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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23:13:33

로비 파울러

리버풀 FC 앰버서더
Liverpool Football Club Ambassador
파일:external/i3.liverpoolecho.co.uk/cup.jpg
<colbgcolor=#d00027> 이름 로비 파울러
Robbie Fowler
본명 로버트 버나드 파울러
Robert Bernard Fowler
출생 1975년 4월 9일 ([age(1975-04-09)]세)
잉글랜드 머지사이드 주 리버풀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신체 180cm
직업 축구선수 ( 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d00027> 선수 리버풀 FC (1993~2001)
리즈 유나이티드 FC (2001~2003)
맨체스터 시티 FC (2003~2006)
리버풀 FC (2006~2007)
카디프 시티 FC (2007~2008)
블랙번 로버스 FC (2008)
노스 퀸즐랜드 퓨리 (2009~2010)
퍼스 글로리 FC (2010~2011)
무앙통 유나이티드 FC (2011~2012)
감독 무앙통 유나이티드 FC (2011~2012 / 선수 겸 감독)
리버풀 FC (2013~2018 / 아카데미 코치)
브리즈번 로어 FC (2019~2020)
SC 이스트 벵골 (2020~2021)
알 카디시야 FC (2023)
국가대표 26경기 7골 ( 잉글랜드 / 1996~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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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클럽 경력3. 감독 경력4. 플레이 스타일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
6. 여담

[clearfix]

1. 개요

잉글랜드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2. 클럽 경력

2.1. 리버풀 FC 1기

1984년부터 리버풀의 유소년 팀에서 축구를 배워오다가 1993년 당시에 팀이 골 가뭄에 허덕이던 시절에 그레이엄 수네스 감독의 부름을 받고 1군으로 승격[1], 데뷔 첫 시즌에 열린 1993-94 풋볼 리그 컵(당시 코카콜라 컵)에서 1차전에서 3대1로 득점에 공헌한 뒤 안필드에서의 2차전에서도 5-0으로 승리하는 데 도움을 주는 대활약을 펼쳤다.

이후 점차 성장하면서 수네스의 뒤를 이어 1994년에 부임한 로이 에반스 감독 시절에 파울러는 더 많은 출장 기회를 얻어 아스날전에서의 전광석화같은 해트트릭, 맨유 레전드 에릭 칸토나의 귀환을 무색하게 만들었던 올드 트래포드에서의 2골, 아스톤 빌라전 당시 콥 엔드에서의 터닝슛 등 팬들에게 인상적인 기억을 많이 남겨주었고, 1995년 1996년에 올해의 젊은 선수상을 받고 동시에 잉글랜드 대표팀에도 발탁되는 영광을 누릐기도 했다. 21세가 되기 전 무려 84골을 넣었던 영예로운 시기였는데, 이 기록은 2023년 현재를 기준으로도 역대 3위 기록이다. 호나우두가 124골로 1위, 음바페가 104골로 2위다.

그러나 1997년에 부상을 당해 주춤한 사이 신인 스트라이커 마이클 오언이 급부상하면서 정체기를 겪기도 했으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골을 터뜨려 2000/01 시즌에 리버풀의 미니 트레블 달성(리그컵-FA컵-UEFA컵)에 공헌을 했다.

하지만 제라르 울리에 감독이 2000년 레스터 시티 FC로부터 영입한 골잡이 에밀 헤스키를 오언의 파트너로 중용하는 바람에 자리를 잃고 1,200만 파운드로 리즈 유나이티드 FC에 이적해야만 했다.

2.2. 리즈 유나이티드 FC

리즈가 챔피언스리그 4강에 진출한 후 팀 공격력 강화를 위해 영입한 로비 파울러는 2001-02 시즌에 마크 비두카, 앨런 스미스 등과 출장시간을 조절해가며 출장하는 와중에 22경기에 출장하며 12골로 첫 시즌에 제 몫을 해냈다.

