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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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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K로 촬영한 튀니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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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이름 튀니스의 메디나
Medina of Tunis
국가 튀니지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79년
등재기준 (ii), (iii), (v)

1. 개요2. 역사
2.1. 고대2.2. 중세
2.2.1. 아글라브 왕조2.2.2. 쿠라산 왕조2.2.3. 무와히드 vs 바누 가니야2.2.4. 하프스 왕조
2.2.4.1. 8차 십자군 (1270년)2.2.4.2. 내전기2.2.4.3. 마린 왕조의 침공2.2.4.4. 전성기2.2.4.5. 바르바리 해적
2.2.5. 스페인 vs 오스만 전쟁
2.2.5.1. 카를 5세의 점령 (1535년)2.2.5.2. 스페인의 간접 지배2.2.5.3. 오스만 정복 (1574년)
2.3. 오스만 제국
2.3.1. 무라드 왕조2.3.2. 내전과 대 알제리 전쟁2.3.3. 후사인 왕조
2.4. 근대
2.4.1. 프랑스의 입김과 혼란2.4.2. 프랑스령 튀니지
2.5. 현대
3. 지리4. 기후5. 경제6. 교통7. 자매 결연 도시 및 우호 협력 도시
7.1. 자매 결연 도시7.2. 우호 협력 도시
8.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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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튀니스 모스크와 중심부.jpg
메디나 중심부에서 바라본 자이투나 모스크와 신도심

북아프리카 국가 튀니지 수도이자 최대도시. 역사가 유구한 도시로, 특정 장소만이 아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두 개의 유적지구를 품고 있다(고대 카르타고 유적과 중세 구도심인 메디나). 본래 베르베르인들에 의해 건설되었던 '투니스'는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군에 의해 카르타고와 함께 파괴되었다. 이후 카르타고보다 먼저 재건되었으나 카르타고 역시 재건되자 재차 그 배후 도시가 되었다. 그러던 698년 카르타고가 이슬람 제국군에게 재차 파괴당한 후 튀니스는 이번에는 파괴를 면한 것을 넘어 그를 대신할 도시로 선택되어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역사성과 함께 바다에 접한 풍경과 오랜 프랑스 지배로 인한 유럽풍까지 더해져 늘 관광객들로 붐비는 활기찬 도시이다.

중세 들어서는 9세기 아글라브 왕조의 주요 항구로 번영하기 시작하였고, 그후 파티마 왕조, 지리 왕조를 거쳐 12세기 초엽 후라산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그를 멸한 무와히드 왕조 때부터 튀니스는 노르만/베두인의 공격으로 쇠퇴한 카이라완이나 알 마디야를 제치고 이프리키야 지방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그러던 13세기 하프스 왕조에 들어 튀니스는 3백년간 그 수도로써 전성기를 누렸다. 1270년에 루이 9세가 이끄는 8차 십자군에게 점령당할 뻔 했지만 역병으로 십자군이 철수하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후 16세기 스페인-오스만 전쟁을 거쳐 3세기에 걸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881년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다가 1942년 독일에 잠시 점령되었다. 1943년 연합군이 탈환했고 1956년 튀니지가 독립하면서 수도가 되었다.

2. 역사

파일:튀니스 1.jpg 파일:튀니스 메디나 3.jpg
메디나(구도심)의 골목길 풍경

2.1. 고대

파일:카르타고 포에니 튀니지.png 파일:튀니스 카르타고.png
기원전 255년 바그라다스 전투의 전장이던 튀니스 기원전 240년 경 용병대 반란 시기 거점이던 튀니스

항구 도시 카르타고의 배후 지역에 위치한 언덕(현 구도심 서쪽 카스바 일대)에 세워진 베르베르인 마을에서 기원하였다. 지명은 베르베르어로 야영지를 의미하는 '투니스'에서 유래하였고, 약 15km 떨어진 카르타고로 향하기 전 마지막 정거장이었다. 각각 서쪽, 서남쪽, 동남쪽, 북쪽 방향에서 카르타고로 접근하는 마을들이 로마 시대에 투니자(현 엘 칼라), 투누수다(현 시디 메스킨), 티니수트(현 비르 부레그바), 투니사(현 라스 제벨) 등으로 기록된 것에서 같은 어원임을 알 수 있다. 기원전 4세기 무렵 그리스인들에 의해 '티네스'로 처음 기록되었고, 도시를 지배하게 된 카르타고인들은 페니키아 여신 타니스와 투니스를 결부시켰다. 중간 기착지 역할 외에도 언덕에 자리한 투니스는 카르타고 일대의 육상/해상 교통을 감시할 수 있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기원전 310년부터 3년간 북아프리카 원정에 나선 시라쿠사의 군주 아가토클레스 역시 이곳을 거점 삼아 카르타고 봉쇄를 시도하였다.

1차 포에니 전쟁 이후 재정난에 몰린 카르타고는 휘하 용병들의 봉급을 축소하였다. 기원전 241년, 분노한 2만의 용병들은 투니스를 거점으로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놀란 카르타고 의회는 전액 납부를 약속했으나, 이미 여러 도시들이 합류해 카르타고의 존망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카르타고군은 이듬해 우티카에서 패배하였으나 하밀카르 바르카가 반격에 성공하였다. 기원전 238년 반군은 카르타고 포위를 풀고 본거지 투니스로 철수, 군대를 양분하여 마토가 수비에 치중하고 스펜디우스가 하밀카르와 대적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후자는 포위된 후 전멸하였고, 이후 하밀카르는 투니스를 포위하였다. 투니스는 동쪽과 서쪽에 석호가 있었기에 카르타고군의 진영은 남, 북에 세워졌다. 하밀카르는 사로잡힌 반군 지도자들을 투니스에서 보이는 곳에서 십자가형에 처하였다. 마토는 야습에 성공한 후 역으로 카르타고인 포로들을 같은 곳에서 십자가형에 처하였다.

하밀카르는 후퇴하여 재정비하였고, 그 사이에 마토는 투니스를 떠나 렙티스 파르바로 향하였으나 카르타고 측이 병력을 총동원하여 공격해오자 대패하며 반란은 진압되었다. 카르타고 시대의 투니스의 주민들은 농민, 어부, 장인 등의 직업군으로 구성되었다. 카르타고 시보다는 작은 도시였던 투니스는 (역사가 스트라보에 의하면) 기원전 146년 3차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군에 의해 카르타고와 함께 파괴되었다. 다만 카르타고보다 먼저 재건되었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기에 로마령 아프리카 속주의 중요한 농업 도시로 자리잡았다. 포이팅거 지도에 '투니'라는 지명으로 등장한 도시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역참의 의미를 지닌 무타티오로 분류되었다. 로마화와 기독교화를 거친 투니스(혹은 투네스)는 주교좌가 되었다. 다만 대도시로 부활한 카르타고에 비하면 한참 작은 규모로, 그 후광에 가려져 있었다. 이러한 관계는 7세기 말엽 이슬람 정복 후 역전된다.

2.2. 중세

파일:튀니스 자이투나 모스크.jpg 파일:튀니스 자이투나 사원.jpg
앗 자이투나 사원(일명 올리브 모스크). 카이로우안 대사원에 이어 튀니지에서 두번째로 세워진 모스크로, 말리키 학파를 따른다.

670년 카이로완 건설과 함께 시작된 우마이야 왕조의 이프리키야 정복은 698년 하산 이븐 앗 누만 알 가사니 휘하의 4만 대군이 재차 카르타고를 점령하며 확고해졌다. 동로마 해군의 반격을 염려한 하산은 카르타고 항구와 성벽을 파괴하고 그를 대체할 중심지로 배후의 투니스를 선택하였다. 따라서 699년 3월 기존 마을과 튀니스 석호 사이에 현재의 메디나 (구도심)인 신도시를 건설하였다. 본래 기독교 성녀 산타 올리비아에게 봉헌되었던 성당은 중심 모스크로 개조되었는데, 올리비아의 이름을 아랍어로 직역한 '자이투나' 사원으로 명명되었다. 기존 카이로완 대사원과 유사한 형태인 자이투나 사원은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들 중 하나이다. 그후 하산은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의 명으로 이집트의 콥트교도 노동자 1천을 고용, 투니스에 전선 건조를 위한 병기창을 세웠고 튀니스 석호와 바다 사이의 1km 간격의 회랑에 수로를 뚫어 함대가 발진할 수 있게 하였다.
파일:튀니스 마드라사.jpg
737년 세워진 앗 자이투나 마드라사. 페스의 알 카라위인과 함께 세계 최고(最古)의 대학 지위를 다툰다.

투니스를 거점으로 동로마군의 해상 공세에 대항하려는 우마이야 왕조의 노력은 703년 하산이 해임된 후로도 지속되어 큰 결실을 거두었다. 투니스에서 발진한 우마이야 해군은 발레아레스 제도를 점령하고 사르데냐를 습격하는 등 서부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동시에 투니스는 카이라완과 함께 8세기 튀니지 지방의 양대 도시로 성장하였고, 731년 이프리키야 총독 우바이둘라 이븐 하바브는 자이투나 대사원을 확장하였다. 9세기의 아랍 지리가 알 야쿠비에 의하면 당시 도시는 육지 부분은 점토 벽돌, 호숫가는 돌로 구성된 성벽을 두르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 무렵부터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성장기도 잠시, 741년 베르베르 대항거와 함께 마그레브는 20여년간 혼란에 돌입하게 된다.

745년 카이라완의 건설자 우크바의 증손 압둘 라흐만이 투니스에서 봉기, 카이라완의 이프리키야 총독 한달라를 축출하고 피흐리 왕조를 세웠다. 하지만 그의 우마이야 조로부터의 자립 및 중앙집권화 시도는 베르베르 뿐만 아니라 아랍 부족들의 반란을 야기했다. 카이라완에 도읍한 압둘라흐만은 전투 끝에 튀니스에서 봉기한 아르와 이븐 앗 주바이르 앗 사데피, 타비나스의 이븐 아타프 알 아즈디, 베자의 베르베르 군벌 사비트 앗 산하지 등을 모두 격파했다. 다만 서부 마그레브는 여전히 독자적인 베르베르 부족들의 수중에 있었고, 755년 트리폴리 총독이던 동생 일리아스가 그를 암살하며 내분이 발발하였다.

소득 없는 전쟁 후 일리아스는 동생 아므란과 조카 하빕에게 각각 가프사, 투니스를 내어주고 자신은 트리폴리로 물러났다. 하지만 일리아스가 협정을 어기려 하자 하빕이 재차 봉기해 그를 죽였다. 그리고 하빕은 다시 재차 반란을 일으킨 카와리지 베르베르인들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고, 761년 압바스 왕조가 베르베르인들을 토벌한 후에야 안정이 회복되었다. 768년 카와리지 베르베르인들은 재차 봉기하였다. 무함마브 가문의 이프리키야 총독 우마르 이븐 하프스는 반군의 투브나 포위를 격퇴하였다. 그후 반군이 카이로완 총독부를 포위하자 우마르는 구원에 나섰는데, 중도에 습격을 받아 투니스로 철수하였다. 곧 재정비하여 보급품과 함께 카이라완에 당도한 그는 771년 공성전 도중 전사하였고, 도시는 점령되었다. 다만 투니스는 트리폴리와 함께 압바스 왕조의 거점으로 남았고, 이들을 기반으로 후임 총독 야지드는 773년 카와리지-베르베르 반란을 최종 진압하였다.

2.2.1. 아글라브 왕조

파일:튀니스 중심부.png
앗 자이투나 사원. 아글라브 왕조 기에 예배당이 완성되었고, 돔은 지리 왕조 시대인 991년 세워졌다.

반란 진압 후 무할라브 가문은 이프리키야 총독위를 세습하였다. 787년 라우흐 이븐 하팀이 사망한 후 친척 나스르가 계승했는데, 불만을 품은 전자의 아들 알 파들은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를 설득해 총독위를 차지하였다(791년). 그러나 나스르를 지지하던 준드 (아랍 군부)가 반발하였고, 투니스 주둔군은 알 파들의 조카인 태수 알 무기라와 대립하였다. 알 파들이 태수 교체 요청을 거부하자 그들은 장교 압둘라 이븐 자루드 하에 봉기하여 알 무기라를 도시에서 축출하였다. 그후 압둘라는 알 파들과 협상, 충성을 약속하며 새 태수의 파견을 청하였다. 이에 알 파들은 사촌 압둘라 이븐 야지드를 파견했는데, 후자가 투니스 부근에 이르렀을 무렵 압둘라가 사절로 파견한 일단의 병력이 명령을 불복하고 신임 태수를 공격해 살해하였다. 이제 타협이 불가하다고 여긴 압둘라는 반란을 일으켰고, 인근 도시들에 격문을 보내어 동참을 호소하였다(794년).

이에 현지 준드가 집결하였고, 알 파들은 토벌에 나섰으나 패하고 카이라완으로 철수하였다. 압둘라는 그를 추격, 도시를 포위해 항복시킨 후 알 파들을 처형하였다. 압바스 당국은 무할라브 가문 외의 하르마타를 파견해 질서를 회복했으나 그의 후임자 무함마드 이븐 무크타일 알 아키[1]는 재차 준드와 대립하였다. 마클라드의 반란에 이어 799년 10월 투니스의 타맘 이븐 타밈 앗 타미미가 봉기하였고 큰 호응을 얻었다. 타맘은 카이라완으로 진군, 무함마드를 격파하고 도시에 입성하였다. 트리폴리로 철수한 무함마드는 자브 태수 이브라힘 이븐 알 아글라브가 카이라완을 수복하자 귀환하였다. 투니스로 도주했던 타맘은 재차 남하하였으나 이브라힘에게 다시 패하고 중앙 정부에 복속하였다. 이듬해인 800년 여름, 이브라힘은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에게 상주하여 이프리키야의 아미르로 봉해졌다. 그후 아글라브 가문이 총독위를 세습하며 사실상의 세습 왕조가 설립되었다.

