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이츠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예이츠에 대한 내용은
예이츠(성씨) 문서 참고하십시오.
{{{#cd9f51 {{{#!wiki style="padding: 5px 0 0; margin:-5px -10px; background: linear-gradient(to right, #582d2d, #663334, #663334, #582d2d)"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25%; min-height:2em" {{{#!folding [ 20세기 ] {{{#!wiki style="margin:-5px -1px -5px; word-break:normal" {{{#555,#aaa |
<rowcolor=#cd9f51> 1901 | 1902 | 1903 | 1904 |
쉴리 프뤼돔 | 테오도르 몸젠 | 비에른스티에르네 비외른손 | 프레데리크 미스트랄 | |
<rowcolor=#cd9f51> 1904 | 1905 | 1906 | 1907 | |
호세 에체가라이 | 헨리크 시엔키에비치 | 조수에 카르두치 | 러디어드 키플링 | |
<rowcolor=#cd9f51> 1908 | 1909 | 1910 | 1911 | |
루돌프 오이켄 | 셀마 라겔뢰프 | 파울 폰 하이제 | 모리스 마테를링크 | |
<rowcolor=#cd9f51> 1912 | 1913 | 1915 | 1916 | |
게르하르트 하웁트만 |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 로맹 롤랑 | 베르네르 폰 헤이덴스탐 | |
<rowcolor=#cd9f51> 1917 | 1919 | 1920 | ||
카를 기엘레루프 | 헨리크 폰토피단 | 카를 슈피텔러 | 크누트 함순 | |
<rowcolor=#cd9f51> 1921 | 1922 | 1923 | 1924 | |
아나톨 프랑스 | 하신토 베나벤테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 | |
<rowcolor=#cd9f51> 1925 | 1926 | 1927 | 1928 | |
조지 버나드 쇼 | 그라치아 델레다 | 앙리 베르그송 | 시그리드 운세트 | |
<rowcolor=#cd9f51> 1929 | 1930 | 1931 | 1932 | |
토마스 만 | 싱클레어 루이스 | 에릭 악셀 카를펠트 | 존 골즈워디 | |
<rowcolor=#cd9f51> 1933 | 1934 | 1936 | 1937 | |
X | ||||
이반 부닌 | 루이지 피란델로 | 유진 오닐 | 로제 마르탱 뒤 가르 | |
<rowcolor=#cd9f51> 1938 | 1939 | 1944 | 1945 | |
펄 벅 | 프란스 에밀 실란패 | 요하네스 빌헬름 옌센 |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 |
<rowcolor=#cd9f51> 1946 | 1947 | 1948 | 1949 | |
헤르만 헤세 | 앙드레 지드 |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 윌리엄 포크너 | |
<rowcolor=#cd9f51> 1950 | 1951 | 1952 | 1953 | |
버트런드 러셀 | 페르 라게르크비스트 | 프랑수아 모리아크 | 윈스턴 처칠 | |
<rowcolor=#cd9f51> 1954 | 1955 | 1956 | 1957 | |
어니스트 헤밍웨이 | 할도르 락스네스 | 후안 라몬 히메네스 | 알베르 카뮈 | |
<rowcolor=#cd9f51> 1958 | 1959 | 1960 | 1961 |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 살바토레 콰시모토 | 생존 페르스 | 이보 안드리치 | |
<rowcolor=#cd9f51> 1962 | 1963 | 1964 | 1965 | |
존 스타인벡 | 요르기우스 세페리스 |
|
미하일 숄로호프 | |
<rowcolor=#cd9f51> 1966 | 1967 | 1968 | ||
슈무엘 요세프 아그논 | 넬리 작스 |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 가와바타 야스나리 | |
<rowcolor=#cd9f51> 1969 | 1970 | 1971 | 1972 | |
사뮈엘 베케트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 파블로 네루다 | 하인리히 뵐 | |
<rowcolor=#cd9f51> 1973 | 1974 | 1975 | ||
패트릭 화이트 | 에위빈드 욘손 | 하뤼 마르틴손 | 에우제니오 몬탈레 | |
<rowcolor=#cd9f51> 1976 | 1977 | 1978 | 1979 | |
솔 벨로 |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 오디세우스 엘리티스 | |
<rowcolor=#cd9f51> 1980 | 1981 | 1982 | 1983 | |
체스와프 미워시 | 엘리아스 카네티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 윌리엄 골딩 | |
<rowcolor=#cd9f51> 1984 | 1985 | 1986 | 1987 | |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 | 클로드 시몽 | 월레 소잉카 | 조지프 브로드스키 | |
<rowcolor=#cd9f51> 1988 | 1989 | 1990 | 1991 | |
나기브 마푸즈 | 카밀로 호세 셀라 | 옥타비오 파스 | 나딘 고디머 | |
<rowcolor=#cd9f51> 1992 | 1993 | 1994 | 1995 | |
데릭 월컷 | 토니 모리슨 | 오에 겐자부로 | 셰이머스 히니 | |
<rowcolor=#cd9f51> 1996 | 1997 | 1998 | 1999 | |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 다리오 포 | 주제 사라마구 | 귄터 그라스 | |
<rowcolor=#cd9f51> 2000 | ||||
가오싱젠 | ||||
}}}}}}}}}
- [ 21세기 ]
- ##
||<tablebgcolor=#663334><rowcolor=#cd9f51> 2001 || 2002 || 2003 || 2004 ||
}}}}}} ||
물리학 | 화학 | 생리학·의학 | 평화 | 경제학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word-break:keep-all" |
The Nation's Favourite Poet | ||||||||
※ 2009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 시민들과 평론가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웹사이트 투표를 바탕으로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시인 30명'을 선정 | |||||||||
TOP 30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T. S. 엘리엇 | 존 던 |
벤자민 제파니아
|
필립 라킨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W. B. 예이츠 | 존 베처만 | 존 키츠 | 딜런 토머스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사이먼 아미티지
|
W. H. 오덴 |
로버트 브라우닝
|
로버트 번즈 | 조지 고든 바이런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 웬디 코프 | 캐롤 앤 더피 | 토머스 하디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제라드 맨리 홉킨스 | 테드 휴즈 | 로저 맥거프 | 존 밀턴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크리스티나 로세티
|
스티비 스미스 |
알프레드 테니슨 경
|
|||||||
출처 | }}}}}}}}}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William Butler Yeats |
|||
|
|||
이름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W.B. 예이츠(W.B. Yeats) |
||
출생 | 1865년 6월 13일 | ||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더블린 샌디마운트 | |||
사망 | 1939년 1월 28일 (향년 73세) | ||
프랑스 공화국 망통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아일랜드|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시인, 극작가, 정치인 | ||
서명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묘소 | <colbgcolor=#fff,#1f2023>아일랜드 슬라이고주 드럼클리프 묘지 | |
사조 | 모더니즘, 상징주의, 낭만주의[1] | ||
민족 | 아일랜드인 | ||
학력 | 아트 & 디자인 국립대학 졸업 (1884~1886) | ||
활동 기간 | 1885년 – 1939년 | ||
종교 | 개신교[2] ( 성공회) | ||
역임 직위 | 아일랜드 자유국 상원의원 (1922~1928) | ||
소속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소속 단체 | 황금여명회 (1890~1900) | ||
부모 |
아버지 존 버틀러 예이츠 (1839~1922) 어머니 수잔 메리 폴렉스핀 (1841~1900) |
||
배우자 | 지오르지안나 하이드 리스[3] (1917년 결혼) | ||
자녀 |
딸 앤 예이츠[4] (1919~2001) 아들 마이클 예이츠[5] (1921~2007) |
}}}}}}}}} |
[clearfix]
1. 개요
|
아일랜드의 국민[6] 시인, 극작가.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중요한 대표적인 시인 중 한 명[7]이며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전 세계를 대표한 시인이다. 192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는데 아일랜드인 첫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1865년 6월 13일 더블린에서 태어난다. 예이츠의 아버지 존 버틀러 예이츠는 변호사였지만 나중에 초상화 화가가 되었다. 처녀시절 이름이 수잔 폴렉스펜인 어머니는 아일랜드 슬라이고의 부유한 상인의 딸이었다.사람들은 예이츠가 아일랜드의 압도적인 가톨릭교도 사이에서 강력한 소수를 대표하는 영국계 아일랜드인의 프로테스탄트 전통을 이어받은 인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런던에서 학교에 다닐 때도 아일랜드의 영상으로 가득 차 있어 자신을 이방인으로 느낄 정도였지만 아일랜드에서도 2가지 역사적 전통에서 분리된 채 있었다. 왜냐하면 가톨릭교도들과는 신앙을 공유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프로테스탄트들은 '출세만 생각하고 있는 듯해 보였기 때문이다'. 예이츠는 조너선 스위프트, 에드먼드 버크, 올리버 골드스미스,[8] 조지 버클리 같은 유명한 영국 문인들의 문학과 사상에 나타나 있는 18세기의 찬란한 프로테스탄트 앵글로아일랜드 전통을 존중했다. 그러나 이 전통은 이제 쇠퇴해가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시대가 부상하고 있는 것 같았고 그 시대는 가톨릭 전통에 유리하며 영어보다 아일랜드어로 표현되는 시대였다.
