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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18:06:30

선동열/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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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삼성 라이온즈 수석코치 시절3.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3.1. 부임 성적3.2. 스타일
3.2.1. 투수 기용3.2.2. 타자 운용3.2.3. 사단 구축3.2.4. 포스트시즌 운용3.2.5. 대졸 신인 선호
3.3. 선수기용 논란
3.3.1. 오승환 타이틀 만들어주기3.3.2. 양준혁 은퇴 관련3.3.3. 외국인 선수 기용 관련
3.4. 사임 및 속사정3.5. 삼성 감독 시절에 대한 팬들의 평가
3.5.1. 삼성팬3.5.2. 비삼성팬
4.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
4.1. 2011년4.2. 2012년4.3. 2013년4.4. 2014년4.5. KIA 감독 시절 특이사항4.6.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 평가
5. KIA 타이거즈 감독 사퇴 이후6.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7. 다시 야인으로8. 역대 감독 전적

1. 개요

선동열의 지도자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삼성 라이온즈 수석코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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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0월 수석코치 취임식에서.

파일:/image/001/2004/11/30/072004113004200_1.jpg
2004년 당시의 모습.
삼성 라이온즈 No.82
선동열(宣銅烈)

은퇴 후 KBO 홍보위원과 여러 팀의 투수 인스트럭터으로 활동하다가, 2003년 자신의 현역 마지막 팀이던 주니치 드래곤스로 1년간 지도자 연수를 다녀왔다.

2003년 시즌이 끝난 이후 LG 트윈스 두산 베어스가 새 감독 후보로 선동열을 검토했으나 무산되었고[1][2], 결국 연봉 1억 2천만원에 2년 계약을 맺으며 2004년 삼성 라이온즈의 수석코치로 부임했다. 이는 당시 코치 최고 대우로 알려졌다.[3]

2004년 한 해 동안 김응용 감독 아래서 삼성의 수석코치 겸 투수코치로 활동하면서 투수 운영 전권을 보장 받음과 동시에 사실상 차기 감독 수업을 받았으며, 그 다음해 김응용 감독이 삼성 라이온즈 사장으로 영전하자[4]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3.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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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No.90
선동열(宣銅烈)

감독으로 승격되면서 90번으로 등 번호를 바꾼다.

3.1. 부임 성적

1년의 수석코치 경력을 쌓고 바로 감독이 된 선동열은 2005년, 2006년 2년 연속으로 정규시즌 1위를 기록하고 한국시리즈도 2연속 우승. 그러나 2007년, 2008년에는 4위에 그쳤고 2009년에는 5위에 그치면서 1996년 이후 처음으로 4강에서 탈락하였다. 2010년 SK에 이어 2위로 페넌트레이스를 마쳤으며, 플레이오프에서 시즌 3위 두산에 3승 2패로 승리, 한국 시리즈에서 SK에게 4연패하여 2010 시즌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6년 재임기간동안 우승 2회, 준우승 1회, 4위 2회, 5위 1회.

일반적인 팀이었다면 충분히 명감독이라고 불릴만하겠지만, 삼성의 통산 성적과 비교해 본다면 4-4-5라는 성적은 결코 좋은 성적이라 평가 받기 어렵다. 더욱이 2009년을 5위로 마쳐 13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을 좌절시켜버렸다. 그 이후로 6년이나 더 가을야구에 진출했다는 걸 생각하면 2009년에 명맥이 끊겨버린 게 더 아쉬운 상황이다. 허나 구단 역사상 첫 2회 연속 우승을 기록한 감독도 선동열 감독.[5]

팬들과의 관계에서 논란이 많았던 감독으로 대구 지역 골수팬들은 한국시리즈 2연패 당시에도 선동열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삼성 특유의 타선 중심 빅볼 대신 투수 중심 스몰볼을 추구했는데, 화끈한 빅볼 야구를 오랜 세월 봐온 팬들과의 상성도 맞지 않았다.[6] 더군다나 선수 선동열에게 한국시리즈의 좌절을 맛본 기억이 대다수 있기 때문에 올드 팬일수록 감독 선동열에게도 비판적인 시각이 많았다.

다만 2회 연속 우승이라는 기록 역시 어쨌거나 의미 있는 기록이었기에, 지지하는 팬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또한, 해태의 전설적인 레전드 선수 출신이다 보니 2004년 이후 성적이 시원찮던 KIA를 뒤로 하고 선동열을 따라서 삼성을 응원하던 감독의 개인 팬들도 상당수 존재했다.[7] 하지만 이런 팬들도 팀이 좋은 성적을 뽑으며 잘 나갈 때에나 목소리가 컸고, 이후 성적이 곤두박질 치고 각종 프렌차이즈 스타에 대한 홀대가 불거지면서, 삼성 팬들의 다수는 선동열 감독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으로 돌아섰다.

현역 시절 한국을 대표하는 투수였기 때문에, 개인 팬들이 있었고, 전반적으로 선동열에 비판적인 삼성 올드 팬들과 선동열 개인 팬들간의 논란이 여러 야구 커뮤니티에서 벌어졌다. 성적이 좋을 때는 별문제가 없었지만, 성적이 나쁠 때는 여러 논란으로 번졌다. 더군다나 2009년에 조원수박차를 필두로 한 투수진 운영에 힘입어 5위로 가을 야구를 탈락하고, 이듬 해에는 팀의 프렌차이즈 스타인 양준혁이 강제 은퇴 당하면서 소수의 선동열 옹호파 삼성팬들도 등을 돌렸기 때문에, 선동열의 임기 말기에는 그를 옹호하는 이는 소수밖에 남지 않았다.

3.2. 스타일

3.2.1. 투수 기용

大투수 출신답게 투수 기용이나 운용은 대체로 괜찮았다고 평가된다. 선동열 재임 시절에도 투수 운용에는 별 말이 나오지 않았고, 이후 류중일 시절 선동열이 구축한 투수진들이 남아서 삼성의 4연속 우승을 이끌었다.

수석코치로 입단한 뒤 1년 만에 감독으로 승격했기 때문에 코치 경력이 짧아서 드러나지는 않지만, 수석코치로 선임됐을 때도 삼성은 사실상 그를 투수코치로 영입했고 실제로 2004년 한 해동안 삼성의 수석코치와 투수코치를 겸하면서 활동한 뒤 곧바로 감독으로 승격된 케이스라고 봐야 한다. 실제로 1년밖에 되지 않는 짧은 경력이지만 투수코치로서 능력은 대부분 인정해준다. 그래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투수코치로도 많이 차출됐는데,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표팀 투수코치를 맡아 대한민국 대표팀의 4강행을 이끌었고, 2015 WBSC 프리미어 12 대표팀 투수코치를 맡았을 때도 신들린 듯한 투수교체 타이밍을 보여주면서 초대 우승에 일조했다.

투수를 중심으로 하는 스몰볼인 지키는 야구를 한다. 그 결정판은 "KO펀치"라 불리던 권오준 - 오승환[8]의 필승 계투진. 그와 더불어 권오준 - 권혁의 "쌍권총" 라인 또한 유명하다. 외에도 정현욱, 안지만 등을 기용하여 계투진의 강력함을 유지했다. 이렇게 완성된 게 이른바 JOKKA 라인이다.

투수진 육성은 선동열의 가장 큰 공이며, 큰 부상 없이 롱런했고 선동열 재임기 내내 꾸준히 기회를 부여받은 윤성환, 안지만, 차우찬 3명은 선동열에 비판적인 팬들도 선동열이 키웠다고 인정하는 편이다.

다만 선발에서 잘 던지거나 선발로 정착해야 할 유망주들을 빼서 불펜에 넣었던 점에서도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권오준은 원래 선발이었지만[9] 2004년 시즌 중 혈행장애 드립[10]을 치면서 기어이 불펜으로 전향시키고, 굴린 결과 권오준은 인생의 토미존 서저리 3회 중 2회를 선 감독 아래서 받게 되었다. 권혁 또한 좌완 파이어볼러 선발 유망주였지만, 토미존 서저리에서 복귀한 직후인 2007년 불펜에서 마구 구른 결과[11] 결국 평범한 좌완 계투로 전락하고 말았다. 다만 정현욱의 경우에는 선발로만 가면 난조에 시달리는 것을 봤고, 안지만 또한 선발로서는 그다지 좋은 활약을 보이지 못했기에 반대가 없다.[12]

그리고 "투수가 자기 공을 제대로 뿌리려면 일단 많이 던져봐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어서인지[13][14], 스프링캠프에서 투수들에게 많은 공을 던지는 훈련(소위 3000투구 훈련)을 요구하기도 한다. 다만 이에는 체계적인 웨이트트레이닝으로 근력을 탄탄히 해 놓아야 한다는 선제조건이 있기 때문에[15], 초보 코치 시절에는 이 조건을 간과하고 그냥 무작정 많이 던지라는 식으로 주문했다가 몇몇 투수들이 이 강도 높은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부상으로 시즌이 시작하기도 전에 드러눕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16] 본인이 3000투구로 부활했던 건 그냥 본인의 신체 조건이 사기였고 허리 위주의 투구 때문에 가능했던 거라는 사실을 잊었다. 이후로는 좀 나아져서 공을 던지기 전에 일단 몸을 만들 것을 주문하고 있다.

투수 운용 능력은 수준급이어서 2010년에는 "5회 이후 리드시 승리"라는 무시무시한 진기록을 이어가기도 하였다. 이 기록은 9월 4일 롯데에게 패하면서 52연승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투수 출신 감독이어서 그런지 투수에 대한 애정이 넘쳐흐르며 투수 오타쿠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다. 신인 선수가 오면 닥치고 투수부터 만들고 보려는 경향이 크다. 팀 내 타자가 모자른 탓에 타자로 갈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라고 예상됐던 2008 지명 신인 최원제조차도 투수로 낙점지었다.[17] 거기에 이상목, 구자운 등 타 팀에서 방출된 투수들을 1억씩 쥐어주고 컬렉션으로 만들었다. 이 양반 투수 오타쿠 맞다. 2008 시즌이 끝난후 스토브 리그에서는 히어로즈 장원삼을 자기 콜렉션으로 만들려다가 타 구단과 KBO의 제재로 실패. 그러나 2009 시즌 이후 히어로즈 가입금 완납 이후 기어코 장원삼 영입에 성공. 이는 이미 작년부터 계속 진행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008 시즌 후 장원삼은 30억+ 박성훈의 조건으로 트레이드 되었었으나 이때 지불한 30억원을 2009 시즌 후까지도 히어로즈가 반환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언론에 발표한 20억+ 김상수+박성훈의 딜은 김상수에게 10억의 가치를 인정해서가 아닌 단순히 김상수를 끼워준 명목 상의 트레이드에 불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투수 오타쿠라기보다는 불펜 오타쿠에 가깝다. 그 대표적인 예로 선발로 10승 투수가 된 권오준의 불펜 전향과 권혁의 불펜 강제 전향. 그나마 이 불펜 오타쿠 질 속에서도 윤성환 차우찬을 꾸준히 선발 투수로 키운 부분 안지만을 리그 정상급 불펜으로 성장시킨 것 만큼은 훌륭한 업적이라 봐야 할 듯. 선동열의 투수 운용을 비판하는 삼성팬들도 저 3명은 군말 없이 인정하는 편이다.

그러나 2000년대 투수 혹사와 관련해서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는 감독 중 한 명이 바로 선동열이다. 배영수는 팔꿈치 인대가 완전히 끊어진 상황에서도 2006년 한국시리즈에서 데포 주사를 맞아가며 6경기 중 5경기 등판이라는 무리한 일정[18]을 소화하게 만들면서 전성기를 완전히 끝내버렸다.[19] 오승환은 데뷔 첫해 99이닝, 두번째해 79.1이닝을 던지며 매년 혹사를 당하다 결국 부상을 입고 2009~2010년 2년 동안 부진에 시달렸다.[20] 권오준 역시 이미 팔꿈치 수술을 한번 받았던 선수를 2005~2006년에 미친듯이 굴리면서 결국 두 번째 수술을 받고 이때의 구속과 구위도 대부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당장 후임 류중일 체제에서 혹사라고 지적할만한 사례가 2014년 차우찬 정도인것과 비교하면 성적은 더 안 나오면서 투수 혹사는 훨씬 심했던게 바로 선동열의 삼성이었다.

3.2.2. 타자 운용

감독으로서 해태식의 투수 야구, 타격에서는 스몰볼을 추구해 쥐어짜는 야구를 했다. 이 때문에 삼성은 삼점 라이온즈라는 굴욕적인 별명을 얻기도 했다. 2005 시즌 득점 2위이던 타선이 부임 3년만인 2007 시즌에 득점 8위라는 초라한 성적을 냈다.

이런 삼성의 스몰볼에 이만수, 양준혁, 이승엽 시절부터 홈런을 뻥뻥 쳐대는 것에 익숙하던 삼성 팬들[21]은 매번 1점차, 2점차로 쥐어짜내 이기는 야구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이것도 인기가 없던 요인 중 하나. 후임 삼성 라이온즈 감독인 류중일이 선동열과 반대로 선발을 길게 가져가고 연속 우승을 차지하게 되면서 삼성 라이온즈의 팬들은 선동열의 이러한 스타일을 더욱 비판하고 있다.

이를 두고 일부 삼성 팬들이 선동열의 타자 운용이 형편없었다는 식으로 주장하지만, 사정을 따져보면 선동열이 스몰볼을 추구한 것은 그의 부임 직후 삼성타선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김응용이 우승할 때 타선의 주축이었던 이승엽 마해영, 틸슨 브리또, 강동우가 모두 팀을 떠났고[22], 2000년대 중반 삼성 타선은 노인정 타선이라는 말을 듣고 있을 정도였다. 심정수를 비싼 돈 주고 사 왔지만, 정작 라섹 수술 후유증과 어깨 부상 심화로 제대로 써 먹을 수도 없었고, 그 당시에는 거의 30대에 접어든 박한이가 그나마 가장 젊은 주축 타자였다. 선동열이 스몰볼을 선호한게 아니라 빅볼을 할 수 없는 거포가 없는 삼성 타선의 사정상 그게 유일한 수였다. 일부 팬들이 선동열 재임시인 2005-2010년 드래프트에서 강타자를 안뽑고 소위 멸치라 불리는 준족 타자들만 뽑았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명백한 사실왜곡으로 각 구단이 앞 다투어 지명하는 투수를 제외하면, 나름 선동열도 강타자로 성장할 수 있는 타자들을 뽑았다. 2005년에는 김현중, 2006년에는 모상기, 2007년에는 김동명을 뽑았고, 2010년 정민우를 뽑았다. 이들은 거포감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성장하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23]

오히려 2008-10년 타선 리빌딩을 위해 채최박에게 계속 기회를 주며 키운게 선동열이다.[24] 일부 팬들이 채최박을 김응용이 키웠다고 주장하는데, 이들을 픽업한 것은 김응용이 맞지만, 아직 미숙했던 이들의 방망이를 3년간 꾸준히 기용하며 키운 것은 분명히 선동열의 공이며, 이들은 류중일 시절 전성기를 맞이하여 돌아온 이승엽, 바뀐 제도로 영입된 외인 타자로 삼성 라이온즈는 화려한 빅 볼을 할 수 있었다. 즉 선동열이 스몰볼을 선호했다기보다는 여건상 빅볼을 할 수 없었다고 보는게 맞다.

류중일 이후에는 채최박의 이적 및 프런트의 드래프트 실패 등이 겹쳐 김한수 재임기 삼성은 리그 최고 타자친화구장을 홈으로 쓰면서 장타력이 약점인 구단이 되었다.[25] 이를 일부 팬들이 선동열 탓을 하기도 하지만, 애당초 선동열이 나간 후 6년 후까지 선동열 탓을 하는 것은 그냥 안티팬의 주장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3.2.3. 사단 구축

순혈을 선호하는 일부 삼성 팬들은 선동열이 삼성 팀 컬러와 맞지 않는 해태 인맥이나 자기 사람을 스탭으로 대가 불러와 삼성의 전력을 손상시켰다고 주장하나, 프런트가 막강해 감독은 그저 프런트의 집행인 정도인 메이저 리그 와는 달리 한국 야구의 경우에는 감독 개인이나 개성이 팀성적에 직결되어 있고, 이를 위해 자기에 맞는 사람들을 불러와 사단을 꾸리는 게 일반적이다. 애당초 코칭스태프의 불화는 팀의 성적을 박살낸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이를 크게 문제 삼기는 어렵다.[26] 게다가 해태 출신 코칭 스탭 영입은 선동열이 아니라 전임 김응용이 시작한 것으로, 2001년 삼성 부임 당시에 해태 시절 오랫동안 보좌했던 유남호와 제자인 김종모, 조충렬을 불러온 것이 시초이다.

