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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6 16:44:38

JG 54

제54전투항공단 그륀헤르츠(Jagdgeschwader 54 Grünherz)

1. 창설과 해협 전투2. 발칸 침공3. 바르바로사4. 동장군5. 19426. 도살새7. 제국 본토 방공전8. 노르망디와 보덴플라테9. 국민적 영웅10. 의미 없는 노력11. 쿠를란트 공방전

1. 창설과 해협 전투

JG 54는 독일군 프랑스를 함락시킨 후인 1940년 6월 말에 탄생했다. 마틴 메틱(Martin Mettig) 소령이 지휘를 맡고 후베르투스 폰 보닌 대위의 제1비행단을 중심으로 3개 항공단이 통합됐는데, 프리츠 울츠쉬 대위의 제21전투항공단 제1비행단이 제2비행단이 되고 리하르트 크라우트 중위의 제76전투항공단 제1비행단이 제3비행단이 되었다. 위의 3개 항공단은 폴란드 침공 직전에 급히 편성되어 3~4개 비행대를 보유하게끔 되어 있는 정규 항공단 편성에 이르지 못하고 1개 비행단만 가진 감편 부대들이었다. 제1비행단은 중부 독일, 제2비행단은 오스트리아 공군의 전투비행대를 뿌리로 하고 있었으며 제3비행단은 동프로이센 출신이었다.

이렇게 창설된 JG 54는 100대 이상의 Bf 109E를 보유하고 네덜란드의 6개 비행장에 분산 배치돼 교전에 돌입했다가 8월초에는 영국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위해 영-불 해협의 파 드 칼레로 전진 배치를 명령 받는다. 8월 5일 오후에 제일 먼저 도착한 제1중대가 도버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을 공격하는 Ju 88 호위 임무에 나섰다가 호커 허리케인의 반격을 받아 중대장 라인하르트 자일러 중위가 중상을 입고 낙하산으로 탈출했다. 바다에 떨어진 중위는 해군에 구출되지만 이듬해 봄까지는 병상에 있어야 했다. 8월 10일까지는 부대 대부분이 집결해 영국 남부의 제공권 장악 작전에 돌입하는데 8월 12일 벌어진 캔터베리 비행장에 대한 폭격 호위 임무에서 제3비행단 참모 알브레흐트 드레플 중위가 스핏파이어 1기를 떨군 후 자신도 격추당해 포로가 됐고 스태브너 일병은 이보다 운이 나빠서 해협으로 추락한다. 다른 3명의 대원도 부상당한 채로 그들의 손상된 전투기를 추스려서 귀환했다.

그 다음날에는 루프트바페의 대규모 공격이 실시됐는데 나쁜 날씨와 통신장애로 폭격기 전투기가 협력하지 못하고 제각각 공격이 돼버렸다. 루프트바페의 피해에 비하면 항공단의 손실은 경미했다. 8월 15일에는 4명이 실종, 전사했지만 전과는 스핏파이어 1기뿐 이었다. 그 후 10일간의 격렬한 공중전 결과 영국 공군의 저항이 거세지면서 작전 실패가 명확해지자 8월 25일 괴링은 나이든 전투항공단장들이 감투 정신이 부족하다면서 37세의 메틱 소령을 해임하고 28세의 하네스 트라우트롭트 대위를 그 자리에 임명했다. 트라우트롭트는 1930년대 초부터 비밀리에 비행교육을 받으며 미래의 공군 기간요원으로 훈련받았으며 스페인 내전부터 전투비행사로 무훈을 쌓고 있었다. 그는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해 그 후 몇 년간 부대를 잘 통솔한다. 이때 제정된 부대명인 「그륀헤르츠」는 그가 태어난 바이마르 지방이 독일의 녹색 심장이라고 불리운데서 유래한다. 각 비행대도 출신 지방을 상징하는 독자적 엠블렘을 가지고 있었다.

8월 30일에는 제2비행단의 로트 중위와 치글러 소위가 서베이 상공에서 충돌해 사이좋게 포로가 됐고, 제5중대장 안톤 스탱글 중위는 9월 1일 틸버리 항구 상공에서 우군기와 충돌해서 비상탈출했는데 6,000미터 상공에서 낙하산을 펼쳐서 지상까지 내려오며 해협 부근과 바다 건너 우군 기지까지 경치 감상을 한 후 포로가 된다. 9월 3일에는 상당한 손실이 발생했는데 제2비행단의 엘싱 중위와 프라엔도르프 하사가 임무 후 귀환하다 칼레 상공에서 충돌, 전사했고 제3비행단도 2명을 잃었다. 9월 5일에는 제3비행단장 울츠쉬 대위를 포함한 3명이 전사하고 1명이 실종됐다. 후임에는 귄터 셸(Günther Scheel : 1921~1943 / 71대 격추) 중위가 임명됐다.