아글라브 왕조는 정치적으로 기존 총독들과 준드 간의 갈등에 더하여 종교적으로도 무타질라 학파를 따랐기에 카이라완의 말리키 울라마와 대립하였다.[2] 3대 아미르 지야다탈라 1세에 이르러 관계는 악화되었고, 824년 준드 부대를 해산시키려는 그의 시도는 투니스에서의 대규모 반란으로 이어졌다. 이는 836년에야 베르베르 부족들의 도움으로 진압되었고, 따라서 827년 동로마령 시칠리아 원정에 나선 아글라브 함대는 반군이 장악한 투니스가 아닌 수스에서 출항하였다. 이어진 9세기 중반의 안정기에 자이투나 사원은 864-65년에 걸쳐 증축되었고, 880년경 아미르 이브라힘 2세에 의해 완성되었다. 다만 893년 이브라힘이 알제리의 준드 장교 1천여를 초청한 후 학살하자 투니스를 필두로 각지의 준드 부대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한때 카이라완 일대로 몰렸던 이브라힘은 수단 (흑인) 부대로 반격하여 반란을 가혹히 진압하였다. 준드 반란을 이끈 만수르 앗 툰부디의 거점 툰부다

한편 이브라힘의 잔혹한 통치를 보고받은 칼리파 알 무타디드는 그의 폐위를 선언하였다. 901년 말엽 칼리파의 칙령을 지닌 사절이 투니스에 당도하였고, 예상 외로 이브라힘은 순순히 아들 압둘라에게 양위하였다.[3] 이때부터 아글라브 아미르들은 라카다 대신 투니스에 머물렀고, 지야다탈라 3세는 옛 로마 극장에 궁전을 세웠다. 한편 그는 서쪽에서 세력을 키우던 파티마 반란군에 대비해야 했다. 907년 그는 라카다로 돌아가 도시를 요새화하고 대군을 편성한 후 자신은 투니스로 귀환하였다. 다만 파티마 지휘관 알 쉬이가 예상과 달리 북부 해안 대신 내륙으로 진군하자 908년 재차 라카다로 향하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였다. 909년 아글라브 왕조를 멸한 알 쉬이는 카이라완 부근 라카다 궁전과 함께 투니스의 수로를 '동방을 능가하는' 마그레브의 양대 걸작이라 평하였다. 이슬람권 3대 해군 기지이자[4] 아글라브 왕조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였던 투니스는 이제 시아 파티마 왕조의 지배 하에 놓였다.

2.2.2. 쿠라산 왕조

파일:튀니스 카스르 사원 1.jpg 파일:튀니스 카스르 사원 미흐랍.jpg
(아마도) 아미르 아흐마드 대에 세워진 카스르(왕궁) 사원과 미흐랍. 많은 중수를 거쳤고, 미나렛은 1647/8년에 재건되었다.

파티마 왕조는 튀니지 동해안에 신도시 알 마디야를 건설해 수도이자 해군 기지로 삼았고, 따라서 투니스는 한세기 이상 소외를 겪었다. 944년 아부 야지드 마크라드의 카와리지 과격파 반란 시에 카이라완에 이어 945년 투니스 역시 점령된 후 약탈되었다. 동시에 마크라드는 알 마디야를 포위하며 파티마 왕조의 존립을 위협하였지만 포위가 장기화되자 반군은 지쳤고, 파티마군의 반격에 결국 포위는 풀렸다. 이에 투니스와 베자 등지에서는 친파티마 봉기가 일어나 조정에 귀순하였고, 그에 힘입어 반란은 948년 진압되었다. 세력을 회복한 파티마 왕조는 이집트를 정복한 후, 973년 카이로로 천도하였다. 남은 이프리키야 지역은 베르베르계 지리 왕조에게 위임되었다. 파티마 왕조에 충성하던 지리 왕조는 과거 함마드 왕조처럼 1047년 순니 이슬람으로 전환하며 독립하였고, 보복으로 파견된 바누 힐랄이 내륙을 파괴하였다. 이로써 지리 왕조의 지배력은 튀니지 해안 일대에만 국한되었다.

1057년 카이라완 함락 후 지리 왕조가 약화되자 투니스 주민들은 알제리의 함마드 왕조[5]에 복속하였다. 그에 따라 총독으로 파견된 산하자 베르베르계 아미르 압둘 하크 이븐 압둘 아지즈 이븐 쿠라산은 바누 힐랄로부터 도시를 방어, 질서를 회복한 후 1059년 쿠라산 왕조를 세워 독립하였다. 1063년 지리 왕조의 아미르 타밈이 투니스를 공격했지만 격퇴되었고, 압둘 하크의 통치를 인정하였다. 압둘 하크는 1095년까지 안정적으로 통치하였고, 사후 두 아들들이 계승한 후 장손 아흐마드 이븐 압둘 아지즈(재위 1107 ~ 1128년)가 즉위하였다. 후에 투니스에서 강의하는 역사가 이븐 칼둔에 의해 쿠라산 왕조에서 가장 중요한 아미르로 여겨진 그는 바누 힐랄에 대비하여 도시를 두르는 성벽과 요새화된 궁전을 세웠고, 도로의 안전을 확보하였다. 쿠라산 왕조 하에 투니스는 지중해 무역을 통해 번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흐마드의 사후 함마드 왕조는 재차 투니스를 점령, 20년간 지배하였다.

한편 1차 십자군을 피해 투니스로 피신해왔던 시리아 출신의 그리스인 요르요스는 지리 왕조의 해군에 복무하다 갈등을 겪은 후 시칠리아 왕국으로 귀순하였고, 1131년부터 그 해군을 이끌고 북아프리카 해안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1146년 트리폴리에 이어 1148년 알 마디야가 점령되었고, 수스가 복속하며 지리 왕조는 멸망하였다. 혼란을 틈타 투니스 시민들은 카디 아부 무함마드 압둘 무민 이븐 아불 하산을 지도자로 선출하였다. 그는 이내 바누 리야흐 출신의 무흐리즈 이븐 지야브로 대체되었는데, 아흐마드의 사촌 아부 바크르 이븐 아흐마드가 밤을 틈타 광주리를 통해 투니스 성내로 잠입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복원된 쿠라산 왕조는 동서로 시칠리아 왕국에 포위된 형국이었고, 따라서 그 군주인 루지에로 2세에게 곡물을 바치며 복속하였다. 압둘라 이븐 압둘 아지즈(재위 1149 ~ 1159년)의 통치기에 무와히드 왕조의 칼리파 아브드 알 무민은 함마드 왕조를 멸하고 동진하였다.

2.2.3. 무와히드 vs 바누 가니야

그러던 1159년, 아흐마드의 아들 알리가 아미르로 즉위한 직후 투니스는 포위되었다. 그해 7월 12일, 70척의 무와히드 함대는 굴레타 호수를 가로질러 튀니스를 점령하였다. 마지막 아미르 알리는 도시 원로들의 간청에 따라 아만(안전 보장)이 주어져 축출되었고, 아브드 알 무민은 대신 주민들의 재산 절반을 취하였다. 아브드 알 무민은 트리폴리에 이어 1160년 알 마디야를 함락하며 이프리키야를 평정하였다. 점령 후 알 마디야는 파괴되었고, 카이라완 역시 쇠퇴한 상태였기에 투니스는 일대의 중심 도시로 부상하였다. 무와히드 왕조는 시내 서부의 카스바에 이프리키야 총독부를 두었고, 이때부터 투니스는 튀니지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다. 한편 1184년 아브드 알 무민의 후계자 유수프 1세가 사망한 후 발레아레스 제도에 웅거하던 무라비트 왕조의 후예 알리 이븐 이샤크[6]가 알제리 해안을 침공하여 선조의 왕국 재건을 위한 기나긴 투쟁에 나섰다.

1185년 무와히드군에 의해 알제리에서 밀려난 알리는 튀니지-리비아 해안에 집중, 바누 힐랄과 함께 투니스와 알 마디야를 공격하였다(1187년). 분노한 무와히드 칼리파 야쿠브 알 만수르는 친정에 나서 튀니지 일대를 수복하였고, 사막으로 도주한 알리는 이듬해 사망하였다. 부흥운동을 이어받은 동생 야흐야는 제노바 공화국 아라곤 왕국과 동맹하여 안달루스-마그레브 해안을 습격하였다. 1195년 야흐야는 트리폴리, 카이라완, 안나바 등을 점령하였고 1203년 무와히드 왕조에게 본국인 마요르카를 상실했음에도 그해 12월 14일 투니스를 점령하며 알제리 동부에서 리비아 서부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듬해 그는 내륙의 카와리지 베르베르인들을 나푸사 산에서 격파, 배상금을 받아낸 후 투니스로 개선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성립된 바누 가니야[7] 토후국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1204년 가을 무와히드 칼리파 무함마드 앗 나시르가 대군을 모아 진격해오자 야흐야는 투니스를 포기하고 제르바 섬으로 향하였으나 도중 따라잡혀 대패하였다. 그후 1205년 투니스와 알 마디야는 무와히드 왕조에 항복하였다.

2.2.4. 하프스 왕조

파일:튀니스 카스바 사원.jpg
초대 군주 아부 자카리야 야흐야에 의해 세워진 카스바 모스크(جامع القصبة). 오스만 지배기인 1584년 목조 민바르가 석조로 교체되었다.

1206년 2월 튀니지에 진입한 무함마드 앗 나시르는 신임하는 부관이자 개국공신 셰이크 아부 하프스 우마르의 아들인 압둘 와히드를 이프리키야 총독[8]으로 봉하고 마라케시로 회군하였다. 야흐야는 그 직후와 1209년 압둘 와히드에게 연이어 패배하였다. 이로써 입지가 높아진 압둘 와히드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자 무와히드 당국은 1221년 그를 해임하고 아불 알라를 이프리키야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트리폴리타니아에서 세력을 회복한 야흐야는 1223년 사막을 횡단하여 기습적으로 투니스를 점령했으나, 인근 마드줄 전투에서 아불 알라에게 대패하고 도주하였다. 그 이듬해 투니스를 장악한 압둘 와히드의 장남 압둘라는 약화된 무와히드 왕조로부터 자립하였는데, 1228년 동생 아부 자카리야 야흐야가 카이라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압둘라는 그를 대적하러 남하하였으나 군대가 야흐야 측에 전향하자 후자에 의해 폐위되어 셰이크 직위만 유지한채 은퇴하여 종교에 헌신하였다.

그 무렵 쇠퇴기에 들어선 무와히드 왕조는 내전에 돌입한 상태였다. 1229년 카스티야의 도움을 받은 이드리스 알 마문이 마라케시를 점령, 경쟁자를 지지한 셰이크들을 학살하고 마흐디 교리 대신 순니로 개종하였다.[9] 이를 계기로 총독 야흐야는 1229년 말 독립을 선언, 곧장 정복 활동에 나서 1235년까지 알제에서 트리폴리에 이르는 영토를 확보해 하프스 왕조를 세웠다(야흐야 1세). 한편 알제리 산지에서 웅거하던 바누 가니야의 야흐야는 현지인들과 싸우다 중상을 입고 사망하였는데, 임종 전 자신의 세 딸들을 하프스 왕조에 위탁하였다. 아미르 야흐야는 그녀들에게 투니스 근처의 한 성채를 내어주었는데, 이는 후에 카스르 알 바나트(여인의 성)으로 불리게 되었고 투니스의 성문들 중 하나인 밥 바나트의 유래가 되었다.

한편 야흐야는 1230년 건축가 알리 이븐 무함마드 이븐 카심을 고용해 12세기 무와히드 지배기부터 현재까지 통치의 중심이 된 카스바에 왕실 사원을 건립하였다. 1233년 완공된 그 미나렛은 마라케시의 카스바 모스크 미나렛과 상당히 유사하다. 카스바의 특권층 전용이던 사원은 후에 대중에게 개방되어 앗 자이투나에 이은 2번째 자미(금요 예배 회중 사원)이 되었다. 20년간 이어진 야흐야의 치세에 투니스는 이프리키야 기반 왕조의 수도로써 평화를 누리며 번영하였다. 야흐야의 후계자이자 아들 무함마드는 1258년 바그다드 함락 후 압바스 칼리파 왕조가 일시 단절되자 스스로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라 칭하였고, 이로써 투니스는 칼리파의 수도가 되었다. 그의 지위는 1269년 마린 왕조에 의해 무와히드 왕조가 멸망하며 더욱 공고해졌다. 하지만 그 무렵 서유럽에서 프랑스의 성왕 루이 9세의 주도로 추진되던 8차 십자군은 레반트가 아닌 투니스를 노리고 있었다.
2.2.4.1. 8차 십자군 (1270년)
파일:Siege_of_Tunis_1270.jpg 파일:튀니스 루이 9세.jpg
튀니스 공방전 루이 9세의 병사

12세기 이래로 시칠리아 왕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던 투니스가 십자군의 대상지가 된 것은 여러 이유가 있다. 표면상으로는 하프스 왕가의 개종 소문 및 튀니지의 기독교화와 거듭된 이집트 원정 실패로 해상이 아닌 투니스를 거점으로 육로를 통해 진군하려는 것이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한세기에 걸친 기벨린(제국파) & 구엘프(교황파)의 대립 끝에 1266년 프랑스의 왕제 샤를 드 앙주는 교황의 허가 하에 시칠리아 왕국을 정복하였다. 하지만 기존 호엔슈타우펜 왕가를 지지하던 기벨린 세력은 지속적으로 저항하였고, 1270년 그 지도자인 갈반 란치아와 콘라드 카페체 등이 투니스로 망명하였다. 이미 정복 직후부터 하프스 왕조와 기벨린 반군 간의 공조 의혹이 있던 터라 샤를은 분노하였고, 비슷한 시기 금화를 위조해 지불하려던 제노바 상인들이 투니스에서 체포당하고 재산이 몰수되자 개입을 청하였다.[10] 그럼에도 프랑스 국왕 루이 9세는 우선 레반트를 목표로 출정하였다.

