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풀 FC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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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 <colbgcolor=#d00027> 산하 구단 | 리버풀 FC| 리버풀 FC 아카데미 | 리버풀 FC 위민 | |
선수단 | 스쿼드| 스쿼드(간략)| 아카데미 스쿼드 | |||
스태프 | 보드진 및 스태프 | 아카데미 스태프 | |||
역사와 문화 | 역사 | 역사| 기록과 통계| 상대 전적| 역대 유니폼 | ||
주요 인물 | 레전드| 역대 회장 및 구단주 | 역대 감독 | 역대 주장| 역대 올해의 선수| 역대 리그 득점왕 | |||
역대 시즌 | 2004-05| 2005-06| 2006-07| 2007-08| 2008-09| 2009-10| 2010-11| 2011-12| 2012-13| 2013-14| 2014-15| 2015-16| 2016-17| 2017-18| 2018-19| 2019-20| 2020-21| 2021-22| 2022-23| 2023-24| 2024-25 | |||
우승 기록 |
1부 : 19회 |
1900-01, 1905-06, 1921-22, 1922-23, 1946-47, 1963-64, 1965-66, 1972-73, 1975-76, 1976-77, 1978-79, 1979-80, 1981-82, 1982-83, 1983-84, 1985-86, 1987-88, 1989-90, 2019-20 | ||
2부 : 4회 |
1893-94, 1895-96, 1904-05, 1961-62 | |||
FA컵 : 8회 |
1964-65, 1973-74, 1985-86, 1988-89, 1991-92, 2000-01, 2005-06, 2021-22 | |||
EFL 컵 : 10회 |
1980-81, 1981-82, 1982-83, 1983-84, 1994-95, 2000-01, 2002-03, 2011-12, 2021-22, 2023-24 | |||
커뮤니티 실드 : 16회 |
1964, 1965, 1966, 1974, 1976, 1977, 1979, 1980, 1982, 1986, 1988, 1989, 1990, 2001, 2006, 2022 | |||
UEFA 챔피언스 리그 : 6회 |
1976-77, 1977-78, 1980-81, 1983-84, 2004-05, 2018-19 | |||
UEFA 유로파 리그 : 3회 |
1972-73, 1975-76, 2000-01 | |||
UEFA 슈퍼컵 : 4회 |
1977, 2001, 2005, 2019 | |||
FIFA 클럽 월드컵 : 1회 |
2019 | |||
서포터즈 | The Kopite | |||
응원가 | 응원가 목록| You'll Never Walk Alone| Allez, Allez, Allez | |||
관련 상식 | 더비 매치 | 노스웨스트 더비| 머지사이드 더비 | ||
사건 사고 | 힐스버러 참사| 헤이젤 참사 | |||
기타 | 이스탄불의 기적| 안필드의 기적| 붉은 제국| 부트 룸| 제토 라인| 마누라 라인 | |||
구단 시설 | 경기장 | 안필드(1892~현재) | ||
훈련 시설 | AXA 트레이닝 센터| AXA 멜우드 트레이닝 센터 | |||
이 외 | 연고지 | 리버풀 | ||
스폰서 | 스탠다드차타드(메인 스폰서)| 나이키(킷 스폰서)| 익스피디아(슬리브 스폰서)| AXA(트레이닝 스폰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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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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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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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 명예의 전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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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헌액자 | |
1890 |
맷 맥퀸 Matt McQueen |
해리 브래드쇼 Harry Bradshaw |
|
1900 |
잭 콕스 Jack Cox |
알렉스 레이스백 Alex Raisbeck |
|
1910 |
아서 고다드 Arthur Goddard |
에프라임 롱워스 Ephraim Longworth |
|
1920 |
도날드 맥킨리 Donald MacKinlay |
엘리샤 스콧 Elisha Scott |
|
1930 |
고든 호지슨 Gordon Hodgson |
지미 맥도걸 Jimmy McDougall |
|
1940 |
잭 발머 Jack Balmer |
빌리 리델 Billy Liddel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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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
알버트 스터빈스 Albert Stubbins |
앨런 에이코트 Alan A'Cour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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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
로저 헌트 Roger Hunt |
론 예이츠 Ron Yeat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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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
이안 캘러한 Ian Callaghan |
레이 클레멘스 Ray Clemence |
|
1980 |
케니 달글리시 Kenny Dalglish |
앨런 한센 Alan Hansen |
|
1990 |
이안 러쉬 Ian Rush |
존 반스 John Barn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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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
제이미 캐러거 Jamie Carragher |
스티븐 제라드 Steven Gerrar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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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항 | |||
* 각 년대별로 2명을 헌액한다. | |||
출처: 리버풀 FC 공식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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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 히어로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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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로마자 이름 | 국적 | 포지션 | 선수 활약 기간 | 경기 | 골 | 감독 활약 기간 | 경기 | 승 | 비고 |
빌 샹클리 | Bill Shankly | MF | - | - | - | 1959-74 | 783 | 407 | [2] | ||
밥 페이즐리 | Bob Paisley | MF | 1939-54 | 277 | 12 | 1974-83 | 535 | 308 | [3] | ||
조 페이건 | Joe Fagan | MF | - | - | - | 1983-85 | 131 | 71 | [4] | ||
빌리 리델 | Billy Liddell | FW | 1939-61 | 534 | 228 | - | - | - | [5] | ||
이안 캘러한 | Ian Callaghan | MF | 1960-78 | 857 | 68 | - | - | - | [6] | ||
필 닐 | Phil Neal | DF | 1974-85 | 650 | 59 | - | - | - | [7] | ||
케니 달글리시 | Kenny Dalglish | FW | 1977-90 | 515 | 172 | 1985-91 / 2011-12 | 307 | 187 | [8] | ||
이안 러쉬 | Ian Rush | FW | 1980-96 | 660 | 346 | - | - | - | [9] | ||
존 반스 | John Barnes | MF | 1987-97 | 407 | 108 | - | - | - | [10] | ||
스티븐 제라드 | Steven Gerrard | MF | 1998-2015 | 710 | 186 | - | - | - | [11] | ||
출처: 리버풀 FC 공식 홈페이지 / 마지막 수정 일자: 2020년 8월 21일 |
130년이 넘는 클럽의 오랜 역사 동안 무수한 선수와 감독, 스태프들이 머물렀으며, 또 수많은 레전드들이 클럽에 헌신하며 크게 공헌하였다. 이에 구단에서는 가장 위대한 족적을 남긴 선수들을 헌액한 '명예의 전당(Hall of Fame)'[12]과 구단 역사에 기록될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을 선정한 '리버풀 FC 히어로즈(LFC Heroes)'를 공식적으로 발표한 바 있으며, 전설적인 활약 혹은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긴 선수들을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소개한 바 있다.[13][14] 이들 중, 유구한 역사 속에서도 구단의 최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960년대~1980년대 붉은 제국의 레전드들이 특히 두드러지는 편이며, 해당 기간을 대표하는 감독과 선수들은 대다수가 압도적인 우승 커리어를 자랑한다. 하지만 전후 시기와 1990년대~2010년대 사이 침체기를 보냈던 역사가 있는 만큼 해당 기간에 팀을 지탱하며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도 상당히 기념비적으로 조명되는 편이다. 그 이외에는 1890년대 구단 초창기와 1900년대 풋볼 리그 초기에 활약한 인물들, 위르겐 클롭 감독 부임 이후 우승 가도에 기여한 인물들이 다수 레전드로 평가받는다.
2.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
2.1.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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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osses[15] |
- 빌 샹클리 (1959~1974 / 783경기 407승 198무 178패)
리버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남자
1950년대 2부 리그에서 침체기를 겪던 팀을 다잡아 단숨에 1부 리그로 승격시킨 뒤, 리버풀을 1960년대 이후 잉글랜드에서 가장 위력적인 구단으로 변모시킨 구단 역사상 최고의 명장. 조지 케이 감독 이후로 오르지 못했던 잉글랜드 리그의 정상을 연달아 재패했으며, 이후 구단 역사상 최초의 유럽 대항전 우승과 컵 대회 우승을 달성해내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이후 리버풀의 최전성기를 지도한 후임 밥 페이즐리와 조 페이건 등 리버풀의 전설적인 부트 룸 코칭 스태프진을 구축한 시초격의 인물로 70년대와 80년대를 거쳐 유럽을 호령했던 붉은 제국의 실질적인 시작을 알린 감독으로 평가 받는다. 허나 샹클리가 리버풀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 이유는 단순히 성적 뿐 아니라 팀의 인프라와 시스템, 더 나아가 팀의 정체성을 창조한 인물로서 범접 불가능한 위상을 쌓았기 때문인데, 현재 리버풀을 상징하는 올-레드 색상의 유니폼과 YNWA 모토 등 구단을 관통하는 대다수의 요소들이 샹클리의 유산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이에 구단 역사상 최고의 감독일 뿐 아니라 명실상부 구단 역사상 최고의 인물로 이견 없이 꼽히며 실질적으로 리버풀의 아버지격으로 추앙받는 감독이다.
- 밥 페이즐리 (1974~1983 / 535경기 308승 131무 96패)
붉은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끈 명장
리버풀에서 선수와 코치, 감독 커리어를 모두 보낸 전설적인 인물로 샹클리의 바통을 이어 받아 구단 역사상 가장 장대하고 위력적인 전성기를 이끌었다. 최다 리그 우승과 더불어 구단 역사상 최초의 유러피언 컵 우승을 달성한 붉은 제국의 실질적 주인공이며, 리버풀 감독으로서 9년의 재임기간 중, 리그 우승 6회, 리그컵 우승 3회, UEFA컵, UEFA 슈퍼컵 우승과 유러피언 컵 3회 우승 등 총합 20개의 트로피를 쓸어 모으는 압도적인 위업을 쌓은 것으로 명망이 높다. 잉글랜드를 넘어 전 유럽을 호령한 위대한 커리어에 의해 리버풀 감독으로는 물론, 잉글랜드 국적의 감독 중 역사상 가장 성공한 감독으로 평가받으며, 재임 기간 중 3개의 빅 이어를 안필드로 가져와 41년 동안 유러피언 컵 최다 우승 감독이기도 했다. 샹클리와 더불어 구단 역사상 최고의 감독이자 가장 위대한 인물로 함께 꼽힌다.
- 조 페이건 (1983~1985 / 131경기 71승 36무 24패)
구단 최초의 메이저 트로피 3관왕
'안필드 바이블'의 창조자이자, 부트 룸의 모든 것. 일찍이 잉글랜드에서 가장 능력이 뛰어난 코치 중 하나로 오랜 기간 이름을 날렸으며 페이즐리 이후 구단의 전성기를 감독으로도 계승하여 잉글랜드 리그 최초의 리그 3연패와 더불어 리버풀 클럽 역사상 최초로 한 시즌 동안 3개의 메이저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단일 시즌으로만 따졌을 때는 붉은 제국의 최고점을 지도한 감독이며, 유러피언 컵을 우승한 네 명의 잉글랜드인 감독 중 한 명이자 마지막 잉글랜드인이기도 하다. 코치와 감독으로서 리버풀의 대소사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전파하여 구단이 자랑하는 '리버풀 웨이'를 탄생시킨 주축이라고 평가 받는다. 샹클리, 페이즐리와 함께 유럽을 지배했던 구단의 최전성기 붉은 제국 시절을 상징하는 레전드 감독이자 코치 중 한 명.
- 케니 달글리시 (1985~1991, 2011~2012 / 381경기 222승 95무 64패)
역사상 최고의 선수에서 전설적인 감독으로
붉은 제국을 상징하는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페이건 이후 플레잉 코치로 감독직을 맡아 감독으로도 위대한 족적을 남긴 전설 중의 전설. 헤이젤 참사 이후 감독직을 이어 받아 유럽 대항전에는 출전하지 못했으나, 1986년 리그와 FA컵 더블, 1988년 압도적인 리그 우승을 포함 3회의 리그 우승, 2회의 FA컵 우승을 이뤄내는 등, 국내 대회를 휩쓸며 리버풀의 전성기 마지막 불꽃을 화려하게 불태웠다. 위르겐 클롭 감독 이전까지 마지막 리그 우승을 달성한 감독이었으며, 2011년에는 암흑기에 빠진 구단에 소방수로 부임해 리그컵을 들어올리기도 했다.
- 라파엘 베니테즈 (2004~2010 / 350경기 194승 77무 79패)
이스탄불의 기적을 만든 스페인의 마법사
2000년대 중반 리버풀에 부임한 첫 해 이스탄불의 기적이라 불리는 기적의 대서사를 쓰며 구단 역사상 다섯 번째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의 위업을 만들어낸 감독. 이후엔 FA컵 우승과 프리미어 리그 준우승을 이끌었다. 당대 최고의 전술가로 명망이 높았으며 90년대 이후 침체기에 들어선 구단에게 매우 중요했던 중흥기를 이끌어낸 인물로 평가 받는다. 이후 구단의 재정 문제로 문제를 겪으며 더 많은 업적을 쌓지는 못했으나, 감독 재임 기간 중 구단 및 팬들과 끈끈한 정신을 공유하며 서포터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았다.
- 위르겐 클롭 (2015~2024 / 491경기 305승 99무 87패)
의심하는 자들을 믿는 자들로 바꾼 '노멀 원'
구단의 길었던 침체기를 끊어낸 뒤 다시 한 번 유럽 최정상의 레벨로 팀을 이끈 21세기 리버풀 최고의 감독. 부임 직후 암흑기 동안 정체되어 있었던 팀의 모든 부분을 수 단계 진일보시켰다는 평을 들으며 통산 여섯 번째 빅 이어를 안필드로 가져왔고 이후 30년만의 리그 우승을 달성, 모든 콥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첫 프리미어 리그 우승이자 1부 리그 통산 19번째 금자탑을 쌓는데 성공했다. 2020년대로 진입하면서는 구단 역사상 최초의 FIFA 클럽 월드컵을 비롯 국내 컵 대회들까지 휩쓸며 잉글랜드 구단으로서 들어올릴 수 있는 모든 최상위 대회의 트로피를 쓸어모았으며, 구단 제 2의 전성기를 이끌며 성공적으로 구단을 원궤도에 올려놓았다는 평이다. '독일인으로 환생한 빌 샹클리'라는 팬들의 평가가 리버풀에서 클롭이 어떤 존재인지를 반증한다.
2.2. 선수
- ★ - 리버풀 FC 명예의 전당 헌액자
2.2.1. 1890년대 ~ 1900년대
- 맷 맥퀸 (1892~1899 / 103경기 7골) ★
역대 최고의 멀티 플레이어
초창기 리버풀에 입단한 최초의 선수들 중 하나로, 창단 직후에 팀에 영입된 많은 스코틀랜드인들 중 한 명이었다.[16] 1893년 리버풀 역사상 첫 리그 경기에 선발 출전한 최초의 11인 중 한 명이며, 필드 플레이어와 골키퍼를 오가며 수많은 포지션에서 뛰었던 멀티 플레이어로 유명하다. 이후 1893-94 시즌과 1895-96 시즌에 리버풀을 2부 리그에서 우승시키는데에 기여했으며, 영국 축구 역사상 필드 플레이어와 골키퍼로서 우승 메달을 획득한 유일한 선수로 기록되었다. 은퇴 이후에는 리버풀 보드진에서 이사직을 맡다가 갑작스럽게 감독직을 사임한 데이비드 애시워스 감독의 대타로 리버풀의 4대 감독으로 부임해 리그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 해리 브래드쇼 (1893~1898 / 138경기 51골) ★
리버풀 최초의 국가대표
초창기 리버풀을 대표했던 골게터. 초창기 풋볼 리그 시절 리버풀을 이끌고 당시 2부 리그에 있던 팀을 두번이나 우승시켰으며, 1893-94 시즌에는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뉴턴 히스[17]를 격침시키며 승격에 기여했다. 시즌 내 두 자릿 수 득점을 올릴 수 있는 상당한 득점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리버풀 커리어 초반에는 센터 포워드로 활약하다가 두 번째 2부 리그 우승 당시에는 레프트 윙으로도 뛰는 등 유연한 포지션 소화도 가능했다. 이러한 다재다능함과 걸출한 득점력에 힘입어 리버풀 입단 이후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 뽑혀 리버풀 최초의 국가대표 선수라는 명예를 얻었다.
- 빌리 던랍 (1895~1909 / 363경기 3골)
원조 스코티시 레프트 백
초기 리버풀에서 핵심 레프트 백으로 활약한 스코틀랜드 국가대표. 1890년대 당시 유의미한 이적료를 발생시키며 잉글랜드 리버풀로 이적하여 축구계에 센세이션을 일찍이 남겼고, 이후 이적 첫 시즌만에 팀을 1부 리그로 승격시켰다. 1901년에는 리버풀 최초의 1부 리그 우승을 이끌었으며, 1906년에는 1부 재진입 1년만에 두 번째 1부 우승을 이끄는 파란을 팀과 함께 일으켰다. 약 14년간을 안필드에서 활약하며 톰 왓슨 체제 하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레전드.
- 잭 콕스 (1898~1909 / 361경기 80골) ★
안필드 사이드 라인의 화력
초기 리버풀에서 오랜 기간 활약하며 훌륭한 족적을 남긴 전설적인 측면 미드필더. 일찍이 대단한 득점력을 보유한 윙어로 이름을 날려 리버풀에 입단한 이후 오른쪽 측면의 주포로 가용되었다. 찬스를 잡았을 때 주저 없이 골문을 공략하는 플레이로 약 4.5경기당 1골이라는 포지션 대비 대단한 득점 기록을 남겼는데, 특히나 리그 우승을 견인한 1900-01 시즌에는 32경기 10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후 아서 고다드가 팀에 합류한 이후에는 왼쪽으로 자리를 옮겨 활약을 더 이어갔다. 리버풀에서의 활약에 힘입어 잉글랜드 국가대표로도 뛰었다.
- 알렉스 레이스백 (1898~1909 / 341경기 19골) ★
리버풀의 첫 번째 스타 플레이어
동 시대 최고의 센터백 중 하나이자 리버풀이 배출한 초창기 풋볼 리그의 스타 플레이어. 리버풀의 사상 첫 리그 우승을 견인한 주장이었으며, 이후 1904-05시즌 2부 리그 우승과 1905-06시즌 1부 리그 우승을 연달아 이룩시켰다. 첫 번째 리그 우승 이후 급작스러운 부진으로 팀이 강등을 당했음에도 "위기에 처한 내 구단을 떠날 수 없다."라는 말을 남기며 묵묵히 팀에 헌신하였고 이후 이어진 초창기 영예의 시절을 이끌었다.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에서도 주장직을 맡으며 활약했고, 선수 은퇴 이후엔 1939년부터 1949년까지 리버풀에서 스카우터직을 맡아 구단과의 동행을 이어갔다.
- 샘 레이볼드 (1900~1907 / 226경기 130골)
최초의 득점왕
20세기 초반 리버풀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스타 플레이어 중 하나로, 측면과 중앙을 오가는 멀티 포워드로 활약했다. 1902-03 시즌에는 가공할 득점 행진을 보이며 리그 31골로 구단 최초 득점왕에 올랐고, 2부 리그에 있던 1904-05 시즌에는 리그 19경기에서 무려 32골을 기록해 팀을 1부 리그 승격으로 이끌기도 했다. 또한 단 100경기만에 67득점을 기록하는 위업을 쌓은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 기록은 모하메드 살라에게 깨지기 이전까지 103년간 리버풀의 100경기 최다 득점 기록이었다.
- 아서 고다드 (1902~1914 / 414경기 77골) ★
'우아한 아서(Graceful Arthur)'
1900년대 초반을 풍미한 측면 미드필더. 샘 레이볼드, 잭 파킨슨과 함께 리버풀 공격진에서 호흡을 맞췄으며, 부드러운 윙 플레이에 의해 '우아한 아서'라 불리며 오랜기간 리버풀을 대표하는 스타 플레이어로 활약했다. 팀이 2부 리그로 떨어졌을 당시에도 리그에서 7득점을 비롯해 훌륭한 플레이를 보여주는 등 승격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이후 리버풀 커리어 내내 핵심 선수로 뛰며 구단 최초 공식전 400경기 돌파라는 기록을 달성했다.
