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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05 15:00:36

에드먼드 버크

<colbgcolor=#000><colcolor=#fff> 에드먼드 버크
Edmund Burke
파일:external/www.heritage-history.com/burke_square.jpg
출생 1729년 1월 12일
아일랜드 왕국 린스터 더블린
사망 1797년 7월 9일 (향년 68세)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잉글랜드 비콘스필드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정치인, 철학자
모교 파일: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 아이콘.png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
( 학사) (1744년 – 1748년)
경력 글래스고 대학교 총장
사상 현대보수주의, 자유보수주의
종교 성공회
정당 휘그당

1. 소개2. 생애
2.1. 미국 독립혁명에 찬성하다
3. 사상
3.1. 엘리트주의3.2. 점진적인 진보3.3. 미(美)와 숭고의 기원
4.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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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18세기 영국 철학자, 정치인. 그의 사상은 현대 보수주의 정치사상의 한 기틀이 되었기에, 최초의 근대 보수주의자라고도 여겨지며, 오늘날 보수주의의 시초로도 여겨진다. 프랑스의 조제프 드 메스트르 백작과 함께 서구 전통적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기도 한다.[1] 다만 철학적으로 차이가 있다면 메스트르는 반자유주의를 부르짖은 반동주의자였다는 것이고 버크는 시대의 점진적 변화를 지지하는 온건주의자였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근대 보수주의의 아버지라는 일각의 평과는 달리,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버크가 활동할 당시 그는 당대 영국 기준으론 진보적 스탠스였던 휘그당 당원이였고[2], 본인도 진보주의자를 자처했다. 다만 현대 기준에서 보자면 귀족적 전통을 긍정한 버크 역시 오늘날 대중적 자유주의와는 거리가 있어 전통주의자로 보는 시각이 더 많은 편이긴 하다. 기타 자세한건 후술 내용 참조.

2. 생애

2.1. 미국 독립혁명에 찬성하다

버크는 아메리카 13개 식민지 주민들 역시 영국인의 후예들이므로 식민지배 또한 영국 헌정 질서에 입각하여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말하는 영국 헌정 질서란, "대표 없이는 과세도 없다"라는 대원칙이다. 이러한 생각에 근거해 버크는 아메리카 식민지 주민들의 봉기가 영국 정부의 영국 헌정 질서의 위반에 대한 항거라고 규정하며 옹호했다.

다만 버크가 (주로 사회계약론자들이 이야기하는) 개인의 자유 때문에 독립혁명을 옹호했다고 보는 주장과 달리, 버크는 그의 저서 '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그러한 자유는 듣도 보도 못했다고 밝힌 바 있다. 고로 그의 자유관은 현대 기준에서 보자면 중세적 자유관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775년 3월 22일 버크는 미국 독립 혁명 전야에 의회에서 연설을 하였다. 그는 여기서 '자유(freedom)에 대한 사랑'과 '자유(liberty)의 강렬한 정신'이 미국 식민지 거주자들의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 당시 미국인들이 로마 가톨릭이나 성공회가 아닌 프로테스탄트이며 그것이 마음과 의견의 내적 복종에 가장 저항적이라고 말하였다.

3.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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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사상사에서 보수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경제에 있어서 기회주의적이란 평을 받는다. 어떤 보수주의자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근거로 시장의 기능을 불신하고(전자), 또 어떤 이들은 정부의 개입이야말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자유시장을 확립해야 한다(후자)고 말했기 때문이다.

시장경제가 퍼진 오늘날에는 보수주의자가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경우가 많지만 당시 보수주의자들 대부분은 자유시장에 있어 기회주의적이었고, 사실 보수주의 철학의 큰 흐름은 의외로 대개 전자로 이어졌는데, 반면 버크는 후자에 속했다.

3.1. 엘리트주의

그는 기득권(당시엔 귀족 등)이라고도 볼 수 있는 엘리트들이 있어야 사회가 잘 돌아간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엘리트가 사회를 이끌고 지도해야 사회 전반적으로 목표가 생긴다고 말했다. 다만 신분 여하에 상관없이 실력이 있다면 고위직도 할 수 있다고 주장해 당대 보수주의와는 궤를 달리 했다.

3.2. 점진적인 진보

버크는 프랑스 대혁명식의 급진적인 혁명이나 개혁을 반대했다.[3][4]대신 영국의 의회주의와 같은 점진적인 진보를 원했다. 물론 이건 이념보단 태도의 문제지만[5], 그렇다고 버크가 활동까지 맹한건 아니라서 그는 왕실재정과 국가재정을 분리시켰고, 반역자 색깔론이나 협박에 시달리면서도 가톨릭 교도들의 권익 증진, 인도 지배 혁신이나 (독립 전) 북미에서의 획기적 자치를 주장하기도 했다.

지금 와선 근대 보수주의의 아버지라고도 불리지만 정작 버크는 보수주의자들도 혐오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당시 주류 보수는 현대 기준으로 보자면 수구적 반동이 태반이였기 때문이다. 연장선상에서 당시 토리당 군주주의, 반동주의 보수 정당, 휘그당 자유주의 진보 정당으로 인식됐는데, 이게 19세기까지 유지되다 20세기 들어 사회주의 붐이 일어나면서 진보, 보수의 기준이 공화(자유)vs 왕정(전통)에서 노동, 복지쪽으로도 제법 옮겨왔다.