선동열 체제의 삼성은 1군과 2군에 선동열 감독 라인이 포진해 있었다. 1군에는 선동열(감독) - 한대화(수석) - 김평호(주루) 라인이 굳건했고, 2군에는 조계현(투수) - 정회열(배터리)라인이 있었다. 이 들은 모두 해태 출신으로 2009년에 조계현 투수코치를 1군으로 올리는 과정에서 삼성 출신인 양일환 투수코치가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고 나갔다. 2009 시즌 종료 후 조계현을 내치고 한대화는 한화 감독으로 선임되어 팀을 떠난데다 삼성 원팀맨인 장태수가 수석코치로 부임하며 코치진의 해태색은 엹어졌고[27], 김현욱, 전병호, 김한수, 김재걸, 김종훈 등 선동열 시기 인선된 삼성 선수 출신 코치들이 자리 잡았다. 해태 출신들은 2011년 우승도 함께 한 후에 선동열을 따라 전부 사직한다.[28]

3.2.4. 포스트시즌 운용

코시 2연패를 달성한 감독[29] 중의 한 명이기에 단기전 능력이 나쁘지 않다고 보는 시각이 있는 반면, 그저 전력이 우세할 때만 이길 뿐 비등하거나 뒤질 때는 맥을 못 추며, 특히 넘어간 흐름을 다시 잡아오는 능력이 형편없다는 주장도 있다.

페넌트레이스에도 선동열은 2009 시즌, 2010 시즌. 삼성은 5회까지 리드 시엔 압도적인 승률을 보였지만, 그 승률의 이면에는 반대로 5회까지 못 이기고 있을 시 매우 낮은 승률이라는 그늘이 존재한다. 이는 선동열이 초반에 실점이 많아 가망이 없는 경기는 아예 포기해버린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워낙 두산과 격전을 치르고 올라왔기 때문에 삼성의 체력이 소진, 아예 포기했다고 할 정도로 무성의한 경기를 했고, 결국 4연패로 한국시리즈를 끝내서 삼성 팬들을 격분시켰다. 이는 김성근이 한화를 맡았을 때의 마리한화와는 매우 대조적인 지휘법이었다. 이런 지휘법을 좋게 본다면 선수들의 체력, 특히 투수력을 아끼기 위한 고육지책일 수도 있지만 게임를 중시하는 팬들에게는 너무 무성의하다는 비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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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스윕패를 앞두고 헛웃음을 짓는 선동열과 심각한 표정인 류중일 코치의 대비된 모습을 보여준다.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우리는 우승할 시기가 아니라는 드립과 함께 4-0으로 무기력하게 지는 운영을 펼쳐 큰 비판을 받았으며, 특히 한국시리즈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SK는 선발의 의미가 전혀 없는 팀 같다. 이렇게 되면 야구가 이상해지고 거꾸로 가는 것 같다. 어떤 식의 야구인지 알 수가 없다. 한국식인지, 미국식인지, 일본식인지...물론 졌으니 할 말은 없다"라고 말하며 삼성 팬들의 어이를 상실케 했다. 비록 김성근의 행적을 보면 틀린 말이 아니기는 하지만, 정반대의 스타일인 로이스터라면 모를까 김성근 감독과 가장 스타일이 비슷한 불펜 중심의 야구를 하는 선동열 감독이 할 소리는 아니다. 실제로 10 시즌 한국시리즈 동안 SK와 삼성 양팀 선발 중 5이닝을 채운 선발은 2차전에 나와서 5.1이닝 3자책을 기록한 차우찬밖에 없다. 정규 시즌 기록을 봐도 선발 평균 이닝이 SK 5.01, 삼성이 5이닝으로 동일한 수준. 추가로 한국시리즈 동안 출장한 투수 숫자도 같다.

이렇게 2010 한국시리즈에서 맥빠진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1980년대 삼성은 전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경우에서도 준우승한 적이 부지기수니, 선동열이 단기전을 못 한다고 보기도 뭐하다.[30] 애초에 "전력이 약한데 우승", "전력이 강한데 준우승"이란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전력이 곧 성적이고, 성적이 곧 전력이기 때문이다. 강한 녀석이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긴 녀석이 강한거다...라고는 하지만 분명히 보유한 선수층의 뎁스라는건 존재한다. 2002년의 LG와 2006년의 현대가 아직도 용병술의 승리로 회자되는 이유는 명백히 얇은 선수층을 가지고도 파이팅과 적재적소에 터지는 작전으로 선두권 싸움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전력이라는 개념은 이 용병술까지도 포괄한 개념이기는 하지만.

3.2.5. 대졸 신인 선호

2009년 8월, 2010년 신인드래프트를 불과 며칠 안 남겨둔 시점에서 언론에 대놓고 " 고졸 투수는 안 뽑겠다"고 선언했다. 사실 이는 삼성 코치를 시작했을 때인 2004년 윤성환이나 삼성 감독이 된 2005년에는 오승환 등 주축 불펜으로 성장한 선수들이 다 대졸인데다, 이때는 주축 투수들의 부상으로 대신 기용한 투수들이 부진했는데 이들 대다수가 고졸 투수였기 때문이었다. 흔히 선동열은 KIA 감독이 된 후 신인 지명에서 대졸 선수를 선호해 KIA 팬들로부터 질타를 받았다는 인식이 있었으나, 원래 삼성에 있을 때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실제로, 삼성은 2010년 신인드래프트에서 1, 2라운드 모두 대졸 투수를 지명하는 등, 지명한 투수 6명 중 4명이 대졸이었다. 삼성의 지명 결과에 대해 타 팀 스카우트는 "삼성이 대졸 투수를 뽑으려고 어쩔 수 없이 ( 임진우 김현우를) 상위라운드에서 지명한 느낌이 있다. 나머지 2명의 대졸 투수( 김재우, 이규대)도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선수들이다."라고 평가했다. 2010년 신인드래프트는 전면 드래프트로 방식이 바꼈고, 이로 인해 고졸 선수들이 미국으로 진출하며 예년에 비해 유망주 풀이 안 좋다고 평가받았지만, 실제 지명 결과 1, 2라운드 동안 삼성을 제외한 타 팀에서 지명한 대졸 투수는 3명 뿐으로, 고졸 선수 풀이 좋지 않다고 그만큼 대졸 선수들이 고평가 받은 건 아니었다. 비록 프로야구 스카우트가 아닌 아마 야구 팬들이 진행했다지만, 아마 야구 사이트인 아마야구사랑의 모의 지명에서도 김현우는 3라운드였고 임진우는 4라운드였다.

삼성 스카우트는 지명 결과에 대한 자평에서 "감독의 인터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원래 뽑으려고 했던 선수들이었다."라든지 "우리 팀은 즉전감이나 완성형을 선호한다."고 인터뷰했지만, 이듬해 2011년 신인드래프트에서는 3라운드까지 모두 고졸 투수를 지명하면서 결국 2010년 신인 지명은 감독 눈치를 본 결과였다는 게 증명됐다.[31]

다만 약간의 변론을 한다면, 선동열이 프로팀 감독을 했던 2005~2014년은 2000년대 초반 야구인기 침체와 2002년 월드컵 특수의 영향을 받은 소위 월드컵 키즈라 불리는 세대들이 프로에 진출했던 시절이라 대졸 지명만으로 팜 황폐화가 심하게 발생하진 않았다. 이때는 학력과는 상관없이 선수들의 기량이 워낙 떨어졌던지라, 전국적으로 관심을 받은 고졸 1차 지명 유망주도 1~2년차부터 프로 1군에서 활약하는 일은 없었고, 2군에서 어느 정도 성장을 하고 경험을 쌓은 뒤 1군에 올라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증거 중 하나로 KBO 신인상 수상자 목록을 찾아보면, 2008년부터 2016년까지 프로 1년차 선수가 신인상을 받은 적은 단 한 차례도 없다.[32] 그 영향에서 자유로운 1990년대 중반 태생들은 선동열의 프로감독 마지막 해인 2014년에야 데뷔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야구 인기가 부흥하고, 각 구단들이 팜의 중요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투자를 시작했고, 그 결과 선수층이 점차 풍부해지면서 해결되었다. 선 감독이 프로에서 물러난 뒤인 2010년대 후반부터 1차 지명이나, 2차 상위 라운드에 지명된 선수들은 2~3년차에서부터 프로 1군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인원이 다시금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정후 강백호와 같이 1999~2000년생인 베이징 키즈를 전후로, 저연차에 프로팀은 물론 국가대표팀 주전 한자리를 차지하는 특급 유망주들도 나오기 시작했고, 다시 예전처럼 프로 1년차 선수가 KBO 신인상을 수상하는 성과가 나오고 있다.

그러니 부작용이 커진건 단순히 대졸선호때문만이 아니라 쌕쌕이 멸치선호와 소모성 강한 불펜야구까지 더해진 탓이다.

어떤 팬들은 삼성 시절과 KIA 시절이 모두 지난 2010년대 후반의 평가는 선동열 감독의 이러한 픽들이 삼성과 KIA의 유망주 팜을 아주 망치게 만든 원흉으로 주장한다. 선동열 감독이 감독으로써 삼성에서 재임한 2005~10년에 뽑은 신인 중에 성공했다고 말할 선수는 투수인 차우찬 백정현, 심창민 뿐이며, 야수는 고교 시절 5대 유격수로 손꼽힌 김상수, 2011년도 신인왕 배영섭, 신고선수로 입단한 이지영말고는 싸그리 망했다. 특히 야수들의 경우 똑딱이만 있고 장타력을 갖춘 선수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런 팬들은 삼성의 이러한 팜 황폐화는 2016년도부터 시작된 암흑기의 씨앗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2010년대 중후반 이후 컨텐더 팀들 중에 12년 지명부터 상위픽에서 계속 대박이 난 키움 히어로즈와 2012, 2013년 신생팀 특별 지명에서 기둥들과 주전 선수들을 일구어냈던 NC 다이노스, 베테랑의 선전과 외국인 선수의 성공으로 최종 우승을 차지했던 KIA 타이거즈, SK 와이번스와 별개로 꾸준히 가을 야구에 진출하고 있는 LG 트윈스, 두산 베어스의 주전 선수들이 선발되었던 시기는 대부분 선동열의 삼성 감독 재임 시기였던 2005년부터 2010년 시기에 지명 받았던 선수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선동열의 대졸선호가 아주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닌데, 특히 선수의 성공 가능성이나 장래성을 생각한 측면. 뽑히는 모두가 프로야구선수로 성공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한국의 고교 야구 팀은 선동열 재임 당시 약 70여개 팀이 있었는데(2010년대에 90개 팀으로 늘었다.), 각 고교마다 10명씩 주전선수가 배출된다고 해도 매년 700명이 나온다. 이들 중에서 지명을 받아 입단하는 사람은 각 구단마다 10명 정도이며, 이 10명중에서도 1군 로스터에 안착하는 선수는 높게 잡아도 30%, 평균적으로 20% 정도이다. 즉 매년 드래프트로 각 구단에 입단하는 10명중 8명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며, 평균적으로 따지면 매년 배출 되는 각 고교의 주전 선수 중에서 프로에 안착하는 비율은 드래프트로 입단한 선수 가운데 20%, 팀당 매년 약 2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대략 80%의 선수들은 프로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다. 그나마 대졸은 대학교 졸업장이라도 있으니 그것으로 제 2의 인생을 준비해볼 수라도 있지만 고졸은 방출되면 돈도 학력도 없는 처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래서 선동열은 야구로 인한 인생 실패자를 만들 수 있는 고졸 픽을 꺼린 것.

실제로 선동열 감독은 KIA 감독으로 재임했을 당시, 이런 이유로 대졸을 선호한다는 논지의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

3.3. 선수기용 논란

선동열의 선수 기용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일고 있다. 물론 어느 감독이나 총애하는 선수가 있고 그리 탐탁치 않게 여기는 선수가 있지만 선동열은 그 정도가 심하다는 것이 대부분.

대체로 그가 감독으로 부임하기 전부터 잘했던 팀 프랜차이즈 선수는 경우 좋은 대접을 해주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그가 부임한 뒤부터 잘했든가 그전부터 잘하긴 했지만 원래 삼성 선수가 아닌 선수는 총애 하는 경우가 많다. 전자에는 강동우, 박한이, 양준혁 등이 있으며, 후자에는 박진만, 신명철, 강봉규, 최형우, 박석민 등이 있다. 진갑용은 앞의 조건은 충족하지만 OB에서 건너온 이적생.

삼성 라이온즈의 대표 타자이자 국민타자인 이승엽 역시 " 우리 팀 온다 해도 뛸 자리 없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당연히 채태인, 최형우, 박석민의 클린업이 삽질을 하면 할 수록 더욱 더 욕을 먹는다. 그리고 2011 시즌, 삼성의 1루수 세 명( 채태인, 모상기, 조영훈)의 홈런개수를 모두 합한 것 = 2011 시즌 이승엽이 오릭스에서 친 홈런 개수[33]라면서 선동열은 미친듯이 까였다.

또 대놓고 홀대한 선수가 한 명 있는데 바로 임창용. 해태 시절 차기 마무리를 꼽는 과정에서 모두가 임창용을 골랐지만 선동열은 김정수를 지목하는 등, 해태 시절부터 사이가 안 좋았고,[34] 2005년 선동열이 투수코치에서 감독으로 승진할 때쯤 임창용이 해외 진출을 시도하자, 20억도 아깝다라는 발언을 하며 대놓고 홀대하였다. 그 이후 임창용이 해외진출에 실패하게 되자 한국으로 돌아와 삼성과 FA 계약을 체결했다가 다음 날 갑자기 취소해줄 것을 요구하면서 팀 분위기를 박살내버렸고, 사장으로 막 취임한 임창용의 은사 김응용은 격분, 임창용이 당장 복귀하지 않으면 임의탈퇴시키겠다고 길길이 뛰었다. 결국 임창용이 백기투항하면서 사건은 종결되었지만, 이후 3년간 임창용의 성적은 그야말로 참담했다. 평균자책점이 2005년 6.50, 2006년 4.50, 2007년 4.90.[35][36] 선동열 입장에선 감독으로 오자마자 선수가 팀 분위기를 망친데다가 성적까지 이 모양이니 좋게 대할 이유도 없고, 임창용은 임창용대로 해외 진출 시도 한 번 했다고 앞에 한 발언 포함해서 감독이 갑자기 싸늘하게 대해버리니 역시 좋은 감정을 가지기 어려웠던 것.

악연은 임창용이 삼성을 떠난 뒤까지 이어져,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결승전 당시 임창용의 스즈키 이치로에 대한 정면 승부건에 대해 김응용과 함께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시일이 조금 지난 2010년 임창용은 "야구선수 임창용을 만든 세 사람"으로 가족, 김성근, 선동열을 꼽았지만 선동열에 대해서는 앞의 둘과는 약간 뉘앙스가 다르게, 자신의 야구 인생에 변화를 준 사람으로 말했다. 근데 링크한 기사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내용마저도 선동열 감독에게 뭔가 직접적인 도움을 받았다기 보다는 그의 채찍질이 재활에 도움됐다는 이야기다. 선 감독은 임창용에게 제구와 변화구를 주문했지만, 그는 와신상담하며 직구와 구위 회복에 더 매달렸다고. 까놓고 이야기하자면 파워 피처에서 피네스 피처로 변화를 강요하는 감독을 엿 먹이기 위해 재활에 매달렸다고 볼 수 있겠다.

관련 이야기는 임창용이 삼성 복귀한 뒤 마해영과의 인터뷰에서 좀 더 명확하게 밝혀진다. 자신에게 자극을 준 사람으로 이야기하며 코치시절(2004)과 감독시절(2005 이후)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에 대해서 대놓고 말하는 걸 보면 정말 싫어하는 듯.

