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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리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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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티베리아스 오스만 모스크.jpg 파일:티베리아스 오스만 성벽 1.jpg
자히르 알 우마르가 건립한 우마리 모스크 십자군 시절 성채
1. 개요2. 역사
2.1. 고대2.2. 중세2.3. 십자군 전쟁2.4. 오스만 제국2.5. 근현대
3. 기타

1. 개요

히브리어 טְבֶרְיָה
아랍어 طبريا
영어 Tiberias

이스라엘 북동부의 도시. 갈릴리 지방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인구는 약 5만명이다. 한때 티베리아스 호로도 불린 갈릴리 호의 서안에 위치한다. 지명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에서 유래했다. 고대와 근대 시기 팔레스타인 북부의 주요 유대인 도시였고, 현대 히브리어가 이곳 방언을 기준으로 제정되었다. 또한 예루살렘, 헤브론, 제파트와 함께 유대교의 4대 성지 도시 중 하나이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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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성채, 사원 등 조금씩 남아있는 구도심의 흔적

서기 20년 헤로데 왕국 헤롯 안티파스가 티베리우스 황제를 기리며 세운 도시로, 유대 전쟁으로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이 정착하여 갈릴리 지방 최개의 유대인 도시가 되었다. 탈무드와 미슈나 등 상당수의 유대 경전들이 집필되었고, 유대인들에 적대적이던 동로마 제국을 지나 이슬람 제국기에 우르둔 주의 치소가 되는 등 번영했다. 다만 중세 시기 여러 전란과 지진을 겪으며 쇠퇴했다. 1187년에는 살라흐 앗 딘이 포위하며 하틴 전투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맘루크 왕조는 산지의 사페드를 갈릴리의 새 중심지로 삼았고, 한동안 마을 규모로 유지되던 도시에 18세기 팔레스타인 호족 자히르 알 우마르가 유대인들을 정착시키며 이슬람 / 기독교 / 유대교가 공존하는 도시가 되었다. 1837년 지진으로 크게 파괴되었던 티베리아스는 19세기 말엽 시오니스트들이 이주하며 점차 유대인 비중이 높아졌고, 결국 아랍인 수를 추월했다. 1차 중동전쟁 후 아랍계 주민들은 추방되었고, 구도심은 대부분 헐린 후 신규 유대 이주민들이 정착하며 개발되었다. 현재 티베리아스는 갈릴리 호에 접한 휴양 관광 도시이자 상업 도시이다. 남쪽의 함마트 티베리아스에는 2천년간 활용된 온천이 있다.

2.1. 고대

유대 전승에 따르면 본래 라카트라는 마을이 있었다 하나, 불분명하다. 확실한 것은 로마 제국의 번왕이자 헤로데 대왕의 아들인 헤롯 안티파스가 자신의 수도로 세운 도시라는 것이다. 시가지는 17개의 온천이 있는 함마트 티베리아스 옆에 조성되었고, 언덕 (아크로폴리스)에는 궁전이 세워졌다. 헤롯 안티파스는 일대의 다신교도들을 이주시켰고, 점차 유대인들도 정착하였다. 다만 초정통파 유대인들은 헬라화를 꺼려 이주하지 않았고, 티베리아스의 명성이 올라 갈릴리 호가 티베리아스 호로 불리게 된 후에도 도시를 유대식 이름인 얌 하키네렛이라 불렀다. 티베리아스는 600인의 민회가 자치를 했는데, 서기 44년 헤롯 안티파스의 사망과 함께 로마 제국에 병합되며 유대 총독의 직접 지배에 놓였다. 61년, 카이사레아 필리피에 기반한 헤로데 아그리파스 2세가 티베리아스를 병합했으나 뒤이은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당시 유대인 반군이 점령했고, 헤롯 왕조의 궁전을 파괴했다.