1270년 5월, 샤를의 영지인 프로방스에 당도한 루이는 제노바측 선박이 지연되자 항구에 발이 묶였다. 샤를은 십자군이 당도한다면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가 용기를 내어 기독교로 개종할 것이라며 형을 설득하였다. 마침내 출항한 루이는 7월 13일에 중간 기착지 사르데냐에서 투니스 우회를 선언하였고, 이틀 후 재차 출항하였다. 이틀 후인 7월 17일 십자군은 옛 카르타고 부근에 상륙하였다. 루이의 예상과 달리 알 무스탄시르는 개종을 거부하고 항전에 나섰다. 21일 십자군은 카르타고 부근 우물을 장악한 데 이어 24일 카르타고 성채를 기습 점령하였다. 며칠 후 하프스 군대가 십자군 진영을 습격하였으나 격퇴되었다. 투니스의 운명이 풍전등화로 보이던 8월 초엽, 왕자인 발루아 백작 장의 죽음을 시작으로 카르타고의 십자군 진영에는 전염병이 엄습하였다. 8월 24일 샤를의 시칠리아 병력이 합세하였으나 다음날 루이가 사망하였고, 이에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는 투니스 구원을 철회하였다.

루이의 죽음으로 원정 포기가 확실시되었음에도 샤를은 유리한 조건의 협상을 위해 전투를 지속하였다. 8월 28일 그는 튀니스 호수의 라굴레트에 선박을 집결시킨 후 하프스 군대가 모이자 격파하였고, 9월 24일에는 하프스 진영을 점령하였다. 이에 알 무스탄시르는 협상을 청하였고, 마침 프랑스의 차기 국왕 필리프 3세 역시 와병하던 터라 수용되었다. 11월 초엽 타결된 조약에 의거하여 하프스 왕조는 다시 시칠리아 왕국에 조공하고, 원정비의 1/3(금 21만 온스)을 부담하며 투니스에 이탈리아 상인 지구를 설치하고 관세 없는 자유 무역권을 주었다. 또한 기벨린 망명자들을 추방, 모든 기독교도 포로를 석방하고 공개적인 예배와 선교를 허가하였다. 11월 8일 카르타고에 당도한 영국 왕자 에드워드는 협상에 분노하였지만, 3일 후 십자군이 떠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돌아가던 십자군 함대는 폭풍을 맞아 지척의 시칠리아의 트리파니에 당도하는 데만도 3일이 걸렸으며, 40여척이 침몰하는 손실을 입었다. 1만 5천명에 달하는 병력과 세 국왕, 두 공작, 14명의 백작이 참가한 십자군 원정은 샤를에게만 이익을 안겨준 채로 마무리되었다.
2.2.4.2. 내전기
파일:튀니스 밥 제디드 1.png
1278년 알 와시크 (야흐야 2세)에 의해 세워진 성문인 밥 제디드. 메디나의 여섯 성문 중 마지막에 건설되었다.[11]

십자군 후로도 외세의 간섭은 이어졌다. 1272년 9월 샤를은 심복 자크 드 탁시 등의 사절을 투니스에 파견해 약속된 조공과 8차 십자군 당시 남겨둔 목재를 가져오게 하였다. 1277년 부왕 알 무스탄시르를 계승한 야흐야 알 와시크는 2년 후 베자이아의 숙부 아부 이샤크 이브라힘의 반란에 직면하였다. 이브라힘은 아라곤 국왕 페드로 3세에게 무역 특혜를 대가로 군사 지원을 얻어내어 1279년 8월 투니스에 입성하였다. 군부 역시 그의 편에 서자 알 와시크는 양위하였다. 칼리파 대신 아미르 직위에 만족한 이브라힘은 전임자와 그 아들들을 처형하여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12] 그후 페드로는 시칠리아의 반란 세력과 공모하며 투니스에 대한 십자군을 준비한다며 에브로 강 하구에서 함대를 준비하였다. 1282년 봄 프랑스의 필리프 3세는 숙부 샤를에게 아라곤 함대의 목적지가 투니스가 아닌 시칠리아임을 알렸지만, 곧 봉기가 시작되었고 실제로 페드로는 시칠리아의 왕으로 등극한다.[13]

한편 1282년 이브라힘은 알 와시크의 아들이라 칭한 마흐디 주의자 아흐마드의 반란에 직면하였다. 후자는 카이라완을 접수한 후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라 칭하였고, 이브라힘의 아들 아부 자카리야 야흐야의 토벌군은 전투도 없이 흩어져버렸다. 1283년 1월, 이브라힘은 혼란에 빠진 투니스를 두고 베자이아 총독인 아들 아부 파리스압둘 아지즈에 의탁하였다. 부왕의 양위를 받은 압둘 아지즈는 칼리파 알 무타디드를 칭하고 튀니지로 진군하였지만 패하고 전사하였고, 사로잡힌 하프스 왕족들은 처형되었다. 틀렘센으로 망명한 야흐야 외에 유일하게 생존한 이브라힘의 이복동생 아부 하프스 우마르는 바누 술라임 등 베두인들을 모아 투니스로 진군하였다(1284년). 이번엔 아흐마드의 병력이 이탈하였고, 7월 12일 투니스에서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 2세로 등극한 우마르는 며칠 후 숨어있던 아흐마드를 찾아내 참칭을 실토시킨 후 처형하였다. 그 무렵 현지 부족들의 도움으로 베자이아와 콩스탕틴을 장악한 야흐야가 1285년 투니스와 트리폴리를 공격해오자 알 무스탄시르 2세는 틀렘센과 동맹하여 이를 무마시켰다.

그 무렵 시칠리아의 만종 도중 샤를 2세를 사로잡은 아라곤 왕국은 1286년 투니스의 조공 수납권을 얻어내었고, 이후 하프스 왕조는 아라곤 왕가에 연공을 바쳤다. 그러던 1293년경 마요르카의 기독교 신학자 라몬 율이 투니스를 방문, 무슬림 석학들에게 논리에서 패배한 측이 개종하는 조건의 신학 토론을 청하였다. 이를 불손하다 여긴 알 무스탄시르 2세는 그를 감금하고 사형을 선고하였는데, 한 학자의 조언에 추방형으로 감형하였다. 라몬 율은 1304년 재차 투니스를 방문, 칼리파 알 문타시르(무함마드 2세)에게 많은 서신들을 전달하였다. 4년 후 귀환한 그는 무슬림들의 개종은 무력이 아닌 예배를 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라 1311년 비엔 공의회는 주요 대학들의 아랍어, 히브리어, 아람어 강좌 개설을 결의하였다. 1314년, 82세의 고령에도 선교를 위해 현지 복장으로 투니스를 찾은 라몬 율은 분노한 군중에게 투석을 당한 후 시내의 제노바 상인들에 의해 구출되었지만 이듬해 사망하였다.

한편 1301년 아라곤 왕국과 10년의 휴전을 맺은 알 문타시르는 부친 야흐야에 이어 베자이아를 통치하던 아불 바카 칼리드 앗 나스르[14]와 협상하여 둘중 더 장수한 이가 단독 군주가 되어 하프스 조를 통합하기로 하였다. 다만 1309년 알 문타시르가 사망하자 칼리드가 계승해야 했으나 투니스의 무와히드 셰이크들은 칼리드의 6촌 아부 바크르를 옹립하였다. 불과 17일 후 베자이아에서 군대와 함께 당도한 칼리드는 그를 폐위, 처형하고 집권하였다. 그러나 칼리드는 콩스탕틴의 동생 아부 바크르의 반란에 직면하였고, 칼리드의 지배가 가혹하다 여긴 투니스의 유력자들 역시 그에 편에 섰다. 지지를 잃은 칼리드는 양위하였으나 곧 암살되었다. 한편 아부 바크르가 베자이아에서 머뭇거리는 틈에 트리폴리에 머물던 왕공 압둘 와히드 자카리야 이븐 알 리흐야니가 현지 부족들과 투니스로 진군하였고, 시칠리아 함대 및 유럽인 구역의 카탈루냐 용병대의 봉기에 힘입어 도시를 장악하였다.

이로써 하프스 왕조는 다시 동서로 분열되었다. 투니스의 자카리야 1세는 모친의 옛 종교인 기독교로 개종할 의사를 밝히며 아라곤 왕국과 동맹하였고, 철저한 법치를 행하였다. 다만 베자이아의 아부 바크르가 지속적으로 공격해오자 결과를 비관한 자카리야 1세는 야흐야 1세의 장서를 포함한 귀중품 전부를 매각하여 금 2만 파운드와 진주 등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1317년 3월, 자카리야는 지방 순행에 나선다며 투니스를 떠났고, 아부 바크르의 진군 소식에도 현지 장교들에게 대처를 맡기고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투니스 지도부는 살인 혐의로 투옥되었던 자카리야의 아들 다르바(알 무스탄시르 3세)를 석방해 추대하였다. 그는 교외 지방을 포함한 외성을 쌓아 수비 강화에 나섰지만, 1318년 초엽 아부 바크르가 투니스를 장악하고 칼리파 알 무타와킬로 즉위하였다. 알 마디야에서 저항하던 다르바는 틀렘센으로 피신하였고, 트리폴리에 있던 자카리야 역시 알렉산드리아로 망명하였다.
2.2.4.3. 마린 왕조의 침공
파일:튀니스 밥 사분.jpg
1350년경 지어진 밥 사두운. 1881년 원활한 교통을 위해 홍예가 2개 추가되어 현재의 형태가 되었다.

1322년까지 각지의 반란을 진압한 알 무타와킬은 아들들을 각지의 총독들로 봉하며 중앙집권화에 나섰고, 모로코의 마린 왕조와 혼인 동맹을 맺어 틀렘센의 자이얀 왕조에 맞섰다. 원교근공 또한 그는 레콘키스타를 피해 망명해온 안달루스인들을 주축으로 사략선을 조직해 기독교 해안을 약탈함으로써 부를 축적하였고, 1335년에는 시칠리아로부터 제르바 섬을 탈환한다. 한편 1337년 틀렘센을 병합하여 하프스 왕조와 접경하게 된 마린 술탄이자 사위 아불 하산 알리에 대해 알 무타와킬은 후계자로 정한 아들 아불 압바스 아흐마드의 후견을 맡겼다. 그러던 1346년 10월 아부 바크르가 사망하자 당시 투니스에 있던 다른 아들 우마르가 무와히드 셰이크 출신의 재상 이븐 타프라긴의 지지 하에 칼리파 앗 나스르 리딘 알라를 칭하였다. 이에 북상한 아흐마드는 투니스를 자악했지만 곧 앗 나스르에게 살해되었고, 후자는 잠재적 경쟁자인 다른 형제들을 역시 주살하였다.

사태를 관망하던 술탄 알리는 1347년 봄, 찬탈자를 몰아낸다는 명분 하에 진격하였다. 앗 나스르는 투니스에서 도주하였으나 그해 8월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듬달 술탄은 투니스에 개선하였다. 도시에 머물던 알리는 현지 베두인들을 제압하려다가 되려 1348년 그들의 반란을 맞아 패배하였다. 그 무렵 핫즈에서 돌아오던 여행가 무함마드( 이븐 바투타)는 투니스에서 이드 알 피트르를 지낸 후 마그레브로 돌아갔다. 1349년 흑사병의 창궐과 함께 수세에 몰린 알리는 그해 12월 선박에 올라 투니스를 떠났고, 이듬해 초엽 베자이아 총독인 왕자 알 파들이 칼리파 알 무타와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1350년 7월 투니스로 돌아온 전 재상 이븐 타프라긴은 그를 살해하고 13세의 동생 이브라힘 2세를 옹립하였다. 그후 14년간 이어진 이븐 타프라긴의 섭정기에 역사가 압둘 라흐만( 이븐 칼둔)이 대제학(사히브 알 알라마)로 임명되었다. 한편 하프스 왕조는 베자이아와 가베스의 반란에 시달렸고, 1352년 전자를 점령한 마린 술탄 파리스는 1357년 부왕의 전례대로 투니스를 점령하였다. 다만 마찬가지로 베두인들의 반란과 재상의 농간 탓에 술탄은 같은해 회군하였다.
2.2.4.4.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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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스 왕조의 옛 왕궁. 현재는 바르도 박물관의 일부이다. 14세기에 걸쳐 확장된 성벽

내지에 숨어있던 이브라힘과 이븐 타프라긴은 마린 군대가 떠난 후 투니스로 돌아왔다. 1358년 파리스의 사망 후 마린 왕조가 분열되자 하프스 왕조는 그의 위협에서 벗어나 베자이아를 수복하고 중흥하였다. 1360년대에 걸쳐 기존 메디나의 성벽이 보수되었고, 다르바가 공사를 시작한 외성이 밥 알리와 및 밥 알루즈의 건설과 함께 완성되었다. 1369년 이브리힘[15]이 사망한 후 12세 아들 칼리드 2세가 지위를 계승하며 내분이 벌어졌다. 이를 틈타 알 무타와킬의 손자이자 콩스탕틴 총독으로, 1366년 베자이아를 점령해 왕국의 서부를 통합했던 아불 압바스 아흐마드 이븐 무함마드는 1370년 손쉽게 투니스를 장악하였다. 해상으로 도주하던 칼리드는 배가 난파하여 사망하였다. 제위에 오른 아흐마드 2세는 베두인 반란을 진압하고 왕국을 통합하였다. 1383-92년 아라곤 왕국이 재차 제르바 섬을 장악하고 1390년 십자군이 알 마디야를 공격한 것을 제외하면 24년에 걸친 그의 치세는 안정적이었다.