이렇게 외부 출신 선수를 선호하는 것은 감독으로서의 권위 문제가 크다. 프로야구도 직장이고, 여러 사람 얽혀있다 보니 팀 내 권력 관계가 매우 복잡하다. 가끔 감독보다 파워가 센 코치나 심지어는 선수가 나오기도 하는데, 그렇게 되면 감독이 원하는 대로 팀을 이끌 수가 없다. 당연히 감독이 가장 큰 권위를 갖고 팀을 이끌기를 원하는데, 감독의 권위는 그냥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닌, 실력과 실적, 경력에서 나온다. 까놓고, 감독이 현역 시절 듣보잡이었거나 낙하산이거나 하면 선수들이 말을 듣지를 않는 것이다.

선동열은 선수시절을 타 지방 팀인 해태 타이거즈에서 보내서 삼성에서는 입지가 약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투수 파트에서는 현역시절 대 투수였으니 실적으로 찍어누를 수 있어서 차별 대우를 할 필요가 없던 것이지만, 야수 파트는 그렇지 못하다. 투수 출신인 선동열은 문자 그대로 방망이 질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도 없을 뿐더러, 삼성 라이온즈 팀의 일원도 아니었다. 선수 시절 삼성에서 뛰어본 적도 없을 뿐더러 초-중-고를 다 광주에서 나온 광주 토박이 출신으로 고향 선배도, 삼성 팀 선배도 아닌 말 그대로 일면식도 없는 외부인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코치라도 오래 해서 '오랜 시간 동고동락한 코치님'으로서 팀의 일부로 녹아들었다면 반발이 없을 텐데, 해태에서 온 주제에 숱한 삼성 프랜차이저들을 제치고 김응용의 후계자라는 이유로 코치를 고작 1년 하고 덜컥 감독이 되었으며, 일본에서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퇴를 하고 빠르게 올라간 덕에 나이로 누를 수도 없다. 말 그대로 새파란 어린 외부인이 갑자기 감독이라고 떡 굴러들어온 것.

선동열보다 훨씬 나이가 많고 지도자 커리어가 화려한 김응용조차 처음 삼성에 부임했을 때 '외부인'이자 '번번히 삼성의 앞길을 가로막았던 적장을 데려온다'고 반감이 상당했다. 그 때 한국시리즈 우승이 없던 삼성은 팀 차원에서 워낙 우승에 목이 말랐었고, 김응용 감독은 당시에도 60대로 야구계의 원로 중 하나이자 자타가 인정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명장이었음에도 반발이 적지 않았는데[37], 하물며 갓 마흔을 넘겼고, 일본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다지만 실제 코치 경험은 딱 1년뿐인 새파란 선동열은 오죽하랴. 게다가 하려는 야구는 여태까지의 삼성 라이온즈 팀 컬러와는 정반대의 스몰볼 불펜야구. 그야말로 사방이 적뿐인 상황이다. 실제로 선동열은 이런 조건때문에 팬들로부터도 민심이 안 좋다. 아무리 돈을 많이 대주고 전임 감독이 뭘 물려줬건 간에 투핏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고, 이후 왕조의 기둥이 된 채최박과 윤성환, 안지만, 오승환, 권혁 등의 선수들을 발굴해낸 나름의 업적도 분명히 있긴 하다. 그런데도 삼성의 시스템이 선동열을 우승시켰다느니 같은 말로 업적마저 크게 평가 절하 당하고 있는 데는 이런 '낙하산 외부인'인 선동열의 입지가 크게 작용한다.

이런 상황에서 팀을 휘어잡고 원하는 대로 팀을 이끌기 위해서는 자칫 수 틀리면 감독의 권위를 위협할 수 있는 프랜차이저가 아닌 자신과 마찬가지로 팀내 입지가 약한, 순혈이 아닌 외부 영입 선수들, 혹은 자신이 키워낸 젊은 선수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일 것이다. 물론 이게 좋은 방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상황에서는 분명 효과적인 방식이기는 했다. 상황이 선동열을 그렇게 만든 것. 초보 감독 시절부터 이런 안 좋은 방식으로 팀을 휘어잡는 방식을 몸에 익히다 보니 본인이 대스타인 기아에 가서도 그대로 했고, 양 팀 팬들로부터 프랜차이저를 홀대한다는 비난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홀대하기도 했다. 이런 스타일은 그가 일본에서 함께 한 호시노 센이치 감독과도 일맥상통한다.[38]

단 투수의 경우에는 상술한 임창용을 제외하면 그가 투수 코치 시절부터 선수들과 대화를 많이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차별이 거의 없다. 배영수의 경우에 혹사 논란은 있지만, 배영수는 선동열을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다. 위에서도 지적했지만, 투수 혹사 문제는 KBO의 고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이를 선동열 개인만의 문제 만으로 보기는 힘들다.

3.3.1. 오승환 타이틀 만들어주기

2005년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잘 던지던 선발투수 라형진을 조기 강판시키고 9승을 기록하고 있던 오승환을 등판시켜 시즌 10승을 만들어줌과 동시에 승률왕 타이틀까지 만들어줬다. 김영덕이 이끌던 팀들에게 네 번[39]이나 한국시리즈 패배를 안겨주었던 선동열이 김영덕으로부터 타이틀 만들어주기를 제대로 전수 받은 셈이다. 오승환이 이 해 KBO 최초로 한 시즌에 승리, 세이브, 홀드 모두 두 자릿수를 달성했고 신인왕까지 받았지만 이로 인해 저 평가되기도 한다.

3.3.2. 양준혁 은퇴 관련

2010년에 삼성의 프랜차이즈 선수이자 상징과도 같은 존재인 양준혁의 기용 문제 및 그의 은퇴와 관련하여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이미 2009 시즌부터 양준혁이 2008 시즌의 부진을 뛰어 넘는 활약을 보여주었음에도 무참히 플래툰으로 돌려버려 총 82경기에 밖에 못 나오게 하여 은퇴의 포석을 깔았다는 비판이 있다. 82경기에 나온 양준혁의 성적은 안타 82, 타점 48, 타율 0.329, 출루율 0.464 장타율 0.526 이었다. 후반기에는 부상이 있었다고는 하나, 정말 잘 나가던 전반기에서조차 플래툰으로 돌려버렸다.

2010년 시즌 들어선 아예 대타 요원으로 돌려버렸고 결국 한국 프로야구계의 타격 관련 대다수의 통산 기록 보유자였던 양준혁은 은퇴를 선언할 수 밖에 없었다. 양준혁이나, 다른 팀 감독들, 동료 선수들의 인터뷰를 볼 때, 기량으로 봐서는 절대 은퇴할 상황이 아니었다. 특히 1위팀인 SK 김성근 감독은 양준혁에게 왜 SK에 오지 않고 은퇴하느냐라고까지 하였다.

물론 2010년 시즌 초반에는 양준혁에게 얼마간의 기회가 간 것은 사실이고, 그 때 양준혁의 성적이 좋지 않았던 건 사실이나, 컨디션이 안 좋을 땐 계속 선발로 보내더니, 타격 타이밍을 잡아가고 4월부터 맹타를 휘두르며 성적이 올라가기 시작하자 대타 요원으로 돌려버린 것이 문제...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양준혁은 5월 말까지 주전으로 뛰었고, 아예 대타로 내려간 것은 6월부터다.[40]

양준혁이 2010년에 기록은 타율 .252/ 출루율 .387/ 장타율 .319로 그로서는 안 좋은 기록임에는 분명하다. 특히 장타율 .319은 심각했다.[41] 노장 선수의 건재함 정도를 측정하는 지표인 출루율은 3할8푼 이상으로 타율보다 1할3푼 가량이나 높았다. 당시 삼성 선수들 가운데 양준혁보다 출루율이 높은 선수는 박한이, 박석민 둘 뿐. 한 마디로 장타력을 제외한 양준혁의 기량은 살아있었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 특히나 전해 OPS 1.0에 가까운 타자는 리바운드만 한다면, 리그에서 5손가락 안에 드는 생산력을 발휘한다는 이야기지만 불과 2개월도 지켜보지 않고, 무엇보다 맹타를 휘두르기 시작할 무렵에 주전에서 제외한 것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따라서 팀 승리를 추구하고 전력을 극대화 해야 하는 감독이 은퇴를 종용한 것은 비상식적인 행위임에 틀림없다.

마찬가지로 또 다른 프랜차이즈 스타인 박한이의 경우에도 2009 시즌 후반기부터 이어진 맹활약에도 FA 계약부터 해서 2010 시즌 구상 인터뷰에 이르기까지 팀의 주력으로 쓰지 않을 것처럼 이야기하며 홀대하다가, 박한이가 2010 시즌 매우 뛰어난 활약을 보이자 어쩔 수 없이 주전으로 계속 쓰는 모양새를 보여 삼성 팬들에게 우려를 낳게 하고 있다.

반면에 강봉규, 최형우와 같은 선수들은 부진할 때도 계속해서 많은 기회를 주었기에 논란을 더욱 증폭시켰다. 심지어 당시 최형우의 수비가 그다지 좋지 않았음에도 집요하리만치 양준혁을 폄하하면서 최형우를 띄우는 모습을 보였다. 양준혁이 수비 잘 해서 골든글러브 탔나? 최형우의 경우에는 차세대 4번타자를 육성한다는 의미라도 있었으나, 강봉규의 경우엔 젊은 나이도 아니었기에[42] 특히나 많은 비판을 받았다.

결국 2010년 7월 양준혁이 은퇴를 선언하면서 강제 은퇴의 주범으로 지목되었다. 이른바 "선졸렬"이라 불리며 줄기차게 까이는 중. 올드 팬들이 많은 엠엘비파크 등에서는 反선동열 움직임이 절정에 다다르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원래 엠엘비파크는 친 선동열 측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 건이 터진 순간 선동열은 동네 북이 되었으니 이 건의 파장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다.

2010년 9월 19일 양준혁 은퇴 경기 후 감독의 코멘트는 다음과 같다.

"이런 은퇴식(경기)은 복 받은 거다. 나도 일본에서 은퇴 경기를 했지만 이렇게 화려하게 선수 생활의 끝을 마무리하는 것은 처음 보는 것 같다. 부럽다. 양준혁은 아주 열심히 했고 볼을 잘 맞혔던 선수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일부 삼성팬들은 위의 문장에서 강조된 문구를 나쁘게 해석해 이를 양준혁을 조롱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각종 커뮤니티에서 선동열에 대한 반감을 불질렀다. 양준혁 자신이야 당연히 선동열의 의중으로 은퇴했기 때문에 감정의 앙금이 남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위의 문구가 양준혁을 나쁘게 말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정서상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아도 기본적으로 스승으로서 은퇴하는 제자에게 딱히 나쁜 말보다는 덕담을 했을 것이고, 이를 나쁘게 해석하는 것은 꿈보다 해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43]

삼성 팬들의 다수는 선동열은 삼성 프랜차이즈 스타들을 불신하기 때문에 삼성 레전드인 양준혁에 대해 매정하게 대했다고 생각하고 이것은 아직도 삼성 팬덤에서 정설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팀을 불문하고 그냥 어릴적부터 스타 플레이어로 성공적인 선수 생활만을 했던 선동열의 성격탓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친정 KIA에서도 레전드 스타인 이종범에게 거의 비슷하게 은퇴를 강요했고, 비슷하게 해태-KIA 팬들의 공분을 샀기 때문이다. 선동열이 조금만 더 배려심이 있었다면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은퇴했을 당시에 주니치 측이 선동열의 의사를 존중해 주는 척 하면서 여러 언플로 비난여론을 누그러뜨린 것을 본받아서 부드럽게 노장들을 은퇴시킬 수 있었겠지만 거의 양자택일조로 양준혁(그리고 이종범)에게 은퇴를 강요한 것은 선동열의 배려심이 부족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삼성(그리고 이종범을 은퇴시킬 당시 KIA)에서 1군에 노화로 성적이 확연히 떨어진 노장을 계속 두기도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엔트리는 제한되어 있고, 노장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신인이 크기 힘들기 때문이다. 레전드 노장이 오래 있어주기를 바라는 팬덤의 생각과 팀의 전력을 항상 젊고 신선하게 관리해야 하는 감독의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단 입장에선 성적은 갈 수록 떨어지는데 연봉은 비싸니 부담스러운 것도 매한가지.[44]

양준혁은 선동열의 행보에 대해 원한이 남았던 듯,[45] 이후에도 트위터에서 선동열을 지칭한 사람을 저격하기도 하고 2011년 시즌 초에 유행했던 류중일 감독의 부도 수표 ' 나믿가믿' 발언 뒤에 양준혁은 "나도 믿어주는 감독님 밑에서 야구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2023년도에 박재홍과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서도 선동열은 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단칼에 말하면서 여전히 앙금이 남아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3.3.3. 외국인 선수 기용 관련

2008년 5월, 제이콥 크루즈가 방출되면서 박동희가 올린 기사 중 선동열 감독 부임 후 외국인 선수들이 성적에 대한 중압감으로 스트레스에 시달려 불만이 심했다고 언급되었다.

팀 하리칼라는 삼성을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언급했고, 제이미 브라운은 삼성 시절 하루하루가 악몽이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둘 다 당시 팀내에서 1, 2선발을 맡아 하리칼라는 2006년 팀내 다승 1위였고 브라운은 2007년 팀내 다승 1위를 했음에도 선동열은 둘에게 더 뛰어난 성적을 요구했었다. 게다가 선동열은 하리칼라와 브라운을 5이닝에서 길게는 6이닝만 던지게 하고 교체시켰으면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선수 요청이나 선수 능력 부족 등으로 교체했다고 말하는 등, 외국인 선수들이 자신의 기대만큼 성적을 못 올린다고 평가절하 하기도 했다.

이렇게 외국인 선수들에게 성적에 대한 중압감을 안기는 선동열의 방식은 에이전트들을 통해 다른 외국인 선수들에게까지 퍼지면서 삼성은 한동안 외국인 선수들이 가장 기피하는 팀이 되었다. 그리고 2008년에는 삼성 외국인 선수들은 그야말로 최악을 달렸다. 부진한 제이콥 크루즈 대신 데려온 톰 션은 실제로는 메이저리그 등판 경력이 7경기 뿐인 만년 마이너리거였고, 웨스 오버뮬러와 톰 션을 방출하고 데려온 존 에니스는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강판되면서 그동안 기용법에 대해 쌓인 불만이 터져 중도 귀국했다. #

최악을 겪은 2008년 이후로는 삼성의 팀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고 선동열도 외국인 선수들에 대해 부드럽게 대하면서 외국인 선수들의 불만이 대외적으로 표출된 적은 없었다.

3.4. 사임 및 속사정

2010년 12월 30일 갑작스럽게 감독직에서 용퇴, 후임으로 류중일 작전코치가 내정되었다.

사실 이미 이는 선동열의 성적과는 별개로 모기업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서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 해 봄에 2년 만에 비자금 사건으로 사퇴한 이건희 회장이 사면을 받고 경영에 복귀했고, 그 이후부터 삼성 내에서 이학수 前 부회장 라인에 대한 광범위한 숙청 작업이 실시되었다. 비주력 계열사에 가까웠던 야구단은 페넌트레이스-한국시리즈가 진행중이라서 오히려 늦은 편이었는데 김응용 사장이 12월 3일 그룹 사장단 인사에 발맞추어 6년 만에 사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숙청이 시작되었다.