헤로데 아그리파스 2세가 반격하자, 주민들은 항전 대신 항복하여 대부분의 갈릴리 및 유대 도시들과 달리 티베리아스는 파괴되지 않았다. 70년, 예루살렘의 함락 후 남부의 유대인들은 대거 티베리아스로 이주했고 73년에는 헤로데 아그리파스 2세가 폐위되어 팔레스타인 전역이 로마 제국의 직할령이 되었다. 2차 유대 전쟁기에도 티베리아스는 반란에 동참하지 않았고, 비록 경제적 타격을 입긷 했지만 유지되었다. 반란 진압 후, 145년에는 예루살렘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이 정착했고 랍비 시메온 바르 야차이가 유대 율법에 따라 '정화' 작업을 했다고 한다. 유대 평의회인 산헤드린도 여러 도시를 전전하다 결국 220년 티베리아스에 정착하여, 425년 해산 시까지 유지되었다. 3세기 중반에는 랍비 요한난 바르 나파하의 주도로 예루살렘 탈무드가 집대성되었고, 티베리아스는 13개의 시나고그를 품은 중세 유대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2.2. 중세

동로마 제국기에도 티베리아스는 유대교의 중심지로 여겨졌다. 6세기 예멘의 유대교도 군주 두 누와스가 나즈란의 기독교도들을 학살하자, 크테시폰 네스토리우스파 주교 시메온은 팔레스타인 기독교도들에게 서신을 보내 티베리아스의 유대 지도자들을 잡아 고문하여 두 누와스에게 박해를 멈추게 할 것을 제안하였다. 614년 사산 제국군이 접근하자 현지 유대인들은 부호 벤자민의 후원 하에 봉기하여 이란인들을 도와 기독교도들을 학살하고 성당을 파괴했다. 다만 628년, 헤라클리우스의 군대가 남하하자 유대 반군은 항복하였다. 헤라클리우스는 본래 그들을 사면했으나, 기독교 사제들의 종용에 결국 이듬해 유대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에 나섰다. 그 결과, 유대인들이 모두 죽거나 이집트로 도주해 살아남아 갈릴리 지방에서 유대인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티베리아스는 634년 아랍 장군 슈라빌 빈 하사나에게 항복하여 이슬람 제국령이 되었다. 항복 조건에 따라 주택과 교회의 절반은 무슬림에게 할당되었고, 추방되었던 유대인들도 귀환한 것으로 보인다. 637년 예루살렘을 점령한 칼리파 우마르는 총대주교 소프로니오스와 협상한 끝에 티베리아스의 유대인 70가구를 성 남부에 정착시켰다. 이는 후일 동예루살렘의 유대 구역으로 이어졌고, 유대교에 있어 티베리아스의 중요성을 점차 줄었다. 다만 정치적으로는 636년 우르둔 주의 치소가 되는 등 계속 중시되었다. 우마이야 왕조 들어 남쪽의 베이산에게 주도 지위를 뺏겼으나, 710년경 왈리드 1세의 아들 우마르가 북쪽 호숫가에 민야 궁전을 지었고 749년 지진으로 베이산이 폐허가 된 후에는 재차 주도가 되었다.

시가지 남쪽의 동로마 시기 성당 옆, 베레니케 산 기슭에 세워진 대사원은 직경 78m x 90m 에 달했고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대사원을 모방하여 장엄함을 뽐냈다. 유대 학자들의 활약도 계속되어 고전 히브리어 문법이 정리되었고, 티베리아스 방언을 바탕으로 표준 히브리어가 제정되게 된다. 다양한 종교와 함께 분위기도 자유로워, 10세의 아랍 지리가 알 마크디시는 더위를 피하기 위한 쾌락이 난무한 도시로 묘사했다.[1] 또한 인근의 온천은 피부병이나 종기 등을 앓는 자가 3일간 목욕하고 냉탕에 담그면 치유의 효험이 있다고 믿어 환자들로 붐볐다고 한다. 10세기 후반 티베리아스는 쉬아 베두인 세력인 카르마트의 습격에 시달렸다. 혼란이 계속되자 에레츠 학당 등 유대 학교들이 더 안전한 예루살렘으로 떠나며 티베리아스의 중요성은 점차 낮아졌다.

11세기 들어 파티마 왕조 하에서 도시는 안정을 회복했다. 건과일, 기름, 포도주 등이 해안로를 따라 카이로로 수출되었고 침대 제작도 활성화되었다. 1047년 티베리아스를 방문한 페르시아인 여행가 나시르 호스로는 (호수를 제외하고)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져 있으며 (물고기가 가득한) 호수의 물 속에도 암반에 대리석 기둥을 박아 별장을 세워 두었다고 기록했다. 그에 의하면 대사원의 문 앞에는 온천 샘이 있었고, 시가지 서부에는 자스민 꽃으로 둘러싸여 있는 야스민 모스크가 있었다. 하지만 티베리아스는 1033년과 1066년의 강진으로 파괴되었고, 후자의 결과 대사원이 붕괴하였다.

