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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4:54:40

김성근/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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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꼴찌를 일등으로
2.1. 비판2.2. 반론
3. 선수 육성의 대가 :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3.1. 비판3.2. 반론
4. 데이터 야구의 대가
4.1. 비판4.2. 반론
5. 재일교포 출신의 비주류 야구인6. 바른 말하다 쫓겨나는 외곬수 야구인7. 한국 야구계의 원로이자 공신
7.1. 비판7.2. 반론
7.2.1. 2009 WBC 국가대표 감독 논란7.2.2. 유망주 육성과 기부 활동

1. 개요

파일:김성근감독슈트.png

김성근 김응용에 이어 KBO 감독 누적 승수 2위를 기록할 만큼 충분히 KBO 리그 역사에 기록될 만한 감독이다. 그러나 승리를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스타일, 끊이지 않는 혹사 논란 등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었던 감독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2007 SK 와이번스 시절부터 최근 최강야구 감독에 이르기까지, "야신"이라는 칭호를 필두로 이러한 문제점이 상당히 희석되거나 가려져 있는 인물로, 강성 팬덤과 야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입문층, 그리고 이러한 김성근식 플레이에 치를 떨어왔던 기존 야구 골수 팬덤층[1] 사이에 가장 큰 갈등을 일으키는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김성근은 2005-2006년 NPB 치바 롯데의 코치로 활동하면서, 바비 발렌타인의 영향을 받으며 언론과 팬에 대한 자세가 완전히 달라졌으며, 더 나아가 마치 스승인 바비 발렌타인이 그랬던 것처럼 언론 플레이와 인맥 등을 통해 이미지 관리를 잘하는 감독으로 변모하였다. 동시에 이 과정에서 누가 봐도 실책이었던 삼성, 한화 시절조차도 상당 부분 미화되는 등[2] 이미지의 왜곡이 일어나는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이에 따라 이 문서에서는 김성근 감독의 대표적인 이미지들에 대해 파악하고, 그러한 이미지들이 얼마나 실상에 가까운지, 또 어떤 부분은 허상인지에 대해 분석하여 좀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김성근이란 인물에 대해 조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 꼴찌를 일등으로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김성근/지도자 경력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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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지금까지 나는 거의 성적이 최하위인 팀의 감독으로 들어갔다. 태평양이 그랬고 쌍방울이 그랬다. 지금은 아니지만 내가 부임할 당시의 삼성이나 LG도 마찬가지였다." - 「김성근이다」 p.42
"지금까지 14개팀을 맡으면서 한번도 상위권팀을 맡아본 적이 없다." - 사사구 The Interview 인간 김성근을 만나다

김성근 감독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꼴찌팀, 최하위권팀을 상위권팀, 우승팀으로 만든 감독이라는 이미지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본인 또한 「꼴찌를 일등으로」라는 자서전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김성근 본인 또한 자신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활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3]

실제로 김성근 감독은 상위권 팀을 거의 맡은 적이 없고 하위권, 혹은 최하위권에 가까운 팀을 많이 맡았던 것이 사실이다. 김성근이 감독을 맡기전 팀 순위를 보면 83년 OB는 6팀중 5위, 88년 태평양은 7팀중 7위, 90년 삼성은 7팀중 2위, 95년 쌍방울은 8팀중 8위, 2000년 LG는 8팀중 4위, 감독대행을 중간에 맡은 01년 LG는 감독 대행 취임 당시 8팀중 8위, 06년 SK는 8팀중 6위, 14년 한화는 9팀중 9위로 그나마 반타작 이상이라도 했던건 90년 삼성 라이온즈, 00년 LG 트윈스 밖에 없었으며, LG 트윈스는 01년도 꼴지 상황일 때 감독 대행으로 시작된 만큼 삼성을 제외한 모든 팀이 최하위권 팀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동시에 그 팀들이 김성근 감독 휘하에서 중상위권 이상으로 도약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2.1. 비판

객관적인 사실로 하위권이라는 것이 나와있는 만큼, 이 부분은 사실 여부를 따질 것은 별로 없다. 따라서 해당 부분에 대한 비판은 주로 이러한 도약이 김성근 감독의 공로가 크다, 아니면 김성근은 숟가락만 얹었을 뿐이고 구단의 역할이 오히려 더 중요했다의 문제로 나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페이롤[4]이다.

김성근이 하위권을 상위권으로 끌어올리는 감독이라는 이미지에 대한 비판은 주로 ''적어도 김성근이 지휘봉을 잡고 나서는, 구단의 투자까지 더해져 상위권으로 발돋움을 한 것이다.라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 과정에서 주로 이야기되는 것은 해당 팀들의 페이롤이 굉장히 높았다는 것을 꼽는다. 일반적으로 연봉이 높은 선수라는 것은 수준이 뛰어난 선수라는 것을 말하고, 김성근 감독 부임과 함께 페이롤이 급격하게 높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좋은 선수들을 팀에서 많이 수급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이야기이다. 「관련 기사: 김성근 감독 가는 팀은 페이롤도 1위」

실제로, 1993년 KBO가 공식적으로 선수연봉 집계를 시작한 이후 김성근이 맡았던 팀 중 쌍방울 레이더스(1997), SK 와이번스(2009~2011), 한화 이글스(2016~2017)가 선수연봉총액 1위를 기록했다. 페이롤 공식 집계 전이지만 삼성 라이온즈야 1993년 공식집계 시작 이후에도 2016년 제일기획으로 이관되기 전까지는 페이롤 부분에서 항상 상위권을 차지했던 팀이니 말할 나위가 없다. 심지어 김성근 부임 당시 김성근이 원했던 15명의 선수를 죄다 사면서 삼성의 이런 전례없는 싹쓸이 선수 영입은 다른 구단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1991년 2월 4일 무분별한 선수 확충을 자제하자는 KBO 사장단 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특히 가난한 팀으로 유명했던 태평양, 쌍방울 같은 팀조차도, 김성근 감독 부임과 함께 각각의 팀들 모두 상당한 수준의 지원을 해주었던 것을 볼 수 있다. 1989년 태평양 돌핀스의 신동관 태평양 부회장은 청보 시절에 임명된 팀의 코칭스태프들을 한명 빼고 전원 물갈이 했고, 당시 태평양 전담 스포츠기자 2명 가운데 한명이자 김성근의 지인이었던 김수인 기자의 강력한 추천을 받아 김성근을 감독으로 영입했다. 신동관 부회장은 김성근이 요구한 21개 요구사항을 대부분 들어줬고, 김성근이 원한 코칭스태프를 모두 영입했고 정영기, 천창호, 김한근, 이광길, 이충우 등 김성근이 원한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는 등 파격 지원 행보를 이어갔다.

쌍방울 또한 이는 마찬가지였다. 쌍방울이 95시즌까지는 야구단 투자에 인색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1996년 김성근 영입과 동시에 하위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했었다. 쌍방울은 김성근 감독에게 전년도(1995년)보다 네배나 증가한 15억여원의 스카우트 비용을 지원한 것을 비롯해 김성근 감독이 재임한 3년여 동안 총 26명의 선수를 영입했을 정도로 통큰 지원을 해줬다.

김성근 감독 최악의 실패 사례였던 한화 또한 마찬가지다. 꼴지를 벗어나기 위해 김성근 감독 취임 전에도 정근우, 이용규 같은 거물급 선수들을 영입하였고, 김성근 감독 취임 이후에는 배영수, 송은범, 권혁, 심수창 등 FA 선수들을 싹쓸이하고 그 외에도 김성근 감독이 원하는 선수들을 모조리 픽업해오면서 페이롤 1위를 찍었다.

즉 꼴지, 혹은 꼴지에 가까운 최하위권 팀들을 맡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김성근 영입과 함께 팀에서는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으며, 김성근 감독 시기 해당 팀들은 그 전 해의 꼴지 팀이던 시절과는 아예 다른 팀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애초에 선수 구성이 어예 달라졌기 때문. 이것은 김성근 감독이 잘해서라기보다는 구단의 전폭적인 투자가 성과를 이룬 것으로 보는 편이 맞다.

2.2. 반론

페이롤이 높다고 야구를 잘하는 것이라면, 한화는 한국시리즈를 5번은 더 우승했어야 정상이다(...) 농담 같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한국에서의 페이롤은 생각보다 팀 전력과의 상관 관계가 높지 않다. 대표적으로 김성근 감독이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던 2007년, 국내 선수들의 페이롤 순위는 다음과 같다. 관련 기사

딱 봐도 페이롤과 순위의 상관 관계를 논하기가 어렵다. 이것은 한국 프로야구의 특성 때문인데, 2010년 LG가 신연봉제를 도입하기 이전까지 한국 프로야구는 연공 서열이 상당히 크게 영향을 주는 연봉 제도를 고집하고 있었고, 심지어 이는 지금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태이다. 즉 잘하는 선수가 많이 받는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고참일수록 연봉이 높고 신참일수록 연봉이 적다.