그러나 2002-03 시즌에 엉덩이 부상이 심해지면서 파울러의 능력은 급격한 하락세를 겪게 된다. 부상으로 인해 시즌 절반을 날려먹었고, 복귀한 후의 로비 파울러는 예전보다 둔중해진 몸으로 등장했다. 예전과 같은 날카로운 골 결정력을 보여주고 싶어도 느려진 스피드는 파울러가 골 냄새를 맡고 싶어도 수비수들에게 막혀서 제대로 골문 앞을 장악하지 못해버리는 상황. 결국 두번째 시즌에는 리즈 팬들로부터는 '배나온 스트라이커'라는 비아냥을 들어가며 최악의 폼을 보였다.

결국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그가 보낸 2년 중 절반에 해당하는 2002-03 시즌의 기록은 8경기 2골이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마무리. 그리고 리즈의 재정난으로 인해 파울러와 같은 고액주급을 받는 잉여는 최대한 빨리 처분해야 할 상황이 오고야 말았고, 결국 맨체스터 시티 FC 케빈 키건의 품에 안기게 된다.

2.3. 맨체스터 시티 FC

파일:imadyfge1.png

맨체스터 시티에서 4시즌을 보내며 80경기 20골을 기록한다. 처음 2003-04 시절까지만 해도 그놈의 부상이 계속 파울러를 집요하게 괴롭히면서 리즈에서 보여준 잉여다운 모습을 계속 지속했으나 2004-05 시즌에 부활하며 32경기 11골을 넣었다.

그러나 2005-06 시즌에 또다시 부상이 재발하였고, 몸을 만드는데 실패하면서 다시 2003-04 시절에 리즈 때처럼 '골문 앞 배나온 스트라이커'가 재현되었고 파울러의 폼은 이 시즌 이후로 급격한 하향세를 타게 된다.

4시즌 중 30경기 이상 출장한 시즌은 두 시즌, 그 중에서도 밥값을 한 시즌은 겨우 한 시즌이기에 맨시티 팬들에게 있어서는 그냥 잉여로운 공격수 하나 정도의 평.

하지만 원래는 이런 잉여에게 엄청난 주급을 지급해야 하지만, 실제로 파울러에게 주어진 주급의 상당 비율은 선수를 판 리즈 유나이티드가 대신 지불해줬으니 맨시티로서는 쓸만한 공격수를 저렴하게 잘 써먹었다라고 할 수 있다.

2.4. 리버풀 FC 2기

그가 리즈와 맨시티를 옮겨다니며 활동하는 동안 리버풀의 팬들은 그의 눈이 고향에 머무르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자 2006년 1월 겨울시장 말미에 라파엘 베니테스 감독이 그를 불러서 다시 파울러는 리버풀로 돌아오게 되었다.

당시 리버풀의 센터포워드진은 밀란 바로스 지브릴 시세가 주전이었으나 바로스는 팀을 떠나고 그 대체자는 피터 크라우치였으며 백업으로 완연한 하향세를 보이던 페르난도 모리엔테스가 버티던 상황. 여기서 리그 10골을 기록한 공격수는 없었다. 이 상황에서 팀의 공격수 뎁스를 높이기 위한 방안 겸 팀의 레전드 복귀라는 명분으로서 파울러 영입은 팬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부진한 모리엔테스와 기복이 심한 시세와 치열한 주전 경쟁을 하면서 꽤 괜찮은 활약을 보이며 팬들의 환호성을 받았다. 2006-07 시즌에는 11번에서 다시 9번을 받았다. 2006-07 시즌에는 모리엔테스나 시세 모두 떠나서 뎁스가 얇아진 리버풀에서 백업으로 출장하며 23경기 7골을 기록하였고, 2006-07 시즌이 종료된 후 리버풀에 안녕을 고했다. 그리고 리버풀은 파울러가 떠난 자리를 메울 새로운 공격수로 페르난도 토레스와 안드리 보로닌을 영입하면서 한방에 공격수 질을 확 높였다.

2.5. 황혼기

그 후 카디프 시티와 블랙번 등 여러 팀을 떠돌다가 2012년에 무앙통 유나이티드의 선수 겸 감독을 끝으로 은퇴했다.