- 잭 파킨슨 (1902~1914 / 219경기 128골)
로컬 보이 득점왕
리버풀의 초창기 유스팀이 배출한 머지사이드 대표 로컬 보이 스트라이커. 데뷔 경기 16분 만에 데뷔골을 터트릴 정도로 득점에 대단한 감각이 있었던 공격수였으며, 팀의 1부 리그 승격과 연이은 1부 리그 우승을 최전방에서 이끌었던 선수였다. 기량이 한껏 무르익었던 1909-10시즌에는 무려 리그 31경기 30골을 기록해 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1910년 잉글랜드 국가대표로도 뛰었다. 2010년대에 리버풀의 운영 디렉터직을 역임한 앤드류 파킨슨(Andrew Parkinson)의 증조부이기도 하다.
2.2.2. 1910년대 ~ 1920년대
- 에프라임 롱워스 (1910~1928 /370경기) ★
풀백의 왕자
20세기 초반을 주름잡은 전설적인 라이트 백. 지역방어가 대세였던 당시의 축구 트렌드에도 불구하고 건실하게 뛰어 폭넓은 활동량을 자랑했으며, '풀백의 왕자'라는 이명과 함께 1921-22, 1922-23 시즌 리버풀의 리그 우승 2연패를 이끌었다. 양발을 잘쓰며 본인의 포지션 그 이상의 선수였던 그는 리버풀 최초로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주장을 맡기도 했으며 무려 마흔살까지 선수생활을 이어가며 보여준 성실한 자세로도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리버풀에서 은퇴한 뒤에는 안필드 구장 관리 스태프로 리버풀에 헌신했다.
- 도날드 맥킨리 (1910~1929 / 434경기 34골) ★
리그 2연패를 이끈 전설적인 캡틴
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주장 중 하나이자 리버풀 축구사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인물 중 하나로, 풋볼 리그에서만 393경기를 뛴 전설적인 레프트 백이다. 에프라임 롱워스와는 팀의 좌우 풀백으로서 원조 황금 풀백 라인을 형성했다. 고전적인 수비수들이 대다수였던 당대 축구에서 유니크하게 오버래핑을 즐긴 공격적인 풀백이었던 그는 1921-22, 1922-23 시즌에 걸친 리그 2연패를 주장으로서 이끌었으며, 이후 윙과 중앙 미드필더를 오가는 다양한 포지션을 수행하며 리버풀에 오랜 기간 헌신했다.
- 엘리샤 스콧 (1912~1934 / 468경기) ★
'콥 스탠드의 왕(The King of the Kop)'
샘 하디의 빈자리를 무색하게 만든 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 중 하나.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17세의 나이로 넘어와 리버풀에 입단한 뒤 1921-22, 1922-23 시즌에 걸친 리그 2연패에 공헌했으며, 이후 무려 22년 동안 팀에 몸 담으며 리버풀 역대 최장 기간 근속 선수, 최고령 출전 기록을 세웠다. 절대적인 카리스마로 수비수들을 지휘하면서도 날렵한 몸동작으로 믿을 수 없는 선방들을 보여줬던 그는, 골키퍼임에도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리버풀의 최고 스타 플레이어였으며 머지사이드 지역 내에서도 에버튼의 딕시 딘과 함께 최고의 명성을 누렸다.[18] 이에 리버풀에서 개인 응원가가 최초로 만들어진 선수로도 알려졌으며, 에버튼 이적설이 나자 팬들이 나서서 이적을 막아섰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가 말년에 리버풀을 떠나게 되자 많은 팬들이 눈물을 흘렸다고도 전해진다.
- 해리 체임버스 (1915~1928 / 339경기 151골)
왼발의 '스마일러(Smiler)'
20세기 초반 풋볼 리그에서 위용을 떨쳤던 공격수이자 리버풀 역대 최고의 골잡이 중 한 명.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용사였으며, 전후에 리버풀의 주포로서 10여 년간 맹렬히 활약하였다. 강력한 왼발 슈팅이 강점이었다고 전해지며 통산 150골이 넘는 득점 기록을 남겼고 잉글랜드 국가대표로도 활동한 바 있다. 위력적인 왼발 킥과 대비되는 멋진 미소로 인해 'Smiler'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 딕 퍼쇼 (1919~1927 / 288경기 123골)
머지사이드의 득점 기계
머지사이드 축구사에 굵직한 이력을 남긴 전설적인 스트라이커. 리버풀에서 프로 커리어를 시작하여 풋볼 리그 2연패 당시 주전 포워드 중 하나로 활약하며 큰 공헌을 남겼으며, 해리 체임버스와 투톱 라인을 이뤄 1920년대 영국 내 최고의 듀오로 불렸다. 1925-26 시즌에는 35경기에 출전하여 29골을 넣었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5-0으로 대파한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다. 1927년에는 머지사이드 라이벌 팀 에버튼으로 떠나 딕시 딘과 호흡을 맞추며 리그 우승을 견인했는데, 이에 리버풀과 에버튼에서 모두 리그 우승을 경험한 최초이자 유일한 선수로 남아있다.
2.2.3. 1930년대 ~ 1940년대
- 고든 호지슨 (1925~1936 / 377경기 241골) ★
남아공산 천재 골게터
남아공 대표팀 초청경기에서 리버풀에게 해트트릭을 선사하며 이후 팀에 스카웃 된 남아공 국가대표 출신의 공격수.[19] 이후 1925년 영국으로 건너와 11년여 간 구단의 전방을 책임졌다. 득점 뿐 아니라 양발을 잘 쓰고 연계 플레이에도 강점이 있었던 그는 해트트릭만 도합 17회를 기록하여 리버풀 최다 해트트릭 기록 보유자로 남아 있으며, 총 377경기에서 241골을 기록해 0.63이라는 어마무시한 경기당 득점 수치를 기록하는[20] 등 팀의 위대한 레전드중 한 명으로 반드시 언급되는 선수이다. 이후 아스톤 빌라, 리즈 유나이티드에서도 좋은 스탯을 쌓아 풋볼 리그에서만 무려 295득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역대 풋볼 리그 통산 4위의 기록이다.[21]
- 지미 맥도걸 (1928~1938 / 356경기 12골) ★
스코틀랜드가 자랑한 왼발
스코틀랜드 파틱 시슬에서 건너와 머지사이드에 유래없는 날카로움을 선사한 전설적인 왼발 미드필더. 뛰어난 왼발 킥을 뽐내며 좌측 풀백과 좌측면 미드필더, 공격수와 수비형 미드필더 등 다양한 포지션에서 장기간 리버풀의 주력 선수로 활약했다. 당대 풋볼 리그의 스타 플레이어로 높은 평가를 받았던 그는 스코틀랜드 국가대표로도 활약했으며, 안필드의 왼쪽 사이드라인과 중원을 지배하며 팀에 헌신했던 레전드로 오랜 기간 높은 명성을 유지했다. 그는 팬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은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특히 1938년 리버풀과의 계약 종료 후, 고향 스코틀랜드로 이적하려던 계획을 접고 리버풀 팬들과 더 만나기 위해 남부 리버풀의 지역 축구 팀으로 이적한 일례가 유명하다.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맥도걸은 리버풀 팬들에게 줄곧 큰 사랑을 받았다.
- 잭 발머 (1935~1952 / 309경기 110골) ★
'해트트릭 오브 해트트릭스(hat-trick of hat-tricks)'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알버트 스터빈스와 함께 구단 역사에서 손에 꼽히는 투톱 듀오를 만들어낸 전설적인 공격수. 측면 포워드 출신으로 민첩한 움직임을 보유해 스트라이커로 포지션을 변경한 뒤 더 날카로운 공격력을 뽐낸 것으로 유명했다. 1946-47 시즌에는 리그 24득점에 성공해 24년만에 리그 우승을 이끌었는데, 이 시즌 발머가 기록한 3연속 해트트릭은 2008년에 페르난도 토레스가 2연속 해트트릭을 기록하기 이전까지 리버풀의 유일한 연속 경기 해트트릭 기록으로 남아있었다.[22] 또한 1938년 2월에는 에버튼을 상대로 30초만에 선제골을 뽑아 당대 구단 최단 시간 득점 기록도 수립했다. 1947-48 시즌부터는 리버풀의 주장직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총 17년간 리버풀에서 헌신했다. 은퇴 이후에는 리버풀의 코치진에 합류해 팀에서의 커리어를 더 연장하기도 했다.
- 필 테일러 (1936~1954 / 343경기 32골)
풋볼 리그의 '대포(Artillery)'
4~50년대 영국 축구의 거물 톰 피니와 리그 최고의 좌측 플레이어 칭호를 두고 경쟁했던 리버풀의 핵심 측면 미드필더. 일찍이 리버풀에 영입되어 잠재력이 풍부한 젊은 미드필더로서 성장해나갔고 1946-47 시즌에 팀이 1부 리그 정상을 차지하는데 공을 세우며 리그 최고의 측면 자원 중 하나로 이름을 알렸다. 커리어 후반부엔 포지션을 바꾸어 세련되고 침착한 수비수로 활약을 이어나갔으며, 1949-50 시즌에는 팀의 주장직을 맡는 명예를 누렸다. 주장으로 부임한 첫 시즌엔 팀을 사상 최초의 웸블리 결승전으로 이끌기도 했다. 약 8년간 리버풀에서 활약한 테일러는 1954년 선수 생활을 마감했으나, 후에 리버풀의 코치와 감독으로도 부임해 리버풀 커리어를 이어갔다. 감독으로는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으나 곧 이어질 빌 샹클리 시대의 선수진들을 구성하는데 큰 기여를 했으며, 팀에 대한 오랜 사랑으로 후에 많은 사랑을 얻었다.
- 빌리 리델 (1938~1961 / 534경기 228골) ★
'리델풀(Liddellpool)'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영광스러운 리그 우승을 이끌었으며, 이후 이어진 긴 침체기 동안 팀을 지탱해 중심을 지킨 전설적인 리버풀의 리더. 케니 달글리시가 '안필드의 왕', 스티븐 제라드가 '안필드의 심장'이라면 리델은 '안필드의 혼'이라고 불린다. 리버풀에 열 여섯의 나이로 입단하여 좌측 윙으로 주로 활약하며 알버트 스터빈스 등과 40년대 팀의 공격진을 이끌었고 전후에 밥 페이즐리와 함께 역사상 다섯 번째 리그 우승을 들어올렸다. 좋은 체격과 강인한 플레이, 강력한 슈팅으로 이름을 날린 그는 이후 50년대 길어진 팀의 암흑기 속에서 다른 클럽들의 이적 제의를 모두 뿌리치고 리버풀에 남아 팀을 대표하는 선수로 오랫동안 자리를 지켰다. 로리 휴즈 이후 3년간 주장직도 역임하면서 팀의 핵심 중의 핵심으로 자리잡은 그에 의해 당시 리버풀은 아예 리델의 이름을 따 '리델풀'이라고까지 불렸으며 빌 샹클리 시대 이전 리버풀을 가장 대표하는 인물로 알려졌다. 현재에도 리버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스코틀랜드 국가대표로 오래 활약했던 그는 스코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된 바 있다.
- 밥 페이즐리 (1939~1954 / 277경기 13골)
혼란 속에서도 팀을 지탱한 정신력
프로 선수 커리어 시작부터 은퇴까지 리버풀에서만 뛰며[23] 붉은 유니폼에 온 힘을 쏟았던 진정한 리버풀 맨. 빌리 리델, 맷 버스비와 함께 뛰며 전간기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리버풀에 헌신했으며, 전후에는 핵심 선수로서 리그 우승을 견인했다. 1948년 리그 경기에서 충돌로 인해 의식을 잃었지만 10분만에 그라운드로 다시 뛰어들어와 헤딩을 위해 머리를 다시 날렸을 정도로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던 그는 우승 이후 혼란스러운 암흑기를 보내던 팀에 끝까지 남아 1950-51 시즌 팀의 주장직까지 역임하는 등 최선을 다해 리버풀 커리어를 보낸 것으로 유명하다. 은퇴 이후에는 리버풀의 코치직을 수행했으며, 이후 샹클리의 뒤를 이어 리버풀 감독직까지 역임하였고 붉은 제국을 이끈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하나로 여겨진다.
- 로리 휴즈 (1943~1960 / 326경기 1골)
철벽의 원 클럽 맨
4~50년대 리버풀의 원 클럽 맨으로 활약하며 17년간 리버풀을 지탱한 작지만 거대했던 존재감.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리버풀에 입단하여 전후 팀의 통산 다섯 번째 리그 우승과 1949-50 시즌 FA컵 준우승을 견인했던 센터백이다.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굉장한 헤딩 능력과 발군의 포지셔닝으로 유명했으며, 이후 팀의 침체기에도 떠나지 않고 안필드에 남아 오랜 기간 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 이후 리버풀의 주장직도 역임하며 팀을 이끈 바 있으며, 잉글랜드 국가대표로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 출전하여 모든 경기에 나섰던, 최초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리버풀 선수이기도 했다.
- 알버트 스터빈스 (1946~1953 / 178경기 83골) ★
페퍼 상사에 그려진 리버풀의 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클럽 레코드 금액으로[24] 팀에 영입 되어 잭 발머와 함께 날카로운 공격력을 과시하며 시대를 풍미한 골게터. 야성적인 득점감각과 현란한 드리블링으로 첫 시즌만에 리그 24득점을 넣으며 발머와 함께 팀 내 공동 최다 득점자에 이름을 올려 리그 우승에 공을 세웠고, 그 다음 시즌에도 24득점을 몰아치는 대단한 득점 행진을 기록했다. 이후 40년대 팀의 핵심 공격수로 군림하며 당대 가장 유명한 선수 중 하나로서 팬들에게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다. 전성기를 보내던 시절의 임팩트가 워낙 대단하여 지역 내에서는 특히나 상당한 영향력이 있던 선수였는데, 심지어 1967년 '리버풀의 상징'인 비틀즈의 명반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의 앨범 커버 모델 중 한 명으로 꼽혀 표지에 그려졌을 정도였다.[25]
2.2.4. 1950년대 ~ 1960년대
- 앨런 에이코트 (1952~1964 / 381경기 63골) ★
암흑기의 끝과 영광의 시작을 이끈 천재 윙어
리버풀 유스 팀에 영입되어 곧바로 리버풀의 핵심 선수로 만개한 당대 리버풀 최고의 재능. 전직 럭비선수답게 두꺼운 피지컬을 지니고 있어 주로 측면에서 강력한 몸싸움으로 수비수들을 제압하는 플레이를 즐겼던 측면 윙 플레이어로, 빌리 리델과 함께 당대 리버풀을 대표했던 측면 공격수였다. 그가 활약하던 당시 리버풀은 2부 리그에서 긴 침체기를 겪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대표팀에 뽑혀 1958년 월드컵에 참여했을만큼 독보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천재적인 재능에 의해 그는 리버풀 리저브에 합류한 이후 어린 나이에 일찍이 핵심 선수로 1군에 도약하였고 24세 89일의 나이에 200번의 리그 경기 출전을 달성했는데, 이 기록은 여전히 리버풀 선수 중 리그 200경기 최연소 기록으로 남아있다. 일찍이 다른 1부 리그 팀으로 이적할 수 있었으나 리버풀을 위해서 팀에 오랜 기간 헌신했던 에이코트는 이후 빌 샹클리가 부임하여 팀이 1부 리그로 승격하는 영광을 함께 했고, 말년에 유럽 대항전에도 출전하면서 리버풀 커리어를 높은 위치에서 마무리 했다.
- 로니 모란 (1952~1965 / 397경기 17골)
Mr. 리버풀
리버풀 로컬 태생으로 유스 팀, 선수, 원 클럽 맨, 코칭 스태프를 모두 리버풀에서 거친 완벽한 리버풀 맨. 선수로서도 암흑기였던 1950년대를 이겨내고 빌 샹클리 시대에 감격스러운 승격을 경험했으며, 팀의 유럽 대항전 진출까지도 함께한 레전드 플레이어다. 50년대 중후반에 리버풀에서 주전 레프트 백 위치를 맡아 상대 공격수들에게 뒤지지 않는 속도로 단단한 수비를 자랑한 그는 대다수의 경기에 출전하는 뛰어난 내구성을 보유함과 동시에 페널티 킥 키커로서도 활약했을 정도로 정교한 기술도 가지고 있었다. 커리어 후반에는 리버풀의 주장직도 역임했으며, 1963-64 시즌 리그 우승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남겼다. 은퇴 이후엔 붉은 제국을 만든 위대한 코치로서의 커리어를 이어갔다.
- 게리 번 (1955~1969 / 333경기 4골)
골절도 막지 못한 허슬맨
강한 정신력으로 안필드 관중들의 박수를 받은 원 클럽 맨 로컬 보이. 리버풀에서 태어나 리버풀의 유스와 리저브팀을 거쳐 샹클리호에서 활약한 성골 레프트 백이다. 원래는 팀의 후보 선수에 지나지 않았으나 샹클리가 부임한 이후 용맹한 플레이로 팀의 주축 중 하나로 성장하여 활약했다. 특히 1965년 FA컵 결승전에서 쇄골이 골절된 와중에도 120분간 경기를 끝까지 소화한 것으로 유명하며, 이에 당시 팀 동료 이안 캘러한이 "리버풀에서 뛴 선수 중 가장 강력한 선수"라는 언사를 보낸 바 있다. 이후 1960년대 팀의 도약기를 뒷받침하며 샹클리가 일궈낸 역사를 함께 끌고 나갔고 리그 우승 2회와 FA컵 우승을 견인했다.
- 토미 로렌스 (1957~1971 / 390경기)
'플라잉 피그(Flying Pig)'
샹클리호의 첫 번째 수문장으로, 육중한 무게에도 놀라운 다이빙 능력을 선보여 'Flying Pig'라는 이명으로 불린 전설적인 골키퍼. 17세의 나이로 필 테일러 감독에게 스카웃되어 리버풀에서 첫 프로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이후 후임 샹클리 감독 아래에서 1963-64 시즌 12경기 클린시트를 기록하며 팀의 통산 여섯 번째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1965년 FA컵 결승에서도 안정적인 경기력으로 사상 첫 우승에 큰 영향력을 남겼다. 그는 거대한 몸집에도 재빨랐으며 반사신경이 뛰어남은 물론 박스 전체를 지배하는 넓은 활동 범위를 가지고 있어 최초의 스위퍼 키퍼 중 하나로도 알려진 선수로, 상당히 진보적이고 세련된 스타일을 보유하고 있었다. 리버풀에서 커리어를 보내는 동안 총 2회의 리그 우승과 1회의 FA컵 우승을 견인했다.
- 로저 헌트 (1958~1969 / 492경기 285골) ★
월드컵 위너 스트라이커
당대 풋볼 리그 최고의 공격수 중 하나이자, 샹클리의 리버풀을 상징하는 주포, 그리고 1966년 월드컵 우승에 기여한 잉글랜드 국가대표 스트라이커. 리그에서는 지미 그리브스를 맹추격했던 득점왕 후보였고, 리버풀에선 1961-62 시즌, 2부 리그에서 41골이라는 경악스러운 득점포를 가동해 득점왕에 오른 후 무려 7년간 2부리그에 있던 팀을 승격시킨 샹클리호의 아이콘이었다. 60년대를 화려히 풍미한 그는 특히 1963-64 시즌 리그 31골을 넣어 승격 2년 만에 팀을 1부 우승으로 이끔으로써 당대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올라섰는데, 1965-66 시즌에는 29골을 넣으며 그리브스의 득점왕 4연패을 저지했고 기여코 득점왕에 오르는 저력을 보였다. 그는 명실상부 리버풀 역사상 가장 뛰어난 골잡이 중 하나로, 11년간 리버풀에서 285골을 득점해 이안 러쉬가 기록을 경신하기까지 23년간 구단 최다 득점 기록 보유자였고, 리그 한정 득점 기록에서는 현재에도 최다 득점자이다. 2021년 모하메드 살라 이전까지 리버풀 역사상 최소 경기[26]에서 100골을 넣은 기록도 가지고 있었다. 현 시점에도 구단 최다 득점 2위에 올라있는 구단 역사상 가장 위대한 레전드 공격수 중 하나이기 때문에, 리버풀 팬들은 '경(Sir)'이라는 호칭을 붙여 그를 부를 정도. 은퇴 이후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오른 바 있다.