삼성, 현대 같은 전통적으로 페이롤이 높은 팀들 외에 2007년 한화가 유독 연봉이 높은 것도 같은 원리다. 당시 한화는 송진우-정민철-구대성으로 대표되는 원로 라인이 주축 선수였던 일명 노인정 구단이었고, 당연히 오래된 선수들이 많았던 만큼 페이롤 상위를 차지하였다. 이는 송진우, 정민철이 모두 은퇴한 2010년 한화가 갑자기 페이롤 최하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면 여실히 드러난다(2008년 3위 2009년 4위, 2010년 8위).
"노장이라는 것은 1년 토탈 쓸 생각은 안 한다고. 예를 들어 작년에 안치용이라든지 그 최동수 같이 SK에서, 버리기 일보 직전 아이들이 일하는 거에요. 노장이라는 것은 1년 토탈 쓰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필요한 거에요. 위기 때, 어려울 때 걔네들이 한다니까. 경험 갖고."
- KBO 특별기획 야구를 말하다 - 김성근

특히 김성근 감독이 운영하는 팀은 페이롤이 높을 수밖에 없는데, 김성근 감독이 새로운 팀을 맡으면서 영입하는 선수 라인업을 보면 이 부분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두산은 원년부터 감독이었으므로 제외)

20대 영입 선수는 거의 전무하며, 거의 대부분 30대 중반에서 후반 선수들이다. 그나마 20대 선수였던 오봉옥은 음주운전 사고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삼성에서 방출당한 선수였다. 80-90년대 선수가 30대 중반이면 사실상 은퇴 수순인 선수들만 사방에서 끌어다쓴 꼴이고, 선수들 면모를 봐도 예전엔 한가닥 했다지만 이 시기에는 거의 퇴물 취급받는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다. 딱히 팀의 빈 자리를 메꾸기 위해서 선수를 데려오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각 구단에서 버리는 방출/은퇴 선수들을 싸그리 긁어모은 것에 가깝다.

더 당혹스러운 것은, 한화 시절 정도를 제외하면 실제 이렇게 영입한 선수들 중 실제로 주전급으로 기용되어 활약을 보인 선수가 거의 전무하다. 심지어 한화에서도 FA로 들어온 권혁, 정우람이 단연 주전이라 할만하고, 다른 선수들은 대부분 땜빵 선수들에 가까웠다. 거의 방출되다시피해서 넘어온 김현욱과 오봉옥 정도가 메인으로 뛰었으며, 그 외에는 노장들의 반짝 활약 이상의 임팩트를 남긴 선수가 없다. 오히려 김성근이 맡았던 모든 팀에서 주축으로 활약했던 선수들은 그 이전에 그 팀에 있었던 선수들, 혹은 태평양 시절 신인 트로이카나 LG 시절의 박용택, SK 시절의 김광현과 같은 신인 선수들이었다.

나쁘게 보면 김성근 감독이 보는 눈이 없어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정작 저 선수들을 주전으로 기용하지 않은 것을 보면 이것은 김성근 감독의 지론과 전술에 관련이 있다. 기본적으로 김성근 감독은 필요할 때 한건 해줄 수 있는 베테랑들로 뎁스를 두텁게 만들면서 필요한 순간 적재적소에 기용하고, 그 과정에서 기존 주축 선수들의 활약과 터져 나오는 신인들의 활약으로 성적을 내는 방식을 선호한다. 실제로 비판 쪽에서 가장 자주 이야기하는 쌍방울 레이더스의 1997년 페이롤 1위조차, 실상을 살펴보면 1997년 쌍방울 선수들의 연봉 순위를 보면 김기태 1억 100만원, 김광림 9천만원, 조규제와 한대화 각 8천만원, 박경완 7700만원, 최태원 7300만원, 성영재 7200만원, 오봉옥, 김성래, 김실 각 6500만원, 이종두 6400만원, 김성현, 박노준 각 6200만원, 김원형, 박성기 각 5800만원, 김호 5600만원, 심성보 5000만원 등으로 1995년 선수단과 그 명단이 크게 다르지 않다.

즉 김성근 감독 시기의 선수 영입은 팀 컬러를 바꿀 정도의 투자라기보다는 단 한번의 기회를 위한 투자에 가깝다. 즉 뎁스를 두텁게 하면서 만약의 상황에 터져줄 로또를 많이 사모은 것에 가까운 만큼, 전력 상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는 것. 여기에 페이롤 상승도 선수단 자체가 커지니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고, 그 선수들이 고참 선수들인 만큼 아무래도 상승폭이 상대적으로 더 커지는 것이다. 심지어 그럼에도 대형 선수들이 아니라 이미 시장에서 가치를 상실한 것으로 취급되는 선수들인 만큼 대부분 고참이면서도 그렇게 고액 연봉자들은 아니었고, 오히려 진짜 연봉 상승은 그를 통해 성적을 거둔 후 기존 선수들의 연봉이 오르면서 전반적인 페이롤이 커지는 현상에 가까웠다.[5]

따라서 김성근 감독의 꼴지팀을 일등으로 만드는 능력이 선수빨이었다고 비판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주전 선수들이 바뀐 것이 아니고, 김성근 감독의 커리어 중 상당수는 그 선수들을 경쟁 관계로 몰아넣기도 하고 단합시키기도 하면서 그 주전 선수 그대로 팀을 상위권으로 올려왔기 때문이다.[6] 오히려 이에 대한 비판은 베테랑에 대한 지론이 다른 경우 돈을 허투루 쓰는 경향이 있다는 쪽[7]에 오히려 더 초점을 맞추는 것이 맞을 것이다. 실제로 김성근 감독이 프런트와 자주 충돌했던 부분도 이러한 부분이었고.

각 팀의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김성근/지도자 경력 문서를 참고하면 좋다.

3. 선수 육성의 대가 :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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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감독으로서 시합에 이기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목표는 선수 육성이다. 리더는 한 선수가 가지고 있는 잠재능력을 개발시켜줘야 하는 것이다." - 김성근 감독, "좋은 선수 없으면 좋은 팀 만들라" (2013.11.13)
김 감독은 '선수가 없다'는 말을 싫어한다. "선수가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없으면 만들어야 한다. 승부의 세계에서 선수가 없다는 말은 곧 지는 것이다"는 것이 김 감독의 말이다. 설령 선수가 부족하더라도 하소연해서 면죄부를 만드는 것보다 어떻게든 만들고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 김성근 감독, "선수가 없다? 프로에선 말이 안 돼" (2014.11.03)
“선수들의 미래가 나에게 걸려 있거든. 이건 내 삶의 큰 테마입니다. 선수는 만지기에 따라서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합니다. '나는 얼마나 철두철미 해야 하나'를 생각해요. 만들긴 쉬워도 가꾸기는 어렵죠.” 새해 기획 대담 고수vs고수 (2012.01.02)
기자 : 감독님 리더십을 얘기할 때, 가장 많이 나오는 얘기가 선수 육성입니다. 김성근이라는 리더를 만난 이후 기량이 늘었다거나, 한물갔다고 생각됐던 선수들이 부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김성근 : 사람은 누구나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못하는 선수도 하나의 장점은 있기 마련이죠. 그렇지만 인간은 대부분 자신의 능력을 모르고 살아요. 잠재능력을 3분의 1도 발휘하지 못하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람이란 본능적으로 편한 것을 추구하기 마련이에요. 자신과 싸우고 벼랑 끝에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하지만 매일 벼랑 끝으로 자신을 내몰 때 비로소 인생이 절실해집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을 수도 있고 자기 개발을 할 수도 있어요. 새로운 것에 도전하지 않을 수 없도록 환경을 조성해 사람들의 숨겨진 장점을 개발하고 키우는 것이 리더의 역할입니다.
기자 : 장점을 키워야 한다는 점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장점을 어떻게 이끌어내느냐인데요, 감독님만의 비결은 무엇인지요.
김성근 : 리더십의 비결은 ‘애정’입니다. 애정이 있는 아버지는 자식의 단점을 개선하고 장점을 키우려고 하겠죠. 감독도 마찬가지예요. 매일 승부를 강요받는 냉혹한 야구의 세계에서 선수가 조금만 부진하면 그 선수를 버릴 것을 강요받습니다. 하지만 애정이 있다면 선수를 방출하기보다는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키워주겠죠. – 매경 김병수, 문희철 기자 인터뷰 (2012.01.18)

김성근은 선수 육성과 조련에 있어 국내 최고의 대가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런 이미지는 김성근 팬들에 의해 확대 및 재생산되면서 김성근이 한번 만져만 줘도 유망주가 터진다 뭐 다른 의미로 터지긴 한다, 망가진 선수가 부활한다는 식의 종교적인 수준의 믿음으로까지 확대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동시에 최강야구가 야구 예능으로 큰 인기를 끌면서 이러한 믿음은 일반 대중에 이르기까지 넓게 퍼지고 있는 상황이다. 동시에 김성근 감독의 지론 중 하나는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이다. 심지어 이는 자서전 제목으로도 사용된 바 있다.

3.1. 비판

김성근 감독은 기본적으로 검증된 선수들을 위주로 기용하며, 신인급 기용 및 새로운 자원 발굴에 인색한 감독이다. 동시에 선수들의 군 입대 억제, 유망주를 내주고 베테랑을 데려오는 트레이드 등 김성근 감독 체제에서의 힘은 최대로 끌어올리지만, 반대로 팀의 미래에는 악영향을 주는 행위도 매우 다반사로 발생하였다. 애초에 김성근 감독은 전형적인 윈나우형 감독이다. 아예 팀 자체가 망가져서 시즌 성적 포기하고 신인을 발굴하는 리빌딩팀이라면 신인을 적극적으로 기용하는 것이 맞지만, 성적이 우선시되는 윈나우팀은 성적이 우선이다.

