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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스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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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1979년

다마스쿠스 고대 도시
مدينة دمشق القديمة
1980년

보스라 고대 도시
مدينة بصرى القديمة
1980년

팔미라 유적
موقع تدمر
1986년

알레포 고대 도시
مدينة حلب القديمة
2006년

기사의 성채와 살라딘 요새
قلعة الفرسان وقلعة صلاح الدين
2011년

북시리아의 고대 마을
القرى القديمة في شمال سوري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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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스쿠스
아랍어: دِمَشقُ‎
파일:Syria.Damascus.Umayyad.Mosque.jpg
파일:Umayyad_Mosque_Yard.jpg
우마이야 왕조 시절에 지어진 대모스크
파일:Damasc26.jpg
십자군 전쟁기에 살라흐 앗 딘에 의해 지어진 성벽
면적 204.2km2
행정구역
[[시리아|]][[틀:국기|]][[틀:국기|]] 다마스쿠스 주 다마스쿠스
인구 8,765,000명( 시리아 내전 이전)
3,980,000명( 시리아 내전 이후)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다마스쿠스 홈페이지
다마스쿠스 무역관 (KOTRA)
다마스쿠스 (시리아)
아랍어 دِمَشقُ ‎(표준 아랍어: Dimashq / 시리아 아랍어: dɪˈmaʃʔ) / الشام (ash-Sham) ‎
페르시아어 دمشق
히브리어 דַּמֶּשֶׂק
영어 Damascus
러시아어 Дамаск
그리스어 Δαμασκός
힌디어 दमिश्क़
중국어 大马士革
일본어 ダマスカス
스페인어 Damasco
프랑스어 Damas
독일어 Damaskus
튀르키예어, 쿠르드어 Şam
조지아어 დამასკო
타밀어 டமஸ்கஸ்
파일:다마스쿠스 대사원 전경.jpg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국어 다마스쿠스 고대 도시†[1]
영어 Ancient City of Damascus
아랍어 مدينة دمشق القديمة
프랑스어 Ancienne ville de Damas
국가·위치 시리아 다마스쿠스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79년[2]
등재기준 (i)[3], (ii)[4], (iii)[5], (iv)[6], (vi)[7]
지정번호 20
1. 개요2. 역사
2.1. 상고대
2.1.1. 아람 왕국 (이메리슈)
2.2. 고대
2.2.1. 헬레니즘 (시리아 전쟁)2.2.2. 셀레우코스 왕조2.2.3. 새로운 시대2.2.4. 팍스 로마나와 기독교
2.3. 중세
2.3.1. 정통 칼리파 조2.3.2. 우마이야 왕조
2.3.2.1. 대사원 건립
2.3.3. 압바스 왕조2.3.4. 연이은 혼란
2.3.4.1. 툴룬 왕조2.3.4.2. 익시드 왕조2.3.4.3. 삼파전2.3.4.4. 파티마 왕조
2.3.5. 십자군 전쟁기
2.3.5.1. 디마슈크 셀주크2.3.5.2. 부리 왕조
2.3.5.2.1. 십자군의 위협과 동맹2.3.5.2.2. 2차 십자군 누르 앗 딘
2.3.5.3. 장기 왕조2.3.5.4. 아이유브 왕조
2.3.5.4.1. 아이유브 내전2.3.5.4.2. 아이유브 vs 맘루크
2.3.5.5. 대몽골 전쟁
2.3.6. 맘루크 왕조
2.4. 오스만 제국기
2.4.1. 근대화의 물결
2.5. 근현대2.6. 현재
2.6.1. 시리아 내전
3. 볼거리4. 여담5.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시리아 수도이자 주이다.

아랍어 발음은 '디마슈크'이지만 다마스쿠스(라틴어), 다마스커스(영어), 다메섹(개신교 성경)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지리상 대한민국보다 남쪽에 있을 것 같지만 제주시보다 약간 북쪽 위도에 위치해 있다. 고대 시리아어로 디마슈크는 '물이 풍부한 거주지'라는 뜻이라 한다.[8]

바르다라 강을 낀 해발 600m의 평지에 형성되었고, 지속적으로 인간이 거주해온 세계 최고(最古)의 도시이다. 이미 4천년 전부터 레반트 지역의 대도시로,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바빌론 과 페니키아의 시돈, 티레 등 해안도시를 잇는 대상들의 무역로 중간에 놓여 막대한 이익을 얻으며 번성했다.

이슬람 정복 후로는 우마이야 왕조의 수도였고, 중세 내내 레반트 이슬람 세력의 중요 거점이었다. 이후 부리 왕조, 아이유브 왕조, 맘루크 왕조 시기에는 시리아 지역의 중심 도시이자 제2의 수도로서 번영하였다. 아라비안 나이트에 단골로 나오는 도시로, 특히 이곳 출신의 상인은 거의 빼놓지 않고 나오는 조연이다. 한마디로 바빌로니아와 더불어 고대 메소포타미아 세계의 대표적인 도시이다.

인류문명이 시발한 중동지역의 핵심적 도시로 번영해왔기 때문에 수많은 오랜 역사가 깃들여져 있어서 도시 자체가 문화재. 영어에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road to Damascus) 표현이 있는데 사도 바울이 원래 기독교를 탄압하다가 다마스커스 여행 중에 회심하여 기독교를 믿게 된 것을 두고 평소 행실이 나쁜 사람이 어떤 일을 계기로 마음을 고쳐먹고 갑자기 크게 달라지는 순간을 말한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우마이야 모스크가 있다.

2. 역사

파일:다마스쿠스 동문 2.jpg
디마슈크의 역사적인 직선 거리와 1세기에 지어진 밥 샤리키 (동문)

다마스쿠스(디마슈크)를 관통하는 바르다라 강 유역의 구타 오아시스에는 기원전 9,000년부터 인류가 거주하였다. 다만 현재의 디마슈크 구시가지에 주거지가 형성된 것은 기원전 2000년 무렵으로 여겨진다. 서기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다마스쿠스는 트라콘티티스(라자트)[9]와 함께 아람[10]의 아들 우즈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한편 도시의 북쪽 카시윤 산 (1151m) 기슭에는 동굴이 하나 있는데, 여러 전설이 전해진다. 먼저 첫 인간으로 여겨지는 아담이 잠시 거주했다 하고, 아브라함과 예수 등이 그곳에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신통한 기도처로 알려져 일대에 가뭄이 들 때면 도시의 지배자들이 와서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빌기도 하였다. 중동의 기우제 중세 아랍 역사서들에 의하면 인류 최초의 살인인 카빌(카인)이 동생 하빌(아벨)을 죽인 것도 그 장소였다고 하며, 따라서 현재까지 마가라트 앗 담(피의 동굴)로 불린다.

2.1. 상고대

파일:상고대 다마스쿠스.jpg
아람인들의 다마스쿠스 시가지 범위와 로마시대 성벽

도시가 형성되던 기원전 2000년 무렵의 디마슈크는 셈어족인 아모리인 계열의 카트나가 지배하고 있었다. 북쪽의 얌하드, 동쪽의 마리와 함께 시리아를 삼분하던 카트나는 기원전 1700년 무렵 전자와의 경쟁에서 패하여 쇠퇴하였다. 이후 미탄니 제국과 이집트가 시리아를 양분하며 카트나는 차례대로 그 속국이 되었고, 그동안 시리아에는 여러 도시 국가들이 출현하였다. 그중 디마슈크는 기원전 1450년경 이집트의 파라오 투트모세 3세의 테베 카르나크 신전 기록에 '타므스쿠'로 기록되었는데, 도시의 문서상 첫 등장이었다. 100년 후 작성된 아마르나 서신에선 '디마스쿠'로 기록되었고, 비르야와자라는 가나안인 국왕명도 등장한다. 그 후 이집트와 히타이트 제국이 시리아를 두고 경쟁하였고, 카데시 전투 이후 히타이트 국왕 무와탈리의 동생 핫투실리가 디마슈크의 총독이 되었다. 다만 기원전 1259년 평화 협정에 따라 디마슈크 일대는 이집트의 영토가 되었다. 하지만 이집트의 통치는 오래 가지 못하였다.

50년 만에 바다 민족의 침공을 겪으며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전환되는 대혼란기가 도래한 것이다. 다만 전쟁은 주로 시리아 북부와 해안에서 벌어졌고, 그동안 디마슈크는 상대적 안정을 누리며 새로운 거점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 증거로 성경 창세기 14장에 '다메섹'으로 등장하고,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향하기 전 도시를 다스렸다고 기록하였다. 기원전 11세기 무렵 시리아 일대에는 셈계 아람인들이 이주해 왔는데, 그들은 기존의 유목 생활을 접고 도시에 정착하였다. 아람어로 '디마슈쿠'로 발음된 디마슈크 역시 그중 하나였다. 도시를 무혈 접수한 아람인들은, 여태껏 별로 개발되지 않은 구타 오아시스의 농업적 가치를 알아보고 바르다르 강을 활용한 수로 건설을 통해 일대를 비옥하게 만들었다. 이때 형성된 배수 체계는 로마와 우마이야 칼리파조의 보완을 거쳐 현재까지 디마슈크 구 시가지의 용수적 기반을 이루고 있다.

2.1.1. 아람 왕국 (이메리슈)

파일:다마스쿠스 스핑크스.jpg 파일:858px-Kingdoms_around_Israel_830_map.svg.png
우마이야 대사원 북쪽 벽에 박혀 있던 옛 하다드 신전 장식 [11] 기원전 830년경 아람-다마스쿠스 왕국과 이스라엘
기원전 1000년 무렵 아람인들은 레바논의 베카 협곡을 중심으로 아람-조바라는 연맹체를 건설했고, 디마슈크는 그 남쪽 거점 중 하나였다. 그러던 기원전 965년, 아람-조바 연맹의 왕위 쟁탈전에서 패배한 에즈론(레존)이 베카 협곡에서 남하해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였다. 그는 현지 부족장을 폐하고 독립 국가인 아람-다마스쿠스를 세웠는데, 아시리아어로 이메리슈라 했다. 기존에 다윗 왕과 싸웠던 아람-조바 연맹처럼, 이메리슈 역시 통일 이스라엘 왕국과 싸우며 솔로몬 왕의 북진을 저지하였다. 이후 헤이존, 탐브림몬을 거쳐 기원전 885년에 즉위한 벤 하다드( 벤하닷) 1세는 분열된 통일 이스라엘의 남쪽 유다 왕국과 연합해 북이스라엘을 공격하였다. 이때 텔 단 등 골란 고원과 하우란 일대를 점령, 페니키아와의 무역로를 확보하며 레반트의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다만 그후 오므리 왕가 출신 이스라엘 왕 아합이 실지를 수복했다고도 하는데, 지금까지의 왕사는 모두 구약에 의존하고 있다.

한편 아람인들은 다른 오리엔트 지역과 마찬가지로 폭풍의 신 하다드를 섬겼고, 디마슈크는 점차 하다드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구약 외에 처음으로 기록된 이메리슈의 군주 벤 하다드 2세 하다드제르 역시 '하다드가 돕는 자'라는 뜻이었다. 그는 점차 강력해지는 신 아시리아 제국의 남하에 맞서 하마의 아람인 군주 일훌레니와 함께 북이스라엘, 키다르 왕국 등이 참가한 12왕들의 동맹군을 이끌고 카르카르 전투에서 아시리아군과 격돌하였다. (기원전 853년) 카데시 전투 이후 중동 역사상 가장 큰 충돌이었던 카르카르 대전은 무승부로 기록되었고, 아시리아 제국의 남부 시리아 정복은 100년 가량 지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리아의 국왕 샬마네세르 3세는 6차례나 더 시리아에 개입하였고, 벤 하다드 2세 하다르제르는 두차례나 하마와 연합해 그에게 맞섰다. 그외에도 벤 하다드 2세 하다르제르는 기존의 동맹이었던 북이스라엘을 침공해 국왕 아합을 길르앗 라못 전투에서 전사시켰다. 성공적인 통치를 이어가던 벤 하다드 2세 하다르제르는 와병 중에 아랍계 관료였던 하자엘(성경에선 하사엘)에게 살해되었다.

그대로 왕이 된[12] 하자엘은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전쟁에 나섰다. 하다르제르의 죽음과 함께 12왕 연맹이 붕괴된 상황에서 하자엘은 북쪽의 강국 신아시리아 제국 대신 그들이 조용한 틈에 남쪽의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노렸다. 이에 이스라엘 국왕 여호람과 유다 국왕 아하시야가 연합해 길르앗 라못으로 진군해 왔으나 패배하고 여호람은 부상당하였다. 텔 단 석비는 이 승리를 기념해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직후 이스라엘에서 예후의 찬탈과 여호람, 아하시야 살해, 유다에서 아달리야의 찬탈로 이스라엘과 유다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하자엘은 요단 강 동안의 이스라엘/유다 영토를 모두 석권하고, 남유다를 침공해 예루살렘 서쪽의 가스 (텔 앗 사피)를 점령, 예루살렘까지 약탈하였다. 다만 열왕기하에는 요아스가 성전의 금을 바쳐 돌려보냈다고 하는데, 원정 중단의 가장 큰 원인은 아시리아의 개입이었다. 아시리아 군대가 다른 영토를 약탈하는 동안 하자엘은 디마슈크로 돌아가 농성하였다. 디마슈크 함락에 실패한 아시리아군은 베카 협곡과 하우란 일대를 복속시키는데 만족하고 귀환하였다.[13]

기원전 796년, 하자엘이 사망하고 아들 벤 하다드 3세가 계승하였다. 그리고 그 직후 아시리아의 아다드 니라리 3세가 곧장 남하해 재차 디마슈크를 포위하였다.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벤 하다드 3세는 아시리아에 복속하고 조공을 약속해야 했다.[14] 이후 이메리슈의 쇠락을 틈타 이스라엘 국왕 요아스가 반격에 나서 하자엘의 점령지를 탈환하였다. 벤 하다드 3세는 역습에 나서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두 차례에 걸쳐 포위했지만 오히려 사로잡혔고, 이스라엘에게 디마슈크에서의 무역 특권을 양도한 후에야 석방되었다. 연이은 타격을 입은 벤 하다드 3세는 같은 아람계 왕국인 할랍의 비트 아구시와 연합해 하마-루후티의 군주 자쿠르를 텔 아파르에서 포위하였다(기원전 785년). 하지만 포위는 실패하였고, 자쿠르는 전승비를 건립하였다. 쇠퇴를 이어가던 이메리슈는 아시리아 제국에 내전이 터지면서 멸망을 모면하였고, 더 나아가 주변의 16개 소국들을 편입하며 중흥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아시리아 제국의 내분은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에 의해 봉합되었고, 그는 시리아 북부를 평정하면서 디마슈크를 다음 목표로 삼았다. 기원전 754년에 즉위한 국왕 레진(라신, 르신)은 위기를 직감하고, 하다르제르처럼 티레, 북이스라엘 등 각지의 왕들에게 연합을 제안하여 성사시켰다. 그러나 유다 왕국의 아하스는 거부하였고, 레진(르신)은 이스라엘 왕 베가와 함께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이에 아하스는 아시리아에 도움을 청하였고, 명분을 얻은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는 기원전 733년 대군과 함께 남하하였다. 그는 디마슈크로 돌아온 레진(르신)을 고립시키기 위해 페니키아 해안을 선점하고, 이스라엘과의 연락을 차단하였다. 이후 봉쇄 속에서 처절한 공성전이 벌어졌고, 이듬해에 디마슈크가 함락되면서 이메리슈 왕국은 멸망하였다(기원전 732년). 강력한 저항의 대가로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는 친히 레진(르신)을 참살한 후 그 참모들도 꿰어 죽이는 잔혹함을 보였고 주민 대부분을 니네베로 잡아갔다. (아람인 디아스포라)[15]

2.2. 고대

파일:다마스쿠스 유피테르 신전.jpg
하미디예 시장의 로마 시대 유피테르 신전 유적

전쟁이 끝난 후 아시리아의 개입을 촉발한 유다의 왕 아하스는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를 알현하기 위해 디마슈크에 당도하였다. 구약 열왕기하 16장에 의하면 복속을 표한 후 하다드 신전을 들른 아하스는 그 제단의 장엄함에 감탄하여 예루살렘에 그를 모방한 제단을 세우게 하였다. 당시 디마슈크가 얼마나 대단한 도시였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 한편 100년간 이어진 아시리아 제국의 치하에서 디마슈크는 비록 정치적 중요성은 상실했을 지언정 레반트에서의 경제, 문화적 중요성을 유지하였다. 동시에 아람인들의 저항 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는데, 기원전 727년 반란이 일어났으나 아시리아군에게 진압되었다. 이후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가 시리아 일대의 반란 세력에 대한 전면적인 평정에 나서며 디마슈크는 아시리아에 완전히 종속되었다. 이어지는 안정기에서 디마슈크는 유향 등 아라비아산 향신료 무역의 거점으로써 번영하였다. 당시 지명은 '샤 이메리수'였고, 총독에 의해 통치되었다.

기원전 609년 칼데아, 메디아의 협공으로 신아시리아 제국이 멸망하자 약 500년만에 이집트가 파라오 네코 2세의 아시리아 구원 시도를 계기로 재차 시리아 남부를 점령하였다. 다만 기원전 572년까지 시리아 전부는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게 정복되었다. 다만 칼데아 지배기의 디마슈크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고, 반세기도 안되어 키루스 2세 아케메네스 제국령 에베르 나리(아라미아)에 소속되어 그 주도가 되었다. 약 200여 년간 페르시아 통치를 받으며 디마슈크는 다시 안정기를 보냈다. 아케메네스 조 특유의 관대한 통치에 따라 디마슈크의 총독은 남쪽 암몬( 암만)의 태수를 임명하는 등 상당한 자치권을 누렸다. 그리고 디마슈크의 중심이던 하다드 신전에서 티레 등지에서 나타나는 페르시아 양식의 건축[16]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때 증축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전에 이란 신화의 여신 아나히타의 신상이 바쳐진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기원전 333년, 이수스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을 격파한 알렉산드로스 3세는 패주한 다리우스 3세를 추격하는 대신 이집트 정복을 목표로 지중해를 따라 남하하였다. 내륙 도시들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던 알렉산드로스는 사트라프의 주도인 디마슈크에는 부관 파르메니온을 파견하였다. 당시 시리아의 핵심 도시이던 디마슈크는 이수스 전투를 앞두고 페르시아 측의 후방 도시로써 막대한 보급품이 있었는데, 다리우스 3세의 보물 및 후궁들도 함께였다. 후자의 존재를 고려해 볼 때에 당시 디마슈크가 성벽이 둘러진 큰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파르메니온은 포위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과 겨울의 눈보라를 뚫고 기원전 332년 초엽 도시 북쪽의 칼라문에 당도하였다. 유혈사태를 원치 않았던 페르시아 측 총독은 그에게 항복 사절을 보내며 다리우스 3세의 보물을 넘겨줄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페르시아 주둔군을 보물과 후궁들을 호위하게 한 후 내보냈고, 마케도니아 군은 이들을 기습해 격파하였다.[17]

2.2.1. 헬레니즘 (시리아 전쟁)

막대한 전리품을 얻은 파르메니온은 아므리트에서 휴식을 취하던 알렉산드로스와 합류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멤논을 디마슈크 총독으로 봉하고 그리스식 화폐 주조를 명하며 헬라화를 시작하였다. 그후 남하를 이어가며 이집트 원정을 완수한 알렉산드로스는 메소포타미아 방면으로 북상하며 해안로 대신 디마슈크를 통한 내륙로를 이용하였다. 이때 시리아 사트라프의 지배자로 아스클레피오도로스가 임명되었다. (기원전 331년) 그리고 10년 후 대왕은 시신이 되어 운구 행렬과 디마슈크로 돌아왔고, 거기서부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가 시신을 알렉산드리아로 운송하였다. 그 후 디마슈크를 포함한 시리아 남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령이 되었는데, 잠시 안티고노스에게 빼앗겼지만 그가 셀레우코스 왕조에게 격파당하자 회복되었다. 한편 북부 시리아를 장악한 셀레우코스 조는 남부를 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조와 한세기간 지속된 시리아 전쟁을 벌였다.

1차 시리아 전쟁은 주로 해안가에서 벌어졌다. 승리를 거둔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디마슈크를 왕비의 이름을 따 '아르시노이'로 개칭하였다. 기원전 260년에 벌어진 2차 전쟁에선 셀레우코스 조가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와 연합해 우세하였다. 따라서 253년의 휴전 조약에서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딸 베레니케를 셀레우코스 군주 안티오코스 2세에게 결혼시키며 그 지참금으로 디마슈크를 포함한 코엘레 시리아를 할양하였다. 다만 불과 7년 후인 기원전 246년에 벌어진 3차 전쟁에서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대승을 거두었고, 5년 후 체결된 강화에서 시리아 해안 전부와 코엘레 시리아(시리아 협곡)를 되찾았다. 기원전 219년, 셀레우코스 조의 야심찬 군주 안티오코스 3세는 4차 전쟁을 일으켜 시리아 해안을 수복하고 더 나아가 가나안까지 점령했다. 다만 2년 후 라피아 전투에서 이집트 군의 분전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조는 디마슈크 일대까진 되찾을 수 있었다.

다만 전쟁의 대가에도 프톨레마이오스 조는 시리아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집트 본토는 이전과 같은 중앙 집권적 통치가 이루어진 반면, 디마슈크 일대는 일종의 비무장지대로 방치되었다. 지명도 곧 디마슈크의 그리스어 발음인 '다마스코스'로 굳어졌고, 아람인 정체성이 유지되었다. 한편 동방 원정을 통해 전성기 셀레우코스 조의 강역을 회복한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는 기원전 202년 재차 마케도니아와 동맹해 5차 전쟁을 일으켰다. 그는 신속히 시리아 전부를 점령하였고, 비록 이집트 장수 스코파스의 반격으로 잠시 밀려나긴 했지만 결국 기원전 198년 시리아와 가나안을 석권하였다. 3년 후 맺어진 강화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조는 그의 점령지를 인정하였고, 이로써 디마슈크는 셀레우코스 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다만 셀레우코스 조 역시 수도 안티오크를 포함한 테라폴리스[18] 및 베로이아 (할랍) 등 북부에 치중하였다.[19] 따라서 디마슈크는 한동안 재차 소외되어 있어야 했다.

2.2.2. 셀레우코스 왕조

파일:알렉산드로스2세.jpg 파일:1014px-Syria_under_the_Seleucids_92_BC.svg.png
디마슈크에서 주조된 알렉산드로스 2세의 은화 / 기원전 95년, 삼분할된 셀레우코스령 시리아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가 로마에 패하고[20] 사망한 후 셀레우코스 조는 서서히 쇠퇴하였다. 후계자인 안티오코스 4세, 데메트리오스 1세, 안티오코스 7세가 일시적인 중흥을 이룩했으나 모두 약 10여 년간의 통치 끝에 요절하거나 살해되었다. 그동안 유대 지방에선 봉기가 일어나 하스몬 왕조가 세워졌고 동쪽에서 파르티아 제국이 흥기해 이란과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하였다. 따라서 셀레우코스 조는 시리아 일대로 축소되었고, 비로소 기원전 134년 화폐 주조소가 생기는 등 디마슈크의 중요성이 회복되었다. 안티오코스 7세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데메트리오스 2세는 국력을 만회하고자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내분에 개입해 이집트로 진격했는데, 펠루시움에서 패배하였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보복으로 안티오코스 7세의 손자임을 자처하던 이를 알렉산드로스 2세로 옹립, 군대를 주어 안티오크를 장악하게 하였다. 다만 데메트리오스가 코엘레 시리아에 웅거하며 내전이 이어졌다.

기원전 125년 초엽, 알렉산드로스 2세는 디마슈크 부근에서 데메트리오스를 격파하였고, 후자는 프톨레마이스 ( 아크레)를 거쳐 티레로 향했으나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다만 2년 후 데메트리오스의 아들 안티오코스 8세가 이집트의 지원으로[21] 알렉산드로스 2세를 격파, 처형하고 내전을 종식시켰다. 이후 평화가 이어지나 싶더니 기원전 116년에 유배지에서 돌아온 안티오코스 8세의 사촌이자 이복동생인 안티오코스 9세가 반란을 일으켰다. 얼마간의 싸움 끝에 그들은 왕국을 반씩 분할하였고, 이후 상호 공존하였다. (기원전 111년) 코엘레 시리아를 얻은 안티오코스 9세는 안티오크를 대신해 디마슈크를 수도로 삼아 그리스식 도시를 세웠고, 제우스-하다드[22] 신전의 동쪽에 장방형 도로와 아고라가 조성되었다.[23] 현재 알 카이마리예 거리의 열주가 그 흔적이다. 한편 기원전 96년 안티오코스 8세가 사망하자 안티오코스 9세가 단독 국왕이 되었고 시리아는 다시 통합되었다.

하지만 같은해 안티오코스 8세의 아들 셀레우코스 6세가 봉기해 안티오코스 9세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 그리고 그 역시 이듬해에 사촌이자 안티오코스 9세의 아들인 안티오코스 10세에 패해 죽는 등 혼란이 이어졌다. 그러던 그해 말엽, 안티오코스 8세의 또다른 아들인 데메트리오스 3세가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왕을 칭하였고, 숙부처럼 디마슈크를 수도로 삼았다. 기원전 90년, 그는 디마슈크를 '데메트리아스'로 명명하였다. 한편 셀레우코스 조의 내전을 틈타 하스몬 왕조는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강역을 장악하고 디마슈크를 위협했는데, 데메트리오스 3세는 그 내전에 개입하여 국왕 알렉산드로스를 격파하였다. 이후 기원전 89년 안티오코스 10세가 파르티아 원정 중 전사하자 데메트리오스 3세는 안티오크를 얻으며 시리아 대부분을 수중에 넣었다. 그러나 이내 동맹이던 동생 필리포스 1세와 대립하게 되었고 그의 거점인 베로이아를 공격하였다.