- 이안 캘러한 (1959~1978 / 857경기 68골) ★
붉은 유니폼을 가장 많이 입은 사나이
2부 리그의 리버풀과 함께 출발해 구단 최초의 유러피언 컵 우승까지 경험한 리버풀 역사의 산 증인. 17세의 나이에 빌 샹클리를 만나 리버풀에 입단한 뒤, 20년 가까이 모든 경기를 풀타임 가깝게 소화하며 무려 857경기를 뛴 리버풀 역사상 최다 경기 출전 기록의 주인공이다. 에너제틱한 움직임과 지칠줄 모르는 체력, 광범위한 포지셔닝 체인지로 리버풀에서 무려 19회의 트로피 수집에 기여했으며, 경이로운 경기 소화 능력으로 많은 승리를 리버풀과 함께했고, 리버풀 구성원들과 강한 유대감을 형성하며 귀감이 되는 선수로 이름을 날려 이후 리버풀의 전설 중 전설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857경기라는 경이로운 플레이 타임을 소화하면서도 단 한 장의 카드밖에 받지 않는 등, 축구선수로서 모든 방면에 있어 모범적인 선수의 표본과도 같은 존재였으며, 1960년대에는 윙어로, 70년대 이후에는 중앙 미드필더로 뛰며 1973-74 시즌에는 FWA 올해의 선수를 리버풀 역사상 최초로 수상하는 등 리버풀의 핵심 선수로서도 매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리버풀에서 5번의 리그 우승, 2번의 FA컵 우승, 2번의 유러피언 컵 우승, 2번의 UEFA컵 우승 등을 달성한 명실상부 리버풀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하나이며, 이후 다른 리그로 이적해 프로 통산 1,000경기에 가까운 기록을 남기며 오늘날까지 축구계의 큰 거목으로 평가받고 있다.
- 크리스 라울러 (1960~1975 / 549경기 61골)
'침묵의 기사(The Silent Knight)'
6~70년대 샹클리호의 핵심 라이트백으로 활약한 로컬 보이. 7시즌 동안 단 3경기만 결장했을 정도로 지칠줄 모르는 스태미너와 부상을 당하지 않는 강인한 신체로 오랫동안 안필드를 누비며 영광의 순간들을 팬들에게 선사한 레전드 플레이어다.[27] 로컬 보이 출신으로 일찍이 리버풀 리저브팀에서 육성된 샹클리의 애제자였으며, 정직하고 묵묵하게 팀에 헌신하는 모습과 더불어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터트리는 득점으로 '침묵의 기사'라는 별명을 팬들에게 부여받았다. 태클 실력과 더불어 결정적인 득점 능력도 타고난 라울러는 밥 페이즐리 부임 이후에도 한 시즌간 팀의 리더 역할을 자처하며 말년까지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줬고, 필 닐이 영입된 이후로도 백업 역할로 계속 팀에 기여해 팬들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은퇴 이후에는 리버풀의 코치와 스카우터 역할로 팀에 대한 충성을 이어갔다.
- 론 예이츠 (1961~1971 / 454경기 16골) ★
거인
샹클리호의 거인이자 캡틴, 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중앙 수비수 중 하나. 188cm에 달하는 키로 상대를 찍어 누르며 오랜 기간 안필드의 골문을 공고히 지켰으며, 주장으로서 그라운드를 호령하는 압도적인 리더십을 발휘해 팀을 수 많은 승리로 이끌었다. 거인이라는 이명답게 압도적인 피지컬과 번개같은 태클로 유명했는데, 샹클리가 그를 영입할 당시 기자들에게 "6피트2짜리 거구로 힘이 센 황소 같은 선수다."라는 소개를 남기기도 했다. 팀의 주춧돌이자 주장으로서 그는 2부 리그에 있던 팀을 잉글랜드 최정상급의 팀으로 끌어 올렸으며, 많은 경기에서 뛰어난 리더십과 수비력을 발휘해 리그와 FA컵을 포함 총 7회의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선수 커리어를 종료한 뒤인 1986년에는 리버풀에서 수석 스카우터 역할을 맡아 약 10여년간 더 팀에 헌신하기도 했다.
- 이안 세인트 존 (1961~1971 / 425경기 118골)
샹클리의 황태자
60년대 빌 샹클리 사단의 시작을 알린 당대 리버풀의 신호탄과 같았던 공격수. 클럽 레코드 이적료[28]로 마더웰에서 리버풀로 합류한 그는 1961-62 시즌 2부 리그에 있던 팀을 단숨에 승격시켜 이후 1부 리그 우승을 곧장 두 차례나 쟁취했고 1964-65 시즌 FA컵 결승에서 리즈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연장 후반 결승골을 뽑아내는 명장면을 만들어내며 리버풀을 명실상부 잉글랜드에서 가장 걸출한 구단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로저 헌트와의 투톱 조합은 당대 잉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공격진으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홈과 원정을 가리지않고 가장 중요한 득점들을 뽑아내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그는 10년에 걸쳐 팀을 전성기로 끌어올린 엔진과도 같은 선수로 역할을 다 했고, 대표팀에서의 공로까지 합쳐져 조국 스코틀랜드 풋볼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
- 토미 스미스 (1962~1978 / 638경기 48골)
안필드의 '철인(Iron)'
안필드를 위협했던 공격수들을 무덤으로 이끌었던, 리버풀 역사상 가장 터프했던 센터백. 강하고, 거칠고, 투쟁적인 수비로 매우 유명했다. 당시 그의 플레이는 흡사 전쟁터의 전사로 묘사되곤 했으며, 서포터로부터 '안필드의 철인'이라 불렸을 정도인데 실제 샹클리는 그를 두고 "토미 스미스는 태어난게 아니라 채석장에서 채석된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단순히 수비 뿐 아니라 세트피스, 중거리 슈팅 등으로 심심찮게 결정적인 득점도 해냈으며 특히 1977년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도 클러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팬들에게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론 예이츠와 함께 샹클리의 리버풀에 절대적인 수비력을 불어넣었으며, 예이츠의 후임 주장으로 이후 페이즐리 시절까지 무려 16년을 리버풀 수비에 헌신한 그는 안필드 커리어에서 15개의 빛나는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말년에는 좌측 풀백으로 포지션을 이동하기도 했다.
- 피터 톰슨 (1963~1974 / 416경기 54골)
레프트 윙의 마법사
좌측면에서 재치있는 플레이를 보여준 윙어로 순간적으로 라인을 붕괴시키는 스피드를 뽐내며 리버풀의 도약을 이끈 레전드 플레이어다. 특히 1965-66 시즌 UEFA 컵위너스컵에서 대단한 활약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29] 큰 키에도 불구하고 재빠른 민첩성을 보여주며 안필드의 관중들을 즐겁게 만들었던 그는 당대 가장 주목받는 측면 자원으로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부름을 받았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선수였다. 리버풀에선 10년 넘게 팀에 헌신하며 2회의 리그 우승과 FA컵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풋볼 리그에서 총합 20년 가까이 560경기를 달성하며 잉글랜드 축구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2.2.5. 1970년대 ~ 1980년대
- 엠린 휴즈 (1967~1979 / 665경기 49골)
'크레이지 홀스(Crazy Horse)'
붉은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수비수이자, 바비 무어의 뒤를 이어 오랜 기간 잉글랜드 국가대표 주장직을 역임했던 영국 축구사 최고의 수비수 중 한명. 센터백, 좌우풀백, 수비형 미드필더까지 모두 가능했던 전천후의 수비 마스터로, 플레이에 묻어나는 폭발적인 승부욕으로 인해 '미친 말(Crazy Horse)'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샹클리의 리빌딩 멤버로 리버풀에 입단하였고, 이후 페이즐리 시대에 들어와서는 토미 스미스로부터 주장직을 이어받아 은퇴할때까지 팀의 리더 역할을 수행했는데 이 기간 동안 2개의 빛나는 빅 이어를 포함하여 수 많은 트로피를 본인 손으로 들어올려 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주장 중 하나로도 오랫동안 회자되고 있다. 1976-77 시즌 FWA 올해의 선수를 수상했으며 넘치는 투지와 열정으로 몸을 던진 붉은 제국의 아이콘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 레이 클레멘스 (1967~1981 / 665경기) ★
올-타임 넘버 원
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로 평가받는 붉은 제국의 전설적인 수문장. 국가대표팀에선 고든 뱅크스의 자리를 물려받아 유로와 월드컵에 출전한 70년대 잉글랜드 최고의 골키퍼이기도 했다. 엄청난 반사신경과 일대일 방어, 신기에 가까운 예측 플레이로 유명했고 골키퍼로서는 단신인 183cm였지만 팔이 길어 공중볼 캐치도 수준급으로 해내는 당대 최고의 실력을 자랑했다. 11년간 단 6경기 결장에 그치며 안필드의 골문을 빈틈없이 채웠던 그는 리버풀에서만 리그 우승 5회, FA컵 우승 1회, 리그컵 우승 1회, 유러피언 컵 우승 3회, UEFA컵 우승 2회 등의 어마어마한 커리어를 쌓았으며 명실상부 풋볼 리그와 유럽 대륙 전체를 통틀어 최고 수준의 골키퍼로 알려졌다. 1978-79 시즌에는 리그 42경기에서 16실점만을 허용하는 실점률을 보이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에 올라서기도 했다. 그는 커리어 통산 460경기의 압도적인 클린 시트 기록을 보유한 역대 가장 위대한 골키퍼 중 한명으로, 통산 1,000경기 이상에 출전한 몇 안되는 선수 중 한명으로도 역사에 기록되었다.
- 존 토샥 (1970~1978 / 247경기 96골)
'빅 존(Big John)'
케빈 키건과 함께 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투톱 듀오 중 하나를 만들어낸 전설적인 선수로, 완벽한 빅 앤 스몰 조합으로 리그를 지배했던 웨일스 출신의 스트라이커다. 카디프에서 당시 클럽 레코드[30]로 리버풀에 영입된 토샥은 곧바로 샹클리호의 주축 공격수로 활약을 시작했으며, 같은 시기에 팀에 합류한 케빈 키건과 함께 절륜한 파트너십을 보이며 공포의 투톱으로 이름을 날렸다. 날쌔고 빨랐던 키건과 다르게 토샥은 강한 피지컬과 공중볼 경합 능력으로 '빅 존'이라는 별명을 가진 단단한 타겟맨이었으며, 실제로 키건과의 굉장한 호흡을 통해 공중 경합으로 키건에게 어시스트를 넘겨주는 장면은 당시 리버풀 공격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이러한 파트너십으로 토샥은 리버풀에서 리그 우승 3회, FA컵 우승 1회, 유러피언 컵 우승 1회, UEFA컵 우승 2회 등의 걸출한 커리어를 보냈고 안필드 팬들에게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강렬한 족적을 남겼다.
- 스티브 하이웨이 (1970~1981 / 475경기 76골)
안필드 위의 고속도로
시원한 이름처럼 사이드 라인에서의 총알같은 돌파와 날카로운 킥을 자랑하며 측면 플레이메이커까지 겸했던 붉은 제국의 핵심 윙어. 케빈 키건, 브라이언 홀 등의 선수들과 팀의 돌격 대장 역할을 자처하며 리그 5회 우승 포함 총 16개 타이틀을 따냈다. 1973-74 시즌 FA컵 결승전에선 직접 쐐기골을 뽑아내는 등 본인이 골을 생산해내는 능력 또한 대단했던 선수였다. 특히 당대의 여타 윙어들과는 다르게 활동량이 굉장히 뛰어나 성실하게 그라운드를 쓸고 다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팬들은 이러한 하이웨이에게 열광적인 응원과 사랑을 보냈으며 현대에도 하이웨이의 이름이 들어간 응원가가 안필드에 불려질 정도로 팬들에게 사랑받는 레전드로 기억되고 있다. 전설적인 커리어를 끝낸 뒤에는 리버풀의 유스 디렉터로도 부임해 아카데미를 이끌면서 스티븐 제라드, 마이클 오언, 스티브 맥마나만 등을 키워내기도 했다.
- 케빈 키건 (1971~1977 / 323경기 100골)
'마이티 마우스(Mighty Mouse)'
70년대 초중반의 붉은 제국을 이끈 절대적 에이스이자 리버풀과 안필드 축구의 상징. 바비 찰튼으로부터 잉글랜드 축구의 에이스 계보를 물려받은 70년대 유럽 축구의 슈퍼스타다. 긴 곱슬 머리를 휘날리며 화려한 기술과 정확한 킥, 뛰어난 골 결정력을 발휘해 윙과 센터톱을 오가며 가공할 공격력을 뽐낸 그는 두 차례의 UEFA컵 타이틀 및 1976-77 시즌 리버풀의 사상 첫 유러피언 컵 우승에 크게 공헌한 전설적인 공격수로 거듭났다. 1975-76 시즌 FWA 올해의 선수를 수상하기도 한 그는 기량으로만 따지자면 리버풀을 거쳐간 공격수를 모두 줄세워도 최상단에 위치할 수 있을 수준의 압도적인 기량을 가진 전천후 포워드였으며, 토샥과의 절륜한 투톱 파트너십으로 리그와 유럽에서 챔피언의 위치를 따낸 위업을 쌓았다. 리버풀이 키워낸 월드 클래스 플레이어였던 키건은 후에 분데스리가로 이적했고, 1977년 리버풀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발롱도르까지 수상하며 빛나는 경지에 올랐다.
- 필 톰슨 (1971~1984 / 477경기 13골)
커크비 라드(Kirkby Lad)
리버풀의 커크비에서 태어나 리버풀 리저브를 거쳐 17세의 나이로 안필드에 데뷔한 로컬 보이로, 처음엔 미드필더로 데뷔했으나 점차 본인의 잠재력을 터트려 수비수로 자리잡았고 기량이 만개한 후엔 앨런 한센과 함께 붉은 제국의 뒷심을 책임졌던 전설적인 센터백으로 발돋움했다. 리버풀에 13년 넘게 헌신하며 리그 7회 우승을 비롯해 총합 23개의 타이틀을 성취해낸 전설 중의 전설이자 1979년 리그 42경기 16실점의 압도적인 팀 수비력을 구축한 주축 중 하나. 엠린 휴즈 이후론 주장직을 맡아 1981년엔 구단 통산 세 번째 빅 이어를 직접 들어올렸으며, 에른스트 하펠이 이끄는 클럽 브뤼헤를 두 차례 잡아낸 1975-76 시즌 UEFA컵 결승과 1977-78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이 그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는 대회로 평가받는다.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도 활약하며 국가대표팀 주장을 맡기도 했다. 건실한 리더십과 수비력으로 안필드의 팬들에게 오랜 기간 사랑받은 톰슨은 선수 커리어를 끝낸 이후, 리버풀에서 코치로 활약하기도 했으며, 제라르 울리에 감독이 심장 문제로 잠시 감독직 수행이 불가해지자 임시 감독을 맡기도 했다.
- 테리 맥더모트 (1973~1982 / 329경기 82골)
안필드 로드의 파수꾼
밥 페이즐리가 믿고 기용한 든든한 만능 미드필더. 성실하고 겸손한 성격으로 주변 사람들과 팬들에게 사랑받는 선수였으며, 1980년도 이후로는 굉장한 득점력을 뽐내면서 리그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발돋움한 전설적인 선수다. 맥더모트는 페이즐리에 의해 리버풀에 영입된 이후 줄곧 인상적인 경기력을 뽐내며 팀의 핵심 미드필더이자 마에스트로로 일찍이 자리잡았고, 1980년에 시즌 16득점, 81년에 22득점, 82년에 20득점을 올리며 당대 최고의 미들라이커로 올라섰다. 특히 1979-80 시즌에는 PFA 올해의 팀에 선정됨에 더하여 FWA 올해의 선수, PFA 올해의 선수를 모조리 석권하여 최초로 이 상들을 동시에 수상한 선수로 기록되었다. 1980-81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1라운드부터 해트트릭을 작렬시키더니, 계속 득점포를 가동해 총 6골에 성공, 공동 득점왕에 오르며 팀을 유럽 챔피언에 올려놓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리버풀에서 리그 우승 5회와 유러피언 컵 우승 3회를 비롯해 총 16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린 맥더모트는 이에 리버풀 역대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 레이 케네디 (1974~1982 / 393경기 72골)
샹클리의 마지막 유산
샹클리가 오랜 기간 팀에 데려오길 원했고 결국 본인의 리버풀 감독직 사임 날에 이적을 성사시켜 데려온 붉은 제국의 왼쪽 날개. 원래는 공격수였으나 샹클리의 후임 밥 페이즐리가 그의 재능을 측면 미드필더에서 발휘하게 만들었고 이것이 적중하여 대단한 커리어를 펼치게 되었다. 8년간 케네디는 리버풀의 좌측 윙어로서 빠른 발과 민첩성을 활용하여 상대 팀의 측면을 무너뜨렸으며, 중거리 슛을 활용하여 인상적인 장면들도 여럿 만들어냈다. 그는 1977년과 1978년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활약하며 빅 이어를 가져오는데 기여했으며, 1976년부터 1981년까지 5시즌 동안 다섯 번의 리그 경기를 제외하고 모든 경기에서 활약하며 대단한 경기 소화력을 보여줬다. 특히나 팬들의 기억에 남는 것은 1981년 바이에른 뮌헨과의 유러피언 컵 준결승 경기에서 결정적인 원정골을 기록하며 팀을 3번째 유러피언 컵 우승으로 견인한 것이었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그는 리버풀에서 총 14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붉은 제국의 전설적인 좌측면 지배자로 오래 기억에 남게 되었다.
- 필 닐 (1974~1985 / 650경기 59골)
리버풀의 지치지 않는 엔진
7-80년대 리버풀을 이끌고 유럽의 왕조를 건설한 머지사이드의 원동력이자, 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오른쪽 풀백. 지치지 않는 붉은 제국의 오른쪽 수비수로 명성을 얻으며 믿기지 않는 출장 기록을 세운 그는 단순히 오른쪽 수비에 그치지 않는 넓은 범위의 활동반경, 첨예한 킥능력, 리더십, 60경기 이상을 거뜬히 소화하는 체력까지 보유해 팀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불어넣는 선수로 알려졌다. 그는 당시 팀의 페널티 키커로도 활약해 1977년 유러피언 컵 결승전 후반 페널티 킥을 성공시켜 팀을 우승으로 직접 이끌기도 했으며, 1970년대와 1980년대 리버풀의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 모두에 출전해 팀 역사상 유일하게 4개의 빅 이어를 들어올 선수로 이름을 남겼다. 닐은 리버풀에서 11년 동안 7번의 풋볼 리그, 4번의 리그컵, 5번의 FA 채리티 실드, 4번의 유러피언 컵, 1번의 UEFA컵, 1번의 UEFA 슈퍼컵을 우승하며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성공한 선수의 경지에 올랐으며 대부분의 시즌을 주전으로 활약함과 동시에 1974년 12월 14일부터 1983년 9월 24일까지 366경기 연속 리그 경기 출장 기록을 달성하면서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최다 연속 출장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팀의 주장으로도 활약했다.
- 케니 달글리시 (1977~1990 / 515경기 172골) ★
'킹(KING)' 케니
명실상부 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선수. 절대적인 리버풀의 아이콘이자 붉은 제국의 국왕. 케빈 키건의 대체자로 리버풀에 입성하자마자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리버풀을 상징하는 슈퍼 스타 플레이어로 순식간에 발돋움하며 전설적인 커리어를 시작했다. 세컨 톱, 윙어, 공격형 미드필더, 스트라이커까지 공격진 전역에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전천후 공격 유닛이었던 그는 리버풀의 실질적인 최전성기를 최전방에서 이끌며 수 많은 공격 포인트를 창출해냈고, 1977-78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전 결승골과 같은 임팩트있는 득점까지 수차례 뽑아내 진정한 안필드의 왕으로 군림했다. 리버풀에서 그는 리그 우승 6회, FA컵 우승 1회, 리그컵 우승 4회, 유러피언 컵 우승 3회를 비롯 21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으며, 1983년 발롱도르 2위와 PFA 올해의 선수, FWA 올해의 선수를 석권하는 대단한 활약을 펼쳤다. 1979년에도 FWA 올해의 선수를 수상했던 그는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중후반에 이르기까지 리그를 대표하는 최고의 공격수로 명성을 떨쳤다. 헤이젤 참사를 겪은 이후에는 선수 겸 감독으로까지 활약해 10개가 넘는 우승트로피를 감독으로서 추가해 들어올렸고, 이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모두 입성했다. 이에 현 시점 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자 구단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하나로 이견 없이 평가받는다.