이후로는 큰 손실은 줄고 전과가 오르기 시작했는데 9월 9일에는 He 111 엄호를 위해 런던 상공으로 출격한 제2비행단이 손실없이 스핏파이어 3기를 격추했다. 제1중대의 2기는 해협으로 추락해 비버 상사가 행방불명되고 다른 1명은 하인켈 He 49 수상기에 의해 구출됐다. 9월 15일에 있었던 호위 임무에서는 기존에 전투기들이 폭격기 주변을 자유로이 오가던 것을 금지하고 폭격기에 바싹 붙어있으라는 괴링의 잘못된 명령 때문에 전투기의 기동성을 살린 전투를 하지 못하고 영국 전투기들에게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하게 됐다.

한스-에케하르트 봅 중위는 캔터베리 3,600m 상공에서 냉각기에 피탄됐는데 엔진을 끄고 활강하면 해협 중간 정도쯤에서 바다에 빠질 것이고 엔진을 가동시키면 과열돼 완전 손상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영리하게 엔진이 과열되기 직전까지만 가동하다가 끄고 활공을 반복해서 기지로 무사히 귀환했다. 영국 폭격대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고 해안지대와 프랑스의 비행장에 반격을 가해왔으므로 9월 말 제1비행단이 독일 북부로 이동해 덴마크로부터 네덜란드에 이어지는 해안에 산개해 배치된다.

9월 27일에는 남은 비행대들이 런던으로 2회 호위 임무를 포함해 4회 출격할 정도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제8중대의 안톤 손 중위가 불시착을 시도하다 엄체호에 충돌해 사망했다. 10월 한 달간은 9명의 대원을 잃었는데 제2비행단 참모 베른하르트 말리셰프스키 소위는 영국의 에이스 스탠포드 턱 소위에게 격추돼 포로가 됐고 제9중대의 아돌프 일부르크 상사도 톱에이스중 하나인 멕켈라 소위에게 당해 불시착했다.

10월 21일에는 부대의 첫 기사철십자훈장 수상자가 탄생했는데 16기 격추의 제2비행단장인 디트리히 흐라박 대위와, 20기 격추의 제4중대장인 한스 필리프 중위였다. 한편 독일 폭격부대는 주간 작전을 줄이고 야간폭격에 의존하게 됐다. 괴링은 폭격 페이스를 늦추고 싶지 않았으므로 각 전투항공단의 1/3을 폭격 임무(Jabo)에 투입하도록 했다. 영국 폭격기들의 반격이 거세져 제3비행단도 10월 말에 북부 독일로 이동하고 제2비행단만 남아 전투를 계속했다. 영국은 이 시기에 영국 본토 항공전을 승리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데 11월에는 영국 본토에 대한 공격이 크게 줄어 제2비행단의 전사자 5명이 모두 해협 상공에서 발생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 결국 제2비행단도 12월 초 도르트문트로 철수한다.

그해 8월 12일부터 12월 1일까지의 배틀 오브 브리튼 동안 그륀헤르츠는 43명의 조종사가 전사, 포로, 실종돼 전 병력의 40%나 되는 큰 손실을 입었다. 비록 각 비행대가 기록했다는 50~60기 정도의 전과는 신뢰성이 없지만 손실보다 적에게 입힌 손해가 많았던 것은 확실하며 갈란트나 묄더스 같은 천재는 없었더라도 여러 명이 두 자리수의 전과를 기록했다. 또한 1~2기의 적기를 격추하며 실전을 경험한 많은 대원들이 항공단의 뼈대를 이루며 후에 동부전선에서 거둔 성공의 밑거름이 된다.

1940년 겨울 동안 항공단은 시급했던 휴식과 인원, 장비 보충을 했다. 이를 위해 항공단은 자체 훈련비행대를 보유하게 된다. 오스트리아의 휴양지에서 스키를 타며 즐거웠던 시간은 곧 지나가고 제2, 3비행단은 1941년 1월 15일 프랑스로 복귀해 르망을 기지로 노르망디 지역의 방공임무에 투입된다.

2. 발칸 침공

영국에 대한 상륙작전을 포기한 히틀러의 관심은 동쪽으로 향해 그해 5월에 소련을 침공할 예정이었다. 한편 그리스를 침공한 이탈리아가 곤경에 처해있었고 동맹국이 될 예정이었던 유고슬라비아에서는 반독 쿠데타가 일어나고 있었다. 배후에 이런 위협을 남기고 소련과 싸울 수는 없었으므로 발칸 지역에 대한 작전이 불가피하게 됐다. JG 54 지휘부와 제2, 3비행단의 Bf 109E 77대는 유고슬라비아 국경에 집결했다. 제2비행단은 자그레브로 향하는 제2군을 지원하기로 하고 제3비행단은 루마니아로 가서 베오그라드에 대한 협격을 지원하기로 했다. 1941년 4월 6일 새벽에 시작된 침공은 적의 공군을 제거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히틀러는 거기에 더해서 수도 베오그라드를 무차별 폭격하도록 명령하고 있었다. 적의 저항은 미약했다.