이에 필리포스 1세는 파르티아- 에메사 군의 도움으로 형을 격파, 사로잡으며 내전을 종식시켰다. (기원전 87년) 그러나 그의 다른 동생 안티오코스 12세가 또다시 이집트의 도움을 얻어 디마슈크에 궁정을 차렸고, 재차 시리아는 남북으로 양분되었다. 안티오코스 12세는 현지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제우스 외에 하다드 신을 동전에 세겼고, 남쪽의 하스몬 왕조와 신흥 아랍 세력인 나바테아 왕국[24]을 공격하였다. 그의 원정 동안 필리포스 1세가 남하해 디마슈크 시타델을 맡던 밀레시오스의 내통으로 도시를 무혈 점령하였다. 하지만 밀레시오스는 예상과 달리 아무런 대가를 받지 못하자 필리포스 1세를 배신, 그가 성 밖의 히드포룸에 있던 틈에 성문을 걸어잠궜다. 그리고 원정에서 황급히 돌아온 안티오코스 12세는 수도를 되찾았다. 그러나 그는 2년 후인 기원전 82년, 카나 전투에서 나바테아의 아레타스 3세에게 패하고 처형되었다.

2.2.3. 새로운 시대

파일:다마스쿠스 로마.png 파일:다마스쿠스 신전.jpg
로마 지배기의 도시[25] 유피테르 신전의 유구
'마지막 셀레우코스'로 평가되는 안티오코스 12세의 죽음 후, 디마슈크 시민들은 약탈로 악명이 높은 서남쪽의 이트레아로부터 보호를 청하며 아레타스 3세를 군주로 받아들였다. 아레타스 3세는 스스로 셀레우코스 조의 후계자를 칭하였고, 디마슈크에서 발행된 동전에도 고유어가 아닌 그리스어를 사용해 헬라화된 주민들과의 동질감을 보이고자 하였다. 나바테아 인들은 기존 시가지의 동쪽에 자리잡았고, 이때 디마슈크는 후에 데카폴리스로 묶이게 되는 요르단 일대의 도시들과 같은 생활권이 되었다. 하지만 나바테아의 지배는 오래 가지 못하였다. 거듭된 내분에 절망한 안티오크 시민들의 초청으로 남하한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2세가 기원전 72년 디마슈크를 점령한 것이다. 한편 비슷한 시기 폰투스와 아르메니아와의 전쟁에 나선 로마의 루쿨루스는 기원전 69년 티그라네스에게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같은해 아르메니아 군은 디마슈크에서 철수하며 주민들을 소개시켰다. 힘의 공백을 틈타 하스몬 조의 아리스토불로스 2세가 도시를 공격했으나 골란 고원 일대의 이투레아 군주 프톨레마이오스 멘나에오스에게 격퇴되었다. 한동안 무주공산으로 남았던 시리아에 기원전 66년, 루쿨루스의 후임으로 부임한 폼페이우스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아르메니아 본토로 진격하는 동시에 루키우스 롤리우스와 메텔루스 네포스를 시리아로 보내어 우선 디마슈크를 접수하게 하였다. 시리아에서 안티오크보다 우선 순위였던 점은 최근 한세기간 높아진 디마슈크의 위상을 상징한다. 이후 부관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를 보내 나바테아의 재점령을 방지하게 하였다. 폼페이우스 본인은 안티오크에서 연명하던 셀레우코스 조를 완전히 무너뜨린 후 기원전 63년 디마슈크에 당도했다. 그곳에서 시리아 각지와 유대, 이집트 등지의 사절을 접견한 폼페이우스는 시리아에 대한 느슨한 지배를 구축한 후 이듬해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셀레우코스 조의 테라폴리스로 대표되는 북부만이 직접 지배가 확립되었고, 디마슈크와 에메사 등의 도시들은 로마의 헤게모니 하에서 상당한 자치를 부여받았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1차 내전을 지나 기원전 37년, 삼두정치의 일원으로써 동부를 맡고 있던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7세와 결혼하였다. 3년 후 그는 연인의 숙원이던 디마슈크를 포함한 시리아 남부를 무려 150년 만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할양해주었다. 비록 둘의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푸스의 명의로 이루어진 것이었고 지극히 명목상이었지만 본국의 여론이 옥타비아누스 쪽으로 기울게 하기엔 충분하였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3년까지 수차례 파르티아 및 아르메니아 원정에 나섰는데, 디마슈크가 그의 주요 거점이었다. 하지만 이내 발발한 2차 내전은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의 대패로 귀결되었고, 곧바로 시리아의 도시들은 옥타비아누스의 편으로 돌아섰다. 이듬해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를 접수하기 위해 육로로 진군하였고, 디마슈크를 지날 때에 주민들은 그를 환영하고 충성을 표하였다.

2.2.4. 팍스 로마나와 기독교

파일:다마스쿠스 로마 개선문.jpg 파일:다마스쿠스 로마 상징.jpg
직선 거리 중동부에 세워진 로마 개선문 유적 밥 키산의 후기 로마 상징

내전을 종식시킨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가 되어 로마를 제정으로 전환시켰다. 그럼에도 관대한 동방 정책에는 변함이 없었고, 시리아 일대에는 번국들과 자치 도시들이 별 간섭을 받지 않고 유지되었다. 한편 셀레우코스 조의 쇠퇴 이후 디마슈크와 시리아 남부 살카드, 보스라 사이에 위치한 트라코니티스 (라자트) 용암대지에는 도적떼가 들끓고 있었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무리하게 파르티아와의 국경에 집중된 로마군을 투입하기 보다 일대를 현지 세력인 유대 국왕이자 벗인 헤로데 대왕에게 맡겼다. (기원전 23년) 20년 전 부친 안티파트로스의 암살 시에 디마슈크에 피신한 적이 있던 헤로데는 임무를 확실히 수행하였고, 도시는 안정을 회복할 수 있었다. 마침 그의 서기관 역시 디마슈크 출신이었고, 헤롯은 그곳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오데온(극장)과 김나지움(체육관)을 세워주었다. 그 후 반세기 넘게 시리아 남부엔 로마 군단이 하나도 배치되지 않을 만큼 안정기를 구가하였다.

기원전후 무렵, 라틴식인 다마스쿠스로 명명된 도시는 셀레우코스 시대부터 이어져오던 농경지의 세분화와 팔미라, 두라 에우로포스 방면의 카라반 교역의 활성화를 완성하고 번영할 수 있었다. 또한 로마의 패권하에 지중해 교역이 활발해지며 디마슈크는 동쪽에 더해 서쪽 티레와의 활발히 교류하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는 그리스도교가 탄생한 때였다. 예루살렘과 불과 200km 떨어져 있었기에 도시에는 큰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고, 그 중엔 사도 바울로는 개종시킨 성 아나니아스도 있었다. 서기 37년경, 기독교도들을 끝장내러 고향 타르수스를 떠나 유대로 향하던 독실한 유대교도 사울이 도중 눈이 멀어 디마슈크에 머물렀고, 예수의 계시로 그를 찾아낸[26] 기독교도 아나니아스에 의해 눈이 치유된 후 세례를 받아 독실한 기독교도가 된 일화는 유명하다. 지금도 동문, 북문 사이의 나바테아 구역엔 하나니야 거리가 있고, 아나니아스의 옛 집은 성당으로 쓰인다.

개종하여 선교사가 된 바울로를 대다수 유대인들은 배신자로 간주하였다. 그들의 고발로 인해 당시 디마슈크에 머물던 바울로는 나바테아 국왕 아레타스 4세[27]의 행정관을 피해 야밤에 광주리를 타고 밥 키산 (동남문)의 창을 통해 도피해야 했다. (고린토 후서 11장) 신약의 이 대목을 통해 일각에선 서기 30년대에 디마슈크는 재차 나바테아의 지배를 받았다고 추측하기도 하나, 그외의 증거가 전무하므로 도시 동부 나바테아 구역에 상주하던 대사 정도였을 것이다. 그와 상관없이 디마슈크는 로마의 패권하에 번영을 이어가며 안티오크에 버금가는 시리아의 주요 도시로 성장하였다.[28] 이른바 팍스 로마나 기간 도시에 특기할 만한 일이 있었다면 66년, 유대 반란 때 군중이 유대에서 벌어진 로마인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시내의 유대인들을 헤로데 왕의 김나지움에 몰아넣어 학살을 자행한 사건이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10,500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파일:다마스쿠스 기독교.jpg 파일:다마스쿠스 로마 수도교.jpg
성 바울로 성당으로 개조된 밥 키산 밥 자비야와 히자즈 역 사이, 알 카나와트에 남아있는 수도교 유구

73년, 마사다의 함락과 함께 유대 반란이 진압된 후 로마는 레반트에 대한 간접 지배 정책을 폐하고 직접 지배에 나섰다. 같은해 (예루살렘 포위에 협조했음에도) 에메사의 왕정이 폐지되었고, 93년에는 이투레아가 합병되었다. 로마의 전성기를 이끈 트라야누스 황제는 106년, 1세기 내내 디마슈크 등 데카폴리스에 대한 경제적 영향력을 키워가던 나바테아를 멸망시키고 요르단의 중심지를 보스라로 옮겨버렸다. 트라야누스는 다키아 전쟁과 파르티아 전쟁 등 여러 군사 원정에 나섰는데, 그를 수행하던 건축가 아폴로도루스는 디마슈크 출생이었다. 트라야누스 원주와 개선문, 다뉴브 강의 다리 등을 설계한 그는 고향의 유피테르-하다드 신전의 확장 역시 주도하였다. 한편 바울로 외에 사도 토마스 역시 (인도로 떠나기 전까지) 디마슈크에 거주했고, 그들이 점차 기존 유대인들과 기타 주민들을 개종시키면서 밥 투마 (북문) 일대가 나중에 정교회 구역이 되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다음 황제인 하드리아누스는 125년, 디마슈크를 코엘레 시리아의 메트로폴리스 (대도시)로 격상시켰다. 그리고 222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의해 콜로니아, 즉 식민도시로 승격되었다. 시리아 출신 왕비를 둔 세베루스의 후원으로 유피테르-하다드 신전 동문이 확장되었고 2중의 성벽이 둘러져 그 장엄함을 더하였다. 3-4세기 무렵 디마슈크의 대신전은 그 규모로 명성을 떨쳤고, 실제로도 당시 시리아에서 가장 큰 종교 건축물이었다. 그 무렵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 전역에 퍼졌다. '동방의 눈'이라 도시를 묘사했던 율리아누스 황제의 다신교 복구 운동 때에 시내의 유대인들이 두 바실리카(성당)에 방화하기도 하였다. 다만 이는 일시적 반동이었다. 391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다른 종교 의식을 금하였고, 같은해 유피테르-하다드 신전은 성당으로 바뀌었다. 당시에는 특정 성인에게 봉헌되지 않았는데, 6세기 들어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매장되어 있다는 전설에 따라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29]

성 요한 대성당은 동시에 다마스쿠스 주교좌 성당이었는데, 디마슈크의 대주교는 시리아에서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다음가는 위치였다. 3-5세기 들어 로마 제국은 내란과 게르만, 사산 제국의 침공으로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그럼에도 시리아, 특히 디마슈크는 번영을 유지하였다. 특히 6-7세기 동로마-사산 제국 전쟁으로 팔미라를 통한 동방 교역이 사실상 중단되었음에도 남쪽 아라비아를 거친 새 교역로 역시 디마슈크를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였기에 그러하였다. 서기 200년 무렵 완공된 디마슈크의 성벽이 더욱 강화된 것 외에 도시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약 680년간의 로마 지배기가 도시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기존의 아람, 헬레니즘기의 시가지가 하나로 합쳐져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그 유구는 5m나 되는 두터운 지층 밑에 매장되어 있지만, 그 구조는 현재까지도 구도심의 중추이며 일부는 여전히 사람들이 이용하거나 지나다니고 있다.

2.3. 중세

파일:다마스쿠스 포위.png 파일:다마스쿠스 동문.jpg
이슬람 군대의 포위망 (밥 투마 = 토마스 문 혹은 동북문) 이슬람 군대가 입성한 밥 샤리키 (동문)
بسم الله الرحمن الرحيم، من محمد رسول الله إلى الحارث بن أبي شمر، سلام على من اتبع الهدى، وآمن به وصدق، وإني أدعوك إلى أن تؤمن بالله وحده لا شريك له، يبقى لك ملكك

진리를 따르는 자에게 안녕을 고하며, 그에게 안전과 정직이 있길. 나는 그대를 유일신의 종교로 초대한다. 그분께는 다른 동반자도 없으며, (이슬람을 수용한다면) 그대의 것은 그대에게 남으리.

ㅡ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신의 이름으로, 신의 사도 무함마드가 알 하리스 빈 아비 샤미르에게

602년부터 동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는 27년간의 대전쟁에 돌입하였다. 전자의 내분을 틈타 페르시아 군대는 610년 에데사 함락을 시작으로 612년까지 디마슈크 등 시리아 전부를 장악하였다. 항복 혹은 파괴라는 페르시아군의 겁박에 대부분 협상에 나선 결과였고[30], 시리아에 만연했던 단성론 세력은 마침내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다만 6년에 걸친 이라클리오스의 반격으로 628년 디마슈크와 시리아는 동로마의 영토로 수복되었다. 대전쟁 동안 도시는 627년 일부 주민들이 이란으로 반출된 것 외에는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한편 두 제국이 싸우는 동안 아라비아 반도는 이슬람의 기치 하에 통합되었다. 628년에 무함마드는 중동 각지의 왕공들에게 이슬람 개종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수신자 중에는 동로마령 디마슈크 총독 하리스 알 가사니도 있었다. 이는 수용되지 않았고, 무함마드의 후계자인 칼리파 아부 바크르는 634년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에게 시리아 정복을 명하였다.[31]

그해 4월 디마슈크 근방을 지나 남하한 칼리드[32]는 7월까지 동로마의 번국인 가산 왕국을 멸하며 요르단을 석권하였고, 아즈나딘 전투에서 로마군을 격파하였다. 이후 그는 '시리아의 낙원'으로 알려진 디마슈크로 진격하였다. 도시는 이라클리오스의 사위 토마스가 지키고 있었는데, 우선 그는 에메사에 있던 장인에게 원군을 청하고 칼리드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두 군대를 남파하였다. 그러나 칼리드는 이들을 각각 마르즈 앗 사파르와 야쿠사에서 격파하고 2만의 병력으로 디마슈크를 포위하였다. (8월 21일) 동로마 수비대 역시 15,000명으로 적지 않았다. 동문 밖의 수도원에 진영을 차린 칼리드는 무리한 공성전 대신 도시를 봉쇄하고 기다렸다. 동로마 원군을 대비해 각지에 정찰대가 파견되었고, 동쪽 교외의 구타 오아시스는 포위군에 충분한 물자를 제공해주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이라클리오스는 9월 9일에 12,000명의 원군을 파견했으나, 정찰대의 보고를 받은 칼리드에게 격파되었다.

9월 중순, 기다림에 지친 토마스는 수비대를 이끌고 밥 투마를 나서 반격을 시도하였다. 로마군은 화살 세례의 엄호와 함께 진군했으나, 진두지휘하던 토마스가 오른 눈에 화살을 맞고 철수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천 배의 복수를 천명한 토마스는 밤을 틈타 재차 반격에 나섰다. 이번엔 군을 넷으로 나눠 주력군은 밥 투마를 나서 낮에 약화된 포위군을 공격하고 나머지는 서문, 작은문, 동문으로 출격해 다른 포위군의 밥 투마 방면 원조를 방지하게 했다. 칼리드를 생포하라며 호언장담하던 토마스였지만, 격전 끝에 칼리드와 기동대가 적재적소에 나타나며 포위군은 모든 반격을 격퇴해내었다. 토마스는 수천의 인명 손실을 입고 성내로 철수해 더이상 성밖에서 싸우려 하지 않았다. 11m 높이의 성벽은 아랍인들에게 익숙지 않은 장애물이었고, 병사들은 지쳐갔다. 하지만 동로마 진영은 단합되어 있지 않았다. 6세기부터 시리아에 퍼진 단성론은 정교회와 반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9월 18일, 한 단성론파 사제 요나가 그날 밤 축제가 있다는 사실을 칼리드에게 알려왔다.[33] 칼리드는 나머지 포위군에 알릴 새도 없이 휘하 병력만을 이끌고 동문을 습격하였다. 가장 요새화되어 있던 동문에 대해 방심한 수비 측은 성문 위엔 병력을 두지 않았고, 칼리드는 두 장교들과 맨손으로 그 위를 올라간 후 밧줄을 묶어 밑으로 내렸다. 대기하던 100명의 결사대가 성벽을 올랐고, 칼리드는 장교 알 카카와 안쪽으로 내려가 문지기들을 죽이고 동문을 열어젖혔다. 이후 시가전이 벌어졌는데, 전세가 기울자 토마스는 도시의 파괴를 막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 다른 포위군이 부동인 것을 보고 칼리드의 독자 행보임을 파악한 그는 이슬람 군의 부사령관인 아부 우바이다에게 사절을 파견, 지즈야를 내고 항복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평화를 선호했던 아부 우바이다는 (칼리드 역시 동의할 거라 여기며) 제안을 수용하였고, 19일 새벽 밥 자비야(서문)을 통해 입성하였다.

2.3.1. 정통 칼리파 조

(종말의 날이 당도한) 후에 이사 이븐 마리얌 (예수)이 디마슈크 동쪽의 백색 미나렛에 강림할 지어니
ㅡ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 앗 나와스 이븐 시만 알 킬라비가 전함[34] [출처]

칼리드와 달리 아부 우바이다는 다른 포위군에 전갈을 보냈고, 그들 역시 각자가 맡은 성문을 통해 무혈입성 하였다. 이후 아부 우바이다는 토마스를 포함한 동로마 장교 및 주교들을 대동하고 시내 중심부로 향하였다. 한편 새벽 내내 동문에서 전투를 벌이던 칼리드 역시 저항을 일소하고 시내 중심부로 진출하였다. 직선 거리의 개선문과 성 마리아 성당 쪽에서 양측은 마주쳤다. 칼리드는 자신이 무력으로 도시를 점령했다고 주장했고, 아부 우바이다는 협상을 통해 항복한 것이라 반박했다. 이어진 회의에서 사령부는 평화 협정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결정했고, 칼리드는 불만이었지만 수긍하였다.[36] 평화 협정에 따라 디마슈크 시민들은 (지즈야를 내는 한) 자유와 재산 및 종교의 자유가 존중되었고, 토마스를 비롯해 이슬람 지배를 피해 안티오키아로 떠나려는 이들에게는 3일의 기한이 주어졌다.[37] 디마슈크의 상실 후 이라클리오스는 전방이 된 에메사를 떠나 안티오키아로 본부를 옮겼다.

다만 동로마는 쉽사리 도시를 포기하진 않았다. 634년 가을, 총사령관으로 진급한 아부 우바이다는 우선 레바논과 팔레스타인 정복을 명하였다. 이에 임시로 디마슈크를 맡았던 야지드 역시 소수의 병력만을 남기고 출정해 티레 비블로스를 함락한 후, 팔레스타인의 주요 항구인 카이사레아를 포위하였다. 비슷한 시기 아부 우바이다는 칼리드의 주력군은 티베리아스 일대를 평정한 후 에메사로 향하였다. (635년 봄) 이슬람 군대가 분산된 것을 포착한 헤라클리오스는, 사령관 테오도로스에게 소수의 수비대만이 남겨진 디마슈크 탈환을 명하였다. 그 해 여름, 테오도로스는 남하하며 부관 스키노스에게 병력 일부를 주며 베카 협곡의 바알벡 구원을 맡기곤 자신은 곧장 디마슈크으로 향하였다. 도시 서쪽의 앗 사부라에 주둔하던 테오도로스는, 밤을 틈타 기습을 가하였다. 이는 좋은 계획이었으나 첩자를 통해 정보를 입수한 칼리드가 친위대를 이끌고 달려와 그를 격파하였다.

칼리드를 급파한 아부 우바이다 역시 베카 협곡(마르즈 알 룸)의 스키노스를 격파하였다. 이로써 동로마의 디마슈크 탈환 시도는 분쇄되었다. 그러나 이는 헤라클리오스가 준비한 역습의 서막에 불과하였다. 이슬람 군대가 에메사를 포위하는 틈에 대군이 안티오크에 집결하였고, 636년 5월에 남하하였다. 칼리드의 조언에 따라 아부 우바이다는 전 병력을 골란 고원 동쪽의 야르무크에 집결시켰다. 디마슈크의 주둔군 역시 주민들에게 지즈야를 돌려준 후 철수하였고[38], 로마군은 2년 만에 도시를 재접수하였다. 그러나 이어진 야르무크 전투는 로마군의 대패로 귀결되었고, 디마슈크를 향해 도주하던 패잔병들은 칼리드의 기병대에 의해 섬멸되었다. 동로마 군대는 도시를 통과해 에메사에 다다른 후에야 재정비 할 수 있었다. 그해 12월, 칼리드는 2년 전과 같은 조건으로 도시에 입성하였다. 이 '두 번째 정복'으로 '하디스에 33번 언급된' 디마슈크는 확고한 이슬람 제국의 지배 하에 놓였다.

637년, 안티오키아의 함락과 함께 시리아 정복이 완료되자 이듬해 디마슈크 서쪽의 자비야에서 수뇌부 회의가 열렸다. 총사령관 아부 우바이다가 시리아 총독이 되었고, 야지드는 그대로 디마슈크 태수를 맡았다. 2년 후인 639년, 아부 우바이다가 역병으로 사망하자 칼리파 우마르는 시리아를 양분하였다. 홈스부터 자지라의 북부는 이야드 이븐 가님에게 주어졌고, 디마슈크와 레바논, 팔레스타인, 요르단의 남부는 야지드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그해 말엽 야지드 역시 병사하자 동생 무아위야가 후임자로 임명되었다. 다만 팔레스타인은 우바다 이븐 앗 사미트에게 주어졌다. 무아위야는 형 야지드 때부터 우마이야 가문의 중심지가 된 디마슈크를 중심으로 삼았다.[39] 640년, 무아위야는 우바다와 함께 동로마의 마지막 거점인 카이사레아 아슈켈론을 함락하며 레반트 정복을 마무리지었다. 그 후 우바다는 아므르 이븐 알 아스의 이집트 원정을 돕기 위해 임지를 떠났다.

이듬해에는 홈스-자지라 총독 이야드가 사망하며 무아위야는 사실상 시리아의 단독 지배자가 되었다. 그해부터 무아위야는 동로마에 대한 지하드를 이끌며 그 심장부인 아나톨리아 습격에 나섰는데, 644년에는 반도 중서부의 아모리움까지 진출하였다. 한편 644년 무아위야의 숙부 우스만이 칼리파로 선출되었다. 우스만은 조카 무아위야의 임지에 팔레스타인을 더해주었다. 비록 홈스-자지라는 우마이르 이븐 사드가 봉해졌지만, 그는 경험이 부족한 20대였기에 사실상 무아위야가 시리아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마저도 3년 후에 우마이르가 해임되며 무아위야가 그의 영지를 차지하였다. 이에도 만족하지 못했던 무아위야는 바누 칼브, 타이 등 신규 편입된 아랍 기독교도 병력의 봉급을 명목으로 군대 봉급을 위해 공유지로 남겨두었던 비옥한 북부 시리아까지 직할지로 요청하였다. 이를 우스만이 수용하며, 무아위야는 시리아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2.3.2. 우마이야 왕조

파일:다마스쿠스 이맘 후세인.jpg 파일:다마스쿠스 대사원 후세인.jpg
우마이야 대사원 동쪽 회랑의 후세인 수급이 전시된 곳 및 묻힌 곳(으로 알려진 장소)을 기리는 벽감

무아위야의 연이은 임지 확대로 대표되는 우스만의 족벌 정치와 해군을 편성을 위한 중과세는 칼리파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켰다. 한편 무아위야는 그 해군으로 키프로스, 로도스, 크레타를 점령하고 마스트 해전에서 동로마 해군을 격파했다. 654년에는 키지쿠스를 점령,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위협하였다. 이듬해에는 무아위야의 부관 하빕 이븐 마슬라마가 아르메니아를 정복하며 무아위야의 위상은 높아졌다. 656년, 우스만이 분노한 군중들에게 피살되고 1차 피트나 (이슬람 내전)이 발발하였다. 신임 칼리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에 대해, 무아위야는 피로 얼룩진 우스만의 옷[40]을 디마슈크 사원에 1년간 전시하며 알리가 우스만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며 주민들을 선동하였다. 남,동쪽의 칼리파 군과 북쪽의 동로마에게 포위된 무아위야는 기존에 대립하던 아므르 이븐 알 아스와 반 알리 동맹을 맺었다. 657년, 무아위야는 동로마와 휴전을 맺고 라카 부근의 시핀에서 알리와 대치하였다.

무아위야는 아랍 무슬림과 시리아 기독교도로 구성된 군대를 거느리고 알리와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다만 아므르의 기지로 알리와 협상에 나섰고, 이에 실망한 알리 진영의 카와리지가 이탈하며 알리는 이라크로 후퇴하였다. 그러자 658년 봄, 무아위야는 칼리파를 칭하였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그해 여름 아므르가 이집트를 재점령하였고, 660년까지 시리아 군대는 이라크와 헤자즈 지방을 습격하였다. 알리가 준비한 총반격은 이듬해 1월 그가 암살당하며 무산되었다. 같은해인 661년 7월, 무아위야는 예루살렘의 성전산에서 칼리파로 즉위식을 치렀다. 다음달에 알리의 후계자인 하산이 협상을 통해 양위하며, 무아위야는 이슬람의 단독 칼리파가 되었다. ( 우마이야 왕조) 디마슈크는 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무아위야는 총독 시절 지은 다르 알 카드라(녹색 궁전)[41]에서 통치하였다. 제국을 안정시킨 무아위야는 재차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680년에 사망하였다.