뒤 이어 12월 8일 김응용, 임창용을 불러오는 등 삼성 왕조건설에 1등 공신이었던 김재하 단장[46]이 갑자기 건강 상의 이유로 "자진사퇴"를 선언했다.[47] 2009년 선동열의 재계약을 주도한 이 두 사람이 사퇴했기 때문에 선동열도 그룹내 안전막이 사라진 셈이었다. 사실 선동열의 사퇴 후 인터뷰를 간간히 뜯어보면 이 두 명이 물러난 이후 "분위기 봐서 스스로 나가라"는 암시를 삼성그룹에서 계속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선수 시절부터 스타플레이어로 지내온 선동열 특유의 눈치 없고[48][49] 뭐 별거 있겠냐고 생각하면서 다음시즌 구상에 더 몰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해임 직전까지 외국인 용병 선발에 관여했고, 해임 전날 조차 선수들에게 발표할 신년사를 작성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2월 30일 선동열은 갑작스럽게 삼성전자[50] 서울 본사로 호출되었고 이수빈(기업인) 구단주, 김인(1949) 사장, 송삼봉 단장이 함께 있는 곳으로 가서 해임을 통보받았다고 한다.[51] 이후 구단 측은 모양새를 고려해 대외적으로는 "자진사퇴"로 발표했고, 본인도 구단 입장을 고려해 "자진사퇴"했다고 언론에 발표했다. 새로 선임된 송삼봉 단장은 선 감독 본인이 용퇴 의사를 밝혔고 본인 후임으로 젊은 류중일 코치를 추천했다고 말했지만 이는 언플일 뿐이다. 왜냐면 선동열은 1963년 1월 10일생, 류중일은 1963년 4월 28일생. 류중일이 딱 108일 젊다.[52] 2009년말에 김재하 단장 김응용 사장 주도로 5년 재계약을 했는데 사내 정치의 여파로 인해서 1년만에 낙마한 것이었다.

당시 삼성 팬 커뮤니티에 돌던 이야기로는 삼성그룹 수뇌부가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이 SK에게 4전 전패 광탈, 그것도 4차전을 보고서 격분했고 그것이 용퇴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라는 지적이 있었고, 선동열에 반감을 가졌던 대부분의 삼성팬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이를 그대로 믿고 선동열의 해임을 반겼다. 하지만 한국시리즈 졸전이 감독 교체의 이유라면 한국시리즈 직후에 바꿨어야 하는데 거의 두달이 흐른뒤에 교체되었으므로, 한국시리즈와 선동열의 해임은 별 관계가 없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이렇게 갑자기 물러나게 된 원인인 삼성그룹 내의 사내정치를 분석해보면, 삼성 비자금 사건 때문에 물러났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이명박의 원포인트 사면을 받고 2010년 경영일선에 복귀하면서, 회장 부재시에 그동안 그룹 경영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던 이학수 前 부회장의 인맥을 대거 숙청했는데 그 유탄을 맞았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학수는 1990년대 후반부터 삼성의 2인자로 재직할 때 그룹 곳곳에 자기 사람을 심었는데 2008년 삼성 비자금 사건으로 둘이 나란히 물러나면서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고, 2010년 그룹에 복귀한 이건희는 이학수를 의심, 이학수 및 이학수 인맥들을 모조리 날려버릴 때 같이 날라갔다는 것이다. 혹은 이건희가 이재용 후계체제를 본격화하면서 그동안 그룹내에서 2인자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학수 인맥을 통으로 날렸다는 분석도 있다.[53][54][55][56]

2010년 당시의 삼성 라이온즈 야구단으로 한정해보면 이학수에게 김응용 사장은 부산상고 선배, 선동열 감독은 고려대 후배, 김재하 단장은 제일모직 경리과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학수의 직계 후임이다.[57] 그리고 평생 해태맨일것 같던 김응용을 삼성 감독으로 데리고 온 사람이 바로 이학수였다. 결론을 내보면 이건희가 이학수 인맥을 정리하면서 야구단에선 학연으로 연결되는 김응용이 날아갔고, 마치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히 이어져서 선동열까지 짤렸다는 것이다.[58]

일부 선동열 안티들이 삼성 고위층과 자신들의 정서가 비슷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승엽 와도 자리 없다 발언으로 이승엽 빠돌이인 이재용의 심기를 건드려서 짤린거라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위의 이유 때문에 짤린 거지 이승엽하고는 상관없다. 만약에 이승엽에 관련된 문제로 선동열이 이재용의 심기를 거슬렀다면, 선동열만 날라갔어야 하는데, 김응용 및 이학수 인맥 전체가 삼성그룹에서 날라갔기 때문. 또한 이재용은 이승엽이 아니라 아예 야구단, 아니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다는게 정설이다. 이건희가 식물인간 상태가 된 후 이재용이 한 일 중의 하나가 삼성 라이온즈에 대한 그룹 차원의 재정지원을 줄이고, 제일기획 산하로 편입시킨 것이었다. 이재용이 삼성 총수가 된 후 삼성 산하 스포츠단에 대한 재정지원은 대폭 줄어들었으며, 대부분의 삼성 산하 구단의 성적은 곤두박질 쳤다. 야구 뿐만 아니라 수원 삼성 블루윙즈 서울 삼성 썬더스도 2020년대 들어 비밀번호를 찍고 있다.

선동열에 부정적이었던 삼성 팬덤은 구단 수뇌부가 자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선동열을 해임한 것으로 여겨 대부분 기뻐했지만 실제로는 실제로는 성적이나 분노한 팬심에 상관없이 그룹 내 정치적 지형 변화로 인한 것이었고, 삼성팬들의 의견과는 무관했다. 형식은 자진사퇴이지만, 실제로는 윗선의 판단에 의한 경질이기 때문에, 삼성 측은 당연히 계약 기간 동안의 임금을 챙겨줄 수 밖에 없었고, 모양새를 위해 "선수단 운영위원"이라는 요상한 보직을 받았다. 그리하여 1년간의 야인 시절에도 계속 감독(4년간 계약 기간이 남아있었다.) 임금을 지급 받았다. 2011년 말, 기아 감독 선임 시에 나온 기사에 따르면 연봉 3억 8천을 그동안 월급 형식으로 지급해왔다고 한다. 2012년 기아 감독 선임이 되고서야 삼성은 선동열에 대한 임금 지급을 중단했다.

3.5. 삼성 감독 시절에 대한 팬들의 평가

3.5.1. 삼성팬

기본적으로 한국의 프로야구 팬덤은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 감독에 매우 관대한 반면 타 팀 출신 감독에는 매우 혹독한데, 선동열에 대한 삼성팬들의 감정은 이를 대표적으로 대변해준다고 할 수 있다. 특히나 삼성 팬덤 사이에서는 선동열이 매우 큰 비판을 받으며, 김한수-허삼영-박진만이라는 막장감독 3연타석 홈런이 등장하기 전까지는[59] 삼성 역대 최악의 감독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심지어는 선동열이 달성한 삼성의 2번의 우승도 감독 혼자만의 능력이 아니라 전임자 김응용의 유산 내지 선수들이 잘 해서 그랬다는 주장이 2010년대 내내 삼성 팬덤 안에서 그럴듯하게 돌았다. 그나마 2020년대 이후에는 사그라든 편.

이들은 또한 2005년 시즌 전에도 타 구단에서 눈에 띄는 전력 보강이나 신인 수급이 없었는데도 가장 큰 라이벌인 현대의 주전력을 빼오고도 2등과 큰 차이가 없는 아슬아슬한 패넌트레이스 우승했다는 부분은 선동열이 무능한 것을 반증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또한 키운 선수보다 부상시킨 선수가 더 많다고 주장한다. 4월 한 달 미친듯이 굴려대다가 부상으로 커리어 아웃된 권오원, 토미존 3회에 빛나는 권오준, 마찬가지로 화려한 수술 경력을 자랑하는 권혁 등이 있다. 오승환도 신인 시즌[60]에 미친듯이 굴리다가 뒤늦게서야 마무리로 정착시키며 관리를 시작했고, 이미 대학생 때 팔꿈치 수술을 한 선수를 99이닝이나 굴려대며 망가뜨렸으니 뒤늦게 관리한다고 나아질 리는 없었고 결국 이는 2009년 시즌 아웃으로 이어졌다고 주됨장한다.

이렇듯 삼성 팬들 사이에서는 평가가 매우 박했으며, 심지어 류중일 재임 시에는 선동열이 삼성 사상 최악의 감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다수였으나, 삼성이 2016년을 끝으로 암흑기에 접어들고, 이것이 10년 가까이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면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졌다. 물론 일부 팬들은 이런 암흑기조차 일방적으로 선동열의 탓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매우 방만한 경영을 이어온 안현호-홍준학 체제와 류중일과 그 이후 감독들의 육성 실패가 암흑기의 결정타였다.

사실 선동열 재임 기간이 삼성 역사적으로도 성적이 나쁘지만은 않은 시기였다. 기본적으로 80년대 중반에는 페넌트레이스는 잘 하더라도 KBO 한국시리즈에서 번번히 해태에 의해 물먹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한국시리즈라곤 1985년 통합 우승이 전부였다. 90년대는 아예 삼성의 암흑기였다. 성적만으로 본다면 류중일 시기 다음의 호성적을 냈을 때가 바로 선동열 재임시였다.[61] 다만 선동열은 팬심을 전혀 감안 안 하는 본인만의 야구를 했고, 심지어 선동열이 물러난지 10년이 지난 2020년대에도 일부 팬들은 선동열은 삼성 역사상 최악의 감독이라고 주장한다.[62] 류중일이 이끌던 왕조 시절까지는 선동열의 업적이 말 그대로 완벽히 부정되어 이견이 없는 팀 역대 최악의 감독으로 불렸을 정도. 99688시기를 거치며 선동열의 업적이 재발굴 및 재평가되며 확실히 김성근, 김한수, 2022년 허삼영보다는 평가가 높아졌다.

선동열은 본인이 라이벌팀( 기아 타이거즈) 출신의 프랜차이즈 스타였기 때문에 삼성팬들의 태생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감독 재직 시절 삼성의 레전드 프랜차이즈 스타들에 대해 매우 비정한 처분을 자주 내려 삼성 올드팬들의 악감정을 더욱 자극했다. 이승엽의 복귀에 대한 부정적 언급이나 양준혁 은퇴와 박한이 기용 문제로 그나마 남은 선감독 지지파도 온라인에서 잠수탔기 때문에[63] 선 감독 용퇴를 공개적으로 걱정하는 의견은 이대호 도루, 이대형 홈런만큼이나 보기 힘들 정도. 대충 "조금 불안하기는 한데 일단 부왘을 울려라" 정도의 분위기. 침소봉대하기로 유명한 한국 언론에서조차 선감독 퇴진에 팬들이 반발했다는 기사는 단 한 번도 올라오지 않았다. 물론 선동열 감독 시절에 유입된 신규팬들은 반발했지만, 이것도 순식간에 묻혀버렸다.[64]

대부분의 삼성팬들의 선동열 재직 기간에 대한 평판은 재직 기간이던 옛날이나 재직하고 있지 않은 지금이나 하나같이 부정적이다. 한창 선동열에 대한 적의가 끓어오르던 시절에는 일부 팬들은 선동열에 대해 " 백인천 이순철에 맞먹는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악의 감독"이라고 주장하며 재임 시절을 "멍게강점기"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런 팬들은 아예 선동열이 삼성의 암흑기의 주범이라고 주장하며[65], 현역 시절 성적까지도 과대평가되었다는 설을 풀고 있다.[66]

하여튼 삼성팬들의 선동열 감독 재직 시간에 대한 평은 10여년이 지난 2023년 현재까지도 상당히 부정적이다. 선동열 이후 부임한 류중일 체제가 4년 간 왕조[67]를 이루어 삼성의 우승 갈증을 완전히 해결해서 재평가될 여지도 더는 없어져 버렸다. 현 시점에서는 더한 인물들이 세 명이나 연속으로 나오기도 했고 여러 재평가 요소가 있어서 김성근보다 평가가 좋아지는 등[68] 역대 최악만 아닐 뿐, 그래도 긍정적인 소리는 듣지 못하는 편.

3.5.2. 비삼성팬

사실 상술한 부정적 평가 역시 삼성팬덤 한정이지 타 팀 팬덤에게는 그래도 좋은 커리어를 쌓았으니 훌륭한 감독이 아니었느냐는 의견이 존재했다. 5년 간 우승 두 번에 투수코치 재직 시절부터 삼성의 4연속 페넌트 -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이었던 철벽 마운드를 구축한 것은 객관적으로 분명히 공인지라 다른 팀들에서도 감독 자리가 나면 내외적으로 항상 물망에 올랐다. 서울특별시 팀들과 친정팀 KIA 타이거즈, 창원시에 신설된 NC 다이노스 중 한 팀이 선감독이 커리어를 이어나갈 팀들로 거론되었다고 한다. 다만 두산 LG는 2011년 10월 기준으로 일찌감치 신임 감독을 정하면서 무산.

야구계에서도 이미 실적과 명망이 있었고, 2014년까지 재계약까지 하면서 4년의 임기가 더 남아 있던 선동열 감독이 이렇게 잘려나간 것에 대해 경악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선감독이 이렇게 잘릴 정도면 우승 감독인 김성근 감독 정도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구단 맘대로 쳐낼 수 있다는 거... 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으나, 2011년 여름, 김성근 감독이 경질되어 4년 간 세 번 우승시키고도 잘릴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 짤린 건 재미없는 야구를 했기 때문이라고...

삼성팬이 아닌 다른 구단의 야빠들 및 현장관계자들은 이런 갑작스러운 해임을 좋지 않게 평가했다. 특히 감독들은 이런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게 결국 자신들도 혹시 언제 뜬금없이 퇴진을 강요당할지 모르는 선례가 생겨버렸기 때문이다. 준우승 감독을 이런 제대로 된 이유도 없이 짤라버리면 3위 이하 감독은 얼마든지 오너 맘대로 잘라도 할 말이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 위협의 유일한 예외로 평가받던 감독은 당시 우승 감독인 김성근이었으나, 그 김성근 조차 11월 경질되면서 결국 한국 프로야구는 성적으로 운영하는 주식회사가 아닌 오너의 장난감인 펫스포츠라는 사실만을 증명하고 말았다.

2020년대도 투수력이 약한 팀의 감독 자리에 공석이 생기면 팬들 사이에서는 그의 투수 조련 능력이나 운용 관리 능력만큼은 높이 사서 간간히 물망에 오르고 있다. 하지만 최근 대세가 젊은 감독을 선호하는 추세인데다가 KIA 감독으로써의 흑역사도 있고, 이후 너무 공백이 길어져서 실제 프런트의 선택을 받아 지휘봉을 잡을 가능성은 낮다고 볼 수 있다.

4.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

KIA 타이거즈 No.90
선동열(宣銅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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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범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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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2011년

2011년 10월 18일, 조범현이 KIA 타이거즈 감독직에서 자진사퇴함에 따라 후임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팀에서는 당연하게도 선동열 감독이 선수시절 달았지만 지금은 KBO 영구결번이 된 18번을 주려고 했으나, 그렇다면 영구 결번의 의미가 없다면서 90번을 달았다. 더불어 세트로 딸려온 수석코치는 이순철. 해태 전설들이 모여들고 있어!

KIA의 약점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게 불펜이고, 선동열이 삼성 감독 시절 잘한 일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게 철벽불펜 구축인 만큼, 당연히 선동열이 불펜을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관심이 가장 높았다. 선동열 본인도 그걸 아는지 스포츠조선과의 인터뷰에서 투수진 전원이 마무리 훈련부터 죽었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발언을 했다. 불펜 한두명의 문제가 아니라고.

그리고 임명되기가 무섭게 한 기자의 오타로 졸지에 부동산 폭격기라는 별명을 득한다. 실제로는 광주 주위에 땅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으나, 땅값이 내려가는 바람에 손해만 보고 그다지 재미를 못봤다고 한다. 그래서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받은 거금의 연봉도 대부분 날렸다고...

10월 21일 취임식을 가졌고 바로 마무리 훈련 일정을 변경, 1.5군 위주로 들어가던 훈련을 개편, 10월 23일부터 1, 2군 선수 전원을 훈련시키겠다고 밝혔다. 윤석민, 이종범, 최희섭 등 예외는 전혀 없으며 훈련을 통해 바로 옥석 가리기에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KIA 타이거즈의 감독이 되고 나서도 삼성 라이온즈가 전지훈련장으로 사용하는 일본 오키나와의 온나손 아카마 구장을 KIA 타이거즈의 전지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접촉하였다는, 소위 ' 멸치 두 박스 소문'[69]이 돌기도 하였으나 김평호 코치가 트위터를 통해서 전지훈련장은 아카마 구장이 아니라고 인증했다. * 그래서 멸치 두 박스는 거짓으로 알려졌으나...결국 아카마 구장을 며칠 이용할 권리를 얻어냈다는 기사가 떴다. *

4.2. 2012년

해당 문서 참조.

