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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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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튀니지 베자 4.jpg
카스바 (시타델)의 모습

아랍어: باجة
영어, 프랑스어: Beja.
1. 개요2. 역사
2.1. 유구르타 전쟁2.2. 재건과 파괴2.3. 중세2.4. 근대2.5. 근현대
3. 갤러리

1. 개요

튀니지 북부의 도시. 튀니스에서 서쪽으로 60km 떨어진 구릉 지대에 위치한다. 인구는 11만명이고, 인근 농경지의 농산물이 집산된다. 옛 지명은 바가로, 카르타고의 핵심 내륙 거점이었다. 이후로도 누미디아, 로마 제국, 반달 왕국, 동로마 제국, 이슬람 제국, 오스만 제국 등을 거치며 2천년 이상 도시가 유지된 유서깊은 동네이다. 해발 250m의 고지대에 위치하여 비교적 기후가 선선한 편이고, 시내에는 고즈넉한 옛 도시의 모습이 남아있어 여행하기에 좋다. 남쪽 25km 지점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두가 유적지가 위치한다. 포르투갈의 베자 현, 동아프리카의 베쟈족과는 연관이 없다. 다만 전자와는 비슷한 지명이고 한적한 내륙의 중세 도시라는 공통점을 부각하여 자매도시를 맺었다.

2. 역사

카르타고가 세워지기 전부터 베르베르계 아브리가 부족의 마을이 있었고, 점차 페니키아 인들이 왕래하며 상업 도시로 발전하였다. 그후 일대를 지배하게 된 카르타고는 현재의 카스바 자리에 성채를 세우고 수비대를 배치하여 누미디아 방면 방어 요새로 삼았다. 와가 혹은 바카라 불린 도시는 포에니 전쟁 당시에 카르타고의 주요 내륙 거점 중 하나로써 기원전 218년 한니발의 이탈리아 침공에 정예 병력을 파병하였고, 이후에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합류하러 동진하던 마시니사의 누미디아 군을 격퇴하였다. 승전 후 로마는 동맹 마시니사에게 참전의 대가로 경쟁자 시팍스의 영토에 더하여 바카의 지배권 역시 주었으나 명목상에 불과하여, 도시는 여전히 카르타고령이었고 그 수비대가 주둔하였다.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가 멸망한 후에야 바카는 온전히 누미디아의 영토가 되었다. 다만 카르타고에서 멀지 않은 관계로 점차 로마인들이 정착하였다.

로마인 역사가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에 의하면 기원전 2세기 무렵 바카는 누미디아에서 가장 부유한 보급창이자 활발한 상업 중심지였다 한다. 기원전 118년, 마시니사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미킵사 왕이 사망하자 누미디아는 그의 두 아들들과 조카 유구르타 사이에 분할되었다. 세 군주 간의 내전 끝에 동부의 바가에 기반했던 유구르타가 로마의 중재를 거부하고 전쟁을 지속하여 통일을 이룩하였다. 그 과정에서 친로마 군주 아드헤르발과 로마 정착민들이 살해되며 로마와 분쟁이 일자 유구르타는 로마 집정관 루키우스 베스티아를 매수하여 평화 협정을 맺었고, 후자는 재무관 섹스티우스를 바카에 인질로 보내기도 하였다. (기원전 111년) 하지만 로마 원로원은 협정 비준을 거부하고 법무관 루시우스 카시우스를 바카로 파견하여 유구르타를 로마로 초청하여 재판하였다. 이어진 공방에서 그의 뇌물 혐의가 드러나자 기원전 109년 메텔루스 누미디쿠스의 로마군이 파견되며 유구르타 전쟁이 발발하였다.