무아위야의 사후 아들 야지드 1세가 계승했는데, 선출제였던 칼리파가 세습제로 바뀌자 많은 반발이 있었다. 이라크 인들은 알리의 아들 후세인을 추대하려 하였고, 이에 그는 선친의 수도 쿠파로 향하였으나 카르발라에서 야지드가 보낸 토벌군에게 살해되었다. 그후 후세인의 수급과 그 가족들은 디마슈크로 압송되어 60일간 고초를 겪어야 했고, 전사자들의 수급은 3일간 전시되었다. 이 잔혹한 처사에 반발한 이라크의 쉬아 세력 및 압둘라 이븐 주바이르가 반란을 일으키며 우마이야 조는 2차 피트나에 직면하였다. 683년 야지드 1세가 사망하자 장남인 무아위야 2세가 계승했으나 그 역시 이듬해에 사망하였고, 동시에 이븐 주바이르가 시리아를 제외한 영토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왕조의 존망이 위태로운 시기에 무아위야 2세의 동생 할리드는 어렸고, 친우마이야 아랍 부족들은 바누 칼브의 주도로 자비야에서 모여 원로이자 무아위야의 6촌인 마르완 1세를 칼리파로 선출하였다.

마르완과 바누 칼브는 우선 자지라의 반발 세력인 바누 카이스를 디마슈크 교외의 마르즈 라히트에서 격파하였다. 마르완이 디마슈크 국고에서 가져온 자금으로 적군을 매수한 것이 승리의 요인이었다. 이후 마르완은 본격적인 반격에 나서 이집트를 수복하였지만 고령이었기에 곧 사망하였다. (685년) 그를 계승한 아들 아브드 알 말리크는 반란 세력이 분열된 틈에 반격하여 결국 692년 이븐 주바이르를 전사시키고 2차 피트나를 종식시켰다. 아브드 알 말리크는 무아위야 1세 이후 재차 20여년간 장기 집권하며 제국을 안정시켰다. 그는 기존 그리스-로마식 국정 운영을 이어가지 않고 중앙 집권화와 이슬람 제국으로의 정체성 형성에 나섰다. 우선 자체적인 주화를 발행하였고, 공문서의 언어를 아랍어로 통일시켜 제국의 아랍화를 촉진시켰다. 또한 각 주의 자치를 인정하되, 총독들은 여분의 수입을 수도로 보내야 했다. 이는 디마슈크의 국고로 모였고, 도시는 제국 전역의 보화로 가득하게 되었다.
2.3.2.1. 대사원 건립
파일:다마스쿠스 마스지드.jpg
이슬람 전승에 따르면 심판의 날에 이사(예수)가 왼편에 보이는 첨탑에 강림할 것이라 한다.

이슬람 정복 후에도 디마슈크는 큰 변화를 겪지는 않았다. 열성 정교도들과 동로마 병력 외에 시민들과 하급 관료들은 그대로 도시에 남았고, 단성론파 기독교는 여전히 우세하였다. 7-8세기에도 교황 그레고리오 3세와 '마지막 시리아인 교부'인 요안니스가 배출되었다. 랍계 동로마 관리 만수르 이븐 사르준[42]과 같은 단성론파 관리들은 이슬람 정부에 기꺼이 협력하였다. 도망친 귀족들의 재산을 차지한 우마이야 일족을 제외하면 아랍 무슬림들도 별로 유입되지 않았다.[43] 그들은 군기 유지를 위해 병영도시인 암사르에 거주했기 때문이다. 야지드 1세 때에 수로 보수가 이루어진 것이 가장 눈에 띄는 변화였다. 천 년간 이어지던 헬레니즘 문화에서 기존의 셈족 문화로의 전환은 서서히 진행되었다. 초기 우마이야 조의 종교색이 약한 느슨한 지배 하에서의 점진적인 변화는 상술한 아브드 알 말리크의 중앙집권화 및 아랍화 정책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705년 즉위한 왈리드 1세는 부왕의 정책을 완성할 사업에 착수했는데, 바로 디마슈크의 성 요한 대성당을 모스크로 개조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디마슈크의 모스크는 성 요한 성당 옆, 메카 방면인 남쪽 회랑에 작은 사원을 세워 이용해왔다. 하지만 점차 개종자 및 무슬림 인구의 자연 증가로 예배 공간이 부족해졌다. 선대의 정복으로 대서양에서 파미르에 이르게 된 이슬람 대제국의 수도가 중앙 사원을 이교도 사원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무슬림들에게 불편한 사실이었다. 앞서 두 칼리파들이 기독교 공동체와 성당 할양을 놓고 협상을 벌였으나 실패한 바 있었다. 693년 예루살렘에 바위의 돔을 세운 부친처럼 명성을 남기고 싶었던 왈리드는 즉위 이듬해인 706년, 재차 협상에 나서 시내에 추가로 3개의 성당 부지를 제공하는 대가로 성 요한 성당과 신전 단지를 얻을 수 있었다.[44] 이슬람이 약 1500년간 이어진 디마슈크의 종교적 중심을 접수한 것이다.

기존 성당과 모스크가 모두 철거되는 것으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 도중 지하 동굴에서 야흐야의 머리가 담긴 유물함이 발견되었다. 이에 왈리드는 친히 들어가 확인한 후 다시 매장하고, 그 위에 성소를 세우게 하였다.[45] 7년치 예산에 맞먹는 백만 디나르에 이르는 비용과 콥트, 이란, 그리스, 힌두 등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12,000명의 장인들이 동원된 대역사는 10여 년이 걸렸고, 왈리드는 생전에 완공을 보지 못하고 마감 공사가 진행되던 715년 초에 사망하였다. 대사원은 다음 칼리파인 술라이만의 즉위 직후에야 완공되었다. 모스크는 메카 방면인 남쪽 회랑을 3배로 증축하여 중심으로 삼았고, 안뜰에서 바라본 건물 외벽은 그리스 장인들에 의해 (이슬람 관념의) 천국을 묘사한 황금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화려함을 뽐내었다.[46] 놀랍게도, 내부의 모자이크와 대리석 패턴은 더욱 화려했다고 한다. 대사원은 북쪽 외에 남쪽에도 회랑으로 둘러쌓인 안뜰을 두고 녹색 궁전과 마주하고 있었다.[47]

우마이야 대사원은 제국의 새 질서를 상징하였다. 그러나 디마슈크의 중요성은 대사원의 완공과 함께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기존 칼리파들이 자비야 혹은 이르비드에서 월동했던 정도를 넘어 술라이만은 팔레스타인에 신도시 라믈라를 세워 그곳에 거하였고, 후대 칼리파들도 요르단 일대에 별궁을 세워 종종 수도를 비웠다.[48] 이와 함께 제국 자체도 쇠퇴하였다. 술라이만이 추진한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은 대실패로 끝났고, 아랍인 중심 정책에 비아랍 무슬림 (마왈리)들의 분노가 축적되었다. 각지 총독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자립해버렸고, 그 틈에 알리의 후손들은 쉬아 반란을 준비하였다. 왈리드 후의 칼리파들은 단명하며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히샴이 장기 집권하긴 했지만 동로마와 투르게쉬, 하자르 칸국 등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베르베르 대항거와 아랍 부족 간의 내분, 카와리지의 반란 등 내우외환이 이어졌다. 그동안 도시에는 예멘계 아랍인이 유입되었다.

여기에 히샴이 사망한 후 왈리드 2세가 방탕함에 빠지자 우마이야 조는 내분에 돌입하였다. 그의 사치스러움을 혐오한 귀족들이 봉기해 별궁으로 진군하였고, 왈리드는 디마슈크 부근 성채로 도주했다가 살해되었다. 그의 수급은 디마슈크 시내에 전시되었다. 칼리파로 옹립된 사촌 야지드 3세는 청빈함을 드러내기 위해 당나귀를 타고 디마슈크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그는 개혁에 나서기도 전에 요절하였고, 동생 이브라힘이 계승했지만 오촌인 원로 마르완 2세가 정권을 잡았다. (744년 12월) 마르완은 우마이야 대사원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하지만 이미 시리아 남부는 바누 칼브를 비롯한 예멘계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바누 카이스를 선호한 마르완은 본래 임지이던 자지라의 하란으로 천도하였다. 도시의 연이은 역병 혹은 동쪽 호라산의 반란에 대처하기 위함이라고도 한다. 어쨋거나 90여년에 이은 디마슈크의 수도 역할은 종식되었다. 그리고 우마이야 제국 역시 종말이 임박하였다.

2.3.3. 압바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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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8년 알 파들에 의해 대사원 서쪽 뜰에 세워진 보물의 돔

750년 초엽, 자브 강 전투에서 패배한 마르완은 디마슈크로 철수했지만 예메니가 장악한 도시는 칼리파에게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에 마르완은 이집트로 도주하였고, 결국 전사하였다. 이로써 우마이야 조는 멸망하였다. 같은해 4월 25일, 약간의 저항 끝에 디마슈크는 압바스 왕공 압둘라 이븐 알리에게 성문을 열어주었다. 한 세기 이전의 정복과 달리, 750년의 정복은 같은 이슬람 세력 간에 벌어진 것이었음에도 더욱 큰 파괴로 이어졌다. 천명의 교체를 상징하기 위해 구체제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려는 의도였다. 우선 밥 앗 사기르 (서남문) 바깥의 묘지에 조성된 우마이야 가문의 무덤이 파괴되었다. 무아위야, 아브드 알 말리크, 히샴을 필두로 유골들이 훼손되었고 후일의 참배를 막기 위해 각각의 무덤 위치에 대한 기록도 말소되었다. 도시를 두른 성벽은 파괴되었고 우마이야 가문의 구성원들은 학살되었다. 디마슈크는 더이상 대제국의 수도가 아닌 지방 도시에 국한되었다.

이러한 가혹한 처사와 함께 호라산 출신 병사들의 횡포는 압바스 조에 대한 디마슈크의 여론은 점차 악화되었다. 압바스 조에 편입된 후 약 6개월간 도시는 반란의 불길에 휩쌓였다. 시리아 북부 킨나스린에서 무아위야 2세의 조카 지야드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시민들이 봉기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디마슈크의 움직임은 손쉽게 진압되었다. 도시를 점령한 후 시리아 총독을 맡은 압둘라는 기존 관리들을 축출하고 장군들을 해임하여 반란의 가능성을 낮추었다. 이슬람의 승리를 상징하는 대사원을 제외한 우마이야 조의 건축물 역시 파괴되었다. 다만 녹색 궁전은 한동안 총독 관저로 사용하였다. 754년, 칼리파 아부 아바스가 사망하자 압둘라는 조카 알 만수르에 대항해 제위를 노렸다. 이때 시리아 귀족들은 기존 특권 회복을 노리며 그에게 가담했으나 결국 후자의 승리로 귀결되며 무위로 돌아갔다.

시리아를 기반으로 했던 우마이야 조와 달리 압바스 조는 이라크를 중심으로 하였고, 디마슈크는 바그다드에 밀려 점차 쇠퇴하였다. [49] 시리아 북부가 동로마에 대한 원정의 후방 보급 기지로 등장했던 것과 달리, 도시는 공식 기록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압둘라 이후 그의 동생 살리흐, 종손 압둘 와하브를 거쳐 766년 살리흐의 아들 알 파들이 디마슈크 총독이 되었다. 알 파들은 약 10여 년간 통치한 후 자지라로 전임되었는데, 예멘계 귀족의 정원에서 발생한 수박 절도가 부족 간의 다툼으로 비화된 것이 이유였다. 780년, 자지라에서 돌아온 알 파들은 대사원 뜰에 정확한 예배 시간을 알려줄 시계의 돔을 세웠다. 그후 이집트 총독을 지낸 그는 786년 경 해임되자 디마슈크로 돌아왔다. 우마이야 대사원의 문을 교체하고 안뜰에 사원의 와크프 (재단) 재산을 수용할 보물고 (바이트 알 마알)을 세웠다. 789년 보물의 돔이 완공될 무렵 알 파들은 생을 마감하였다.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는 786년 즉위 이전 3년 여간 디마슈크 총독을 지냈다. 이후 그는 총애하던 바르마크 가문의 야흐야와 자파르[50] 형제를 디마슈크 총독으로 봉하였는데, 다만 후자는 803년 부임한 그 해에 처형되었다. 그외에는 압바스 조의 개국 세력인 호라산 출신 인사들 (쿠라사니야)이 총독을 맡았다. 그러던 809년 하룬의 사후 그의 두 아들 알 아민과 알 마문이 내전을 일으켰다. (4차 피트나) 이를 틈타 811년 우마이야 조의 복원을 기치로 한 수피야니 반란이 일어나 약 반세기 만에 흰 깃발이 휘날리기도 했지만 결국 진압되었다. 이후 녹색 궁전은 감옥으로 개조되었고 일부는 파괴되었다.[51] 총독 관저는 자비야 성문 밖의 옛 알 핫자즈[52] 저택을 개조하여 이전되었다.[53] 관저를 구시가지 밖으로 옮긴 것은 불온한 여론을 피해 구타 오아시스와 하우란 일대의 친압바스 부족들의 도움을 얻기 위함이었다.

부왕을 따라 디마슈크에 머물렀던 칼리파 알 마문은 831년 도시 북쪽 카이순 산의 기슭 데이르 무란에 화려한 행궁을 세웠다. 그 일대는 므닌 강에서 끌어온 운하와 함께 새로운 주거지로 발전하였고, 동시에 압바스 당국의 거점이 되었다. 840년대 바누 카이스 세력이 디마슈크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칼리파 알 와시크가 파견한 장군 라자 이븐 아이유브는 데이르 무란을 본부로 삼았다. 칼리파 알 무타와킬은 동로마 원정 준비를 염두에 두고 37일간 디마슈크에 머물며 천도까지 생각했지만 초여름의 습한 기후로 포기했다. 그후 도시는 특별한 일 없이 9세기 중반을 보냈다. 855년 북쪽 홈스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칼리파의 지시대로 총독 살리흐 알 압바시가 원군을 파견한 것 정도였다. 한편 9세기 들어 아랍계 기독교도들의 이슬람 개종이 촉진되었고, 디마슈크 역시 무슬림 다수 도시로 변모했다.[54]

2.3.4. 연이은 혼란

• 무력으로 주인이 바뀐 해: 870년, 878년, 885년, 904년, 939년, 942년, 945년, 946년, 968년, 970년. 971년, 978년
860년대 들어 압바스 조는 '사마라의 혼란'을 거치며 쇠퇴했다. 그중 866년 칼리파 알 무타즈에게 로비하여 팔레스타인-요르단 총독이 된 베두인 이사는 869년 무타즈가 폐위되자 정권 교체의 혼란기를 틈타 디마슈크를 장악했다. 이라크로 보낼 세금을 장악하고 자립한 그에 대해 칼리파 알 무흐타디는 이집트 총독 아흐마드 이븐 툴룬에게 토벌을 명하였지만 그 역시 자립을 꾀하고 있었기에 제대로 응하지 않았다. 870년, 신임 칼리파 알 무타미드는 이사에게 조세 납부를 명했고, 재차 거절당하자 아마주르에게 튀르크 기병대를 주어 토벌하게 했다. 중앙군의 남하에 이사는 방어를 위해 티레로 철수했는데, 토벌군이 소수인 것을 보고 출격하여 그들을 격파하고 추격에 나섰다. 그러나 디마슈크 근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이사는 아들 만수르를 잃는 대패를 당하고 라믈라로 패주하였다. 이듬해 협상으로 이사는 아르메니아 총독, 아마주르가 디마슈크 총독이 되었다.
2.3.4.1. 툴룬 왕조
파일:툴룬 왕조 동전.jpg
디마슈크에서 주조된 하룬 이븐 쿠마라위야의 디나르 금화.

이사의 반란은 아흐마드에게 조정과의 완충 지대를 제공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토벌을 명분 삼아 합법적으로 군대를 양성할 수 있었다. 아마주르 역시 상당히 자치적으로 시리아를 다스렸고, 877년 압바스 정부의 아흐마드 토벌 시도 때도 크게 호응하지 않았다. 결국 적은 보급에 분노한 토벌군이 항명하며 원정은 무산되었다. 비적 토벌, 도로 확보, 조세 재정립 등 시리아를 강력히 다스리던 아마주르는 878년 사망하였고, 어린 아들 알리가 총독이 되었다. 유능한 아마주르의 생전에 침묵하던 아흐마드는 칼리파 알 무타미드와 실권자 알 무와파크 간의 갈등 속에서 전자를 지지, 칼리파의 윤허 하에 출병하여 시리아를 별 저항 없이 접수했다. (878년) 디마슈크에서 아흐마드는 옛 정적이자 현지 아밀 (행정관)이던 이븐 알 무다비르의 재산을 압수한 후 감금하였다. 또한 그는 선대 통치자들을 기리는 의미로 무아위야 영묘 터를 방문한 후 그곳에 성소를 세웠다.

이후 아흐마드는 알레포와 안티오크의 저항을 일소한 후 킬리키아[55]와 자지라를 복속시켜 툴룬 왕조의 강역을 최대로 넓혔다. 하지만 882년 가을 알레포 태수 룰루가 조정에 귀순했고, 타르수스의 야자만 역시 자립하였다. 이에 아흐마드는 출정하였는데, 디마슈크에 이르러 급보를 받는다. 형 알 무와파크에 눌려 지내던 알 무타미드가 이집트로 탈출하려 한 것이다. 칼리파의 보호자로 정당성을 얻을 기대에 아흐마드는 진군을 멈추고 디마슈크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라크 서부의 하디싸에서 알 무타미드는 일행 중 튀르크 장군 이샤크의 반란으로 사마라로 송환되었다. 알 무와파크는 칼리파를 자신의 거점 와시트에 감금하곤 이샤크를 시리아와 이집트의 총독으로 선포했다. 그러자 아흐마드는 디마슈크에 울라마들을 모아 알 무와파크를 찬탈자로 규탄하고 그에 대한 지하드를 선언했다.[56]

다만 양측은 각자의 역내 사원들에서 상호 저주 외에 실제로 무력 충돌을 빚지는 않았고 알레포는 수복되었다. 그러던 884년 5월, 아흐마드가 실패한 타르수스 원정 후 사망하고 20살의 차남 쿠마라위야가 계승하며 상황은 급변했다. 알 무와파크는 협상 노선을 파기, 그해 여름 추가 파병 약속과 함께 이샤크와 무함마드 이븐 아불 사즈 휘하의 원정군을 파견했다. 이내 툴룬 왕조의 디마슈크 총독이 항복 의사를 밝혔고 안티오크와 알레포, 홈스가 점령되었다. 이에 쿠마라위야 역시 병력을 파견하였고, 그들은 전향한 총독을 축출하고 디마슈크를 접수했다. 샤이자르로 향해 진영을 차린 툴룬 군대는 무와파크의 아들 아불 압바스에게 증원된 압바스 군의 기습에 대패했다. 패잔병들은 디마슈크로 철수했는데, 압바스 군이 그곳으로 향해오자 더 남쪽의 라믈라로 도주했교, 아불 압바스는 디마슈크를 무혈 점령했다.(885년 2월)

병사들의 탄원에 쿠마라위야는 친정에 나서 라믈라에서 패잔병과 합류했다. 아불 압바스 역시 디마슈크에서 남하했는데 일선 사령관인 이샤크 및 무함마드가 신중론을 주장하자 그들을 겁쟁이라 매도했고, 분노한 장군들을 젊은 왕자를 두고 철수했다. 두 젊은 왕공들은 885년 4월 초엽, 라믈라 북쪽의 평원 앗 타와힌 (방앗간들)에서 맞섰다. 10배의 병력 차이에도 초반의 전투는 압바스 군의 압승이었고, 쿠마라위야는 당나귀를 타고 도주했다. 그 후 아불 압바스와 휘하 병력은 승리를 만끽하며 적진 약탈에 전념하였다. 그때 툴룬 군의 장교 사드 알 아이사르가 반격에 나서 적 장교들을 전사시키자 전황은 역전되었다. 놀란 아불 압바스 역시 도주했고, 역으로 그의 진영이 약탈되었다. 패잔병들은 디마슈크로 향했지만 주민들이 입성을 거부하였고, 타르수스를 거쳐 철수했다. 한편 승리를 이끈 사드는 디마슈크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쿠마라위야의 토벌군에 패하고 살해되었다.

쿠라마위야는 886년 압바스 조에 조공하는 대가로 휴전했고, 이후 자지라와 타르수스를 복속시켜 부왕의 강역을 회복하였다. 다음 칼리파 알 무타디드와도 우호를 유지하던 쿠마라위야가 896년 1월 암살당하며 툴룬 조의 미래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14세의 장남 자이쉬가 계승했으나 곧 살해되었고 동생 하룬이 옹립되었으나 정사는 재상들의 수중에 있었다. 이에 알 무타디드는 897년 타르수스를 수복했고, 하룬을 압박하여 홈스 이북의 시리아 할양 및 연공 증대[57]를 얻어냈다. 동시에 쉬아 베두인 세력인 카르마트가 팔미라에 거점을 두고 시리아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902년 12월, 라카에서 시리아 총독 투구즈를 격파한 카르마트 장군 자카르와이의 두 아들 야흐야와 후세인이 디마슈크를 포위했다. 툴룬 왕조의 원군은 패퇴하였지만 투구즈의 항전으로 야흐야가 전사하는 타격을 입은 카르마트는 조공을 대가로 주변 도시들을 약탈한 후 회군한다. (903년 7월)
2.3.4.2. 익시드 왕조
툴룬 조의 취약함과 달리 903년 칼리파 알 무크타피에 의해 파견된 무함마드 이븐 술레이만이 하마에서 카르마트 대군을 격파하며 사태는 일단락되었다.[58] 904년, 무함마드 휘하 압바스 군대는 시리아를 침공했다. 혼란에 지친 시리아의 도시들은 저항하지 않았고, 그해 12월 무능한 하룬은 숙부 샤이반의 쿠데타로 살해되었다. 이에 디마슈크의 투구즈가 원정군에 투항했다. 이후 샤이반 역시 푸스타트에서 농성하다가 905년 1월 항복하며 툴룬 왕조는 멸망한다. 그러나 디마슈크의 위기는 계속되었다. 906년 카르마트의 아부 가님 나스르가 바누 칼브를 선동해, 시리아 남부를 습격하고 도시를 공격했다. 그들은 수비대를 격파하고도 보급이 길어지자 티베리아스를 약탈하곤 철수하였다. 카르마트의 준동은 이듬해 장군 와시프가 카디시야에서 그 주력군을 괴멸시키며 최소한 시리아에서는 수그러들게 되었다.

압바스 조의 수복 후, 아흐마드 빈 카이글락이 디마슈크와 요르단 총독으로 봉해졌다.[59] 한편 전향의 대가로 알레포 태수로 봉해졌던 투구즈는 궁정 음모에 휘말려 옥사하였고, 그 아들 무함마드 역시 칼리파 알 무크타디르에 대한 쿠데타에 가담했다가 이집트로 도주한다. 현지 총독 타킨의 호감을 사 요르단 총독이 된 무함마드는 압바스 조의 권신 무니스가 파티마 왕조의 이집트 침공을 격퇴할 때에 전공을 세웠다. 928년 그는 정식으로 팔레스타인 총독이 되었고, 그곳의 알 라시디는 디마슈크로 전임되었다. 그리고 931년 실권을 장악한 무니스의 배려로 무함마드는 알 라시디와 임지를 바꿔 디마슈크 총독이 되었다. 933년 3월 이집트의 타킨이 어린 아들만을 남기고 사망하자 무니스가 장악한 조정은 무함마드를 이집트 총독으로 봉했다. 다만 그해 8월, 무니스를 죽이고 친정에 나선 칼리파 알 카히르는 환관 부쉬리를 시리아, 아흐마드 빈 카이글락을 이집트에 봉한다.[60]

이에 불복한 무함마드는 부쉬리를 공격해 사로잡았고, 싸움을 회피한 아흐마드와는 협상하여 각각 시리아와 이집트를 차지하는 것으로 타협하였다. 다만 935년 이집트에서 내분[61] 무함마드는 조정의 승인을 받아 수륙 양면으로 이집트를 장악했다.[62] 이후 파티마 조의 이집트 침공을 막은 공로로 무함마드의 지배는 칼리파의 공인을 받았고, 그의 익시드 왕조는 시리아와 타르수스까지 확장되었다.[63] 939년 가을 압바스 조의 권신 무함마드 빈 라이크가 침공, 시리아를 지나 남하하였다. 다만 펠루시움 (엘 파라마)에서의 전투 후 양측은 라믈라를 경계로 시리아를 분할하였다. 이로써 디마슈크는 다시 압바스 조의 지배 하에 놓였다. 이듬해 무함마드 빈 라이크는 재차 남하하였고, 엘 아리슈에서 익시드 군을 격파했다. 무함마드는 그를 기습하여 디마슈크로 몰아내었으나, 그를 추격하던 동생 후세인이 전사하였다. 이후 교착 상태에서 협상이 재개되었고, 양측의 결혼 동맹과 함께 조정에 대한 14만 디나르의 연공을 대가로 현상 유지에 합의하였다.

다만 942년 함단 왕조에 의해 무함마드 빈 라이크가 암살된 혼란을 틈타 무함마드는 그해 6월 시리아를 수복했다. 944년 칼리파 알 무타키 라카 피신과 함께 함단 & 익시드 조는 알레포를 두고 다투었는데 결국 그해 10월 전자의 알리가 승리한다. 이후 알리는 홈스에 이어 945년 2월, 디마슈크를 점령했다. 다만 시민들의 반발로 그는 축출되었고, 곧 친정에 나선 무함마드는 알리를 격파하고 기존 영토 유지를 대가로 그에게 연공을 납부하는 협정을 맺었다. 툴룬 조에 이어 이집트-시리아 왕조를 재건한 무함마드는 946년 7월 사망하였고 아들 우누주르가 계승하였다. 그 직후 알리는 재차 디마슈크를 점령했지만, 12월 익시드 조의 흑인 환관 출신 장군 카푸르의 반격으로 축출되었다. 이듬해 카푸르는 945년처럼 알레포까지 점령한다. 다만 그때처럼 시리아 남부에 만족하는 휴전을 맺었고, 이 경계는 향후 2세기간 시리아를 양분하게 되었다.[64]
2.3.4.3. 삼파전

966년 알리, 968년 카푸르의 사후 익시드 조는 내분과 흉년으로 혼란에 빠진다. 그 틈을 노려 968년, 카르마트 지도자 하산 알 아삼이 시리아를 침공해 디마슈크를 함락하였다. 카르마트는 그해 10월, 반격에 나선 팔레스타인 총독 하산을 격파하고 라믈라를 약탈한 후에야 철수한다.[65] 이듬해에는 이집트가 자우하르의 파티마 군에게 정복되었고, 팔레스타인의 하산은 라믈라에서 자우하르의 침공에 대비했으나, 카르마트가 재차 디마슈크를 공격했다. 또다시 패배한 하산은 30만 디나르의 연공을 대가로 휴전 및 결혼동맹을 맺었다.[66] 970년 봄, 자우하르의 부관 자파르 빈 팔라는 익시드-카르마트 군을 격파하고 하산을 사로잡았다. 이후 라믈라와 티베리아스가 점령되었고, 디마슈크 총독 샤믈 역시 항복했다. 그러나 베르베르 병사들이 주민 대표단을 홀대하고 절도를 범하자 여론은 분노했다.