예이츠는 자신의 엄격한 예술적 취향과 조화시킬 수 있는 이 운동을 지지했지만 아일랜드가 영국 정부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것을 주창하는 애국단체에서의 그의 행동은 자주 애매한 것이었다. 예이츠는 그 두 아일랜드 사회 중 어느 한 곳에 자리를 잡기 전에, 자기 자신의 입장을 주목할 만큼 애매한 자신의 고국의 입장과 관련지어 명백하게 밝혀야 했다. 이러한 시도는 그의 시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최고의 희망은 가톨릭 전통이나 프로테스탄트 전통보다 더욱 깊은 전통을 계발하는 것이었는데 그 전통은 그리스도교보다는 더 이교도적인 성격을 띠며 아직까지 남아 있는 관습·신앙·성지 같은 인류학적 증거 속에서 널리 찾아볼 수 있는 숨겨진 아일랜드의 전통이다. 1886년부터 발표된 예이츠의 많은 수필과 평론들은 시기가 적당했으므로 진정한 아일랜드를 알려야겠다는 시도였다.
1867년 예이츠가 불과 2세였을 때 가족은 런던으로 이사했으며 그곳에서 아버지는 더블린에서 받았던 것보다 더 많은 수수료를 받기를 희망했다. 1880년 가족은 다시 더블린으로 돌아왔고 거기서 고등학교에 다녔다. 휴일에는 슬라이고에 있는 외삼촌 조지 폴렉스펜과 함께 지냈는데 이 슬라이고는 많은 시의 배경이 되었다. 예이츠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화가가 되려했다. 런던의 고돌핀 학교를 다녔지만 수재와는 거리가 멀었다. 성적표에는 “나쁘지 않은 수준, 다른 과목보다 라틴어에 능한 듯. 철자법에 매우 취약함.”이라고 기록됐다. 수학과 언어에서 쩔쩔 맸고 음치였다고 전해진다. 1883년 더블린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예술학교에 다녔으며 이곳에서 받은 교육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른 시인과 예술가들을 만난 것이었다. 또한 이때부터 오컬트에 관심을 보였고 그의 나이 17세에 “ 성자로 마법사 혹은 시인으로 삶”을 맹세하고, 그 약속을 평생 동안 진지하게 실천해 나간다.
2.2. 작가 활동
그동안 예이츠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 발표한 것은 2편의 짧은 서정시로 1885년 〈더블린 유니버시티 리뷰 Dublin University Review〉에 발표되었다. 같은 해에 예이츠는 비술(秘術)에 관심이 있는 단체, 즉 더블린 연금술 협회의 결성을 도왔다. 1887년 가족이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자 예이츠는 ' 신지학(神智學) 협회'에 가입했다. 이 협회는 신비주의를 통해 지혜와 형제애를 추구하는 국제적인 운동으로 점차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마술은 일상 세계에서 멀리 떠난 상상의 삶의 한 방식이었기 때문에 예이츠를 사로잡았다. 반면 그에게는 과학의 시대는 혐오스러웠으며 천문학보다 점성술에 훨씬 관심이 많았던 신비주의자로서 자신이 시적 영상으로 둘러싸였다고 주장했다.이때 윌리엄 블레이크의 예언서들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이런 모험은 플라톤 철학, 신플라톤 철학, 스베덴보리 신학, 연금술 등의 다른 신비주의 전통과 접촉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당시 예이츠는 이미 자긍심이 강한 젊은이였고 이런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취향과 예술 감각에만 의지하게 되었다. 자랑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 당시 그의 의지를 잘 드러나곤 했다. 〈오신의 방랑기 외(外) The Wanderings of Oisin, and Other Poems〉(1889)에 수록된 초기 시는 탐미주의 작품으로, 아름답지만 난해하며 사소한 문제로부터 해방되고 싶어하는 한 영혼의 외침이었다.
1889년 예이츠는 열정적이고 화려한 미모의 아일랜드 여인 모드 곤을 만났다. 그녀의 직업은 아일랜드 독립운동가였고 페미니스트였다. 그는 그 순간부터 "내 인생의 고뇌는 시작되었다"라고 기술했다. 예이츠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으나 그 사랑은 희망이 없는 것이었다. 모드 곤은 그를 좋아하고 존경했으나 사랑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열정을 아일랜드에 아낌없이 바쳤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목소리와 몸으로 몸소 구사하는 반항자이며 웅변가였다. 예이츠가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에 가담했을 때 부분적으로는 신념 때문이었으나 대부분은 모드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 시절 아일랜드에 대해 쓴 많은 글들은 모드를 향한 속삭임이었다. 1902년 더블린에서 희곡 〈캐슬린 니 훌리안 Cathleen ni Houlihan〉이 초연되었는데, 모드가 캐서린 역을 맡았다.
1891년 논쟁의 여지가 많은 아일랜드의 지도자 찰스 스튜어트 파넬의 급속한 몰락과 죽음 이후 예이츠는 아일랜드의 정계가 희망을 잃었다고 느꼈다. 정치가 남긴 텅빈 공간을 문학·예술·시· 희곡· 전설이 채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에세이집 〈켈트의 여명 The Celtic Twilight〉(1893)은 이런 목적을 향한 예이츠의 첫번째 노력이었지만 1896년 오거스타 그레고리 부인을 만날 때까지는 진전이 없었다. 그레고리 부인은 귀족으로서 극작가가 되었고 그의 한 친구가 되었다. 부인은 이미 서부 아일랜드 지방의 민간전승인 옛날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예이츠는 이 전승 지식이 고대 의식 및 자신의 감정과 기독교가 완전하게 파괴하지 못한 이교도 신앙에 대한 자신의 느낌과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 민간전승이 농촌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몰두하여 연구하면 사람들과의 명백한 관계를 증명할 수 있으리라고 느꼈다. 예이츠가 아일랜드의 민속을 엄격하고 고매한 문체로 표현하면 순수한 시를 창작할 수 있고 개인적인 용어로 그 자신의 정체성에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이상을 정치에 적용하면 농부와 귀족을 연결시키는 것인데, 즉 경험은 농부의 것, 문체는 귀족적인 것을 취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연결은 도시와 부의 산물인 미움받는 중산층을 비난하게 된 것이고 이것이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더라도 도덕적 효과는 가져올 것이다. 1897년부터 예이츠는 카운티 골웨이의 쿨파크에 있는 그레고리 부인 집에서 여름을 보냈고 쿨파크를 사라져가는 우아함의 세계와 결부시켰다. 그 공원이 농부들로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이 그 시각을 완벽하게 해주었다.
|
1911년의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
1899년 예이츠는 모드 곤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9] 곤은 예이츠의 문학적 이상을 이해하지 못했고 온건한 투쟁 노선을 따르지 않았다. 예이츠는 예술가였고, 곤은 사회 운동가였다. 예이츠는 쉰 살이 넘을 때까지 30년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청혼했지만 늘 거절당했다. 또한 이 시기에 예이츠는 『갈대숲의 바람』을 발표하면서 현대문학의 방법을 확립했다.[10] 4년 후 그녀는 아일랜드의 애국 동지이며 영국의 압제를 함께 증오하던 아일랜드 군인 존 맥브라이드 소령과 결혼했다.[11] 한편 예이츠는 시와 연극이 아일랜드 전 국민을 변모시킬 수 있으리라 믿고 문학과 희곡에 전념하며 문예 운동을 하였다.