3. 감독 경력

무앙통 유나이티드 FC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2019년 4월 23일, 브리즈번 로어 FC의 정식 감독으로 선임되었고 계약 기간은 2년이다.

2023년 6월 29일, 알 카디시야 FC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 이후 약 4개월 만에 경질되었다. #

4. 플레이 스타일

키도 작고 운동선수같이 생기지도 않았으며 다리도 땅딸막했다. 때로는 행동도 굼떴고 오늘날의 공격수들과 비교하면 몸싸움은 아예 없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득점력에 비견되지 못했다.
제이미 레드냅

마이클 오언 이전의 원조 리버풀 '원더보이'이자 리버풀 팬들에게 ‘신’이라 불린 선수로, 리버풀 팬들에겐 클럽 최고의 전설 중 하나인 이언 러시만큼 사랑받는 스트라이커이다. 특히나 데뷔 초반의 파울러는 테디 셰링엄, 이안 라이트, 앨런 시어러등 괴물같은 영국인 공격수가 판치던 90년대 말 공격수 리스트에서도 파울러는 당당히 상위권에 위치한다고 평가받는다.

다재다능한 공격수로서 유명했지만 특히 '득점'에서 빼어난 활약을 보였던 스트라이커. 파울러는 진정한 의미의 '골잡이'로서 다양한 방법으로 정확하고 엄청나게 많은 득점을 기록했다[2]. 득점각이 안보이는 각도나 질이 낮은 패스도 파울러 개인 기량으로 골로 연결되는 경우가 잦았고,[3]주발은 왼발이었지만 정작 통계상으론 박스 안과 밖에서 양발 모두 득점 빈도수가 높은데, 실제로 파울러 본인도 BBC 인터뷰에서 자신이 주발을 구분할 수 없다고 직접 언급할 정도였다. 또한 공중볼의 낙하지점을 잡는 위치선정이 좋아 헤딩골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득점력 외에도 파울러의 유니크한 특기는 다재다능함이었는데, 적절히 빠른 주력과 한순간의 찬스를 놓치지 않는 센스를 보유했으며 준수한 드리블 능력과 퍼스트 터치 또한 보여주었다. 또한 정확한 터치와 뛰어난 테크닉을 가지고 있었으며,팀 동료를 사용한 빌드업에도 능숙했고 연계 플레이에도 일가견이 있어 오늘날의 잉글랜드 후배 해리 케인처럼 창조성있는 패스 배급 역할 또한 훌륭히 수행했다.이외에도 큰경기에 결정적인 골을 자주 넣으며 해결사 기질도 있었으며, 그리고 성격적으론 잘 휘둘리지 않는 대인배 기질도 있었다. 한마디로 팔방미인의 육각형 스트라이커로서 당시에도 리버풀의 포스트 게리 리네커라 불릴 정도로 극찬받았다.

다만 피지컬적으로 완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선수였다. 앞선 제이미 레드냅의 평에도 나오듯이 다리가 굉장히 짧고 신체 비율이 안좋아서 준수한 속력 그 이상을 내지는 못했고, 특히나 커리어 내내 부상으로 신음했다는 점이 결정타였다. 등 부상으로 인해 속력이 아예 죽어버리며 여전했던 면도날같은 득점력을 십분발휘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23살이라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다시는 커리어 하이였던 30골 고지를 밟지 못하게 되었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6. 여담



[1] 이게 리버풀 감독시절 그레이엄 수네스 감독의 정말 몇안되는 업적중 하나다. [2] 무려 국가대표 데뷔를 하기도 전에 135경기 80골이라는 엄청난 득점력을 선보였다. 1995년에는 21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한해 36골을 득점했는데, 이는 훗날 마이클 오언, 페르난도 토레스, 루이스 수아레스조차 넘지 못했다. [3] 특히 1993년 산마리노와의 U-21 A매치 경기에서 트레버 싱클레어의 저질 크로스를 헤딩골로 연결시킨 장면은 파울러의 득점 재능을 잘 보여주는 장면으로 회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