14세기 후반의 평화를 누리며 투니스는 지중해 무역의 중심으로 매우 번영하였다. 비록 전연의 맹과 같이 시칠리아, 제노바, 베네치아에 조공하긴 했지만 평화로 인한 무역 흑자와 해적질로 충당될 수 있었다. 당시 인구는 10만을 상회하였고, 지중해를 접한 도시들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이슬람권에서도 페스, 카이로, 다마스쿠스 등과 함께 상업과 학문의 중심으로 명성을 떨쳤다. 메디나는 본격적으로 현재의 조밀한 구조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시가지는 메디나를 넘어 교외 지방으로 확장하였고, 이를 포함하기 위해 세워진 외성 안쪽도 점점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성문들 중 지지라(섬) 문은 제르바 섬, 카르타게나 성문은 카르타고 방면, 마지막 바흐르(바다) 문은 기독교도 상인들이 거주하던 상관 일대로 이어졌다. 한편 1394년 아흐마드 2세를 계승한 아들 압둘 아지즈 2세(알 무타와킬 3세)는 40년간 장기 통치하며 쿠란에 위배되는 세금을 폐지하였고, 사략선 활동으로 부를 충당하였다.

1429년 투니스에서 발진한 70척의 함대는 1만 8천 하프스 군대와 함께 몰타를 공격, 주민 수천을 사로잡아 귀환하였다. 약탈로 얻은 부는 투니스의 각종 건축 사업과 문화 발전에 투입되었다. 1434년 알 무타와킬이 사망한 후 그의 장손 무함마드(알 문타시르 2세)가 지위를 계승하자, 후자의 숙부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알 문타시르는 숙부 중 한명을 실명시켰고, 콩스탕틴으로 도주한 자카리야 형제에게 사면을 약속하여 초청한 후 그들이 투니스에 당도하자 처형하였다. 다만 알 문타시르 역시 1435년 9월, 원정 도중 사망하였다. 짧은 치세에도 그는 밥 사아둔에 공공 분수와 자신의 이름을 붙인 마드라사를 건립하였다. 그의 사후 콩스탕틴 총독이던 16세 동생 아부 아므르 우스만이 지위를 계승하였다(알 무타와킬 4세). 그러나 반란은 지속되었고 1436년 그의 숙부 아불 하산 알리가 아울라드 아빌 라일 베두인들과 함께 콩스탕틴을 포위하고 투니스까지 위협하였다.

반격에 나선 알 무타와킬은 알제 부근 티파자에서 반군을 격파하였고, 이듬해 사로잡은 베두인 부족장들을 사슬에 묶에 투니스의 카스바로 귀환하였다. 다만 반란 자체는1452년 알리가 사로잡혀 처형된 후에야 진압되었다. 그의 연이은 원정의 결과 1446년 투니스를 방문한 피렌체 사절단은 내륙 지방의 평화와 안전에 찬사를 보냈다. 한편 알 무타와킬은 유럽 상인들을 유치하기 위해 그들에게 자신의 무슬림 신민들과 같은 법적 평등을 보장하였고, 각 국가들과 우호를 유지하려 노력하였다. 내정에 있어 그는 하프스 왕가보다는 자신의 심복들을 중용하였고,[16] 권신 나빌을 숙청하며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 다만 1453년과 1468년 투니스는 흑사병으로 매일 수백명씩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피해를 입었다. 한편 하프스 왕조는 알제리의 자이얀 조와 모로코의 와타스 조가 복속하는 등 마그레브의 패권국 지위를 유지하였고, 밀라노 공국 로도스 기사단 등 외부 국가들과 친교를 맺었다.[17]

수도 투니스에 대해 알 무타와킬은 배수로 체계를 확립하였고, 많은 와크프(재단)를 설립하였다. 동시에 수피즘의 후원자로써 그는 여러 자위야(수도원)를 세웠다. 투니스 등 북아프리카 해안의 항구들은 제노바 등 이탈리아에 곡물을 수출하며 번영하였다. 1488년 반세기 넘게 안정적으로 통치한 알 무타와킬이 사망하자 하프스 왕조는 내전에 돌입하였다. 그의 손자들 간의 내분은 1490년 18세의 증손자 아부 야흐야 자카리야에 의해 정리되었지만, 4년 후 그가 역병으로 사망하자 동생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알 무타와킬 5세)가 계승하였다. 1500년경 그는 학문에 투자하던 선조들의 예를 따라 현대까지 잘 보전된 자이투나 사원에 압달리야 도서관을 건립하였다. 한세기 넘게 유래 없는 평화를 구가하며 국제적인 대도시로 성장한 투니스는 서쪽의 스페인 제국과 동쪽의 오스만 제국 간의 패권 경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며 일시적인 파괴와 쇠퇴를 겪게 된다.
2.2.4.5. 바르바리 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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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 레이스 지도의 튀니스 만 부분 하프스 술탄 무함마드 5세(물라이 하산)

15세기 말엽 스페인의 무어인 추방과 함께 바르바리 해적들은 더욱 활성화되었고, 그중 바르바로사 형제는 알 무타와킬의 허가 하에 투니스의 라 굴레트 항구를 거점으로 기독교 해안을 약탈하고 일부를 그에게 바쳤다. 1504년 형제는 엘바 섬에서 교황 율리오 2세 소유의 선박을 나포하여 투니스로 개선하였고, 이듬해에는 5백명의 군인들과 막대한 금화를 싣고 나폴리로 향하던 스페인 선박을 나포하였다. 보복을 두려워한 형제는 후미진 제르바 섬으로 근거지를 이전하였다. 다만 사략선들은 여전히 라 굴레트를 왕래하였고, 1513년 제노바 해군 제독 안드레아 도리아는 그곳에서 형제 소유의 선박 몇 척을 파괴하였다. 1510년 스페인의 트리폴리, 베자이아 점령을 시작으로 하프스 왕조의 쇠퇴는 가속화되었다. 1516년 바르바로사 형제는 알제에서 자립하였고, 3년 후 오스만 술탄 셀림 1세에 복속하였다. 이러한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 1526년 알 무타와킬이 사망하였다.

사후 아들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알 하산(물라이 하산)이 지위를 계승하였는데, 장남이 아니었던 그는 다른 형제 대부분을 처형하였다. 그중 유일하게 목숨을 건진 라시드는 알제의 하이르 앗 딘에게 망명하였다. 1531년 물라이 하산은 오스만 술탄 쉴레이만 1세에게 하이르 앗 딘에 대한 지원을 청하였으나, 술탄은 오히려 후자로 하여금 투니스를 점령하게 하였다. 1533년 코스탄티니예로 소환된 하이르 앗 딘은 겨울 동안 70여척의 함대가 건조되자 1만여 병력과 1천 2백의 기독교도 및 2척의 유대교도 등으로 구성된 노잡이들을 대동하고 출정하였다. 그리스, 이탈리아 해안에 대한 원정과 약탈을 행한 후 1534년 8월 19일 라 굴레트에 당도한 하이르 앗 딘은 라시드의 등극을 돕기 위해 왔음을 알렸다. 소식을 접한 투니스 시민들은 왕궁을 습격하였고, 물라이 하산은 겨우 탈출하였다. 그후 유력자들은 라 굴레트에 사절단을 보내어 라시드를 모셔오려 하였다. 그러나 하이르 앗 딘은 9천의 병력을 상륙시켜 카스바를 장악하곤 쉴레이만이 도시의 적법한 지도자임을 선포하였다. 정복을 완료한 후에도 그는 투니스에 머물며 강력한 해군 기지로 삼았다.

2.2.5. 스페인 vs 오스만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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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5년 바르셀로나(중앙부)를 출항해 튀니스(왼쪽 상단)을 향하는 스페인 함대. 남북이 거꾸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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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5년 카를 5세의 튀니스 원정을 묘사한 스페인 세비야 알카세르 궁전의 태피스트리

16세기 중반 합스부르크 왕가 치하 스페인은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오스만 제국과 격돌하였다. 그 본격적인 서막은 1535년 카를 5세의 투니스 정복이었다. 1569년 오스만 제국이 수복하였다. 비록 레판토 해전을 틈타 1573년 스페인이 재차 점령했지만 이듬해 오스만 제국에게 수복되었다.
2.2.5.1. 카를 5세의 점령 (1535년)
파일:튀니스 카를 1.jpg 파일:튀니스 1535 (2).jpg
튀니스에 입성하는 카를 5세 스페인 함대의 라 굴레타 공격

한편 투니스를 탈출한 물라이 하산은 스페인의 카를 5세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바르바리 해적을 일소할 기회라 여긴 카를은 마드리드에서 의회를 소집한 후 무려 100만 두카트[18]를 들여 안드레아 도리아 휘하 398척의 함대(갤리선은 74척)와 스페인-독일-이탈리아 인들로 구성된 2만 7천[19] 대군을 편성하고 친정에 나섰다. 1534-35년의 겨울에 걸쳐 다국적 원정군이 바르셀로나에 집결하자 그 위용은 당대인들의 놀라움을 샀다. 유럽 각지에서 무수히 많은 귀족들이 몰려들었으며, 카를의 지시로 건설된 대장선은 노 하나에 4명의 노꾼이 배치되었다. 병원으로 쓰인 선박만 6척에 달할 정도로 대규모이던 함대는 1535년 5월 30일, 족쇄를 찬 네덜란드 개신교도 노꾼들과 함께 바르셀로나를 출항하였다. 6월 초엽 카를의 스페인 함대는 3세기 이전 8차 십자군과 마찬가지로 사르데냐의 칼리아리에서 제노바, 교황청, 나폴리, 시칠리아 함대와 합류한 후 투니스로 향하였다(6월 14일).

같은 날 함대는 하이르 앗 딘에게 침공을 알린 2척의 프랑스 선박을 나포한 후 비제르트와 카르타고 사이에 상륙하였다. 제노바 함대의 엄호 하에 하이르 핫 딘 소유의 함대 30여 척을 격파한 카를은 수륙 양면으로 '투니스의 관문'인 라 굴레타를 공격하였다. 포르투갈에서 지원해 준 당대 최강의 전함이던 갈레온 보타포구는 석호로 이어진 수로의 입구를 막던 쇠사슬을 충각으로 끊은 후, 탑재한 366문의 대포로 라 굴레타 요새를 포격하였다. 28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7월 14일, 라 굴레타는 함락되었다. 요새 내에 배치된 3백여 문의 대포들 중 상당수가 프랑스 산임을 확인한 카를은 프랑수아 1세가 약속과 달리 오스만 측을 지원한 사실을 깨닫고 분노하였다. 튀니스 석호로 진군한 스페인-이탈리아 함대는 40여척의 오스만 함대를 격파하였다. 육군은 신설된 테르시오 부대를 앞세워 진군하였고, 알바 공이 지휘하는 1만 보병이 뒤따랐다. 여름 더위와 수비대의 연이은 반격을 이겨낸 스페인 군대는 카스바에 구금되었던 5천의 기독교도들의 봉기에 힘입어 투니스를 함락하였다(1535년 7월 21일).

카를은 테르시오의 선두에 서서 입성하였고, 하이르 앗 딘은 수천의 튀르크 병력과 알제로 도주하였다. 정복자들은 3만에 달하는 무슬림 주민들을 학살하였고, 그에 반해 9천의 기독교도 포로들은 해방되었다. 시체들의 악취에 질겁한 카를 5세는 곧바로 라 굴레트 남쪽의 라데스로 진영을 옮겼다. 한편 복위한 물라이 하산은 그해 8월 5일 스페인에 복속하고 연공에 더하여 라 굴레트의 스페인 수비대 주둔 비용을 납부한다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카를은 여세를 몰아 알제리 해안을 정복하려 하였으나 전투에 지친 군대와 동맹들의 마음을 모으지 못하였고,라 굴레트와 (비슷한 시기 점령된) 안나바에 각각 1천[20]의 병력을 남긴 채 8월 17일 원정군은 튀니지를 떠났다. 나폴리에 개선한 후 휴식을 취한 카를은 1536년 4월 5일, 로마에서 고전적인 개선식을 통해 이교도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였다. 연대기에 의하면 카를은 '손에 창을 쥐고 전방의 병졸들과 생사를 함께하며' 싸웠다고 한다. 투니스 정복에 대해 베네치아에서는 카니발, 몰타에서는 불꽃놀이, 팔마에서는 바르바로사의 패배 재현극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기독교 지중해권 각지에서 기념되었다.
2.2.5.2. 스페인의 간접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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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굴레트 요새(قلعة حلق الوادي). 초대 총독 베르나르디노(1535-38년)[21]와 후임 프란시스코(1538-45년) 시기에 작은 도시로 변모하였다.