그런 활동은 더블린에 그 유명한 애비 극장을 설립하면서 절정에 다다랐고 이 극장은 1904년 첫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아들과의 반목을 주제로 한 〈베일 해변에서 on Baile's Strand〉는 첫 상연 계획에 들어 있었다. 그후 수년 간 예이츠는 애비 극장의 일반적인 운영에 몰두해 있었다. 그 당시는 논쟁이 빈번한 시기였다. 그의 작품들은 비종교적이고 반 가톨릭적이어서 반아일랜드적이라고 비난받았다. 배우·제작자·신문 등과 논쟁도 잦았다. 1907년 존 밀링턴 싱의 〈서부의 난봉꾼 Playboy of the Western World〉의 초연 때는 극장 안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언제나 자긍심이 강하고 당당했던 예이츠는 논쟁시 만만찮은 투사였다. 그는 또한 과거의 상처를 빨리 잊지 못해 많은 사람의 미움을 샀으며, 중산층, 상인 및 대부분의 더블린 사람들처럼 인습적인 성공을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경멸했다.
현대의 시민들, 가톨릭교도, 프로테스탄트 등은 모두 예이츠가 영웅적 가치관에 호소한다는 사실을 자신들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했다. 점차 중산층의 관심사에서 멀어져갔고, 애비 극장도 생명력을 잃어가는 것 같았다. 애비 극장에서 상연된 많은 연극들이 그의 눈에는 천박하고 통속적인 것으로 보였다. 예이츠는 대중의 변덕에 의존하지 않는 다른 종류의 연극으로 마음을 돌렸다. 1913년 미국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의 비서로 일하며 서식스 주에 있는 스톤카티지에서 그와 몇 개월을 보냈다. 파운드는 그 무렵 일본의 고전극인 노(能)의 번역 원고를 교정하고 있었는데, 예이츠는 거기에 큰 자극을 받았다. 그 극들은 대중보다 조신들을 기준으로 한 귀족문화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었다.
점차적으로 노극에 해당되는 대응물로 간주될 수 있는 극들을 고안해냈는데 그것은 〈무희를 위한 4개 극 Four Plays for Dancers〉(1921)으로 극장에서뿐만 아니라 응접실에서도 상연될 수 있는 일련의 짧고 형식적인 극이었다. 예이츠는 이러한 연극들을 새로운 종류의 연극, 즉 말·가면·춤·음악, 모방이 아니라 상징적인 동작의 조화로 생각했다. 그 연극들은 상류 사람들, 즉 그런 형태의 장점을 즐기는 소수들에게만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다. 1916년 초연된 〈매의 우물에서 At the Hawk's Well〉는 그가 믿어왔던 많은 가치관을 구현한 작품이었다. 돈과 대중을 위한 부르주아 극장은 고대 그리스 연극이 일으킨 동정과 공포보다는 '신경질적인 흥분'의 장소일 뿐이었다. 이 시기에 예이츠가 관심을 가졌던 예술은 관객들을 잠시 동안이나마 '지금까지 너무나 미묘해서 우리가 들어가 볼 수 없었던 마음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도록 할 수 있는 예술이었다.
이러한 가치관은 아일랜드 생활의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존속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1913년 휴 레인 경이 수집한 39점의 프랑스 인상파의 그림 처리문제에 대해 벌어졌던 분쟁은 예이츠의 눈에는 사악한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레인은 그 그림들을 더블린 시립현대미술관이 한 화랑을 마련해 그것들을 전시한다는 조건 아래 기증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계획대로 되지 않자 레인은 화가 나서 런던의 국립미술관에 빌려주었고, 1915년 그가 죽자 두 미술관이 이 그림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1913년 예이츠는 이 논쟁에 개입했다. 왜냐하면 레인의 훌륭한 행동이자 귀족적 조치가 한 비천한 더블린인에 의해 능멸당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예이츠의 〈책임 Responsibilities〉(1914)에 실린 많은 시들은 레인 논쟁에 의해 고취된 작품으로 매우 통렬한 작품들이다. 이것은 예이츠와 아일랜드 관계의 새로운 국면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1907년 그레고리 부인과 함께 피렌체·밀라노·우르비노·페라라·라벤나 등지를 여행했고 이탈리아 마을과 도시들이 나타내는 귀족적 우아함의 증거를 결코 마음속에서 잊지 않았다. 1913년부터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즉 예의와 정중함을 존중하던 완전히 사라져버린 왕국에 대한 갈망이 그의 작품 속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1915년에는 영국에서 기사 작위를 수여했지만 단칼에 거절한다.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와 정치 |
한편 그는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로, 아일랜드가 아직 영국령이었던 시절에는 비밀 독립 운동 단체인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Irish Republican Brotherhood)'의 회원이었다. 그러나 1916년의 부활절 봉기 등 아일랜드 독립 투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정치 투쟁과 거리를 두었다.
2.3. 말년
1917년 예이츠는 모드 곤의 딸 이졸트 곤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몇 주 뒤 조지 하이드 리스에게 청혼해 1917년 결혼했다. 1919년 딸 앤이 태어났고 1921년 아들 윌리엄이 태어났다.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이 설립되어 예이츠는 아일랜드 상원의 새 일원이 되어달라는 요청을 수락했고 6년간 봉사했다. 1923년 12월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이 상을 받고 그의 시집들은 판매량이 급증하게 되며 전세계적인 유명한 인물이 되어 현대의 가장 탁월한 시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그는 아일랜드가 독립을 쟁취한 직후에 노벨상을 수상한 아일랜드인라는 상징적 가치를 알고 있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이 이 상을 받았다고 강조하려고 노력했다. 그에게 보낸 많은 축하 편지에 대한 그의 답장은 "나는 이 영광이 아일랜드 문학의 대표자로서보다 개인으로서 나에게 덜 다가왔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유럽이 자유국에 온 것을 환영하는 일부분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명예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상상력, 역사, 비술의 관계에 쏠려 있었다. 그는 그의 생각을 한 위대한 책, 즉 예술에 관해 신성시될 만한 책으로 재현하고 싶었다. 그 결과 1925년 〈비전 A Vision〉의 초판이 출간되었다. 그러나 예이츠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몇 년 간 계속적으로 연구하여 1937년 결정판을 냈다. 노벨상을 받고도 안주하지 않고 그의 시는 날이 갈수록 기량을 더해가고 있었다. 〈탑 The Tower〉(1928)은 그가 고트에서 구입한 무너진 노르만 성의 이름을 따서 붙인 제목으로 그의 작품 중 가장 도도한 것 중의 하나이며 매우 노련한 예술가의 작품이다. 그 작품 속에는 일생의 경험이 완벽한 형태로 구사되어 있다. 그렇지만 예이츠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그 뒤에 씌어진 〈나선층계 The Winding Stair〉(1929)로 나왔다.
|
노년의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
예이츠는 60대 후반에 이르러서도 계속 작품을 썼다. 그의 감정은 예전처럼 강렬했지만, 이 시기의 시는 대부분 상상력의 병적인 흥분 때문에 손상되었고 현실과 정의 사이의 균형도 불안정했다. 세계는 산산 조각나는 것 같았고, 예이츠는 그것을 혐오했지만 자주 세상의 몰락에 매혹되기도 했다. 귀족적 스타일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독재적인 이데올로기에 빠져 말년에는 파시스트라는 비난을 받았다. 자신이 존중해온 가치관이 파괴되고 있다고 느끼며 예이츠는 그 가치들이 위대한 인물, 즉 강력한 지도자에 의해 구출될 수 있다고 상상했다. 예이츠는 활력과 독재주의적인 명쾌함 때문에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를 지지하기도 했다. 산문으로 된 소책자 〈보일러에 관하여 on the Boiler〉(1939)에서 자신의 분노와 절망을 부패한 세상에 토로했다. 이것으로 인해 그는 정치 권력을 갈망하며 그 권력을 갖게 되면 폭력적으로 사용하리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예이츠의 분노는 시인의 분노였고 삶에 대해 갖고 있던 시각은 시인의 시각이었다. 그는 단지 도덕의 힘, 즉 어떤 위대한 상징들이 만들어내는 힘을 원했다. 그는 아일랜드 자유국 상원의원으로서 정치적 권력을 실질적인 것에 쏟았다. 즉 검열, 레인의 그림들, 건강 보험, 이혼, 아일랜드어, 교육, 저작권 보호, 아일랜드의 국제연맹 가입 문제 등에 관심을 가졌다. 상원의 화폐위원회 의장이기도 했다.
