는 특차라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나오는데 서울대는 딱 3년간 특차가 있었으므로 알맞게 재현한 것이다. 정확히 99학번부터 01학번까지 수능성적과 내신 5과목 성적으로 법대 경영대를 포함한 일부학과에서 특차모집이 있었다.

3.12. 12화

파일:attachment/yungdabhara1997okti1212_1.jpg
파일:attachment/yungdabhara1997okti121212.jpg

파일:Screenshot_2015-12-23-03-05-51.png
시원이 버스를 타기전에 뒤에 보이는 버스가 2006년에 출시된 현대 유니버스이다. 참고로 도색과 차종을 감안할 때 금강고속이다.

3.13. 13화

파일:attachment/yungdabhara1997okti111.jpg

3.14. 14화

3.15. 15화

3.16. 16화

4. 옥에 티

4.1. 4화

4.2. 7화

4.3. 8화

4.4. 13화

4.5. 14화

파일:attachment/yungdabhara1997okti.jpg
* 14화에서 윤윤제 은밀한 프로그램을 확인한다고 성시원이 노트북을 켰을 때 맨처음 잠금화면이 뜨지만 바로 다음 장면에서는 자세히보면 윈도우 파일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다음 화면에선 다시 성시원이 비밀번호를 켜는 장면이 나온다. 안면 해제장치라도 있는 건가[53]

4.6. 15화

파일:attachment/yungdabharaokti6543.jpg
* 15화에서도 옥에 티를 발견할수 있다. 정 여사가 보낸 맞선 리스트에서 등장하는 2번째 프로필에 써있는 이력서에서 찾을 수 있는데 출신 학교가 경기고등학교로 나온다. 경기고등학교는 남고.... SS그룹 MR랜드 소유한 사람의 딸이 원래 남자였어!? 아마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오타로 쓴 모양이다. 실제로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 이전만 해도 경기여고는 경기고와 같이 서울특별시에서는 명문고등학교에 속했다. 참고로 이력서에는 생일이 1981년으로 나와있는데 1981년생( 빠른 년생 불문)은 이미 평준화가 된 후에 입학한 세대이다.