2.1. 유구르타 전쟁

이 위대하고 부유한 도시의 모든 것이, 학살과 약탈에 놓였다.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22, 벨룸 루구르티눔에서 바카의 함락을 평하며

압도적인 로마 군세에 유구르타는 적을 내륙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수도 바카를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바카를 접수한 메텔루스는 도시를 요새화하고 수비대를 배치하였다. 이후 게릴라 전을 펴던 유구르타는 메텔루스가 자마 공방전에서 수렁에 빠지자 로마군의 본영을 공격했으나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격퇴되었다. 한편 기존의 수도 바카의 수복을 노리던 유구르타는 로마군의 방어 태세에 무력 점령은 불가능하다 여기고 바카의 주민들을 회유하였고, 결국 포섭에 성공하였다. 따라서 바카의 유지들은 축제날에 로마 주둔군의 장교단을 연회로 초청하여 자신들과 친분이 있던 지휘관 투르필리우스를 제외하고 전부 학살하였다. 석방된 투르필리우스 역시 뇌물을 주어 살아남았다는 혐의로 메텔루스에 의해 처형당한다.[1] 그후 비무장 상태로 활보하던 로마 병사들까지 살해되었고, 성채로 피신하려 했던 일부 생존자들 역시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한 주민들이 돌을 던지는 등 공격을 당하여 죽었다.

이로써 유구르타는 로마에 의해 요새화된 바카를 병력 손실도 없이 되찾았고, 주요 거점을 어이없이 내어준 것에 충격을 받은 히포 디아리투스 (비제르트) 진영의 메텔루스는 며칠간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후 복수를 결심한 메텔루스는 유구르타의 부관 보밀카르를 매수, 그가 이끄는 누미디아 기병대를 앞세워 바카로 향하였다. 군대의 접근을 알게 된 주민들은 로마군이라 여겨 성문을 닫았지만, 선두의 누미디아 말을 본 후 성문을 열고 일단의 주민들이 맞이하러 나갔다. 그러자 메텔루스는 즉시 이들을 포위해 몰살시켰고, 충격에 휩쌓인 성내의 주민들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수비에 나섰다. 하지만 3일 간의 공성전 끝에 바카는 함락되었다. 주민 중 성인 남성은 학살되고 나머지는 노예로 팔렸다. 메텔루스는 도시에 방화하여 복수를 완수하였다. 그후로도 5년여간 이어지던 전쟁은 기원전 105년 마리우스와 술라의 활약으로 유구르타가 붙잡혀 처형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2.2. 재건과 파괴

파일:튀니지 베자.jpg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건설한 시타델

기원전 46 ~ 25년에 걸쳐 누미디아가 로마에 흡수된 후 도시는 재건되어 바가 (Vaga)로 불리게 되었고, 전략적 입지 덕에 수비대가 배치되었다. 기원전 14년에는 옛 카르타고 시절 성채를 파괴하고 22개의 성탑을 갖춘 로마식 성채를 세웠다. 또한 시가지를 두르는 성벽 역시 세워졌고, 현재까지 부분적으로 남아있다. 서기 105년 트라야누스부터 하드리아누스의 치세까지 25년에 걸쳐 인근 협곡에 로마식 다리가 개설되기도 하였다. 200년경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바가를 식민도시로 승격시켜 '콜로니아 셉티미아 바가'로 명명하였다. 그 후로도 주교구가 설치되는 등 번영하던 도시는 430년대 가이세리크가 이끄는 반달 왕국의 북아프리카 정복 당시 히포 레기우스와 함께 파괴되었다.

442년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공식적으로 반달 족의 지배를 인정하였다. 그럼에도 로마군의 반격을 우려한 가이세리크는 448년 바가의 성채를 비롯한 방어 시설을 허물었다. 한세기간 폐허로 남았던 도시는 534년 동로마 제국에 의해 반달 왕국이 멸망한 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재건되었다. 그는 관료 파울로스를 파견해 파괴된 성채와 시가지를 재건하게 하였고, 더 나아가 시가지를 확장하였다. 또한 일대의 주민들을 이주시켜 전과 같은 위상을 회복하니, 현지인들은 황제에게 감사하는 의미로 황후 테오도라의 이름을 따서 테오도리아스 (Theodorias)를 지명으로 삼았다. 7세기 이슬람 정복 이후 바가는 아랍식인 바자로 명명되었고, 성채는 태수의 거처인 카스바로 불리게 되었다.