예이츠의 말년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의 건강은 좋지 않았고 그래서 아일랜드의 습한 겨울을 피해 여행을 다녔으나 은퇴하지는 않았다. 1930년대의 폭력이 끝내 전쟁을 몰고올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한편으로는 그 전망에 두려워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매혹되었다. 그는 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의 군대의 행진소리가 사랑·예술·미·예의범절의 주제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그 시절 예이츠의 삶의 감각은 계시적인 것이었다. 가끔 그는 두려워 그 계시로부터 도망치기도 했으나 또 어떤 때는 그 계시에 동조했다. 1936년 자신이 사랑했던 시이며 대부분 자기 친구들이 쓴 시모음집 〈옥스퍼드 현대시 모음집 1892~1935, Oxford Book of Modern Verse 1892~1935〉가 발간되었다. 여전히 그의 마지막 연극 작품들을 쓰면서 예이츠는 그의 시 중 가장 귀에 거슬리는 시 〈헌의 알 The Herne's Egg〉을 1938년 완성했다. 생애 마지막 2년동안 예이츠는 남프랑스의 이데알세주르에서 요양하며 창작에 온 힘을 기울였다. 죽기 직전까지 창작열이 불타올라 『연옥』을 탈고했다.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묘지 |
그 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그는 외국 프랑스에서 사망한다. 아일랜드에 매장하기 위한 최종적인 준비는 성사될 수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의 로크브륀에 묻혔다. 그의 시신을 슬라이고에 매장하려는 의도는 1939년 가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좌절되었다. 1948년 그의 시신은 슬라이고로 결국 넘겨져서 드럼클리프에 있는 작은 개신교 교회 묘지에 매장되었다. 이곳은 그의 〈마지막 시집 Last Poems〉(1939)에 수록된 시 〈벤 블벤 아래에서 Under Ben Bulben〉에 명시된 장소로 그의 묘 비문에는 자신이 직접 썼던, "삶과 죽음을 냉정히 바라보라. 그리고 지나가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3. 문학적 특징
|
|
예이츠의 작품세계는 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는 『현실이란 무엇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영혼은 과연 존재하는가』라고 집요하게 물으며 그의 철학을 시에 녹여냈다.
초기의 에이츠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인간의 물질화를 가져온 과학주의, 실증주의 철학에 염증을 느끼고 신플라톤주의 철학 같은 신비사상에 몰입하여 아일랜드의 영웅담에 바탕을 둔 초자연적인 세계, 몽환적인 낭만적 세계를 노래하였다. 그러나 점점 예이츠의 시는 구체적인 현실 세계의 모습을 보이며 예이츠 자신도 시 쓰기보다는 아일랜드 문예부흥 운동과 같은 현실사회에 참여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었다. 후기의 예이츠의 시는 기독교 전통신앙의 붕괴와 혼탁한 물질 문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인류의 미래와 새롭게 다가올 문명의 탄생에 대한 비젼 등을 담고자 했다. 특히 예이츠 시의 중요한 주제는 현실과 이상, 육체와 영혼, 생명과 죽음, 인생과 예술 사이의 양립할 수 없는 이원화된 세계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의 비극적 조건과 시를 통해 이러한 대립적 모순적 인간의 조건에 대한 통합적 비젼을 제시하는데 있다.
예이츠가 시인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1870년대는, 세기말 문학의 전형적 특징인 환상 세계에 대한 추구와 과도한 감정 표출 등이 영국 시단을 풍미하던 시기였다. 19세기 초반까지 문단의 주요 흐름으로 자리 잡았던 낭만적 서정성은 이즈음 현실을 초월한 이상주의와 자아 존중의 개인주의와 결합해서, 세기말의 퇴폐적 댄디즘을 선전하는 도구로 전락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서 예이츠는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낭만주의의 전형적인 특징인 서정성을 자신의 시 작품들과 극시들을 통해 구현하여, 낭만주의의 정통성을 잇는 시인으로 영국 시단에 등장했다. 그래서 최후의 낭만주의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여기에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아일랜드의 풍경을 작품의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보다 더 그의 서정성을 강화하는 것은 시 작품 전반에 흐르고 있는 정서의 특징이다. 19세기 후반기까지 예이츠가 쓴 대개의 작품을 관통하는 것은 시적 화자의 아스라한 그리움의 표출이다. 작품의 소재가 아름다운 여성이든 자연의 풍광이든 간에, 그 대상 너머 어떤 것에 대한 아련한 동경이나 애틋한 그리움 또는 떨쳐낼 수 없는 정서의 잔영을, 시의 화자는 소중한 보물을 조심스럽게 다루듯 한 행 한 행에 풀어내 보인다. 그래서 한 작품을 읽고 나면 독자의 뇌리에서 그 작품의 주제는 뒤로 밀리고, 다만 화자의 대상에 대한 느낌과 태도가 크게 자리 잡는다. 여기에는 예이츠가 20대 초반에 만난 모드 곤(Maud Gonne)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의 좌절에서 온 절망감이 작용하고 있는데, 모드 곤에 대한 사랑의 체험은 그의 작품의 중심 정서를 형성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드 곤은 예이츠의 인생에 걸쳐 뮤즈로서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예이츠는 사실 모드 곤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52세에 그의 부인이 된, 자신보다 27세 어린 조지 하이드 리스(Georgie Hyde-Lees)의 이름 표기는 원래 Georgie Hyde-Lees였으나 나중에 George Hyde-Lees로 바뀐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예이츠의 뮤즈, 모드 곤 |
예이츠의 시는 후기로 갈수록 더 강력하고 자유로워졌다. 결혼해서 가정을 이룬 후에도 그의 시 속에 다뤄지는 아름다움이나 열정은, 그것이 사랑과 관련된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간에, 늘 모드 곤과 관련되어 전개된다. 이는 그 자신이 창작하고 무대에 올렸던 극작품에 모드 곤을 주연으로 출연시키는 등의 활동으로 구체화되기도 하고, 여러 시 작품에서는 곧잘 영원한 아름다움을 표상하는 장미라든가 손에 잡히지 않는 요정이나 바람 또는 아일랜드 신화 속의 영웅적인 여성 인물들에 대한 신화화 등으로 대체되어 나타난다.[12] 이러한 시적 특징들은, 그가 30대에 들어서는 20세기 초반기에 이르러, 간결한 스타일 속에 보다 더 현실에 가까이 내려섬으로써 극적 변화를 겪는다. 물론 이러한 변화에는 모드 곤이 갑자기 다른 남성과, 그것도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군인과 결혼한 사건이라든가 어머니의 죽음 등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시인으로서 스스로 새로운 변화를 적극 수용해야 할 만큼, 시대는 바야흐로 19세기의 여러 증후들을 벗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빠른 속도로 유럽의 문학과 예술 전반에 걸쳐 일어나고 있던 모더니즘 열풍이었다. 예이츠도 이미 극작품을 쓰고 공연할 뿐만 아니라 무대 공연의 여러 작업들을 경험한 바 있어, 과거 낭만적 태도로 현실을 버텨내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인으로서 그는 이미 프랑스 상징주의에서 빌려온 상징의 압축성과 다면성, 그리고 간결한 문체가 가져오는 시적 긴장성의 고양 등을 그 자신의 작품에서 구현해 내고 있었다. 이러한 형식상의 변화를 통해 예이츠는 시인으로 인정받기 시작하기 이전부터 줄곧 관심을 기울여온 현실과 이상,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 실제와 예술, 삶과 죽음 등등 서로 상반되는 것들의 이상적 화합 상태를 시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그 상태는, 서로 상반되는 것들이 마치 ‘춤꾼과 춤 자체’가 서로 떼어낼 수 없는 것처럼, 또는 밤나무의 가지 뿌리 꽃 등이 모두 합쳐져 밤나무가 되는 것처럼, 서로 떼어낼 수 없이 존재하는 상태다. 이러한 이원적 요소들의 분리불가의 성격을 시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예이츠의 시 작품들은 그의 초기 낭만적 서정성이나 환상성과 더불어 20세기 전반기 영국 시의 한 축을 예시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문학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창작력이 오래 지속되었다. # 1923년, 그가 아일랜드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당시 예이츠의 나이는 58세였다. 그가 아일랜드 문학의 발전에 세운 공헌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셈이다. 그런데 당시 예이츠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은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예이츠의 최고작으로 평가받는 작품들은 그가 노벨상을 받은 이후인 60대에 쓴 것들이다. 예이츠는 흔히 에즈라 파운드[13][14](Ezra Pound, 1885~1972), T. 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 1888~1965) 등과 함께 모더니즘 시인으로 분류된다. 사실 나이로 따져보면 1865년생인 예이츠는 1885년생인 파운드나 1888년생인 엘리엇보다 엄연히 윗세대의 시인이다. 연배 차이에도 불구하고 예이츠가 모더니스트로 분류되곤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가 자신의 최고작을 발표한 시기가 모더니즘의 시대(1900년~1945년)와 맞물리기 때문이다. 한 예술가가 이토록 오랜 기간 동안 창작력을 구가하는 경우는 문학사에서 전례를 찾기 어렵다. 예이츠보다 앞선 세대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1850)만 하더라도 최고작들은 청년기에 발표된 것들이었고 중년이 되면서 창작활동에 뚜렷한 쇠퇴가 엿보이는 반면, 예이츠는 노벨상을 받은 이후에 오히려 전작들을 뛰어넘는 작품들을 남겼으니 말이다.