기본적으로 신인은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다. 유망주라는 것이 게임처럼 딱딱 경험치만 먹인다고 잠재력이 터지지 않는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수라 하더라도 루키 시즌부터 포텐이 터지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1군에 적응하는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 한 해에 신고선수까지 10명이 훌쩍 넘는 선수를 뽑지만, 개중 2~3명 이상만 1군급 자원으로 성장시킬 수 있어도 성공한 드래프트로 평가받는 것이 KBO의 육성으로 기본적으로 유망주란 성공확률이 20~30%도 안 되는 복권인 것이고 미국에서도 확실한 선수를 내주고 대신 가능성 있는 유망주를 받는 시스템이다. 게다가 그 중 이정후나 원태인, 구자욱처럼 거의 확실히 성공할 것 같은 자원은 KBO에서는 절대 시장에 내놓지 않는다. 반면 베테랑은 이미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둔 선수인 만큼 계산이 서는 편이고, 운동하는 법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재활에 성공할 가능성도 상대적으로 높다. 그렇기에 윈나우형 감독은 유망주보다는 베테랑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다만 김성근 감독은 특히 이미 쓸모를 다한 것이 분명해보임에도 자신이 선호하는 선수들을 데려오는 데 집중하는 일을 자주 일으켰다. 삼성 때의 윤석환과 조범현, LG 때의 심성보, 한화 때의 송은범 영입 등은 순전히 자기 제자들 데려오는 것 이상으로 봐주기 어려울 정도의 일들. 정말 좋게 보더라도 이건 사적인 감정으로 공적인 일을 망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심지어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는데, 정작 김성근은 선수들을 소모품으로 여겨 쓸모가 없어질 때까지 마구 쓰고 버리는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특히, 야수보다도 투수에 대해 이러한 행태가 집중된다. 선수를 소모품으로 여기는 김성근의 선수 혹사 문제는 김성근/구설/선수 기용 관련 논란 문서에서 혹사 관련 내용만 한가득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혹사에 가려 비교적 덜 알려진 것이 김성근의 신인투수 기용 행태다. 김성근이 투수 육성의 대가로 잘못 알려지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그의 팀에 의외의 신인들이 등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김성근의 실제 투수 운용을 보면 신인투수들에게 제대로 된 기회를 거의 주지 않고 노장 선수들만 신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성근의 팀에 신인투수들이 비교적 많이 등판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김성근의 혹사 때문에 시즌 중후반에 주전 선수들이 줄부상을 당하게 되고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많은 신인들이 1군에 올라와 임시로 기용되기 때문이다.

김성근의 팀은 혹사로 인해 주축 투수진들이 만성적인 부상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주축 선수들의 부상 공백을 메우기 위해 신인선수들이 등판하는 경우도 타팀에 비해 많은 편이다. 이것이 일부 야구팬들에게 김성근이 신인선수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는 것으로 착시효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 신인투수들의 용도는 말그대로 땜빵용일뿐 결코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박빙이나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신인투수가 기용되는 일은 거의 없다. 심지어 팀이 크게 이기고 있는 경우에도 신인들을 등판시키지 않는다. 신인이 등판하는 경우는 크게 지고 있는 상황 등에서 주전 투수들의 소모를 줄이기 위해 버려진 카드로 투입되는 땜빵용 기용인 경우가 많다. 선수를 키우기 위해서는 일정한 보직을 정해 주고 꾸준히 등판 간격을 유지해 주면서 다소 기복이 있더라도 믿음을 갖고 등판시켜야 한다. 그러나 김성근의 신인투수 기용은 팀의 상황에 따라 마구잡이로 갖다 쓴 후 주전선수가 부상에서 복귀하는 등으로 해서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지면 다시 2군에 내려보내는 패턴이 반복된다.

조영민 사건에서처럼 큰 점수차로 지고 있는 경기에 신인선수를 내보내 경기가 끝날 때까지 굴려 혹사, 소모시킨 후 2군에 보내는 사례는 그나마 양반이다. 더욱 최악인 것은 빈볼을 던져야 할 때 엔트리에 (땜방용) 신인투수가 있는 경우 그들을 등판시켜 빈볼을 던지게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물론 주전 투수들에게도 빈볼을 많이 지시하지만, 이미 한차례 빈볼이나 항의 소동, 벤치클리어링이 일어난 상황에서 다시 한번 빈볼을 던져 퇴장 및 출장정지 등의 징계가 확실시되는 상황에서는 신인들을 올려 빈볼을 던지게 하는 경우가 많다.

김준, 이동걸[8] 등 잘 알려진 사례 뿐만 아니라 신인시절 박현준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사례도 많다. 이렇게 고의 빈볼을 던진 투수는 대개 퇴장, 출장정지 등의 징계를 받게 된다. 그러면 김성근은 이들 투수를 2군으로 보낸 후 본인은 빈볼을 지시하지 않았고, 빈볼의 책임을 물어 선수를 2군으로 내려보냈다라고 해명하곤 했다(…)

3.2. 반론

논지 자체가 좀 혼란스러운데, 우선 신인 선수를 잘 기용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애초에 윈나우를 노리는 팀에서 신인 선수를 고정적으로 기용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애초에 오승환, 류현진 같은 괴물이 아닌 한, 신인을 박빙이나 이기고 있는 상황에 기용하는 경우가 대체 어디 있는가. 일단 신인은 대타, 대수비, 패전처리로 1군에 올리고 거기서 잘 하면 스타팅으로 내보내보고, 거기서 또 잘 하면 주전이 되는 것이 당연한 순번이다. 실제로 알버트 푸홀스도 이런 식으로 기회를 받아서 데뷔 첫 해는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등록되어 있다. 신인 키우겠다고 그냥 고정 기용 박아놓고 돌리는 건 그 MLB에서조차 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실제 야구는 야구 게임이랑은 다르다.

오히려 그런 것 치고는 김성근 감독은 윈나우형 감독답지 않게 신인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는 편이다. 특히 그런 모습이 가장 크게 드러났던 것은 SK 왕조 시절. 당시 주전 박재홍을 두고 자꾸 신인을 주전 중견수로 쓴다며 세자저하라는 비꼼 섞인 별명까지 있었던 신인 시절의 김강민이 대표적이다. 또 아무리 상무에서 기량을 쌓아 왔더라도, 이제 한 시즌 제대로 보내고 제대한 3년차 새파란 박정권에게 기회를 주면서 2009년 1루수로 정착하게 만들었던 것은 분명 김성근의 공이다. SK 왕조를 이끈 선수의 주축 중 정근우, 최정 정도를 제외하면 외야 라인 등은 대부분 김성근 감독이 발굴한 선수들이고, 심지어 그 정근우와 최정조차도 김성근 감독 시기 전까지는 수비가 최대 약점으로 지적받던 선수들이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LG의 최동수, 거기서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쌍방울의 마지막 톱타자 윤재국이나 이연수, 심성보, 최태원 등 돌격대 선수들, 거기서 더 거슬러 올라가면 김성근의 애제자 1순위로 꼽히는 조범현이나 기업은행 시절 발굴한 윤동균까지. 선수 잘 키워내기로 유명한 감독에 비할 바는 아니라도, 비난받는 것에 비하면 좋은 선수를 많이 키워낸 육성 실적이 제법 있는 감독이다. 즉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 같이 하위권 팀의 전력을 가다듬어 상위권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는 리빌딩 전문가는 분명 아니지만, 팀의 전력을 쥐어짜서 하위권 팀에도 성적을 거두면서 그 과정에서 좋은 선수들을 육성하여 그 팀의 전력을 계속 유지하게 하는 정도의 능력은 계속해서 보여준 바 있다.

김성근 감독의 육성 능력이 빛을 발한 것은 사실 타자보다는 투수 쪽인데, 세간에도 김성근이 투수 조련과 운영의 대가라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김성근 감독은 투수를 아주 잘 키워냈으며, 태평양 돌핀스의 짠물 트리오라 불린 신인 3인방, 양상문, 김현욱, 이동현, 전병두, 고효준, 송은범, 김광현 등등 수많은 투수들을 키워냈고 특히 불펜 파이어볼러들을 잘 키워냈다. 대표적으로는 SK 시절의 전병두, 고효준, 엄정욱 같이 구위만 좋고 제구가 아예 안 되는 선수들을 육성하여 좋은 스윙맨으로 만들어냈다. 삼성 2군 감독 시절 키워낸 배영수 또한 좋은 사례로, 배영수 본인이 당시 그 훈련을 통해 하체를 가장 잘 사용하는 투수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인터뷰한 바 있다.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도 버린다는 개념에 대한 내용이 잘못 전달되는 느낌이 있다. 김성근 감독이 선수를 소모품 쓰듯이 혹사시키는 것을 부정할 순 없지만, 그것을 버린다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애초에 오류다. 정작 김성근 감독은 혹사는 혹사대로 시키지만, 선수는 선수대로 계속 끌고간다. 심지어 다른 팀 감독임에도 선수가 기존 팀에서 방출, 은퇴 위기 상황에 전화하면 그 선수를 어떻게든 또 데리고 간다(...). 이걸 좋다고 볼 것이냐는 문제는 좀 다른 문제지만, 버린다고 볼 수는 없는 것. 2군으로 보내는 것도 버리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애초에 야근을 죽어라 시키는 것과 해고하는 것은 아예 다른 이야기이고, (그 처벌이 합당한지는 차치하고) 감봉이나 인사 발령 등 징계를 주는 것과 해고하는 것 또한 다른 문제다. 그리고 김성근 감독의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는 지론은 후자에 가깝다.

4. 데이터 야구의 대가

"대한민국에서 데이타 제일 먼저 시작한 건 납니다." - 한국 현대사 증언 TV자서전 - 야구의 신 김성근 2부
기자 : 감독님은 한국 프로야구계에 데이터를 정착시킨 주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른 모든 감독들이 갖고 있는 똑같은 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하기에 다른 구단보다 성적이 좋았는지, 탁월한 데이터 마이닝[9] 비결이 궁금합니다.
김성근 : 야구라는 스포츠는 확률 게임입니다. 확률이 높은 쪽으로 선택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그렇지만 데이터 마이닝을 하기 위해서는 기존 데이터를 버려야 합니다. 데이터를 그대로 믿으면 망합니다. 순간순간의 직감에 따라 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물론 전제는 모든 데이터가 완벽하게 머릿속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숫자 암기는 기본이고, 여기에 그날 투수의 심리나 상대방 타자의 심리, 컨디션 등을 고려해 직감적으로 어떻게 데이터를 활용할지 결정하죠. 비수치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데이터는 단순한 숫자에 불과합니다. – 매경 김병수, 문희철 기자 인터뷰

김성근은 1990년대 데이터 야구라는 용어가 생소하던 시절부터 자신이 한국 데이터 야구의 시초라고 자처해 왔다. 구체적으로 쌍방울 감독으로 있을 때 부터 본격적으로 자신이 데이터 야구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매일 경기가 끝나면 집에 가서 데이터를 분석하느라 거의 밤을 새고 다음날 바로 경기장에 나온다는 것. 일단 데이터를 모으는데만 해도 새벽 3시까지 걸린다고 한다.