- 앨런 한센 (1977~1990 / 620경기 14골) ★
붉은 장벽
붉은 제국 최후의 보루이자 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센터백. 공격의 케니 달글리시, 중원의 그레이엄 수네스가 있었다면 수비에는 단연 앨런 한센이 있었다.[31] 한센은 마크 로렌슨, 필 톰슨 등의 철혈 센터백들을 현명히 통제해 팀의 수비 리더로 활약했으며, 이탈리아의 가에타노 시레아와 더불어 80년대 초반 세계 최고의 수비수라는 평가를 받았던 선수였다. 기술과 두뇌를 동시에 보유한 다재다능한 센터백으로 이름을 날린 그는 190cm에 달하는 체구를 가졌음에도 민첩하고 컨트롤이 뛰어나 직접 공을 몰고 센터 서클 위로 전진하는 플레이를 즐기는 현대적인 볼 플레잉 센터백이었으며, 7-80년대 유럽을 지배한 붉은 제국을 끝까지 지킨 부동의 수비 리더였다. 말년에는 헤이젤, 힐스보로에서 일어난 비극과 겹부상을 정통으로 맞아 위기를 맞이했는데 결국엔 이를 극복하여 복귀에 성공했고, 85년 이후로는 팀의 주장을 맡아 리그와 FA컵 더블을 이끌었으며 마지막 시즌의 리그 우승까지 팀과 함께해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PFA 올해의 팀에 총 6회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며 리그를 지배한 센터백으로 인정받았으며, 후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 그레이엄 수네스 (1978~1984 / 359경기 55골)
제국의 사령관
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 중 하나이자 7-80년대 영연방 플레이메이커의 정점. 밥 페이즐리에 의해 당시 클럽 레코드 금액으로 리버풀에서 입성한 그는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최고 수준의 플레이를 보여줄 수 있었던 당대 최고의 올라운드 미드필더로 중원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는 강한 승부욕으로 팬들을 매료시키는 선수였고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고 남다른 시야로 팀을 지휘함과 동시에 놀라운 터치로 중원에서 원더 플레이를 직접 만들어내는 놀라운 역량을 보여줬다. 6년의 리버풀 커리어 동안 팀의 모든 플레이를 지휘하는 장군과도 같은 모습으로 팬들의 박수를 이끌어낸 그는 리그 우승 5회, 리그컵 우승 4회, 유러피언 컵 우승 3회와 더불어 리버풀에서만 15개의 트로피를 획득하며 PFA 올해의 팀에 4회나 이름을 올렸고 1980-81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 득점왕에 오를정도로 타고난 결정력도 과시한 바 있다. 1982년에는 팀의 주장으로 부임하여 3시즌 연속 리그 우승을 일궈내는 등 팀 역사상 가장 찬란한 역사를 이끈 주장으로 꼽히며, 1983-84 시즌에는 67경기중 61경기를 소화하는 믿을 수 없는 경기 소화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특히 리그컵 결승전에서 에버튼을 상대로 결승골을 넣은 강렬한 모습은 팬들에게 자주 회자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달글리시, 한센이 그러했듯이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모두 입성했다.
- 앨런 케네디 (1978~1985 / 359경기 29골)
유러피언 컵 파이널의 사나이
리버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을 장식한 전설적인 왼쪽 풀백. 붉은 제국의 주축 중 하나이며 리버풀 역대 최고의 왼쪽 풀백 중 하나로, 1980-81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결승골을 기록해 빅 이어를 안필드로 가져온 기념비적인 역사의 주인공이다. 드로인을 가슴으로 받아 세명을 제치고 통렬한 왼발슈팅으로 마무리한 해당 득점은 유럽의 강자 레알 마드리드를 격침시키며 붉은 제국의 통산 세 번째 유러피언 컵 우승을 만들어냈다. 1983-84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도 케네디의 활약은 이어졌는데, 치열했던 해당 결승전의 승부차기 마지막 키커로 나와 골을 성공시켜 승부를 결정짓는 멋진 순간을 팀에게 다시 선사한 바 있다. 이러한 클러치 능력과 더불어 케네디는 다방면에서 뛰어났던 만능의 측면 자원으로, 당시 좌측 윙어였던 레이 케네디와는 '케네디 라인'을 형성해 완성도 높은 플레이를 선보였다. 케네디가 주전으로 활약한 기간 동안 리버풀은 리그에서만 5번 우승하며 압도적인 리그 지배력을 뽐냈으며 당시 리버풀의 좌측면은 팀의 주 공격 루트로써 상당한 파괴력을 자랑한 것으로 유명했다.
- 로니 웰런 (1979~1994 / 493경기 73골)
아이리시 특급
80년대를 풍미한 아일랜드 출신의 전천후 미드필더. 레이 케네디의 대체자로 처음엔 좌측 미드필더로 안필드 커리어를 시작했으나, 중앙 미드필더로도 훌륭하게 뛸 수 있었고 90년대 이후로는 존 반스에게 윙어 자리를 물려주고 완전히 중앙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바꿔 활약했다. 시종일관 필드를 누비는 에너자이저로 기민한 패스 플레이를 즐기는 얀 몰비와 시너지를 발휘해 페이즐리와 페이건으로 이어지는 리버풀의 80년대 황금기에 주축으로 역량을 발휘했다. 15년간 6번의 리그 타이틀을 비롯해 무려 18개의 트로피를 획득했으며, 1984년 유러피언 컵에서도 활약하며 전설적인 우승의 핵심 멤버로 평가받는다. 특히 결승전에 강했는데, 국내 컵 결승전에서 토트넘과 맨유를 만나 결정적인 득점을 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짧게나마 리버풀의 주장으로도 활약했다.
- 이안 러쉬 (1980~87, 1988~96 / 660경기 346골) ★
'귀신(The Ghost)'
'The Ghost'라는 이명을 가진 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이자 리버풀의 역대 최다 득점자. 현재까지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한 위업을 달성한 붉은 제국의 넘버 9. EFL컵 역대 최다 득점자이며 FA컵 결승전 최다 득점[32] 기록도 보유하고 있는 잉글랜드 리그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공격수이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리버풀에 입단하여 총 3기의 리버풀 커리어를 거치는 동안 리그 우승 5회, FA컵 우승 3회, EFL컵 우승 5회, 유러피언 컵 우승 2회를 들어올린 전설 중의 전설로, 1983년 PFA 올해의 영플레이어 수상에 이어, 1984년 유러피언 골든부츠[33]와 리그 득점왕, PFA 올해의 선수, FWA 올해의 선수를 수상했고 PFA 올해의 팀에는 83년부터 91년까지 총 5회 이름을 올렸다. 리버풀에서 총 15시즌을 활약하는 동안 단 3시즌[34]을 제외하고는 모두 시즌 두자릿 수 득점[35]을 올린 역대급 득점 기계로, 커리어 하이로 평가받는 1983-84 시즌에는 무려 리그 32골과 시즌 총합 47골을 기록, 팀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 레벨에 일찍이 올라갔다. 케니 달글리시와 팀 역사상 최강의 투톱 듀오를 이루며 붉은 제국의 전성기를 대표했으며, 팀의 주포로 센세이셔널한 활약을 펼친 이후 유벤투스 시절을 보내고 팀에 다시 돌아와 프리미어 리그 시대까지 팀의 공격을 이끌었다. 유럽 축구 역사상 가장 간결한 마무리를 가진 공격수로 유명했던 그는 웨일스 국가대표팀에서도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으며, 가레스 베일이 기록을 경신하기 이전까지 A매치 최다 득점자였다.
- 브루스 그로벨라 (1980~1994 / 628경기)
'크레이지 정글 맨(Crazy Jungle Man)'
리버풀 역사상 가장 독특한 캐릭터를 남긴 전설적인 커리어의 짐바브웨산 골키퍼. 레이 클레멘스의 대체자로 페이즐리 사단에 합류해 80년대 붉은 제국의 수문장으로 자리잡은 후 무려 14년간 아이코닉한 활약을 펼쳤다. 대담하고 동작이 큰 스타일, 우렁찬 목소리, 때때로 욕설과 과격한 퍼포먼스[36]도 불사하는 캐릭터로 유명했던 그로벨라는, 이로 팀의 전의를 통제해 1984년 팀의 네 번째 유러피언 컵 우승 및 6회의 리그 우승을 포함 무려 19회의 타이틀을 리드했는데 특히 1983-84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전 승부차기에서 몸을 꼬는 동작으로 브루노 콘티와 프란체스코 그라지아니의 패널티킥을 공중으로 날려보내며 우승에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37] 방대한 커버 범위를 가지고 있어 스위퍼 키퍼의 원류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 마크 로렌슨 (1981~1988 / 356경기 18골)
아이리시 '로로(Lawro)'
80년대 엘런 한센과의 놀라운 파트너십으로 리그 최고의 수비수 중 한명으로 평가받던 만능의 수비수.[38] 밥 페이즐리 체제하 리버풀로 이적해 페이건 체제에 이르기까지 팀이 이룬 위대한 성취를 든든하게 뒷받쳤으며 영리하고 지능적인 플레이와 맨투맨에서의 터프함까지 두루 보여주어 풋볼 리그 5회 우승과 1984년 유러피언 컵 재패를 이뤄냈다. 태클 실력과 상황에 맞는 볼처리, 민첩성과 볼 컨트롤 능력 등 만능 수비수로 유명했던 로렌슨과 또 다른 육각형 수비수 앨런 한센의 협업 센터백 라인은 80년대에 전유럽을 통틀어 가장 강력했던 콤비로 이름을 날렸다. 아일랜드 국가대표팀의 주축으로도 활약했다.
- 스티브 니콜 (1981~1995 / 468경기 46골)
스코티시 '촙시(Chopsy)'[39]
필 닐의 뒤를 이어받아 붉은 제국의 역사를 끝까지 견인한 전천후 라이트백. 80년대 중반부터 주전으로 발돋움해 오른쪽 풀백임에도 공수 모두에서 큰 기여도를 보인 당대 안필드 우측 사이드 라인의 지배자였다. 특히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골문으로 침투하여 올리는 결정적인 득점으로도 이름을 날렸으며, 당시 대표팀에도 주전으로 기용되어 스코틀랜드 축구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페이건 감독 체제에서부터 활약상이 두드러졌는데, 선수로서의 커리어 하이는 아스날과의 동일승점, 동일득실차를 기록하고도 상대전적에 밀려 리그 준우승에 그친 1988-89 시즌으로, FA컵 우승공로와 더불어 수비수임에도 FWA 올해의 선수를 수상했다. 라커룸의 수다쟁이이자 분위기 메이커였던 그는 달글리시 체제까지 약 13년간 리버풀에 헌신하며 리그 우승 4회, FA컵 우승 3회, 유러피언 컵 우승 1회 등의 커리어를 남겼다.
2.2.6. 1990년대 ~ 2000년대
- 존 반스 (1987~1997 / 403경기 106골) ★
안필드의 검은 별
80년대 후반과 90년대 리버풀을 상징하는 가장 빛나는 별. 안필드의 아이코닉한 슈퍼 스타. 인종 차별이 만연했던 당시 잉글랜드의 차별적인 대우를 실력으로 당당히 잠재웠을만큼 대단한 퍼포먼스를 과시했던 인물로, 타고난 신체 밸런스와 강력한 다리 힘, 엄청난 스피드를 앞세워 테크닉과 돌파력, 공격력을 두루 갖췄던 잉글랜드의 전설적인 컴플리트 윙어다. 헤이젤 참사 이후 침체기를 맞이한 리버풀의 암흑기 속에서 수차례의 타이틀을 수성해냈으며, 저물어가는 붉은 제국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킨 팀 역사상 최고 레전드 중 하나인 반스는 리버풀 역사에 있어서는 흑인 선수 중 처음으로 성공적인 기록을 남긴 것으로도 그 기념비적인 명예를 인정받는다. 리그 우승을 이끈 1987-88 시즌과 1989-90 시즌에 모두 FWA 올해의 선수를 수상했으며 PFA 올해의 팀에는 총 세 차례 이름을 올렸고 최고점이었던 1987-88 시즌에는 PFA 올해의 선수 또한 수상했다.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도 주축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며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리버풀에서는 붉은 제국의 마지막 유산이자 달글리시호의 마지막 에이스, 침체된 팀을 빛낸 단 하나의 자존심으로 오랜 기간 여겨졌으며, 힐스보로 참사 이후 팬들과의 강한 유대감을 다지기도 하여 더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이에 이후 현대 리버풀 축구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로 거듭났고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도 입성했다.
- 로비 파울러 (1993~01, 2006~07 / 369경기 183골)
안필드의 신
안필드를 가득 메운 팬들에게 무려 신이라는 이명으로 불린 사나이. 원톱 내지 세컨톱에서 천재성을 발휘했던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 공격수였으며, 코카인 세레모니로 대표되는 적잖은 기행을 보였던 리버풀의 전설적인 탕아로 이름을 날렸다. 리버풀에서 태어난 로컬 보이로 리버풀 아카데미에서 훈련받고 90년대 초반 일찍이 리버풀에서 데뷔한 성골 중 성골이며, 데뷔 직후 1993-94 리그컵 우승에 혁혁한 공을 세운 원조 '원더 보이'로도 유명한데, 어린 나이에도 아스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등의 강팀들을 만나 대단한 활약을 선보이며 안필드의 팬들에게 충격을 선사했고, 21세가 되기 전 무려 84골을 넣어 1994-95 시즌과 1995-96 시즌에 PFA 올해의 영플레이어를 석권하는 등 엄청난 10대를 보냈다.[40] 이후 FA컵, 리그컵, UEFA컵을 연속으로 따내며 일명 '미니 트레블'을 달성한 2000-01 시즌에는 마이클 오언과 더불어 팀 최고의 선수로 칭송받으며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서도 활약해 리그와 국가 클럽을 대표하는 공격수로 성장했으며, 이후 리즈와 맨시티를 거치고 리버풀로 다시 복귀한 2006-07 시즌에는 베테랑으로 팀의 결속을 다지며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에 기여하기도 했다. 비교적 부족한 피지컬로도 천부적인 센스를 발휘해 득점을 때려 넣고 절륜한 드리블과 패스 센스 또한 보유했던 이안 러쉬 이후 붉은 셔츠의 9번 계보를 이은 레전드 공격수.
- 제이미 캐러거 (1996~2013 / 737경기 4골) ★
암흑기를 지킨 진정한 원 클럽 맨
17년간 리버풀의 수비진을 지킨 로컬의 성골 원 클럽 맨. 리버풀의 대표 로컬 보이 중 하나로 아카데미에서부터 특출난 재능들 중 하나로 꼽혀 일찍이 리버풀에 데뷔했다. 피지컬은 뛰어나지 못했지만 훌륭한 판단 능력과 집중력, 플레이에 묻어나오는 투지, 좌우 풀백 전부 소화 가능한 유틸리티성을 가져 오랜 기간 리버풀의 핵심 주전 센터백으로 기용되었다. 사미 히피아 이후에는 수비의 리더로도 자리매김하여, 주장 스티븐 제라드의 뒤에서 묵묵히 부주장으로 역할을 해온 것만 10년이며, 히피아 이외에도 스테판 앙쇼, 마틴 슈크르텔, 다니엘 아게르 등 많은 센터백들과 짝을 맞추며 팀의 침체기 동안 든든한 기둥으로서 팀을 이끌었다. 긴 리버풀 커리어 동안 FA컵 2회 우승, 리그컵 3회 우승, UEFA컵 1회 우승, UEFA 슈퍼컵 2회 우승, UEFA 챔피언스 리그 1회 우승을 이뤄냈으며, 선수 커리어 최정점이었던 2004년에서 2006년 사이에는 PFA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고 특히 이스탄불의 기적 당시 120분 내내 엄청난 투지를 발휘하며 대단한 퍼포먼스를 선보여 팀의 다섯 번째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 엄청난 공을 세웠다.
- 스티븐 제라드 (1998~2015 / 710경기 55골) ★
안필드의 심장
21세기 리버풀의 상징이자 리버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주장. 23세의 나이로 주장직을 맡아 역대 가장 오랜 기간 주장직을 수행했으며 침체기 동안 팀을 이끌며 수 많은 역경 속에서도 빛나는 트로피들을 안필드에 가져온 리버풀의 전설적인 미드필더다. 리버풀에서 태어난 로컬 보이로, 아카데미를 거쳐 90년대 후반 일찍이 리버풀에 데뷔했고, 전방위적인 패스, 엄청난 파워와 정확도를 자랑하는 중거리 슈팅, 뛰어난 피지컬과 전진성, 공수 만능의 유틸리티, 팀을 위기에서 구하는 클러치 능력 등을 과시하며 2000년대 중후반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하나로 그 위상을 떨쳤다. 리버풀에서는 2번의 FA컵과 3번의 리그컵, UEFA 챔피언스 리그와 UEFA컵, 2회의 UEFA 슈퍼컵 우승을 달성했는데 이 중 2006년의 FA컵과 더불어 2005년 이스탄불의 기적으로 대표되는 제라드의 토너먼트 하드캐리 퍼포먼스는 축구사에 기록될만한 드라마를 써내리며 세계적인 팬덤을 이끌어냈고 오랫동안 '리버풀=제라드'라는 공식이 축구팬들에게 각인되었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국내에서는 2000-01 PFA 올해의 영플레이어와 PFA 팬 선정 올해의 선수, 2005-06 시즌 PFA 올해의 선수, 2008-09 FWA 올해의 선수와 PFA 팬 선정 올해의 선수, 2013-14 리그 도움왕 등을 수상했고 PFA 올해의 팀에는 8회로 역대 최다 지명되었으며, 유럽 무대에서는 2004-05 UEFA 올해의 클럽 축 선수를 비롯, 총 3회의 UEFA 올해의 팀과 FIFPro 월드 XI와 2005년 발롱도르 3위에 올랐다. 2020년에는 발롱도르 드림팀 후보로 뽑혀 수비형 미드필더 부문 7위에 올랐으며, 2017년에는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2021년에는 프리미어 리그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이러한 17년간의 장대하고 화려했던 활약상에 의해 21세기 리버풀 최고의 선수이자 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로 이견 없이 평가받으며, 안필드의 팬들에게는 2010년대 후반 다시 찾은 전성기 이전 팀을 지탱한 불멸의 주장으로 남게 되었다.
- 사미 히피아 (1999~2009 / 464경기 35골)
핀란드산 방벽
핀란드가 낳은 2000년대 안필드 최후의 보루. 2000년대 초반 위력적인 높이와 단단한 수비력으로 리그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로 꼽혔고, 이후 스테판 앙쇼, 제이미 캐러거, 다니엘 아게르 등 다양한 파트너와 호흡을 맞추면서도 안정적인 플레이로 리버풀의 뒷문을 사수했다. 스피드에 약점이 있었으나 압도적인 피지컬과 영리한 판단력, 깔끔한 전진 패스 능력, 절륜한 위치 선정으로 PFA 올해의 팀에 2회 선정, 2001년에는 UEFA 올해의 팀에 선정될 정도의 상당한 퍼포먼스를 보여줬으며, 2000-01 시즌 리버풀이 FA컵과 리그컵, UEFA컵을 모두 석권한 시즌에 대단한 기여를 했다. 2001년부터는 리버풀의 주장직을 맡아 최초의 유럽 대륙 출신 주장으로서 팀에 입지를 다졌고, 이후에도 2009년에 이르기까지 팀의 중추로서 활약해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포함하여 9개의 트로피를 안필드에 가져왔다.
2.2.7. 2010년대 ~ 2020년대
- 조던 헨더슨 (2011~2023 / 492경기 33골)
암흑기를 전성기로 이끈 위대한 캡틴
팀의 암흑기에 입단하여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결국엔 구단 역사상 최초의 프리미어 리그 우승을 비롯, 모든 대회의 트로피를 직접 들어올린 전설적인 리버풀의 주장. 팀 역사상 최고의 주장이라 불린 스티븐 제라드의 후임자로 지목되어 큰 부담과 비난여론에 직면했으나, 묵묵히 수년 간 팀에 헌신하며 21세기 리버풀의 최고의 전성기를 직접 이끌었다. 어린 나이에 팀에 입단하여 처음에는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였으나 날이 갈수록 기량을 발전시켜 2010년대 중반 이후 팀의 핵심 미드필더로 자리를 잡았고, 중원 전역을 커버하는 범용성 및 활동량과 훌륭한 패스 능력을 위시하여 경험을 쌓은 이후엔 리그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하나로도 활약했다. 주장으로서 걸출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선수들을 융합시키로도 유명하여 리버풀이 유럽 최고 수준의 멘탈리티를 보유한 팀으로 거듭나는 과정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프리미어 리그의 주장들을 모두 소집하여 선수들의 뜻을 모으기도 하여 '주장들의 주장'이라는 평가도 들은 바 있다. 2018-19 시즌 UEFA 올해의 미드필더 3위, 2019-20 시즌 FWA 올해의 선수, PFA 올해의 팀, ESM 올해의 팀 등 개인 수상을 비롯하여 리버풀에서 12년간 프리미어 리그, 챔피언스 리그 등 7개의 트로피를 따내며 커리어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 제임스 밀너 (2015~2023 / 332경기 26골)
프로 정신의 교과서
무관의 암흑기에 팀에 입단하여, 부주장으로서 모든 대회의 트로피를 쓸어모은 프리미어 리그의 살아있는 전설. 무시무시한 스태미너와 정신력을 발휘해 경기당 13km를 소화하는 철인의 면모를 보여줬으며, 2017-18 시즌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9개의 도움을 기록해 단일시즌 UCL 역대 최다 도움 기록을 수립하는 위엄을 과시한 바 있다. 팀의 필요에 따라 본 포지션인 미드필더뿐 아니라 좌측 풀백으로도 리그 베스트급 활약을 펼칠 정도로 다재다능하고 헌신적인 플레이가 장점이었으며, 부주장으로서 팀의 기강과 규율을 다잡고 팀 내 모든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는 프로 중의 프로로 리버풀 커리어 내내 스쿼드의 중심을 지켰다. 결국 2018-19 시즌 챔피언스 리그, 2019-20 시즌 프리미어 리그, 2021-22 시즌 FA컵 우승을 비롯해 총 7개의 트로피로 안필드 커리어를 화려하게 장식한 뒤 리버풀의 전설로 남았다.