스페인의 속국으로 복원된 하프스 왕조는 현지인들의 반감을 샀고, 1537년 수스와 카이라완 등 튀니지의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물라이 하산은 주군 카를에 청하여 시칠리아의 군대를 지원받았지만 진압에 실패하였고, 2년 후 안드레아 도리아의 함대가 당도한 후에야 수스와 스팍스 해안이 평정되었다. 다만 1540년 스페인 주둔군이 철수한 후에 도시들은 재차 봉기하였고, 오스만 제독 투르굿에 복속하였다. 1542년 물라이 하산은 반격에 필요한 무기와 화약을 얻으러 이탈리아로 향했는데, 그의 부재를 틈타 아들 아흐마드가 부왕이 기독교로 개종하고 왕국을 스페인에 넘기려 한다며 반란을 일으켰다. 물라이 하산은 용병대장 바티스타 로페르디와 투니스로 돌아왔으나 아흐마드에게 사로잡혔고, 처형과 실명 중 후자를 선택한 후 나폴리로 추방되었다. 라 굴레트의 총독 프란시스코 데 토바르는 아흐마드가 수도를 비운 틈에 그의 동생 압둘 말리크를 지원, 변장한 채로 잠입하여 카스바를 장악한 후자는 물라이 하산의 약속대로 연공과 6천 두카트 상당의 라 굴레트 수비대 주둔비를 납부하였다.

하지만 압둘 말리크가 집권 36일만에 독살당하자 투니스 시민들은 라 굴레트에 인질로 있던 아흐마드의 다른 동생 물라이 무함마드를 추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프란시스코는 압둘 말리크의 12세 아들 무함마드를 옹립하였다. 한편 내륙의 베두인들을 규합한 아흐마드가 곧 당도하여 카스바를 장악하였고, 무함마드는 간발의 차이로 라 굴레트에 피신하였다. 복위한 아흐마드는 오스만 조의 지원을 모색하며 라 굴레트를 봉쇄하였다. 이에 프란시스코는 카를에게 물라이 하산의 복위를 청하였다. 1545년 신임 라 굴레트 총독으로 부임한 루이즈 페레즈 바르[22]는 1547, 48년 아흐마드와 평화 협정을 맺었으면서도 동시에 튀니스 석호의 치클리 섬을 요새화하여 투니스를 압박하였다. 1550년 물라이 하산을 대동한 안드레아 도리아의 알 마디야 공격에 동참한 총독 루이즈는 전사하였고, 하산 역시 독살당하며 복위는 무산되었다. 그해 말엽 아흐마드는 재차 스페인과 6년의 휴전을 맺었고, 1555년 내부 문제에 직면한 카를은 이를 연장하였다. 한편 오스만 제국은 1549년 제르바 섬, 1554년 알 마디야, 1558년 카이라완을 장악하며 투니스를 노렸다.

1565년 몰타 공방전 당시 시칠리아 총독 돈 가르시아 데 톨레도는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라 굴레트가 공격당한다면 20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며, 투니스의 호수 접안부(기존 유럽인 구역)에 새로운 요새를 세워 방어력을 보강하도록 상주하여 관철시켰다. 그러던 1569년 10월, 오스만령 알제 총독 울루츠 알리는 카빌레 베르베르 부족 및 5천 예니체리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육로를 통해 투니스로 진군하였다. 아흐마드는 라 굴레트 총독이자 펠리페의 대부인 안토니오 알론소[23]에게 지원을 청하였지만, 후자는 성채를 방어할 정도의 병력밖에 없었기에 거절하였다. 홀로 반격에 나섰으나 군대가 흩어지며 패배한 아흐마드는 라 굴레트로 피신하였고 그해 12월 울루츠 알리는 투니스에 무혈 입성하였다. 다만 라 굴레트에 대한 공격은 격퇴되었고, 1573년 10월 레판토 해전의 승장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는 그를 기반으로 투니스를 점령하였다. 그는 민심을 잃은 아흐마드 대신 팔레르모에 유폐되었던 후자의 동생 물라이 무함마드를 술탄으로 추대하였고, 역으로 팔레르모로 은퇴한 아흐마드는 연금을 받으며 살다 1575년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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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니스로 진군하는 오스만군(1569년) 1573년 스페인의 2차 튀니스 점령. 1565년에 세워진 성형 요새 형태의 투니스 성채가 보인다.
이교도들의 군화가 마드라사들을 짖밟았고, 모든 과학 장서들은 길거리에 흩어져 사원 동편을 지나는 이들은 이를 밟지 않고는 지나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시내에서는 (성당 예배를 알리는) 종이 울렸고, 풍문에 의하면 기독교도들이 대사원에 말을 매었다고 한다.
ㅡ17세기 역사가 이븐 아비 디나르의 기록

물라이 무함마드의 만류에도 스페인 군대는 투니스를 약탈하였다. 사원으로 피신한 주민들은 살해되었고, 돈 후안은 자이투나 사원의 대리석 기둥 4개를 제거하였다. 시내의 무슬림들은 기독교도들이 장악한 구역에서 밀려났고, 많은 난민들이 주변 지역으로 몰렸다. 스페인 총독은 라 굴레트 대신 투니스 외곽의 요새에 상주하였고, 물라이 무함마드와 함께 사법권을 지녔다. 한편 도주한 오스만 수비대는 북쪽의 비제르트와 남쪽의 카이라완에 주둔하며 기회를 옅보았고, 따라서 하프스 왕조의 지배력은 투니스 일대에만 국한되었다. 1574년 스페인과 대립하던 네덜란드의 빌럼 판 오라녀와 프랑스의 샤를 9세는 오스만 술탄 셀림 2세에게 스페인군을 분산시킬 원정을 청하였다. 그해 7월 술탄은 시난 파샤와 울루츠 알리 휘하 250 척의 함대에 4만(혹은 7만 5천) 대군을 승선시켜 투니스로 파견하였다.
2.2.5.3. 오스만 정복 (157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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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4년 라 굴레트를 수륙 양면으로 공격하는 오스만 함대

7월 15일, 마그레브 일대의 병력과 합류하여 10만으로 불어난 오스만 군대가 튀니스 만에 진입하여 7천의 수비대가 배치된 라 굴레트와 투니스의 두 요새를 공격하였다. 돈 후안은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함대로 구원을 시도하였으나 폭풍을 맞아 좌절되었고, 8월 24일(혹은 25일) 라 굴레트가 함락되었다. 수비대장 돈 페드로 포르토카레호는 코스탄티니예로 압송되던 중 사망하였다. 한편 구원을 위해 출정한 스페인군에는 향후 돈키호테를 집필하는 미구엘 데 세르반테스가, 오스만 진영애는 향후 모로코 사드 왕조의 술탄으로 즉위하는 압둘 말리크가 참전하였다. 전자의 기록에 의하면 오스만 군대는 투니스 성채에 대해 22 차례의 공세를 가하였고, 2만 5천의 병력을 잃었다고 한다. 지속적인 충돌 끝에 오스만 함대가 라 굴레트 수로를 통해 석호로 진입하며 전세가 결정되었다. 3백으로 줄어든 수비대는 9월 3일 항복하였고, 총독 가브리엘레 세르벨로니는 수염이 잡힌 채로 시난 파샤 앞에 끌려가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하는 수모를 겪었다.[24]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로 중 상당수가 학살당했고, 남은 이들은 갤리선의 노예가 되었다.

두 곳에 총상을 입은 물라이 무함마드는 사로잡혀 코스탄티니예로 압송되어 예디쿨레 성채에 감금되었고, 그곳에서 1594년 사망하였다. 그의 장남 물라이 나자르는 1574년 당시 전사하였고, 다른 아들 물라이 압둘 라흐만은 투니스 수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1581년 스페인 함대는 물라이 하산의 동생 아흐마드(하메트)와 소수의 그의 지지자들을 가베스 부근에 하선시킨 후 귀환하였다. 아흐마드는 베두인들의 동무을 받아 투니스를 공격하려 하였으나 배신당한 후 내륙에 은둔하다가 1592년 엘 젬에서 사로잡혀 코스탄티니예로 압송되었다. 한편 1594년 아흐마드는 몇몇 셰이크들과 6만이 넘는 동조자들을 확보했다며 스페인령 시칠리아 총독에게 투니스 공격에 50여 척의 함선 지원을 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후 스페인 영토에 남은 하프스 왕족들은 투니스 수복을 포기하고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한편 투니스 방어에 재정을 소모한 스페인 왕국은 1575년 파산하였고, 이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에 대한 개입에 악영향을 주었다. 이후로도 이어진 오스만-네덜란드 공조는 1582년 안트베르펜의 오스만 대사관 건립으로 이어졌다.

2.3. 오스만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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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중반의 튀니스. 베르사유처럼, 기존 도시와 분리된 바르도 궁전과 정원이 보인다.

1581년 오스만-스페인 강화 이후 투니스에 대한 오스만 지배가 확립되었다. 투니스는 안달루스 등지에서 몰려든 이주민들로 인구 증가를 겪었고, 바르바리 해적 및 노예 무역의 번창으로 인한 수익으로 호화로운 건물들이 세워졌다. 그러나 알제리와 마찬가지로, 튀니지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지배는 1587년 초대 파샤 울루츠 알리의 사후 흔들렸다. 투니스에 주둔한 4천의 예니체리 부대는 1591년 봉기하여 총독을 압도하고 정권을 장악하였고, 그후 예니체리 장교인 데이가 실권을 행사하였다. 1593년 3번째 데이로 선출된 카라 오스만 데이는 1598년 파샤를 명예직으로 제한하고 실권을 취하였다. 그는 투니스를 기반으로 강력한 함대를 건조하고 해안을 따라 일련의 요새들을 세움과 동시에 도시 주변을 평정하여 일대의 안정을 가져왔다. 1609년을 전후로 그는 안달루스의 모리스코 난민 8-9만명을 튀니지에 수용하였고, 대부분 농촌 소도시들에 수용되었지만 일부는 투니스에 정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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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5년경 건설된 다르 오스만. 카라 오스만 데이는 카스바가 아닌 메디나에 거주한 유일한 데이이다.

1610년 죽음을 맞기 전, 도시를 불안정한 군부에 몰아주기 싫었던 카라 오스만 데이는 지방 군대의 지휘관으로써 ' 베이' 직위를 신설하고 사위인 조지아계 예니체리 장교 람단을 그에 임명하였다. 다만 실권은 군부를 계승한 유수프 데이[25]에 있었고, 1613년 람단 베이가 사망하자 그의 부관인 코르시카 출신의 무라드를 베이로 추대하였다. 무라드 베이는 내륙을 지배권을 데이들에게 일임하고 투니스 지배에 만족하였다. 터키인 색채가 강했던 실권자 유수프 데이는 1616년 투니스에 첫 터키 양식의 모스크를 세웠고 그 주변에 터키식 시장인 수크 앗 투르크를 조성하였다. 함께 세워진 수크 엘 비르카에선 바르바리 해적에 의해 잡혀온 기독교도 노예들이 거래되었다. 유수프 데이가 지휘하는 투니스의 9천 예니체리 부대와 수천의 현지 부족 기병대, 2백척이 넘는 함대는 당대 마그레브 지역에서 가장 강한 군사 단체였다. 그의 튀르크화 정책과 함께 튀르크어를 쓰는 지도부와 아랍어를 쓰는 현지 주민들 간 언어적인 간극이 굳어지기 시작하였고, 많은 튀르크인들이 투니스 등 해안 지방을 중심으로 정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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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프 데이 모스크. 튀니스에 11번째로 세워진 모스크로, 하프스 시대에 세워진 튀니지의 첫 팔각 양식 미나렛이 유명하다.[26]

1631년 무라드 베이의 사후 포르테(오스만 조정)의 승인 하에 그를 계승한 아들 함무다 파샤는 점차 노쇠해가는 유수프 데이 대신 군부를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트리폴리의 파샤로부터 제르바 섬의 지배권을 회복하는 데에는 상호 협력하였고, 그를 기념하고자 투니스에는 제르바 출신 상인들 만을 위한 시장이 세워졌다. 1637년 유수프 데이가 사망하자 함마다 파샤의 지지를 얻은 이탈리아계 우스타 무라드가 무력으로 데이가 되었다. 6척의 함대와 20년 이상 티레니아 해를 누빈 우스타 무라드는 유럽측 기록에 따르면 9백여 척을 나포하고 2만명을 사로잡아 투니스의 노예 시장에 팔았다고 한다. 1640년 6월 우스타 무라드가 사망하였고, 이후의 데이들은 강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1647년 함무다 파샤는 투니스의 예니체리 부대를 장악하고 모든 관료들을 직접 임명하는 등 중앙 집권에 성공하였다. 이로써 튀니지에는 사실상의 독립국인 무라드 왕조가 설립되었다.

2.3.1. 무라드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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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양식의 함무다 파샤 모스크[27] 다르 함무다 파샤. 현재는 고급 레스토랑으로 개조되어 활용하고 있다.