디마슈크는 일종의 코뮌 (자치 정부)을 세우고 저항했고,[67] 민병대는 자파르가 파견한 선발대를 격파했다. 하지만 11월 자파르가 잔여 병력과 당도하자 민병대는 성안으로 후퇴, 곧 항복 의사를 밝혔다. 관용적이던 자우하르와 달리 자파르는 여성들이 먼지 속에 머리를 내리고 나오게 하는 등 모욕적인 조건을 내걸었고, 베르베르 부대는 3일간 시장 거리를 약탈하며 주민들과 충돌했다. 또한 보복으로 주민 대표 무함마드 이븐 아수다의 형제 등 유력 인사들이 처형되었고, 유사시를 대비해 시타델이 세워졌다.[68] 이후 자파르가 안티오크 원정에 나서자 카르마트의 하산 알 아삼이 재차 디마슈크를 공격했고, 무함마드 이븐 아수다와 부근 베두인들 및 기존 익시드 잔병들이 합류하였다. 자파르는 출격하여 사막에서 이들과 맞섰지만 패하고 전사했다. (971년 8월)[69]

25일 카라마트의 디마슈크 점령 후 사원에서는 (그들이 쉬아였음에도) 다시 압바스 칼리파의 이름이 예배에 언급되었고, 파티마 칼리파 알 무이즈가 저주되었다. 이듬해 하산은 카이로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었고, 바레인으로 철수했다. 973년, 알 무이즈의 카이로 당도와 함께 파티마 군은 재차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남부를 장악했으나 하산의 반격으로 축출된다. 이듬해에 하산은 재차 카이로를 공격했으나 자라흐 부족의 배신으로 또다시 패주했다. 한편 975년 초엽 부와이 왕조령 이라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한 알프타킨은 3백의 튀르크 병력과 시리아에 진입했다. 같은 시기 동로마의 중흥군주 요안니스 1세가 안티오크에서 남하하자, 세력이 약화되던 카르마트는 알프타킨에게 디마슈크를 맡겼다. 동로마, 파티마 조 모두를 꺼리던 주민들의 환영과 함께 그는 디마슈크를 접수했다. (975년 4월)

여름 무렵 홈스와 바알벡을 점령한 요안니스 1세가 다가오자 디마슈크의 민병대는 서북쪽 자바다니 고개 (바르다라 강의 상류)를 막았다. 단기전만을 고려하던 요안니스에게 이는 부담스러운 장애물이었고, 공격 대신 막대한 조공을 요구했다. 입지가 불안했던 알프타킨은 엄포에 겁을 먹었지만 액수가 지대했기에 대신 그에게 안내자를 대동한 관광을 제안했다. 제안을 수용한 요안니스는 소수의 근위대만 대동하고 3세기 전 제국이 상실한 도시를 둘러보았다. 만족한 것인지 요안니스는 병합을 포기, 약속대로 순순히 철수했다. 북방의 위협이 가시자 이번엔 남쪽의 파티마 조가 디마슈크를 노렸다. 976년 7월, 대장군 자우하르가 도시를 포위했다. 이에 시민들은 알프타킨을 도와 강하게 저항했다.

이듬해 1월, 하산의 카르마트 원군이 접근하자 자우하르는 철수했고 알프타킨과 하산은 추격에 나섰다.[70] 연합군의 아슈칼론 포위가 장기화되던 978년 4월, 자우하르는 알프타킨이 파티마 칼리파를 정통으로 인정하는 대가로 가자 북쪽의 영토를 넘겨주는 휴전을 체결했다.[71] 다만 알프타킨의 세력 확대에 반대한 알 아지즈는 대군과 함께 친정하였다. 앗 타와힌 전장인 라믈라 부근에서 양측은 격돌했다. 초반 파티마 측 좌익을 맹공하며 기세를 올렸던 아프타킨은 중앙 전열이 붕괴하자 2만의 전사자를 남긴채 패주했다. 사막을 떠돌던 그는 과거의 동맹이던 팔레스타인의 자라흐 부족에게 구출되었는데, 그들은 며칠후 10만 디나르를 받고 그를 알 아지즈에게 넘겼다. (978년 8월) [72]
2.3.4.4. 파티마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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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후반 대사원 북쪽에 세워진 신부의 미나레트 파티마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의 디나르 금화

카르마트가 떠난 후에도 디마슈크는 파티마 조의 베르베르 군대를 거부했고, 알프타킨의 부관 카셈이 여론과 민병대의 지지를 받아 집권했다. 이에 파티마 장군 알 파들 빈 살리흐가 진군했지만 무력시위만 하고 회군했다. 979년[73]에는 술레이만 빈 자파르[74]가 재차 원정했지만 실패했다. 이에 알 파들은 자라흐 부족을 지원했고, 그들은 본거지 라믈라를 벗어나 시리아 남부를 계속 약탈했다. 디마슈크의 교외 곡창 지대인 구타와 하우란이 황폐화되었고, 도시는 기근에 시달렸다. 때때로 함단령 홈스[75]에서 오는 식량만이 상황을 일시 호전시켰다. 981년, 파티마 조는 이번엔 베르베르계가 아닌 알프타킨의 전 장교 발타킨을 사령관으로 삼아 디마슈크를 봉쇄했다. 한편 파티마 조의 견제에 불만을 품은 자라흐 부족이 봉기, 포위군을 공격했다가 토벌되었다.[76] 포위를 견디던 카셈은 983년 초엽, 관직을 대가로 항복하였다. 마침내 12년 만에 디마슈크는 파티마 제국령이 되었다.[77]

이후 함단령 홈스의 바크주르도 파티마 조로 귀순했는데, 함단 조가 불러온 동로마 군에게 축출되었다. 알 아지즈는 현지 여론과 재상 야쿱의 반대에도 바크주르의 요청대로 그를 디마슈크 총독에 봉했다. (983년 12월) 얼마 후인 985년, 도시를 방문한 팔레스타인 출신 여행가 알 마크디시는 도시의 위대함과 동시에 옛 영광이 바랜 모습을 모두 묘사했다.[78] 바크주르는 공포 정치를 행했고, 987년 야쿱의 사주로 일어난 봉기를 진압한 후 반대파를 학살했다. 결국 988년 봄, 야쿱에게 설득된 알 아지즈는 바크주르의 해임을 선포하곤 무니스 휘하의 토벌군을 파견했다. 바크주르는 두 달간 게릴라로 싸웠지만 도시 동남쪽 다리야에서 패배했다. 좌절한 그는 사면과 거취의 자유를 보장받은 후 라카로 떠났다. (988년 10월 29일)[79] 이후 야쿱의 굴람 (맘루크) 앗 시클라비가 총독으로 부임했다. 991년 야쿱의 사후에는 튀르크 장군 만주타킨이 부임했고, 그가 두 차례 알레포를 포위할 시에 디마슈크는 후방 보급 기지 역할을 하였다.[80]

996년 알 아지즈 사후, 어린 알 하킴의 즉위와 함께 군부의 튀르크-베르베르 파벌 간에 내전이 터지자[81] 만주타킨은 이집트로 남하했고, 술레이만 빈 자파르 휘하 베르베르 군단이 북상하였다. 양측은 전례대로 라믈라 부근에서 맞섰는데, 만주타킨은 패하고 사로잡혔다.[82] 그 직후 자라흐 부족이 라믈라를 공격했으나 임시 디마슈크 총독 자이쉬 이븐 삼사마가 격퇴했다. 한편 승리한 술레이만은 디마슈크로 향하여 스스로 총독이 되었고, 주민들은 또다시 베르베르 병사들의 출몰에 반발했다. 또한 대다수가 순니이던 주민들의 쉬아 지배에 대한 거부감은 불만을 증폭시켰다. 이러한 불온적인 기류에 대해 파티마 조정은 잔혹히 대응했다. 998년 수백명에 달하는 디마슈크의 반파티마 계열 지도자들이 총독 관저의 하맘 (목욕탕)에 초청되었다. 그들은 당국을 신뢰하지 않았지만 응하지 않을 경우의 처벌을 두려워 그곳으로 향하였고, 대기하고 있던 베르베르 주둔군에게 학살되었다.

한편 파티마 조의 사면과 반란을 지속하던 자라흐 부족은 11세기 초엽 세력이 가장 컸다. 1011년, 숙청당한 재상의 아들 아불 카심 후세인의 선동으로 자라흐 부족은 재차 봉기하였다. 이에 알 하킴은 튀르크 장군 야루크를 디마슈크 총독으로 봉하여 파견했지만 그는 자라흐 부족의 기습으로 가자에서 붙잡혀 처형되었다. 1012년 7월 그들은 메카 샤리프 하산을 칼리파로 옹립하는 등 기세를 올렸지만, 알 하킴의 뇌물과 1013년의 토벌로 진압되었다.[83] 1021년 알 하킴의 실종과 함께 파티마 조의 쇠퇴가 시작되었다.

1024년 레반트 남부[84]의 베두인들은 자라흐 부족을 중심으로 대반란을 일으켰고, 1028년 이를 진압한 튀르크 장군 아누슈테킨이 시리아 총독으로 봉해졌다. 아누슈테킨은 약 15년간 디마슈크를 다스리며 주민들의 호감을 얻었고 1038년에는 미르다스 왕조령 알레포를 점령, 일시적으로 시리아를 통일했다. 그러나 그의 세력 확대를 경계한 파티마 조의 재상 알리의 사주로 1041년 디마슈크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아누슈테킨은 축출되었고, 이듬해 그는 알레포에서 병사하였다. 그의 후임으로 부임한 함단 왕족 출신의 나스르 앗 다울라[85]는 1048년 알레포 원정에 실패한 후 흑인 환관 출신 리파크로 교체되었다. 다만 그 역시 이듬해 알레포 원정에 실패하고 사망하였다. 이후 디마슈크는 한동안 역사 기록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2.3.5. 십자군 전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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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마슈크 시타델과 대사원

1062년부터 이집트에서 내전이 터지며 파티마 조는 급속히 쇠퇴하였다. 이듬해 4월, 아르메니아계 맘루크 바드르 알 자말리가 디마슈크의 왈리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도시 서남쪽 교외인 알 미자 (카르프 수사)에 관저를 세웠다. 비록 바드르의 군대가 알리 가문의 아부 타히르 하이다라가 이끄는 민병대와 충돌한 후 그는 해임되었지만, 1066년 7월 재차 임명되었다. 바드르는 이번엔 밥 알 하디드 (북서문) 밖의 카스르 앗 술타나에 궁전을 세웠다. 같은해 압둘 샤라프 이븐 아불 자닌이 자라흐 부족과 디마슈크를 공격하였지만 격퇴되었다. 1068년에는 하이다라가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진압되었지만 바드르의 궁전과 대사원의 북쪽 회랑과 돔이 전소되는 피해를 입었다. 그러던 1070년, 알 무스탄시르의 소환에 나시르 앗 다울라를 축출하고 카이로를 안정시킨 바드르는 아크레로 거점을 옮겨 티레와 트리폴리 등 도시국가써 자립한 레반트 해안에 대한 재정복에 나섰다.

바드르가 떠난 사이에 나시르 앗 다울라는 재차 카이로를 장악하였고, 디마슈크 총독 무알라 이븐 하이다르 역시 자립하였다. 알 무스탄시르의 탄원으로 재차 이집트로 향한 바드르는 튀르크 군벌들을 숙청하고 전권을 장악하였다. (1074년) 한편 셀주크 제국에서 축출된 호라즘 출신 튀르크 무장 아트시즈 이븐 우바크는 파티마 조의 혼란을 틈타 1071년부터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상태였는데, 1076년 디마슈크를 장악하였다. 그는 성 북서쪽에 시타델 건설을 시작하였다. 1076-77년 아트시즈는 이집트 공격에 나섰지만, 지하드를 선포하며 반격에 나선 바드르에게 격퇴되었다.[86] 이후 바드르는 1077년과 1078년에 디마슈크를 포위하였다. 그의 부관 나스르 앗 다울라가 지휘한 후자의 포위는 아트시즈의 요청을 수용한 셀주크 왕공 투투쉬의 남하로 풀렸다. (1078년 10월 10일) 이후 디마슈크에 입성한 투투쉬는 이내 아트시즈를 투옥 후 교살하곤 자신이 도시를 차지하였다.

투투쉬는 디마슈크를 수도로 삼았고 아트시즈가 삽을 뜬 시타델 (칼라)을 완성시켜 거주하였다. 자신만의 국가를 세우려는 야먕과 함께 투투쉬는 디마슈크를 수도로 여기고 관심을 보였다. 1082년 그의 지시에 의해 13년 전 화재로 훼손되었던 대사원이 돔이 복원되었고, 이후 8세기간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외에 대사원의 기둥과 벽면의 모자이크 역시 보완되었다. 1086년 5월, 투투쉬는 우카일 왕조가 철수한 알레포를 접수하였는데 형인 술탄 말리크샤 1세가 남하하자 그해 10월 디마슈크로 회군하였다. 1092년 11월, 말리크샤가 사망하자 셀주크 제국은 내전으로 치닫았다. 술탄을 칭한 투투쉬는 1094년 북진해 재차 알레포를 점령하고 이듬해 이란으로 진격하였으나 바르키야루크에게 패하고 전사하였다. 그후 투투쉬의 장남 리드완은 알레포에서 동생들을 암살하고 시리아를 독차지하려 했는데, 셋째 동생 샴스 알 물크 두카크가 탈출하여 디마슈크에서 자립하였다.
2.3.5.1. 디마슈크 셀주크
이후 두카크와 리드완은 시리아의 패권을 두고 내전을 벌였다. 시리아의 영주들은 둘 사이에서 동맹과 배신을 반복하였다. 그러던 서유럽에서는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한편 1097년 초엽, 리드완이 자신을 배신한 야기 시얀의 안티오크를 공격하자 두카크는 후자의 구원에 나섰다. 그러자 리드완은 역으로 디마슈크를 포위했으나 실패하였고, 두카크의 북진에 야기 시얀과 리드완이 재차 연합하는 등 시리아의 혼란은 극에 달하였다. 그해 10월 1차 십자군이 시리아에 진입하여 안티오크를 포위한 후에야 일시적으로 내전이 멈추었다. 두달 후 두카크는 재차 안티오크 구원에 나섰으나 보에몽에게 격퇴된 후 하마로 철수하였다.[87] [88] 따라서 구원은 실패하였고 1098년 6월 안티오크는 함락되었다.

학살로 점철된 안티오크의 비극과 달리 디마슈크는 이 시기에 중요성을 회복하였다. 두카크는 1097년 도시의 첫 비마리스탄 (종합병원), 1098년 사르디예 마드라사를 세웠다. 한편 1099년 7월,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유혈 점령하자 피난민들은 디마슈크로 몰려들었다. 이에 카디 알 하라위는 그들을 이끌고 바그다드로 향하여 칼리파 궁전에서 지하드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으나 무위에 그쳤다. 여론을 의식한 두카크는 이듬해부터 '지하드'에 나섰고[89], 시리아 영주 중 처음으로 십자군에게 작으나마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1100년 5월) 다만 그 다음달 반격에 나선 십자군 영주 탕크레드가 디마슈크 일대를 약탈하자 두카크는 재물을 주어 무마시키려 하였다. 이에 탕크레드는 사절을 보내 기독교 개종 혹은 도시 할양의 모욕적인 답변을 주었는데, 분노한 두카크는 역으로 사절단에 개종 혹은 죽음의 선택을 강권했다.[90]

이로써 협상이 결렬되자 약탈은 10여일간 이어져 도시 일대의 농경지는 황폐화되었고, 골란 고원의 영주들은 예루살렘 왕국에 조공하기 시작하였다. 1100년 말엽, 두카크는 보두앵 1세 일행을 급습해으나 트리폴리 아미르의 배신으로 실패했다.[91] 이후 보두앵이 요단강을 넘어 약탈전에 나서자, 두카크는 5만 베잔트를 납부하고 이전 전투의 포로 석방을 제안하곤 침묵했다. 1101년에는 자블라가 복속해오자 두카크는 부리를 퍼견했으나 결국 도시는 트리폴리 령이 되었다.[92] [93] 1102년, 두카크는 십자군에 포위된 트리폴리 구원에 나섰으나 돌연 회군하며 복수했다.[94] 결국 양측의 연이은 배신은 예루살렘 왕국의 정착과 트리폴리 백국의 성립이란 결과로 이어졌다.
2.3.5.2. 부리 왕조
1103년 5월, 지하드에 앞장서던 홈스의 자나 앗 다울라가 아사신에 암살당하자 두카크는 부관 툭테긴을 파견해 도시를 접수했다. 이로써 그는 시리아 최고의 아미르가 되었으나, 1104년 몸져누웠고 모친의 조언에 따라 자신의 아타베그였던 툭테긴을 어린 아들 투투쉬 2세의 아타베그로 지목한 후 그해 6월 사망하였다. 툭테긴은 두카크의 과부와 결혼, 정당성을 확보한 후 전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투투쉬가 반발하자 툭테긴은 그를 폐위시키고 동생인 11세의 이르타쉬를 옹립했는데, 그마저도 축출하고 자신이 아미르로 등극했다. (1105년 4월) 이르타쉬는 보스라 영주 알 아이테킨에게 의탁, 복위를 시도하나 실패 후 보두앵의 궁정으로 망명했다. 툭테긴은 정당성 강화를 위해 지하드에 나섰고, 요르단 약탈 후 귀환하던 갈릴리 공 위그를 기습해 전사시켰다.[95]

그후 툭테긴은 파티마 군의 3차 라믈라 전투에 원군을 보내고, 토론 성채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자 보두앵과 휴전을 맺었다.[96]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디마슈크의 이론가 알리 이븐 타히르 앗 살라미가 '키타브 알 지하드'를 저술하여 십자군에 대한 무슬림 지식인의 입장을 드러내었다.[97] 1108년 5월, 툭테긴은 또 요르단을 약탈한 후 귀환하던 갈릴리 공 제르바제를 사로잡아 처형했다.[98] 그리고 툭테긴은 은퇴를 결심한 파크르 알 물크의 호의로 아르카 영주의 복속을 받았다.[99] 같은해 12월, 툭테긴은 요르단의 세금 1/3을 바치는 조건으로 보두앵과 휴전을 맺었다. 다만 이듬해 트리폴리 백작 기욤이 부카이아 고개를 지나던 툭테긴을 매복해 격파하고 아르카를 점령하였다. 1110년 4월, 툭테긴은 바알벡의 영주 귀무슈테킨이 십자군에 항복하려 하자 도시를 병합해, 아들 부리를 태수로 봉했다.

다만 9월엔 보두앵의 협박에 디마슈크의 양곡 1/3을 바쳤다. 그해 12월 포위 끝에 시돈이 십자군에 항복하자 툭테긴은 포로가 된 주민들의 몸값을 대주었고, 일부는 디마슈크에 정착하였다.[100] 1111년 말엽, 십자군이 티레를 포위하자 툭테긴은 요청대로 500명의 궁수를 용병으로 보내주었다.[101] 포위가 개시 후 티레가 복속, 원군을 청하자 툭테긴은 친정하였고 십자군 진영을 포위하여 수비대의 승리를 도왔다. (1112년 4월) 이듬해 6월, 툭테긴은 마우두드와 연합해 티베리아스 근처 앗 산나브라 전투에서 보두앵을 격파했다.[102] 그후 마우두드는 9월 툭테긴의 초청으로 디마슈크에 주둔했는데, 재차 출정하기 전날인 10월 2일에 대사원에서 기도를 마친 마우두드는 툭테긴과 걷던 중 군중 속에서 나타난 자객에게 찔려 중상을 입었다. 이로써 원정은 취소되었고, 마우두드는 1114년 3월에 사망했다. 툭테긴은 아사신을 탓했지만, 여론은 새 영웅을 경계한 툭테긴의 소행이라고 여겼다.[103]

비난 상쇄를 위해 툭테긴은 알레포의 알프 아르슬란을 도시로 초청하여 대십자군 동맹을 맺었다. 비록 9월 후자가 암살됐지만 새 군주 룰루와 동맹을 유지했고, 마르딘의 일가지 역시 초청해 동맹을 맺었다.[104] 다만 곧 안티오크 공 로제르를 더하여 반 술탄 연합으로 전환시켰다.[105] 다만 사르민 전투 후 십자군이 너무 강력해졌다고 여긴 툭테긴은 1116년 4월 바드다드를 방문해 술탄에 용서를 빌었고, 디마슈크와 홈스의 통치자로 책봉받았다. 그후 부르수크와 트리폴리 백작 퐁스를 격파했지만 이듬해 부르수크, 1118년에는 술탄이 연달아 사망하며 셀주크측 개입은 끊겼다. 따라서 툭테긴은 알레포의 일가지, 샤이자르의 문키드 조와 대십자군 동맹을 맺었다. 1119년 6월, 킨나스린에서 모인 연합군은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에서 안티오크 공 로제르를 전사시켰다.[106] 다만 보두앵 2세[107]의 반격으로 안티오크 점령은 실패한다.
2.3.5.2.1. 십자군의 위협과 동맹
세상의 보화는 10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9가 다마스쿠스에 있다.
ㅡ 12세기 아슈아리 학파의 하디스 학자 이븐 아사키르[108]

연합군은 이후 기세를 활용하지 못했고[109], 1123년 툭테긴은 파티마 조로부터 티레를 넘겨 받았으나 알레포의 발라크가 급사하는 등의 악재로 이듬해 십자군에 넘겨주고 만다.[110] 1125년 6월, 툭테긴은 알레포의 새 영주 알 보르소키와 함께 아자즈 전투를 치렀으나 패배하였다. 보복으로 그해 10월 디마슈크를 습격한 보두앵은 이듬해 도시에 대한 직접 공격에 나섰다. 1126년 1월 16일에 요단강을 건넌 보두앵은 사도 바울의 개종일을 이틀 남긴 23일, 바울의 개종 장소로 알려진 디마슈크 남쪽의 마르즈 앗 사파르에 당도하여 진영을 세웠다. 다음날 툭테긴 역시 홈스의 아사신을 포함한 군대와 당도하였고, 양측은 26일 격돌하였다. 결과는 디마슈크 측에 유리한 무승부였는데, 다만 툭테긴이 낙마했다는 소문에 군대가 철수하며 추격하지는 못하였다.[111] 이후 도움의 대가로 아사신에게 바니아스가 할양되었다.

1128년 2월, 툭테긴은 약 70이 넘는 고령으로 사망하고 아들 타즈 알 물크 부리가 계승하였다. 한편 보두앵 2세는 디마슈크 정복을 위해 서유럽에서 십자군을 모집한 결과, 1129년 5월 그의 사위인 풀크 등의 병력이 당도하였다. 그해 9월 말, 부리가 친아사신 재상 알 마즈다가니를 처형한 것을 계기로 다마스쿠스에서 반아사신 민중 봉기가 일어나 시내의 모든 아사신 일파가 학살되었다. 그후 바니아스의 아사신이 보두앵에 항복하자, 그는 십자군 연합군[112]을 꾸려 바니아스를 접수한 후 디마슈크로 진군했다. 1129년 11월, 부리 역시 출정하여 도시 남쪽 10km 의 다리에서 십자군과 대치하였다. 한달 후 그는 십자군이 약탈로 분산된 틈에 공격하여 승리하였고, 이후 폭풍이 불자 그들은 철수하였다.[113] 1130년, 부리는 알레포의 장기와 동맹을 맺었으나 오히려 하마, 홈스가 공격을 당했다.[114] 1131년 5월 부리는 호위대로 위장 취업한 아사신에게 찔려 중상을 입는다.

그해 10월, 포로가 된 베두인 군벌 두바이스와 장기의 인질이된 아들 세비츠를 교환한 부리는 1132년 6월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하였고, 장남 샴스 알 물크 이스마일이 계승하였다. 보두앵 사후 예루살렘 왕국이 내전에 빠지자 그는 12월에 바니아스를 점령, 디마슈크의 안전을 확보했다. 하지만 태후 주무르드와 대립하던 이스마일은 전자의 애인인 전 와지르 유수프를 죽이려 하였는데, 그녀에게 저지되었다. 그리고 1134년 암살 위협을 받은 후 살카드 성채로 피신한 이스마일은 이듬해 1월 알장기에게 디마슈크 할양을 제안하며 보호를 청하였다. 이에 장기는 남하하였으나 다다르기 전에 주무르드는 이스마일을 죽이고 동생 시하브 앗 딘 마흐무드를 옹립하였다. 1135년 2월 4일, 구타 평원에 당도한 장기는 디마슈크를 포위하였는데 장군 우누르의 저항과 압바스 칼리파 알 무스타르시드의 만류로 다음달 철수하였다.