- 호베르투 피르미누 (2015~2023 / 362경기 111골)
클롭풀의 연결고리
클롭풀 공격의 중추이자 클롭이 직접 공언한 리버풀의 엔진. 브라질리언 특유의 센스와 이타적인 플레이로 21세기를 대표하는 펄스 나인 중 하나로 활약했다. '마-누-라'로 유명했던 리버풀의 당대 쓰리톱에서 실질적으로 득점을 도맡았던 살라와 마네를 건실하게 서포트하면서 팀 공격의 윤활류 역할을 수준 높게 수행한 선수. 이에 진정한 팀 공격의 중추라고도 평가받는다. 단순히 서포트 역할만 뛰어났던 것이 아니라 2017-18 시즌에는 챔스 10득점을 올리며 단일 공격 유닛으로도 날카로움을 보인 바 있다. 경기장 내에서의 훌륭한 플레이 뿐 아니라 항상 웃는 모습과 유쾌한 태도로 팬들과 팀 내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레전드 공격수. 클롭이 부임하기 이전부터 팀 공격을 이끌며 2010년대 후반에서 2020년대 초반까지 팀의 메이저 트로피 올킬을 주도한 명실상부 한 시대의 아이콘이다.
- 사디오 마네 (2016~2022 / 269경기 120골)
안필드의 흑표범
리버풀과 세네갈의 돌격 대장. 가공할 탄력 및 야수와 같은 득점력을 앞세워 프리미어리그의 좌측면을 지배한 월드클래스 윙포워드이다. 리버풀에서 호베르투 피르미누, 모하메드 살라와 무시무시한 공격 라인을 형성하여 시대를 풍미했으며, 클롭이 실질적으로 풀 시즌을 설계한 2016년 여름에 팀에 합류해 클롭 축구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 중 하나로 성장했다. 일찍이 리그를 대표하는 육각형 크랙이었으며, 득점력까지 폭발시킨 2018-19 시즌에는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도 차지한 바 있다. PFA 올해의 팀에는 총 4회나 선정됐으며 아프리카 올해의 선수는 두 차례, FA컵과 리그컵 우승 및 프리미어 리그와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을 거머쥔 2022년에는 발롱도르 2위에 랭크된 바 있다. 리버풀이 모든 메이저 트로피를 쓸어모으는 과정에 핵심적인 기여를 했던, 한 시대를 대표한 레전드 공격수.
2.2.8. 현역
리버풀 커리어를 지속하고 있으나 현 시점까지의 활약도와 팀내 위상으로 평가할 때, 향후 레전드 목록에 포함될 것이 매우 유력한 인물들이다.- 트렌트 알렉산더아놀드 (2016~)
- 모하메드 살라 (2017~)
- 앤디 로버트슨 (2017~)
- 버질 반 다이크 (2018~)
- 알리송 베케르 (2018~)
3. 그 밖의 상징적인 인물들
인상적인 업적을 남겼던 인물들과 리버풀 FC 소속으로 공식경기 200경기 이상 출전, 혹은 단기간이더라도 기념비적인 활약을 펼친 선수들만 기재한다.3.1. 감독
- 윌리엄 바클레이 (1892~1895 / 127경기 77승 20무 30패)
리버풀을 만든 브레인
1892년 존 하울딩과 함께 리버풀 창설에 앞장섰고, 창설 이후에는 구단의 비서 겸 사무총장 그리고 초대 감독직을 맡은 인물. 원래 에버튼의 초대 감독 및 사무총장이었으나 하울딩과 에버튼 구단 사이 갈등 과정에서 하울딩 편에 남아 안필드에서 리버풀의 시작을 함께 했다. 리버풀이라는 팀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수 많은 역할에 참여했고, 존 맥케나와 함께 초창기 다양한 구단 업무를 수행했다. 당시엔 감독이 보드진과 완벽히 분리되어 있지않아 다양한 행정 업무를 해야했고, 이에 맥케나와 사실상 감독 업무를 분담 수행했는데, 바클레이는 실질적으로 현대의 디렉터와 같은 역할을 맡았으며, 초창기 선수들을 수급하고 리그에 구단을 등록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바클레이가 팀에 있는 동안 구단은 2부 리그 정상에 2회 올라 1부 리그 승격을 맛봤다.
- 존 맥케나 (1892~1921 / 127경기 77승 20무 30패)
'팀 오브 맥스(Team of Macs)'
리버풀의 2대 감독이자, 초창기 구단의 중대사를 담당해 구단에 대단한 영향력을 끼친 역사적인 인물로, 최측근이었던 존 하울딩을 도와 팀을 창설한 이후 윌리엄 바클레이와 공동으로 구단의 초창기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다. 특히 초창기부터 실질적인 코치로서의 감독 역할을 맡아 팀을 지도하고 선수들을 수급해왔으며, 'Team of Macs'라고 불리는 스코티시 위주의 스쿼드를 조직해 초창기 팀의 활약을 이끌었다. 풋볼 리그에 합류한 뒤로는 2부 리그를 무패로 우승했으며, 톰 왓슨이라는 후임자를 구해 실질적으로 팀을 더 발전시키는 과정을 만든 인물이기도 했다. 이후에는 디렉터직을 맡아 구단 내 모든 이적에 대한 업무에 관여했고 구장 관리에도 힘을 써 안필드 내 스피온 콥 스탠드를 처음으로 건축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1909년부터는 팀의 회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 톰 왓슨 (1896~1915 / 742경기 329승 141무 272패)
역사상 최초의 리그 우승을 이끈 최장 기간 재임 감독
구단 최초의 리그 우승을 비롯하여 두 차례 팀을 잉글랜드 정상의 위치에 올려놓은 초창기 리버풀의 설계자. 창단 이후 최초로 메이저 대회를 우승한 감독이며, 약 19년간 팀을 이끌면서 구단 역사상 최장 기간 팀을 이끈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일찍이 선덜랜드에서 리그 우승을 경험한 뒤 리버풀로 입성하여 당대 잉글랜드 무대에서 가장 뛰어난 감독 중 하나로 명성을 날렸으며,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최초로 다른 두 팀을 이끌고 리그 우승을 이룩한 감독이다. 리버풀의 3대 감독으로 부임하여 초창기 리버풀의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구축하고 구단의 모든 부분에 주춧돌을 쌓는 등 지대한 영향력을 다방면에 끼친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 조지 케이 (1936~1951 / 357경기 142승 93무 122패)
혼란 속에 빛난 리더십
전간기에 팀에 부임하여 곧장 제2차 세계대전의 혼돈 속에서 팀을 지휘하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선수들을 북돋는 리더십과 예리한 운영으로 팀 역사상 다섯 번째 우승이자, 전후 최초의 우승을 이끌어낸 당대 리버풀의 존경받던 수장. 약 15년간 리버풀의 감독직을 맡으며, 역대 두 번째로 오랜 기간 팀을 지휘했다. 건강 악화로 감독직을 사임하기까지 인생을 리버풀에 바쳤던 감독으로 평가받으며 신중한 판단과 전술적인 이해도를 바탕으로 선수들에게 강한 동기부여를 줄 수 있었던 인물로, 그의 지도 아래서 뛰었던 선수들 모두에게 높은 신망을 얻었다. 빌리 리델, 밥 페이즐리와 같은 전설적인 선수들을 팀에 끌어모은 장본인이며, 1950년 FA컵 결승에 올라 구단 최초의 컵 대회 결승전을 치른 감독이기도 하다.
- 제라르 울리에 (1998~2004 / 307경기 160승 73무 74패)
밀레니엄 미니 트레블
21세기의 시작을 알린 감독으로, 2000년대에 들어와 혁신적인 리빌딩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실현하여 적지않은 성공물을 팀에게 가져온 인물. 비록 좋지 못한 시기는 있었으나, 사미 히피아, 디트마어 하만, 블라디미르 스미체르 등의 새로운 영입생들을 적극적으로 팀에 데려왔으며, 제이미 캐러거와 스티븐 제라드 등의 유망주들도 직접 팀에 안착시키며 2000년대 이후 중흥기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리버풀 커리어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2000-01 시즌의 미니 트레블을 이룩한 것으로, 당시 오랜 기간 이렇다할 결과물을 만들고 있지 못했던 리버풀에서 천금과도 같았던 다수의 트로피들을 안필드로 가져온 훌륭한 업적을 세웠다. 이후 심장병을 앓으며 부진을 겪었으나 2002-03 시즌 리그컵을 한번 더 들어올리며 커리어를 다져 침체기에 있던 팀의 위신을 세웠다.
3.2. 선수
3.2.1. 1890년대 ~ 1900년대
- 앤드류 해나 (1892~1895 / 73경기 1골)
리버풀의 초대 주장
리버풀의 첫 스쿼드 멤버 중 하나이자 리버풀의 초대 주장. 특유의 성품과 성격으로 팀의 중심이 되어 1893년 리버풀의 역사상 첫 리그 경기에 주장으로 나서 팀을 이끌었다. 뛰어난 신체능력을 보유하고 있던 그는 초창기 리버풀의 핵심 멤버로 여겨졌으며, 팀이 여러 대회에서 자리를 잡는 과정에 많은 공헌을 했다고 알려졌다. 리버풀의 초대 감독인 존 맥케나와 윌리엄 바클레이가 스코틀랜드에서 스카웃한 최초의 선수들 중 하나로 이전에 에버튼 주장 출신이기도 했는데, 이에 리버풀과 에버튼에서 주장직을 모두 역임한 최초이자 유일한 인물로 남아있다.
- 말콤 맥빈 (1892~1897 / 126경기 43골)
무패 승격을 견인한 최초의 공격수
리버풀의 창단 첫 경기에 나서 구단 역사상 최초의 득점을 올린 구단 최초의 공격수. '팀 오브 맥스'라고 불린 리버풀의 대표적인 초창기 스코티시 스쿼드 멤버들 중 하나이며, 1893-94, 1895-96 시즌 2부 리그에 있던 팀의 승격을 이끌었다. 리버풀 역대 최초의 득점자라는 기록 이외에도 다양한 최초 득점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구단의 첫 랭커셔 리그 득점자이며, 첫 풋볼 리그 득점자이기도 하다. 초창기 경기들에서 앤드류 해나가 출전하지 않으면 직접 주장 완장을 차기도 했던 팀의 주축이자 리더였던 인물이다.
- 모리스 패리 (1900~1909 / 221경기 4골)
웨일스 축구의 간판 미드필더
20세기 초반 웨일스 출신으로 이름을 날린 미드필더. 1900년에 리버풀에 입성하여 총 두 번의 리그 우승을 경험했는데 첫 번째 리그 우승 당시엔 경기 수가 모자라 메달을 받지 못했지만, 5년 뒤 두 번째 우승 당시엔 주도적으로 팀을 이끌어 홈에서 단 2패만 허용하여 승점 51점을 기록하는 등 상당한 호성적에 기여했다. 리버풀 시절 웨일스 국가대표팀으로도 활약했다.
- 로비 로빈슨 (1904~1912 / 271경기 65골)
팀을 승격과 우승을 도운 멀티 플레이어
1900년대 2부 리그에 있던 팀을 이끌어 승격 시킨 후 곧바로 1부 리그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하는데 기여한 공격수. 1904-05 시즌에는 2부 리그 32경기에서 23골을 넣으며 득점왕을 차지하는 등 특히 승격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후 이어진 1부 리그 우승 시즌에서도 11골을 기록하며 팀 공격에 큰 기여를 했다. 이후에는 최전방 공격수에서 하프백으로 포지션을 바꿔 활약하는 다재다능함을 보였다.
- 샘 하디 (1905~1912 / 240경기)
'세이프 앤 스테디 샘(Safe and Steady Sam)'
20세기 당대 최고의 골키퍼 중 하나로, 공격수들에게 포커스가 맞춰져있던 시기에 그들을 압도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던 영국 축구의 슈퍼 스타였다. 톰 왓슨 감독에게 직접 스카웃되어 리버풀에 합류하자마자 1부 리그 우승을 곧장 견인하였고, 걸출한 실력으로 곧바로 안필드의 팬들에게 'Safe and Steady Sam'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잉글랜드 국가대표에서도 당대의 주전 멤버로 활약했다.
3.2.2. 1910년대 ~ 1920년대
- 빌 레이시 (1912~1915, 1919~1924 / 260경기 29골)
까다로운 만능의 윙어
1921-22, 1922-23 시즌 풋볼 리그 2연패와 더불어 1913-14 시즌 팀의 창단 첫 FA컵 결승전을 이끈 측면 미드필더. 커리어 동안 11개의 다른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을 정도로 다양한 역할 수행이 가능했으며, 리버풀에서는 주로 왼쪽 윙으로 출전하여 상대를 교란시는 플레이로 명성을 얻었다. 리버풀에서 FA컵 28경기에 출전하여 11골을 득점했을 정도로 특히 FA컵에 강한 면모를 보인 것으로 유명했다.
- 왈터 워즈워스 (1915~1926 / 242경기 8골)
리그 2연패를 선사한 로컬 보이
제1차 세계대전의 공백기에도 불구하고 리버풀에서 선수 생활을 끈질기게 이어갔던 초창기 리버풀의 로컬 보이. 센터백과 풀백에서 든든한 활약을 펼치며 1921-22, 1922-23 시즌 풋볼 리그 2연패를 이끌었던 당시 리버풀의 대표 수비수였다. 주전으로 활약하던 기간 동안 리그 84경기 중 74경기에서 출전하였고 리버풀이 초창기 풋볼 리그 강자 중 하나로 거듭나는 과정에 인상적인 활약을 남겼다.
- 토미 루카스 (1916~1933 / 366경기 3골)
팀의 뒤를 꿋꿋이 떠받친 명품 조연
작은 피지컬과 부족한 입지에도 포기하지 않으며 17년간 팀의 원동력이 된 근성의 풀백. 팀에 입단한 시기 리버풀 역대 최고의 풀백 듀오 중 하나 불리는 에프라임 롱워스와 도날드 맥킨리에 밀려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 소집되는 선수임에도 주전으로 출장하지 못했으나, 포기하지 않고 팀에 남아 조연을 자처하여 팀의 풋볼 리그 2연패에 기여했다. 주전 선수들이 팀을 떠난 이후엔 드디어 주전 선수로 발돋움하였으며, 이후 약 200경기를 주전으로 활약했다. 체구는 작았지만 태클과 킥이 뛰어난 선수로 유명했다.
- 톰 브로밀로우 (1919~1929 / 375경기 11골)
웨스트 더비가 낳은 테크니션
리버풀 웨스트 더비 지역에서 태어난 로컬 보이이자, 리그 2연패를 견인한 원 클럽 맨. 상당히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어 당시 조지 패터슨 감독에 눈에 띄었고, 곧 바로 리버풀에서 데뷔해 10년간 꾸준한 활약을 펼쳤다. 훌륭한 태클 실력과 배급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브로밀로우는 팀의 브레인으로 여겨졌고, 프로로 전향한 지 3년 만에 잉글랜드 국가대표로도 선발되었다. 1910년 후반까지 영향력 있는 1군 주전으로 활약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친 그는 팀 주장직도 역임하여 모범적인 지도력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 프레드 홉킨 (1921~1931 / 360경기 12골)
안필드 로드의 철강왕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영입되어 안필드를 뜨겁게 달군 장본인. 윙어로서 10년간 활약하며 뛰어난 스피드로 측면에서 다양한 활약을 펼쳤으며 경기 소화력이 매우 훌륭하여 대다수의 경기를 소화한 것으로 유명했다. 리그 2연패의 주역 중 하나였으며, 1923년 3월 초 경기에서 골을 넣은 후 스탠드에 불이 붙은 재밌는 일화가 있다. 당시 팬들 중 하나는 홉킨이 너무 멋진 골을 넣어 관중들이 충격을 받았고 불이 나는 것도 몰랐다는 증언을 했다고 알려졌다.
3.2.3. 1930년대 ~ 1940년대
- 아서 릴리 (1925~1940 / 338경기)
리버풀 최초의 아프리칸
남아공 출신의 골키퍼로 구단 최초의 아프리카 선수였으며, 남아공 대표팀에 선발되어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인상을 남긴 뒤 스카웃 되어 영국으로 넘어와 엘리샤 스콧을 이은 30년대 리버풀의 주전 골키퍼로 활약했다. 큰 키와 예리한 무브를 자랑하는 뛰어난 골키퍼였던 그는 구단 역대 최고의 골키퍼 중 하나인 스콧을 2년 만에 밀어내고 넘버 원의 자리에 오른 뒤 오랜 기간 리버풀의 골문을 지켰다. 평생을 리버풀에만 몸 담았으며 멋진 인품으로도 유명했던 그는 은퇴 후 고향의 동료인 니우엔후이스와 고국의 전쟁에 참여했으며, 1939년 실시했던 풋볼 리그 베스트11과 영연방 베스트11의 이벤트 경기에 참여해 받은 금액을 적십자에 모두 기부했던 일화로도 유명하다.
- 톰 브래드쇼 (1930~1938 / 291경기 4골)
'타이니(Tiny)' 브래드쇼
190cm의 거구임에도 'tiny'라는 역설적인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당대 리버풀의 대표 수비수. 피지컬적 우위를 앞세운 파워 플레이로 윙백, 센터백 등 와이드한 수비범위에 있어 훌륭한 기량을 뽐냈으며, 리버풀 커리어 초기에는 지미 맥도걸과 좌우 풀백 파트너를 맡기도 했으나 후에는 센터백으로 오래 활약했다. 스코틀랜드 대표팀이 웸블리에서 콧대 높은 잉글랜드 대표팀을 잡아낸 그 유명한 '웸블리의 마술사들(Wembly Wizards)' 중 하나로, 해당 경기에선 잉글랜드의 대표 공격수 딕시 딘을 경기 내내 꽁꽁 묶어내며 상당한 화제를 일으켰다. 딘과는 머지사이드 더비에서도 자주 부딪혔는데, 브래드쇼는 거친 플레이나 교묘한 파울을 하지않고 정직한 몸싸움으로만 승부하는 수비수라 딘이 상당히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브래드쇼는 리버풀의 주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 베리 니우엔후이스 (1933~1947 / 257경기 79골)
리버풀의 퀵실버 '니비(Nivvy)'
풋볼 리그를 빛냈던 초기 아프리카 스타들 중 한명으로 호지슨, 릴리와 함께 리버풀을 대표하는 남아공 트리오로 활약했다. 양측면을 오갈 수 있었으나 주로 우측면의 공격적인 윙어로 활약했으며, 빠른 속도와 기술적인 플레이, 강한 슛과 능숙한 헤더로 유명했다. 발음하기 어려운 성으로 인하여 팬들에게는 'Nivvy'라고 불렸으며 1946-47 시즌, 조지 케이 감독 아래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승점 1점차로 제치고 차지한 팀 역사상 다섯 번째 리그 우승에 기여한 이후에는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공군에 자원하여 입대해 공훈까지 남겨 전쟁 이후에도 팬들에게 어마어마한 사랑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 레이 램버트 (1939~1956 / 342경기 2골)
최연소의 리버풀 맨
당시 최연소 나이였던 13세의 나이로 리버풀에 입단하여 약 17년간을 리버풀에서만 뛴 원 클럽 맨.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공백기는 있었으나 17세의 나이로 프로 계약을 맺고 이후 오랜 기간 리버풀에 헌신했다. 측면 수비수 역할을 선호했던 그는, 커리어 내내 시즌당 평균 30경기씩을 소화하는 핵심 선수였으며, 뛰어난 재능으로 안필드 관중들에게 인기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전후 울버햄튼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1점 차로 제치고 차지한 우승의 핵심 멤버로 해당 시즌 리그 42경기 중 36경기에 출전했다. 이후 1950년 리버풀의 사상 첫 웸블리 결승전에도 기여했다.