함무다 파샤는 투니스의 메디나에 많은 시장과 궁전, 아지자 오스마나 비마리스탄을 세웠다. 궁전 중에는 왕자 시절인 1630년에 건립한 다르 함무다 파샤와 다르 엘 베이가 유명하다. 즉위 후 함무다 파샤는 민중과 소통하기 위해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다르 엘 베이에 주로 머물렀다. 1643년 하무다 파샤는 군부로부터 하프스 왕조의 별궁으로 쓰이던 바르도 궁을 매입, 대대적인 복원과 증축에 나섰다. 과수원, 하맘(목욕탕), 카흐베하네(카페), 시장, 방문자 숙소 등이 세워지며 궁전 도시로 거듭난 바르도는 하무다 파샤의 후계자 무라드 2세 대에 베이의 거처가 되었다. 1655년 그는 오스만 건축가들을 고용하여 터키 양식의 함무다 파샤 모스크를 건립하였다. 한편 같은해 4월 영국 정부는 바르바리 해적들의 잉글랜드 선박에 대한 침탈을 억제하기 위해 제독 로버트 블레이크 휘하의 함대를 파견하였다. 북아프리카 해안의 베이들 중 투니스만이 불복하자, 15척의 영국 함대는 투니스 북쪽 30km의 가르 엘 멜흐에 자리한 함무다 베이의 병기창을 포격해 2개의 포대와 9척의 전함을 파괴하였다. 이는 해전사 사상 상륙 없이 해안 포대를 파괴한 전투였다.

1659년 함무다 파샤는 포르테로부터 공식적으로 파샤에 임명되었다. 다만 1665년 이번에는 프랑스 함대가 당도하자 충돌을 원치 않던 그는 같은해 12월 25일 조약을 체결하였다. 프랑스 대사는 타국의 대사들보다 우위에 놓였고, 튀니지 전역에 대한 유럽 각국의 무역권이 보장되었다. 이듬해 함무다 파샤가 다르 엘 베이에서 사망하자 기존에 정해둔 대로 장남 무라드 2세가 투니스와 베이 작위를, 차남 무함마드 알 하프시가 카이라완 및 수스, 막내 후세인이 서부 접경 지대를 계승하였다. 무라드 2세는 각지를 순행하며 세금을 거두고 알제리의 침공에 맞섰는데, 1673년 실패한 원정을 틈타 투니스의 데이 알리 라즈가 장교 무함마드 아가를 베이로 옹립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수도로 귀환한 무라드 2세는 반란을 진압한 후 군부를 개혁하였고, 이로써 데이의 권력이 약화되었다. 군부를 약화시키려 그가 소유한 푼두크(카라반사라이)를 무라디아 마드라사로 전환한 그는 2년 후 바르도 궁에서 사망하였다. 유수프 데이의 딸과 결혼한 무라드 2세는 그녀와 세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장남 무함마드(마메트 베이)와 차남 알리가 계승 분쟁을 벌였다.

무함마드 베이는 즉위 직후 군부는 그의 숙부 무함마드 알 하프시를 데이로 선출하여 맞섰고, 이에 후자는 추방되었다. 그후 알리가 튀니지 서북부 부족들을 동원하여 진군해오자 무함마드 베이는 투니스를 떠나 카이라완에서 농성하였다. 1677년 양측의 전투에서 승리한 알리는 투니스를 장악하고 베이로 등극하였다. 한편 튀니지로 돌아온 무함마드 알 하프시는 카이라완의 무함마드와 동맹하여 알리에 맞섰다. 그러던 1679년 알제리 측의 중재로 휴전이 성립되었다. 알리, 무함마드, 무함마드 알 하프시는 각각 투니스의 베이, 내륙 산작들의 지휘관, 투니스의 파샤가 되었다. 다만 온전히 명예직이던 파샤에 만족하지 못한 무함마드 알 하프시는 재차 무함마드와 연합해 봉기하였고, 비록 전자는 재차 추방되었으나 무함마드와 알리 간의 전쟁은 지속되었다. 그 틈에 투니스의 군부는 튀르크인 아흐메드 첼레비를 데이로 선출하였고, 그는 자신의 맘루크 무함마드 마뉴트를 베이로 임명하였다. 위기를 느낀 무함마드와 알리 형제는 알제의 아흐메드 코자에 도움을 청하였고, 1686년 5월 투니스는 알제리 군대에 점령되었다.

2.3.2. 내전과 대 알제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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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2년 건립된 모하메드 엘 베이 무라디(시디 마레즈) 모스크

투니스 점령 후, 알리가 알제리와 내통해 집권하려 한다고 여긴 무함마드는 그를 암살하고 단독 집권하였다. 무함마드 베이는 알제리 측의 대리인으로 투니스에 남아있던 무함마드 벤 체케르에 자신의 딸을 결혼시켜 복속시키려 하였으나, 베이 직위를 노리던 후자는 거부하였다. 군부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한 무함마드 벤 체케르는 재차 알제리 군대를 불러들여 투니스를 포위하였고, 장기간의 극심한 포위 끝에 무함마드 베이는 남쪽으로 도주하였다. 1694년 11월 12일 알제리의 데이 차반네 코자와 무함마드 벤 체케르는 도시를 점령하였다. 전자의 튀르크, 후자의 베두인 병력은 시내의 시장들을 약탈하였고, 분노한 시민들은 군부의 주도 하에 봉기하였다. 한편 오스만 원군과 현지 부족들을 모아 돌아온 무함마드는 1695년 5월 1일, 카이라완에서 무함마드 벤 체케르를 격파하였다. 4일 후 투니스 주민들은 도시에 당도한 무함마드에게 성문을 열어주었고, 그는 환영을 받으며 베이로 복위하였다. 알제리로부터 버려져 카스바에 피신했던 데이 아흐마드 첼레비는 그간 저지른 악행을 기억하던 주민들에게 난도질당했다.

무함마드 베이는 두 차례의 포위를 겪으며 파괴된 투니스를 복구하고 안정을 회복하였다. 이듬해 그가 두 어린 아들만을 남긴채 사망하자 디반(내각)은 무라드 2세의 막내 아들 롬다네를 베이로 추대하였으나, 이내 실세로 대두한 그의 피렌체 출신 맘루크 마둘에 대한 주민들과 군부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불안해진 베이는 무함마드의 장남 무라드를 의심, 그를 다르 엘 베이로 소환하여 모반 혐의로 실명형을 내렸다. 하지만 탈출에 성공한 무라드는 각지의 튀르크 주둔군 및 베두인들과 함께 거병하였다. 롬다네 베이는 도주하려 하였으나 붙잡혀 처형되었고, 18세의 무라드는 투니스에 입성하여 베이로 등극하였다. 무라드 3세는 롬다네의 옛 지지자 전부를 학살하였고, 혼란을 틈타 재차 도시를 장악하려 하였던 알제리 당파를 숙청하였다. 이후 알제리에 선전포고한 그는 군부의 지지와 함께 동맹인 트리폴리의 병력과 함께 콩스탕틴으로 진군, 알제리의 데이 알리 코자를 격파하였다(1698년). 다만 알제리 측이 전군을 동원하여 반격해오자 무라드는 콩스탕틴의 포위를 풀고 투니스로 철수하였다.

1701년 재차 알제리와의 전쟁에 나선 무라드 3세는 투니스의 예니체리 아가(지휘관) 이브라힘 샤리프를 코스탄티니예로 파견해 모병을 맡겼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양측의 대립을 끝내라는 지시를 받은 이브라힘은 터키 군대와 함께 가르 엘 멜흐에 당도하였다. 1702년 무라드 3세는 이들과 함께 알제리로 진군하였다. 이에 이브라힘은 시파히 부대의 아가 후사인과 결탁하여 6월 8일 무라드를 암살하였다.[28] 투니스로 귀환하여 무라드의 동생 하산 등 4살배기를 포함한 모든 무라드 왕족을 학살한 이브라힘은 군중의 경악 속에 무라드 왕조의 멸망을 선포하였다. 여론의 분노에 직면한 이브라힘은 기존에 취하려던 베이 칭호를 폐지하고 데이로 선출된 것에 만족하였다. 한편 튀르크 군부는 그의 학살과 독재에 반발하였고, 정권 교체를 틈타 알제리와 리비아의 군대가 양면에서 침공하였다. 이브라힘은 트리폴리 베이를 격퇴했지만 알제의 데이에게는 1705년 7월 8일일 케프에서 패하고 사로잡혀 압송되었다. 이틀 후, 남은 군대와 투니스로 회군한 기병 대장 후사인[29]은 7월 15일 디반에 의해 베이로 추대되었다.[30]

2.3.3. 후사인 왕조

파일:튀니스 엘 제디드 2.png 파일:튀니스 마드라사 1.jpg
1726년 건립된 엘 제디드 모스크 1752년 건립된 마드라사 엘 바쉬야

후사인 베이는 1705년 말엽 알제리 측에 의해 석방된 후 투니스 수복을 위해 진군하던 이브라힘을 가르 엘 멜흐에서 암살하며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 그는 포르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예니체리 부대의 지지를 얻었고, 민생에 신경써 현지인들의 호감을 샀다. 동시에 맘루크들을 친위 세력으로 삼고 프랑스인 조언자를 둔 후사인 베이는 다양한 민족들의 통합에 이슬람을 활용하였다. 신앙에 있어 경건함을 보임과 함께 그는 투니스에 1726년 엘 제디드 사원, 이듬해 데르스 마드라사를 세웠고 바르도에도 사원을 세웠다. 한편 집권 이듬해 동생 아불 하산 알리를 후계자로 지목했던 후사인은 1710년과 1712년 늦둥이를 얻자 약속을 어기고 그들을 후계자로 세웠고, 이에 알리가 반발하자 그를 연금시켰다(1726년). 연금지를 탈출한 알리는 현지 부족들과 알제 데이의 지원으로 1735년 후사인 베이를 격파하였다. 이후 투니스 수비대가 항복하였고,후사인은 수스로 도주하였다. 다만 도움의 대가로 알리는 투니스 주변에 진영을 차린 알제리 군에게 노새 35마리 분의 은을 배상금으로 지급하고 매년 5만 리얄의 연공을 약속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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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중후반 알리 2세에 의해 건립된 후세인 왕가 영묘[31]

알리는 아들 유누스를 보내 수스를 포위하였고, 1740년 후사인은 붙잡혀 처형되었다. 정당성 확보를 위해 알리는 1741년 제노바령 타바르카 섬을 점령하였고, 1500명의 기독교도 포로와 투니스에 개선하였다. 같은해 유누스는 프랑스령 캅 네그흐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후 알리는 여러 반란에 시달렸다. 먼저 아들 유누스가 반란을 일으켜 투니스를 점령, 베이로 등극하였다. 반격에 나선 알리는 카스바에서 그를 포위하였고, 궁지에 몰린 유누스는 알제로 도주하였다. 다음으로 알제리로 망명했던 후사인의 아들들인 무함마드와 알리가 콩스탕틴의 데이가 이끄는 병력과 침공하여 투니스에 이르렀다. 알리는 성벽을 복구하고 해자를 세워 보강하였지만, 1756년 8월 31일 도시는 기습 점령되었다. 이틀 후 폐위된 알리는 사슬에 묶여 알제로 압송되었고, 곧 신임 베이 무함마드(알 라쉬드)의 부하들에게 교살되었다.[32] 다만 무함마드 베이는 전리품 분배에 있어 콩스탕틴의 데이와 충돌한 후 요새화된 바르도 궁으로 피신하였다. 그후 투니스의 튀르크 군부가 알제리 군의 지원 하에 집권하여 군정을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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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무라르 왕조의 함무다 베이가 옛 아글라브 궁전 자리에 세운 다르 엘 베이. 1795년 함무다 파샤가 층을 더하였다.

한편 스팍스로 향하여 근왕병을 조직한 알리는 튀르크 군부의 포위를 격퇴하였고, 알제리인들과 협상에 나서 막대한 배상금 및 연공 납부를 대가로 철수를 유도하였다. 그후 형제는 공동으로 재위하였고, 1759년 무하마드가 사망하자 알리가 단독 집권하였다. 알리 2세는 25년간 안정적으로 통치한 후 1782년 사망하였다. 뒤를 이은 아들 함무다 파샤는 1784년 튀니지 상인들의 재산권을 침해한[33] 베네치아 공화국에 1784년 선전포고하였다. 그해 8월 30일, 제독 안젤로 에모 휘하의 9척의 베네치아 함대가 튀니스 만에 진입하였다. 3일간 폭풍에 시달린 베네치아 함대는 해적에게 나포되었던 나폴리 상선을 구출하고 라 굴레트를 비롯한 해안을 포격하였다. 그후 튀니스 만을 봉쇄하던 베네치아 함대는 1788년 철수하였고, 이듬해 프랑스 대혁명 후 위기에 직면한 베네치아 공화국이 1792년 피해를 보상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납부하는 것으로 전쟁은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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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헤브 에타바아 모스크. 함무다 파샤의 재상 유수프 사히브 앗 타바아가 1808-14년 유럽인 노예들로, 이탈리아풍으로 건립하였다.