5. 관련 문서



[1] 대개 1980년대생이나 그 이전이라고 할 수 있다. [2] 1997년 당시에는 광안여자중학교도 있었다. 광안여중은 2002년에 남녀공학으로 바뀌면서 한바다중으로 변경. [3] 실제 촬영장소는 서울특별시 강서구에 위치한 영등포공업고등학교이며, 참고로 수영구에는 현재(2017년)까지도 남녀공학 고등학교가 없다. (부산남일고는 남고이며 그것도 수영구 내의 유일한 남학교이다. 동여고, 덕문여고, 부산여상은 이름만 보면 알듯이 여고다.) [4] 1997년 당시 부산에 있었던 남녀공학 일반계 고등학교는 1972년부터 남녀공학이던 동래학군(4학군)의 부산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와 1997년에 남녀공학으로 전환된 남산고등학교, 북구학군(3학군)의 낙동고등학교 단 3곳 뿐이었으며, 이들 학교 역시도 애초부터 학군 자체가 달라서 수영구에서는 진학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1997년이면 부산서 이제서야 공립고등학교 중에 남녀공학 고등학교가 처음으로 나온 시점이었다. 그 외의 당시 부산시내 남녀공학 고등학교는 모두 특수목적고등학교였다. [5] 애초에 부산제일중학교라는 교명 자체는 학교 서열을 조장할 수 있다는 문제로 부산광역시교육청에서는 영구결번 처리해서 실제로는 쓸 수 없는 교명이다. 다만 이름이 비슷한 영남제일중학교(정식 명칭은 영남제1중학교)가 동대신동에 존재했던 적은 있는데, 1983년 연말에 장림동으로 이전하면서 영남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사실 교명의 '제일'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잔재이며, 이 점을 의식해서인지 일부 지역에서 제일이나 동서남북 및 중앙이라는 이름을 가진 학교 명칭을 바꿨던 사례가 있었다. 실제로 일본에는 현재도 제일(第一, 다이이치) 외에 제이(第二, 다이니), 제삼(第三, 다이산) 등의 이름을 단 학교를 볼 수 있었으며, 한국도 과거에는 일본과 비슷하게 제1, 제2 이런식으로 붙인 학교가 몇몇 있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 교명을 변경하여 사라졌다. [6] 부산에는 송도여중이 아닌 송도중학교가 있는데 남자중학교다. 설마... 그리고 송도여중은 부산이 아니라 포항에 있었 여자중학교였다. (2017년 현재는 남녀공학) [7] 물론 삭발도 규정위반. 어쩌라는 거야... [8] 시대적으로 보면 1980년대 이전은 반삭이 기준이었다가 1982년에 두발자유화 조치를 시행하면서 다수의 학교에서 남자는 뒷머리, 여자는 커트머리, 생머리까지 풀었지만,(물론 파마와 염색, 남학생의 머리가 옷깃에 닿거나 옆머리를 덮는것은 금지사항이었다.) 이때도 학교장 재량에 의거하여 길이 규제를 할수있었기 때문에 학교마다 두발기준이 제각각이라 엄격한 학교는 명목상의 규제완화만 시행해서, 스포츠 머리와 귀밑 5cm 내외의 단발을 기준으로 삼았으며, 이 정도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정수준의 길이를 넘으면 안된다는 학교가 많았기 때문에 일선학교에서 바리캉이 나돌아다녔던것은 여전했다. 이후 1980년대 중후반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기간까지 교복부활과 함께 깔끔해보이게 만들어야된다는 전시행정적인 이유로 두발규정을 강화해서 뒷머리를 민 스포츠 머리와 길이 5cm 단발을 강제하는것이 일선 중고등학교의 유행이 되었다가, 물론 이발소와 미장원에서 머리깍는 비용과 교복비는 학교에서 대주는것이 아닌 자가 부담이었다. 드러운 놈들 2000년 두발자유화 시위 이후로는 1980년대 수준으로 두발규정이 복구는 되었지만, 학교마다 길이 규정이 제각각이라 여전히 일선학교에서 바리캉이 돌아다녔던것은 여전했으며, 대부분의 학교에서 길이 기준을 완전히 풀고, 경우에 따라 염색과 파마규정까지 완전히 없애서, 바리깡이 사라지게 된것은 2010년대 중후반의 일이었다. [9] 심지어 학교 버스 기사는 머리는 얼마나 길렀는지 자로 재서 확인했다. 여학생의 경우 귀 밑 5cm정도의 길이며 그 이상은 교사들이 가차없이 잘랐다. 2020년대 기준으로는 학생과 학부모가 교사들을 고소해서 모가지 날릴일이지만, 이 당시의 학부모들은 학창시절에 끽해봐야 까까머리와 단발, 양갈레, 땋은머리나 하던 수준이었고, 머리를 기르면 학생들이 공부에 신경안쓰고 나댄다는 고정관념을 대놓고 드러냈기 때문에 대학에 보내기만 한다면, 대충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10] 그 당시 학창시절을 보냈던 김태희, 송지효, 한지민의 졸업사진은 전부 단발이다. [11] 심지어 양아치학생들이 머리를 길었다고 한다. 하지만 깔끔한 생머리였다. [12] 1997년 당시 부산서 유일하게 두발자유화를 했던 학교는 브니엘중학교 한곳 뿐이었으며, 고등학교 중에 두발자유화 인 곳은 없었다. 더군다나 브니엘중학교도 학교 폐교 관계로 1997년 시점이면 1~2학년들은 들어오지 않았고 3학년만 남아있었으며, 게다가 이 학교는 동래 학군이라 수영구와는 전혀 다른 학군에 속했다. [13] 부산지역의 경우는 일반계 고등학교 대다수가 1986년~1993년 사이에 교복을 정해서 현재도 바꾸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만 그 시절과 비교하면 유행에 따라서 전체적인 비례는 많이 달라졌다. [14] 겨울땐 터틀넥도 입을 수 있었다. [15] 대부분 끈리본 형태였고, 지금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의 리본은 부산시내에서는 부산예술고등학교만 1986년 9월 부터 썼었다. [16] 여자 학교에 다닐 경우는 바지도 입을 수 있었다. [17] 파일:루즈삭스.jpg