일부 언론 기자들은 김성근이 철저한 데이터에 따라 팀을 운용하는 것처럼 묘사했다.
중요한 사실은 김성근 감독이 이러한 벌떼야구를 함에 있어 결코 감(感)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기반에는 철저한 사전 데이터 분석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선수기용이 있었다. 김성근 감독의 야구를 ‘데이터 야구’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주전과 비주전, 노장과 신인의 차별을 없애고 최근 성적, 훈련 성적만으로 선수를 기용했다. 고액 연봉의 선수들도 매 경기 교체아웃 당하기 일쑤였고, 무명에 가까웠던 신인 선수들은 자신의 잠재능력을 십분 발휘하며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 데이터야구 파헤치기! ①알고보면 더 재밌는 기록의 스포츠

그의 강연에서 데이터 야구는 반드시 나오는 단골 소재로 쓰였으며, 이처럼 언론과 인터뷰할 때 마다 자신의 야구는 데이터 야구라고 스스로 강조한 덕분에 김성근은 한국에서 데이터 야구의 선구자로 자리 매김했다. 나아가 데이터마이닝(data mining)의 대가라 불리며 통계학과 수학 전문가로까지 묘사되기까지 했다. 심지어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에서 주최한 "DB잡(JOB)콘서트"에서 강연하기도 했다.

이처럼 김성근 감독은 한국 데이터 야구의 선구자로 잘 알려져 있으며, 2010년 초까지만 해도 이 부분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한화 시절부터 이에 대한 논란이 가중되고 세이버매트릭스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들어오면서, 정말 김성근 감독이 데이터 야구를 하고 있는 것이 맞느냐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4.1. 비판

실제 김성근 감독의 경기 운용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위 기사가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나아가 "데이터를 버려야 한다",“오늘은 데이터를 버렸다”, "데이터를 그대로 믿으면 망한다."라는 식의 선문답적인 발언을 강조하면서 이미 자신은 데이터 야구를 초월한 경지에 오른 존재인 것처럼 언플해왔다. 사실 이 발언들을 뜯어보면 결국 직감에 의한 야구가 정답이라는 결론으로 귀결되는데, 물론 스포츠, 더 나아가서는 정-재계의 최종결정권자들에게는 분명히 본인의 직감 으로 의사결정을 해야되는 상황이 있다. 하지만, 그 직감적 판단 아래에는 그간의 경험이나, 정량적 데이터라는 기초자료가 바탕이 된 상태여야 하는 건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김성근은 그 실제로 한화 이글스 감독에 부임한 이후 김 감독이 자신의 발언대로 데이터를 완전히 버리고(데이터를 전혀 보지 않고), 직감에만 의존하는 야구를 하는 것이 확인되면서 위의 발언들이 틀린 말은 아닌게 되었다. 결국 직감에만 의존할 뿐, 데이터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자신의 스타일을 그럴듯하게 거짓으로 꾸미고 포장한 것에 불과한 것.

사실 김성근은 인터뷰에서 데이터 야구가 구체적으로 뭐냐, 데이터 야구의 비결이 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데이터를 버릴 줄 알아야 한다, 데이터만 믿으면 망한다, 직감이 중요하다라는 식의 뜬구름 잡는 식으로 두리뭉실하게 말의 방향을 돌리면서 질문을 피해갔다. 그나마 김성근이 직접 데이터 야구의 구체적인 사례로 든 것은 충암고 시절 6~7명을 상대팀에 몰래 보내서 정보를 빼온 것, OB 코치 시절 삼성 포수 이만수의 팔근육을 읽고 사인을 훔친 것 두 가지이다. 이게 왜 데이터 야구지? 김성근은 이런 데이터 야구(?) 덕분에 전력이 약했던 충암고와 OB가 우승할 수 있었다고 자기 스스로를 미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10]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실제로는 데이터에 의존하지 않고 감에만 의존하는 운용을 해왔다.
느낌이, 감성이 예민하지 않으면 안 돼. 특히, 프로야구 이 승부세계는 느낌이 강해야 되는 거야.
- 김성근 "SK 이미지를 망친 건 내가 아니었다"

한화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마구잡이식 투수 기용과, 리그 최하위권의 번트 후 득점 성공률(8위), 대타성공률(7위) 등 총체적인 난맥상을 보이면서 김성근의 데이터 야구는 실체가 없는 허구였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심지어 투수의 기본적인 구질 조차 제대로 파악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나면서 데이터 야구는커녕 감독으로서의 자질에 의심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구질 파악은 고사하고 2016시즌 리그 신인왕 신재영이 어떤 구종의 공을 던지는지도 모른다는 점이 더 큰 문제[11]로 지적되고 있다.

과거 SBS에서 방영한 야구 프로그램인 야구본색에서 그의 스몰볼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구질이 유리하고 어떤 투수가 그 구질을 잘 구사하는가를 철저하게 계산한 결과물이라고 했는데, 실상은 그런 계산은커녕 자기팀 투수가 어떤 구질을 던지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

과거 김성근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주위가 흔들려도 나는 내 올바른 진심 하나면 된다고 봤다. 오로지 선수만 생각했고 팀만 생각했다. 야구만 생각했고 승리만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다."
-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中 -
팀과 선수 생각에 모든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고 말해왔지만, 실상은 어떤 선수가 어떤 구종의 공을 던지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떤 이는 김성근은 과거 데이터야구를 한 감독이라고 추켜세워주며 다만 시대에 맞추지 못한 거라고 실드를 치는 데 그야말로 노리타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일단 과거 방식이건 뭐건 데이터 야구라면 최소한 주먹구구식 데이터라도 수집하고 적용해야 하지만 그랬다는 예가 있긴 한가? 나름 예라고 든 첩자를 보내서 상대방 훈련을 염탐하는 건 데이터 야구가 아니라 비매너이다. 또, 당연하지만 야구 데이터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점점 다양하고 방대해지는데 데이터 야구 한다는 양반이 거기에 따라오지 못하는 건 분명 문제이다. 그리고 데이터 야구를 한다고 했으면 당연히 오늘 상대팀 투수의 구질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처음 붙는 상대라 구종도 모른다는 말은 그냥 아예 데이터 안 본다는 소리.

4.2. 반론

애초에 데이터 야구에 대한 개념에서의 차이가 문제이다. 김성근 감독의 데이터 야구는 야구에서 일반적으로 데이터 야구라고 할 때 떠올리는 세이버매트릭스의 개념과는 아예 다르다. 애초에 김성근 감독이 세이버매트릭스 야구를 하고 있다면 일본 야구라는 또다른 별칭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김성근 감독의 데이터 야구는 통계적으로 파고드는 야구라기보다는 일명 쿠세 야구에 더 가깝다. 상대의 습관 등을 현미경처럼 파악해서 그 약점을 파고들고, 스윙 궤적이나 팔로 스루 등을 좀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 등을 찾는 것이다. 김성근 감독이 데이터 야구를 한다면서 정작 숫자를 등한시하는 듯한 발언들이 많은 것도 이쪽에 가깝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일반적인 야구팬들이 받아들이는 의미의 데이터 야구라면, 김성근 감독의 야구는 데이터 야구와는 거리가 먼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김성근 야구가 또 데이터 야구가 아니냐고 하면 그 또한 애매해지는 것도 사실.

다만 위의 사례에서 신재영 투구를 커브로 불렀다는 것 가지고 물고 뜯는 것은 너무한 해석이다. 인터뷰 시점 팔순을 바라보는 노장이 헷갈릴 수 있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신재영의 슬라이더는 실제로 슬라이더라기보단 커브의 성질을 띠고 있다. 해당 글에서는 버티컬 슬라이더라면 커브와 헷갈릴 수 있지만 신재영의 슬라이더는 횡무브먼트가 강하기 때문에 헷갈릴 수가 없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건 신재영이 우완 사이드암 투수라는 것을 잊고 서술한 내용이다.

사이드암 투수의 커브각은 일반적인 오버핸드나 쓰리쿼터의 커브보다 횡무브먼트가 강하다. 커브의 특성은 종적 변화가 큰 것, 그리고 탑스핀이 걸리는 특성상 브레이킹이 특정 시점부터 급격히 나타나는 것인데, 사이드암은 그 특성상 종적 변화보다는 브레이킹에서 커브의 특성이 나타난다. 사이드암이나 언더스로 중 커브의 일종인 업슛을 주무기로 썼던 김병현의 커브를 보면 이 차이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12] 즉 슬라이더의 경우에는 공이 그리는 궤적이 특별히 끊어지는 지점 없이 횡적 무브먼트로 나타나지만, 커브의 경우 브레이킹이 크게 걸리면서 퉁 하는 느낌으로 갑자기 꺾이는 느낌이 나오게 된다. 단순히 횡적 무브먼트가 크다고 해서 슬라이더와 커브를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파일:랜디슬라이더.gif