3.2.4. 1950년대 ~ 1960년대
- 지미 멜리아 (1954~1964 / 286경기 79골)
암흑기를 뚫어낸 로컬 보이 윙어
리버풀 태생으로 50년대 리버풀의 암흑기를 지탱했고, 샹클리 사단의 첫 스쿼드에서 오른쪽 윙어로 활약하며 팀의 1부 리그 승격을 이끈 핵심 멤버 중 하나. 일찍이 재능을 인정받아 15세의 나이로 리버풀에 입단했으며 이후 18세의 나이로 1군에 데뷔하여 다년간 리버풀의 공격진을 이끌었다. 측면 포워드로 주로 활약하며 특히 1958-59 시즌에는 21골을 넣어 팀 내 최다 득점자에 오르기도 했다. 샹클리가 팀에 부임한 이후에는 오른쪽 윙어로 자리를 고정해 1961-62 시즌 대부분의 경기에 출전했고 팀의 승격에 크게 기여했다. 은퇴 이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에 위치한 리버풀 아카데미에서 기술 이사로 일하기도 했다.
- 고든 밀른 (1960~1967 / 282경기 18골)
고든 '개퍼(The Gaffer)'
빌 샹클리의 첫 번째 영입생들 중 하나로 샹클리호의 초기 영광을 이끌었던 미드필더. 리버풀이 2부 리그에서 승격하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후 영입된 윌리 스티븐슨과 훌륭한 중원 파트너십을 형성했다. 안필드 커리어에서 1963-64, 1965-66 시즌에 1부 리그 우승을 견인했으며, 1964-65 시즌 사상 첫 FA컵 우승 멤버이기도 하다. 특히 1964-65 시즌 유러피언 컵 준결승 1차전에서 인터 밀란을 상대로 대단한 활약을 펼친 것으로 유명세를 날렸다. 당시 중원의 터줏대감으로 'The Gaffer'라는 이명으로 알려졌다.
- 바비 그레이엄 (1961~1972 / 137경기 32골)
스코티쉬 특급 조커
리버풀 유스와 리저브를 거쳐 17세에 데뷔한 스코티쉬 센터 포워드. 샹클리호의 주전 멤버는 아니었으나 무려 유로피언 컵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을만큼 결정적인 득점을 창출해내는 능력을 타고나 장기간 팀의 특급 조커로 활약했다. 이안 세인트 존과 로저 헌트의 뒤를 오랜 기간 받쳤고 1969-70 시즌에는 무려 20골을 올리는 대단한 날카로움을 과시하기도 했다. 10년에 걸쳐 팀의 게임 체인저로서 활약한 그는 존 토샥에 이르기까지 리버풀의 공격진을 뒤에서부터 지탱하는 버팀목으로 팬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리버풀 커리어를 마감한 이후엔 풋볼 리그를 떠나 스코틀랜드에서 80년대까지 활동했다.
- 윌리 스티븐슨 (1962~1967 / 241경기 18골)
FA컵 우승을 이끈 노련한 미드필더
1962년에 빌 샹클리에 의해 리버풀에 입성한 뒤, 고든 밀른과 중원 듀오를 형성하며 샹클리호의 초창기 주축 멤버로 활약한 중앙 미드필더. 감각적인 패스 능력과 노련한 경기 운영으로 단숨에 주전으로 활약하며 1963-64, 1965-66 시즌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특히 그는 1964-65 시즌 FA컵 준결승전에서 팀이 페널티킥을 얻었을 때, 모두가 기피하던 상황에서 키커로 나와 득점을 기록한 것으로 유명하며[41], 해당 시즌 FA컵 전경기에 출전하며 팀의 사상 첫 FA컵 우승을 이끌었고, 해당 시즌 유러피언 컵에서도 걸출한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 제프 스트롱 (1964~1970 / 201경기 33골)
샹클리호의 멀티 플레이어
60년대 샹클리호의 첫 번째 영광을 뒤에서 지원하며 전천후 유틸리티로 활약한 숨은 보석. 아스날에서 주전 공격수로 활약하다 리버풀에 입성하였고[42], 이후 6시즌 동안 거의 모든 포지션의 백업으로 활약하며[43] 팀의 리그 우승과 FA컵 우승, 유럽 대항전 활약을 지원했다. 특히 1965년 FA컵 결승전에서 부상당한 고든 밀른 대신 출전하여 연장전 승부에 힘을 실어 팀의 우승에 기여했으며, 1965-66시즌 컵위너스컵 준결승전에서는 아무도 예상못한 헤딩 득점을 뽑아내 팀의 결승행을 이끌었다. 묵묵히 팀의 위기 상황에 소방수로 등장하여 안필드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대표적인 언성 히어로 중 하나.
3.2.5. 1970년대 ~ 1980년대
- 브라이언 홀 (1968~1976 / 224경기 21골)
'리틀 밤버(Little Bamber)'
160cm대의 작은 신장이었으나 피치 위에서 굉장히 영리한 움직임으로 활약했던 꾀돌이 미드필더. 70년대 초반 샹클리의 팀 리빌딩에서 살아남아 이안 캘러한이 중앙 미드필더로 이동한 이후 우측면에서 적극 기용된 선수로, 선발과 조커를 모두 오가며 팀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팀에 자리잡은 이후에는 미드필더 전역에서 활동하며 근면성실한 플레이로 팬들과 팀원들에게 신뢰받는 선수였던 그는 리버풀에서 총 6개의 타이틀을 들어올렸고 샹클리에게 깊은 신뢰를 받는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 알렉 린제이 (1969~1977 / 248경기 18골)
샹클리호의 언성 히어로
샹클리의 리빌딩 멤버로 영입되어 70년대 초반 훌륭한 활약을 펼친 왼쪽 풀백. 페이즐리 휘하에서는 주전으로 활용되지 못하여 붉은 제국 멤버 중 존재감이 크지는 않지만 1973년과 76년의 리그 우승, 74년의 FA컵 우승, 73년의 UEFA컵 우승에 혁혁한 공을 세운 핵심 수비수 중 하나였다. 주전으로 도약한 시즌들에서는 시즌마다 40경기씩 뛰며 철강왕의 면모를 뽐내기도 했으며, 특히나 당대 전성기를 구가하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무찌른 UEFA컵에서의 활약은 리버풀 커리어의 정점으로 팬들에게 기억된다.
- 래리 로이드 (1969~1974 / 218경기 5골)
샹클리의 마지막 센터백
론 예이츠의 뒤를 이을 차세대 센터백으로 영입되어 샹클리호의 마지막을 책임졌던 강건한 센터백. 기술적이거나 빠르지는 않았으나 공중볼에 누구보다 강했고 태클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던 수비수로 명성을 날렸다. 특히 1970-71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예이츠를 대체하여 토미 스미스와 단단한 주전 파트너십을 이루었고, 1971년 FA컵 준우승에 이어 1972-73 시즌 리그와 UEFA컵 더블을 달성하는 과정에 핵심 멤버로 활약했다. 페이즐리 감독이 부임한 이후로는 안필드를 떠나 팀에서 오래 활약하진 못했으나 이후 노팅엄 포레스트에서 전설적인 스쿼드 멤버로 활약하며 유러피언컵 2연패를 달성, 잉글랜드 축구계의 전설로 남게 되었다.
- 피터 코맥 (1972~1976 / 178경기 26골)
화룡점정의 플레이 메이커
샹클리가 '팀의 마지막 조각'이라고 평하며 70년대 리빌딩의 화룡점정으로 팀에 입성하였고, 이후 짧지만 뜨겁고 강렬한 인상을 남긴 당대 핵심 중앙 미드필더. 상대 마크맨을 들이받는 플레이도 불사하며 공격력을 뽐내는 투지넘치던 미드필더였던 그는, 리버풀의 중원에 불꽃같은 경쟁심을 불어넣음과 동시에 자신의 안필드 커리어 첫 두 시즌에서 모두 두 자리수 득점을 올리며 1972-73, 1975-76 시즌 리그 우승에 상당한 공을 세웠고, 1973년 UEFA컵 우승과 1974년 FA컵 우승에도 결정적으로 기여하여 당대 팀 내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비록 무릎 부상으로 인해 리버풀 커리어를 일찍 마감했으나, 70년대 샹클리호가 다시 한 번 반등하여 붉은 제국의 초석을 제대로 다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시기의 주축 멤버로 평가받는다.
- 지미 케이스 (1973~1981 / 269경기 46골)
중원의 전투병
터프한 태클과 벼락같은 중거리포로 안필드 커리어를 장식한 페이즐리호의 중원 마당쇠. 중원 힘싸움에서 언제나 강렬하게 부딪히며 그레이엄 수네스, 테리 맥더모트와 함께 70년대 붉은 제국의 중원을 구성한 미드필더였다. 특히 강력한 중거리슛이 트레이드 마크였을 만큼 대단했으며, 리버풀에서 리그 우승 4회와 유러피언컵 3회 우승, UEFA컵과 리그컵 우승을 이룩하는 전설적인 커리어를 남겼다. 사생활 문제로 인해 일찍 리버풀을 떠났지만[44] 특유의 아이코닉한 플레이 스타일과 활약에 의해 커리어 내내 안필드의 팬들에게 열렬한 사랑을 받았다.
- 데이비드 페어클러프 (1974~1983 / 154경기 55골)
붉은제국의 슈퍼 서브
비록 주전으로 활약하는 기간은 많지 않았으나, 케니 달글리시, 데이비드 존슨, 존 토샥 등 팀의 공격수들이 부진하거나 부상으로 공백이 생겼을 때 어김없이 출전해 천금같은 골들을 뽑아낸 기적의 슈퍼 서브. 붉은 제국을 만든 또 다른 언성 히어로이자 대단한 클러치 능력으로 팀에게 기적적인 승리를 안겨준 장본인이다. 통산 리버풀 득점 55골 중 35골이 60분 이후에 터졌을 정도로 결정적인 골 감각을 타고 났으며, 특히 골키퍼와의 일대일 상황에서 상당히 강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페어클러프는 '교체 투입 후 가장 많은 골을 득점한 선수'라는 특이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데, 그는 통산 교체 후에 18골을 득점했으며 이러한 특이한 커리어로 인하여 팬들에게 대단히 사랑받는 선수이기도 했다. 특히 1976-77 시즌 유러피언 컵 8강에서 생테티엔에게 경기 종반 극적인 결승골을 성공시키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일례가 아직까지도 유명하다.
- 조이 존스 (1975~1978 / 100경기 3골)
빅이어를 들어올린 최초의 웨일스인
리버풀에서 3년간 단 100경기만을 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임팩트를 남기며 기념비적인 인물로 남은 레전더리 플레이어. 전방으로 훌륭한 패스를 배급할 수 있었던 레프트 백으로 이름을 날린 그는, 리버풀에 입성한지 얼마지나지 않아 1976-77 시즌에 리그 우승과 FA컵 준우승, 유러피언 컵 우승을 달성하는 등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리버풀 역사상 가장 빛나는 시즌 중 하나를 완성했고 이어진 1977-78 시즌 유러피언 컵 2연패의 위업을 달성하며 짧은 안필드 커리어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당시 리버풀이 석권한 대회들에 있어서 존스의 활약도는 상당했고, 대단한 시기에 뚜렷한 인상을 남겼기에 안필드 팬들에게 상당한 사랑과 인기를 받았다. 이후에도 오래간 리버풀의 가장 영광스러운 시절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 데이비드 존슨 (1976~1982 / 213경기 78골)
'닥터(Doc)' 존슨
70년대에 활약한 대형 스트라이커. 친정팀 에버튼의 정적 리버풀로 이적하여 화제를 불러일으켰으며,[45] 리버풀에선 존 토샥, 케니 달글리시와 호흡을 맞추며 막강한 공격진을 구축했다. 1979-80 시즌 리그 우승의 최대 주역으로 손꼽히며 해당 시즌 PFA 올해의 팀에도 입성, 팀은 물론 리그 내에서도 상당히 경쟁력 있는 입지를 자랑했다. 그는 항상 가방에 비상약과 의료 기구들을 넣고 다녀 팀 동료들로부터 'Doc'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머지사이드 더비에서 양 팀 소속으로 경기에 나서 모두 득점을 올린 유일한 선수라는 굉장히 특이한 기록의 보유자이기도 하다. 후에 이안 러쉬가 팀에 합류하며 입지가 상당히 좁아졌지만 짧은 기간 동안 리그 4회, 리그컵 2회, 유러피언 컵 3회 우승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 새미 리 (1976~1986 / 295경기 19골)
'리틀 샘(Little Sam)'
리버풀 태생의 로컬 보이로 리버풀 유스와 리저브를 거쳐 리버풀에서 데뷔한 성골 미드필더. 80년대 초중반 유럽 축구를 휘어잡은 '붉은 제국' 시절에 페이즐리의 신임을 받아 측면 미드필더로 기용되었고, 리버풀 커리어 동안 풋볼 리그 3연패를 포함 무려 14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특출난 실력자이거나 꾸준히 최고의 활약을 펼친 팀 내 핵심 선수는 아니었으나,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민첩하게 날카로운 러닝 크로스를 날릴 줄 알았으며, 활동량이 뛰어난 선수로 알려졌다. 특히 1980-81 시즌 바이에른 뮌헨과의 유러피언 컵 준결승전에서 파울 브라이트너를 완벽하게 봉쇄시키는 당찬 모습을 보여주는 등 팬들에게 범상치않은 임팩트를 남겼고 '페이즐리 키즈'로 불리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선수 커리어 은퇴 후에는 베니테스 감독 시절 수석 코치와 리버풀 아카데미 매니저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 크레이그 존스턴 (1981~1988 / 271경기 40골)
'캥거루 스키피(Kangaroo Skippy)'
특유의 겸손함과 헌신적인 멘탈리티로 안필드에서 많은 사랑을 받은 80년대 풋볼 리그의 호주산 스타 플레이어. 173cm의 신장에서 나오는 낮은 무게중심을 활용한 드리블로 'Kangaroo Skippy'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페이즐리에게 영입되어 달글리시 체제에 이르기까지 톡톡 튀는 오른쪽 윙어로 활약한 그는 1982년과 1983년 리그 2연패의 일원이었고 1983년의 리그컵에 이어 1984년 리그 우승, 리그컵, 유러피언 컵 3관왕을 달성한 역대 리버풀 최고의 팀에 기여한 선수였다. 1986년에는 웸블리에서 열린 에버튼과의 결승전에서 쐐기골을 득점하며 리버풀의 20세기의 세 번째 '더블'[46]에 필수적인 역할을 했다.[47] 리버풀 유니폼을 입고 있는 것이야 말로 본인에게 진정한 승리라는 말을 남기며 팀에 대한 대단한 사랑과 충성을 드러냈던 그는 가족의 투병에 의해 전성기 나이에 리버풀에서 선수 커리어를 은퇴해 많은 이들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 게리 길레스피 (1984~1991 / 214경기 16골)
붉은 제국의 마지막 센터백
조 페이건에게 발굴되어 리버풀에 입성해 달글리시 체제의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킨 붉은 제국 최후의 센터백. 미드필더와 측면 수비수로도 뛸 수 있었던 유틸리티였으며, 상당한 전진 능력으로 순간적으로 공격에 가담해 직접 득점까지 올릴 수 있는 전천후의 기술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유명하다.[48] 리버풀의 주전 센터백 조합이었던 마크 로렌슨과 엘런 한센의 백업으로 커리어를 시작하였으나 후에는 로렌슨을 측면 수비수로 밀어내면서 당당히 핵심 센터백으로 올라섰고, 1990-91 시즌 달글리시가 사임하기 직전까지 시즌 대다수의 경기에 출전하 제국의 명맥을 지켰다.
- 얀 몰비 (1984~1996 / 292경기 58골)
'람보(Rambo)'
188cm의 건장한 신체조건을 자랑한 당대 리버풀 중원의 거인. 태클을 피하지 않는 단단한 플레이의 중앙 미드필더로 'Big Jan', 'Great Dane', 'Rambo' 등의 터프한 별명을 가지고 있던 그는 날카로운 패싱력을 발휘해 중원에서 힘있는 게임을 전개하던 플레이 메이커였으며, 유사시 센터백과 스위퍼로도 활약이 가능한 전천후 자원이었다. 1985-86 시즌 리그와 FA컵 더블을 달성했던 당시 58경기를 소화하며 21골을 넣는 대단한 시즌을 보냈고, 특히 FA컵 결승전이었던 머지사이드 더비에서는 3골에 관여하는 특급 활약을 선보인 바 있다. 특히 패널티 킥 능력이 뛰어나 45회 시도 42회 성공이라는 엄청난 성공률을 발휘해 역사상 최고의 키커 가운데 한명으로 유명하기도 했다.[49] 헤이젤 참사 이후엔 다소 어두워진 팀 분위기를 환기하는 리더십까지 발휘하며 리버풀의 품에 총 8회의 우승 트로피를 안겼다.
- 스티브 맥마흔 (1985~1991 / 277경기 50골)
'하드 마카(Hard Macca)'
달글리시의 첫 영입생으로 단단한 플레이를 펼치며 안필드 팬들의 사랑을 받은 중앙 미드필더. 그레이엄 수네스의 대체자로 영입되었다는 큰 부담과 170cm의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중원에서 성실하게 뛰며 패스와 득점에서 다양한 존재감을 보여준 맥마흔은 1986-87 시즌 총 14골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및 FA컵 우승 트로피 수집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1989-90 시즌 에버튼을 승점 9점차로 따돌리고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데 지대한 기여를 더해 안필드 커리어의 클라이막스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잉글랜드 국가대표로도 활약했으며 PFA 올해의 팀에 1987-88 시즌과 1989-90 시즌에 선정되는 등 당대를 대표하는 리버풀의 핵심 미드필더 중 하나였다.
- 피터 비어즐리 (1987~1991 / 175경기 59골)
시대를 풍미한 대형 스트라이커
영국 축구의 위대한 재능이자 풋볼 리그의 전설적인 스타 플레이어. 리버풀에서는 1980년대 후반 존 올드리지, 존 반스와 함께 붉은 제국의 마지막 전성기를 불태운 스트라이커로 족적을 남겼다. 당시 케니 달글리시 감독 하에서 영국 내 최고 이적료를 발생시키며 야심차게 영입된 선수로, 1987-88, 1989-90 시즌 리그 우승과 1988-89 시즌 FA컵 우승을 견인했다. 리버풀에서만 PFA 올해의 팀에 총 2회 이름을 남긴 비어즐리는 스트라이커로서의 야수성, 미드필더에서의 침착함, 창조적인 플레이메이킹, 넓은 시야등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는 만능의 공격수로 명성을 날리며 짧은 안필드 커리어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후 에버튼으로 충격적인 이적을 감행했지만, 비어즐리의 활약을 인정한 팬들이 그의 이적에 별다른 비난을 가하지 않았을 정도.
- 레이 호턴 (1987~1992 / 202경기 38골)
달글리시호의 마지막 퍼즐
크레이그 존스턴의 대체자로 안필드에 입성하여 붉은 제국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측면 공격수. 달글리시에 의해 붉은 유니폼을 입은 이후 오른쪽 측면에서 맹렬한 에너지로 팀의 톱니바퀴를 자처하며 영민한 활약을 펼쳤다. 존 반스와 함께 양 날개 라인을 형성하며 달글리시호의 핵심 선수로 이름을 날렸고, 1987-88, 1989-90 시즌 리그 우승을 달성했으며, 1988-89, 1991-92 시즌 FA컵 우승을 들어올렸다.
