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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colcolor=#000000> [[동티모르| ]][[틀:국기| ]][[틀:국기| ]] |
지역 | 딜리 현 |
면적 | 48.27 km2 |
시간대 | UTC+9 |
인구 | 222,323명[3] |
인구 밀도 | 4,606 명/km² |
[clearfix]
1. 개요
동티모르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 티모르 섬 북해안에 위치하며, 배후는 3면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시가지 서부에 니콜아우 로바토 대통령 국제공항이 있다. 1769년 포르투갈령 티모르의 총독부가 되었고, 동티모르 독립 후에는 그 수도가 되었다. 태평양 전쟁과 1999년 동티모르 위기 당시 큰 피해를 입었지만, 21세기 들어 유엔의 도움으로 복구되었다. 딜리의 경제는 비석유 부문 동티모르 경제의 절반 가량을 차지한다.지명은 '언덕' 이란 뜻의 인니어에서 나왔다.
2. 역사
포르투갈 시기의 총독궁
1702년 설립된 포르투갈령 티모르의 총독부는 본래 (동티모르의 서부 월경지에 있는) 리파우에 있었다. 이는 플로레스 섬과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1749년 네덜란드 군이 서티모르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자, 1769년 포르투갈 당국은 총독부와 1천 2백의 주민들을 동쪽으로 옮기고 딜리라 명명하였다. 1788-90년 마나투토의 관료와 내전이 벌어지는 등의 혼란을 겪은 후 1818년부터 정식으로 포르투갈 군이 주둔하였다.
1861년 섬 동부에서 반란이 벌어져 딜리가 고립되기도 했으나, 포르투갈 군과 티모르 동맹군이 진압하였다. 1911-12년에도 반란이 일어났으나 포르투갈 군이 강경 진압하였다.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 연합군은 포르투갈의 중립 선언을 무시하고 동티모르에 진주하였다. 이에 1942년 2월 일본군이 상륙하여 딜리를 포함한 해안을 접수하였다. 호주-포르투갈 군은 내륙으로 철수하여 게릴라 전을 펴다가 1943년 초엽 철수하였다.[4]
2.1. 근현대
일본의 점령 후 딜리는 연합군의 공습으로 크게 파괴되었고, 따라서 시내에는 옛 건물이 거의 없다. 1945년 해방된 후 딜리는 점차 발전하여 1960년에는 인구가 7천에 이르렀다. 1975년 독립을 앞두고 벌어진 내전에서 딜리는 동티모르 민족해방군의 거점이었다가 8월 말엽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이 점령한 후 포르투갈측 총독이 도주하며 1차 독립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해 12월 인도네시아 공수부대가 딜리를 기습 점령한 후 이듬해 동티모르 병합을 선포하였다. 이에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은 게릴라 투쟁애 나섰고, 주민들도 저항하였다. 1997년 엘니뇨로 인한 가뭄과 뒤이은 경제 위기로 딜리를 중심으로 한 동티모르 전역에서는 시위가 벌어졌고, 인도네시아 군이 강경 진압에 나서며 국제적인 공분을 샀다.1998년 민주화를 이룬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 독립 투표를 약속하였는데, 투표일이 다가오던 1999년 9월 친인도네시아 민병대가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인도네시아 주둔군의 묵인 하에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였고, 이로써 145명의 사망자와 1만 2천에 달하는 난민이 발생하였다. (1999년 동티모르 위기) 이후 호주군을 필두로 하는 유엔군이 파견되었고, 대한민국도 상록수부대를 딜리로 보냈다. 2002년 동티모르의 재독립 후에도 유엔 평화유지군은 계속 주둔하였다. 유엔 관할 하에 딜리의 인구는 2004년 기준 17만으로 늘었지만, 27%에 달하는 실업자 문제가 발생했다.[5] 딜리의 인구는 꾸준히 늘어 2018년 28만명을 기록하였다. 2021년 4월 대홍수로 시가지 대부분이 침수되는 피해를 입었다.
3. 볼거리
- 포르투갈 지배기에 세워진 시장 건물
- 시가지 동쪽의 관광지인 돌록 오언 해안
- '동티모르의 거대 예수상'이라 불리는 파투카마 곶의 그리스도 왕 조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