파일:파일160622.gif

이러한 이유로 신재영 본인조차도 투심형 슬라이더를 장착하면서 신인왕까지 올라가기 전까지는 슬라이더와 커브를 구분하지 못했으며, 관련 기사 실제로 당시 넥센 감독이었던 염경엽 또한 신재영의 슬라이더는 꺾이는 양상이 다른 슬라이더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관련 기사 실제 투구 모습을 보면 신재영의 슬라이더는 초반 움직임이 약하다가 후반부에 급격하게 틀어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비록 좌완이긴 하지만 같은 사이드암 계통인 랜디 존슨의 슬라이더와 비교해 보면 그 양상이 매우 다르다. 특히 신재영의 슬라이더는 투심 실밥을 잡고 던지기 때문에, 슬라이더가 기본적으로 던지는 방향으로 휘어들어가는 것과 달리 약간의 역회전도 걸려 있다. 오히려 이러한 구종 성향은 슬라이더보단 커브에 가깝다. 심지어 해당 비판 글과는 달리 신재영의 슬라이더는 횡적 무브먼트와 종적 무브먼트가 같이 나타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파일:신재영 슬라이더.jpg

여기에 그립을 이야기할 때 손날이 타자 쪽으로 향하면 커브, 직구와 커브의 중간이면 슬라이더라고 하는데, 사진을 보면 사이드암이라는 특성 때문인지 신재영의 슬라이더는 손날이 정확히 타자 방향을 향한다. 즉 김병현이 슬라이더 그립으로 커브를 던지는 것과 반대로 신재영은 커브 그립으로 슬라이더를 던지는 것에 가깝고, 이러한 부분들을 총체적으로 고려했을 때 신재영의 슬라이더는 최근 유행하는 슬러브에 가까운 구종이다. 슬러브의 대표 주자인 코리 클루버의 공 같은 경우 횡무브먼트가 크기 때문에 투구 분석 업체마다 슬라이더로 부르기도, 커브로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과 비슷한 양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슬라이더 형태는 우규민, 임창용 등 사이드암 계통 투수들에서 자주 나타나는 양상이며, 사실 야구의 구종이란 것이 선수마다 같은 구종이라도 그 무브먼트 양상이 다르고 그립이 다른 만큼, 일반 야구팬들이 인식하는 것처럼 여기까지는 커브, 여기까지는 슬라이더 같은 식으로 칼같이 나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뭐라고 부르냐에 따라 커브일 수도, 슬라이더일 수도 있는 것.[13] 즉 신재영이 커브와 슬라이더를 분리해서 자주 던지는 것도 아닌 상황인 이상, 둘을 착각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즉 데이터 야구의 선도자로 알려져 있는 부분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오히려 LG 시절 김성근 경질의 사유로 데이터 야구는 재미없다는 논의가 있었을 정도로 김성근의 데이터 야구는 야구계에서는 옹호자이든 반대자이든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는 사항이다. 다만 그와는 어울리지 않게 미신과 징크스에도 굉장히 민감한 이중성을 지니고 있고, 그 데이터 야구의 특성 자체가 우리가 현 시점에서 주로 떠올리게 되는 세이버매트릭스가 아니라 쿠세 야구인데다 본인도 징크스 등을 엄청나게 따지는 스타일이다 보니 저게 데이터 야구가 맞나 하는 혼란이 오게 되는 것.

5. 재일교포 출신의 비주류 야구인

김성근은 항상 자신이 재일교포 출신이기 때문에 차별받아온 완벽한 아웃사이더였다고 회상한다. 이러한 이유로 고양 원더스 감독시절까지도 김성근은 야구계 주류와 거리가 있다는 인식이 강했다. [재일교포 2세로 별다른 연줄 없이 실력 하나로 팀을 올려놓으면 토사구팽 당하고,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른 팀에서 또다시 재기하는 승부사. 이게 고양 원더스 시절까지 따라다녔던 이미지였다.

다만 재일교포에 대한 박해는 애매한 부분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김성근 감독 또한 재일교포라서 야구계에서 차별받았다고 증언한 내용은 없다. 실제로 야구계에서 초창기 재일교포는 차별의 대상이라기 보다 우대의 대상에 가까웠다. 애초에 한국에서 프로야구가 출범할 때부터 장훈 등 재일교포 야구인들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이루어 졌다. 프로야구 초창기 시절에는 일본에서 기회를 받지 못하던 재일동포 선수들이 한국 프로야구에 진출해 활약했으며, 야구단 창단 당시 프런트에는 일본통이 많았다. 삼성 라이온즈의 경우 이건희 회장이 일본통이었으며 일본 유학 시절 카네다 마사이치 등 재일교포 야구인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을 정도로 열렬한 야구팬이기도 했다. OB 베어스 구단주인 박용곤 회장도 일본통으로 일본 출신인 김성근을 매우 아낀 것으로 유명하다. 롯데 자이언츠 구단주 신격호 회장도 재일교포 야구선수 카네다 마사이치 등과 개인적인 친분을 가질 정도로 야구팬이며[14], 일본에서 사업을 하면서 프로야구단 롯데 오리온즈[15] 운영하고 있었고, 한국에서도 프로야구가 생기기 오래 전부터 실업야구 롯데 자이언트을 운영하고 있었다. 또한 기업인이자 한국야구계 행정에 있어서 큰 족적을 남긴 최인철은 일본에서 태어나서 코시엔을 밟아본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1956년부터 있었던 재일교포 야구단들과의 친선경기에선 재일교포 야구인들이 자신들의 장비를 낙후된 장비를 쓰던 한국선수들에게 주고 오던 실정이었다. 현장이나 윗선이나 다 이러니 야구계는 전반적으로 재일동포에 대해 우호적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코치, 프런트 경험만 가졌던 사람 수도권 구단 감독자리까지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은 야구계가 아니라 외부,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고 보는 편이 더 맞다.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 이후 그를 끝없이 따라다니던 단어는 쪽바리로, 한국말이 어눌하다는 이유와 이런저런 차별로 인해 한국 체육계에서 배척받아 왔다는 것. 일제강점기 시절을 통한 반일감정과 군사정권 때 냉전이란 극한 대립속에 재일교포가 반쪽바리, ( 조총련을 통한) 간첩질이나 하는 국가반역자라는 인식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다큐영화 그라운드의 이방인에서는 한일간의 야구격차가 크던 1960년대 후반까지는 재일교포 야구인들의 한국 야구 발전 기여에 대해 국가적인 환대를 받았던 것이 사실이나, 문세광 사건 등으로 재일교포에 대한 이미지 자체가 나빠지면서 차별이 심해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장효조의 증언 등에서 짐작해 볼 때, 고교야구에서 재일교포 야구단에 대한 편파 판정도 어느 정도 있었다는 점도 분명 볼 수 있다. 관련기사. 일본야구 출신에 대한 팬들의 여론이 마냥 좋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롯데에서 감독대행으로 있었던 도이 쇼스케(등록명 도위창)은 코칭스탭으로 재직 중 시즌 중에 감독이 경질당하자 감독대행으로 감독직을 수행해 호성적을 거두었지만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팬들의 비난을 받아 정식 감독 계약에는 실패했다.

실제 대중들의 반응 또한 마찬가지였다. 재일교포 선수나 감독들은 실제 팀에서는 거의 차별이 없었고 선진 야구를 배웠다는 의미에서 오히려 우대를 받았던 측면까지 있었으나, 당시 대중들 또한 우리편으로 잘할 때는 한국인, 못할 때나 적일 때는 일본인 취급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오히려 이런 설움에 대한 내용은 김성근이 아니라 다른 재일교포 출신 야구인들이 자주 토로한 바 있다. 프로야구를 통틀어 30승 427 1/3이닝이라는 가장 극적인 기록을 세웠던 장명부가 대표적인데, 장명부는 재일교포로서의 괴로움을 '내 조국은 대한민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니다. 내 조국은 현해탄[16]이다.'라는 말로 토로하기도 했다. 또 " 아버지의 나라에 진출해서 한국프로야구 발전에 기여해 보라"는 나가시마의 말에 설득되어 한국으로 넘어왔던 김일융도 결국 3년만에 못 버티고 귀국하였으며, 김성근보다 훨씬 잘 적응한 케이스였던 김영덕조차 이구동성으로 '과거에는 반쪽바리 취급받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 즉 당시 재일교포들에 대한 설움은 단순히 야구에서 차별받지 않았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수준이었던 것은 사실이며, 이러한 분위기는 현재까지도 여전히 어느 정도 남아 있다. 당장 김성근 감독의 야구를 비판할 때 바로 나온 게 세이콘 드립이다.

다만 좀 묘한 것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야구인 상당수가 비주류 출신이었다는 점. 당장 초창기 프로야구를 대표혔던 감독들 중 상술한 김영덕 또한 재일교포 출신이다. 거기다 주류 중의 주류로 취급받았던 김응용이나 삼미 슈퍼스타즈의 초대 감독이었던 박현식, 해태 타이거즈 초대 감독이자 MBC 청룡의 감독을 오랜 기간 맡았던 빨간장갑의 마술사 김동엽 등 실향민 출신 감독들도 많다. 즉 김성근이 재일교포로서 차별받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한 비주류들이 모여서 만들어간 것이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였던 만큼, 김성근이 특별히 한국의 비주류라서 야구계에서 배척받았거나 한 것도 없고 특별히 취급받을 만한 것도 없다. 재일교포라 차별받았다, 감독 재직하다 수차례 잘렸다의 두 명제는 모두 사실이지만, 이는 후술할 프런트와의 갈등 문제가 더 컸으며 별개의 사건인데, 정작 그것이 언론과 대중의 인식에서 혼합되어 재일교포라 잘렸다는 식으로 왜곡된 것이 크다. 상술한 것처럼 정작 본인도 야구계에서 그 때문에 차별받았다고 증언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현실.