비평가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시가 좋아진다고 말한다. 하버드 대학교 영문학 교수 스테파니 버트[15]는 "재독을 하는데 이렇게 잘 보답하는 시인은 거의 없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미국의 시인 테스 겔러거[* [[레이먼드 카버의 배우자다.]는 "저는 그의 시가 오늘날에도 얼마나 잘 읽혀지는 정말 놀랍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서정적이고 신비로운, 그런 시인의 명상만이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은밀한 힘에서 술을 마시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예이츠는 일제강점기부터 알려져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줬다. 대표적으로 김소월의 < 진달래꽃>에 영향을 준 시인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김소월의 스승이었던 김억을 통해 예이츠의 낭만적 시 작품들이 번역 소개되어 일찍이 대한민국의 서정시에도 주요한 영향을 주었다. 또 김수영에게도 많은 영향을 줬다. # 이러한 이유로 예이츠의 환상적이고도 낭만적 정서가 주를 이루는 작품들만 우리 독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어, 한국에서 예이츠는 낭만적 서정 시인으로 인식되고 있다.
- 현실성과 정의
모든 위대한 예술과 마찬가지로 예이츠의 작품은 각 세대와 함께 스스로를 새롭게 하고 있으며, 예이츠가 계속해서 많은 세대들에게 가장 강하게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전쟁으로 고민하는 시인과 시민적 반대에 부딪혀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예이츠를 처음 읽은 시인 테스 갤러거는 "그는 정치적이었고, 자신의 조국과 자유에 대한 대가를 걱정했으며, 그 대가를 국가가 된 것에 대해 걱정했다"고 말한다. 시인 아너 무어는 혼란스러운 1968년에 새로운 이해로 읽힌 시로 "두 번째 오는 것"을 가리킨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제2차 세계대전이 있을 줄 모르고) 글을 쓰고 있었다"고 적었다. 그는 "20대 초반이던 나와 다른 많은 사람들은 '최고의 확신은 부족하다/최악의 강렬함은 정열적인 강렬함으로 가득 찬다'는 이 대사들의 정확성에 뼛속까지 얼어붙었다. 형언할 수 없고 무시무시한 짐승, 그 '태양과 같은 시선과 공백과 무자비'. 예이츠는 한때 예술의 목적이 "단일한 사상적 현실과 정의 속에 붙잡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의 새로운 컬렉션인 Station Zed는 레바논, 소말리아, 이라크, 리비아에서 언론인으로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시인 톰 슬레이는 말한다. "당신은 그런 것을 읽고, 이라크와 같은 나라의 딱딱한 사실에 적용하고, 그것이 당신에게 온갖 감정적인 엽록체로부터 예방 접종을 해 주는 겁니다."
- 혼돈으로부터의 명령
예이츠는 인간의 비극에 정면으로 맞섰지만 그의 피실험자들만이 아니라 그의 형태도 증명되었다. "그는 항상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었다"고 스탠포드 대학의 창의적 글쓰기 프로그램을 가르치는 더블린 태생의 시인 에반 볼랜드가 말한다. "예이츠는 20세기 서정시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는 특히 후기 작품에서 스탠자의 [임무]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서정적인 페르소나를 19세기 말엽에 부드러운 집중력과 감상적으로 성장시킨 페르소나라는 새로운 방법으로 이용할 수 있게 했다.볼란드는 "예이츠의 주요한 유산이자 시를 읽거나 쓰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이츠의 주요한 유산과 본보기는 그의 후기 작품에 대한 강박적으로 인간적인 증거"라고 말하는데, 이는 2세기 동안 그리고 꽤 간단히 나이를 먹는 것의 산물이다. "초창기 시에서 영웅주의와 강인함을 자축한 시인으로서 이러한 변화는 후기 시에서 매혹적인 성장의 호로 변모한다. 그는 점점 시인이 줄고 점점 늙어가는 사람이었다. 이 무적의 시인과 연약한 인간의 결합은 낭만주의와의 급진적이고 전복적인 결별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강인하고 설득력 있고 믿을 수 있는 새로운 가사를 만들었다. 그 업적의 날씨와 함께 우리는 아직도 시문가와 독자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인, 평론가, 하버드 교수인 스티븐 버트는 예이츠를 지금도 시인들에게 좋은 모델이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신화에 대한 통로와 근면하고, 의식적인 공예의 모델, 사생활을 소중히 여기는 명백한 정치 시인, 어떤 면에서는 퇴보, 어떤 면에서는 초현대적인" 등 모순된 많은 방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4. 오컬트
|
출처: 예이츠, 시인 겸 마법사
예이츠는 철저한 불가지론자였던 아버지의 세계관에 만족하지 못하고 청년 시절부터 신비철학, 아일랜드의 신화와 민담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두 가지의 의미 있는 사건이 그가 스무 살이던 1885년에 일어났다. 대학 교지에 처음으로 자신의 시를 게재한 것이 첫째였고, '더블린 헤르메틱 소사이어티(The Dublin Hermetic Society)'라는 단체를 설립한 것이 둘째였다. 당시 학교 급우였던 찰스 존스턴(Charles Johnston), 조지 윌리엄 러셀(George William Russell))과 함께 설립한 이 단체는 처음에는 신비학 전반을 연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예이츠를 비롯한 회원들이 신지학자 모히니 채터지(Mohini Chatterjee, 1858~1936)를 만나고는 이듬해 더블린 헤르메틱 소사이어티는 신지학회의 더블린 지부로 바뀌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신통치 않자 예이츠 가족은 새로운 기회를 찾아 더블린을 떠나 런던으로 이주했다. 예이츠는 때를 놓치지 않고 런던에 있던 신지학회에 가입하여 헬레나 블라바츠키(Helena Petrovna Blavatsky, 1831~1891) 여사를 만난다. 예이츠는 주기적으로 블라바츠키를 만나 신지학에 대해 많은 것을 익혔다. 예이츠의 오컬트에 대한 관심을 폄훼하는 이들은 그가 블라바츠키 등의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추종했던 것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예이츠가 신지학회에 가입한 이후의 활동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이츠는 기본적으로 회의주의자였다. 자신만만하고 지적인 청년이었던 그는 자신이 직접 시험해보지 않은 것들은 쉬이 믿지 않았다.