2.3. 십자군 전쟁

십자군 시기 성 피에르 성당

1차 십자군이 티베리아스를 점령한 후, 시가지는 좀더 북쪽으로 옮겨져 현재의 위치로 바뀌었다. 티베리아스는 갈릴리 공 탕크레드에게 영지로 주어졌고, 그는 티베리아스를 중심지로 삼았고. 따라서 갈릴리 공국은 이따금씩 티베리아스 (혹은 티베리아드) 공국으로 불렸다. 12세기 말엽 티베리아스의 유대인 인구는 50가구에 그쳤고, 랍비들이 가장 양질의 토라 사본을 지켰다. 12세기 아랍 작가 이븐 아사키르는 티베리아스를 4개의 지옥 도시 중 하나로 꼽았다. 즉, 무슬림 비율이 매우 낮은 도시였다. 그 무렵 티베리아스는, 과부가 된 갈릴리 공작부인 에시바가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와 재혼함에 따라, 레몽 3세의 관할 하에 있었다.

1187년 살라흐 앗 딘은 아들 알 아흐달에게 레몽에 연락하여 협정대로 군대의 통과를 허가해 줄 것을 요구했다. 바니야스 ( 카이사레아 필리피)에서 남하한 살라딘은 템플기사단 병력을 격파하고 티베리아스를 포위하여 6일만에 함락했다. 그리고 티베리아스를 구원하러 출정한 대규모의 십자군은 10km 근방에서 벌어진 하틴 전투에서 괴멸되었다.[2] 도시는 아이유브 왕조령이 되었고, 1204년 이집트에서 사망한 랍비 모셰 벤 마이몬 (마이모니데스)가 매장되었다. 이후 그의 무덤은 유대인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1220년대 지리가 야쿠트 하마위는 티베리아스를 작고 가느다란 도시로 묘사했고, 염분 있는 온천을 언급했다. 1241년, 십자군이 재차 도시를 할양받았으나 1265년 바이바르스에 의해 티베리아스는 맘루크 왕조령이 되었다.

2.4. 오스만 제국

이후 티베리아스는 쇠락했고, 1522년 도시를 방문한 이탈리아의 유대인 랍비 모세 바솔라는 폐허 속에 20여 무슬림 가구만 거주하는 위험한 도시라 기록했다. 그는 도시에 머물기 위해 현지 지방관에게 돈을 줘야 했다. 한편, 16세기에 이베리아 반도에서 축출된 유대인들은 대부분 오스만 제국령으로 향했다. 코스탄티니예, 테살로니키, 소피아, 그리고 아나톨리아 반도까지 제국의 핵심부에도 다수의 유대인들이 당도했다. 이에 술탄 쉴레이만은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 정착을 권했고, 1558년에는 포르투갈 유대인 도냐 가르시아가 티베리아스 징세관이 되었다. 술탄의 허가 칙령과 함께 그녀는 티베리아스의 성벽을 재건했고, 유대인 정착을 장려했다. 산업 육성을 위해 mulberry 나무를 심고, 장인들을 유치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교황령의 유대인들을 티베리아스로 이주시키는 계획이 베네치아-오스만 전쟁으로 무산되며 도시의 부흥 시도는 실패했다.

1596년 기준 티베리아스는 50여 무슬림 가구만이 사는 소도시였다. 주민들은 각종 곡물과 가축, 벌꿀, 물고기 등을 통해 매년 3천여 악체의 세금을 납부했다. 1624년 파크르 앗 딘 2세가 아라비스탄 (알레포 ~ 가자)의 영주로 봉해진 이래로 갈릴리 지방은 레바논 아미르국의 마안 가문 령이 되었다. 그들의 비호 하에 유대인들이 재차 정착했으나, 1660년 친오스만 드루즈 세력과 마안 가문 간의 분쟁으로 티베리아스는 파괴를 겪었다. 결국 마안 가문이 갈릴리 지배권을 상실하자, 유대인들은 도시를 떠났다. 사페드와 달리 한동안 방치되던 티베리아스는 1720년대 자히르 알 우마르가 아말 산지의 쉬아 지도자 나시프 앗-나사르에게서 약탈을 하지 않게 협의한 후 부흥하였다. 자히르는 도적들을 토벌한 후 기존 성벽을 강화했고, 도시 북쪽에 요새를 세워 방어력을 높혔다.