즉 해당 부분은 비판도 반론도 할 것이 없다. 재일교포로 차별받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야구계에서가 아니라 외적인 부분에서의 차별이었고. 김성근 스스로도 야구계에서 차별받았다고 주장한 바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은 비단 김성근뿐 아니라 당시 수많은 재일교포 출신 야구인들이 겪었던 고통이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 그 비주류 출신 대부분이 은퇴한 시기까지 김성근만이 계속 그 자리를 유지하면서 성과를 거두었고, 그 과정에서 김성근이 유독 주목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김성근은 이제 야구계의 원로로 자리잡았으며, 지금은 비주류가 아니라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야구계에 파란을 일으킬 정도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6. 바른 말하다 쫓겨나는 외곬수 야구인

"구단하고 트러블 많이 있었고... 내가 구단에 갈 때는 야구하러 왔지 상사한테 아부하러 간건 아니라는 이런 확고한 그걸 가지고 있어가지고 잘 위에 사람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습니다. 감독 자리라는 건 어떤 자린지 내가 알고 있으니까 일부러 트러블을 만드는 경우도 있어요. 태평양에 갔을 때는 저보다 한참 위에 아버지 같은 분( 신동관 태평양그룹 부회장 겸 야구단 사장)[17]이었는데 (중략) 이건 사장하고 싸워가지고 내 자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결례라는 걸 알고서도 제가 덤볐어요." - 2012년 4월 2일 '프로정신과 리더십' 특강, 한국경제연구원 KERI Forum
"나는 고개를 안숙이니까. 위에 사람들은 고분고분한 사람들을 좋아하겠죠. 나는 뭐가 있더라도 느끼고 보면 말을 해야 되겠고 그러니까 위에 사람들이 볼 때는 제가 아주 안좋은 인간이었겠죠. 사장 입장에서는 내가 사장님 감사합니다 이런 존재가 아니니까 껄끄러웠겠죠. 그니까 자르는 사람은 위에 사람이에요. 이건 단호하게 말할 수 있어요. 선수들은 나 안짤랐어요. 이건 단호하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선수가 나 배반한 건 없어요. 이게 제일 중요하다고 봐요. 위에 사람 한 사람 두 사람이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에요. .. 나는 선수들에게 욕을 먹는 지도자는 아니었지 않나 싶어요. 그게 제일 중요하지 않나 싶어요." - 한국 현대사 증언 TV자서전 야구의 신 김성근 2부
김성근 : 나는 최태원 회장이라든지 SK그룹에는 유감이 없어. 오히려 나를 키워준 거 고맙게 생각해. SK가 나를 다시 불러줬다는 자체가 그래. (…) 나는 어느 구단 가서도 오너는 참 좋은 분들 만났다고.
김은식 : 최태원 회장이랑 LG 계실 때 구본무 회장 말씀하시는 건가요? 또 지금 허민 대표랑…
김성근 : 음. 그렇지. 두산 박용곤 회장님도 그랬고. 참 좋은 분들이었다고. 소탈하고. 야구 좋아하시고. SK도 마찬가지였어. 하지만 사장들이 문제다. 사장, 단장. 그들이 중간에서 장난한다고. 이거 문제야.
김은식과의 인터뷰

김성근 감독의 비주류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은 재일교포보다 사실 잦은 경질이 원인이었는데, 가장 큰 원인은 지도자 경력 내내 겪은 프런트와의 다양한 불화이다. 신임 감독 시절인 OB 베어스 감독 시절부터 김성근은 프런트와 엄청나게 충돌하였으며, LG 트윈스 시절 "이것은 LG 야구가 아니다"라며 프런트가 김성근 경질에 앞장섰던 것은 유명하다. 여기에 소요 사태까지 일어났던 SK 와이번스 시절과 한화 이글스 시절까지, 김성근의 행보에서 프런트와의 충돌은 거의 당연시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김성근은 평생 구단주인 대기업 총수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공개적으로 여러차례 구단주들을 존경하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김성근이 불화를 일으키며 권력 투쟁을 했던 대상은, 어디까지나 중간관리자 프런트, 구체적으로 프런트 사장 또는 단장이었다. 김성근이 프런트와 극한의 대립을 일으켰을 때도 최고위층인 구단주를 언제나 두둔했다.

흔히 사람들은 김성근이 외곬이라서 11회나 감독 자리를 잃은 것은 알지만, 반대로 11회나 재취업한 까닭은 잘 모르는 경향이 있다. 김성근은 과거나 지금이나 프런트가 꺼리는 감독이지만, 그룹 최고위층에 대해서는 항상 존경과 감사를 표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니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그들과 친분을 쌓고 직접 대면하려 애썼다. OB·삼성·한화 등에서 감독이 될 때 프런트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룹 총수의 지시로 그의 영입이 이루어진 바 있다. 김성근은 누구보다 구단 총수의 힘을 잘 이해하고 직접 그들을 통해서 일을 처리하려고 시도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중요한 사안, 특히 자신의 거취와 관계된 일에 대해서는 늘 그룹 총수와의 직거래를 원했다. 구단 내에서 뜻이 관철되지 않았을 때, 또는 갈등이 생겼을 때 그런 성향이 더욱 뚜렷해졌다. 프런트에서는 '김성근이 자신들을 무시하고 구단주와 직접 독대를 해서 일을 해결하려 한다'고 불만이 많았다. 김성근은 구단 총수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 항상 노력했고 경질된 후에도 항상 자신이 몸담았던 팀의 프런트를 맹렬하게 비난했지만 구단주들에 대해서는 깍듯하게 감사의 말을 전하곤 했다.

이처럼 김성근이 구단주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프런트와는 꾸준히 충돌했던 것은, 김성근이 감독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사장-단장과의 하위 관계로 보질 않고 구단주라는 리더 아래 프런트 vs 선수단이라는 동등한 관계로 보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사실상의 구단주 역할이었던 OB의 박용민 사장 겸 단장[18], 과는 대립하지 않았으며, 가장 대립이 극렬했던 LG 어윤태 사장조차 김성근 본인이 인터뷰 등에서 대놓고 비판한 적은 없었다.[19] 퇴진 이전 단장-사장급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보여줬던 것은 SK 민경삼 단장과 한화 박종훈 단장에 한정되었으며, 이 둘은 같은 야구인 출신이자 본인의 제자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김성근 감독 본인도 강연에서 구단 사장보다 현장 감독인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보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장을 무시하고 인사도 하지 않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7. 한국 야구계의 원로이자 공신

김성근은 재일동포 야구단부터 시작하여 80이 넘는 지금까지 한국 야구계에 있으면서, 한국 야구계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원로 야구인이자 사회 지도급 인사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과연 어떤 기여를 했느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갈리고 있다.

7.1. 비판

막상 김성근이 한국 야구의 발전에 구체적으로 무슨 기여를 했는지 살펴보면, 자신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야구계나 구단에게 쓴소리한 것을 제외하면 김성근이 야구계에 기여한 점은 그 실체가 없다. 물론 김성근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가 한국 야구 발전에 기여한 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닌데, 위장 오더 사건, 승률왕 밀어주기 논란, 마운드 높이 논란 등의 사건에서 김성근이 야구 규정의 헛점을 악용하자, 이러한 악용 사례를 막기 위해 야구 규정이 보완된 것이 여러차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부정적인 측면에서의 기여, 그리고 그의 적폐 야구가 현재 한국 야구계에 반면교사가 되고 있다는 점으로써의 기여를 제외한다면, 김성근이 한국 야구계에 저지른 폐단들은 무수히 많을지언정, 그가 야구계에 순수하게 공헌한 바는 거의 없다.

무엇보다 김성근은 지금까지 국가대표 감독을 한번도 맡은 적이 없다. 심지어 김성근이 국가대표팀에 미친 더 큰 해악은 본인과 본인의 팀(당시는 SK)을 이익을 위해 대표팀 코칭 스태프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면서 대표팀을 흔들어 놓았다는 점이다. 이런 사람에게 동업자 정신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상식 있는 인간이라면 자기 대신 대표팀을 맡아준 김경문 감독에게 고마워하고 국가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거두라고 응원해 줘야 정상인데, 김성근은 김경문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겨울 비시즌 기간동안 쉬지도 못하고 힘들게 올림픽 예선을 치르고 돌아온 대표팀을 향해서 코칭스태프들이 선수 관리를 엉망으로 해서 김광현, 정대현의 몸상태가 나뼈졌다면서 김경문과 대표팀 코칭스태프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결국 보다 못한 김응용 삼성 라이온즈 사장이 나서서 " 김성근이의 수법이 또 나왔다. 김성근이 저런 소리를 하는 건 라이벌인 김경문을 흔들기 위한 위한 것"라고 말하며 김성근을 강하게 비난했다. 심지어 김성근은 막상 올림픽 시즌이 되자 아들 김정준과 함께 SBS에서 올림픽 중계를 맡아 단기 알바로는 상당한 거액의 출연료를 챙기기도 했다. 당시 SBS에서도 대놓고 야구의 신을 불렀다고 대대적으로 광고까지 때렸을 정도.

2009년 WBC 대표팀 감독 역시 리그 우승팀 감독인 김성근이 맡을 차례였으나, 역시 KBO가 자신에게 예의를 갖추어 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냥 하기 싫었던 걸 KBO가 태도가 어쨌네 저쨌네 하니까 욕을 먹는 것뿐인데, 김성근 본인은 그걸 모른다. 아마 계속 모를 거 같지만 KBO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은 감독은 김성근 하나뿐이다. 그러나 이미 사전에 우승팀 감독이 맡기로 합의되어 언론에도 진작부터 크게 보도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요청이고 나발이고 할 것 없이 그냥 김성근이 아무 말 없이 맡았어야만 했던 상황을 그저 회피하기 위해 KBO에게 예의 드립을 치는 것. 김성근 광팬들은 "KBO에서 정중하게 요청하지 않았다"면서 예의 드립을 치며, 오히려 김성근이 야구계로부터 왕따 당하고 있다는 식으로 여론을 조성해 나갔다.