1136년 맘루크 출신의 바르자와쉬가 대낮에 광장에서 유수프를 죽이고 실권을 장악했다. 정당성 확보를 위해 지하드에 나선 그는 이듬해 3월 트리폴리를 공격, 백작 퐁스를 사로잡아 처형했다.[115] 그러나 1138년 5월 바르자와쉬 역시 암살되었고, 이 틈에 장기가 재차 남하하자 주무르드는 그에게 청혼했다. 8월의 결혼식 후 지참금으로 홈스를 얻은 장기는 회군했다. 1139년 6월 마흐무드가 암살되자 전 홈스 태수 우누르가 그 이복동생 자말 앗 딘 무함마드를 옹립, 그의 모친과 결혼해 정권을 장악했다.[116] 그후 주무르드의 요청으로 장기는 재차 남하했는데, 바알벡 함락 시의 잔혹함 때문에 12월 그가 디마슈크를 봉쇄하자 주민들은 결사 항전을 결의한다.[117] 1140년 우누르는 연공과 바니아스 할양을 대가로 십자군과 동맹했고, 같은해 3월 무함마드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무지르 앗 딘 아바크를 옹립했다. 십자군과 우누르가 바니아스에서 합세하자 바알벡으로 후퇴했던 장기는 전자가 철수하자 6월에 디마슈크를 포위, 아바크로부터 자신을 쿠트바에 언급하는 형식적인 복종을 얻은 후 회군했다.
2.3.5.2.2. 2차 십자군 누르 앗 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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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십자군과 디마슈크 공격

이후 지하드에 열중하던 장기는 1144년 에데사를 정복하며 이슬람의 영웅이 되었지만 1146년 9월 암살되었다. 암살범 환관 야란카슈는 디마슈크로 피신했지만 우누르는 그를 체포해 장기의 아들들에게 보내주었다.[118] 한편 1147년 2월, 십자군이 우누르에 반기를 든 보스라와 살카드의 영주 알툰타쉬를 돕기로 하며 양측의 동맹은 흔들렸다.[119] 그해 5월, 우누르는 디마슈크를 찾아온 십자군 사절을 설득하였고 그가 다시 보두앵 3세 등을 설득하며 원정 무산이 보였지만 결국 강경파의 반발로 강행되었다. 분노한 알레포의 누르 앗 딘(일명 누레딘)에게 딸과의 결혼 및 하마 반환을 조건으로 도움을 청했다. 우선 우누르는 살카드를 항복시켰고, 6월 누레딘이 당도하자 보스라[120] 역시 항복하였다. 그리고 십자군 역시 철수하였는데, 누레딘의 명성 확대를 우려한 우누르는 추격을 하지 않았다.

한편 에데사 함락으로 결성된 2차 십자군은 1148년 아크레에 도착, 6월 전략회의에서 '성서의 도시' 디마슈크 공격을 결의하였다. 다음달 십자군이 다가오자 우누르는 알레포의 누레딘과 모술의 사이프 앗 딘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이에 전자는 자신 군대의 시내 주둔권을 요구했다. 7월 23일 디마슈크 서쪽 다라이야에 당도한 십자군은 과수원에서 나무를 징발해 공성 병기를 만들었다. 다음날 그들은 수비대를 격파하고 밥 파르디스 (북서문)과 밥 자비야 (서문)를 공격했다. 이에 주민들은 두려워하며 길거리에 바리케이드를 세웠다.[121] 25일에 디마슈크 민병대가 반격에 나섰는데, 71세의 원로 학자 유수프 알 핀달라위와 수피 알 할히 등이 전사하였다. 이후 십자군은 서남쪽 바라메크 초지에 진영을 세웠다. 26일에 수비대는 격전 끝에 성 북쪽의 포위군을 몰아냈고, 이후 북문을 통해 모술의 원군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무렵, 도시의 주인을 놓고 논쟁하던 십자군은 다음날 진영을 더 약하다고 판단한 남쪽으로 옮겼는데[122], 서쪽의 초지와 달리 남쪽의 황무지에서 십자군은 갈증에 시달렸다. 그러던 28일에 누레딘과 사이프 앗 딘이 홈스에 당도했다는 소식에 십자군 지도부는 철수하였고 튀르크 기병대는 이들을 추격하며 화살을 날렸다. 이후 십자군 제후들은 서로를 탓하며 각자 귀국하였다.[123] 1149년 6월, 우누르는 누레딘과 이나브 전투에서 안티오크-아사신 연합군을 격파했고 공작 레몽을 전사시켰다. 그후 디마슈크로 귀환한 우누르는 폭식한 후 와병하여 8월 28일 사망하였고, 어린 군주 아바크가 친정하였다. 이에 1150년 3월, 누르 앗 딘은 디마슈크로 진군했으나 아바크의 요청으로 보두앵 3세가 접근해오자 철수했다. 1151년 보스라가 복속하자 누레딘은 그해 5월 재차 디마슈크를 포위했으나 역시 보두앵의 개입으로 포기했다.

이후 아바크는 보두앵의 막사를 방문, 십자군의 시내 바자르 출입을 허가했다. 다만 보두앵의 회군 후, 보스라 회복을 대가로[124] 아바크는 알레포로 향하여 공식적으로 누레딘과 동맹을 체결했다. 1152년에는 마르딘의 티마르타슈가 디마슈크에 당도, 막 내분을 수습한 예루살렘 공격을 제안하였다. 다만 아바크는 그에게 보급품만을 판매하고 참전을 거부, 더 나아가 만류했다. 이후 티무르타슈는 격퇴당하고 이듬해 사망한다. 1153년, 누르 앗 딘은 아바크에 우누르가 십자군에 넘겼던 바니아스에 대한 협공을 제안했다. 하지만 아바크는 이를 거절한 것을 넘어 보두앵에게 조공을 바쳤다. 이에 디마슈크의 여론은 들끓었다. 마침 근처에 있던 누레딘의 신하 아이유브는 아바크에 이슬람을 배신한 자라는 프레임을 씌워 여론전을 이어갔다.

그후 누레딘이 디마슈크를 봉쇄, 물가가 상승하자 여론은 그것 역시 아바크의 탓으로 돌렸다. 초조해져 가던 아바크는 소문만을 믿고 충성하던 장군들을 반역 혐의로 몰아 숙청했고, 이로써 군부의 지지마저 잃었다. 마침내 1154년 4월, 누레딘은 부관 시르쿠에게 군대를 주어 디마슈크에 사절로 파견하였다. 아바크가 그의 입성을 거부하자 이를 모욕으로 여긴 누레딘은 다시 남하하여 디마슈크를 포위하였다. 아바크는 재차 보두앵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그전인 4월 25일, 일주일의 포위 끝에 주민들이[125] 밥 샤르키 (동문)를 열어 누레딘을 맞았다. 그날 저녁 아바크는 시타델에서 나와 항복하였고, 보상으로 홈스가 주어졌다.[126] 누레딘은 여론전을 수행한 아이유브를 디마슈크 및 바알벡 총독으로 봉하고 알레포로 돌아갔다.
2.3.5.3. 장기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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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7년 조성된 누르 앗딘 마드라사 & 영묘

지하드를 앞세웠지만 누레딘 역시 현실주의자였다. 막 정복된 디마슈크의 안정을 위해 그는 아바크가 보두앵에게 납부하던 8천 두카트의 연공 지속을 대가로 휴전을 연장했다. (1156년) 이듬해 10월 누르 앗 딘은 중병에 걸리자 부관 시르쿠를 디마슈크 총독으로 봉했는데 서서히 회복했다. 그 틈을 노린 보두앵은 1158년 4월 1일 디마슈크에 접근, 외곽의 다라이야 요새를 공격했다. 누레딘은 완치되지 않은 몸으로 6일만에 원군을 데려왔고, 이에 십자군은 철수하였다. 두달 후 그는 요르단의 십자군 성채 하비스를 포위했는데, 보두앵이 재차 디마슈크로 진격해오자 철수하였다. 그러던 1163년 부카이아 전투에서 패배한 누르 앗 딘은 홈스에서 알레포, 디마슈크의 물자를 공수한 후 생존자 및 전사자 유족들에게 나눠주며 재정비하였다.

1163년부터 이집트를 두고 십자군과 장기 왕조는 경쟁했교, 1164년 4월 시르쿠가 원정군을 이끌고 디마슈크를 떠나 남하하였다. 같은해 누레딘은 예루살렘 국왕 아모리의 부재를 틈타 하림 전투에서 십자군을 격파하고 10월 바니아스를 점령, 디마슈크의 안전을 확보했다. 이후 그는 디마슈크에 지속적으로 머물며 사실상의 수도로 삼았다. 전 총독 아이유브의 아들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살라딘) 역시 그곳에 거주하며 과학, 법학, 신학 등을 공부하였다. 1168년에는 베이루트에 머물던 동로마 황족 안드로니코스가 친척이자 아모리의 전 부인 테오도라와 함께 일시적으로 망명하여 디마슈크에서 6년간 머물기도 하였다.[127] 같은해 십자군의 공격에 직면한 파티마 칼리파 알 아디드가 친서를 보내 도움을 청하자 누레딘은 살라딘을 홈스로 보내 그 숙부인 시르쿠를 소환하였다.

다만 이미 디마슈크로 향하던 시르쿠와 곧 마주친 살라딘은 지난 원정의 고초르 반복하고 싶지 않아 숙부의 종군 제안을 꺼렸지만 누레딘의 지시로 결국 합류하였다. 1169년 시르쿠와 살라딘은 이집트를 장악했고, 같은해 전자가 사망하며 살라딘은 파티마 조의 재상이자 실권자가 되었다. 카이로의 살라딘과 디마슈크의 누르 앗 딘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점차 전자가 내우외환을 이겨내고 권력을 공고히 하자 상호 불신이 생겼다.[128] 1173년 양측을 중재하던 아이유브가 사망하고 누레딘이 조공의 양을 문제삼으며 관계는 악화되었다. 이후 이집트 원정을 준비하던 누레딘은 1174년 5월 15일 디마슈크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11세 아들 앗 살리흐가 이스마일이 계승했는데, 디마슈크 총독 이븐 알 무카담이 그를 '보호'한다며 도시에 붙들어 놓고는 알레포 총독 귀무슈테킨과 섭정권을 두고 대립하였다.

기회를 노리던 아모리는 그해 6월 디마슈크를 노리고 바니아스로 진격하였다. 이에 이븐 알 무카담은 디마슈크의 십자군 포로 전원 석방 및 대살라딘 동맹을 제안했다. 바니아스에서 몸져누운 아모리는 그 제안을 수용하고 철수하여 다음달 사망하였다. 한편 여름 무렵 이스마일은 디마슈크를 떠나 알레포의 귀무슈테킨에 합류하였다. 그들의 공격을 우려한 이븐 알 무카담은 살라딘에게 도움을 청했다.[129] 시칠리아 십자군 및 내부 반란을 정리하던 살라딘은 사태가 진정되자 불과 700명의 기병만을 이끌고 북상했다. (10월 말엽) 보스라를 접수한 그는 11월 23일 디마슈크에 당도, 주민들의 환영과 함께 입성했다. 살라딘은 청년기를 보낸 옛 집에 머물렀고, 4일 후 시타델의 수비대장 라이한이 항복했다. 이에 살라딘은 시타델 포위를 맡았던 동생 툭테긴을 디마슈크 총독으로 봉하고 시리아 통일을 위해 북상했다. 한편 그해 대사원 북부에 화재가 났으나 살라딘의 후원으로 곧 복구되었다.
2.3.5.4. 아이유브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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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성벽과 살라흐 앗 딘의 동상

1175년 초엽, 살라딘은 십자군의 개입으로 알레포 포위를 풀었다. 다만 4월에 그는 모술의 군대를 격파한 후 앗 살리흐로부터 알레포를 제외한 시리아의 통치권을 인정받은 후 '시리아와 이집트의 왕'이라 칭하며 5월 디마슈크로 돌아왔다. 이듬해 살라딘은 우누르의 딸이자 누레딘의 과부 이스마트 앗 딘 카툰[130]과 결혼했다. 그해 4월, 북상한 그는 재차 모술 군대를 격파했고 다음달 칼리파 알 무스타디로부터 술탄으로 책봉되었다.[131] 1176년 9월부터 1181년 5월까지 그가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먼저 동생 투란샤가 디마슈크를 맡았는데, 그는 실정으로 1178년 조카 파루크샤로 대체되었다. 이듬해 파루크샤는 예루살렘 왕국의 원수 음프헤 2세를 전사시키는[132] 공을 세웠고 베이루트 일대까지 습격하였다. 이에 십자군이 반격하였으나 마르즈 아이윤 전투에서 파루크샤를 지원하러 온 살라딘에게 패배했다. 이때 많은 포로가 디마슈크에 수용되었는데, 그중 템플기사단장 오도는 석방 협상을 거부하고 그곳에서 옥사하였다.[133]

1182년 7월, 지하드에서 활약하던 파루크샤는 디마슈크에서 사망했다. 그러자 12월 레몽이 보스라, 보두앵 4세가 디마슈크로 진군했으나 후자의 병세 악화로 철수하였다.[134] 그리고 1183년 마침내 알레포를 정복한 살라딘은 8월 24일 디마슈크로 개선했다.[135] 1186년 모술의 복속까지 얻어낸 살라딘은 그해 말엽 르노가 재차 무슬림 순례단을 공격하자 휴전 파기를 선언하였다. 이윽고 이집트에서 이라크에 이르는 제후들을 소환한 그는 1187년 3월 17일 디마슈크에서 출정하였다. 그해 7월 벌어진 하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살라딘은 팔레스타인 대부분을 정복하였다. 디마슈크는 십자군 포로들로 북적거렸고, 세달 후 예루살렘이 탈환되자 디마슈크의 카디 무히 앗 딘 이븐 알 자키가 알 아크사에서 금요 예배를 인도하였다. 살라딘은 1188년 5월 약 1년만에 디마슈크로 돌아왔는데 같은달 재차 출정하여 트리폴리-안티오크 일대를 원정하고 1189년 3월에야 돌아왔다. 한달의 휴식 후 이번엔 보포르 성채 공격에 나선 그는 항복을 번복한 영주 르노 그라니어를 8월 디마슈크에 감금했다.[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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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의 살라흐 앗 딘 영묘

그후 아크레 포위전과 함께 3차 십자군이 당도했다. 1년 넘게 싸운 후 리처드 1세와 휴전을 맺은 살라딘은 1192년 11월 4일 디마슈크에 개선했다. 급속히 쇠약해진 그는 아미르들을 모아 장남 알 아프달 알리에게 충성 서약을 시킨 후 1193년 3월 4일 사망했다. 이후 세 아들들이 제국을 분할 상속했는데, 알 아프달이 디마슈크를 중심으로 술탄위를 이어받았다. 한편 살라딘의 동생 알 아딜은 조카들의 야심을 자극하여 분열시켰고, 1194년 5월 이집트의 알 아지즈는 디마슈크를 공격했다. 알 아프달의 도움 요청을 받은 알 아딜은 팔레스타인을 알 아지즈에 넘겨주는 중재안을 내어 평화를 회복했다. 이듬해 여름 알 아지즈는 재차 디마슈크를 공격했는데, 알 아딜은 재차 알 아프달을 구원하였다. 그러나 알 아프달이 이집트 공격에 나서자 알 아딜은 혼란 종식을 명분 삼아 디마슈크를 포위했고, 시타델에서 버티던 알 아프달은 1196년 7월 3일 항복하며 살카드로 은퇴하였다.

이로써 알 아딜은 새 술탄 알 아지즈의 이름으로 디마슈크를 지배하게 되었고, 1198년 독일 십자군을 격퇴하여 5년 8개월의 휴전을 체결했다. 그해 말엽 알 아지즈가 급사하고 12세 아들 알 만수르가 계승하였다. 알 아딜을 경계한 이집트의 군부는 알 아프달을 섭정으로 삼고 알레포의 앗 자히르와 1199년 6월 디마슈크를 포위했다. 자지라에 있던 알 아딜은 급히 회군하여 완전히 포위되기 전에 디마슈크로 돌아왔다. 6개월간 이어지던 포위는 이듬해 1월 알 아딜의 장남 알 카밀이 원군과 당도하자 풀렸다. 반격에 나선 알 아딜은 알 아프달을 격파한 후 2월 9일 카이로에 입성하였고, 8일 후 술탄으로 즉위했다. 그의 부재 동안 차남 알 무아잠이 디마슈크를 맡았는데, 이듬해 8월 알 아프달과 앗 자히르가 재차 도시를 포위하였다. 알 카밀을 이집트에 남기고 북상한 알 아딜은 두 형제를 이간질하고 보상을 약속하여 포위를 풀었고, 1201년 10월 9일 알 아딜은 디마슈크에 개선하였다.
2.3.5.4.1. 아이유브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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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아딜이 증축한 시타델

1202년 알 아딜은 알레포의 앗 자히르마저 복속시켜 아이유브 제국을 통합했다. 이듬해부터 그는 디마슈크 시타델 증축에 나섰고, 시리아 각지 제후들도 참가한 끝에 1216년 완공되었다. 십자군과 휴전을 이어가던 알 아딜은 1217년 5차 십자군이 당도하자 아질룬으로 나아가 디마슈크의 안전을 확보하였다. 비록 팔레스타인의 헝가리 십자군은 곧 귀환했지만 이듬해 독일 주도의 십자군이 이집트를 공격하였다. 다미에타 공방전이 한창이던 1218년 8월, 알 아딜은 그 외곽 요새가 함락되었다는 급보에 쓰러져 사망하였다. 1202년에 이미 분할해 놓은대로 세 아들인 알 카밀 무함마드, 알 무아잠 이사, 알 아슈라프 무사가 각각 이집트, 디마슈크, 자지라를 계승하였다. 다만 술탄위가 이집트로 옮겨진 탓에 디마슈크는 반세기만에 제국의 수도 자리를 잃었다. 알 무아잠은 십자군에 맞서는 알 카밀을 성실히 보좌했다.[137]

그해 말엽 결국 다미에타가 함락되자 시리아로 돌아간 알 무아잠은 1220년 카이사레아를 점령, 아틀리트를 포위하는 등 십자군의 후방을 교란시키다가 11월에야 디마슈크로 회군하였다. 1221년 7월 알 카밀의 요청에 알 무아잠과 무사는 이집트로 향하였고, 디마슈크 군대는 십자군의 퇴로를 차단, 만수라 전투의 승리를 이끌었다. 다만 십자군의 철수 후 알 무아잠은 형제들과 대립했고, 1226년에는 호라즘 제국의 잘랄 웃 딘에 복속하며 자지라 공격을 부탁하기도 했다. 1227년 알 카밀은 십자군과의 평화를 위해 예루살렘 양도를 약속했는데 실효 지배자인 알 무아잠은 반발했다.[138] 다만 그해 11월 알 무아잠이 사망하고 어린 아들 앗 나시르 다우드가 계승하자 알 카밀은 1228년 8월 팔레스타인을 정복했다. 앗 나시르는 숙부 무사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같은달 그는 디마슈크에 당도한다.
최근 새롭게 닥쳐온 재앙에 우리들의 가슴은 찢어질 듯 합니다. 무슬림 순례자들은 더이상 예루살렘으로 갈 수 없습니다. 쿠란의 구절 또한 더이상 마드라사에게 울려퍼지지 않을 것입니다. 무슬림 지도자들에게 오늘보다 수치스러운 날이 또 있었단 말입니까!

ㅡ 다마스쿠스의 이맘 시브트의 연설

1229년, 십자군에 예루살렘을 내어주고 10년 휴젼을 맺은 알 카밀은 시리아로 관심을 돌렸다. 한편 예루살렘 할양 소식에 각지의 무슬림들은 분노하였다. 특히 디마슈크의 여론은 폭발했고 앗 나시르는 설교자들을 이용해 알 카밀에 대한 적개심을 조성했다. 이에 알 카밀은 무사를 구슬려 복속하는 대가로 디마슈크를 준다는 밀약을 맺었다. 그해 3월, 프리드리히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무렵 무사는 디마슈크를 포위했다. 포위군은 시내로 향하는 수자원을 끊으려 했으나 수비대의 반격으로 격퇴되었다. 알 카밀은 4월 부관 파크르 앗 딘을 포위망에 합류시켰고, 다음달 십자군이 떠나기가 무섭게 자신도 합류하였다. 여론의 지지와 함께 버티던 앗 나시르는 6월 14일, 술탄의 진영을 방문해 협상에 나섰고 이틀 후 알 카밀과 만났다. 11일 후 앗 나시르는 항복하여 점령되지 않은 케라크로 향하였고 무사가 총독으로 봉해졌다.

1230년 무사는 알 카밀과 함께 자지라를 위협하던 잘랄 웃 딘을 격파했고, 자지라를 술탄에 내주는 대신 바알벡을 얻었다. 이듬해 3월 디마슈크로 돌아온 무사는 곧 알 카밀의 초청으로 카이로로 향하였고, 1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이후로도 무사는 1232년 아르투크 왕조, 1235년 룸 셀주크에 대한 원정 등에서 술탄을 동행했다. 다만 후자 도중 중 몽골군이 이라크 북부에 나타나자 후퇴하였는데, 이후 알 카밀이 몽골의 동정을 살핀다며 1236년이 지나도록 디마슈크에 계속 머물렀다. 의심이 불안으로 바뀐 무사는 알레포의 앗 나시르 유수프 및 룸 술탄과 연합해 술탄에 맞서려 하였는데, 1237년 봄 후자가 사망하고 본인 역시 병에 걸리며 무산되었다. 그해 8월 27일 무사가 사망하자 동생 앗 살리흐 이스마일이 계승하였는데, 알 카밀은 무단 점거라며 반발하며 11월 10일 카라크의 앗 나시르와 디마슈크를 포위하였다. 이스마일은 시리아 각지의 제후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홈스만이 소수의 병력을 파견했고, 그마저도 격파되었다.[139]

알 카밀은 본영을 남문에 세우고 앗 나시르는 서문, 나머지 병력은 북문에 배치되었다. 12월 20일, 마침내 포위군은 전면 공세에 나섰고 앗 나시르가 서문을 거의 돌파하였다. 하지만 그에게 전공을 넘기기 싫었던 (혹은 약탈을 우려했던) 술탄은 파크르 앗 딘을 보내 공격을 중단시켰다. 이어진 공성전으로 디마슈크 교외는 잿더미가 되었고 시내의 물가가 폭등하였다. 이로써 여론이 악화되자 이스마일은 연말에 휴전을 청했고, 1238년 1월 7일 도시를 떠나 바알벡의 영지로 향했다. 이후 알 카밀은 디마슈크에 머물다가 그해 3월 8일 병사했다. 장남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자지라, 차남 알 아딜 2세가 이집트를 계승했다. 앗 나시르는 권력 공백을 틈타 9년만에 디마슈크를 장악했지만 이듬해 1월, 호라즘 용병과 남하한 아이유브에게 축출되었다. 1239년 9월, 바알벡의 이스마일은 이집트 원정을 준비하는 아이유브를 돕는 척하며 홈스 군대와 함께 디마슈크를 기습 점령했다.[140]

망명해 온 아이유브를 투옥한 앗 나시르는 그해 11월 예루살렘을 점령, 이슬람권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같은 시기 아크레에 모이던 귀족 십자군은 아슈켈론을 거쳐 디마슈크를 공격하려 했지만 이집트 군에게 패하고 아크레로 철수했다. 한편 이집트의 알 아딜 2세와 협상이 결렬된 후 앗 나시르는 아이유브를 석방, 각각 디마슈크와 이집트를 점령하는데 있어 상호 협조한다는 조건으로 동맹했다. 그러나 1240년 6월 이집트를 정복하고 술탄으로 등극한 아이유브는 약속을 파기, 이스마일의 디마슈크 영유를 승인했다. 그해 7월 이스마일은 십자군과 동맹을 맺었고 군사 원조를 대가로 갈릴리 북부를 할양한다. 이에 대사원의 설교자 이즈 앗 딘 압둘 살람이 이스마일을 비난하며 예배 기도문에 그를 언급하길 거부하다가 결국 이집트로 망명했다.[141] [142]

이스마일은 쿠트바에서 술탄으로 아이유브 대신 룸 술탄을 언급하게 하며 대립각을 세웠다.[143] 이 시기 법학자 알 술라미가 십자군과 연합해 술탄과 싸우는 그를 비판하다가 투옥되었고, 앗 나시르는 술탄 측으로 전향한다. 1242년 아이유브는 시리아 원정을 시도했으나 군대가 디마슈크로 망명해버렸다. 십자군을 괴롭히던 앗 나시르도 이듬해 예루살렘을 할양했다. 1243년 내분에 빠진 십자군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된 이스마일은 그해 여름 아이유브와 화해, 그를 술탄으로 인정하였다.[144] 9월 11일 디마슈크의 금요 예배에서는 아이유브가 언급되었다. 하지만 이듬해 봄 아이유브가 베르케 칸 휘하의 호라즘 인들을 초청하자 이스마일은 재차 술탄을 적대했고, 다시 시리아-십자군 연합으로 이집트 침공을 준비했다. 1244년 6월 호라즘 인들은 디마슈크를 공격했고, 이스마일은 반격에 나섰지만 곧 성내로 철수했다. 가자에 모이던 이집트 원정군도 디마슈크로 철수했다.[145]

다음달 호라즘 인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이스마일과 앗 나시르가 개입, 십자군 수비대의 안전 철수를 확보했다. 그 무렵 아이유브는 아들 우마르가 디마슈크에서 옥사했다는 소식에 분노했고, 이집트-호라즘과 시리아-십자군이 라 포르비에 전투에서 격돌하였다. (1244년 10월) 하틴 전투 이후 최대의 회전에서 이스마일은 호라즘 군에게 밀리자 일찍 도주했고, 남은 십자군은 포위되어 대패했다. 이듬해에 아이유브는 재상 무인 앗 딘에게 시리아 정복을 맡겼다. 그는 1245년 4월 디마슈크를 포위하였고 동맹인 호라즘 인들은 도시의 보급로를 차단하였다. 포위군은 투석기로 매일 폭격을 가하였는데, 그와중에 우마이야 대사원의 동쪽 미나렛이 맞아 파괴되는 피해가 있었다. 그후 이스마일이 인근 수로의 둑을 터트려 홍수를 내자 무인 앗 딘은 한발 물러나 봉쇄에 치중하였다. 이스마일은 6월에 알 아딜의 궁전을 포함한 디마슈크 북부 구역을 파괴하여 소개시켰다.