3.2.6. 1990년대 ~ 2000년대
- 스티브 맥마나만 (1990~1999 / 364경기 66골)
리버풀이 낳은 잉글랜드의 스타 보이
90년대 리버풀을 이끈 로컬 보이 출신의 에이스 플레이 메이커. 10대의 나이로 이안 러쉬, 존 반스 등 전설적인 선배들과 함께 뛰면서도 돋보이는 퍼포먼스를 자랑했으며, 1995-96 시즌 EPL 도움왕, 그 다음 시즌에는 PFA 올해의 팀에도 이름을 올리는 등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여 안필드의 스타 보이로 시대를 풍미했다. 좌우 측면과 중앙을 가리지않고 공격적인 미드필더 롤을 수행하며 천부적인 드리블 능력과 왕성한 활동량, 창조적인 플레이메이킹 능력, 양발을 활용하는 파괴적인 드리블링을 선보인 그는 역사상 다섯 번째로 어린나이에 리그 100 어시스트를 달성했으며 레알 마드리드 이적으로 EPL을 떠나는 시점에 EPL 역사상 최다 어시스트 및 키 패스 공동 1위를 달성했을 정도로 천재적인 선수였다. 1991-92 시즌 FA컵과 1994-95 시즌 리그컵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했으며,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는 1996년 유로에서 눈에 띄는 퍼포먼스를 펼치며 당대 주축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1999년 스페인으로의 충격적인 이적을 감행하면서 팬들에게는 원성도 들었던 선수.
- 제이미 레드냅 (1991~2002 / 308경기 41골)
'스파이스 보이(Spice Boy)'[50]
185cm의 훤칠한 외모와 비주얼에 걸맞은 화려한 플레이로 큰 사랑을 받은 안필드의 또 다른 스타 보이. 중앙 미드필더 역할을 맡으며 넓은 시야, 날카로운 패스, 호쾌한 중거리 슛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당대의 스티브 맥마나만, 로비 파울러 등과 함께 리버풀의 영건으로 맹활약했다. 커리어 동안 모범적인 생활을 하지 않는 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나며 팀의 핵심 미드필더로 출중한 실력을 선보이며 영향력을 높여갔고, 90년대 중후반부 이후론 리버풀 중원의 중추로 자리잡았다. 1998-99 시즌에는 제라르 울리에 감독 아래서 리그에서만 10골을 신고하며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고, 이후 1999-2000 시즌 팀의 주장으로도 선임되어 3년간 팀을 이끌었으나, 2000년을 기점으로 무릎 부상이 발병하여 2000년대 초반 팀의 유럽 대항전 호성적에는 크게 기여하지 못했고, 이후 신예 스티븐 제라드에게 자리를 내주며 새 시대로 바통을 넘겼다. 그러나 90년대 리버풀의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선수로 명망이 높았고 팀의 침체기 기간 동안 팀을 상징한 스타 플레이어 중 하나로 여겨진다.
- 대니 머피 (1997~2004 / 246경기 44골)
노스웨스트 더비의 사냥꾼
2000년대 초반 팀의 트로피 수집에 동참한 성실한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 한 때 주전 경쟁에서 밀려 임대를 떠나기도 하는 등의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후 성장을 거듭하여 미드필더 전역에서 뛸 수 있는 전천후의 미드필더로 팀에 자리잡았다. 멀티성과 더불어 온 더 볼 플레이에서의 넓은 시야, 성실한 활동량을 바탕으로 2002-03 시즌엔 무려 56경기를 소화해 구단 올해의 선수에도 등극하였다. 또한 세트피스 능력과 득점력도 굉장히 뛰어나서 팬들의 기억에 강한 인상을 심어줬는데, 특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상당히 뛰어난 활약을 펼친 것으로 팬들에게 좋은 추억을 남겼다. 2000-01 시즌 올드 트래포드에서 넣은 프리킥 결승골에 이어 2001-02 시즌에도 맨유 원정 결승골을 뽑았고, 2003-04 시즌에도 올드 트래포트에서 결승골을 기록한 바 있다.
- 디트마어 하만 (1999~2006 / 283경기 11골)
바이에른이 낳은 중원의 기함
191cm의 전투적인 피지컬을 자랑했던 강인한 유형의 수비형 미드필더. 대포와도 같은 강력한 중거리 슈팅과 프리킥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선수로, 독일 국가대표팀과 리버풀에서 전성기를 맞아 인상적인 활약상을 펼쳤다. 리버풀에서는 스티븐 제라드와 중원듀오를 맡아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2000-01 시즌의 미니 트레블과 2004-05 시즌 이스탄불의 기적으로 알려진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 훌륭하게 기여했다. 특히 이스탄불의 기적 당시 AC 밀란과의 결승전에서는 발가락 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음에도 연장 후반까지 경기를 투지로 소화했으며, 승부차기 키커로 나와 골을 성공시키는 저력을 보여줘 팬들에게 박수와 존경을 받았다. 그 다음 시즌 FA컵 우승 당시에도 승부차기 키커로 나와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리그에서도 다년간 수위급 선수로 활약하며 호쾌한 플레이를 펼쳐 2000년대 중반 리버풀 팬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으며, 특히 2003-04 시즌 포츠머스를 상대로 뽑아낸 골은 그해 BBC선정 올해의 골로 선정되기도 했다. 리버풀에서 FA컵 2회, 리그컵 2회, UEFA 슈퍼컵과 UEFA컵,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이뤘다.
- 예지 두덱 (2001~2007 / 186경기)
이스탄불의 밤을 지킨 춤추는 수문장
페예노르트를 떠나 안필드에 입성한 직후 팀의 주전으로 발돋움하여 이스탄불의 기적을 완성한 기념비적인 골키퍼. 약 네 시즌간 상당한 임팩트를 남기며 안필드의 골문을 방어했다. 리버풀 커리어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2004-05 시즌의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 전반에만 3골을 실점했으나 스티븐 제라드의 추격골을 시작으로 팀이 각성하여 3-3을 만들어냈고, 이후 연장 승부 내내 신들린 연속 선방을 해내며 경기를 승부차기까지 끌고갔다. 이후 승부차기에 돌입하자 온몸을 씰룩거리는 디펜스 모션으로 세르지뉴와 안드레아 피를로, 안드레이 셰브첸코의 패널티킥을 방어해내며 구단 역사상 다섯 번째 빅 이어를 들어올렸다. 비록 리버풀에서의 나머지 커리어는 화려하지 못했지만 리버풀의 2000년대 중반 중흥기를 이끈 이스탄불에서의 위대한 승리로 인해 리버풀 서포터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인물이다.
- 욘 아르네 리세 (2001~2008 / 348경기 31골)
악마의 왼발
역대 최고의 슛 파워를 논할 때마다 순위에 들어가는 선수로, 골 네트가 찢어질 듯한 왼발 킥 파괴력을 과시했던 좌측 풀백. 공포스러운 강도의 왼발 킥에 빠른 발은 물론 185cm의 피지컬까지 지녔던 선수였으며 당대 프리미어리그의 인상파 플레이어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유명한 이스탄불의 기적에서는 윙어로 풀타임을 소화하여 팀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리버풀에서 FA컵과 리그컵을 포함, 7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리버풀과 프리미어 리그 무대에서 오랜 기간 활약하면서 2000년대 팀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선수 중 하나로 기억된다.
- 루이스 가르시아(2004~2007 / 121경기 30골)
원더 골 제조기
일찍이 라리가에서 활약한 이후 베니테즈의 부름을 받아 안필드에 입성한 스페니시 테크니션.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만 리버풀에 머물렀으나, 2004-05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2005-06 FA컵 우승을 비롯 4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고 특히나 2004-05 시즌의 챔피언스 리그에서 대단한 활약을 펼쳐 리버풀에서 인상적인 족적을 남긴 선수로 평가받는다. 챔피언스 리그 우승 시즌에는 UEFA 올해의 팀에 입성하기도 했다. 안필드 팬들에겐 환상적인 중거리 슈팅과 원더 골로 많은 좋은 기억을 남겼으며, 이스탄불의 기적을 이뤄낸 레전드 중 한 명으로 기억되는 편. 화려한 플레이에 의해 국내 팬들에겐 '루간지'라고 불리는 선수다.
- 사비 알론소 (2004~2009 / 210경기 19골)
롱패스 마스터
베니테즈 감독의 스페니시 커넥션 중 하나로 리버풀의 유니폼을 입고 굵직한 임팩트를 만들어냈던 수비형 미드필더. 후방에서 강인한 피지컬로 수비에 도움을 주면서도 넓은 시야와 강력한 킥으로 양 사이드를 공략하는 양질의 롱패스를 뿌렸던 프리미어 리그 시대 리버풀의 대표 미드필더 중 하나이다. 무엇보다도 이스탄불의 기적 멤버 중 하나로, 3-3 동점을 만드는 귀중한 동점골을 기록한 장본인이기도하다. 이후엔 꾸준하게 리그 수위급 미드필더로 발전하여 2000년대 후반 스티븐 제라드, 하비에르 마스체라노와 함께 세계 최고의 퀄리티를 가진 중원을 형성했으며, 2008-09 시즌에는 본격적으로 리그 최고 수준의 퍼포먼스를 구가하여 안필드의 팬들을 열광시켰다. 리버풀의 자금난과 운영 미스 때문에 더 오래 리버풀에 머무르지는 못했지만, 본인의 커리어 내내 리버풀과 안필드 팬들에 대한 사랑을 드러냈던 인물로, 현재에도 리버풀 팬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선수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리버풀에선 챔피언스 리그와 FA컵을 비롯, 4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 페페 레이나 (2005~2014 / 396경기)
암흑기의 골문을 지킨 승부차기의 영웅
팀의 암흑기에 든든하게 뒷문을 사수하며 안필드의 골문을 지킨 골키퍼. 당대 EPL을 대표하는 골키퍼 중 하나로 명망이 높았으며, 뛰어난 반사신경, 깔끔하고 정확한 볼 전개 능력을 위시한 특유의 안정감으로 EPL 최다 클린 시트 골키퍼에게 주어지는 프리미어 리그 골든글러브를 무려 3연속 수상했다. 이적 직후 2005-06 시즌 FA컵 결승에서 승부차기 승리를 이끌어 내면서 리버풀에서의 첫 트로피를 들어올렸는데, 이후 2011-12 시즌 리그 컵에서도 승부차기 끝에 우승을 차지하여 리버풀의 2000년대 중후반 무관을 끊어낸 승부차기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프리미어 리그에서의 꾸준한 활약에 힘입어 2000년대 후반부터 대단한 전성기를 맞이한 스페인 대표팀의 세컨 골키퍼 자리도 오랜 기간 사수했다.
- 다니엘 아게르 (2006~2014 / 232경기 14골)
배신하지 않는 덴마크인
대단한 충성심과 팀을 향한 애정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덴마크 출신의 센터백. 잦은 부상으로 재능을 만개시키지는 못했으나 현대 축구에 어울리는 발기술과 터프한 수비로 팀에 다년간 헌신했다. 슈크르텔과 함께 2010년대 초반 단단한 수비력을 자랑한 바 있으며, 이후엔 리더십을 인정받아 리버풀의 부주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암흑기 시절에 팀과 함께 우여곡절을 겪는 도중 외부의 영입 제의를 받았으나, 리버풀에 대한 충성심 하나로 팀을 지켰으며 이에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덴마크인은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명언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 디르크 카윗 (2006~2012 / 285경기 71골)
Mr. ' 듀라셀(Duracell)'
지치지 않는 체력과 팀을 위한 헌신으로 암흑기 팀의 공수 모두에서 맹활약한 윙어. 네덜란드 리그 득점왕 출신으로 리버풀에 입성하였으나, 골 결정력 보다는 왕성한 활동량과 사이드 라인에서의 영향력으로 측면 위치에서 전성기를 맞았고, 6년간 안필드에서 헌신적인 플레이로 많은 팬들에게 박수를 받았다. 비록 리버풀에서는 2011-12 시즌의 리그컵 외에 다른 우승 커리어를 만들지 못했으나, 2006-07 시즌 챔피언스 리그와 2008-09 시즌 프리미어 리그 준우승 과정에서 팀에 지대한 공헌을 올렸고 특유의 플레이 스타일로 팀원들에게는 귀감을 주는 선수로, 팬들에게는 사랑을 받는 인물로 자리잡았다.
3.2.7. 2010년대 ~ 2020년대
- 조르지니오 바이날둠 (2016~2021 / 237경기 22골)
매직 지니
위르겐 클롭 감독의 리버풀 커리어 초반부를 든든하게 지원한 중앙 미드필더. 본래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주목받았으나, 안필드에서 후방의 살림꾼 역할을 도맡으며 전천후의 활약을 펼쳤고, 특히나 후방에서 공을 소유하고 왕성한 활동량으로 중원 싸움에 가담하는 성실한 플레이로 인상을 남겼다. 안정성을 극도로 추구하는 플레이에 의해 보는 이로 하여금 답답함을 유발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박스로 가담하여 팀을 승리로 이끄는 대단한 클러치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2018-19 시즌 안필드의 기적으로 유명한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 2차전에서 후반 2골을 집어넣으며 위대한 역전극을 장식한 바 있다. 이외에도 2016-17 시즌 프리미어 리그 4위로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결정지으며 사실상의 암흑기를 종결시키는 리그 골 등도 안필드 팬들에겐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평가받는다. 리버풀에서 프리미어 리그와 챔피언스 리그를 비롯 4개의 메이저 트로피를 들어올렸으며, 2018-19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 리그 시즌의 스쿼드에도 선정되었다.
- 디보크 오리기 (2015~2022 / 175경기 41골)
기적을 만드는 공격수
놀라운 클러치 능력과 결정적인 골 포착 능력으로 수 많은 기적을 창출한 21세기 리버풀 최고의 슈퍼 서브. 190cm의 피지컬을 활용한 다부진 피지컬과 우수한 공격력으로 일찍이 팀에서 큰 기대를 모은 유망주 출신이었던 그는 큰 부상을 당해 재능을 만개하지 못했으나 이후 클롭 체제에서 특급 조커 자원으로 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역사적인 공헌을 남긴 선수가 되었다. 신기에 가까운 기적적인 득점들을 수 없이 뽑아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잊을 수 없는 장면은 역시나 2018-19 시즌 챔피언스 리그, 4강에서 난적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일궈낸 ' 안필드의 기적'. 당시 총합 스코어를 4-3으로 만드는 역대급 역전골을 포함해 총 두 골을 넣었으며, 그 이후 토트넘과 맞붙은 결승전에서는 쐐기골을 뽑아내 팀 통산 여섯 번째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 공신이 되었다.
- 파비뉴 (2018~2023 / 219경기 11골)
21세기 리버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장신의 피지컬과 뛰어난 축구 지능으로 후방의 안정감을 불어넣으며 클롭의 리버풀을 완성시킨 브라질리언 수비형 미드필더. 강도 높은 압박 축구와 높은 수비라인을 구사하는 클롭 축구의 특성상 수비형 미드필더 포지션이 매우 중요한데, 2018년 팀 합류 이후 이 어려운 역할을 완벽히 수행하며 리버풀 중원의 바리케이드로 자리매김했다. 파비뉴가 팀에 안정감을 불어넣은 이후, 투박하기만 했던 리버풀의 중원이 정리되며 본격적인 클롭풀의 최고점 전성기가 시작되었다는 평가가 많으며, 수비력과 더불어 가끔씩 꽂아넣는 레이저 중거리포도 팬들에게 큰 임팩트를 남겼다. 특히 2021-22 시즌에는 절정의 폼을 보이며 팀을 도메스틱컵 더블과 리그 준우승, 챔피언스 리그 결승으로 이끌었으며, 해당 시즌 챔피언스 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
- 조엘 마팁 (2016~2024 / 201경기 11골)
드리블링 센터백
공을 직접 몰고 전진하여 과감하게 상대 진영을 공략하는 특유의 부드러운 플레이로 수비진에 특별함을 더하며 팀의 고공행진과 트로피 획득에 기여한 카메룬산 센터백. 우수한 제공권과 긴 다리에서 나오는 안정적인 수비력에 더하여 부드럽게 공을 다루는 훌륭한 볼플레잉 능력으로 결점이 적은 만능형의 중앙 수비수로 여겨졌으며, 위르겐 클롭 감독 체제 하에서 버질 반 다이크의 파트너로 협력한 센터백들 중 기복없이 가장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며 리그 톱 클래스 수준의 기량을 인정받았다. 물론 부상빈도가 심각하게 높아 팀에 있던 기간에 비해 많은 경기에 뛰지 못했기 때문에 다소간 아쉬움을 남겼지만, FA로 영입되어 다년간 리버풀의 수비진에 안정감을 더해준 클롭 체제 최고의 영입생 중 하나이며, 명실상부 구단 제 2의 전성기를 이끈 핵심 센터백 중 하나.