예이츠는 블라바츠키의 진실성부터 그의 가르침이 실질적으로 적용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까지 모든 것에 거침없이 의문을 제기했다. 신지학회 내부에서 충돌도 잦았다. 논쟁하기 좋아하며 가끔 거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성격도 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예이츠는 가입한지 2년 후인 1889년에 신지학회를 탈퇴한다. 예이츠와 오컬트의 관계에 대해서 깊은 연구를 한 수전 그라프(Susan Graf) 박사는 그가 신지학회를 탈퇴한 이유에 대해 "신지학회의 가르침에 의문을 표하는 실험을 하여 논란을 일으켰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썼다. 예이츠는 22세이던 1887년, 대영박물관에서 맥그레거 매더스(Samuel Liddell MacGregor Mathers, 1854~1918)라는 신비학 연구가를 만난다. 매더스는 독일어와 라틴어, 히브리어 등으로 쓰여진 카발라 및 마법 관련 서적들을 처음으로 번역하여 영어권에 소개하는 공헌)을 세운 인물로, 예이츠에게 자신을 비롯한 세 명의 신비학 연구가들이 갓 창설한 단체에 가입할 것을 권한다. 1890년 3월, 예이츠는 매더스의 초대에 응해 그의 단체에 정식으로 입회했다. 바로 20세기 신비학의 융성에 신지학회 못지않은 공헌을 했으며 서구 마법의 역사를 논할 때 결코 빠지지 않는 ' 황금여명회(Hermetic Order of the Golden Dawn)'였다. 황금여명회에 입회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 등을 표현하는 각자의 모토를 선택하곤 했다. 예이츠는 "Demon est Deus inversus"를 자신의 모토로 선택했는데 이 문구는 예이츠에 대한 큰 오해 하나를 낳았다. 통상적으로 이 모토는 '악마는 신의 다른 이름이다' 등으로 해석되곤 했는데 때문에 예이츠가 황금여명회에서 악마숭배를 했었다는 지적이 숱하게 나왔다.
그러나 수잔 그라프는 라틴어에서 악마를 의미하는 단어는 demon이 아닌 diabolus이며 inversus는 역, 반전을 뜻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demon의 라틴어 원형은 daemon으로 직관이나 통찰력, 영감을 제공하는 ‘정령’을 뜻한다. 이 정령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과 대화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여겨졌다. 이 라틴어 단어의 근원이 되는 그리스어가 바로 다이몬(daimon)이다. 평론가이자 시인인 버지니아 무어(Virginia Moore)는 예이츠에 대한 평론서 <유니콘: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현실 추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소크라테스가 내면의 소리라는 뜻으로 썼던 '다이몬'은 양심, 보다 높은 차원의 자아, 본인과 연결된 어떠한 신 등으로 다양하게 풀이되었으며 결코 사악한 존재를 의미하지 않았다. 따라서 예이츠가 의미한 바는 분명하다. 여기서 다이몬은... 그에게 ‘지구의 반대편’에 속해 있는 수호령(tutelary spirit)을 의미했다." 황금여명회 사상의 근간이자 예이츠의 시적 심상에도 큰 영향을 끼친 크리스천 카발라에 비추어 보면 "지구의 반대편"이라는 표현이 뜻하는 바는 더욱 분명해진다. 지구, 다시 말해 세상은 신의 빛의 가장 타락한 곳이고, 지구의 반대편은 신의 빛이 시작된 근본의 자리, 바로 신의 세계를 뜻한다. 따라서 예이츠의 '데몬' 또는 '다이몬(예이츠는 산문집 <달의 친절한 침묵(Per Amica Silentia Lunae)>에서는 그리스어 원형인 daimon을 사용한다)'은 악마가 아니라 인간과 신을 매개하는 수호령을 말하는 것이다.
루이지애나 주립대의 제임스 올니(James Olney)의 설명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저서 <뿌리와 꽃: 예이츠와 융의 영원철학(The Rhizome and the Flower: The Perennial Philosophy—Yeats and Jung)>에서 예이츠의 다이몬 개념이 플라톤에게서 유래한다고 분석한다. <파이돈>, <국가>, <향연>, <티마이오스>와 같은 대화편에서 플라톤이 언급하는 다이몬은 천계와 지상 사이에서 사는 작은 신들을 의미한다. 영어에도 이와 비슷한 단어가 남아 있다. 흔히 ‘램프의 요정’을 의미하는 '지니(genie)'이다. 이 단어는 천재성이나 재능 등을 뜻하는 genius와 연결된다. 비범한 재능, 천재성은 어떠한 정령이 신의 세계로부터 선택된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것이라는 믿음이 이 단어에 남아 있다. 예이츠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예이츠에게 예술 창작의 원동력은 이러한 신적 존재와 연결되어 얻는 영감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영감이 떠오를(예이츠의 관점에서는 '전달될') 적절한 순간을 기다렸지만, 예이츠는 영감을 받기 위해 직접 움직였다. 황금여명회에서의 활동은 바로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는 황금여명회의 마법을 연마하면서 투청(透聽, clairaudience), 투시(透視)를 경험했고 영적 존재들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 메시지들은 종종 시의 소재가 되곤 했다. 예이츠는 1892년에 동료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법과 신비학이 자신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제가 마법을 꾸준히 공부하지 않았다면 제 블레이크 책(예이츠는 블레이크 전집 발간에 관여했으며 그 과정에서 블레이크의 미공개 시를 발견하기도 했다)에 단 한 단어도 쓰지 못했을 것이며 <캐슬린 백작부인>5)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비의 삶은 제가 생각하고 쓰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의 중심에 있습니다. (...) 저는 항상 제 자신을 지성에 대한 영성의 반란과도 같은, 이제 막 세계에서 시작되고 있는 위대한 르네상스의 목소리라고 여겼습니다." 예이츠가 황금여명회에 입회한 이후 10년은 작가로서의 삶에서 가장 창작열이 왕성했던 시기였다. 평단이 이 시기의 작품을 최고로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이츠는 이 시기에 많은 작품을 썼으며 자신의 젊음과 샘솟는 영감의 희열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것이 진정한 마법의 효력이든 자기최면에 의한 암시 효과이든 간에, 예이츠는 시상을 떠올리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예이츠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바야흐로 영성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여겼고, 새 시대의 산파역을 하는 시인이자 사제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1900년, 20세기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파국이 시작되었다.
예이츠는 샘솟는 영감을 만끽했지만 행복한 시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악명 높은 마법사 알레이스터 크로울리(Aleister Crowley, 1875~1947)가 조직의 균열을 가져왔고 황금여명회는 곧 공중분해된다. 환멸과 개인사의 슬픔이 더해져 예이츠는 한동안 창작의 활력을 상실했다. 이후의 10여 년은 잃어버린 창작력을 되찾기 위한 고투의 시기였다. 일주일 간격으로 자신이 사모하던 여성과 그녀의 딸에게 청혼을 하는 기이한 행동을 하기도 했지만 예이츠는 결국 현명한 아내를 만났고, 자신의 창작력을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부활시켰다.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면 예이츠는 아내와 함께 섹스마법을 실행하면서 창작의 새로운 활력을 얻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5. 저작
-
「자서전」 - 「비극의 세대」 중
이 구절은 일본 만화 「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와 노래「 잔혹한 천사의 테제」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테판 말라르메의 다음에,
폴 베를렌의 다음에,
귀스타브 모로의 다음에,
퓌뷔 드 샤반의 다음에,
우리들의 시구 다음에,
우리의 모든 미묘한 빛깔과 신경질적인 운율,
희미하게 섞인 콘데르의 엷은 색조 다음에 무엇이 더 가능하겠는가?
우리 다음은 야만적인 신이 있다.
After Stéphane Mallarmé,
after Paul Verlaine,
after Gustave Moreau,
after Puvis de Chavannes,
after our own verse,
after all our subtle colour and nervous rhythm,
after the faint mixed tints of Conder,
what more is possible?