기세가 오른 함무다 파샤는 이듬해 트리폴리의 오스만 총독 알리 벤굴이 제르바 섬을 공격하자 반격에 트리폴리를 침공, 총독을 이집트로 축출하고 카르만리 왕조를 복원시켜 튀니지의 영향력 하에 두었다. 1807년에는 알제리의 침공 역시 격퇴하며 함무다 파샤의 치세에 후사인 왕조는 전성기를 맞았고 수도 투니스는 15세기 번영기의 10만 인구를 회복하였다. 허나 그가 일군 전성기는 1811년 투니스의 반란으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함무다 파샤 역시 32년의 치세 끝에 1814년 9월, 바르도 궁에서 유럽인 맘루크 대장인 나폴리 출신의 마리아노 스틴카에 의해 독이 든 커피로 암살되었다. 사후 동생 우스만이 계승하였지만 3달만에 암살되었고, 무함마드 1세의 아들 마흐무드에 이어 후자의 아들 후사인 2세가 계승하였다. 그의 치세에 튀니지 함대는 1826년 영국, 이듬해 프랑스에 패배하였고 도시에 대한 후자의 경제적 영향력은 점차 확대되었다.

2.4.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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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들어 완전히 왕궁으로 정착한 바르도 궁전

1830년 프랑스의 알제 정복은 이웃한 튀니지에 대한 침투의 확대로 이어졌다. 알제 포위 당시 오스만 원군의 진군을 방해하여 원성을 샀던 후사인은 그해 12월 프랑스 대사와 체결한 조약에서 8차 십자군 당시 루이 9세를 기리는 예배당 설립을 허가하였다. 1835년 후사인의 사후 계승한 동생 무스타파가 2년만에 사망하자, 후자의 아들 아흐메드 1세 역시 프랑스와의 친교에 치중하였다. 투니스에 대한 프랑스의 입김을 경계한 포르테는 아흐메드의 책봉 시에 오스만 베이 휘하의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1838년 5월 15일 라 굴레트에 당도한 오스만 베이는 다음날 내각의 환대 및 시파히-아랍 기병대의 호위 하에 투니스에 입성하였고, 3일 후 바르도 궁전의 아흐메드를 알현하여 선물과 인장을 전달하였다. 한편 1840년 프랑스의 카르타고 성당 건설이 시작되자 그해 포르테는 아흐메드를 군대 원수로 임명하였다. 이는 역대 투니스의 베이들이 수여받은 직위들 중 가장 높은 것이었다.

그러던 1846년 여름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리프의 아들 몽펜시에 공이 카르타고와 투니스를 방문하자 아흐메드는 그를 극진히 대접하였다. 그러자 베이의 프랑스 방문 역시 제안되었고, 그에 따라 아흐마드는 기독교인 관료 주세페 라포[34]와 프랑스 대사의 주선으로 같은해 11월 파리로 향하였다. 루이 필리프의 환대를 받음과 동시에[35] 프랑스의 발전상을 확인하고 돌아온 아흐메드는 고국의 근대화에 나섰다. 먼저 정부가 유럽식 부서제로 개편되었고 바르도에 군사 학교 및 화폐 주조소가 세워졌으며, 1846년 1월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또한 앗 자이투나의 말리키 & 하나피 신학교 역시 정비되었다. 다만 모든 개혁이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고, 라 굴레트에서 건조된 거대한 선박이 막상 바다로 이어진 수로를 통과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아흐메드 시기의 근대화는 1847-8년에 걸쳐 밥 알 자지라 사원과 밥 엘 바흐르가 복구된 것을 제외하면 투니스의 일상 자체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바르도, 라 굴레트, 모하메디아(살레히야)의 궁전 건설에도 막대한 비용이 투입되었지만 모하메디아는 거의 활용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후임자 무함마드 2세 때에 모하메디야 궁전은 라 마르사의 다르 앗 타즈 궁전의 증축을 위한 자재로 사용되며 허물어졌다.

1만 5천의 신식 군대를 크림 전쟁에 파병한 아흐메드가 1855년 자녀 없이 사망하자, 후세인 2세의 아들인 사촌 무함마드 2세가 계승하였다. 1857년 탄지마트를 본뜬 개혁의 촉구를 명분으로 프랑스는 9척의 함대와 7백문의 대포를 라 굴레트로 보내어 베이를 압박하였다. 그에 따라 같은해 모든 신민에 대한 종교의 자유와 법적 평등을 보장한 기본 협약을 발표한 무함마드는 2년 후 사망하였다. 사후 동생 무함마드 3세(사디크 베이)가 계승하였다. 1860년 그는 영국 대사 리처드 우드의 조언대로 투니스에 첫 제지 공장 및 아랍어 신문 알 라시드를 설립하였다. 그를 전후로 전신, 아랍권의 첫 헌법, 의회 체제 등이 도입되었고 베이의 권력은 약화되었다. 1862년 기존의 카라반사라이(폰두크 데스 프랑세스)에 있던 프랑스 대사관은 해안으로 이어지는 대로(현재의 하비브 부르기바 거리)로 이전되었다. 기존 도심과 석호 연안의 교외 지방을 연담화하기 위한 노력으로 1860년대 들어 이미 관리가 부실하던 메디나의 성벽 철거가 시작되었고, 1872년 청동 대포들과 라 굴레트 성채가 매각되었다.

2.4.1. 프랑스의 입김과 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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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활한 교통을 위해 1881년 3개의 아치로 확장된 밥 사두운. 구도심 성문에 대한 상세한 설명(아랍어)

프랑스 인들을 중심으로 유럽인들의 이주가 증가하며 도심이 확장되었다. 특히 밥 엘 바흐르 일대는 유럽인들의 거주지가 되었고, 현재의 카르타게나 거리까지 시가지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새 구역들에는 상수도(1860년), 전등(1872년), 집수 시설(1873년) 등이 세워졌다. 전통적인 무역과 공방들은 쇠퇴하였고, 프랑스 이주민들을 중심으로 유럽과의 교역이 활성화되었다. 이로써 투니스는 점차 근대적인 도시로 변모하였고, 제도 개혁 역시 지속되었다. 하지만 기존의 사략선 활동이 근절된 상황에서 근대화와 궁전 건설로 인한 지출은 지속된 차관과 증세 외에는 충당될 방법이 없었다. 1863년 프랑스로부터 3500만 프랑을 빌린 것에서 시작한 연쇄적인 빚은 정부 예산을 전부 투입해도 이자를 겨우 충당할 정도로 불어났다. 1863년 무함마드 3세는 기존 메즈바(인두세)를 2배로 인상하고 투니스 등 5대 도시에 대한 면세 혜택을 철폐하여 재정 적자를 해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는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현지 아랍인들의 분노를 폭발시켰고, 1864년 봄 각지의 총독들이 축출되거나 살해되는 것으로 메즈바 반란이 시작되었다.

거센 봉기에 직면한 총독들은 투니스로 도피하였고,[36] 각지에는 지방 정부가 세워졌으며 내륙의 교통로는 부족들의 수중에 놓였다. 반란군은 관료 출신 알리 벤 게다헴을 베이 알 움마(민중의 베이)로 추대하며 결집하였다. 무함마드 3세는 헌법 및 증세 철회 등 반군의 요구 사항을 수용하는 척하며 협상을 진행함과 동시에 반격을 준비하였다. 한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자국민 보호를 명분 삼아 함대를 파견하였고, 오스만 조정 역시 투니스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할 기회라 여겨 하이다르 에펜디 휘하의 함대를 파견하였다. 1864년 5월 11일, 오스만 함대는 라 굴레타에 상륙하였고 유럽 열강의 침공을 두려워하던 시민들의 환영과 함께 투니스에 입성하였다. 하이다르 에펜디는 무함마드 3세에게 외교권 이양. 3백만 피아스터의 연공 납부 및 책봉 위한 베이의 이스탄불 방문 등이 담긴 협정을 제안했으나 오스만의 동맹 영국마저 지나치다고 여긴 결과 거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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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튀니스 앞바다에 정박한 프랑스-이탈리아 함대

그러나 오스만 함대의 무력 시위와 50만 프랑 금화의 제공은 무함마드 3세로 하여금 외세의 견제 및 반란 진압의 자금 마련 등 호재로 작용하였다. 그동안 투니스로 진군한 알리는 도시에서 서남쪽으로 40km 떨어진 엘 파흐스에서 정부군과 대치하였다. 6월 29일 투니스에서 출정한 장군 이스마일 엣 순니 사헤브 앗 타바는 알리와 협상하며 더욱 시간을 끌었다. 프랑스와 영국 모두 알리에게 접근하였고, 전자는 베이 교체까지 염두에 두었다. 한편 이탈리아 역시 제노바에서 1만 원정군을 보내 투니스 등 해안을 장악하려 하였으나, 언론의 폭로 후 영국의 항의로 중단하였다. 9월 23일 열강들은 각자의 함대를 철수시키고 베이의 반란 진압에 관여하지 않기로 결의하였고, 같은날 오스만 사절 하이다르 에펜디 역시 떠났다. 이렇듯 열강들의 상호 견제로 인해 튀니지는 반란을 기회로 삼은 유럽의 식민화를 피할 수 있었다. 8월 29일, 추수를 앞두고[37] 아흐마드 자루크 장군의 정부군이 투니스에서 출정, 수스에서 반군을 격파하고 해안 도시들에 가혹한 응징을 가하였다. 프랑스령 알제리로 도주했던 알리는 이듬해 초엽 귀국했다가 사로잡혀 옥사하였다.

반란의 종식 후 바르도 궁전으로 압송된 고위급 포로들은 매질을 당하여 대부분 옥사하였고, 반란 지역들은 철저한 수탈과 폭력에 시달렸다. 1865년 7월 30일 자루크 부대가 투니스로 귀환하였을 당시 튀니지 중부와 남부는 피폐해져 있었다. 수확물을 전부 빼앗긴 민중들은 3년간 기근에 시달리며 가축은 물론 식인까지 행하였고, 1867년에는 콜레라와 티푸스까지 유행하며 참상은 절정에 이르렀다. 인구 감소와 납세 독촉으로 과실수마저 전부 베어 팔아버린 결과 튀니지의 농업 사회는 붕괴하였다. 이로써 정부는 차관에 대한 상환 능력을 상실하였고, 파산을 모면하려 지속적으로 더 빚을 지며 상황을 악화시켰다. 그러한 상화에서 무함마드 3세의 동생 시디 아델이 밤을 틈타 바르도 궁을 탈출해 베이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고, 그후 대숙청이 이어졌다. 정치적 혼란과 함께 1868년 튀니지는 사실상 파산하였고, 이듬해 7월 설립된 국제 차관 위원회는 튀니지의 수조권을 위임받았다. 이로써 튀니지는 경제적으로 외세에 완전히 종속되었고, 이제 남은 단계는 군사적인 점령 뿐이었다.

2.4.2. 프랑스령 튀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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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7년 건립된 생 빈센트 드 폴 대성당 1899년 메디나의 밥 수이카 광장 일대의 사진

1881년 4월, 프랑스령 알제리와 튀니지의 코루마이어 부족 간의 국경 분쟁을 빌미로 프랑스군은 엘 케프, 비제르테(5월 1일)에 이어 5월 11일 투니스를 장악하였다. 다음날 무함마드 3세는 바르도 조약을 체결해야 했고, 그에 따라 프랑스령 위임통치령이 설립되었다. 이듬해 무함마드 3세가 사망하자, 장남 대신 가문의 원로가 계승하도록 규정한 그의 상속법에 따라 동생 알리 3세가 계승하였다. 1883년 6월 3일 그는 라 마르사 협정으로 프랑스에 모든 실권을 양도하였고, 이후 프랑스 군정이 실시되었다. 1885년 4월 5일, 프랑스측 총독이 투니스의 식수 공급권을 한 회사에 넘기려 하자 시의회 전체가 사임하고 시장의 2천여 자산가들을 비롯한 현지인들이 시위에 나섰다. 라 마르사 궁전 앞에 모인 군중은 베이에게 식수 공급권 회복에 나서달라고 청하였으나, 알리는 '눈물의 집에 울려고 왔냐며' 자조적인 답변만을 내었다. 결국 시위는 진압되었고, 주요 인사들은 각지로 유배되었다.

프랑스의 지배 하에 투니스는 빠른 도시화를 이룩하였으나 아랍인들의 옛 메디나는 상대적으로 소외되었고, 많은 유럽인들이 정착하여 20세기 초엽 인구의 절반이 유럽계로 구성될 정도였다. 특히 그중 이탈리아인이 1910년 기준 10만 5천으로 가장 많았으며(프랑스인은 3만 5천), 1911년 11월 젤라즈 묘원의 소유권을 두고 발생한 소요 사태 당시 현지 시위대는 이탈리아 공동체와 충돌하였다. 다수의 현지인과 8명의 유럽인이 사망한 이 사태는 프랑스 군경의 발포로 진압되었다. 이듬해 2월에는 이탈리아인들이 주축이 된 회사 소유의 트램에 대한 불매 운동이 벌어졌다. 비록 이 역시 실패하였지만. 젊은 튀니지인들이 언론을 통해 연대감을 형성하였다. 1911-12년의 일련의 시위들은 향후 튀니지 민족주의의 뿌리가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을 조용히 넘긴 투니스는 구/신도심을 넘어 위성 도시들이 형성되며 더욱 확장되었다. 다만 2차 세계대전에 도시는 1942년 11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나치 독일군의 지배를 겪었다. 1942년 당시 베이이던 알리 3세의 아들 아흐마드 2세는 튀니지의 유대인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다가 퇴위당하였다.