2.3. 중세

파일:튀니지 베자 6.jpg 파일:튀니지 베자 8.jpg
성당에서 전환된 대사원

이슬람화 후에도 바자는 주요 지방 도시로 남았고, 다른 튀니지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9세기 아글라브 왕조의 지배기에 확장되었다. 파티마 왕조에 들어 943년 아부 야지드 마크라드의 카와리지 반란 시에 카스바가 크게 파괴되고 도시가 습격당하는 피해가 있었는데, 946년 칼리파 이스마일 알 만수르가 일대를 회복한 후 재건하였다. 지리 왕조, 하프스 왕조를 거치며 도시는 11세기의 베두인 침공 외에는 대체적으로 평화를 유지하였다. 16세기 중반 스페인-오스만 패권 다툼 속에 카스바에는 14문의 대포가 배치되었다.

2.4. 근대

파일:튀니지 베자 1.jpg
오스만 제국기에 추가된 성탑

이어진 오스만 제국은 카스바 남쪽에 원형 성채를 더하였고 예니체리 부대를 수비대로 주둔시켰다. 1677년 무라드 왕조의 알리 베이 1세는 알제리 방면 방어력 증강을 위해 5백의 시파히 부대를 추가 배치하였다. 1881년 바르도 조약으로 튀니지를 보호국으로 만든 프랑스는 알제리 주둔 병력과 본국의 해군을 동원하여 각 도시들을 점령하였다. 바자는 1881년 4월 24일, 알제리에서 케프를 거쳐 진군해 온 로즈로 장군이 카스바를 점령하며 프랑스령이 되었고, 불어식인 베자로 불리게 되었다. 1888년 9월 21일 프랑스 군은 카스바에 병영을 두었고, 이는 독립 시까지 70여년간 유지되었다.

2.5. 근현대

파일:베자 프랑스 튀니지.jpg
1881년 베자의 카스바를 점령하는 프랑스 군

본래 나치 독일은 비시 프랑스령 튀니지에 별 간섭을 하지 않았다. 다만 횃불 작전으로 연합군의 공격이 임박해진 1942년 11월 16일, 독일군은 타바르카 & 비제르트와 연결되고 알제리-튀니스 사이에 위치한 베자의 프랑스인 시장 장 위공에게 24시간 최후 통첩을 보내며 항복을 요구하였다. 이에 그는 도지사 클레망스에게 소식을 전했고, 후자는 다시 알제의 연합군에게 알렸다. 그러자 다음날 영국군 낙하산 부대가 도시 북쪽 언덕에 투하되어 수비대가 조직되었다. 19일 독일 공군이 경고의 의미로 시가지를 폭격하였고, 이로써 수세기간 이어오던 베자의 평화가 깨졌다. 다음날 독일 공군은 몇 시간 동안 시가지를 크게 폭격하였고, 동북쪽 40km 지점 마테우르의 독일군이 남하하였으나 베자에서 15km 떨어진 지점의 야간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저지되었다. (1943년 2월 28일) 이로써 베자는 튀니지의 도시들 중 독일군에게 직접적으로 점령당하지 않은 소수의 도시들 중 하나가 되었다.

3. 갤러리

파일:튀니지 베자 5.jpg
도시 전경
파일:베자 튀니지 요새.jpg
시타델 (카스바)
파일:튀니지 베자 8.jpg 파일:베자 튀니지 9.jpg
대사원
파일:베자 튀니지 시청사.jpg
시청사
파일:베자 튀니지 6.jpg

파일:베자 튀니지.jpg

파일:베자 튀니지 5.jpg
카스바의 대포
파일:튀니지 베자 7.jpg 파일:베자 튀니지 8.jpg
파일:베자 튀니지 문.jpg 파일:튀니지 문 베자.jpg

파일:베자 튀니지 건물.jpg

파일:베자 튀니지 7.jpg
[1] 정확히는 마리우스를 비롯한 메텔루스의 장교들이 투르필리우스가 뇌물을 주어 살아남았다며 의심하였고 어쩔 수 없이 투르필리우스를 처형한 메텔루스는 뒤늦게 투르필리우스가 결백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리우스를 적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