3.3. 보드진 및 스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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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하울딩 (1892~1902 / 구단 창립자, 회장)
리버풀 FC의 창립자이자 초대 회장. 자수성가한 지역의 사업가이자 정치인이었으며, 후에 리버풀 시장직도 역임한 인물로 유명한 하울딩은 원래 에버튼의 최초 창립자들 중 하나로 에버튼의 회장직을 맡고 있었으나 후에 구단과의 갈등에 의해 안필드에 남게 되었고, 이후 리버풀을 창립하게 된 결정적인 팀의 시초격 인물이다. 구단을 창립한 이후 윌리엄 바클레이, 존 맥케나와 함께 팀을 안정적인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힘썼으며, 팀의 회장으로서 다양한 인물들을 구단에 데려와 초창기 리버풀의 기틀을 잡았다. 이후 구단 창립 8년만에 잉글랜드 리그 정상에 오른 리버풀을 지켜봤으며 1년 뒤 지병으로 타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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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패터슨 (1908~1939 / 수석 코치, 구단 비서, 감독)
30년 넘게 다양한 업무를 담당하며 구단을 위해 헌신한 인물. 감독으로도 재임했으나, 감독시절에는 눈에 띄는 성과를 보이지 못했고, 코치와 구단 비서로 팀에 활약한 오랜 기간에 의해 리버풀을 건설한 위대한 인물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특히 톰 왓슨 감독의 수석 코치로 팀을 지도하며 2회의 리그 우승을 견인하였고, 이후 데이비드 애시워스, 맷 맥퀸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감독들을 보좌하며 구단의 보드진에서 총무 역할을 수행했는데 이 기간 동안에도 2회의 리그 우승이 추가되었다. 후에 감독으로서는 다양한 유망주들을 데려와 1947년 리그 우승의 자양분을 쌓은 것으로도 팀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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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H. 맥코넬 (1927~1947 / 이사, 회장)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첫 시즌이었던 1946-47 시즌의 힘겨웠던 성공을 이끌어낸 리버풀의 브레인. 부둣가에서 카페들을 운영하며 '빌리 맥'으로 불렸던 그는 세기의 전환점에서 리버풀에 인생을 걸었던 평생의 리버풀 맨으로, 1929년에 보드진에 합류한 이후 전국적으로 사업적인 명망을 떨치며 리버풀의 성장에 기여했다. 그는 1944년부터 회장직을 맡아 구단을 혁신적인 방향으로 이끌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당대로서는 파격적이었던 북미 투어. 당시 영국은 식량 보급에 매우 결핍을 겪고 있어 구단 선수들까지 식량을 보급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이에 맥코넬이 미국에서 시즌을 준비하도록 했던 것이었다. 혼란한 환경을 뒤로하고 미국에서 치열한 전후 첫 타이틀 경쟁을 준비한 리버풀의 선수단은 해당 시즌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맥코넬의 선택을 증명해냈다. 또한 그는 당시 외부 선수 영입에도 상당히 적극적인 행보를 보여 알버트 스터빈스를 팀에 영입해온 장본인이기도 했다. 맥코넬은 리버풀에서 이보다 더 안정적인 관리자는 없다는 평을 들으며 인상적인 행보를 보였으나 1947년 갑작스럽게 지병으로 타계하여 많은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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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라일리 (1928~1982 / 구장 관리인)
반세기 넘는 기간 동안 안필드를 지킨 리버풀의 숨겨진 전설. 아버지의 뒤를 따라 구장 관리인의 길을 걷게 된 라일리는 1928년 학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안필드의 스태프진에 합류하여 구단에 재직하는 54년 동안 안필드의 구장 관리를 맡았다. 그는 수년에 걸쳐 구장에 많은 변화를 가져가 안필드를 유럽 최고의 무대로 만들어냈는데, 특히 투광조명등의 설치나 그라운드 하층부 흙에 보온시스템을 설치하는 등 당시로서는 상당히 선진적인 인프라 도입에 앞장섰다. 이러한 명성에 힙입어 한때는 웸블리의 구장 관계자들이 그에게 자문을 구하기 위해 찾아올 정도였을 정도. 안필드가 잉글랜드에서 가장 뛰어난 구장이라는 자부심을 지키고 살았던 그는 1982년 은퇴를 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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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V. 윌리엄스 (1948~1976 / 디렉터, 회장)
리버풀을 축구계에서 가장 압도적인 팀들 중 하나로 성장시킨 경영가이자 리버풀 축구의 선지자. 일찍이 리버풀의 주주로 자리잡아 1948년 팀의 이사진에 합류했고, 이후 디렉터로서 전후 침체기에 빠진 리버풀을 지원해 다잡은 인물이다. 그는 1950년대 초반 웨스트 더비의 지역을 매입하여 멜우드 훈련장의 기초를 닦았으며, 회장으로 선출된 이후에는 밥 페이즐리, 루벤 베넷, 조 페이건 등의 인물들을 구단의 코치로 영입하는 전설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들은 후에 모두가 붉은 제국을 이끄는 위대한 주역들이 되었는데, 이 뿐 아니라 그의 최고의 업적은 1959년 빌 샹클리를 팀의 감독으로 선임해왔던 것. 그는 샹클리와 절륜한 파트너십을 이루며 사실상 리버풀이라는 구단을 설계한 인물로 알려졌으며, 현재까지도 팀의 역사를 바꾼 선지자와 같은 레전드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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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니 모란 (1949~1992 / 선수, 리저브 코치, 코치, 임시 감독)
반백년을 리버풀에서 헌신하며 선수, 주장, 코치, 감독을 두루 경험한 진정한 리버풀 맨. 선수로서도 훌륭한 족적을 남겼으나, 부트 룸의 코치로서 가장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 선수 은퇴 이후 리저브 팀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했으며, 1군 코치로 빠르게 승격하한 뒤 부트 룸에 합류해 구단의 최전성기를 지도한 대표적인 인물로, 규율에 엄격하기로 유명하여 훈련장에서 강인한 훈련을 지휘한 것으로 명성을 날렸다. 팀이 위기에 빠졌을 때는 임시 감독직을 맡아 팀의 중심을 잡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기도 했기에 구단 내부에서 상당한 지지와 신뢰도를 받았으며, 구단의 모든 이들에게 깊은 존경심을 얻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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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 트웬티맨 (1953~1960, 1967~1986 / 선수, 수석 스카우터)
리버풀의 황금기를 만들어낸 리버풀의 눈. 빌 샹클리, 밥 페이즐리, 조 페이건에 이르기까지 붉은 제국의 수석 스카우터로 활약했으며, 팀이 항상 최고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도록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선수들에 대한 데이터를 방대하게 쌓은 인물로 유명하다. 스카우터 역할을 맡기 전에는 리버풀에서 선수로 활약했는데, 성실한 하프백으로 경기 안팎에서 많은 이들의 신뢰를 받는 선수로 알려졌다. 샹클리는 트웬티맨에 대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그를 코치진에 데려왔으며 이후 영국과 아일랜드 전역을 뛰어다니며 리버풀의 미래를 책임졌다. 케빈 키건, 필 닐, 이안 러쉬가 트웬티맨의 대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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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 베넷 (1958~1980 / 코치)
리버풀의 아이언맨이라고 불린 부트 룸의 핵심 인물이자 붉은 제국의 전설적인 코치. 초기 부트 룸 코치들 중 가장 긴 기간인 22년 동안 리버풀의 코치로 헌신했으며, 빌 샹클리 사단의 중추로서 리버풀을 유럽 최고의 위치까지 끌어올리는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베넷은 일찍이 스코틀랜드에서 유능한 코치로 알려져 샹클리 부임 1년 전부터 리버풀에 영입되어 있었으며, 샹클리가 팀에 부임한 이후로는 스태프들 중 샹클리와 가장 가까운 인물로서 수많은 업무를 수행했다. 특히 팀의 피지컬 및 피트니스 총괄 코치로 활약상이 대단했으며, 때로는 스카우트진을 도와 다양한 선수를 선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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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소이어 (1961~1979 / 디렉터)
붉은 제국을 뒤에서 지원했던 구단 역사상 최고의 디렉터. 빌 샹클리가 주도한 1960년대 리버풀의 혁명을 뒤에서 관리한 장본인이다. 그는 비즈니스에 있어서 스마트한 두뇌를 지닌 회계사로 일찍이 알려졌고, 리버풀의 이사진에 취임해 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구단의 단장 및 디렉터 역할을 맡았다. 샹클리의 리버풀은 소이어가 구단에서 일하기 이전까지 이적 시장에서 자금의 부족으로 원하는 선수들을 계속해서 놓쳐가고 있던 상태였는데, 소이어가 구단에 부임한 이후로는 이사진으로부터 적극적으로 투자를 끌어올 수 있었고, 1961년 이안 세인트 존의 영입과도 같은 대형 이적들을 성사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소이어의 주도 아래 론 예이츠 등의 이적들이 안필드로 이어졌고 팀은 필드 안팎에서 크게 번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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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로빈슨 (1965~2000/ 구단 비서, CEO)
35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리버풀을 위해 묵묵히 헌신한 존경받는 경영인. 1965년 브라이튼으로부터 자리를 옮겨온 그는 리버풀이 성공가도를 달리는 기간 동안 팀이 경기 외적인 부분에서도 순항할 수 있게 노력을 쏟은 구단의 비서였으며, 1992년 이후로는 최고 경영자로서 구단을 이끄는 핵심 경영인이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유럽무대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업무량을 굳건히 소화해낸 구단 최고의 운영 전문가였으며, 감독이 원하는대로 팀의 방향을 조율하며 외부로 새나가는 잡음없이 신속한 대응으로 유명한 팀의 파수꾼으로 알려졌다. 이에 그는 리버풀이 자부한 '리버풀 웨이'라는 가치의 실질적인 권위자로 평가받으며, 이적 협상, 팀의 이동 계획 등 모든 팀의 행위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빌 샹클리가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었던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하나로도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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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손더스 (1970~1986, 1993~2001 / 유소년 개발 담당관, 스카우터, 디렉터)
리버풀의 첩보원이라고 불리며 1970~80년대 붉은 제국을 이끌어간 부트 룸의 초창기 멤버 중 하나. 축구 비즈니스에서 가장 뛰어난 두뇌로 이름을 알린 그는 1970년대 들어 리버풀의 유소년 팀과 스카우트진에서 일하기 시작하여 미래의 안필드 스타들을 배출하는데에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더불어 스카우팅 실력이 상당하여 그의 의견은 항상 구단에 높은 신뢰도를 자랑했으며, 당대 주요 이적건에 대해 늘 거대한 영향력을 남긴 인물이다. 특히 유럽 전역으로 스파이처럼 출장을 다녀 상당한 정보력을 가진 것으로 유명했다. 1993년에는 팀의 보드진으로 돌아와 약 8년간 디렉터 업무를 총괄했으며, 빌 샹클리에서부터 제라르 울리에에 이르기까지 역대 리버풀 감독들에게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조언을 아끼지 않은 인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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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배니슨 (1970~1993 / 리저브 코치)
리버풀이 보낸 영광의 시대를 지탱한 리저브 팀의 터줏대감이자 부트 룸 코치진의 초창기 멤버들 중 하나이다. 다른 부트 룸 코치들만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당시 팀의 중요한 톱니바퀴로 평가받는 인물이며 1970년 리저브 코치로 부임한 이래 20년 넘게 유소년 육성 현장을 이끈 인사다. 그는 리저브 팀의 지속적인 발전에 필수적인 역할을 했으며, 유소년 현장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고 인맥이 뛰어나 당시 로컬 최고의 인재를 발굴하는 역할을 총괄한 책임자였다. 그에 의해 많은 레전드 선수들이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후 '베노'라 불린 그는 1990년대 은퇴할 때까지 큰 존경을 받았고 리저브 팀에 끝까지 남아 경력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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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 에반스 (1970~1998 / 선수, 리저브 감독, 코치, 수석 코치, 감독)
28년간 리버풀에서 가질 수 있는 모든 직함을 연달아 달아오며 리버풀 역사의 산 증인으로 거듭난 레전드 코칭 스태프. 후에 리버풀 감독직까지 역임하였으나 전성기 붉은 제국을 이끈 부트 룸 코치로서의 명망으로 리버풀에선 레전드 반열에 올랐다. 그는 부트 룸의 가장 대표 인사 중 하나로 긴 기간 팀을 위해 일했고, 리저브 팀에서 다양한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여 내실을 다지며 리저브 팀을 이끌고 9시즌 동안 7번의 센트럴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대단한 지도력을 보이기도 했다. 후에는 1군 코치로 승격하여 80년대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감독으로서도 1995년 리그컵 우승에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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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미스 (1971~1990 / 이사, 회장)
역대 최장 기간 팀을 경영했으며 팀의 황금기를 지원했던 명망 높은 회장으로, 구단 역사상 최다 우승 회장이다.[51] 붉은 제국을 이끄는 감독들의 뒤에서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팀이 항상 높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운 리버풀의 오랜 서포터였던 그는 1971년 이사진에 합류하였고 2년 뒤 바로 회장으로 선임되어 구단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적합한 존재로 자리잡았다. 그는 안정감과 꾸준함을 우선적인 철학으로 여겨 주기적으로 회장을 바꾸던 이사진의 정책도 재정립했고, 감독들의 계보도 내부적인 승격에 초점을 맞춰 달글리시까지 이어지는 부트 룸 '리버풀 웨이'의 탄생을 이끌었다. 스미스는 늘 혁신적인 방향으로 팀의 성공적인 수완을 최대화 해나가는데 관심이 많았고, 1979년 히타치와 축구 구단 최초로 메인 셔츠 스폰서 계약을 이끌어낸 인물이기도 했다. 이후 헤이젤 참사와 힐스보로 참사를 수습하기 위해 발빠르게 뛰며 일하는 근면성실한 모습까지 보여줘 구단과 팬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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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세프턴 (1971~ / 구장 아나운서[52])
50년 넘게 리버풀의 홈 구장을 지키고 있는 '안필드의 목소리(the voice of anfield)'. 1971년 당시 피터 로빈슨 구단 비서에게 편지를 써보내 안필드의 장내 아나운서직에 지원한 이후, 지금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은 숨은 구단의 레전드이다. 세프턴은 1971년 8월 14일 노팅엄 포레스트와의 경기[53]에서 처음 안필드의 마이크를 잡았고 현재 영국 내 두 번째로 오래 근무한 구장 아나운서로 남아있다.[54] 케니 달글리시는 세프턴에 관해 "그는 구단 역사와 전통의 일부이며, 내가 떠난 것보다 그가 떠나는 것이 더 영향력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세프턴은 오랜기간 구단과 지역 사회에 대한 자선 행위와 공헌을 보여준 것으로도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1]
2017년에 창단 125주년을 기념하여 구단에서 제작한
리버풀 FC 드림씬 아트워크. 클럽을 형성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19명의 레전드들과 클럽의 미래를 상징하는 1명의 특별한 팬이 드레싱룸에 모여 있는데,
부트 룸이 있는 좌측부터 차례로
밥 페이즐리,
위르겐 클롭,
존 하울딩,
빌 샹클리,
톰 왓슨,
알렉스 레이스백,
스티븐 제라드,
존 반스,
케니 달글리시,
빌리 리델,
이안 캘러한,
조던 헨더슨,
엘리샤 스콧,
엠린 휴즈,
로저 헌트,
제이미 캐러거,
조셉 서스턴,
이안 러쉬,
고든 호지슨,
레이 클레멘스가 위치해 있다.
[2]
우승 경력 : 풋볼 리그 1부(1963/64, 1965/66, 1972/73), 풋볼 리그 2부(1961/62), FA 컵(1965, 1974), FA 채리티 실드(1964, 1965, 1966), UEFA 컵(1973)
[3]
우승 경력 : 풋볼 리그 1부(1975/76, 1976/77, 1978/79, 1979/80, 1981/82, 1982/83), 풋볼 리그 컵(1981, 1982, 1983), FA 채리티 실드(1974, 1976, 1977, 1979, 1980, 1982), 유러피언 컵(1977, 1978, 1981), UEFA 컵(1976), UEFA 슈퍼컵(1977)
[4]
우승 경력 : 풋볼 리그 1부(1983/84), 풋볼 리그 컵(1984), 유러피언 컵(1984)
[5]
우승 경력 : 풋볼 리그 1부(1946/47)
[6]
우승 경력 : 풋볼 리그 1부(1963/64, 1965/66, 1972/73, 1975/76, 1976/77), 풋볼 리그 2부(1961/62), FA 컵(1965, 1974), FA 채리티 실드(1966, 1974, 1976, 1977), 유러피언 컵(1977, 1978), UEFA 컵(1973, 1976), UEFA 슈퍼컵(1977)
[7]
우승 경력 : 풋볼 리그 1부(1975/76, 1976/77, 1978/79, 1979/80, 1981/82, 1982/83, 1983/84, 1985/86), 풋볼 리그 컵(1981, 1982, 1983, 1984), FA 채리티 실드(1976, 1977, 1979, 1980, 1982), 유러피언 컵(1977, 1978, 1981, 1984), UEFA 컵(1976), UEFA 슈퍼컵(1977)
[8]
우승 경력 : 풋볼 리그 1부(1978/79, 1979/80, 1981/82, 1982/83, 1983/84, 1985/86, 1987/88, 1989/90), FA 컵(1986, 1989), 풋볼 리그 컵(1981, 1982, 1983, 1984, 2012), FA 채리티 실드(1977, 1979, 1980, 1982, 1986, 1988, 1989, 1990), 유러피언 컵(1978, 1981, 1984), UEFA 슈퍼컵(1977)
[9]
우승 경력 : 풋볼 리그 1부(1981/82, 1982/83, 1983/84, 1985/86, 1989/90), FA 컵(1986, 1989, 1992), 풋볼 리그 컵(1981, 1982, 1983, 1984, 1995), FA 채리티 실드(1982, 1986, 1990), 유러피언 컵(1981, 1984)
[10]
우승 경력 : 풋볼 리그 1부(1987/88, 1989/90), FA 컵(1989, 1992), 풋볼 리그 컵(1995), FA 채리티 실드(1988, 1989, 1990)
[11]
우승 경력 : FA 컵(2001, 2006), EFL 컵(2001, 2003, 2012), FA 커뮤니티 실드(2006), UEFA 챔피언스 리그(2005), UEFA 컵(2001), UEFA 슈퍼컵(2001)
[12]
각 년대별로 2명의 선수만을 선발한다.
[13]
하지만 현재 구단 홈페이지에는 명예의 전당과 히어로즈 두 부문이 모두 내려가 있어 공식적으로 레전드 목록을 공개하고 있지는 않다.
[14]
주기적으로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긴 인물들을 조명하는 순위들을 발표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리버풀을 만든 50인(50 Men Who Made LFC)'과 '콥들을 놀라게한 100명의 선수들(100 Players Who Shook The Kop)' 등의 리스트가 있다.
[15]
구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감독들을 묘사한 것으로, 리버풀 서포터들이 즐겨 사용하는 대표적인 응원 플래그다. 좌측부터
빌 샹클리,
밥 페이즐리,
조 페이건,
케니 달글리시,
라파 베니테즈,
위르겐 클롭. 리버풀 소속으로 리그와 유럽 대항전을 모두 재패한 인물들이다.
[16]
당시 리버풀엔 상당히 많은 스코틀랜드 출신 선수들이 있었고 특히나 감독 맥케나를 비롯해 'Mc'으로 시작하는 성씨를 가진 선수들이 많아 'Team of Macs'로 불리기도 했다.
[17]
현재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8]
날렵한 몸동작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 'the Cat', 이후엔 'the King of the Kop'이라고 불렸다.
[19]
심지어 당시 호지슨이 뛰었던 팀은 남아공의 한 아마추어 팀이었으며, 호지슨은 리버풀 입단 이전까지 프로 선수도 아니었고 보일러 제조업자로 일하고 있었다.
[20]
리버풀 역대 득점 3위이자, 경기당 득점 비율로는 득점 순위권 중 1위다.
[21]
1위부터 각각
지미 그리브스,
스티브 블루머,
딕시 딘
[22]
현재에도 3연속 해트트릭 기록은 리버풀에서 발머가 유일하다.
[23]
비숍 오클랜드에서 뛰기는 했으나 아마추어 클럽이었다. 프로 축구 구단으로는 리버풀 원 클럽 맨이다.
[24]
12,500 파운드
[25]
축구 선수로는 유일하게 그려졌다.
[26]
152경기
[27]
이후 우측 풀백 후임인
필 닐도 미친 수준의 내구성으로 유명한데, 전임자도 역대 최고 수준의 철강왕이었던 것. 붉은 제국 당시 리버풀 우풀백의 아득히 높은 기준을 알 수 있다.
[28]
37,500 파운드
[29]
하지만 아쉽게 팀은 준우승에 머물렀다.
[30]
111,000 파운드
[31]
이들은 모두 리버풀뿐만 아니라 조국 스코틀랜드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스코티시 트리오였다.
[32]
통산 FA컵 결승전 5골
[33]
연연방 선수 중 최초이자 리버풀 선수로서 최초의 유러피언 골든부츠. 이후 리버풀에서는
루이스 수아레스가 다시 이 상을 수상했다.
[34]
총 9경기에만 나선 데뷔시즌과 리버풀 커리어 마지막 시즌, 부상을 당한 1991-92 시즌이다. 1991-92 시즌엔 그래도 9골을 득점했다.
[35]
40골 이상 득점한 것이 2시즌, 30골 이상은 6시즌, 20골 이상 득점 시즌은 무려 9시즌이다.
[36]
난입한 관중을 직접 잡아내고, 우승 기념 사진에서 우스꽝스러운 포즈들도 다수 남겼다. 경기 중의 기행이 많은 선수였고, 90년대에는 스티브 맥마나만과 언쟁을 벌이는 헤프닝도 있었다.
[37]
이는 21년뒤 예르지 두덱이
이스탄불의 기적에서 리메이크했다.
[38]
중앙 미드필더와 왼쪽 풀백까지 소화가 가능한 센터백이었다.
[39]
건방진 수다쟁이라는 뜻
[40]
이 기록은 2023년 현재를 기준으로도 역대 3위 기록이다. 호나우두가 124골로 1위, 음바페가 104골로 2위다.
[41]
당시 팀의 페널티킥 키커는 토미 스미스와 고든 밀른이었는데, 이들이 무려 6연속으로 페널티킥을 실축하고 있던 중이라 부담이 상당했다고 한다. 스티븐슨은 이전에 한 차례도 키커로 나선적이 없으나 팀이 결정적인 순간에 페널티킥을 얻자 아무 말도 없이 공을 들고 본인이 킥을 처리했다고.
[42]
아스날에서 137경기 77골을 넣은 상당히 좋은 공격수였다. 리버풀로 이적하자 리버풀의 론 예이츠가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기뻐하기도 했다고.
[43]
주로 로저 헌트와 이안 세인트 존의 백업 공격수였으나 측면 수비수 백업으로 활약도가 가장 높았다.
[44]
1980년에 팀 동료였던 레이 케네디와 웨일스의 한 호텔에서 음주상태로 난투극을 벌였고, 이후 구단이 케이스를 좋게 보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1981년 브라이튼으로 이적했다.
[45]
리버풀 커리어 종료 이후 에버튼으로 다시 이적한 특이 경력을 가지고 있다.
[46]
리그와 FA컵 동시즌 우승
[47]
한준희 해설위원은 이러한 걸출한 커리어를 언급하며 존스턴을 '역사상 최고의 오세아니아 축구선수' 6위에 랭크한 바 있다.
[48]
1985-86 시즌에는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다.
[49]
2014년 8월 스티븐 제라드가 자신의 기록을 넘어설 때까지 리버풀 선수 중 최다 페널티킥 기록 보유자였다.
[50]
당시 유명 그룹
스파이스 걸스에 빗대어 만들어진 별명으로 화려한 그의 외모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외모에 비해 불성실한 생활을 조롱하는 단어로도 사용되기도 했다.
[51]
리그 우승 10회, FA컵 우승 3회, EFL컵 우승 4회,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4회, UEFA 유로파 리그 우승 1회, UEFA 슈퍼컵 우승 1회. 총 23회 우승.
[52]
경기 당일 구장 전광판을 관리하고, 킥오프 2시간 전부터 장내에 재생되는 음악을 관장하며, 골득점자와 교체선수를 관객들에게 직접 알리는 역할을 한다. 특히 안필드의 장내 아나운서는 1963년 10월 이후로 경기 전후에
You'll Never Walk Alone 음원을 장내에 직접 재생시키는 전통이 있다.
[53]
해당 경기는
케빈 키건의 리버풀 데뷔전이기도 했다.
[54]
가장 장기 근속한 구장 아나운서는 1969년부터 근무를 이어오고 있는
브렌트포드 FC의 피터 길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