포위가 장기화되며 식량 부족으로 여론이 악화되자 그해 9월 이스마일은 와지르 아민 앗 다울라를 무인 앗 딘에게 보내 협상하였고, 다음달 바알벡과 보스라 영지를 유지하는 대가로 항복했다. 이스마일이 떠난 다음날인 1245년 10월 9일, 무인 앗 딘은 디마슈크에 입성하였다. 1246년 2월, 아이유브는 다른 장군 후삼 앗 딘을 총독으로 지명했고 무인 앗 딘은 급사하였다.[146] 무인 앗 딘의 죽음과 함께 호라즘 인들에게 시리아 남부 & 팔레스타인에 영지를 주겠다는 약속도 파기되었고, 이에 분노한 호라즘 군대는 다음달 디마슈크를 포위했다. 그들과 동맹한 앗 나시르는 예루살렘을 접수했고, 이스마일은 4월 호라즘 군대에 합류했다. 그러자 아이유브는 이스마일의 옛 동맹인 홈스의 알 만수르에게 디마슈크 총독위를 제안해 포섭하였고, 그는 호라즘을 경계하던 알레포의 병력과 남하했다. 호라즘 인들도 포위를 풀고 북상하여 양측은 알 카삽 전투에서 격돌했는데, 호라즘 군은 베르케 칸이 전사하는 등 대패하였다.

다만 한달 후 알 만수르는 디마슈크에서 카이로 행을 준비하던 중 사망했고, 후삼 앗 딘이 그대로 총독위를 유지했다. 이후 이스마일은 도주하고 바알벡이 항복했다. 대세가 정해지자 아이유브는 친정에 나서며 후삼 앗 딘을 소환, 부재하는 동안 카이로를 맡겼다. 그동안 디마슈크는 자말 앗 딘 마트루가 맡았다. 파크르 앗 딘이 예루살렘, 나블루스, 보스라를 점령한 후[147] 아이유브가 당도하자 살카드, 살라미야, 바니아스 등이 항복했다. 1247년 4월 7일, 아이유브는 디마슈크에 입성하였다. 다만 오래 머물지 않고, 회복한 파크르 앗 딘에게 시리아를 맡긴 후 회군했다.[148] 다만 알레포의 앗 나시르 유수프가 망명객 이스마일과 홈스를 점령하자 1248년 가을, 쇠약해진 아이유브는 가마를 타고 디마슈크로 돌아왔다. 홈스로 파견된 후삼 앗 딘과 파크르 앗 딘은 도시를 봉쇄한 후 디마슈크 일대의 농민들을 징발, 투석기를 운송했다.

그 무렵 7차 십자군이 키프로스에 당도했다는 소식에 알레포를 제외한 시리아의 제후들은 아이유브에 충성을 서약하였다. 한편 포위가 장기화되던 1249년 3월 칼리파 알 무스타심이 보낸 사절단의 설득으로 아이유브는 포위를 거두고 4월 19일 디마슈크를 떠나 회군하였다.[149] 십자군과 아이유브 군이 만수라에서 대치하던 1249년 11월 아이유브는 사망했다. 자지라에서 남하한 그의 아들 투란샤는 1250년 1월 5일 디마슈크에 입성하였고 총독 자말 앗 딘에 의해 술탄으로 선포되었다. 투란샤는 장교 및 귀족들에게 재물을 나눠주고 23일 이집트로 향하여 한달 후 만수라에 당도하였다. 이미 맘루크 군이 승전한 상태였지만, 투란샤는 그들을 박대했다가 암살되었다.[150] 그후 맘루크 군부는 섭정이던 후궁 샤자르 알 두르를 술타나로 추대, 맘루크 왕조를 세운다.
2.3.5.4.2. 아이유브 vs 맘루크
샤자르 앗 두르 추대 후 맘루크들은 디마슈크에 카팁 (설교자) 아실 앗 딘 알 이드리시를 파견해 충성을 얻어내려 했으나 총독 자말 앗 딘 이븐 야그무르는 거부하였다. 다만 카라크의 경우와 달리 자말 앗 딘이 아이유브 왕공을 추대하지 않자 불만을 품은 쿠르드계 맘루크들이 알레포의 앗 나시르 유수프와 결탁했다. 신속히 남하한 유수프는 1250년 7월 10일 밥 앗 사기르 (남문)을 통해 디마슈크에 입성하였고 시타델의 자말 앗 딘도 곧 항복하였다. 이 소식에 맘루크 군부는 디마슈크 원정을 보류, 아이유브 왕족 중 6세의 알 아슈라프 무사를 추대하고 맘루크 중에서 아이바크를 그 섭정으로 선포해 맞섰다. 가을까지 바알벡, 카라크 등 시리아를 통합한 유수프는 연말 무렵 가자에 연합군을 집결시켰다.

그러나 1251년 2월, 카이로 근방에서 벌어진 압바사 전투는 유수프의 튀르크 맘루크들이 이탈하며 맘루크 군이 승리한다.[151] 1253년 4월 칼리파 알 무스타심의 중재로 아이바크와 유수프는 나블루스를 경계로 휴전을 맺었다. 유수프는 자신의 동맹 제안을 거절한 십자군에 대한 보복으로 야파, 시돈 등지를 습격한 후 디마슈크로 돌아갔다.[152] 같은해 아이바크는 스스로 술탄이 되며 허울 뿐이던 아이유브 술탄국을 멸한다.[153] 한편 1255년, 숙청을 피해 망명해 온 바이바르스는 1257년 아이바크의 암살 후에도 유수프는 칼리파로부터 술탄 칭호를 얻어내는 데에만 치중하자 실망하여 그해 가을 디마슈크를 떠나 케라크의 우스만에 의탁한다.

그후 유수프는 몽골의 이라크 침공을 방관하며[154] 시리아 남부를 약탈하던 바이바르스와 맞서며 1259년 초엽, 디마슈크 동쪽 구타에 주둔했다. 바이바르스의 공격으로 술탄의 막사가 기습당하고 디마슈크에선 혼란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결국 유수프가 승리했고, 바이바르스는 재차 그에게 복속했다. 한편 훌라구와 접촉하던 유수프는 그의 출두 명령에 아들을 대신 보냈는데, 만족하지 않은 훌라구는 시리아 원정을 결심한다. 1259년 9월, 훌라구는 타브리즈에서 시리아를 향해 남하하였다. 이에 유수프는 이집트에 사절을 보내 동맹을 청하였으나, 당시 쿠투즈의 쿠데타로 맘루크 측은 제대로 답변하지 않았다. 한편 유수프는 시리아 사막의 압바스 왕자 아흐마드 ( 알 하킴 1세)를 초청해 약 5세기만에 디마슈크에서 칼리파로 세우려 했으나 몽골의 침공으로 무산되었다.
2.3.5.5. 대몽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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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바르스가 안장된 자히리야 마드라사 내의 영묘

1259년 몽골군이 카부르 강을 지나자 유수프는 참모들의 조언에 따라 대군을 편성, 디마슈크 북쪽 4km 지점의 알 비르자에 주둔했다. 다만 유수프는 강경론과 신중론 사이에서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했고, 그 나약함을 멸시한 바이바르스는 이듬해 1월 정변을 시도한다. 바흐리 맘루크들은 디마슈크 부근 정원에서 숙영하던 유수프를 습격했는데 그는 용케도 시타델로 도주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바이바르스는 유수프의 동생 앗 자히르 가지를 술탄으로 옹립하곤 가자로 도주했다. 충격을 입은 유수프는 바이바르스에게 디마슈크를 빼앗길까봐 몽골군에게 포위된 알레포로 출정하지 않았고, 1260년 1월 24일 도시는 함락되었다. 이 소식에 유수프는 시타델에만 수비대를 둔 채로 디마슈크를 떠나 철수하였다. (1월 31일 ) 이에 주민들은 성벽 위로 몰려와 울부짖거나 무책임한 지도자를 저주하였다. 일부 기독교도들은 혼란기를 틈타 도시를 떠나 십자군령 티레로 이주하였다.[155]

유수프가 떠난 직후 몽골군 분견대가 디마슈크 외곽 올리브 농장에 접근했고 수비대를 기습해 격파했다. 그리고 알 비르자에 있던 몽골 사절단은 1260년 2월 4일에 디마슈크에 입성했다. 유수프를 따르지 않고 남아있던 관료 자인 앗 딘 알 하피지는 알레포의 훌라구에게 카디 사드르 앗 딘 이븐 사니 앗 다울라 등의 항복 사절단을 보냈다. 이에 훌라구는 부관 키토부카를 파견했고, 이들은 안티오크공 보에몽 6세 및 아르메니아 국왕 하이톤 1세 등과 함께 디마슈크에 입성했다. (2월 14일) 우마이야 대사원은 성당으로 개조되었고 무슬림 성지에서는 술 잔치가 벌어졌다. 다만 몇주 후 키토부카가 유수프 추격을 위해 남하하자 시타델의 병력이 반란을 일으켰다.[156] 3월 중순에 복귀한 키토부카는 시타델을 포위했고, 20일에는 주민들을 동원해 공격하기도 했다. 수비대가 버텨내자 키토부카는 4월 25일 20여대의 투석기를 건조하고 시내 건물로부터 포탄을 징발했다. 그러자 더이상 버틸 수 없음을 깨달은 수비대는 3일 후 항복했다.

키토부카는 수비대를 살려주었으나 시타델의 성벽 일부 및 성탑과 여장 등을 허물어 무력화시켰다. 한편 가족들을 이집트로 보낸 후 가자에서 요르단으로 북상한 유수프는 몽골군에 항복하였고, 아즐룬 등지를 항복시킨 후 6월 17일 포로 신세로 디마슈크에 돌아왔다.[157] 1260년 8월, 맘루크 술탄 쿠투즈는 바이바르스와 대군을 이끌고 가자로 북상했다. 이에 키토부카는 전군을 모아 디마슈크에서 남하했는데, 수비대 없이 남겨진 도시의 주민들은 봉기를 일으켰다. 이어진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키토부카가 전사하며 몽골군이 대패하자 디마슈크의 주민들은 폭동을 일으켜 이틀간 몽골 부역자들과 몽골 치하에서 우대받던 기독교도들을 공격하였다. 밥 투마 (북문)와 밥 샤르키 (동문) 사이의 기독교 구역은 약탈되었고 성 마리아 성당이 전소되었다. 9월 7일 자말 앗 딘 무함마디의 맘루크 군이 입성한 후에야 질서가 회복되었다. 다음날 도시 근교에서 이둘 피트르를 지낸 쿠투즈는 9월 10일 디마슈크에 개선한 후 시타델에 머물렀다.

쿠투즈는 디마슈크로 찾아온 베두인 부족장 이사 이븐 무한나를 아미르 알 아랍으로 봉하는 등 시리아 각지의 제후들을 분봉한 후 카이로로 회군했다. 다만 그 도중에 바이바르스가 쿠투즈를 살해하고 술탄으로 즉위했다. 그러자 그해 가을 디마슈크 총독 산자르 알 할라비가 술탄 알 무자히드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디마슈크의 아미르들 중 알라 앗 딘 아이디긴 등은 바이바르스를 지지하며 도시를 떠났고 산자르가 보낸 추격대를 격파했다. 산자르는 알레포와 하마에 도움을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1261년 1월 17일, 맘루크 군대의 접근에 산자르는 출정하여 디마슈크 외곽에서 싸웠으나 패배했다. 이후 그는 시타델에서 항전하였는데 아미르들은 바이바르스가 보낸 뇌물과 예복에 전향했다. 비록 여론은 산자르를 지지했지만 포위가 시작되자 곧 항복했다.[158]

그해 봄, 두 압바스 왕공이 베두인들과 디마슈크로 왔다. 총독 타이바르스는 그들의 카이로 행을 주선했고, 먼저 도착한 아불 카심 아흐마드가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 2세로 즉위해 압바스 조가 부활했다.1261년 9월 바이바르스는 칼리파와 디마슈크에 당도했다. 10월 11일 알 무스탄시르는 3백의 기병과 바그다드 수복을 위해 출정했다. 도움을 약속했던 바이바르스는 11월 12일 디마슈크를 떠나 회군했다.[159] 1266년 6월 바이바르스의 십자군령 사파드를 포위 시에 디마슈크의 투석기가 파견되었다. 다음달 사파드를 함락한 바이바르스는 디마슈크 근처에서 부관 칼라운 휘하 아르메니아 원정군을 파견했다. 그후 디마슈크와 홈스 사이의 기독교도 마을 카라에서 학살을 자행한 바이바르스는 칼라운과 합류, 9월 디마슈크에 개선했다.[160] 1268년 안티오크를 함락한 바이바르스는 6월 9일 디마슈크에 개선했다.[161]

1269년 가을 몽골군이 시리아 북부에 출현, 12월 9일 바이바르스가 디마슈크에 당도하자 철수했다. 그는 곧 십자군과 대결한 후 회군했다. 1271년 8차 십자군과 맞서던 바이바르스는 6월 12일 디마슈크에 당도, 상황을 살피다 별일 없자 다음달 회군했다. 그 직후 십자군이 습격하자 9월 20일 디마슈크로 돌아왔다. 같은 시기 몽골군 역시 알레포를 지나 남하하자 디마슈크에선 혼란이 일어 일부 주민들은 카이로로 피신했다. 11월 9일 이집트의 원군이 당도하자 3일 후 바이바르스는 알레포로 북상했고, 몽골군은 철수했다. 바이바르스 역시 이듬해 1월 회군했다. 1272년 십자군과 10년의 휴전을 체결한 바이바르스는 5월 8일 디마슈크에서 몽골 사절단을 접견했다. 그 후로도 한차례 더 사절을 주고받았으나 효과는 없었고, 8월 비밀리에 카이로로 향했던 바이바르스는 카이로에서 3일만에 디마슈크로 돌아왔다. 11월 28일, 그는 디마슈크를 떠나 북상, 알 비라를 포위한 몽골군을 격퇴한 후 12월 26일 도시를 거쳐 귀환했다.

1273년 여름 몽골군의 남하 소식에 바이바르스는 재차 디마슈크로 북상했고, 이번에도 몽골군이 철수하자 회군했다. 1275년 2월 재차 디마슈크에 당도한 바이바르스는 3월 6일, 아르메니아 원정에 나섰다. 4월 말 디마슈크로 돌아온 바이바르스는 12월 8일 몽골군이 재차 알 비라로 접근하자 재차 출정했고, 역시 몽골군은 그 소식에 철수했다.[162] 1277년 바이바르스는 아나톨리아로 원정, 몽골-룸 연합군을 격파하고 디마슈크로 개선하였으나 7월 1일 급사했다. 두 아들 바라카와 솔라미쉬는 연달아 폐위되고 1279년 말 원로 아미르 칼라운이 즉위했다. 한편 1275년부터 디마슈크 총독이던 순쿠르 알 아쉬카르는 1280년 3월 바라카가 의문사하자 다음달 스스로 술탄 알 카밀이라 선포, 반란을 일으켰다.[163] 시리아 제후들의 지지 하에 그는 5월, 가자로 진군하나 이집트 군에 패한다. 칼라운은 바이바르스 즉위 시에 반란을 일으켰던 산자르를 토벌군으로 파견했다.

6월 디마슈크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초반에 알레포, 하마 군대가 이탈하고 베두인 부대가 사막으로 도주하며 패배한 순쿠르는 사흐윤 (살라딘 성채)에 틀어박혀 몽골에 도움을 청하였다.[164] 1280년 10월, 몽골군이 알레포를 점령하자 디마슈크로 난민들이 몰렸다. 다만 칼라운이 북상하자 몽골군은 철수하였다. 이듬해 재차 출정한 칼라운은 십자군과 10년 10개월 10주 10일의 휴전을 체결한 후 5월 10일 디마슈크에 이르렀다.[165] 1281년 가을 몽골군이 알레포를 지나 이번엔 남하하자 10월 칼라운은 디마슈크 외곽에 군대를 소집했다. 다만 제후들의 요청에 따라 전장은 홈스로 변경되었다. 이어진 전투에서 초반에 맘루크 군은 일부가 디마슈크를 거쳐 이집트까지 도주할만큼 밀렸지만 반격에 성공, 대승한다. 11월 16일, 칼라운은 디마슈크에 개선하였다. 12월 7일에는 디마슈크로 온 몽골군 탈영병들이 라흐바 부근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아바카 칸의 철수 소식을 알렸다.

1287년 라타키야를 점령한 칼라운은 1289년 초엽, 트리폴리 정복에 나서 북상하였다. 3월 14일 4만 대군과 함께 디마슈크에서 출정한 카라운은 다음달 트리폴리를 함락한 후 6월 6일 도시에 개선했다. 디마슈크를 포함한 시리아 각지의 도시에서는 축제가 열렸다. 1289년 7월 칼라운은 재차 십자군과 10년 10개월 10일의 휴전을 체결하며 아크레와 디마슈크 간의 자유 무역에 합의했다. 이로써 도시의 상인들은 몽골의 방해로 동방 무역이 단절되었던 것으로 인한 손실을 어느정도 상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존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1290년 8월, 아크레에서 반무슬림 폭동으로 상인들이 희생되자 칼라운은 공격을 결심한다.[166] 그는 디마슈크 주둔군에게 카이사레아로 이동해 튀니스가 목적이라며 공성병기를 주조하게 했다. 11월, 칼라운은 대군과 함께 출정하나 곧 쓰러져 사망하였다. 뒤를 이은 장남 살라흐 앗 딘 칼릴 역시 부왕의 유지를 받들어 원정을 추진했다.

1290년 12월 레바논 목재로 지어진 대형 투석기 알 가비다가 완성되어 디마슈크에 당도했다.[167] 2월 칼릴은 공성병기 전문가 이즈 앗 딘 아이바크 알 아프람을 디마슈크로 파견해 투석기 재조립 및 운반을 맡겼다. 3월 3일 도시에 당도한 그는 준비에 착수했다. 6일 후 대사원의 금요 예배에서는 공성병기 운송 자원자를 모집하였다. 23일에 디마슈크 총독 라긴은 아크레로 출정했고, 같은날 저녁 하마 병력이 디마슈크에 당도했다.[168] 4월 5일, 칼릴은 대군과 함께 아크레를 포위했다. 2일 후 디마슈크에서 92대의 투석기가, 그 다음날 하마 병력이 당도했다. 15-16일, 십자군은 포위망 중 디마슈크 부대 쪽을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한편 십자군과 내통하던 아미르 알 파크리는 병을 핑계로 디마슈크로 이탈했다. 이를 의심한 칼릴은 5월에 그를 체포, 압송했다. 얼마후 그와 친한 디마슈크 총독 라긴 역시 체포되었다.[169]

1291년 5월 내내 벌어진 처절한 전투 끝에 아크레는 함락되었고, 6월 7일 칼릴은 280명의 포로와 디마슈크에 개선하였다. 오전이었음에도 주민들은 종교를 막론, 촛불을 들고 나와 그를 환영했다. 그해 내로 레반트의 십자군 세력은 일소되었고, 디마슈크에서도 십자군에 대한 기억은 점점 잊혀지며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던 1299년 말엽, 3차 홈스 전투에서 맘루크 군을 격파한 가잔 칸의 몽골-십자군은 1300년 1월 디마슈크를 무혈[170] 점령했다. 다만 그도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였기에 (훼손을 피한) 대사원에서는 가잔 칸의 이름으로 예배가 인도되었다. 다만 시타델의 수비대는 저항하였고, 이때 도시 북쪽 앗 나브크에 있던 몽골 진영에 맘루크 사절단이 방문해 공격 중단을 청하기도 했다. 사절단 중에는 이븐 타이미야도 있었다.[171] 이후 차가타이 칸국의 침공에 대비해야 했던 가잔 칸은 2월 물라이 휘하 10,000명의 병력을 남기고 회군했다.[172] 물라이는 팔레스타인을 약탈한 후 3월에 디마슈크로 돌아왔는데, 맘루크 군이 북상하자 그 역시 회군하며 시리아는 5월까지 맘루크령으로 회복되었다.

1301년 2월에는 쿠틀루그샤 휘하 60,000명 몽골군이 십자군과 함께 남하, 디마슈크를 재점령하고 몽골인 총독을 두었다.[173] 하지만 가잔 칸이 차가타이 칸국과의 대결에 전념, 시리아 원정을 연기하자 회군했다.[174] 그해 8월, 이븐 타이미야 등 현지 이맘들은 디마슈크로 파견된 일 칸국의 카디 디야 웃딘 무함마드 등 몽골 사절단을 만났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1303년 봄, 쿠틀루그샤는 아르메니아 병력 등 80,000명 대군과 재침했다. 그는 다마스쿠스를 포위했으나, 주민들은 결사 저항하였다. 시간을 버는 동안 칼리파와 술탄을 대동하고 당도한 맘루크 군은 바이바르스 2세의 지휘 하에 다마스쿠스 남쪽 외곽에서 몽골군과 격돌했다. 이어진 마르즈 앗-사파르 (샤카브) 전투는 3일에 걸친 격전 끝에, 초반에는 몽골군이 우세를 점하였으나 맘루크 군의 분투로 전세는 역전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몽골군이 물을 마시려 언덕에서 내려오자 맘루크 군이 총공격을 가하여 섬멸하였다. 몽골군은 수천여 만이 생환했고, 이듬해 가잔 칸이 사망[175]하며 시리아는 북부에서의 국지전을 제외하면 완전한 평화를 얻었다.

2.3.6. 맘루크 왕조


술탄 파라즈는 역사가 이븐 칼둔을 포함한 사절단을 디마슈크로 급파하여 협상에 나섰고, 이에 티무르는 잠깐 공격을 멈췄으나 사절단의 귀환 후 공격을 재개했다.

1400년 3월 24일 (혹은 1401년 5월 17일) 티무르가 디마슈크 점령, 우마이야 대사원에 방화하고 주민들 노예로 끌고감. 그중 장인들은 수천 km 떨어진 사마르칸트까지 보내졌다. 그외에 수만의 주민들이 학살된 후 성벽 동북쪽에 해골 피라미드가 세워졌다. 현재까지도 그곳은 부르즈 알 루수스 (머리들의 탑)로 불린다.

1342년 안티오크 총대주교 이그나투스 2세는, 주교좌를 디마슈크로 이전했다.

1348-49년 디마슈크에 흑사병이 업습하여 주민 중 절반이 사말하는 참극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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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대사관, 1511년 지오반니 벨리니 작

2.4. 오스만 제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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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양식으로 세워진 술라이마니야 타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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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당국에 의해 복원된 야흐야 (세례자 요한) 성소

16세기 들어 오스만 제국이 무섭게 성장하자 맘루크 술탄 깐수 알 구리는 종파 차이에도 사파비 왕조와 연대했다. 이에 분노한 오스만 술탄 셀림 1세는 공격의 화살을 남쪽으로 돌려 타우루스 산맥을 넘었고, 1516년 알레포 인근의 마르즈 다비크 전투에서 깐수를 전사시키며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써 시리아는 무방비 상태가 되었고, 9월 21일 디마슈크 총독이 도주한 후 10월 2일 대사원에서 셀림 1세의 명의로 쿠트바가 진행되었다. 다음날 셀림 1세는 디마슈크에 개선했다. 약 3달 간 머물던 그는 이집트 원정을 위해 자비야 성문을 통해 떠났다. 1517년 10월, 맘루크 조를 멸한 후 회군한 그는 재차 디마슈크에 머물며 테키예 모스크와 무히 앗 딘 이븐 아라비 영묘를 건설하는 등 수피즘을 후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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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븐 아라비 영묘 및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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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중반에 세워진 아젬 궁전

당시 오스만 기록에 따르면 디마슈크에는 10,423 가구가 거주했다. 오스만 조의 시리아 지배는 일부 해안을 제외하면 안정적으로 이어졌다. 1559년에 모스크, 여관 등으로 구성된 술레이마니야 테키야의 서쪽 건물이 미마르 시난에 의해 완공되었다. 곧 인근에 셀리미야 마드라사도 더해졌다. 18세기 중반에는 아랍화된 튀르크계 아젬 가문이 30여년간 디마슈크 총독을 맡았고, 1743-57년간 장기 집권한 아사드 파샤 아젬 궁전과 칸 아사드 파샤 등 시내에 여러 건물을 세웠다. 점차 경제적으로 알레포에 밀린 디마슈크였지만, 메카로 향하는 핫지 순례길의 시발점이었기에 두 성지의 수호자인 오스만 조정의 입장에서 더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18-19세기 시내의 바라다 강변에는 여러 카흐베하네 (카페)가 지어져 운치를 더했다.

2.4.1. 근대화의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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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사진첩의 밥 샤리키 (동문)

1832년, 메흐메드 알리 파샤의 아들 이브라힘 파샤가 시리아를 정복하며 디마슈크의 근대가 시작되었다. 이집트 지배 말엽인 1840년, 기독교도 수사와 그의 무슬림 하인이 디마슈크 시내에서 변사체로 발견되며 이른바 '다마스쿠스 사건'이 터진다. 현지 기독교도들은 유럽에 만연하던 유대인들의 '피의 제의' 의혹을 제기했고, 총독 샤리프 파샤는 기독교도들이 제소한 유대인 제빵사를 고문한 후 그가 자백한 7인의 유대 지도자들을 체포한다. 이를 시리아에 있던 유대계 유럽 외교관들이 폭로했고, 메흐메트 알리는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석방을 명했다. 그해 말엽, 영-프 군대의 도움으로 시리아를 수복한 마흐무트 2세는 '피의 제의'는 거짓 소문이라며 이에 대한 논의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리며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한편 이때 미국의 유대인들도 시위에 나서는 등 유대인들의 국제적인 공조와 외교적 연대가 확인되었다.[176]

레바논 아미르국의 멸망 후 1850년대 레바논 산지에서 벌어진 드루즈와 마론파 공동체 간의 패권 다툼은 1860년, 디마슈크로 번져 대대적인 기독교도 학살로 이어졌다. 그해 6월, 드루즈-무슬림 군중에 의해 기독교 구역이 방화되었고 수천이 살해되었다. 그러던 3일 째부터 알제리 독립운동을 이끌던 수피 망명객 압델카데르가 지지자들과 함께 기독교도 보호에 나섰고, 시타델 내의 저택에 다수를 숨겨주었다.[177] 이때 구도심의 (가톨릭) 기독교 구역은 크게 파괴되었지만, 성밖 미단 구역의 빈곤한 (정교회) 기독교 구역은 무슬림 이웃들이 보호하여 화를 피할 수 있었다. 1867년 기준 인구는 약 140,000명으로, 그중 30,000명의 기독교와 10,000명의 유대인 외에는 무슬림이었다. 그 무렵 디마슈크를 방문한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은 동방의 진주라고 칭송했다. 1898년 11월에는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가 방문했다.