After us the Savage God.
6. 그에 대한 말들
If ever there was an oeuvre that can take a hammering, that's even daring you to have a go at it, it's Yeats's
예이츠의 작품들은 독자들의 도전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를 부추기는 면이 있기까지 하다.
― 셰이머스 히니
예이츠의 작품들은 독자들의 도전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를 부추기는 면이 있기까지 하다.
― 셰이머스 히니
가장 아름다운 시의 일부.
― W. H. 오든 #
― W. H. 오든 #
예이츠는 오늘날
윌리엄 셰익스피어,
새뮤얼 존슨[17],
에밀리 디킨슨이 중요한 방식으로 중요하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영어의 매개체가 페이지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예이츠는 오늘날 영어로 글을 쓰는 모든 시인에 영향을 미쳤다. 예이츠는 지난 세기에 걸쳐 서정시를 재현했다. 그는 수세기 동안 어떤 사람의 결혼이나 출생, 대관식이나 죽음에 관한 시인 이 시의 더 작고 더 얌전한 개념을 받아들여 우리 언어에서 가장 진지하고 가장 중심적인 종류의 시로 변화시켰다
― 제임스 론젠바흐 (미국 문학 비평가) #
― 제임스 론젠바흐 (미국 문학 비평가)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 중 한 명으로 널리 여겨진다. 예이츠는 그의 많은 시와 연극에서 아일랜드의
전설과
영웅들을 등장시키며 그의 문화적
뿌리를 유지했다. 그는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이미지를 고수하는 데 있어서 마찬가지로 확고했다. 이러한 확신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엘리트주의라고 비난하게 만들었지만,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의 위대함에 기여했다. 아마도 다른 어떤 시인도 예이츠처럼 당당히
한 민족과
국가를 대표할 수 없었으며 그의 시는 오늘날
영어권 세계 전역에서 널리 읽혀지고 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시에서 울려 퍼지는 보편적인 언어로 자신의 삶의 지역적 관심사를 구현하여 변혁시키려 했던 시인이었다. 그의 상당한 운율과 시적 표현력에 의해 강화된 그의 빛나는 수사학적 업적은 독자들로부터 폭넓은 찬사를 받았고, 특히 W. H. 오든, 스티븐 스펜더, 시어도어 로스케,[18] 필립 라킨[19] 등 동료 시인들로부터 폭넓은 찬사를 받았다. 시간이 지나도 그의 업적이 줄어들 것 같지 않다.
― 미국 시 재단 #
― 미국 시 재단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만큼 그의 나라와 국문학에 독특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준 20세기 시인은 없을 것입니다. 예이츠의 다양한 스타일과 주제들은 그가 살았던 변화하는 세계를 반영했고 그를 따라온 작가 세대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한때 "그의 생각을 통일로 망쳐놓고 싶다"고 원했지만, 그의 최고의 글은 삶의 완전한 복잡성을 끌어들이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 갈등과 이념적 모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939년 그가 사망할 당시 예이츠는 아일랜드에서 전국적인 사랑을 받은 인물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주요 문학인물이기도 했습니다.
― 미국 시 재단 #
― 미국 시 재단 #
그 거친 아일랜드 사람. 나는 그의 언어 사랑, 그의 흐름을 정말 사랑했다. 그의 혼란스러운 생각은 시인에게 딱 맞는 것 같았다. 열정! 그는 항상 옳은 편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시를 썼다.
― 치누아 아체베[20] #
― 치누아 아체베[20] #
나는 위대한 시는 역사상 그 시점에서 시인의 언어를 가장 흥미롭고 복잡하게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제 거의 100년 된 예이츠와 같은 시인을 읽으면 더욱 흥미진진하게 된다. 그리고 아마 아무도 그것을 능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다이앤 와코스키[22] #
― 다이앤 와코스키[22] #
셰익스피어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예이츠는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것은 그의 주제이기도 했고 또한 나는 그가 그의 개인적인 삶을 선보이는 방식에 정말 감탄했어요.
― 레너드 코헨[23] #
― 레너드 코헨[23] #
7. 여담
-
그의 대표적인
초상화들.
1900년 | 1907년 |
1907년 | 1908년 |
-
국내에 알려진 대표작으로는 <
재림(The Second Coming)>, <하늘의 융단(He Wishes For The Cloths Of Heaven)>, <이니스프리의 호도(The Lake Isle of Innisfree)[24]>가 있다.
- 국민 시인답게 아일랜드 여권 속 표지에는 모허 절벽과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로 장식되어 있다. # 또한 아일랜드에서 고등학교 시험문제의 자주 나오는 단골 손님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기말고사를 위해 영어를 공부하는 동안 그의 시의 일부를 공부한다.
- 1999년 아일랜드인이 뽑은 가장 좋아하는 시에서 상위 10위 중 그의 시만 무려 6개였다. #
- 라디오가 대중화될 때까지 살아서 육성을 남겼다. 시 3수 낭송
- 불교, 인도 철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우파니샤드와 일본의 노극을 통하여 선불교를 수용하기도 했다.[25] 또한 청년기부터 인생의 말년까지 인도인들과 각별한 친분을 맺는다. 러셀(George Russell(AE))과 존스턴(Charles Johnston)과 더불어 인도의 채터지(Mohini Chatterjee)와 친분을 맺고, 1912년에는 타고르[26](Rabindranath Tagore)의 『기탄잘리』(Gitanjali )의 서문을 쓰고, 그리고 1932년에 스와미(Purohit Swami)의 전기 『인도의 승려』(An Indian Monk), 1934년에 함사(Bhagwan Shri Hamsa)의 『성스러운 산』(The Holy Mountain), 1938년에 파탄잘리(Bhagwan Shri Patanjali)의 『 요가』(Aphorisms of Yoga)의 서문을 쓴다. 그리고 『10편의 중요한 우파니샤드』(The Ten Principal Upanishads)를 스와미와 더불어 영역하고 그 책의 서문을 써서 1937년에 발간한다.[27]
- 그는 어린 시절부터 요정 이야기를 듣고 자라서면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실재를 믿었고, 켈트의 정신이 담겨 있는 민담, 신화, 전설을 수집하고 편집하고 분류하고[28], 그것을 묶어 주를 달아 『아일랜드 농부의 요정담과 민담』을 출판하고, 그 일의 연속작업으로 철학서인『비전』[29]을 발표한다.[30]
- 거의 모든 시가 번역된 몇 안되는 서구권 시인이다.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에서 그의 모든 시를 번역했다. 1권, 2권, 3권으로 주제별로 나눠졌다.[31] 원문도 비교적 어렵지 않고 한국어로 번역된 시도 예이츠 특유의 감성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한국인의 감성과 맞는 시인이기도 하다.[32]
- 시대를 초월한 특유의 감성과 깊이로 오늘날에도 많은 서구권 대중들이 선호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 서구권의 유명 시인이다보니 그의 시는 많은 책과 대중매체에서 자주 인용된다. #
- 대표적인 책은 치누아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조안 디디온의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 필립 로스의 '죽어가는 짐승', 코맥 매카시의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33]', 레이 브래드버리의 '태양의 황금 사과' 등이 있다.
- 대중음악에는 루 리드의 라이브 앨범 'Take No Prisoners', 조니 미첼의 앨범 'Night Ride Home', 밴 모리슨의 앨범 'A Sense of Wonder' 등이 있다. 또 영국 밴드 워터보이즈는 앨범의 테마를 예이츠의 시로 만들기도 했다.
- 영상매체중 대표적인 드라마로는 레프트오버, 바빌론 5,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 소프라노스 등이 있고, 영화로는 올리버 스톤의 작품 월 스트리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페기 수 결혼하다, 데이빗 휴 존스의 84번가의 연인, 프랭크 마셜의 콩고, 스티븐 스필버그의 A.I. 등에서 언급된다.