4.3. 2013년

해당 문서 참조.

4.4. 2014년

해당 문서 참조.

2013년에 이어서 평균자책점 8위, 득점권타율 9위 결국 2년연속 9개팀중 꼴찌에서 2등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당시 이때는 주축선수들의 부상도 끊이질 않고 무기력한 불펜과 수비 공격력이 원인이 되고 결국 54승 74패라는 최악의 결말을 맞이하고 8위라는 실망스러운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결국 선동열은 팀에서 사퇴당하고 전국민적인 개망신을 당했으니...

4.5. KIA 감독 시절 특이사항

성적이 좋지 않았던 2012년, 이래저래 타이거즈 팬은 물론이요 타팀 팬들에게도 주목받는 것은 선동열의 감독으로서의 행보가 아니라 표정 변화(…)였다고 한다. 득점 여부에 관계없이 카메라가 비춰주는 선동열의 뚱한 모습이 그림자와 특유의 푸짐한 얼굴살이 겹쳐서 한껏 무서워 보이는 게 포인트라면 포인트.

KIA에 부임하고 부쩍 자극적인 인터뷰가 늘었다. 2012년에는 성적이 좋지 않아서 더 부각되었다.

KIA 감독에 취임한 뒤 유독 對 삼성 전적이 영 좋지 않다. 2012년 9월 26일, 27일 추가 일정으로 편성된 대구 2연전에서 김진우 완투 윤석민의 완봉으로 2연승을 한 것을 제외하고, 부임 이후 정규 3연전에서는 삼성에게서 위닝시리즈를 가져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직구와 조크볼에서도 이 모습을 묘사하였다. 심지어 2013년에는 삼성전에서 트리플 스윕패를 당하고 시즌 상대전적 4승 12패를 기록중이며(...) 8월 11일 광주에서 이기기 전까지는 삼성전 11연패를 하고 있었다. 그 두 번 이긴 것 중 한 번은 선발 투수가 아네우리 로드리게스(...).

프랜차이즈 레전드 출신이라고 2012 시즌엔 욕은 덜 먹고 있었지만 2013-14 시즌 내내 욕을 흠씬 먹고 있다. 감독으로서의 밑천이 슬슬 드러나고 있다는 평. 투수조련 1인자라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평이었지만 2013년 전반기 종료 현재 팀 평균자책 4.53(7위), 팀 WHIP 1.53(8위), 팀 피안타율 0.285(8위), 팀 피출루율 0.364(8위), 팀 피장타율 0.402(8위), 팀 피OPS 0.766(8위)라는 처참한 성적을 보이고 있다. 가장 높은 게 평균자책 7위일 정도. 투수 교체로 그렇게 욕먹었던 조범현도 4년간 팀 평균자책 4, 2, 3, 3위다.

게다가 약한 불펜으로 역전패도 빈번하며, 선수들의 멘탈 문제와 잇단 실책성 병맛 플레이, 이전에도 그랬지만 여전히 한 박자 늦은 투수교체 타이밍, 경기를 쉽게 포기한다는 점과 희생번트에 대한 집착 등등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투수력을 강화하려면 수비를 강화해야 하거늘 수비에 소홀하다고 하여 언행불일치라고 까인다.

2013 시즌 하반기로 들어 갈수록 점입가경. 7월 23일 대패로 팀 평균자책도 8위가 되었다. 신생팀인 NC만도 못한 성적. 바로 밑이 팀이리고 부르기도 뭐한 경기력을 보여주는 한화니 사실상 최하위.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 결국 그동안 인내했던 KIA 팬들도 결국 한계를 보이고 선동열을 가루가 되도록 깠다.

여기에 매년 즉전감, 인성 등을 운운하면서 대책없이 대졸몰빵 픽을 하면서 차기 감독이 군 문제로 골머리를 썩혔다.[70] 이렇게 지명한 대졸중에 즉시전력 주전으로 자리잡은 선수는 아무도 없어서[71] 권윤민 스카우트 팀장과 함께 쌍으로 더 까이고 있다. 유망주까지 폭격해버린거임~ 그 외에 이 시절에 뽑은 대졸 픽 중에서는 이홍구, 박준표, 고영창, 고장혁, 강한울, 박준태, 이민우, 문경찬, 황인준, 김호령, 김명찬 정도를 건지긴 했는데[72] 문제는 즉시 전력감으로 제대로 써먹은 선수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홍구는 트레이드로 강한울은 최형우의 보상 선수로 떠났고 나머지는 군대를 갔거나 갔다온 이후에 활약하고 있다. 그와중에 대학교 진학을 만류하면서까지 데려온 박찬호가 2019 시즌에 대박을 터트리는 아이러니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비판받는 건 자기 스타일을 너무 고집한다는 점. 스타 출신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자신의 야구관을 다른 사람들이 보면 답답하다 싶을 정도로 밀고나가며, 부진한 성적에 대해서 반성하거나 주변의 조언을 구해서 변화를 시도하는 모습은 전혀 없다. 하루가 다르게 모든 게 바뀌어가는 현대 사회에서 야구계라고 예외일 수는 없는데, 발전이 없이 자기 방식만 고집하다가는 이대로 도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73] 일각에서는 삼성에서의 초보 감독 시절 2연속 우승을 한 것이 오히려 독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평도 있다.

우천연기를 너무 많이 시킨다고 타 팀빠들로부터 졸렬하다고 까인다. 사실 우천연기 자체는 KBO 리그 경기감독관이 결정하는 일이라 크게 까일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천연기와 별도로 계속되는 입놀림으로 스스로 비호감지수를 올리는 것은 사실이다. 자기 팀 상황이 개차반인데 한가롭게 국내선수들의 해외진출에 관련한 인터뷰나 하고 있으니, 야구팬들한테 오지랖도 넒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13게임 만에 모가지를 당한 김동엽 감독을 제외하고, 역대 타이거즈 감독 중에서 유일하게 팀을 가을 야구에 못보낸 감독다. 타이거즈의 최하위란 큰 굴욕을 안긴 두 감독인 유남호 서정환은 적어도 각각 2004년과 2006년에 팀을 4강에 보낸 적이 있다. 둘 다 그 다음해에 거하게 말아먹어서 문제였지만.(...) 덤으로 후임 감독 김기태가 2016년엔 와일드카드전 진출, 2017년에는 아예 리그 통합우승까지 달성하면서 이 불명예스런 호칭에 한층 더 치욕을 더하게 되었다. 그나마 김기태 이후 취임한 맷 윌리엄스 감독 역시 팀을 가을야구에 못 보내고 경질되며 유일하게 가을야구 못 보냈다는 타이틀은 벗게 되었다.

2013년엔 타어강이라는 현실이자 비아냥마저 들으며 신생팀 NC에게까지 밀려 8위로까지 추락해버렸다.
그리고 설령 그가 경질된다 하더라도 KIA 팬들은 이후 6668587667급의 암흑기가 올 것이라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2013 시즌 후에도 결국 살아남았다. 구단에서 계약기간은 채워주기로 했다는듯. 하지만 이순철 수석코치가 성적부진의 책임을 지고 대신 경질당했다.

그리고 2014년. 예상대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2014년을 마지막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날 것으로 보다. 하지만 선동열 감독, 2016년까지 KIA맨…2년 10억 6천만원 재계약 10월 19일 준플레이오프 1차전 경기도중에 뜬금포로 연임발표를 했다. 실제로 발표가 난 지 30분도 안 되어서 호랑이 사랑방이 터졌다(...).

KIA 팬들은 말그대로 충격과 공포에 빠졌고 타팀팬들은 축제분위기. 진짜로 종신각동님 되는 건가 팬들 중 일부는 2년 재계약 소식이 혹시 오보가 아닐까 생각하며 희망고문 속에서 정정기사가 뜨기를 기다려 보았으나 역시나. 많은 KIA 팬들이 떠날 것이 예상되며...3년동안 눌러참고 있던 광주아재들의 활약이 기대되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계약 기간이나 연봉으로 봐서는 애초에 3+2 계약이 아니었나 하는 의견도 올라 오는 중.

다만 세간의 평과는 반대로 선수들과의 관계는 별다른 트러블이 없는 편. 비록 이종범 등 기존 노장들과의 마찰이 있었긴 했지만 타자들에게 방망이를 선물해주고 과감하게 장비를 제공해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주니치에 뛰었던 연이 닿으면서 일본에서 물품을 공수해와서 선수들에게 선물해주기까지도 했다. 다만 이런 모습도 그냥 물품을 지원해 주는 정도에서 그칠 뿐이라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선 감독이 맘에 들어하는 선수들에게는 한없이 베푸는 성격이기는 하지만[74] 모든 사람에게 그랬다면 많은 선수들과의 트러블이 발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예상됐으나...

2014년 10월 24일자 매일경제에서 23일자 광주일보 기사를 인용하여 군입대를 하겠다는 안치홍에게 임의탈퇴를 시킬 수도 있다는 발언을 한 사실을 기사로 냈다. 매일경제 기사: 상처 투성이, `名家` KIA는 실종됐다 광주일보 기사: 선동열 “소통” … 선수들 “분통”

더구나 KIA 타이거즈 홈페이지에 본인이 직접 소통드립친 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이런 사태가 벌어졌으니 KIA 팬들의 분노는 가히 하늘을 찌를만 했다. 가뜩이나 재계약으로 KIA 팬들이 들끓은 상태였는데, 이 사건은 그야말로 불난 집에 휘발유를 부어버리는 꼴이 돼버렸다. 그런데도 선동열이나 KIA 구단은 이 일에 대해 사죄는커녕 일언의 해명조차도 하지 않아 KIA 팬들을 더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결국 악화된 팬심으로 인해 자진사퇴를 결정했다. 이번 재계약 직후 자진사퇴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처음 있는 일. 관련기사 이종범과 함께 타이거즈 역대 최고 프랜차이즈로 꼽히는 그가 다른 무엇도 아닌 팬들의 반대로 물러났다는게 심히 씁쓸한 부분.

# 이 기사에서는 '안치홍 임의탈퇴' 발언에 대해 이렇게 해명을 했는데, "너나 나나 프로들이고 어떻게 보면 우리들은 소모품들이다. 최악의 경우 구단쪽에서 임의탈퇴까지 생각하면 안되지 않느냐. 생각을 바꿔보자"고 말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미 때늦은 해명이라 대차게 까였다.

이후 또 다른 인터뷰에서도 이렇게 해명을 했다.
"오해가 있어요. 김선빈의 군 입대가 결정된 상황에서, 구단에서 저한테 치홍이 좀 말려달라고 부탁했어요. 치홍이한테 '너까지 가면 안 그래도 어려운 팀이 더 어려워 진다. 나중에 가면 안 되겠냐'고 했죠. '구단에서 못 가게 하면 어떻게 할래' 그랬더니, 치홍이가 '그래도 가야죠' 해서, '그러면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치홍이 생각이 확고했어요. 2년 재계약 후 어떻게 팀을 이끌어야 하나 고민이 컸는데, 치홍이 문제가 잘 못 전해지고, 팬사이에서 안 좋은 얘기가 나와, 물러나는 게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 KIA와 2014년 말 2년 재계약을 하고도 내야수 안치홍의 군대 문제가 불거진 질문-

4.6.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 평가

3년의 재임기간 동안 구단으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타이거즈 역사상 최초로 재임기간 내에 팀을 가을야구 못보낸 감독이 되었다.[75] 전임 조범현 감독보다 성적이 더 나으리라 생각하고 불러왔는데 팀 성적을 오히려 더 추락시켰으며, 그의 재임기간은 타이거즈의 암흑기로 불리고 있다. 명선수라고 해서 꼭 명감독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줬다는 평.

세부적으로 들여다본다면, 그나마 좋아보였던 타선은 이름값과 14년 타신투병에 의한 착시현상이었다. 재임 기간 3년동안 팀 WRC+는 95 정도로, 리그 6, 7위권을 전전했다.

오히려 투수진은 혹사가 없었고, FIP을 보면 의외로 평균에 근접하는 수준이었다. 정작 투수진이 처참해 보였던 것은 바로 큰 효과를 내지 못한 선발의 불펜 돌려막기와 리그 최악의 수비를 기록한 야수진 때문이었다. 13,14년 팀 ERA는 팀 FIP에 비해 0.8이나 높았으며, DER 등의 세부적인 수비지표는 한화와 최하위를 양분하였다. NC가 압도적인 수비로 포스트시즌 진출의 쾌거를 이뤄낸 것과 완전히 대조되는 결과인데 원인은 물론 주전선수들의 연이은 부상으로 인한 공백과 1, 2군 간의 심각한 격차로써 이전부터 생긴 고질적인 문제점이 결국 선동열 때 한꺼번에 터진 결과였다고 보인다. 물론 프로 감독은 노력으로 동정은 받을 수 있으나 결과물이 있어야만 인정을 받는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선수뎁스의 보충은 그럭저럭 괜찮게 이루어졌는데, 투수진에서는 양현종의 포텐셜을 만개시켰다는 어마어마한 업적이 있고 그 외에도 대졸몰빵픽 한다고 욕도 많이 먹었지만 의외로 그 대졸들 중 건진 선수도 많았다. 비록 그중 선감독의 의도대로 즉전으로 써먹은 선수는 드물지만 12년 임준섭, 김윤동, 홍성민, 박지훈, 13년 이홍구 고영창, 박준표, 14년 강한울, 박찬호, 김호령에 고졸에다 아직 1군에서 뚜렷한 활약을 보이진 못했지만 기대주인 최원준 황대인까지, 매년 2~3명 이상씩 1군급 자원들을 건져서 드래프트도 풍작을 거두었다. 팬들이 대졸에 기대치가 낮아 대졸이라면 무조건 발작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현장에서는 보통 드래프트에서 1군자원을 2명정도 건지면 성공적이라고 평하는데 보면 알다시피 매년 1군급 자원을 2~3명씩 뽑았다. 대졸이건 뭐건 드래프트에서 1군급 자원을 저 정도 건졌으면 나름 풍작으로 뎁스 보강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기존 선수들도 돌아와서 포텐을 다시금 폭발시킨 김진우, 준수한 백업으로 자리잡은 박기남, 포텐을 폭발시킨 신종길 나지완이나 개조에 성공한 이대형 등 나름 기존 선수층도 충실하게 키워냈고 최향남이나 최영필 등 나이든 선수도 쏠쏠하게 주워서 보강했다. 아쉬운 점은 이렇게 직접 키워낸 선수들이 후일 주축이 되어 왕조를 이룩한 삼성과는 달리 이 선수들이 나이 때문이건 부상 때문이건 대부분 오래 가지 못했다는 점과 임의탈퇴된 손영민, 군대를 가야 했던 김선빈이나 FA로 팀을 떠난 이용규, 부상 등으로 선동열 재임기간동안 부진에 시달린 최희섭과 이범호 김상현과 트레이드해 왔지만 역시 부진에 시달린 송은범, 베테랑의 비중이 높아 은퇴하는 선수도 많았던 등 기존 전력의 유출도 많았고, 육성과는 다른 얘기지만 즉시전력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외국인 뽑기가 3년간 거의 다 실패해서 결국 선동열이 보강한 만큼 빠져나간 것도 많아 재임 기간 중 팀이 강해지지는 못했다는 점.

그래도 선동열 시기 지명하거나 포텐셜을 발휘하기 시작한 양현종, 나지완, 김주찬, 김윤동, 김호령 등이 17년 우승에 일익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저평가받는 것에 비해 육성 면에서는 중박 이상은 쳤다고 할 만 하다. 죄다 선동열 나가고 난 후 완전히 만개해서 그렇지.

또한 재활시스템 등 설비에 대한 구단지원을 이끌어낸 것은 업적이라고 할 만하다. 재임 당시 구단 윗선에 모기업 이사들까지 찾아가서 재활시설 및 2군시설의 투자를 끌어내려고 고생한 건 사실이라고...뒤에 재계약을 그렇게 강행하려 한 것도 그 당시 윗선들에게 투자는 다 끌어왔는데 막상 그 열매를 먹을려고 할 타이밍에서 재계약이 걸려버렸기 때문이라는 뒷얘기도 있다. 그래도 재활 및 2군 투자의 성과는 김기태가 물려받아 잘 써먹고, 결국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으니까 그런 점에서는 기여도를 인정할 수 있다고 하겠다.