1742년 다마스쿠스 총독 술레이만 파샤 알-아젬이 티베리아스를 포위했으나 격퇴되었다. 이듬해 재차 티베리아스 포위에 나선 술레이만 파샤는 도중 사망했다. 자히르는 스미르나의 랍비 차임 아불아피아를 초청해 유대인 공동체를 재건하게 했다. 당시 세워진 시나고그는 지금도 남아있다. 자히르 사후 팔레스타인을 지배한 제자르 파샤 역시 관용적인 태도를 유지하여 1780년에는 많은 폴란드 유대인들이 정착했고, 랍비들도 유입되어 유대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랍비 요시프 슈와르츠는 팔레스타인 농민반란 시에 티베리아스에서 유대인들이 가장 덜 시달렸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1837년 갈릴리 대지진 당시 5백의 유대인을 포함한 6백여명이 죽었고, 이후 제대로 복구되지 못하다가 1850년대에 들어서야 재건되었다.

2.5. 근현대

영국 위임통치기인 1922년 기준 티베리아스에는 4400여 유대인, 2100여 무슬림, 400여 기독교도가 거주했다. 본래 상호 종교 간의 관계는 좋았고, 1929년에는 첫 근대적 목욕탕이 세워졌다. 1934년 11월에는 산사태 및 홍수가 발생해 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던 구도심응 튼 피해를 입었고, 좁은 길에 토사와 물이 차오르며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영국 당국은 참사의 재발을 막기 위해 시가지를 언덕 쪽으로 옮겼고, 비탈에 나무를 심었으며 새 방파제를 세웠다. 1938년 10월, 아랍 민병대가 티베리아스에서 19명의 유대인을 죽였다.

1948년 4월에는 시가전이 벌어졌고, 아랍해방군이 시가지 북부의 유대 구역을 포위라자 하가나 유대 민병대가 아랍 구역을 포격하며 반격했다. 전황이 유대인 측에 유리해지자, 영국 당국은 아랍 주민들을 소개시켰다. 그해 12월에는 주이스라엘 미국 대사가 티베리아스에서 벤구리온과 회담, 이스라엘 군의 시나이 반도 철군을 종용하기도 했다. 1차 중동전쟁 후, 티베리아스 구도심은 붕괴 위협을 명분으로 대부분 파괴되었다. 시장 시몬 다한의 반대에도 유대 국가 펀드는 (요르단이 주장하던) 아랍 주민들의 귀환을 막기 위해 철거를 이어가 1949년 초에 이르면 696채 중 477채가 사라져 있었다. 그나마 남은 유적들은 70년대에야 보수되었다.

1950년대 들어 티베리아스에는 세파르딤, 미즈라히 유대 이주민들이 정착했다. 1959년 하이파의 마그레브계 유대인들이 경찰의 차별에 대항하여 일으킨 와디 살립 봉기가 티베리아스에도 퍼져 긴장감이 돌기도 했다. 70년대 들어 티베리아스는 이스라엘의 국내 관광 및 기독교도들의 순례지로써 갈릴리의 주요 관광 도시가 되었다.

본래 어업 용도로만 쓰이던 항구는 90년대 들어 레저 용도로 전환되었다. 특히 연이은 가뭄과 농업 용수의 과다 사용으로 호수 수면이 낮아지며 어업은 타격을 입었고, 6m 가량 낮아졌던 수면은 2010년대 이스라엘 정부의 노력으로 2020년에 1990년 수준을 회복했다.

3. 기타

십자군 전쟁 시기에는 십자군 국가 중 하나였던 트리폴리 백국 레몽 3세가 아내의 영지를 물려받아 티베리아스를 다스렸으며, 티베리아스에서 머무르는 기간이 많았기에 관련 서적에는 종종 “티베리아스의 레몽”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때문인지 십자군 전쟁을 배경으로 다루는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도 레몽3세 역으로 나온 인물을 “티베리아스”로 지칭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 1년 중 2달씩 각각 춤추고, 폭식하고, 때리고, 나체로 있고, 갈대 피리를 불고, 진흙탕에서 뒹군다고 적었다 [2] 레몽 3세는 티베리아스를 포기하고 티레로 향했다가, 살라딘의 공격을 예상하고 군대를 물려 트리폴리를 방어하는 등 계속해서 항전했다. 그러나 끝내 예루살렘이 함락당하여 왕국이 멸망하기에 이르자, 그렇잖아도 하틴에서의 패배 이후 부상의 후유증 혹은 정신적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던 중이었던 레몽 3세는 끝내 병으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