2.5.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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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심과 신도심을 잇는 중심가인 하비브 부르기바대로

나치 독일의 북아프리카 최후의 거점이던 튀니스는 1943년 5월 7일 15시 경 영/미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었고, 20일에는 개선 행진이 있었다. 그후 연합군은 튀니스를 거점 삼아 이탈리아로 진출하였다. 이듬해 샤를 드 골이 튀니스를 방문해 해방 1주년을 기념하였다. 1956년 마침내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후 튀니스는 신생 튀니지 왕국을 거쳐 튀니지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50년대 들어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고국으로 귀환하였고, 현지 인구의 유입과 함께 도시의 재아랍화가 진행되었다.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협정에 대한 공분으로 아랍 연맹의 본부는 카이로에서 튀니스로 옮겨졌고, 1990년까지 유지되었다. 동시에 팔레스타인의 PLO 역시 1982~2003년 간 튀니스에 망명 본부를 세웠으며, 1985년 이스라엘 공군의 폭격으로 60여명의 사상자를 내기도 하였다. 2011년 튀니스에선 하비브 부르기바 대로를 중심으로 아랍의 봄의 시초인 튀니지 혁명이 일어나 민주화의 장이 되었다.

3. 지리

튀니스는 튀니지 북동부의 튀니스 호수로 내려가는 언덕 경사면 사이의 교차로에 위치해있으며 라 굴레트(La Goulette) / 할크 알 와디(Halq al Wadi) 항구에서 끝나는 운하를 통해 지중해의 튀니스 만과 연결되어있다. 또한 유럽의 최남단 지점과 비슷한 위도에 있고 튀니스의 북쪽에는 카르타고가 있다.

튀니스 광역권은 2,668㎢의 면적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 10%만 도시화되어있고 나머지는 농촌이다.

4. 기후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르면 튀니스는 지중해성 기후(Csa)에 속하다보니 고온건조한 여름[38]과 온난습윤한 겨울을 가지고 있다.

겨울은 1년 중 가장 습한 계절로 연간 강수량의 3분의 1 이상이 이 기간에 내리며 평균 2~3일에 한 번씩 비가 내린다. 그러나 1979년 -2.0°C[39]를 기록하기도 했다. 봄에는 강우량이 절반으로 줄어들고 일조시간이 하루 평균 10시간 정도 된다.

5. 경제

튀니스는 튀니지의 산업 및 경제의 중심지이다.[40] 그러나 청년들의 실업률이 증가하고 있으며[41] 노인의 문맹률은 여전히 ​​높다(여성27%, 남성12%).

튀니스의 경제구조는 국가와 마찬가지로 3차산업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42]

그러나 1차 산업도 무시할 수는 없다. 일부 비옥한 토양을 보유하고 있으며 와인 및 올리브 오일 산업이 특화되어 있다.

6.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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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나(구도심) 관광 안내도

시가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튀니스 카르타고 국제공항이 있지만 대중교통이 부실을 넘어 없는 것에 가깝다. 궤도교통은 전무하며2km 정도 걸어가면 전차역이 있긴 하다 출국장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는듯 하긴 하지만 어떤 버스가 언제 오는지는 현지인도 모른다. 시내버스는 노란색 도색이며 굴절버스도 다닌다. 바가지만 쓰지 않는다면 택시요금이 그렇게 비싼 편이 아니므로 그냥 택시를 타자.

튀니스 역과 République를 중심으로 총 6개의 노면전차 노선이 있기는 하지만 열차 도입이 안되는지 열차가 상당히 낡았고[43] 수도 부족한듯 하다. 덕분에 일부 시간대를 제외하면 365일 가축수송중. 열차가 상당히 복잡하고 관리가 되지 않는 대중교통이 다 그렇듯이 치안도 나쁜 편이므로 극한체험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면[44] 그냥 택시를 타자.[45] 기승전 택시 하지만 사람사는 곳이 다 그렇듯이, 일단 노선 정보를 제대로 알고 소지품의 안전에 유의하며 이용하면 별 문제없이, 아주 싼 가격으로 튀니스를 여행할 수 있다. 역마다 있는 매표소에서 직원에게 역 이름을 말하면 빳빳한 종이로 된 표를 준다. 가격은 아무리 멀어도 무조건 1디나르 이하.

Bourguiba 대로 동쪽의 Tunis Marine 역으로 가면 포카리스웨트 광고로 유명한 시디 부 사이드나 카르타고 유적지, 근교 해변으로 갈 수 있는 일종의 광역 전철인 TGM 열차를 탈 수 있다. 입구의 매표소에서 목적지를 말한 후 요금을 내고 표를 받으면 된다. 열차는 엄청나게 낡았으나[46] 관광지를 이어주는 노선이라 그런지 그나마 시내 전차보다 치안이나 혼잡도는 나은 편. 의외로 배차간격도 짧다.

튀니스에는 3개의 루아지 역이 존재한다, Bab Saadoun 역 인근에 있고 비제르트 등 북쪽 방면 루아지들이 이용하는 북 지상 역(Gare routière Nord), Bab Aliwa 역 인근에 있고 함마메트 및 나블 등 서남부 및 튀니스 근교로 향하는 루아지들이 이용하는 밥 알리와 루아지 역(Station Louage Bab Aliwa), 수스 등 남부로 향하는 루아지들이 이용하는 몽세프 베이 루아지 역(Station louage Moncef Bay) 3곳이 그것이다. 자신의 목적지 방향을 잘 확인하여 알맞는 루아지 역으로 향하고, 혹시 애매하다 싶으면 택시 기사나 숙소 직원 등 현지인에게 물어보는 편이 좋다.

7. 자매 결연 도시 및 우호 협력 도시

7.1. 자매 결연 도시

7.2. 우호 협력 도시

8. 여담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는 지중해에서 이슬람권 조합이 있는 도시들 중에 유일하게 변장 안하고 들어갈 수 있는 도시로 나온다. 지중해에 이슬람권 조합은 튀니스말고 알렉산드리아 이스탄불이 있는데 이스탄불은 오스만 제국의 본거지고 알렉산드리아는 영지에 해당하는 반면 튀니스는 거기 속하지 않은 동맹항이기 때문.

1967년 제5회, 2001년 14회 지중해 게임을 연달아 개최하였다. 지중해 게임을 두 번 이상 개최한 유일한 도시이다.


[1] 압바스 왕조의 개국공신 무크타일의 아들이자 칼리파 하룬의 대부였다. [2] 따라서 이브라힘 1세는 카이라완 남쪽에 궁전 도시 알 압바시야를 세워 머물렀고 흑인 노예 군단을 대거 기용하여 준드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자 하였다 [3] 그후 이브라힘은 시칠리아를 거쳐 이탈리아 원정에 나섰다가 코센차에서 병사하였다. [4] 다른 둘은 이스칸다리야, 트리폴리였다. [5] 함마드 왕조는 지리 왕조 2대 에미르 알 만수르 이븐 불루긴이 그의 삼촌인 함마드 이븐 불루긴을 현 알제리 일대의 총독으로 임명한 것에서 시작하므로 어디까지나 지리 왕조의 방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6] 무라비트 조의 아미르 알리 이븐 유수프의 증손이다. [7] 무라비트 왕조와의 차별성을 위해 가문의 시조인 무함마드 이븐 알리의 모친 가니야의 이름을 붙였다. 파티마 왕조와 비슷한 경우이다. [8] 다만 이때는 일시적으로 알 마디야를 치소로 두었다. [9] 정확히는 교주 이븐 투마르트 대신 이사(예수)를 마흐디라 선언, 사원에서 베르베르어 예배를 금하고 이븐 투마르트를 모욕하게 하였다. 그외에 카스티야의 요구대로 1230년 마라케시에 기독교 교회를 설립했다. 다만 이 교회는 1232년 마라케시를 수복한 조카 야흐야에 의해 파괴되었다. [10] 또한 하프스 왕조는 샤를을 정통 군주로 인정하지 않으며 거의 120년간 이어오던 연공 납부를 거부하였다. 그외에 맘루크 왕조와 통상 조약을 체결한 샤를은 이집트와의 호혜적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았다. 결국은 경제적 원인도 작지 않았던 셈. [11] 밥 엘 자지라, 밥 카르타게나, 밥 수이카, 밥 메나라, 밥 엘 바흐르, 마지막이 밥 제디드이다. [12] 다만 그의 유복자인 무함마드는 살아남아 1295년 즉위한다. [13] 정확히는 콩스탕틴 총독 이븐 알 와지르가 페드로와 동맹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아라곤 함대가 당도했을 당시 이미 이브라힘의 아들이자 베자이아 총독인 아부 파리스 압둘 아지즈에게 패하고 살해된 후였기에 사태를 관망하다가 시칠리아 인들의 추대에 응한 것이다. [14] 1307년 라몬 율은 베자이아에도 찾아왔다. 기존의 투니스에서 소극적 선교에 나서던 그는 이번부터 이슬람의 부정함을 증명하려 하였고, 결국 얻어맞은 후 카디에 의해 감금되었다. 6개월의 감금 후 칼리드는 투니스의 예에 따라 그를 석방한 후 추방하였다. [15] 1364년 10월 권신이자 장인 이븐 타프라긴이 사망한 후 친정에 나서나 5년만에 사망했다. [16] 특히 유럽 출신 개종자들을 카디, 총독 등으로 봉하며 우대하였다. [17] 오스만 제국과는 145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 축하 사절을 보내며 관계를 수립했고, 맘루크와 그라나다와는 전통적인 친교를 유지하였다.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문에는 사자를 선물로 보냈으며 그외 피렌체, 제노바, 프랑스, 아라곤, 나폴리 왕국 등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18] 놀랍게도 이는 곤살로 피사로가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를 석방하는 대가로 뜯어낸 2백만 두카트 중 갈레온 선을 통해 스페인에 당도한 120만 두카트로 충당되었다고 한다 [19] 1만 스페인, 8천 독일, 8천 이탈리아, 7백 몰타인, 그외에 포르투갈과 플랑드르 병력. 대부분 보병, 기병은 2천 [20] 4개 보병 부대로 구성 [21] 점령 후 라 굴레트의 지휘관으로 선임된 베르나르디노 데 멘도자는 1538년 스페인 해군 제독으로 선임되어 떠날 시에, 급료 체불로 반란의 기색을 보이던 스페인 수비대가 요새를 오스만 측에 매각할 것을 염려하여 일부와 시칠리아로 향하기도 하였다. [22] 1535년 투니스 원정과 이탈리아 전쟁에서 활약한 노련한 장군이었다. [23] 1565년 5월 29일 부임, 발렌시아 총독 겸임 [24] 공교롭게도 시난 파샤, 울루츠 알리, 가브리엘레 세르벨로니는 모두 이탈리아 출신이었다. [25] 트리폴리 주둔 오스만 군인 무스타파 엘 투르키의 아들이다. [26] 본래 공공 모임 장소로 첨탑이 있었다가 1631년 공식적으로 사원이 되었다. [27] 상징인 팔각형의 고상한 미나렛 아래에는 무라드 가문의 영묘가 자리하였다. [28] 콩스탕틴 진군 도중 와디 자르카에서 함께 행군하던 이브라힘 샤리프는 근거리에서 나팔총(산탄총)을 베이에게 발사하였고, 무라드는 피를 흘리며 도주했지만 곧 튀르크 장교들에게 둘러쌓였다. 누군가 무라드를 붙잡자 다른 이가 월도로 그의 목을 베었다. [29] 한때 그는 무라드 3세의 카즌다르(금고지기 / 회계관)였다. 공교롭게도 그는 크레타 출신의 케프 태수 알리 앗 투르키의 아들이었다. [30] 혹은 8일에 이브라힘이 패하고 10일에 후사인이 등극하였다고도 한다. [31] 예외적으로 19세기 중반의 재상 무스타파 카즈나다르가 함께 매장되었다. [32] 알제에 당도하고 20일만에 옷이 벗겨진 후 목이 졸려 살해되었다. [33] 몰타의 베네치아인들이 전염병을 이유로 튀니지 상인들의 선박을 압수하고 물품을 불태웠다. [34] 투니스로 잡혀온 기독교도의 아들로, 투니스에서 태어났다.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어 조정에 들어갔고, 누이가 아흐메드의 동생 무스타파와 결혼하며 왕실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35] 오스만 조정은 프랑스가 명목상 자신들의 제후인 투니스 베이를 국왕 대우한 것에 불만을 표했다고 한다. [36] 대표적으로 카이라완 지사 라쉬드 장군 역시 수스로 도주한 후 영국 선박에 올라 투니스로 피신했다. [37] 반군 중 농민들은 추수를 위해 귀향했다. 또한 반란이 장기화됨에 따라 프랑스에게 점령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38] 2021년 튀니스-카르타고 국제공항에서 튀니스의 기상관측이래 최고기온인 48.9°C를 기록했다. [39] 현재까지 튀니스의 기상관측이래 최저기온이다. [40] 튀니지 기업의 3분의 1이 튀니스에 있다. [41] 튀니지 광역권의 청년 실업률은 35%이다. [42] 금융업, 관광 등이 발달됐다. [43] 단, 비교적 나중에 생긴 6호선 한정으로 알스톰제 신조 열차가 운행중이다. 최근에는 1, 4호선 등 다른 노선에서도 신조 열차가 운행중이다. [44] 치안 문제 뿐만 아니라 열차에 냉방장치도 없다. [45] 택시 색상은 노란색이며 폭스바겐이나 푸조의 소형차를 사용한다. 봉고차 형태의 택시도 있는데(현지에서는 '루아지'라고 부른다) 토요타 하이에이스 차량을 주로 사용한다. [46] 가끔 창문에 금이 가거나 문이 닫히지 않는(...) 열차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