또한 당장의 성적을 내는데 급급할 뿐, 젊은 선수의 재능을 알아보는 눈이 없어 유망주를 발굴한 적이 별로 없다. 유망주 발굴은 팀의 미래뿐만 아니라 야구계 전체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김응용, 강병철 등 원로 감독들이 말년에 성적이 안 나오면서도 유망주들을 키워내려 한 이유는 팀의 미래, 나아가 한국 야구의 발전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항상 유망주보단 즉전감을 선호했으며 그나마 괜찮은 유망주들은 혹사하여 채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성근과 노리타들이 주장하는 '실패한 선수들을 위한 다시 한 번의 기회'였다는 고양 원더스 데럴 마데이 등 퓨처스에 걸맞지 않은 외국인 선수를 비롯한 투수들의 혹사 위에서 이뤄진 업적이었으며, 그나마도 구단주의 예상을 뛰어넘는 재정 운영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본인은 SK-고양 원더스 시절을 거치며 사회적 리더의 명성을 쌓고 강의를 다니며 야구계를 뛰어넘는 위상을 얻었지만, 감독과 구단들을 향한 몇 번의 쓴소리[20], 또한, KT가 수원을 연고지로 하는 게 확실시되자 성균관대학교에서 인스트럭터를 한 것[21]을 제외하면 물적, 심적 모두 감독으로서 한국 야구계에 기여한 정도는 원로 감독치고는 너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김성근은 감독으로서 고액 연봉을 받았고, 수많은 강연과 여러 자서전을 저술하면서 역대 그 어느 감독과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부를 쌓았고 부동산도 적극적으로 활용해 수백억원대의 자산가가 되었다. 그러나 김성근은 현재까지 어떠한 기부활동을 한 적이 없는 것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소에 사회의 리더 행세를 했지만 정작 자기 스스로는 알려진 기부 실적은 없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다.

김응용 감독은 자신의 이름으로 된 야구장을 지었고, 유망주들과 함께 숙식하거나 자비로 갈비같은 좋은 거 먹이고 훈련시켰으며, 원로 야구인들의 말년이 힘들 때 도움을 주고 있으며, 노년이 되어서도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회장 물론, 협회장으로서의 김응룡은 명보다 암이 월등히 많긴 했다(...) 등 직책을 맡으며 야구계의 발전을 위해 발로 뛰고 있다. 이만수 전 감독도 활발히 물적 기부 및 재능기부를 펼치며 국내 외 야구계에 공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22], 노리타에겐 기독교인으로서 패드립이나 다름없는 유다라는 모욕을 당했다. 류중일, 한용덕 감독 등도 취임 중 1억원이라는 거액을 기부한 것이 알려져 있다. 또한, 강민호, 양현종, 차우찬, 장원삼, 박석민, 박용택, 정우람, 오재원, 신본기 등 여러 현역 선수들도 야구계 안팎에 기부를 하는 등 기부 문화가 야구계에 자리잡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김성근은 자신을 추켜세우기 위해 쓴소리만 내뱉을뿐, 야구계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지갑을 여는 일이 없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고 야구발전을 위해 앵간히 노력하시는분 아닌가요?
돈으로 어쩌고 하실 급은 아닌거 같은데..?
야구 인프라나 후배 양성이나 어쨋든 꽤나 이런쪽으로 재능이든 능력이든 기부하신거 같은데 느낌인가요..?
강연회나 다른 것들은 돈 받고 하셔서 기부라고 하기 좀 그런건가 싶기도 한데 야구판 내에서는 충분히 재능기부 하시는 거 같은데.."
- 출처 : 엠팍

물론 그 말대로 물질적 기부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꼭 금전적인 기부를 하지 않더라도 재능기부 형식으로 야구계를 위해 기여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김성근은 재능기부 활동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2011년 SK 감독에서 경질된 후 단발성으로 용마고를 지도한 적이 있으며, 2017년 한화 감독에서 경질된 이후에는 울산공고와 성균관대에서 잠깐 학생들을 지도한 것이 전부다. 그러나 김성근의 이러한 짧은 재능기부 활동들도 결국은 당시 새로 감독을 구하고 있거나 기존 감독들의 경질설이 나돌고 있던 NC 다이노스(용마고), 롯데 자이언츠(울산공고), kt wiz(성균관대)의 차기 감독을 노리는 행보가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기 때문에 야구팬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7.2. 반론

7.2.1. 2009 WBC 국가대표 감독 논란

김성근 감독이 국가대표 감독을 맡은 적은 없지만, 국가대표 코칭 스태프로 활약한 이력은 이미 있었다. 제11회 아시아선수권대회 당시 코치 겸 선수로 활동한 이력이 있으며, 당시 우승으로 체육훈장 기린장을 수상한 바 있다. 그리고 2009년 WBC 당시 감독 선임 과정에서는 분명할 정도의 문제가 있었다. 애초에 비판 쪽 서술이 잘못되어 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우승 감독이 대표팀 감독을 맡는다는 규정이 없었다. 오히려 이 당시의 내홍 때문에 그 규정이 생긴 케이스이다.

2009년 당시 김성근 감독이 2007년, 2008년 연속 우승을 이룩했지만, 오히려 당시 KBO 측은 2위였던 김경문 감독을 제1순위에 두고 삼고초려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바로 전해였던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당시 김경문 감독이 우승을 이룩한 만큼, KBO는 사실상 당시 감독은 김경문으로 확정하고 있었다.[23] 그러나 WBC 감독 참가에 부정적인 두산 베어스 구단이 김경문 감독과의 재계약 조건으로 WBC 대표팀 불참을 포함시키면서 김경문 감독 선임이 어그러졌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하는데, 다음 순위로 지목된 김성근 감독에 대한 설득이 전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김경문 감독이 이유로 꼽은 구단과의 계약은 11월 4일 체결되었으며, 김성근 감독과의 만남은 같은 날인 11월 4일 이뤄졌다. # 당장 11월 2일까지 김경문 감독으로 확정짓고 대화하고 있었던 상황인 만큼 #, 실제 김성근 감독 선임을 염두에 둔 것은 정말 빨라도 4일보다 하루 전인 11월 3일, 늦으면 4일 계약 후 몇시간 이내인 상황이었다. 근데 정말 문제는, 정작 이 접촉에서 거절당하자마자 바로 다음 날짜인 11월 5일, 김인식 감독과 협의가 끝났다는 것이다. # 심지어 당일 김성근 감독은 아시아시리즈 때문에 윤동균 당시 기술위원장과 저녁에 30분 정도 잠시 만났을 뿐 #이고, 방식조차 “기술위원회에서 결정해 발표할테니 그리 알아달라”는 협박조였다. 그리고 거기에서 거절당하자마자 하일성 당시 총장은 더는 사정하지 않겠다며 바로 김인식 감독에게로 넘어갔고, 정작 김인식 감독에게는 하일성 사무총장, 한국리틀야구연맹 회장인 한영관 씨, 윤동균 KBO (한국야구위원회) 기술위원장이 모조리 몰려가서 4일 밤부터 5일 새벽까지 몇 시간에 걸쳐 무릎 꿇고 큰절까지 해가며 사정하여 승낙을 받아내었다. #

즉 여론은 김성근 감독을 선임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한 상태에서, 당시 KBO는 김성근 감독보다 후배인 수준을 넘어 제자격인 김경문 감독에게는 몇달간 매달리며 사정하였다. 하지만 김경문 감독이 계약 요건 때문에 불가함을 밝히자, 급해진 KBO는 김성근 감독을 만나 잠시 의견을 타진해본 후, 안 되겠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어차피 할 사람 많다며 다시 만나는 것도 거부하고 부리나케 얼마전 뇌경색을 앓다가 퇴원한 김인식 감독에게 달려가 바짓가랑이 잡고 매달린 것. 안 그래도 2연속 우승 감독에 여론조차 지지하는 판국에서 본인한테는 얘기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한테 매달리다가, 그쪽이 안 되니 30분 협박하고 바로 다른 사람한테 넘어가서는 새벽까지 몇 시간에 걸쳐 간청하며 사정한 것이다. 이는 김성근 감독에 대한 호오를 떠나 야구계 원로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조차 차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는 것이 맞는 상황이었다. 즉 당시 김성근 감독이 자존심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맞으나, 충분히 그럴 만한 상황이었다는 것.

7.2.2. 유망주 육성과 기부 활동

김성근 감독이 유망주를 육성하지 않았다는 말 자체부터가 오류이다. 베테랑을 선호하는 경향이야 김인식, 김응용 등 다른 감독들도 다 마찬가지이며, 당장 김성근 감독 덕에 성장했다고 말하는 선수만 해도 SK 시절 선수로는 정근우, 최정, 김강민, 박정권, 김광현 등이 있으며 배영수, 임창용, 정명원, 김현욱 등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수많은 선수들이 그 밑에서 성장했다. 관련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아마추어 야구에 대해서도 각지를 다니며 인스트럭터 활동으로 자신의 야구 경험을 전수한 바 있다.

비판 글에서는 인스트럭터 활동들을 구직 활동이었을 거라고 폄하하지만, 행동이 있음에도 그 의도일 리가 없다는 식으로 폄하하면 그 누가 뭘 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대표적으로 KT 위즈 창단과 성균관대 인스트럭터 활동을 이야기하는데, 수원이 유력하게 떠오른 건 10월 2일 기사부터였고 김성근 감독의 인스트럭터 활동은 9월 5일부터였다. NC 감독 선임과 마산용마고 방문을 연관짓는 내용도 정작 용마고 방문은 용마고후원회에서의 특강 요청에 따른 것이라는 내용은 쏙 빼놓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 외에도 2003년 동천초와 경주고 야구부 방문, 2017년 울산공고 야구부 방문 등 다양한 방문들이 기록에 남아 있다. 심지어 이러한 활동은 최근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며, # 1965년생인 고정식 중앙대 감독이 초등학교 시절 인스트럭터로 방문한 김성근 감독을 만났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1990년대부터 이미 이뤄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애초에 김응용, 이만수 등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잠시 한화에 복귀한 적이 있다고는 하나, 김응용은 2004년 이미 감독직에서 은퇴하고 프런트 겸 고문으로 전환한 사람이다. 이만수 또한 2014년 SK 감독 재계약을 실패한 후 사실상 지도자직은 은퇴한 상황이다. 용인에 있는 김응용 야구장 건설, 이만수의 라오스 야구 전파 등은 모두 이 은퇴 이후의 활동이며, 김성근 감독은 구단이 계속 바뀌었을 뿐 그들과는 달리 계속 현직을 유지했던 인물이다. 즉 은퇴 자체를 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런 활동을 하는 것 자체가 말이 맞지 않는 상황. 그렇다고 물리적 기부를 안한 것도 아닌 것이, 2014년 아이스버킷 챌린지 참여, 2015년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 프로그램에서의 릴레이 기부 활동 등 물리적 기부 활동도 찾을 수 있다.