결과적으로 당장 성적을 끌어올릴 것을 기대하고 데려왔는데, 이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떨어진 성적과 삼성에서도 그랬듯 프랜차이저 홀대로 인한 기존 선수단과의 마찰으로 욕도 많이 먹었고 실패한 감독임에는 부정할 수 없으나 2군과 재활시설의 투자, 성공적인 신인발굴과 육성으로 리빌딩의 토대를 닦아 17년 우승에 일조한 면도 있던 감독이었다.

5. KIA 타이거즈 감독 사퇴 이후

KIA 타이거즈 감독 사퇴 후 야인으로 돌아간 그는 자택에서 가족들과 많은 시간들을 보낸다고 한다. 선동열의 현재 근황

2015년 11월에 개최되는 국제 야구대회인 프리미어 12 국가대표팀 사령탑 1순위로 거론됐지만 결국은 김인식 감독으로 내정되었다. 하지만 김인식 감독은 제 1회 WBC에서 국가대표팀 투수코치를 맡았던 선동열에게 코치로 합류를 상의한다고 해서 국제 대회에서 그의 참여가 다시 있을 지 미지수이다. 김인식 감독 "선동열 코치 합류 상의할 것"

2015년 7월 5일에는 2015년 11월에 열리는 국제 대회인 2015 WBSC 프리미어 12 기술위원으로 확정되었다. 프리미어12, 선동열 전 감독 등 기술위원회 확정

2015년 8월 20일 KBO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김시진, 이만수와 함께 KBO 유소년 야구캠프에 참여하여 아이들을 지도해주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선동열 감독님! 슬라이더 좀 알려주세요"

2015년 9월 3일에는 프리미어 12 국가대표팀 투수코치로 선임됐다. 투수코치로서의 평가는 꽤나 호평. 매끄러운 투수교체로 철벽불펜진 구축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는 평이 많다.

2015년 10월 2일 엠엘비파크에서 LG 트윈스 고려대학교 출신 깜짝 놀랄 인물을 감독으로 선임할지도 모른다는 썰이 나오자 선동열의 LG 감독 설이 나오기 시작했고 곧바로 엠엘비파크 한게는 엄청난 글리젠으로 혼돈의 카오스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곧이어 디시인사이드 LG 트윈스 갤러리 역시 그렇게 헛소문 하나에 거품물고 반대를 하였다. 어떤 스포츠 관련 사이트든지 항상 이런걸 지어내고 난리법석인것과 별개로, 프로감독으로서 선동열은 대중들이 원치 않는다는것은 확인 가능하였다.

2015 WBSC 프리미어 12 우승으로 이끈 투수코치가 되었다. 대회에서 매끄러운 투수교체로 좋은 결과가 이어졌다. 이에 네티즌들은 감독이 아닌 투수코치가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평가들이 주를 이뤘다.

프리미어 12에서 투수코치를 맡아 신들린 투수 운용으로 우승을 이끈 1등공신이 되었다. 이를 통해 어느 정도 명예회복을 하게 되었으며, 2016시즌의 결과에 따라 감독 복귀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KIA 시절 나타난 단점은 극복하고, 장점은 극대화하는 개선이 필요할 것이다. 아예 감독의 자질이 없다는 다른 금지어급 감독들과는 달리 선동열은 감독으로서 2회 우승 커리어도 있고 투수코치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는 인물이기에 재기의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보기는 곤란하다.

다만 재기를 위해서는 언급했듯 자신이 실패한 원인에 대해 보다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하는데, 스타 선수 출신으로서 감독 커리어에서도 조기에 성공을 맛본 것이 이를 가로막을 위험이 아주 높다.[76] 감동님계의 투 톱인 이만수 감독 또한 조기에 준우승을 맛보았고 장점도 보여주었지만 팀케미 관리에 심각한 난점을 보인 면에서 선동열과 꽤 공통점이 있는 편이다.

2016년 김성근 감독의 노장들 기용이 좋은 성과를 못내고 한화 이글스 운용이 망가지는데 한 원인을 제공하자, 선동열 감독을 데려오자는 의견이 대다수다. 노장을 정리하자는 뜻이다.

2016년 10월 12일 kt wiz 조범현 감독과의 재계약 포기를 선언하면서 후임 자리 후보 4인 중 한명으로 거론되었다. 기사에 이니셜 처리를 했지만 대놓고 힌트까지 주면서 선감독임을 야구팬들이 눈치챌 정도였다.

2017년의 인터뷰에서 이승엽, 양준혁, 이종범의 은퇴와 관련해 구단의 입장을 대신하여 악역을 자처했던 것이라 밝혔다.

2017년 7월 24일 야구 국가대표팀 전임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6.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파일:선동열.jpg

2015 WBSC 프리미어 12 이후 물밑에서 검토되었던 전임감독제가 고척돔 참사로 인해 WBC 2회 연속 탈락의 충격을 받자, 이에 선동열, 류중일, 조범현 등 3인의 전임감독에 대한 후보군이 추려졌고, 이에 2017년 7월 24일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첫 전임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아시안게임 대표팀 선수 발탁 과정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이후 활동은 선동열호 문서 참조. 그리고 결국 한국 야구 사상 최악의 참사가 터졌으며, 그래도 이후 경기를 모두 이기면서 금메달을 따긴 땄다. 하지만 선수단 선발 등의 문제로 선수단 출범 당시부터 논란이 끊이질 않았고(특히 선수단 선발 논란의 중심에는 오지환 박해민이 있었다.) 첫 경기였던 대만전을 제외한 모든 경기를 이기긴 했으나 내용면에서 봤을 때 실망스러운 모습이라 많은 비난을 받았다.

결국 '한국청렴운동본부'라는 시민단체로부터 권익위에 신고당했다. # 싸늘한 여론만 확인한 셈이다.[77]

아무튼 시민단체는 말 그대로 시민단체일뿐 거의 전체적인 내용이 없기 때문에 엎친데 덮친데 격으로 2018년도 문화관광부 국정감사 증인으로 신청됐다. 바른미래당 김수민의원은 MK스포츠와의 김대호 기자[78]와의 전화통화에서 “선동열 감독을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 증인으로 신청했다”라고 밝혔다. 병역면탈을 의도적으로 시도한 오지환(28·LG 트윈스)을 대표팀에 선발한 경위를 따지기 위해서다.

국민권익위원회에 2018년 9월 15일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야구 금메달을 지휘한 선동열 감독이 LG트윈스 내야수 오지환 등을 선발한 것이 부정청탁의 결과물일 수 있다는 신고가 접수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김수민의원은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증인 신청은 우선 소속 국회의원별로 이뤄진다”라면서 “위원회 교섭단체 간사단이 이를 모아 채택 여부에 대한 조율을 거친다”라고 설명했다. 교섭단체 간사단 조율을 거친 명단은 문화체육관광위원회 2018년도 국정감사 증인 채택으로 확정된다. 김수민 의원실은 “간사단 논의에서 이의가 제기되지 않으면 대체로 통과되는 것이 관례”라고 전했다.

2017년도 국정감사의 경우 2017년 9월 20일 제354회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제3차 회의에서 계획서 채택과 서류 제출 및 증인 출석요구가 모두 처리됐다.

결국 "2018년 10월 10일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참석이 확정되었다." #

이에 대해 선동열 감독은 2018년 10월 4일 긴급기자회견 등을 통해 오지환 등의 선발과정에 대한 입장을 밝힐 예정이라서 지켜봐야 될듯 싶다. 기사

그런데 하루 전인 2018년 10월 3일 <엠스플뉴스>에서 국회에서 제출한 자료를 통해 얻은 내용을 보면 “선수 선발은 감독 고유 권한, 부정한 청탁 운운은 명예훼손. 비공개를 전제로 선수 선발 기준을 제출할 수 있다” 즉 비공개 전환을 통해 자료를 제출해서 더더욱 의혹만 증폭되는 상황이다. "즉 오지환 선발과정은 7명인 현역 코치의 의견을 수렴해서 결정한 바이며 일본을 이겨서 메달을 딴 걸로 만족한 것 같은 의견..."

"즉 자신은 할일만 했을 뿐이라는???" 엠스플
"-“현장 스포츠인에 대한 국정감사 증인 채택은 위험”"
"-“야구는 철저히 통계와 포지션이 최적화된 독특한 스포츠. 그 기준과 통계에 따라 대표팀 선수 선발했다”"
"-“아시안게임 과정에서 여러 논란이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일본 이겼고, 국민 여러분들께 금메달과 함께 즐거움을 선사했다”"
"-“정치가 스포츠에 개입할 땐 평등해야. 다른 종목에도 유사한 문제 제기 있는데…”"
"-“난 국회가 정한 법과 제도에 충실했을 뿐 오로지 야구만을 위한 병역 특례제도를 설계하지 않았다.”"

2018년 10월 4일 기자회견
지나친 신중함이 오히려 많은 논란을 만들게 된 것 같다.

지금이라도 국민과 야구를 사랑하는 여러분들의 질문에 답하고자 이 자리에 섰다.

먼저 분명하게 말씀드린다. 국가대표 선발 과정에서 그 어떤 청탁도, 불법행위도 전혀 없었다.

나와 야구대표팀을 향한 근거없는 비방, 명예훼손은 자제돼야 한다. 나 선동열과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 명예가 존중되길 희망한다. 대표 선수 선발 과정은 공정했다. 코칭스태프와 치열한 토론을 거쳤다. 출장기록, 포지션, 체력 등 여러 지표를 살폈다.

토론 결과를 바탕으로 감독인 내가 최종 결정을 내렸다. 그럼에도 아시안게임 경기력, 전략적인 면에서 부족했다. 깊이 성찰하고, 더 노력하겠다. 무엇보다 국민과 야구를 사랑하는 분들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병역혜택에 대한 비판에 공감했다. 제대로 살피지 못한 점에 대해 죄송하게 생각한다. 앞으로 있을 대표팀 선발 방식, 병역혜택 제도에 대해선 정부와 야구미래협회의 결정에 충실히 따르겠다.

그럼에도 대표팀 감독이 감사에 서는 것은 내가 처음이라고 들었다. 마지막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다시 한 번 부족함으로 인해 심려를 끼쳐드린 점 죄송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당부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 감독인 내 권한과 책임으로 함께 금메달을 따낸 특정선수에 대한 비난은 자제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

대표팀에 대한 최종 책임은 어떠한 경우라도 나의 몫이다. 나와 대표팀, KBO는 이번 일을 계기로 대한민국 야구 발전을 위해 더욱 정진하겠다.

2020 도쿄올림픽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의혹을 다시 한 번 부인하면서 자신이 뽑은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기사 선동열 감독 기자회견 영상

하지만 2018년 10월 5일 엠스플 뉴스에서 선동열 감독 기자회견 중 언급한 내용도중에 KBO회의록이 있다고 해서 문서를 입수했지만 KBO 기록실 자료를 복붙한 수준에 스카우팅 리포트만 있고 참석자 토론 내용은 없는 등 내용이 부실해서 더더욱 의심만 가는 상황이다. 엠스플단독
"- KBO “대표팀 선수 선발 회의록 이미 대한체육회에 전달” 주장"
"-회의록 입수하니 한 줄 요약이 회의내용 전부, 참석자 토론 내용 전무"
"-선동열 “통계 활용했다.” 주장. 회의자료와 회의록은 KBO 기록실 ‘복붙’ 수준"
"-부실한 회의자료, 회의내용 없는 회의록. 야구인들 "선동열 감독과 KBO 운영팀은 야구계와 야구팬을 도대체 어떻게 아는 건가"전무"

또 한 가지, 기자배포용 회의록 자료 중 오지환 관련 기록 부분에서 모순이 발견되었다. 2018년 6월 10일까지 LG가 소화한 경기는 66경기인데 그 밑에 첨부된 통산기록에는 73경기에 출전한 것으로 나왔으며 홈런 순위도 오지환보다 많이 친 선수가 후보군에서만 해도 4명이 있었음에도 1위로 기재되어 있었다. 또한, 국회 제출용 자료에는 기자 배포용 자료에 기재되지 않았던 10개의 실책과 67개의 삼진 기록이 기재되어 있어서, 여기에 대해서도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관련 기사[79] 결국 손혜원 국회의원이 이를 국감자료를 통해 폭로했다. 어설픈 수를 쓰다가 오히려 화를 자초한 셈이다. #

이럴 바엔 사퇴하면서 솔직하게 털어놓으라는 김영석기자의 논평이 나왔다. 기사

2018년 10월 10일, 프로스포츠 사상으로 촌극이 펼쳐진 가운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 일반증인으로 출석하여 내용은 위에도 서술했지만 그대로 공정성을 강조했다. 기사

이에 대해 손혜원의원은 "양해영 전 사무총장의 시나리오대로 가는 것 같다"라며 "김응용 KBSA 회장과 함께 모든 선수를 뽑는 권한을 KBO에 넘겼다”며 “그렇게 넘기고나서 일주일 뒤 선동열 감독이 선임된다. 참 이상하지 않나”고 말했다.

“선동열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이용당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며 “양해영 전 KBO 사무총장이 계속 사무총장을 맡으면서 아마도 2020년까지 본인이 이 일을 맡으려고, 선수선발 권한을 가져왔다고 추측한다”고 했다.

아울러 손 의원은 “전임감독 제도도 이들이 만든 거다. 선동열을 그 자리에 두려고 한 것”이라며 “거기엔 아마 이 일을 획책한 사람의 더 큰 그림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기사

그런데 2018년 국감에서 야구에 대한 연관성이 전무하거나 지식 자체가 결여된 의원들을 청문회에 앉혀놓고 시종일관 고압적이고 민심 여론에만 기댄 사퇴 요구 및 제대로 된 해명은 듣지도 않은 채 질의를 진행하는 태도에 오히려 의원들에 대한 역풍이 거세지고 있다.

당장 바른미래당 김수민 의원은 전년도 김선빈과 오지환의 스탯을 놓고 블라인드 형식으로 선동열 감독에게 "A와 B 선수 중 누구를 선택하겠느냐"라는 질의 자체가 문제가 되었으며, 더불어민주당 손혜원 의원은 선동열 감독과의 질의 중 "국가대표 감독직 연봉 2억원이 너무 많은 거 아니냐", "판공비를 무한대로 사용할 수 있다" 등 본질과 어울리지 않는 깎아내리기식 질문을 주도하고 선 감독의 답변에 대해서는 일방적으로 말을 끊어버리고 본인의 주장만을 강조하는 등 질의 태도에도 문제를 보였다. 점입가경으로 SNS에서 자신을 질타하는 여러 댓글에 "나는 골목길을 걸었고 고무다라이"라는 궤변섞인 멘션을 올리며 정신승리를 하고 있다. 참고로 '다라이'는 대야의 일본말. 국감 전날이 한글날(9일)이었다.

이후 각종 기사 및 댓글여론은 "이럴거면 선 감독을 왜 부른거냐" "국민 정서에 반하는 건 오히려 국회의원들" "공부 좀 하고 질문하세요" 및 일부 스포츠 기사는 오히려 자신의 소신을 묵묵히 피력한 선동열 감독을 조금이나마 높이 평가하고 있다.

2018년 11월 14일 KBO에 오후 2시 30분에 기자회견을 하겠다고 요청했고 이후 정운찬 총재에게 사임 의사를 밝히며 국가대표 감독직에서 사퇴했다.
야구를 사랑하는 시민 여러분, 야구인 여러분. 국가대표 감독 선동열입니다.

저는 오늘 국가대표 야구 감독직에서 스스로 물러납니다.

지난 9월 3일, 저와 국가대표 야구팀은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하였습니다.