2.5. 근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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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말엽, 다마스쿠스의 파이살 1세

20세기 들어 청년튀르크당 집권으로 오스만 제국이 튀르크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자, 베이루트와 디마슈크 등지에서 아랍 기독교도들을 중심으로 아랍 민족주의가 태동했다.[178] 1915-16년, 디마슈크 총독 자말 파샤는 아랍 민족주의자들을 여럿 교수형에 처하며 열기에 기름을 부었다. 1차 대전 말엽, 아랍 대봉기 T.E 로렌스 휘하 헤자즈 왕국-영연방 연합군이 디마슈크에 진입했다. (1918년 10월)[179] 주민들은 철수하는 오스만 군대를 향해 총을 쏘는 등 적대감을 보였고, 아랍 봉기군을 환영했다. 이후 샤리프 후세인의 아들 파이살 1세가 시리아 국왕으로 선포되었고, 슈크리 파샤의 군정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사이크스-피코 밀약으로 후세인 맥마흔 서한을 뒤집은 서구 열강은 프랑스의 시리아 위임 통치를 선포했고, 1920년 프랑스 군은 마이살룬 전투에서 시리아 군을 격파한 후 디마슈크를 점령했다. 이로써 프랑스령 시리아가 설립되었다. 1925년 시리아 남부 하우란 지방에서 시작된 대시리아 봉기가 1926년 5월, 디마슈크로도 퍼지자 프랑스 당국은 항공기까지 동원해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 결과, 많은 주민이 사망하고 구도심의 하미디야 시장과 미드하트 파샤 시장 사이의 시가지가 전소했다. 지금까지도 일대는 알 하리카라 불린다. 봉기 후 당국은 구도심애 철조망을 둘러 구타 지역에서의 전투원 침투를 차단했고, 원활한 병력 운송을 위해 북쪽에 도로를 내었다.

2차 대전기, 1940년 이래로 시리아는 비시 프랑스 하에 놓였다. 그러던 1941년, 연합군은 시리아-레바논 전역에 착수하여 3주의 전투 끝에 6월 21일 영연방군 및 자유 프랑스군이 디마슈크를 장악한다. 전후로도 프랑스는 계속 지배하려 했으나, 현지인들의 강한 반발과 영국의 개입으로 1946년 철수했다. (레반트 위기) 이후 시리아 아랍 공화국이 디마슈크를 수도로 건국되었다. 1958년, 시리아는 범아랍주의에 입각하여 이집트와 아랍 연합 공화국을 이루었으나, 지나치게 이집트 주도가 되자 1961년 9월에 군부가 디마슈크에서 정변을 일으켜 분리되었다.

아랍 연합 공화국의 붕괴 후, 범아랍주의를 제창하던 시리아 바트당은 큰 충격을 받았다. 분리 후 친미 성향의 나짐 알 쿠드시가 집권했으나, 1962년 3월 바트당 군부의 쿠데타로 감금되었다가 이듬달 반대파의 쿠데타로 복권되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 1963년 3월, 바트당은 쿠데타로 집권했다. 그 과정에 800여명이 사망했다. 이후 민중의 염원대로 아랍 연합 공화국이 재건되나 싶었지만, 바트당 내에서 연합파 (구파)와 분리파[180] (신파)가 나뉘었고 점차 후자가 전자를 숙청했다. 그러자 같은해 7월, 이집트의 지원 하에 연합파 군부가 쿠데타를 시도하나 하페즈 알 아사드가 주요 관공서들을 지켜내며 진압한다. 그 과정에서 민간인이 여럿 피격되었고, 연합파 요인들은 망명 혹은 처형되었다.[181]

다만 하마의 무슬림 형제단 봉기 등 주요 도시들의 순니 엘리트 층이 반발하자, 이들에 대한 대응을 두고 바트당은 재차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뉘었다. 1966년 2월, 살레 자디드의 급진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바트당의 창시자인 미셸 아플라크 등을 몰아내고 집권했다. 이때는 디마슈크 대통령궁을 포함, 전국적인 충돌이 벌어져 약 400여명이 사망했다. 그후 살레 자디드는 친소 정책을 폈고, PLO를 지원했다. 다만 검은 9월 개입 실패 후 하페즈 알 아사드는 그를 비판하며 대립했고, 1970년에 친위 병력으로 지도부 회의장을 포위한 결과 무혈 쿠데타에 성공한다. 1971년 대선 후 하페즈 알 아사드는 공식적으로 집권, 30여년간 시리아를 통치한다. 한편 1979년, 구도심 일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2.6.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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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경과 주경. 배경의 카이순 산이 보인다.

2000년 바샤르 알 아사드가 세습에 성공한 후, 경제 개방 정책을 실시하며 시가지가 새로 개발되는 등 건설붐이 있었다. 국립 극장 등이 세워졌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인 유학생들도 아랍어를 배우기 위해 체류하기도 했다. 다만 아랍의 봄에서 촉발된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시리아 전역이 여행금지지역으로 설정됨에 따라 지금은 여행할 수 없다. 내전 이전에는 혹시 모를 사태에는 다마스쿠스에 있던 영사협력원을 통해 주 레바논 영사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한편 디마슈크에 한때 1만명 넘게 살던 유대인들은 1948년 1차 중동전쟁 후 분위기가 험악해지자[182] 절반 이상이 이스라엘로 떠났다. 시리아 정부는 유대 구역의 빈 집들에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수용했고, 유대인들의 집단 이주를 막기 위해 가족 단위의 출국을 금하였다. 그러다 1992년, 하페즈 알 아사드가 이스라엘로 가지 않는 조건 후에 이민을 허가하자 남은 4천여 중 대부분이 떠났다. 2019년 기준 본래 8개의 시나고그 중 엘프란즈[183] 만이 유지되며, 12명의 유대인만이 남아 있다. # 다만 그마저도 대부분 고령층이라 디마슈크의 2천년 유대인 역사는 끝나가고 있다.

2.6.1. 시리아 내전

2011년 이전까지만 해도 여행금지국가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2011년 시리아 민주화 운동의 영향으로 여행금지국가에 등록되었기에 시리아에 들어가는 건 힘들게 되었다.

2012년에는 다마스쿠스 근교 고타(Gouta)지역이 반군에게 넘어가 주요 도로를 제외하면 반정부 세력에 의해 포위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7월에는 다마스쿠스 방면 반군에 의해 수도함락작전 "다마스쿠스의 화산"이 입안되었으나, 정부군의 첩보망에 걸려 작전이 다급하게 시작되었다. 7월 15일 도우마 시 주변에서 정부군과 전투하던 반군이 다마스쿠스 방면으로 퇴각하면서 전체 방면에서 다마스쿠스로 진입이 개시되었다. 한때는 최대 80%가까이 반군의 손에 장악당했으나, 정부군이 이스라엘 침공에 대비한 골란고원의 예비대를 차출하고 수도 방위 제4기갑사단과 제3기갑사단이 시내로 돌입하여 대격전을 벌이며 수도에 대한 직접 포격도 서슴치 않음으로써 7월 23일에는 반군이 도주를 시작하였고 정부군은 7월 30일 완전 승리를 선포하여 함락을 면할 수 있었다.

그나마 전선이 교착상태에 접어든 2014년 이후로는 정부군 점령지의 복구가 활발히 진행중이다. 그러나 내전 이전의 상태로 완전히 돌아가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도심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야무크 난민 수용소와 하자르 알 아스와드 지역은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에 점령당한 상태. 이들 지역은 2018년 5월 시리아 정부군이 ISIS를 완전 소탕하면서 해방되었으며, 2018년 8~9월 현재, 다마스쿠스 시를 포함한 다마스쿠스 주는 완전히 정부군이 통제중이다.


서구권 기자가(여행금지 지역이지만) 당국의 특별 허락을 받고 알 아사드 정권 하의 다마스쿠스를 취재한 영상(영어).[184] 이 다큐멘터리의 취재시기가 2015년 여름으로, 러시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기 직전의 시리아 정부군이 가장 수세에 몰렸던 시점의 다큐멘터리인데, 3여년이 지난 현재는 상황이 훨씬 나아졌고, 다마스쿠스와 교외지역 전지역이 정부군의 수중에 들어감에 따라, 다큐에 나왔던 폭격이나 반군 공격도 다 사라진 상태이다. 또한, 격렬한 내전이 수년째 진행 중인데도 생각보다 다마스쿠스의 분위기가 크게 피폐하지는 않고, 시리아 내전 발발 이전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알라위, 수니파 등 다종교가 공존하는 세속적이고 향략적인 분위기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성들은 히잡착용을 강제받지 않으며, 세속적인 복장의 자유를 누리며, 음악회같은 서구식 생활도 즐길 수 있다. 근본주의 이슬람에 대한 비판도 매우 자유롭다. ISIL에 점령당한 이후로 1984 뺨칠 정도로 숨도 못쉬는 억압적인 지역이 되었고, ISIL에게 해방된 이후에도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여전히 재건중인 라카 모술 같은 도시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 사실, 이렇게 ISIL이나 알 누스라 전선(HTS) 등 시리아 도처에 날뛰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 맞서싸우며 다양한 문화 간의 공존을 보장해 주는 이유 때문에 이슬람 극단주의 수니파가 아닌 시리아 국민들[185]에게는 아사드 정권이 마지막 희망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2019년 11월 다마스쿠스 여행기

실제로 서방권의 뉴스만 보고 많은 사람들이 아사드 정권이 자국 수도인 다마스쿠스에 한 폭격 등의 행위를 보면서 아사드가 다마스쿠스 시민들을 억압하는 폭군이라는 식으로 지나치게 일반화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반정부/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이들리브 같은 지역이라면 몰라도, 시리아내, 특히 다마스쿠스 지역 수니파의 다수는 아사드를 지지하고 있다. 당장 아사드 현 대통령의 영부인인 아스마 알 아사드도 알레포의 수니파 명문가출신이다. 시리아 수니파의 대다수는 내전 이전이나 이후에나 근본주의가 아니라 이슬람 세속주의자들이다.

3. 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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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대사원과 구도심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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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년 압뒬하미트 1세가 지은 하미디야 시장

로마 시대의 대도시였고 이후 우마이야 조의 수도로 기능하며 많은 건축물이 지어졌다. 십자군 전쟁을 겪으며 서유럽의 영향을 받은 성벽도 지어졌다. 성벽으로 둘러진 구도심 내에는 중세 시기에 세워진 모스크, 성당, 마드라사 (대학), 함맘 (욕탕), 비마리스탄 (병원), 저택, 시장 등이 많다. 다만 21세기 들아 도시가 확장되고 신시가지가 개발되며 서울의 종로-을지로처럼 도심 공동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또한 시리아 내전 이후 해외 관광객이 거의 끊기며 경제적으로도 큰 타격을 입었다.