당시 고교생 인기가수였던 양파도 루즈삭스를 신고있다.
[18] 2000년대 중반에는 루즈삭스가 아닌 양말을 완전히 올려 신는 니 삭스가 유행했는데, 당시에도 부산에서 교칙으로 허용했던 학교는 브니엘예술고등학교 외에는 전무했으며, 당시 부산시내서 교칙이 널널하던 실업계 고교 중에서도 니 삭스를 교칙으로 허용한 곳은 없었다. 중학교 중에서 니 삭스를 교칙으로 허용했던 학교는 부산에서는 여태까지 단 한곳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추가로 2009년 이후에 동래구 혜화여자고등학교가 교복을 바꾸면서 니 삭스도 세트로 지정한 적은 있었으나 정작 이 시절에는 니 삭스의 유행이 지나서 아무도 신지 않았다고... [19] 비트매니아는 1997년 12월 10일에 첫 발매를 시작했다. [20] 모든 비마니 시리즈를 살펴봐도 플레이스테이션 1,2판 가정용 이식판이 한국에서 정식 발매된 건 beatmania IIDX 16 EMPRESS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비트콘 없는 반쪽짜리 정식발매. [21] 1997년부터 비디오 게임기를 포함한 일부 제품들의 수입이 자유화가 되었다. [22] 철권 3의 PS판은 1998년 봄에 출시. [23] 몇몇 타이틀을 정발해주긴 했지만 북미/유럽 게임 위주여서 없는셈 쳤다. [24] 모드칩은 소매점에서 2차 유통될 때 장착되었다고 하지만 이미 밀수가 점령하고 있어서.. 애초에 모드칩조차 카마에서 달고 판것이었다.. [25] 촬영지가 서울이어서 같이 찍혔을 수도 있다. [26] 이들의 어린 시절은 시즌 3격인 응답하라 1988의 배경인 80년대다. 작중 성시원과 윤윤제의 출생년도가 1980년과 1981년으로 확인사살. 이 때문에 후술할 버스카드는 이때 당시 아예 없었다. 다만 응팔에서 주인공들이 시내버스를 타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다. [27] 동일이 토니를 만나러 서울에 갔다 온 시원의 머리를 마구 잘랐다. [28] 여기서도 문화역서울284의 로고가 새겨진 주황색 현수막이 다 보인다. [29] 물론 1997년 당시 서울지하철공사가 총신대에게 이수역으로 바꾼다고 통지를 한 상태이기 때문에 노선도는 미리 이수역으로 바꿔놓았을 가능성도 있다. 이랬을 경우 이건 오류가 아니다. [30] 공사역명은 수리산역이 아닌 '도장역'이었다. 차라리 '도장'이라고 찍혀있으면(?) 오류라고 보기 애매했을 것이다. [31] 그리고 이때 1호선 서울역~청량리 구간의 색은 빨간색이었다. 현재 1호선 열차가 죄다 빨간 색인 이유 중 하나. [32] 1호선 지하구간을 제외한 전 구간, 3호선 대화-지축(지축역은 서울메트로와 공동관리), 4호선 선바위-안산 [33] 역사 자체는 2004년 KTX 개통에 맞춰 이전했다. [34] 본사가 대구에 있다. [35] 간혹 PPL인 경우라면 오류인데도 쌩까고 넣는 경우도 많다. '오류'을 일부러 인식하게 되어서 더 크게 기억되기 때문. [36] 한국시리즈는 흥행을 위해 서울 연고 팀이 없는 경우에도 5,6,7차전을 잠실 야구장에서 개최한다. 다만 특수한 상황에서는 잠실에서 열리지 않을수도 있다. 한국시리즈 항목 참조. [37] 최초로 출범한 홈쇼핑은 바로 LG홈쇼핑이다. (현재는 GS홈쇼핑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38] 현재는 홍콩 국제공항 수완나품 국제공항으로 운항 중이다. [39] 장우혁 광팬의 닉네임 [40] 1997년 4월 1일에 실시된 시간제 정액제. PC통신 문서 참고. [41] 1998년 6월 서비스. [42] TVN enews에서 소개된 바 있다. [43] iMac G3는 1998년 8월 15일(미국)에 출시되었고 그것도 LCD가 아닌 CRT였다. [44] 97년 골든디스크 대상도 H.O.T.였고 98년에는 골든디스트를 제외한 타 시상식에서는 모두 H.O.T.가 수상했기 때문에 대부분 당연히 H.O.T.로 예상하고 있었다. [45] 오피스 2007과 인터넷 익스플로러 7은 2006년에 출시되었으며, 인터넷 익스플로러 8은 2009년에 출시되었다. [46] 촬영장소가 거의 다 서울이어서 이 부분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도봉구는 훗날 응답하라 1988의 배경이 된다. [47] IE7 베타는 2005년 7월에 배포됐다. [48] 실제 촬영하기도 빠듯할테고 사람도 굉장히 많은 곳이라 찍지 못한듯. 그 전에 부산종합버스터미널은 신축건물로 바뀌면서 장소가 동래구에서 금정구로 바뀌었다. [49] 아무래도 '才員' 이라고 생각하고 사용한 것 같은데 국어사전에는 없는 단어이다. 남성을 대상으로 지칭할 때는 '재자(才子)'가 옳은 표현이다. [50] 그러나 가끔 몇몇 루트로 학생이 교사용 지도서를 입수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아예 교사가 총애하는 학생에게 몰래 주는 경우도 가끔 있었고 헌 책방 혹은 폐지 수집 등에서 건져내는 경우도 있었다. [51] 부산 도시철도 2호선, 부산 도시철도 3호선이 개통한 지금도 거의 1시간 가까이 걸린다. [52] 이게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 동남 방언이 나왔기에 최소한 영남권이라는 건 알 수 있다. [53] 이때는 아직 Face ID같은 기술이 PowerBook이나 MacBook에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