아시안게임 3회 연속 금메달이었음에도 변변한 환영식조차 없었습니다. 금메달 세레모니 조차할 수 없었습니다. 금메달을 목에 걸수도 없었습니다. 국가대표 감독으로서 금메달의 명예와 분투한 선수들의 자존심을 지켜주지 못한 데에 대해 참으로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결심했습니다. 감독으로서 선수들을 보호하고 금메달의 명예를 되찾는 적절한 시점에 사퇴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지난 10월, 2018 국회 국정감사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 증인으로 출석했습니다. 어느 국회의원이 말했습니다. “그 우승이(아시안게임 금메달이) 그렇게 어려웠다고 생각지 않는다.” 이 또한 저의 사퇴결심을 확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됐습니다. 국가대표 감독직을 떠나며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감독의 책임은 무한책임입니다. 저는 그 책임을 회피해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선수선발과 경기운영에 대한 감독의 권한은 독립적이되, 존중되어야 합니다.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귀국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간 여러 일들이 있었습니다. 한국청렴운동본부가 국민권익위원회에 저의 부정청탁금지법 위반 여부를 조사해달라는 신고를 했습니다. 억측에 기반한 모함이었습니다. 마음 아팠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종결 처분이 내려졌습니다. (구체적 문제 제기가 무엇이었는지, 어떤 절차를 거쳐 종결처분되었는지에 대해 국민권익위원회에 정보공개를 요청했습니다만 알려줄 수 없다는 답변만 들었을 뿐입니다.) 잠시 언급했듯이 국가대표 감독의 국정감사 증인 출석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으며, 대한체육회 역사상, 국가대표 감독 역사상, 한국야구 역사상 처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스포츠가 정치적 소비의 대상이 되는, 그리하여 무분별하게 증인으로 소환되는 사례는 제가 마지막이길 간절히 희망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정치와 스포츠는 분리되어야 마땅합니다.

불행하게도 KBO 총재께서도 국정감사에 출석해야만 했습니다. 전임감독제에 대한 총재의 생각,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자진사퇴가 총재의 소신에도 부합하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정치권 일각의 ‘스타 선수가 명장이 되란 법 없다’라는 지적, 늘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감독직 수행에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째는 인내심을 갖는 것. 둘째는 인내하는 것. 셋째로 가장 중요한 것이 인내심입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사표를 제 가슴속에 담아두고 기다리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수차례 사퇴를 공표하고 싶었습니다만 야구인으로서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국가대표 야구선수단의 명예 회복, 국가대표 야구 감독으로서의 자존심 회복, 아시안게임 금메달의 영예 회복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야구인의 대축제인 포스트시즌이 끝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오늘 사퇴하는 것이 야구에 대한 저의 절대적 존경심을 표현함은 물론 새 국가대표 감독 선임을 통해 프리미어12나 도쿄올림픽 준비에 차질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아시안게임 야구대표팀 구성 과정에서 있었던 논란에 대해 다시 한번 사과드리고자 합니다.

기자회견과 국정감사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우리 시대 청년들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병역 특례에 대한 시대적 비판에 둔감했습니다. 금메달 획득이라는 목표에 매달려 시대의 정서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습니다.

다시 한번 정중한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공을 만지기 시작한 이래 저는 눈을 뜨자마자 야구를 생각했고, 밥 먹을 때도 야구를 생각했고, 잘 때도, 꿈속에서도 야구만을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야구를 생각하지 않은 유일한 시간이 있다면 마운드에, 그리고 덕아웃에 서 있을 때일 것입니다.

앞으로도 야구에 대한 저의 열정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사퇴 이후 KBO 정운찬 총재, 당시 더불어민주당 손혜원 / 바른미래당 김수민 의원은 야구팬들에게 현재까지 까이고 있다.

아무튼 2019년 1월 28일 후임으로 고려대학교 시절 같은 룸메이트기도 했던 김경문 감독이 선임되었다.

2020 도쿄 올림픽에서 치러진 이스라엘전 경기에서 오지환이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며 선동열 감독의 선구안도 재평가 받고 있다.

덤으로 전대회 감독과 담대회 감독이 같은데 본인의 삼성 후임감독이다.

이후 본인의 자서전에서 국정감사 출석이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라며 왜 본인이 이 자리에 서야 하는지 자괴감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손혜언 의원의 망언에는 어이가 없으며 부끄럽다면서도 나름대로 좋은 경험이었다고 덧붙이기도. 더불어 하도 억울해서 부정청탁금지 위반과 관련해 국민권익위원회의 명확한 해명을 요구하며 행정 소송을 걸었다고 한다.

7. 다시 야인으로

국가대표팀 감독을 떠난 이후 뉴욕 양키스에서 연수를 받기로 했으나 코로나19 영향으로 보류되었다.

이후 온택트 연수를 시작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일간스포츠에서 '선동열 야구학'이라는 칼럼을 연재했다. 구시대적 야구관이 아닌 전문적인 데이터 분석을 통한 세이버매트리스적 해석과 과거 자신의 야구관에 대한 반성으로 감독 시절 선동열을 생각하던 팬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팬들은 호평 일색인데, 역시 역사에 길이 남을 최고의 투수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는 평이 중론이다. 1편 2편 3편 4편 5편 6편 7편 8편 9편 10편 에필로그

2019년 10월 22일, 본인의 야구인생을 담은 야구는 선동열이라는 에세이를 발매했다.

2018년 국가대표 감독을 마지막으로 야인 생활을 하고 있고, 은퇴 선언은 하지 않았기에 KBO 리그 감독이 경질되면 꾸준히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본인 역시 지도자 연수를 다녀오고 LG 트윈스 kt wiz, 두산 베어스 스프링캠프에서 투수 인스트럭터로 활동하였기에 현장 복귀에 어느 정도 여지를 남겨놓고 있는 상황. 실제로 일부 구단에서 면접 혹은 감독 후보로 접촉한 적이 있다고 한다.

8. 역대 감독 전적

역대 감독 전적
년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2005 삼성 라이온즈 126 74 48 4 1위 우승
2006 126 73 50 3 1위 우승
2007 126 62 60 4 4위 4위
2008 126 65 61 0 4위 3
2009 133 64 69 0 5위 -
2010 133 79 52 2 2위 준우승
통산 770 417 340 13
년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2012 KIA 타이거즈 133 62 65 6 5위 -
2013 128 51 74 3 8위 -
2014 128 54 74 0 8위 -
통산 389 167 213 9
총계 1159 584 553 22