3.1. 우마이야 모스크

파일:우마이야 대사원 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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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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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2] 2011년 수정 [3]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4]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5]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6]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7]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8] 혹은 마슈(마시)가 현재 자주 불리는 '아샴'과 일맥상통하는 태양이란 뜻이라고도 한다. [9] 다마스쿠스와 보스라 사이의 옛 도시. [10] 노아(누흐)의 아들인 셈의 막내아들 [11] 현재 다마스쿠스 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12] 구약 열왕기상 19장에 따르면 야훼의 명으로 엘리야가 디마슈크로 향하여 하자엘을 왕으로 봉했다고 하는데, 후에 구도심 외곽의 조바르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한 시나고그가 세워진다. [13] 이때 귀환하며 레바논의 나흐르 칼브 (개의 협곡)에 현존하는 전승비를 세겼다. [14] 기원전 803년이라고도 한다. 님루드에서 발굴된 기록에 따르면 은 2,300 탈렌트, 금 20 탈렌트, 구리 3,000 탈렌트, 철 5,000 탈렌트, 갖가지 색깔의 옷감, 다양한 보석으로 장식된 금쟁반을 바쳐야 했다고 한다. [15] 다만 디마슈크의 상태는 양호한 편이었다. 다른 이메리슈 왕국의 영토는 초토화되었다. 아시리아 자체의 연대기도 디마슈크 외 16개 주의 591개 마을이 '홍수 후의 언덕'처럼 파괴되었다고 기록했을 정도였다. [16] 회랑으로 둘러쌓인 넓은 뜰과 중앙의 대형 건물, 균형미를 위한 벽면의 탑 등이 있다. [17] 이때 음악에 단련된 329명에 달하는 후궁들과 헤아릴 수 없는 금제 장식들이 마케도니아 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고 한다. [18] 안티오크, 셀레우키아, 라타키아, 아파메아 [19] 그 밖에 라리사 ( 샤이자르, 에피파네이아 (하마), 두라 에우로포스 등의 도시들이 개발되었고 코엘레 시리아인 홈스 ~ 디마슈크 일대는 방치되었다. [20] 이 패전으로 체결한 아파메아 조약으로 그리스가 사실상 로마령이 되며 셀레우코스 조의 그리스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시리아 일대에 뼈를 묻게 된다. 이로써 디마슈크 역시 퇴역병들이 정착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그 후계자인 안티오코스 4세가 에피파네아 (하마)로 대표되는 헬라화에 공을 들인 점도 있었다. [21] 알렉산드로스 1세와 데메트리오스 2세 때와 마찬가지로 프톨레마이오스 조는 자신들이 즉위를 도와준 국왕을 다시 폐위시키는 전략을 구사하며 셀레우코스 조를 약화시켰다. [22] 전자는 번개를 쥔 하늘의 신, 후자는 폭풍의 신이었기에 동일시 될 수 있었다. [23] 즉, 종교적 & 상업적 중심지를 이어준 것이다. [24] 유향 무역으로 이익을 보고 있었는데 하스몬 왕조가 기원전 100년에 가자를 점령해버려 해상 교역이 막히자 내륙의 팽창을 도모해 기원전 90년 무렵에는 디마슈크 남쪽 하우란까지 진출한 상태다. 그 외에도 셀레우코스 조의 쇠퇴를 틈타 에메사의 삼프시케라무스 1세는 디마슈크 북쪽 70km의 아브루드까지 영토를 넓혔고, 유목민 계열인 이트레아는 레바논 베카 협곡에서 골란 고원까지를 지배하며 디마슈크와 페니키아 간의 교역을 차단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아랍계열로, 셀레우코스 조의 헬라화 노력에도 결국 현지 셈계 민족들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25] 그리스식 시가지가 남쪽 아람인 구역 등으로 확대되었고, 상징적인 직선 거리가 놓였다. [26] 이때 디마슈크의 직선 거리가 성경에서 언급된다. [27] 여담으로 현재 우마이야 대사원에 성지가 있는 세례자 요한(야흐야)이 그의 딸 파사엘리스와 결혼한 후 그녀를 내친 유대의 왕 헤로데 안티파트로스를 비난하다가 투옥되었다. 헤로데 안티파트로스가 조강지처를 내치고 제수 헤로디아와 결혼한 후 조카이자 의붓딸 살로메 3세가 춤을 추었는데, 그녀에게 원하는 것을 묻자 요한의 머리라 답하여 처형된 것이다. [28] 특히 카르도, 즉 원형 열주는 안티오키아보다 먼저 세워졌다. 중심 도로에 이러한 열주 건물을 세우는 것은 현지인들에게 로마의 위대함을 선전하는 것 외에도 길거리 상인들이 태양빛을 피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함이었다. [29] 실제로는 나블루스 인근에서 처형되었다. [30] 대표적 예시로 3주간 저항한 예루살렘은 대규모 약탈과 학살을 겪었다. [31] 629년 무타 전투를 보듯 무함마드 역시 헤자즈 지방과 지리적으로 연결된 시리아를 아라비아 반도 외의 첫 대상지로 삼았다. 그러나 아부 바크르는 우선 '성서의 백성'도 아니었고 동로마에게 패한 후 약화되었던 페르시아를 우선 침공하였다. 그러던 634년 초엽, 신흥 세력의 발호를 경계한 동로마는 과거의 적인 페르시아에 원군을 파견한 것을 계기로 이슬람 제국은 공격의 화살을 시리아로 돌리게 된 것이다. [32] 이라크에서 사막을 횡단해 팔미라를 거쳐 디마슈크 동쪽 독수리 고개를 넘을 때에 초록 깃발을 꽂아 이슬람의 당도를 알림. 다만 친위대만을 대동한 상태였음으로 도시 자체를 공격하진 않고 주변 습격한 후 남하해 본군과 합류했다. [33] 배신의 대가로 그는 자신과 약혼녀에 대한 사면을 요구했다고 한다. 기타 무슬림 기록에 의하면 약혼녀는 포위가 시작되는 바람에 그에게 넘겨지지 않았다. 따라서 평화가 필요했던 그는 최대한 빨리 칼리드에 접촉하였고, 나중에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한다. 이후 그녀는 여러 기독교도들과 함께 도시를 떠나 안티오키아로 향했는데, 이에 요나는 칼리드에게 안티오키아로의 지름길을 알려주고 함께 진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마침내 그는 포로 중에서 약혼녀를 발견했지만, 그녀는 변절한 그에게 실망해 자살하였다고 한다. 칼리드는 요나에게 포로로 잡힌 동로마 황녀와 결혼할 것을 제안했지만 요나는 거절하였고, 이후 황녀는 헤라클리오스의 부탁에 따라 돌려 보내졌으며 2년 후 요나는 야르무크 전투에서 동로마군과 싸우다 전사한다. [34] ثُمَّ يَنْزِلُ عِيسَى ابْنُ مَرْيَمَ عِنْدَ الْمَنَارَةِ الْبَيْضَاءِ شَرْقِيَّ دِمَشْقَ فَيُدْرِكُهُ عِنْدَ بَابِ لُدٍّ فَيَقْتُلُهُ [출처] https://sunnah.com/abudawud/39/31 [36] 사실 공성전 도중 즉위한 신임 칼리파 우마르는 칼리드를 해임하고 아부 우바이다를 총사령관으로 선임했는데, 칼리드가 숨기고 있었음으로 이 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37] 이후 비가 내려 토마스의 병력 및 난민들의 행렬이 지체되자 칼리드는 그들을 따라잡아 약속한 3일이 끝나자마자 공격해, 마르즈 알 데바즈에서 격파하고 토마스의 부인인 황녀를 비롯한 엄청난 전리품을 얻어 공방전 당시의 아쉬움을 달랬다. [38] 지즈야는 군 복무를 하지 않던 이교도들을 지켜준다는 보호세 명목으로 걷던 것인데, 더이상 보호해주지 못하니 돌려주라고 아부 우바이다가 지시한 것이다. [39] 시리아의 정식 중심지는 자비야였지만, 639년부터 우마이야 가문이 총독위를 독점하게 되며 그 가문의 거점인 디마슈크가 사실상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실 이슬람 정복 이전, 자힐리야 시대부터 이미 우마이야 가문은 히자즈-시리아 무역을 주도하며 시리아 남부에 어느정도 재산을 확보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마이야 왕조 역시 시리아를 중심으로 삼은 것이다. [40] 우스만의 과부 (무아위야의 고모)가 보내온 것이다. [41] 기존 동로마 총독 관저를 개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650년경 사하바 중 한 명인 아부 다르 알 기파리가 그 궁전의 화려함을 규탄하다가 도시에서 쫓겨났다. 칼리파 우스만은 그를 메디나에 살게 해주었는데, 그곳에서도 역시 사치에 실망하였다고 한다. [42] 그의 손자가 바로 앞서 언급된 요안니스였다. [43] 심지어 무아위야는 우마이야 일족과 그 관련자들을 제외하면 이민을 받지 않기까지 하였다. 우마이야 가문은 동로마 총독의 궁전이 있던 성 요한 바실리카 남쪽 지역에 집단 거했다. 초청받은 사하바들을 비롯한 다른 아랍 무슬림들은 성 밖 구타 오아시스에 주로 거주했다. 서기 700년 무렵 약 350만에 달한 시리아 인구 중 무슬림은 약 20만 정도로 추정된다. [44] 이로써 여전히 정교회 수중에 있던 성 마리 성당이 디마슈크의 중심 성당이 되었다. [45] 알 사카섹이라고 불렸으며, 현재의 건물은 19세기 화재로 소실된 것을 오스만 당국이 중건한 것이다. [46]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휴전을 기념해 파견해 준 장인들이었다. 기둥을 제외한 모든 벽면이 그러한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었다. 비록 현재는 중앙부를 제외한 모자이크가 소실되었지만, 라벤나의 산 비텔레 성당과 함께 현존하는 후기 로마 모자이크를 옅볼 수 있는 소중한 유산이다. 로마식 성당과 달리 내부 외에 외부까지 모자이크로 도배한 것은 우마이야 대사원이 유일무이하다. 또한 현재의 단일 돔과 달리 당시에는 하기아 소피아처럼 2개의 작은 돔이 중심 돔을 지탱하고 있었는데, 12세기 여행가 이븐 주바이르는 목재로 만들어진 이들 돔에 세겨진 화려한 장식에 감탄하며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라고 극찬하였다. 그러나 1893년의 화재로 현재는 알 수 없게 되었다. [47] 이러한 대사원, 열주 회랑으로 둘러쌓인 안뜰, 궁전의 배치는 다른 우마이야 왕조 시대의 도시들에서도 나타난다. 한편 지붕에 덧씌울 납을 조달하기 위해 고대 석관까지 털었다고 한다. 한편 왈리드는 이 외에도 707-9년 메디나의 무함마드 집터에 예언자 모스크, 709-14년에 바위의 돔 옆에 알 아크사 모스크를 세웠다. 메디나, 예루살렘의 성지와 함께 수도 디마슈크가 대역사의 장으로 선택된 것. 이러한 건축들은 기존 문명들에 대한 이슬람의 승리를 기념하는 것이었다. [48] 사실 건축광 왈리드 때부터 시작된 풍조였다. 히샴의 경우 기독교도들의 순례지였던 루사파를 개발했다. 이러한 사막 지대의 별궁 건설은 아랍계 왕실의 과거 베두인적인 삶에 대한 회귀 혹은 향수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49] 756년 서쪽 안달루스에 후우마이야 조가 세워지며 우마이야 조의 부활에 대한 경각심이 극대화 된 결과로 압바스 당국의 차별이 더욱 심해졌다. [50] 천일야화의 매인 빌런인 그 자파르이다. [51] 궁전과 대사원을 이어주던 회랑의 열주만이 19세기 중반까지 잔존하였다. [52] 우마이야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 시대의 권신 [53] 현재까지도 그 일대는 카스르 알 핫자즈로 불린다. [54] 그동안 압바스 조 역시 튀르크 용병 (굴람)의 유입과 함께 서서히 쇠퇴하였다. [55] 앗 투구르 알 아와씸 [56] 오직 이집트 수석 판관 바카르 이븐 쿠타이바 등 세 명만이 반대하였다. [57] 886년 불특정, 893년 30만 디나르, 896년 45만 디나르로 인상되었다. [58] 이후 많은 툴룬 조의 관리들이 이탈하였다. [59] 그는 이집트의 친 툴룬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후 동로마령 카파도키아를 습격하였다. 다만 후세인 이븐 함단의 반란 진압엔 실패하였고, 이를 진압한 무니스 알 무자파르의 권력이 커졌다. [60] 이는 중앙집권 + 무니스 잔존 세력 소탕의 의미였다. [61] 마그리비야 (베르베르), 마샤리카 (튀르크) 등 군부의 투쟁이 벌어졌다. 전자는 아흐마드, 후자는 무함마드 이븐 타킨을 지지하였다. [62] 935년 8월 26일 푸스타트 입성한다. 파티마 왕조로 도주한 아흐마드는 그 칼리파 알 카임과 함께 돌아와 알렉산드리아의 마그리비야와 함께 푸스타트를 위협했으나 결국 격퇴되었다. [63] 이후에도 압바스 조는 최소한 시리아라도 수복하려 했으나 무함마드는 그럼 파티마 칼리파와 혼인 동맹을 맺고 그 종주권을 인정하겠다며 협박하여 무마시켰다. 파티마 왕조 역시 당시 내부 반란으로 이집트에 신경쓰지 못했기에 이집트는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다만 그럼에도 대장군 무함마드 빈 라이크는 침공을 감행하였다. [64] 우누주르, 알리 형제의 치세 동안 실권자로 행세하던 카푸르는 966년 후자가 사망하자 스스로 아미르가 되었으나 968년 4월 사망하였다. 그후 알리의 아들 아흐마드가 즉위했으나 연이은 흉년으로 인한 경제난, 재상 자파르와 군부의 대립 등 혼란이 이어졌다. [65] 한펻 연공으로 인해 경제난에 처한 팔레스타인 총독 하산은 혼란의 이집트로 향하여 5초 조카인 아미르 아흐마드의 섭정이 되었다. (968년 11월) 그러나 미래를 비관한 그는 이듬해 1월 말, 정예 병력 및 관료들을 대동하고 파티마 왕조의 침공이 임박한 푸스타트를 두고 시리아로 향하였다. 약 일주일 후 출병한 자우하르의 파티마 군대는 969년 여름 이집트를 정복하였다. [66] 이때 카르마트 군의 일부는 파티마 조에 맞서도록 하산 휘하에 들어갔다. [67] 압바스 가문의 아비 얄라과 일반인 무함마드 이븐 아수다가 대표로 선임되었다. [68] 그후 자파르는 칼리파의 숙원 사업이던 대로마 지하드에 착수, 부관을 파견해 안티오크를 공격했지만 격퇴되었다. [69] 그 외에 파티마 조를 경계하던 부와이 왕조 및 함단 왕조가 도와주었다. 전투 후 무함마드 이븐 아수다는 자파르의 목을 베어 형제의 복수로 삼았다. [70] 다만 고령이던 하산은 라믈라 탈환 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연합군은 라믈라를 거쳐 파티마 군을 추격, 아슈켈론을 포위하였다. [71] 같은해 알프타킨은 이라크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한 이즈 앗 다울라와 그의 다일람 군대까지 받아들였다. [72] 알프타킨의 능력을 높이 사던 알 아지즈는 그를 용서하고 튀르크 용병대장으로 삼았는데, 그를 시기한 재상에게 암살되었다. 카르마트는 이라크 방면에서도 985년 부와이 조에게 대패한 후 잠잠해졌다. 한편 카르마트는 연공을 대가로 바레인으로 철수한 후 다시 시리아에 나타나지 않았다. [73] 혹은 980년 [74] 970년 디마슈크를 점령했던 자파르 빈 팔라의 아들이다. [75] 당시 함단 왕조에 복속한 튀르크 장군 바크주르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76] 이후 부족장 무파리즈는 홈스를 거쳐 동로마령 안티오크로 도주, 동로마 편에서 바크주르의 알레포 공격에 맞섰다. 다만 984년 칼리파 알 아지즈의 사면으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와 디마슈크 총독 바크주르의 동맹이 되었다. 비록 988년 바크주르와 토벌군 간의 전투에서 패한 후 전자와 라카로 떠났는데 991년 파티마 조의 재상 야쿱이 사망하자 (그의 유언과 달리) 알 아지즈로부터 재차 사면을 받아 귀환하였다. 그리고 만주타킨과 베르베르 군단의 대결 시에 자라흐 부족은 전자에 붙었다가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자로 전향, 만주타킨을 추격해 사로잡기까지 하며 세력을 유지하였다. [77] 같은해 여름 홈스의 아미르 바크주르가 함단 왕조에서 파티마 조로 전향한 후 그 군대를 이끌고 할랍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함단 왕조의 요청으로 남하한 동로마 군이 그를 격파하고 역으로 홈스까지 점령하였다. [78] 그는 대사원의 이사 미나렛이 최근 지어졌다고 기록했다. [79] 그곳에서 바크주르는 재차 전 주인인 함단 왕조의 사드 앗 다울라의 알레포를 빼앗기 위해 싸웠다. 이에 사드 앗 다울라는 재차 동로마의 지원을 받아 991년 4월 알레포 동쪽 나우라에서 바크주르를 격파하였고, 사로잡힌 그를 처형하였다. [80] 마침내 996년, 알 아지즈는 알레포로 친정을 나서려 했으나 출정 직전 급사하였다. [81] 군부가 마샤리카 (튀르크) 쪽으로 기우는 것에 반발한 마그리비야 (베르베르) 군단이 어린 칼리파 알 하킴을 끼고 조정을 장악하려 하였다. [82] 다만 튀르크 군부와도 화해하려 했던 재상 하산 이븐 암마르는 그를 단순히 은퇴시켰고, 1007년 카이로에서 자연사하였다. [83] 야루크의 진군을 접한 자라흐 부족장 무파리즈의 두아들 마흐무드와 알리가 이집트를 탈출해 부친에게 이를 알렸다. 후세인은 무파리즈에게 야루크가 라믈라에 당도하기 전에 공격하도록 설득하였고, 그들은 가자에 매복하였다. 이를 접한 야루크는 라믈라에서 1,000명의 기병을 징발해 매복대를 후면에서 기습하게 하였는데, 그 전령이 자라흐 부족에게 잡혔다. 따라서 작전은 실패하였고 야루크는 그대로 라피아에서 붙잡혔고 라믈라가 점령되었다. 이에 알 하킴은 야루크 석방 및 5만 디나르 지급의 회유책을 내놓았는데, 무파리즈가 넘어갈 것을 우려한 후세인은 그의 아들 하산을 설득해 야루크를 처형해버렸다. 후세인은 직접 메카로 향하여 아불 푸투흐 알 하산을 설득해 알 라시드 빌라로 선포하고 라믈라로 데려왔다. 다만 그가 가져온 재물이 떨어지자 자라흐 부족의 지지가 흐지부지 되었고, 이에 낙심한 알 하산은 메카로 돌아가 파티마 조에 재차 충성하였다. 이후 알 하킴의 뇌물을 받은 무파리즈의 아들 하산이 포로를 석방하는 등 유화적인 모습을 보이자 후세인은 이라크를 거쳐 자지라로 도피하였다. 그리고 1013년 여름 알리 이븐 자파르가 24,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라믈라를 수복하였다. 무파리즈는 독살되었고, 하산은 항복하고 부친의 영지를 이어받았다. [84] 시리아 남부와 팔레스타인 [85] 그는 후에 1058년부터 2년간 재차 디마슈크 총독을 맡았고, 1060년대 이집트의 내전 시에 카이로를 장악하기도 하였다. [86] 아트시즈는 후퇴하며 반란을 일으킨 예루살렘의 동부 구역을 포위, 함락하였는데 알 아크사 사원으로 피신한 이들을 포함한 주민 3,000여명을 학살하였다. (바위의 돔으로 피신한 이들은 예외였다.) [87] 야기 시얀의 아들 샴스 앗 다울라의 요청대로 두카크는 안티오크 동쪽 하림에서 식량을 징발하던 타란토 백작 보에몽과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의 십자군 분견대와 마주쳤다. 하지만 두카크가 망설이는 동안 십자군은 전투 대형을 갖추었고 이어진 전투에서 다마스쿠스 군대는 패하였다. 두카크는 샴스의 필사적인 설득에도 불구하고 하마로 철수하였다. 그나마 전투 중 십자군의 식량이 소실되어 안티오크 포위전 내내 그들이 식량 부족으로 고통받게 된 것이 야기 시얀의 유일한 소득이었다. [88] 이듬해 모술의 카르부카의 구원 시에도 두카크는 합세하였다가 승리 시에 그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전투 직전 이탈하였고 오히려 그의 영토인 디야르바크르를 점령해버렸다. [89] 1100년 초엽, 그는 예루살렘에서 성탄절을 보내고 각자의 영지로 돌아가던 안티오크 공 보에몽과 에데사 백작 보두앵의 일행을 바알벡 부근에서 기습했으나 격퇴되었다. 다만 그해 5월, 골란 고원을 약탈하고 귀환하던 십자군에 대한 습격은 성공적이었다. 십자군은 많은 약탈물 때문에 제대로 반격도 못하였고, 전사자들을 수습하지도 못하고 패주하였다. 이는 시리아의 영주가 십자군에 대해 처음으로 거둔 제대로된 승리였다. [90] 그 결과 1명은 개종을 수용하였고 거부한 나머지 5명은 처형되었다. [91] 1110년 10월, 예루살렘 국왕 고드프루아가 사망한 후 그 조카인 에데사의 보두앵이 계승을 위해 소수의 병력과 예루살렘으로 남하하였다. 복수를 노리던 두카크는 레바논의 '개의 협곡'에 매복하여 그를 노렸으나 두카크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인근 트리폴리의 파크르 알 물크가 보두앵에게 이를 누설하였다. 십자군이 진군을 멈추자 당황한 디마슈크 군은 다음날 화살을 날리며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반격을 당해 패퇴하였다. 이로써 작전은 실패하였고, 무사히 즉위한 보두앵 1세는 첫 군사 활동으로 요단강을 넘어 디마슈크령 요르단을 약탈하였다. [92] 십자군의 위협이 가중되자 1101년 봄, 시리아의 해안도시 자블라의 카디가 디마슈크에 복속하였다. 이에 두카크는 부관 툭테긴의 아들 부리를 태수로 파견했지만 주민들의 반발을 사 축출되었고 도시는 트리폴리령이 되었다. [93] 애초에 트리폴리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것. 도시를 수복한 파크르 알 물크는 부리를 사과 편지와 함께 되돌려 보냈다. [94] 레몽의 십자군이 트리폴리를 포위하자 파크르 알 물크는 염치 불구하고 도움을 청해왔다. 1102년 4월 두카크는 홈스의 병력과 함께 그와 합류했는데,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둘은 이탈해버렸고 당황한 파크르 알 물크는 병력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대패하였다. [95] 정확히는 중상을 입은 후 사망했다. [96] 1105년 8월, 파티마 군대가 북상하자 툭테긴은 부관 사바와에게 1,000여 군대를 주어 합류시켰다. 다만 연합군은 8월에 벌어진 3차 라말라 전투에서 보두앵에게 격파되었다. 1105년 10월에는 디마슈크 군이 갈릴리의 토론 성채를 공격했으나 보두앵이 재차 격퇴하였고, 툭테긴은 그와 휴전을 체결하였다. 이때 디마슈크 사절단은 보두앵이 환대해주자 감탄하였다고 한다. [97] 그에 의하면 1085년 톨레도 함락부터 십자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또한 선지자 무함마드의 말대로 알 쿠드스 (예루살렘)는 단지 일시적으로 잃은 것일 뿐이고 콘스탄티노폴리스도 정복될 것이라고 얘기했다. [98] 그는 보에몽에게 티베리아스, 하이파, 아크레를 할양하라는 무리한 석방 조건을 걸었다가 거절되자 몸값 제의도 거절하고 그를 처형하였다. 8월엔 보두앵이 시돈을 포위하자 툭테긴은 도시로부터 30,000 베잔트를 받고 튀르크 기병을 파견해주었고, 포위는 풀렸다. 다만 싸움 없이 원군의 존재 만으로 보두앵이 퇴각한 것임에도, 그후 시돈은 도시를 점령하지 않는 대가로 보두앵에게 9,000 베잔트 추가 지급했다. [99] 포위가 지속되던 트리폴리의 태수 파크르 알 물크는 직접 바그다드로 향하여 술탄의 원군을 얻어내려 했으나 의례적인 답변만을 얻었다. 소득 없이 귀환한 그는 포위된 트리폴리로 가지 못하고 디마슈크에 머물렀는데, 도시가 파티마 조에 복속했다는 소식에 자블라로 은퇴하였다. 그리고 머무는 동안 호의를 베풀어 준 툭테긴에게 보답으로 아르카 영주의 복속을 주선해 주었다. 다만 1109년 탕크레드가 자블라를 함락하자 파크르 앗 딘은 재차 디마슈크로 돌아왔다. [100] 1111년 툭테긴은 술탄이 십자군에 맞서도록 파견한 마우두드와 합류했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101] 유력자들의 재산 보관을 약속하였는데, 이를 위한 운송 행렬은 보두앵에게 약탈당하였다. 본래 레이날드라는 십자군 기사를 매수하여 십자군 영토 안전히 통과할 계획이었는데 그가 보두앵에게 폭로해버렸다. 툭테긴은 티레에 집중하기 위해 알레포의 리드완과도 동맹하였다. [102] 1113년 봄, 보두앵이 진군해오자 툭테긴은 마우두드와 연합하여 6월 티베리아스를 포위하였고 구원에 나선 보두앵을 앗 산나브라 전투에서 격파하였다. 다만 티베리아스 포위는 트리폴리-안티오크의 개입으로 풀렸다. [103] 심지어 보두앵 역시 그리 여겨 자신의 대장을 신의 집에서 죽인 민족은 망해야 마땅하다며 비꼬았다. [104] 1115년 1월 일가지는 디마슈크를 향하던 중 홈스의 키르한에게 포로가 되었고, 아들 아야즈를 인질로 겨우 풀려났다. [105] 따라서 마우두드의 후임으로 파견된 부르수크는 툭테긴의 보급기지 하마를 점령하였다. 1115년 툭테긴-룰루-일가지는 십자군과 함께 진군하였고, 비록 사르민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회군했지만 분노한 술탄 무함마드 1세는 십자군에 대한 개입을 중단을 결심하였다. [106] 이후 툭테긴은 자르다나를 장악했고, 일가지의 만류에도 자르다나 영주 로베르를 처형하였다. [107] 툭테긴은 막 즉위한 그에게 요단강 동안 할양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한 바 있다. [108] 다마스쿠스 출생으로, 핫지 (성지 순례) 후 바그다드부터 메르브까지 중앙아시아를 여행하며 하디스를 수집해 하피즈가 되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술탄 누르 앗 딘의 후원을 받아 '타리크 디마쉬크 (다마스쿠스 역사)'를 집필하였고 이에 술탄은 그를 위해 다르 알 하디스 마드라사를 세워주었다. [109] 1120년, 일가지와 툭테긴은 재차 연합 작전에 나섰으나 보두앵 2세와 대치하다가 1년 휴전을 맺었다. [110] 1123년 파티마 조는 십자군의 공격이 임박한 티레를 툭테긴에게 매각하였다. 이듬해 툭테긴은 700명의 증원군을 파견하고 일가지의 후계자 발라크와 아자즈를 공격해 주위를 분산시키려 했지만 포위는 진행되었다. 티레 구원을 약속했던 발라크가 급사함과 함께 바니야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툭테긴은 십자군이 다가오자 디마슈크로 철수, 티레의 항복 협상을 도와 주민들의 안전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111] 1126년 11월, 툭테긴의 재상 알 마즈다가니는 도움의 대가로 아사신에게 바니아스를 할양하였다. [112] 각 제후들도 포함이다. [113] 승리 후 부리는 연회를 열었던 터라 십자군에게 좋은 반격 기회였는데 폭풍을 신의 징벌로 여겨 퇴각했다. [114] 1128년부터 알레포와 모술을 지배하던 장기가 1130년 동맹을 제안하였고, 이를 수락한 부리는 하마 태수 사윈지와 아들 세비츠 휘하 5백 기병대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장기는 알레포에 그들이 도착하자 감금해버리고 부리가 5만 디나르의 몸값을 제안했음에도 거절하곤 하마를 점령, 홈스를 포위한 후 회군한다. [115] 패배 후 도주하던 중 마론파 기독교도 루이에게 붙잡혀 넘겨졌다. 8월엔 장기가 바린 전투에서 십자군을 격파한 틈에 나블루스를 습격하였다. [116] 이에 다른 왕자 바흐람샤는 장기에게 망명하였다. [117] 장기는 무함마드에게 항복하면 홈스나 바알벡 준다 하였고 이에 그가 혹하였으나 우누르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118] 다만 그 다음달엔 장기에게 잃었던 바알벡과 하마를 수복하였다. [119] 알탄타쉬는 성 2개를 할양한다는 조건으로 도움을 청함. 십자군 측은 단지 그를 돕는 것이지 디마슈크에는 피해 주지 않을 것이고 하우란 일대에 야곱파 기독교도가 많다며 수락했다. [120] 정확히는 알탄타쉬의 부인이 디마슈크 군을 시타델로 들여보냈고, 당도하여 이를 확인한 십자군이 철수한 것이다. [121] 즉, 시가전을 준비했다. [122] 도시 주인을 놓고 벌인 논쟁에서 현지 제후들이 서유럽 제후들에게 밀리자 앙심을 품고 우누르와 내통하거나 뇌물을 받고 진영을 옮긴 것이라고 한다. [123] 한편 이듬해에 트리폴리 백국에서 내전이 터지자 백작 레몽 2세가 도움을 구할 정도로 우누르는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다만 2번의 포위에서 회복하느라 여력이 없었기에 기회는 누르 앗 딘에게 넘어갔다. [124] 보두앵이 곧 돌아가자 보스라 영주인 사르카크가 십자군에 복속하였다. 그러자 아바크는 바알벡에 있던 누르 앗 딘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그의 위협에 사르카크는 다시 디마슈크에 복속하였다. [125] 유대인들이 주축이었다고 한다. [126] 다만 불과 한 달만에 디마슈크 수복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어 영지를 압수당하고 바그다드로 은퇴하게 된다. [127] 같은해 아모리는 홈스를 공격하는 척하며 누레딘을 끌어낸 후 재차 이집트를 공격하였다. [128] 1170년 누레딘은 살라딘의 부친 아이유브를 파견하여 파티마 조를 멸할 것을 지시하였는데 진행되지 않자 이듬해 군사 원정을 언급하며 위협하였다. 다만 그 전에 알 아디드가 사망하고 수니파가 복원되며 사태는 일단락이 되었다. [129] 본래 이븐 알 무카담은 모술의 사이프 앗 딘과 연대하려 했으나 그가 거절하자 살라딘에게 도움 청한것이다. [130] 그녀는 부친을 위한 마드라사와 영묘 건설 후원했고, 살리히예 구의 자마 알 자지드에 묻혔다. [131] 이후 다시 알레포를 포위했지만 역시나 십자군의 개입으로 휴전 후 철수한 살라딘은 이집트로 향했다. [132] 정확힌 보두앵 4세의 퇴로를 보장하기 위해 싸우다 중상입고 곧 사망했다. [133] 1180년 살라딘은 십자군과 2년의 휴전을 맺었다. 이듬해 말엽 알레포의 앗 살리흐가 사망하자 살라딘은 1182년 5월 동생 알 아딜에게 이집트를 맡기고 북상하였다. 마침 십자군과의 휴전도 끝났다. 파루크샤와 함께 십자군과 싸우던 살라딘은 장기 왕조와의 휴전이 끝난 9월 재차 북상하였다. [134] 보두앵은 도시 외곽의 모스크를 파괴하려 했으나 현지 기독교도들이 그런다면 바알벡 총독 이븐 알 무카담이 시내 교회 파괴할 것이라 만류했다. [135] 다만 부재 시에 메카를 노리는 등 악행을 일삼은 르노 드 샤티용의 응징을 위해 한달도 안되어 카라크로 출정하였고 12월에야 귀환하였다. 1184년 살라흐 앗 딘은 재차 카라크를 포위했으나 역시 실패하고 9월 회군하였다. [136] 다만 이듬해 보포르 성채가 항복하며 풀려났다. [137] 1219년 이집트 군부의 반란 시에도 직접 구원에 나섰다. [138] 이에 알 카밀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2세와 접촉하였다. [139] 200명이었고 50명이 포로로 잡히자 알 카밀은 배신자라 욕하며 교수형에 처하였다. [140] 근거지를 잃은 아이유브는 케라크의 앗 나시르에게 의탁하려 했으나 결국 그의 포로가 되었다. [141] 정확힌 체포되고 석방된 후 망명했다. [142] 이스마일의 이러한 배려에도 십자군은 템플기사단 등 현지 제후들의 반발에도 술탄 아이유브와 협상하였다. (1241년) [143] 한편 이스마일과 동맹했던 앗 나시르는 그가 사파드 성채의 무슬림 봉기를 돕기는 커녕 십자군에게 알려 학살을 도운 것에 경악, 그해 6월 술탄과 동맹했다. 그 후 이스마일은 앗 나시르를 격파하고 십자군과 이집트 원정을 시도하였으나 가자에서 술탄의 군대에 막혀 철수하였다. [144] 1243년부터 십자군은 제국파와 이벨린 가문 사이의 내전을 벌였다. [145] 이로써 시리아-십자군 연합군의 이집트 원정은 무산되었다. [146] 이에 대해 이스마일을 추격해 체포하라는 왕명을 거절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147] 아이유브의 선봉장 파크르 앗 딘은 1246년 말까지 예루살렘, 나블루스, 보스라를 점령하였는데 연말에 와병하였다. 그러자 1247년 3월 술탄은 직접 시리아로 향하였다. [148] 이후 파크르 앗 딘은 십자군으로부터 티베리아스, 아슈켈론을 점령였다. 술탄의 시리아 통합을 경계한 알레포의 앗 나시르 유수프는 망명해온 이스마일과 홈스를 포위하였다. (1248년 5월) 이에 아이유브는 재차 친정을 결심하였지만 와병하였고, 결국 홈스는 항복하였다. [149] 6월에 그가 이집트에 당도할 무렵 7차 십자군 역시 다미에타를 무혈 점령하고 남하하였다. 앗 나시르의 카라크가 술탄군에게 점령된 것이 유일한 희소식이었다. [150] 투란샤가 이집트에 당도했을 당시 이미 7차 십자군은 맘루크 군에게 대패한 상태였다. 하지만 투란샤는 승리를 이끈 바흐리 맘루크 대신 자신의 친위 세력을 등용하였고, 불만을 품은 그들에게 5월 암살당하였다. [151] 이후 아이바크는 십자군과 동맹하여 시리아를 공격할 계획까지 세웠지만 실현하지는 않았다. [152] 다만 이듬해 그는 십자군과 2년 6개월의 휴전을 맺었다. [153] 1255년 아이바크는 십자군과 10년 휴전을 맺었다. 한편 아이바크의 숙청으로 바이바르스 휘하 바흐리 맘루크가 유수프에게 망명하였는데 유수프는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였다. [154] 1258년 몽골군은 이라크 공략에 나서자 알 무스타심과 마야파리킨 영주 등이 유수프에게 도움을 청하였는데, 그는 약속만 하고 제대로 돕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시리아 남부를 약탈하던 바이바르스와 싸웠고, 바그다드가 결국 함락되었을 때에도 원군은 여전히 '준비 중'이었다. [155] 얼마 후 가자에 당도한 유수프는 앗 자히르 가지와 화해하고 군세를 합쳤다. 다만 바이바르스는 곧 쿠투즈의 사면을 받아 이집트로 향하였다. [156] 왈트 (지휘관) 바드르 앗 딘 무함마드 이븐 칼리자르와 나킵 알 칼라 (성주) 자말 앗 딘 알 사이라피가 가자에서 파견된 유수프의 은밀한 지시 받고 봉기한 것이다. [157] 8일 후 그는 다른 아이유브 왕공들과 타브리즈의 훌라구에게 보내졌다. [158] 그 틈에 십자군이 하우란을 습격했지만 격퇴되었다. [159] 그 결과 알 무스탄시르는 패하고 전사한다. [160] 10월 3일 이집트로 회군하였다. [161] 이후 십자군 사절과 10년의 휴전에 합의하였으나 그 범위를 놓고 추후 갈등이 일며 결렬되었다. [162] 바이바르스 역시 홈스에까지 북상했다가 회군하였다. [163] 알레포, 하마, 베두인 족장 시사 등이 그를 지지하였다. [164] 먼저 라흐바로 향했는데 입성하지 못하자 사흐윤으로 갔다. [165] 다음달 순쿠르는 안티오크와 아파메아의 영지를 대가로 항복했다. [166] 막 당도한 이탈리아 출신의 기사들이 전쟁이 없는 것에 실망하여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다가 무슬림 상인이 기독교도 여성을 유혹했다는 풍문에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인근 소작농 출신 무슬림 상인들 뿐만 아니라 수염을 길러 라틴인같지 않아 보이는 이들을 보이는대로 살상하였다. 이로써 19명의 상인들이 희생되었고 그 유가족들은이 피묻은 옷을 카이로에 보내 하소연하자 칼라운은 주동자 전원 소환을 요구하나 아크레 측이 그들은 '외국인'이라 처벌이 어렵다고 답해오자 원정을 결심하였다. [167] 이듬해 초엽에는 크락 데 슈발리에에서 주조한 대형 투석기 알 만수르가 당도했다. 후자의 운송은 수십마리의 소가 동원되었다. [168] 3일 후 아크레에 당도한 라긴은 포위망 구축에 나섰다. 그 다음날 트리폴리 병력이 합류했다. [169] 알 파크리와 친한 라긴이 밤을 틈타 도주하려 했는데, 아미르 알람 앗 딘 알 다와다리가 '무슬림의 대의'를 손상시키지 말자며 만류하였다. 다음날 칼릴은 라긴을 불러 예복을 하사하며 신뢰를 보였는데, 3일 후에 돌연 그를 체포하여 사파드 성채에 감금하였다. [170] 혹은 10일 간의 포위 후 수비대가 항복했다. [171] 가잔 칸이 이슬람으로 개종했음에도 한발리파 신학자 이븐 타이미야는 그가 진정으로 '샤리아를 따르는' 무슬림이 된 것이 아니라며 지하드를 선포하였다. 그 배경에는 가잔 칸의 시리아 원정이 있다. 1300년 1월, 다마스쿠스 북쪽 앗 나브크에 있던 일 칸국 진영에 맘루크측 사절단이 당도하였다. 이븐 타이미야를 포함한 이맘들로 구성된 사절단은 가잔에게 다마스쿠스 시타델에 대한 공격의 중단을 청하였으나 거절되었다. 1301년 8월 이븐 타이미야를 포함한 이맘들은 다마스쿠스로 파견된 일 칸국의 카디 디야 웃딘 무함마드를 포함한 몽골측 사절단을 만났다. 두 경우 모두 맘루크측 이맘들은 감히 가잔 칸을 언급하지 못했는데, (둘중 한 경우에서) 이븐 타이미야만이 대놓고 그를 비판했다고 한다. [172] 맘루크 조가 시리아의 목초지를 전부 태워버리는 청야 전술을 벌인 것도 이유였다. [173] 이후 요단강 일대에 2만 병력을 배치했다. [174] 십자군 역시 루아드 섬에 소수의 수비대만을 남긴 채로 돌아갔다. 가잔 칸은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게 예루살렘 할양을 대가로 파병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가잔 칸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남겨진 루아드 섬은 1302년 9월, 맘루크 군에게 함락되었다. 이로써 더이상 '서방' 십자군 병력이 시리아 내부로 침투하지 않았다. [175] 충격을 받은 가잔 칸은 코피를 흘리고 쓰러져 이듬해 사망하였다. [176] 따라서 후일 시오니즘의 토대 중 하나가 되었다. [177] 이후 유럽 각국에서 감사 훈장을 받는다. [178] 1910년에는 바트당의 창시자 미셸 아플라크가 디마슈크에서 탄생한다. [179] 1일에 호주 기병대, 3일에 파이살 휘하 아랍군 [180] 정확히는 사회주의 친소파다. [181] 유배, 추방, 좌천에 그치던 기존 쿠데타들과 달리 20여명이 처형되었다. [182] 1949년 메나르샤 시나고그에 테러가 발생한다 [183] 레콘키스타 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이 세운 시나고그로, 유대-스페인어로 예배를 본다. [184] 비단 다마스쿠스 내부 사정뿐만 아니라 정부군 통제하의 다마스쿠스- 홈스-타르투스- 라타키아 지역을 연이어 취재하면서 시리아 내전 한가운데 있는 아사드 정권 하 시리아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입장 및 삶을 볼 수 있는 다큐이다. [185] 물론 알라위파라도 반 아사드계열도 있긴 하지만, 대다수 알라위파는 이미 2010년대 중반에 아사드 정권으로 기울어진 상태다. 비알라위 계열 시아파, 기독교도들도 이런 이유로 아사드 정부군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186] 다마스쿠스의 연강수량은 50mm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