- 제임스 조이스와 알고 지낸 사이다. 조이스가 20살 새내기일 무렵, 뜬금없이 새벽에 한 아일랜드 시인 집에 처들어가서 자기 원고를 보여준다. 이 시인도 특이한게 자다깼는데도 그 원고를 보며 조이스와 이야기를 나누며 이 젊은이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예이츠에게 조이스를 소개시켜 준다. 작가를 꿈꾸는 조이스는 당대의 유명인사 예이츠와 첫 만남에서 뜬금없이 예술론으로 시비를 트며 토론을 한다. 예이츠는 또 그걸 차분히 받아주며 대화를 나누었는데, 나중에 회고하기를 조이스와 말이 안 통하자, 갑자기 조이스가 한숨을 쉬며 당신 몇 살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걸 또 순순히 대답해주니, 조이스는 그대로 떠난다. 예이츠는 그게 또 신선하다면서 그 후 조이스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에즈라 파운드에게 소개시켜주기도 한다. 조이스는 예이츠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35]
- 그의 이름을 딴 선박도 있다. 여객 및 화물선 용도. MV W.B. Yeats 2019년부터 운항중이다.
- 1989년 조각가 로난 길레스피가 만든 이 동상은 예이츠의 서거 50주년을 맞아 스티븐 스트리트와 마르키예비치 로드의 한 모퉁이에 얼스터 뱅크 밖에 세워졌다. 이 장소를 선택한 이유들 중 하나가 스톡홀름의 왕궁이 슬리고의 얼스터 은행과 닮았다는 예이츠의 노벨상 수상 발언때문 이기도 하다. 이 동상은 또한 예이츠 기념관 건물에서 강을 건너편에 있고, 예이츠 학회의 본사이자 시인에 관한 전시회가 있다.
- 예이츠의 탄생 150주년 행사도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150주년 홈페이지 전 세계에서 수백 개의 행사와 기념행사를 기록했다. 그의 고향에서는 모든 술집이 매일 예이츠의 시를 읽기도 했다. 영국에서도 그의 시를 바탕으로 연극, 전시 행사를 열기도 했다. 아일랜드에서는 그의 150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새로운 우표와 한정판 15유로의 동전을 발행했고 #, 예이츠의 150주년을 진행한 팀은 세계 최대의 그의 작품 오디오 보관소를 만들기 위해 사람들에게 그들만의 버전의 예이츠 시를 녹음을 진행했다. 마이클 D. 히긴스 대통령은 'A Prayer for My Daughter'을 낭독해 기고했고 #, 셰이머스 히니의 가족은 그가 녹음한 'What Then?'이 사용되도록 허락을 내렸으며, 아일랜드의 전 대통령 메리 로빈슨은 'The Song of Wandering Aengus'를 낭독했다. 공식 행사에서의 그의 작품 낭독은 배우 피오나 쇼가 낭독했다.[36]
- 유명 시인이기에, 그의 시집 초판본은 상당한 가격을 자랑한다. 제일 싼 것이 100만원 가격에서 거래될 정도. 예이츠의 친필 싸인이 새겨진 경우에는 가격이 2배로 뛴다.
8. 미디어 매체
- 로스트 도터(영화)에서 예이츠의 시 'Mask'가 나온다.
- 사이버펑크 2077의 특정 루트 결말부에서 작중 등장인물인 알트 커닝햄이 그의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Sailing to Byzantium)' 4연을 낭독한다. 사이버펑크라는, 작품의 대주제와 그 이상(理想)을 문학적으로 표현하기에 알맞은 작품을 선택했다는 평이 많다.
9. 관련 문서
10. 외부 링크
[1]
오늘날의 모든 비평가들이 예이츠를 모더니즘 시인이라고 못박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이 스스로 최후의 낭만주의자라고 믿었다.
[2]
공식적인 종교는 개신교다. 그러나 예이츠는 신비주의자, 오컬티스트 성향이 더 강해 기독교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후기에는 불교와 인도 철학에 심취하기도 했다.
[3]
1892년 출생, 1968년 사망.
[4]
화가로 활동했다.
[5]
변호사이자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피어너 팔 소속이었다.
[6]
소설에는
제임스 조이스, 시에는 W. B. 예이츠라고 불릴 정도로 아일랜드 문학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7]
현대 영어권의 시인들 중에서
최고봉에 있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T. S. 엘리엇은 그를 '최대의 시인'이라고 평했다.
[8]
빅토리아 시대 최고 인기 작가 중 한 명. 대표작은 웨이크필드의 목사.
[9]
훗날 예이츠는 "그녀가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였다면 자신은 평범한 시인에 머물렀을 것"이라며 상실감을 회고했다.
[10]
그가 존경한
윌리엄 워즈워스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결속을 회복시키려하나, 예이츠는 모든 외면적인 현상이 내면적인 특징을 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해 내서 표현하려고 한다. ‘위대한 존재’, ‘위대하게 존재함’이 워즈워스에게는 인간의 밖에 있으나, 예이츠에게는 인간의 내면에 있다.
[11]
그는 1916년에 일어난
부활절 봉기에 참여한 죄로 사형당한 항거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12]
대표적인 작품으로 단막극 "Cathleen Ni Houlihan" 등이 있다.
[13]
엘리엇과 함께 20세기 모더니즘 문학의 거장 시인 중 한 명. 예이츠와 비슷하게 파시즘을 지지하기도 했는데 파운드는 더 극단적인 파시스트였다.
나치 독일의
프로파간다 활동을 했을 정도.
[14]
예이츠가 그의 비서를 하기도 했으며 예이츠에게 문학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후배 작가기도 하다.
[15]
뉴욕 타임스는 그녀를 "그녀의 세대에 대한 가장 영향력있는시 비평가 중 하나"라고 불렀다.
[16]
20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시인 중 한 명,
[17]
처음으로 근대적인
영어 사전을 만들어 영문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이기도 하다,
[18]
그의 세대의 가장 영향력 있던 미국 시인 중 한 명.
[19]
20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시인 중 한 명, 중증의 예이츠빠이기도 했다.
[20]
나이지리아의 대문호. 대표작은 모든 것이 산산히 부서지다.
[21]
미국의 시인. 20세기 후반 미국시에서 주요 인물이었으며 고백시의 주요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22]
미국의 시인.
비트 세대의 대표적인 여성 시인이다.
[23]
그의 영웅으로 예이츠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를 꼽은적이 있다.
#
[24]
국내 화장품 브랜드
이니스프리가 바로 여기서 이름을 따 왔다.
[25]
예이츠는 1913년과 1914년에 걸쳐서 페놀로사(Ernest Fenollosa)가 수집한 일본문화에 대한 자료의 출판을 도왔던 파운드(Ezra Pound)와 함께 일본 노(Noh)극을 공부하면서 선불교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
[26]
예이츠의 추천 덕분에 마침내 그의 책이 영국에서 간행됐다
[27]
그러나 그 책의 서문에서 예이츠는 약 40년 동안 친구 러셀과 함께 우파니샤드의 구절에 관심이 있어 왔음을 밝히고 있다. 결국 1937년에 쓴 「내 작품을 위한 전반적인 소개」(“A General Introduction for My Work”)에서 자신의 예수는 옴(AUM)으로 아트만이라고 한다.
[28]
국내에도
켈트의 여명이라는 책이 번역됐다.
[29]
비전에서 역사상 “존재의 통합”을 이룬 예로 신성의 화현인
석가모니나
예수 그리고 니르바나를 성취한 인도의 성자나 일본의 스님을 든다. 예이츠는 『비전』에서 태음과 태양의 관계를 통해 인간과 역사의 운명성과 그것을 벗어 날 수 있는 자유를 통찰한다. 영혼의 사후나 운명에 대해서도 업에 따라 <운명체>가 결정되고, 이원성을 떠난 반야공의 실상을 깨달아 자유와 해탈에 이르러 윤회를 벗어 날 수 있다는 불교적인 견해를 보인다.
[30]
국내의 이 책의 번역본이 있다.
시공사 번역.
#
[31]
맥밀란판
전집 번역이다.
[32]
번역된 시로 크게 와닿지 않는 외국 시인이 꽤 많은데 예이츠는 정반대 케이스.
[33]
제목 자체가 예이츠의 시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34]
출처
[35]
그로부터 2년 뒤 조이스도 세상을 떠난다.
[36]
해리 포터 실사영화 시리즈에서
피튜니아 더즐리역을 맡은 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