주변 야구인들에 대해서도 젊은 시절부터 많은 신경을 써왔는데, 80년대 당시 선수 겸 코치였던 박철순이 한참 부상에 시달리고 설상가상으로 이혼할 때 전 부인의 빚까지 떠안았고 이걸로 빚쟁이들한테 시달리자 그를 데려가 2000만원의 보증을 서주고 자비로도 2000만원을 개인적으로 빌려준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대졸 초임자 월급 20만원 시대에 4천만원이면 현재 기준으로는 4억에 가까운 수준. 그외에도 고교 감독 시절 집이랑 땅까지 팔아 선수들 밥을 먹였다는 일화, 1999년 쌍방울이 어려웠던 시절, 김성근 감독 등이 돈을 각출하여 1억을 모아 이진영의 계약금을 내줬다는 일화 등 다양한 일화가 있다.

그리고 부인 덕에 인생 마지막 무렵 부동산에서 큰 이익을 봐서 그렇지, 김성근 감독은 돈이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 당장 SK 2-3년차 돼서야 부인이 이제야 드디어 빚이 없다고 했을 정도. # 실제로 이 부동산의 큰 이익으로 돌아온 성수동 자택도 1999년 10월 한차례 압류된 바 있었다. # 야구 감독으로 오랜 기간 있었던 만큼 연봉이 적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상술한 것처럼 사방팔방 새는 돈이 굉장히 많았던 케이스. 이러한 이유로 빚이 없어진 시점인 SK 시절 이후부터 기부 사례가 조금씩 나타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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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특히나 여러 비매너 플레이는 혹사와 더불어 그가 현재까지도 비판받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2] 대표적으로 유퀴즈 출연 당시 감독 재임기간 중 가장 성적이 좋던 2015년 한화 6위 성적 하나만 가지고 꼴찌팀을 중위권으로 만들었다는 등 한화의 부흥기를 끌었다는 등 자극적인 제목을 유퀴즈측에서 달았고 영상도 마치 김성근이 부임하고 나서 날아올랐다는 등 유리한 장면만 틀었다. # [3] 자서전 「김성근이다」(p.42)에서는 "지금까지 나는 거의 성적이 최하위인 팀의 감독으로 들어갔다."고 말했다. 자신이 맡았던 시절에는 태평양, 쌍방울, 삼성, LG도 최하위권 팀이었다고 말했다. 또 「사사구 The Interview 인간 김성근을 만나다」에서도 자신은 "지금까지 14개팀을 맡으면서 한번도 상위권팀을 맡아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4] 스포츠 팀에서 한 해 선수들이 받는 총 연봉을 합한 것을 말한다. [5] 여기서 한화의 실패 원인이 여실히 드러난다. 한화는 그 이전까지 주축이었던 선수가 김태균을 제외하면 정근우, 이용규 등 다 외부인 출신이었고, 그들마저 이미 보여줄 건 다 보여준 베테랑 선수들이었다. 후루꾸 시즌으로 유명한 2018년조차 타자에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 적이 없고, 현재 한화 선수진을 보면 2017년까지 신인급이든 주전급이든 활동했던 선수들이 하주석 빼고는 전무하며 그 하주석도 욕이란 욕은 다 처먹고 있다. 즉 김성근 감독은 기존 주전들과 새롭게 성장하는 신인들을 주축으로 하고 그들이 부족한 부분의 공백을 베테랑을 끌어와 메꾸는 방식을 선호했는데, 주전과 신인 성장이 전무하고 그나마 있는 선수들도 한물 간 베테랑들의 수준조차 넘어서는 선수가 없다 보니 그 끌어다놓은 베테랑들로만 야구를 하는 이상한 형태가 되었던 것. [6] 대표적으로 SK 시절에는 경쟁 관계를 통한 상승을 도모하여 왕조를 이룩했고, LG 시절에는 선수협 사태와 서용빈 병역비리 사건으로 팀 케미가 붕괴된 팀을 포지션 고정을 통해 단합시켜 준우승까지 이끌어냈다. [7] 심지어 해당 선수들 중에서는 김성근 감독의 제자 출신이 많고, 나아가 선수들조차도 김성근 감독에게 전화하여 선수 연장 기회를 노려봤다는 이야기를 하는 선수들이 많다. 이러한 김성근 감독의 성향을 선수들 또한 잘 알고 있다는 뜻. [8] 이동걸 사례는 2021년 4월 김태균 야구의 참견에서 이 사건의 진상에 대해 직접 말하면서, 실제 빈볼 지시자가 김성근 감독이 아니라 김태균보다 선배인 어떤 고참 선수인 것으로 밝혀졌다. [9] 데이터에서 주요 정보를 추출해 의사결정에 이용하는 첨단 수학 및 컴퓨터과학 기법. 인공지능(AI) 기법과도 상당부분 연계된다. 2010년대 이후 '빅데이터'라는 개념으로 확장.발전되었다. [10] 그러나 충암고는 김성근 부임 이전에도 이미 야구 명문고였을 뿐만 아니라, 김성근은 충암고에 부임한 후 대구의 야구명문고인 대건고가 야구부를 해체하려한다는 소문을 입수하고 발빠르게 대건고 야구부 18명 전원을 충암고로 전학시켜 대건고 전력을 주축으로 하여 우승을 거두었다. [11] 신인왕도 신인왕인데, 신재영은 당시 168이닝 15승 방어율 3.9를 기록하며, 넥센 선발로테이션의 핵심투수로 꼽혔다. 그 핵심투수의 구종조차 모르는데, 다른 투수들의 구종을 제대로 알았겠냐는 것. [12] 실제로 김병현도 업슛을 던질 때 슬라이더 그립을 사용하여 던졌다. [13] 예시로 든 코리 클루버는 아예 자기 공을 브레이킹볼이라고만 부른다. 커브로도 슬라이더로도 구분하지 않는다. [14] 카네다는 치바 롯데 마린즈의 전신인 롯데 오리온즈의 감독을 1973~1978, 1989~1990년 역임하며 팀의 1974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15] 현재 이름인 치바 롯데 마린즈로 바뀌는 건 치바로 연고이전한 1992년부터. [16] 대마도 규슈 사이를 가르는 해협. 현재 한국에서 쓰이는 명칭은 대한해협이나, 현해탄이라는 단어는 일제강점기를 겪은 사람이나 재일교포들에게는 현 세대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17] 1923년생으로 김성근보다 20살이나 연상이었다. 태평양그룹 부회장이었음에도 야구단 사장을 겸했다. 당시 신동관은 칠순을 바라보는 고령이었고, 김성근은 한창 팔팔한 40대 중후반이었다. 2012년 3월 29일에 사망했는데, 이 특강은 신동관 부회장 별세하고 4일이 지나서 한 특강이었다. [18] OB 베어스 구단 창단을 주도했던 인물로 김성근보다 나이가 더 많았다. 단, 이름 때문에 착각할 수 있는데 두산 그룹 일가는 아니었으며, 두산 계열 언론사 합동통신 기자 출신으로 박용곤 회장의 큰 신임을 받던 부하 직원이었다. [19] 실제로 인터뷰 상에서 SK 시절 이전까지 김성근 감독이 직접적으로 전에 몸담았던 팀의 사장을 직접적으로 비판한 케이스는 없으며, 그 시작은 SK 신영철 사장 이후이다. 오히려 LG 시절 감독 vs 프런트 구도에서는 프런트가 감독을 공격하는 언론 기사가 주를 이뤘으며, 그 이후 퇴진으로 이어졌다. 다만 LG 시절까지의 김성근은 그 정도 언론 플레이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대중적 명망이 없었기도 하다. [20] 그나마 9,10구단 창단에 대한 쓴소리를 빼면 선발 야구에 대한 지적 등 현실과 맞지 않는 지적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구단 창단도 본인의 재취업을 위한 것 아니었냐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 실제로 김성근 감독은 NC가 창단할 때 마산까지 내려가 언플을 했었다. [21] 감독 선임을 위해 연고지쪽에서의 활동으로 포석을 깔아놓은 것이라는 평이 많았다. 조범현 감독을 선임하는 것으로 가닥이 나자 바로 인스트럭터를 종료했다. 물론, 인스트럭터라는 직책자체가 애초에 단기 교육이라는 전제하에 계약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계약기간이 끝나서 안하는 것일 가능성도 있다. 진실은 저 멀리에... [22] 대표적으로 베트남, 라오스같은 동남아 국가쪽으로 야구 관련 재능기부를 한 것. 또한, 유소년 야구나, 장년층에 있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야구 관련한 활동을 하고 있다. [23] 심지어 바로 그 전해였던 2008 베이징 올림픽 당시에도 김성근은 배제되었다. 오히려 2005, 2006년에는 1위를 기록하였으나 2007년 4위로 추락한 선동열 감독이 1순위였으며, 김경문이 2순위였다. # 애초에 베이징 올림픽 시점에서 김성근, 김인식을 비롯한 원로들은 더는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하지 않는 분위기로 가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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