[1] 특히 두산은 선동열을 감독으로 영입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협상을 했으나 선동열 쪽에서 감독 취임 조건으로 전력 보강 등 적극적인 투자를 요청하는 바람에 협상이 결렬되었다. 당시 두산은 그룹 차원에서 구조조정을 하면서 제조업에서 중공업으로 체질 개선을 하고 있었고, 결정적으로 두산 구단은 돈 안쓰는 구단 중 하나로 악명이 높았었다. 그래서 선동열과 고려대 시절 배터리를 이루던 김경문 배터리코치를 새 감독으로 선임했다. [2] 여담이지만 두산과 LG는 선동열을 감독으로 영입하겠다고 기존 1군 감독이던 김인식 이광환을 용퇴시키기까지 했는데, 정작 선동열이 삼성 코치로 가버리는 바람에 두 구단 모두 멀쩡한 감독을 내친 셈이 되었다. 결국 두산은 대안으로 김경문 배터리코치를, LG는 이순철 주루코치를 신임 감독으로 승격시켰는데, 김경문과 이순철을 감독으로 선임한 뒤 이듬해부터 두 구단의 결과에 대해서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3] 이 이후로 약 19년 뒤 삼성한테 선동열을 뺏긴 두산은 삼성의 한 프랜차이즈 선수를 감독으로 선임을 했는데 그 이름은 다름이 아닌 이승엽이다! [4] 본래 김응용 감독은 2000년 말 해태에서 삼성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5년 계약을 맺었다 보니 2005년까지 계약기간이 남아 있었다. 계약 기간 1년이 남은 김응용 감독은 사장으로 영전했다. [5] 하지만 2013년 한국시리즈에서 3년 연속 통합 우승을 달성한 류중일에게 완전히 묻혀버렸다...게다가 선동열은 이 시기에 타어강 발동... [6] 이미 1991~1992년에 김성근이 감독을 하던 시절에 스몰볼 야구를 했다가 욕을 배부르게 먹은 전적이 있다. [7] 2014년 이후 한화 이글스의 유입팬들 중 상당수가 SK시절 김성근 감독 개인의 팬인 것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 원래 프랜차이즈 스타 감독이 다른 곳으로 이적하면 개인팬들도 그 팀을 많이 응원한다. [8] 단, 오승환은 스카우트 당시 선동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카우트진의 판단으로 뽑았으며, 데뷔와 동시에 놀라운 활약을 보였기 때문에 선동열이 키웠다고 할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오승환 특유의 투구폼은 손 보지 않고 유지하게 했다는 공적은 있다. [9] 그냥 자리 잡지 못한 그저그런 선발이 아니라 04년에는 시즌 중 불펜으로 내려갔지만 11승이나 거둔 뛰어난 선발 자원이였다. [10] 이는 아직도 사실로 믿는 사람이 많다. 권오준이 불펜으로 전향하기 전인 2004년에는 153⅓이닝을 소화했는데, 실제로 혈행장애가 있었다면 이만큼 많은 이닝을 소화할 수가 없다. [11] 2007년 권혁의 9이닝당 탈삼진 수는 11.64개로 불펜 투수임에도 100탈삼진을 찍는 등 엄청난 구위를 자랑했었다. 게다가 이때 권혁은 등판하면 거의 1이닝 이상씩 던졌는데, 결국 팔꿈치 통증으로 8월 중순 1군에서 말소되어 3주 가량을 쉬고도 60경기 77⅔이닝을 소화하는 등 부상 복귀 첫 해임에도 관리받지도 못하고 엄청나게 굴려졌다. [12] 다만 안지만의 경우엔 2007년에 5이닝 동안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고 있었는데, 아무 이유 없이 그냥 교체된 적이 있었다. [13] 보통 일본 야구계나 이에 영향을 받은 지도자들이 동의하는 편이며,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지만 논란이 있다. 이와 반대되는 지론이 "투수의 어깨나 팔은 지우개같은 소모품이다"인데, 현 시점에서는 이쪽이 더 정론에 가깝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결국 최상의 경기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훈련과 휴식 둘 다 중요하고, 한쪽으로 치우치면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다. [14] 사실 본인이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인 1996년 성적을 망치고 그 해 시즌 종료 후 스프링캠프 때 3000투구 훈련을 해서 1997년 부활한 경험 때문에 이런 지론이 생긴 것이다. [15] 일본이나 미국 투수들은 어릴 때부터 체계적인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미리 몸을 만들어놓아 스프링캠프에서 많은 공을 던져도 무리가 없는 반면, 한국은 중-고교 야구 시절부터 성적에 매달려 몸을 만들 시간도 제대로 가지지 못하고 혹사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때문에 국내 투수들은 피지컬에 비해 근력이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많다. [16] 실제로 2004년 삼성 스프링 캠프에서 3000투구 훈련을 소화한 15명의 투수들은 이후 많은 후유증을 겪었는데, 아무래도 체계적으로 몸을 만들지 않고 무작정 공을 던지기만 하다보니 애초에 의도했던 근력 강화와 투구 기술 제고는커녕 부상에 시달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 대부분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거나 타팀으로 트레이드되었고, 결국 수술대에 오른 선수도 3명이나 된다. 대표적인 선수가 삼성 역대 최대의 신인 계약금을 받고 입단한 이정호. [17] 결국 최원제는 투수와 타자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이도 저도 아닌 선수가 되어 재능을 발휘하지 못 하고 조용히 은퇴했다. [18] 1차전 6이닝 무실점 후, 3~6차전까지 불펜, 마무리로 등판시켰다. [19] 이 당시 배영수의 무리한 등판은 선동열도 개인적으로 후회하는 부분이라고 한다. [20] 반면 류중일 체제에서의 오승환은 9회 딱 1이닝만 맡기는 방식으로 기용하며 2011~2013년까지 50이닝대로 관리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21] 당장 2003년에 이마양 트리오가 있어 타격이 강한 팀으로 유명한게 삼성이었다. [22] 사실 강동우는 선동열이 내친 쪽에 가깝다. [23] 신인 드래프트는 거의 로또급으로 복불복이다. 선동열을 멸치 뽑이로 까면서 당시 두산측이 거포를 잘 뽑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드는 예인 양의지만 하더라도 2006년 두산의 드래프트 순위가 8위에 불과했다. 즉, 양의지는 두산 측도 안목이 있어서 뽑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두산은 30줄에 들어 수비력을 크게 상실한 홍성흔 때문에 일단 포수 포지션을 한 명 뽑고 보니 거포로 성장해 로또가 된 것이다. [24] 이 와중에 30대 후반이던 양준혁도 실력은 받쳐주었으나 선동열의 타선 리빌딩 구상에서 벗어나 은퇴해야만 했다. [25] 류중일은 구자욱을 계속 썼지만, 15시즌 혜성처럼 떠오른 구자욱은 컨택이 돋보이는 퓨어 히터지 파워 히터가 아니었다. 류중일 감독 시절만 해도 전성기 김현수 스타일의 타격기계에 가까웠지 거포와는 거리가 멀었던 셈. 오히려 류중일이 물러나고 나서, 김현수와 유사하게 장타자로의 변신을 꾀하며 벌크업하고 스윙을 크게 가져갔는데, 11~14시즌의 김현수와 거의 동일하게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적이 떨어져가다가 19년도에 커리어 로우를 찍고 20년 시즌 전 신인왕 시절의 컨택 위주의 스윙으로 회귀하였다. [26] 대표적으로 2023년 롯데 자이언츠 내에서 투수코치 배영수 래리 서튼에게 항명했고 팀 성적이 곤두박질 친 예가 있다. [27] 대신 정회열 코치가 1군으로 올라온다. 물론 한대화가 한화 감독으로 가면서 본래 1군 배터리 코치인 강성우를 데려갔기 때문. [28] 흥미로운 것은 그 후 빈자리를 조범현 라인들이 차지한다는 점이다. 장재중과 황병일이 삼성 2군 코치로 들어왔다. [29] 먼저 달성한 순서대로 김응용, 김재박, 선동열, 김성근, 류중일, 김태형. [30] 허나 이것도 선동열이 삼성에 있었기에 이런 말이 나오지, 해태나 현대에 있었다면 단기전에서의 그에 대한 평가는 훨씬 박해졌을 것이다. [31] 좀 넓게 본다면 사장의 눈치를 본 거라 할 수 있는데, 대졸 투수 위주 지명 뿐만 아니라 당시 김응용 사장의 모교인 개성고 선수들( 정민우, 길태곤)도 지명했는데 둘 다 김응용의 후원 하에 개성고로 진학했다. 이렇듯 2010년 신인 지명 때 과도하게 윗 선이 개입한 탓에 신인 지명을 마친 후 삼성 스카우트진이 언론에서와는 달리 내부적으로는 불만을 터뜨리며 윗 선 개입이 줄었다는 후문이 있다. [32] 타이중 쇼크 항목에 그 흔적이 남아있는데,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의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류현진, 한기주, 장원삼이 입단했던 2006년을 마지막으로, 신인이 데뷔하자마자 프로 1군에서 활약하는 시대는 지나갔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그리고 당시 신인드래프트(대개 2007년부터 2014년까지로 꼽는다. 특히 2007~08년도와 2010~13년도)를 보면 지금 기준으로는 미지명되거나 하위픽도 간당간당한 실링으로 상위 라운드에서 지명받은 선수들( 김용주, 김명성 등)이 한가득이다. [33] 15개. [34] 이건 루머. 선동열하고 임창용은 해태시절 95 시즌 단 한 시즌만 같이 뛰었고, 그마저도 선동열은 1군 마무리지만 임창용은 거의 2군에만 있다가 시즌 끝나갈 때 1군에 잠깐 얼굴을 비춰 접점이 거의 없었던데다, 95 시즌 끝날 때까지만 해도 임창용이 마무리 투수가 될 거라는 생각을 아무도 안 했다. 구단에서 선발로 키우려고 했고, 실제로 96 시즌 초 7경기나 선발로 출장했다. 근데 승운이 너무 없자 스트레스를 받은 임창용 본인이 셋업맨으로 가겠다고 했고, 그 이후부터 우리가 아는 창용불패의 전설이 시작된 것이다. [35] 게다가 2006년은 팔꿈치 수술로 인해 고작 2이닝 던졌다. [36] 다만 2007년의 저 성적은 임창용의 태업이라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뭐, 정말 태업했다면 그게 더 문제지만. [37] 그나마 김응용은 양준혁이 복귀하면서 수족 노릇을 한 덕분에 팀을 장악할 수 있었다. [38] 호시노 감독도 새로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 과거 자신과 오래 보았던 선수는 내치고, 젊거나 외부 출신 선수들로 선수진을 갈아 엎었다. [39] 1986 삼성, 1988, 1989, 1991 빙그레 [40] 양준혁은 4월에 18경기 54타석, 5월에 18경기 58타석에 나섰다. 그리고 5월 기록은 타율 .217/ 출루율 0.379/ 장타율 0.239 /OPS 0.618. 차라리 부진하기를 기다려 냉큼 뺐다고 하면 모를까 잘하니까 일부러 뺐다기에는 어폐가 있다. 관련글 링크 [41] 타자의 BABIP은 투수의 BABIP과는 달리 타자의 기량에 탄력적으로 반응하는 편이다. 더군다나 양준혁과 같이 라인드라이브 히터의 경우에는 이러한 낙폭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편이다. 좀 더 정확히는 라인드라이브 타구의 비율을 살펴봐야 단정지어 말할 수 있는 문제다. 다만 타자의 라인드라이브 비율을 제공해주던 스탯티즈가 닫혔기 때문이다. 물론 간접적으로 추론하자면 장타율의 급감을 라인드라이브 비율의 급감과 연관지어 설명할 수는 있다. 본 각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BABIP 문서 참조. [42] 선동열이 그렇게 홀대하던 팀 프랜차이즈 스타 박한이의 동기로 나이는 박한이가 빠른 생일인지라 1살이 더 어리다. [43] 이런 과도한 해석은 선동열 개인적 인성마저도 나쁘게 보려는 당시 삼성 팬들의 정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44] 그러나 양준혁 때와 달리 이종범의 은퇴는 12시즌 KIA에게 독이 됐다고 팬들과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그럴만한 것이 외야진의 상황이 악화된 것은 물론 팀 케미스트리 적인 측면에서도 야수 조에서 리더 역할을 할 사람이 없어 최희섭이 비뚤어지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45] 본인 스스로도 자서전에서 은퇴시점에서 젊은 선수들과 경쟁하며 몇 년은 더 뛸 자신이 있었을 거라고 썼을 정도. [46] 1999년 11월부터 무려 만 11년간 단장을 맡았던 인물로, 상무보에서 취임하여 준우승 3번, 우승 3번을 거두고 부사장 직급으로 나갔다. 롯데 같은 구단이 구단 단장직에 상무보~상무를, 대표이사직에 상무~전무를 앉히는 것을 생각하면 전무~부사장급 단장이라는 이례적인 높은 직급으로 단장직을 수행한 셈이다. [47] 하지만 바로 한달 후에 대구 FC의 단장을 맡아서 자진사퇴가 아님을 강하게 암시했다. [48] 사실 삼성 감독 당시 팬심을 헤아리지 않거나 무시했던 여러 행동도 이런 선동열 특유의 성격 탓이라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본인이 항상 정상의 스타플레이어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나 평범한 선수의 정서나 처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데, 스타플레이어 출신 지도자들에게 자주 보이는 성격이다. [49] 반면 은사인 김응용 전 사장은 그룹 인사 개편 과정에서 본인이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것이 제자인 선동열 감독에게도 분명 영향이 갈 것이라고 예상했다고 한다. [50] 당시에는 삼성 라이온스는 삼성전자 산하였다. 2015년부터 이후 삼성그룹의 다른 계열사인 제일기획 산하로 옮겨진다. [51] 그나마 삼성그룹은 상당히 선동열을 예우해준 것이다. 물론 성적 같은 이유가 아니라 사내 정치라는 별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해임하려다 보니 선동열의 반발을 우려해 이렇게 해야만 했을 것이다. 많은 구단에서 감독을 경질할 때, 상식적으로 봐도 너무 무례한 경우가 적지 않다. 이듬해(2011)에 기아타이거즈에서 조범현 감독을 경질할 때, 훈련을 주재하러 온 조범현에게 프런트 말단 직원이 해임을 통보했고 2014년 롯데 자이언츠는 이종운 감독에게 문자로 해임을 통보했다고 한다. [52] 학번으로 따지면 선동열은 빠른 63년생이라 62년생-81학번이고, 반대로 류중일은 고교 시절 1년 유급하는 바람에 64년생-83학번과 동기라 선동열 쪽이 2학번 위다. [53]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김용철 변호사가 언급한 김인주를 비롯한 인물들은 이 시기에 거의 다 물러났다고 보면 된다. 구조본 출신이던 김인주 사장은 고문으로 쫓겨났다가 한직인 삼성선물 사장을 하다가 은퇴했고, 박근희 사장(경영진단팀장)도 이 때 은퇴했고, 이순동 사장(홍보팀장)도 한직에서 완전히 옷을 벗었다. [54] 이학수는 1998년 삼성그룹이 삼성자동차를 설립했다가 IMF로 위기에 쳐했을 때 구조조정본부장(부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이건희를 대신해 삼성그룹을 사실상 진두지휘했다. 게다가 노무현과는 부산상고 인맥으로, 이명박과는 고려대 상대 인맥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이 노무현-이명박 정권에서 그룹의 2인자로 군림했으며, 실제로 삼성은 이 시기에 급성장하여 형제의 난이 벌어진 라이벌 현대그룹을 제치고 압도적인 일등 재벌이 되었다. [55] 하지만 이건희와는 악연으로 결별했는데 이건희가 이학수에게 맡겨 회장 개인의 비자금을 조성할 때, 이학수는 자신의 개인 자금도 회장 비자금과 같이 굴려 불렸다고 한다. 이것을 이건희 측이 인지하여 이학수를 의심, 2010년도에 완전히 결별했다고 한다. 이학수는 삼성그룹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웬만한 재벌 총수와 맞먹는 수조원의 개인재산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삼성 재직시에 개인 재산을 불렸다고 한다. # [56] 삼성 그룹 내에서 이학수 인맥에 대한 숙청은 2010년부터 2012년까지 계속되었고, 매우 광범위하고 가차 없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삼성 계열사에서 임원으로 퇴직할 경우 퇴임 후에도 2-3년간 고문이나 자문위원 등으로 위촉되어 급여도 지급받는 등 재임 시 준하는 예우를 받게 되지만, 이렇게 숙청된 사람은 전혀 예우가 없었다고. 다만 김응용 사장은 이학수 인맥이기는 하지만 야구계의 거물로 상징적인 인물이다 보니 그룹 차원에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사장에서 물러난 후에도 2년간 삼성 구단 고문으로 예우를 해줬고 실제로 고문 시절 구단 운영에 간접적으로 관여하기도 했다. 이학수 인맥이어서 자르기는 했어도 기업인이 아닌 한평생 야구밖에 모르고 살아온 스포츠인이었다 보니 이학수 前 부회장을 빼면 크게 삼성 내에서 인맥도 없던 김응용 前 사장이 사내 권력을 위협할 야심이 없는 것은 뻔한 사실이기도 했다. [57] 당시 삼성 내에서 이학수 인맥의 핵심은 바로 제일모직 경리과 출신들로 이들은 구조조정본부(전략기획실)와 주요 계열사의 재무 계통에 포진하고 있었다. [58] 다만 선동열 라인으로 들어왔던 해태 출신 코치인 김평호와 정회열은 1시즌 더 1군 코치로 일하다가 11년에 우승을 맛보고 12년에 선동열을 따라 KIA로 떠난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삼성 출신 프랜차이즈들이 채우게 된다. [59] 사실 허삼영같은 사례의 경우 참작 여지가 있으나, 그래도 2022시즌 한정으로는 나머지 둘만큼이나 평가가 안 좋다. 김한수와 박진만은 KIA 시절 선동열이면 몰라도 아예 삼성 시절 선동열과는 감독 평가에서 동렬에 놓는 매체, 전문가, 팬덤이 전무할 정도로 월등히 낮은 평가를 받는다. 사실 삼성 시절 선동열은 물론이요 KIA 시절 선동열보다도 불량하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며, 역대를 통틀어서도 열 손가락을 논해볼 수 있다. [60] 05 시즌 61경기 99이닝. 전업 마무리 시작이었던 06시즌도 63경기 79 1/3 이닝이다. [61] 한국시리즈 2회 우승, 1회 준우승을 기록했다. [62] 다만 삼성 역대 최악의 암흑기인 홍준학 체제에서 선동열을 넘는 졸장이 김한수 - 2022년 허삼영 - 2023년 박진만으로 무려 3연속 등장하였기 때문에 진지하게 선동열을 삼성 역사상 가장 최악의 감독으로 생각하는 팬덤은 이제는 거의 사멸하였으며, 오히려 왕조 시대의 을 만든 점이 재평가되어 저 3명보다는 일반적으로 나은 평가를 받는 김성근과의 비교도 선동열에게는 모욕이 될 수 있다는 여론도 등장할 정도다. 물론 단순 업적상으로 꽤 괜찮았음에도 불구하고 삼성을 넘어서 리그 전체적으로도 이견의 여지가 없는 졸장으로 분류되는 저들과 비견된다는 것부터 선동열이 얼마나 삼성 팬덤에게 큰 미움을 샀는지 알 수가 있다. [63] 양준혁 은퇴 당시에는 선동열을 까지 않으면 해태팬 취급당할 정도로 살기등등한 분위기였다. 조금 부연 설명을 하자면 사실 2010년은 어지간한 선까들도 '어라?' 하는 반응을 보일 만큼 이전의 운영과는 확연히 (긍정적인 방향으로) 차별된 모습을 보여주었고, 때문에 삼성 팬덤도 점점 호의적인 반응으로 변해가던 때가 2010년이었다. 그러나 양준혁 은퇴 단 한 방으로 이 모든 것은 핫케익보다도 더 쉽게 뒤집혀버렸고, 이후 포스트시즌에서 보여준 경기를 포기하는 모습으로 그나마 조금이나마 남았던 선동열 지지자들도 점차 하나둘씩 등을 돌리게 된다. [64] 이전부터 지적되어 온 사항이지만, 선동열 감독은 팬들과의 관계도 그렇지만, 언론과의 관계도 소원한 편이다. 선수 시절 때는 그렇게까지 나쁜 건 아니었지만, 유독 감독 시절부터 껄끄러운 관계가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어느 팬은 선동열 감독이 마치 전자오락 하듯이 야구를 혼자서 하는 게임으로 여기는 것 같다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65] 위에서도 과한 대졸 신인 선호 문단에 그런 주장이 있긴 하지만, 어이없는 주장이다. 설령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의 주장처럼 대졸 신인 픽이 팀의 팜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해도 선동열 재임시의 픽이 류중일 시절에는 아무 이상 없다가 선동열이 삼성을 나간 이후인 거의 7-8년 후의 저조해진 성적의 원인이라는 주장인데, 삼성의 암흑기마저 선동열 탓을 하려는 안티팬의 입장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66] 2010년대 각종 야구 커뮤니티에서는 한동안 선동열을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한국인 투수들과 비교하여 현역 성적도 이제 보니 생각보다 별 거 아니라는 식의 주장을 하는 일부 선동열 안티팬들이 상당히 많았다. 물론 선동열이 뛰던 옛날 프로야구 초창기에는 30승 투수라든지 4할 타자와 같이 현재에 나오기 어려운 기록들이 많이 나오긴 했지만, 미국 일본에서도 자국의 초창기 리그에서 현재에 나오기 힘든 초인적인 기록들을 모두 존중하고, 이들의 기록을 현재에 비교하여 폄하하지 않는다. 이런 비교는 전혀 이성적이지 못한 주장인데도 한동안 반선동열 정서가 강했던 일부 야구 커뮤니티에서는 정설로 먹혀들어갔다. [67] 2015년에도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이루었지만 한국시리즈에서 패퇴했는데, 이는 불가항력적인 사건으로 인한 것이라 감독을 비판하는 팬들은 없다. [68] 삼성 시절 김성근은 한화 시절 김성근의 마이너 버전으로 불릴 정도로 평가가 매우 좋지 않다. 물론 그래봐야 김한수나 2023년 박진만보다는 나은 편. [69]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에서 한 누리꾼이 자신이 지금 오키나와에 있는데 지금 선동열이 촌장에게 멸치 두 박스를 주고 있다고 제보했다. [70] 참고로 신인드래프트에서 즉시전력 운운하면서 (대수비급) 어정쩡한 대졸들만 몰빵지명하는 것은 한화 이글스가 암흑기로 접어들기 직전에 나타났던 모습이다. 어정쩡한 대졸몰빵 지명 → 원툴(혹은 무툴) 대졸로만 가득한 2군 → 군입대기한에 따른 병역문제 → 주전은 노쇠화 돼 가는데 올라오는 신인은 없고 → 종이장처럼 얆아지는 뎁스. 이게 한화 이글스가 암흑기에 접어드는 과정이었는데 KIA 타이거즈가 거의 똑같이 따라가고 있다. [71] 박지훈이 입단 1년차에 맹활약했지만, 그 뒤론 개점휴업 상태이다. 입단동기인 홍성민도 첫 해에 3점대 방어율을 기록하였으나 김주찬의 보상선수로 롯데로 가게 되었다. [72] 이중 박준표, 고영창, 고장혁, 이민우, 김호령 등은 2019년 이후 KIA에게 없어서는 안 될 선수가 되었다.의문의 1승 [73] 스승인 김응용도 21세기에 20세기의 야구를 버리지 못해 결국 한화 이글스에서 또 다른 의미의 전설을 써내려가고 있다. 한편 김성근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의 코치 경험 등으로 자신의 야구관을 과감히 보완해나가면서 70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명감독으로 칭송받고 있다. 이에 대해 한 한화 이글스 갤러리의 모 갤러가 남긴 일침이 있는데, 바로 김응용도 과거의 김응용이 아니고 김성근도 과거의 김성근이 아니다다. 어찌 보면 두 감독을 같은 선상에 두고 비교하는 것 같지만 전자는 그대로 멈춰 있었지만 후자는 진보했기 때문에 둘은 다르다. 라고 평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평가는 김성근이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극적으로 반전되게 된다. 김성근의 한화에서의 막장 행보는 임기 내 꼴찌에 머무르면서 승부를 포기하는 모습까지 보였던 김응용조차 어떻게든 뎁스를 두껍게 만들고자 애썼고, 선수들의 폼과 선수생명을 존중했던 감독이었다는 평이 나오는 지경이다. [74] 특히 조영훈의 경우에는 삼성-KIA 시절 선동열 감독이 기회를 많이 부여했던 경우이다. [75] 정식 타이거즈 감독 중에서는 유남호에 이어 두 번째라고 할 수 있지만 유남호는 한 시즌을 풀타임으로 지휘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상 선동열이 유일하다. 거기다 유남호는 감독대행 시절이던 2004년 가을야구 진출을 이끈 바 있다. 선동열이 더 까이는 데에는 타이거즈 역사상 최악의 감독이라고 불리는 서정환도 정식 감독 부임 첫 해인 2006년 가을야구에 나갔고 온갖 기행과 고집으로 팬들을 분노케 했던 김기태도 3년 연속 가을야구 진출에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시켰다는 점도 있다. 2020년 큰 기대를 품고 계약한 맷 윌리엄스 제 9대 감독도 재임 기간 동안 포스트시즌이 좌절되어 계약 종료기간까지 1년을 남기고 구단에서 조기 계약해지를 해서 유일하지는 않게되었다. [76] 가장 행보가 유사한 인물이 바로 김재박 전 감독인데, 야구팬들이 나름 재기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평하면서도, 2010년대 KBO 트렌드에 맞지 않는 스몰볼 성향으로 인해 정작 자기 팀 감독으로는 주저한다는 것도 비슷하다. 근데 감독으로 한정하면 커리어 전반적으로 김재박 감독 쪽 평가가 좀 더 좋다. [77] 다만 이 단체가 선동열이 오지환에게 청탁을 받고 선발했다는 이유로 권익위에 신고를 한 건 맞지만, 선동열이 오지환에게 청탁을 받고 선발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은 점은 감안해야 한다. 이 단체도 선동열이 정말로 청탁을 받았는지 수사해달라고 한 거지 증거가 있으니까 처벌해달라고 한 것이 아니다. [78] 페이스북에서 선수과정에 대해 의문점을 기재했다가 삭제했지만 [79] 참고로 그 유명한 김영석의 기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