사실 자유주의 자체가 현대 좌우파 모두에 엄청난 영향을 준 사상인지라 지금도 좌파는 사회주의+리버럴 좌파, 우파는 리버럴 우파+보수주의자들이 결합된 양상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6], 그러다 보니 당대엔 진보주의자를 자처한 버크가 지금은 근대 보수주의의 아버지 비슷하게 불리는 재미난 상황이 됐다고도 볼 수 있겠다. 급진적 개혁 대신 점진적 개혁을 주창했기에 그가 보수주의자였다는 식의 주장도 사실은 이념을 떠나 온건파였다 정도로 볼 수 있는 비슷한 맥락이다.

상기했듯 그의 이론은 리버럴 우파에 신분제 옹호처럼 부분적 보수주의가 섞인 편으로, 결국 버크가 중요시 여겼던 것은 기존 질서를 존중해주되 시대의 변화 역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급진적 개혁은 질서를 파괴해 혼란을 일으킬 수 있지만, 강한 질서와 억압 역시 민중의 폭발을 불러 일으키고 도태되기 쉽기에 모순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주장을 한 것. 결국 오늘날로 치면 합리적 진보, 개혁적 보수 정도 되는[7] 온건파 스탠스에 속했지만 할 말은 한 사람이였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3.3. 미(美)와 숭고의 기원

버크는 정치사상가로 더 알려져 있지만 사실 미학사에서도 중요하게 언급되는 인물 중 하나인데, 그는 "숭고와 미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라는 논문을 통해 아름다운 것, 조화로운 것, 균형잡힌 것 등으로부터 야기되는 보편적인 미적 감정과 거대한 것, 거칠고 두려운 것, 기괴하고 충격적인 것 등으로부터 야기되는 숭고의 감정[8]이 실은 동일한 기원에서 나온다고 처음으로 주장했으며,[9] 이러한 그의 미와 숭고의 동일 기원론은 이후 칸트 판단력비판 등에 영향을 주어 미적 범주론의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4. 어록

과거를 이용해 미래를 계획할 수는 없다.[10]
Nobody made a greater mistake than he who did nothing because he could do only a little.
조금밖에 할 수 없어서 아무것도 안한 사람보다 더 큰 실수를 한 사람은 없다.
우리는 오래된 편견을 던져 버리는 대신 상당히 소중히 여긴다. 더욱 수치스러운 것은 그것이 편견이기 때문에 소중히 여긴다는 점이다.
선량한 이들의 수수방관은 악이 승리하는 데 유일한 조건이다. [11]

[1] Eatwell, Roger (1990), "The nature of the Right: the right as a variety of styles of thought", in Eatwell, Roger; O'Sullivan, Noel (eds.), The nature of the right: American and European politics and political thought since 1789, Themes in right-wing ideology and politics series, Boston: Twayne Publishers, p. 66 [2] 사실 당시 휘그당도 영국 기준 진보적이였다는거지 당대 프랑스에 비교하면 공화주의자는 소수였기 때문에 온건공화파보다도 보수적이긴 했다. 물론 이런 식이면 공화국 사람들이 보기엔 전제군주국은 말할 필요도 없고 현대 입헌군주국 주요 정당들조차 다수는 신분제 지지하는 보수정당이라고 싸잡아 매도할 수도 있긴 하다만. 공화국 우파는 진보정당이었던 것이다. [3] 특히, 당시 루소의 사상에 비판을 많이 했는데 아무리 인간이 자연 상태의 평등이라한들 왜 스스로 정부를 세우고 질서를 만드는지 의구심을 품었다고 한다. 다만 몇몇 주장은 공화주의자였던 토머스 페인에게 역으로 비판당한다. [4] 다만 장자크 루소 항목을 살펴보면 버크가 루소의 사상을 오해한게 가깝다. [5] 애초에 그 영국식 의회주의란 것조차 왕권을 대폭 약화시키는 혁명을 통해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6] 리버럴 좌파와 우파를 나누는 기준은 대개 경제적 관념이다. 즉, 사회적으론 대체로 진보적인 편이나 경제적으로 좀 더 공동체 지향적이냐 아님 개인의 재산권을 존중하느냐 이런 차이. [7] 물론 당대 기준으로 그렇다는 것. 현대 기준에서 보면 버크 역시 전통주의적 한계를 가진 인물이었다. [8] 숭고의 감정은 인간으로 하여금 무력감, 두려움, 전율, 한계를 깨닫게 해 주지만 한편으로는 그것들을 뛰어넘어 보다 높은 단계로 상승, 고양하겠다는 의지를 일깨우는 계기가 된다. [9] 숭고의 개념은 이미 2세기 경 로마 시대의 철학자 디오니시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단, 롱기누스의 숭고론은 롱기누스 본인의 저작이 아니라 롱기누스의 이름을 빌린 누군가의 저작이므로 정체 불명인 이 책의 진짜 저자를 흔히 가짜 롱기누스(Pseudo Longinus)로 통칭한다.)에 의해 제시된 바 있으나 버크가 숭고와 미의 기원을 논함으로써 비로소 숭고가 미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편입되었다. [10] 문명 6에 수록. [11] "The only thing necessary for the triumph of evil is for good men to do nothing." 이 말은 버크가 한 말이 아니다. 버크 전집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말이다. 유사한 말 중에 존 스튜어트 밀의 말, "착한 사람이 구경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보다 나쁜 사람이 그들의 목적들을 달성하는 데 더 필요한 것은 없다. (Bad men need nothing more to compass their ends, than that good men should look on and do nothing.)"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