첫날 베오그라드 상공에서 Bf 109끼리 공중전이 벌어져 원조가 승리했다. 한스-에케하르트 봅 중위와 막스-헬무트 오스터만 소위, 게르하르트 코알 중위가 각 1기를 격추시킨 것. 같은 날 오스트리아의 제2비행단 기지를 공격해온 유고슬라비아 공군의 브리스톨 브레니엄 폭격기 2대는 모두 격추됐다. 4월 7일 슈투카 호위 임무에 나섰던 제4중대의 한스 필리프 중위가 Bf 109 2기를 격추했고 막스 슈토츠 상사도 1기를 추가했다. 후에 유명해지는 에르빈 라이카우프(Erwin Leykauf : 1918~2007 / 33대 격추) 소위와 한스 바이스벵어 소위도 브레니엄 폭격기와 허리케인 전투기를 격추한다. 사흘 만에 적 공군의 조직적인 저항이 붕괴되자 항공단의 주목표는 철도 등 지상 목표물 공격으로 바뀌었다. 4월 10일 자그레브가 점령되자 크로아티아에는 독립정부가 들어섰고 48시간 후에는 독일군 선봉이 베오그라드에 입성하고 있었다. 전선이 이동함에 따라 항공단도 전방으로 기지를 옮기는데 4월 16일 베오그라드 부근 기지에 융커스 Ju 52로 도착한 지상 근무요원들이 적 보병의 습격을 받아 몇 명이 전사하고 Bf 109의 지원을 받아 물리치는 사건이 있었다.

4월 17일 유고슬라비아가 무조건 항복하자 항공단은 베오그라드에 집결해서 그들의 Bf 109E를 그리스로 진격하는 제77전투항공단에 넘기고 철도를 이용해 포메른으로 간다. 발칸 전역에서 전사한 조종사는 1명 뿐이었다. 신형전투기인 Bf 109F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제1비행단은 제1전투항공단에 배속돼서 1940년 가을부터 북부 독일 해안의 방공 임무를 계속해오고 있었는데 겨울 동안 북해 특유의 안개와 악천후로 10대 이상의 기체와 몇몇 베테랑 대원을 잃었다. 한편 전과는 4월에 아돌프-발데마르 키칭거(Adolf-Waldemar Kitzinger) 중위가 스핏파이어 2기를 격추한 것을 비롯 3기의 브레니엄 폭격기를 격추한 정도였다.

1941년 4월 중순부터 제2, 3비행단을 필두로 최신 Bf 109F형으로 기종 개편이 이뤄졌는데 훈련 중에 몇 명의 대원과 항공기가 손실됐다. 조종 미숙으로 비행기를 파손시킨 사람들 중에는 오토 키텔 하사 같은 베테랑도 포함되어 있었다. 6월 20일에는 그륀헤르츠 전체가 동프로이센의 소련 국경 지역인 굼비넨으로 집결했다. 상상도 하지 못할 전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3. 바르바로사

1941년 6월 22일 새벽 3:00시. 150만 독일군이 일제히 국경을 넘어 소련을 침공했다. 암호명 바르바로사, 사상 최대의 전쟁, 독소전이 발발한 것이다. 그륀헤르츠의 105대의 전투기는 북부 집단군의 유일한 전투항공단으로 제1항공함대에 배속돼 소련이 점령한 발트 3국을 넘어 레닌그라드로 진격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며 첫 임무는 소련 영내를 공격하는 3개 폭격항공단을 엄호하는 일이었다. 별로 준비가 돼있지 않았던 소련 공군의 첫날 전 전선에서 피해는 1,800대에 달했다. 하지만 엄청난 피해에도 불구하고 서툴지만 치열히 반격해와 독일군 교두보에 큰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소련 공군이 독일 제4기갑집단의 진격로인 듀나강 다리를 파괴하기 위해 전투기 엄호도 없이 무모하게 폭격을 시도해온 6월 29일, 항공단의 전과는 65대에 달했다. 7월 첫 째주에 리투아니아 라트비아가 독일군 손에 들어왔고 항공단은 빠르게 움직이는 전선을 따라 전방으로 이동했다. 7월 11일 소련 영내의 페이푸스호 남쪽 비행장에 야전텐트를 펴고 전개한 제1비행단 기지는 한여름의 열기도 막을 수 없었고 전투기가 이륙할 때마다 프로펠러 후류가 일으키는 엄청난 먼지가 그대로 들어왔는데, 2, 3비행단의 사정이라고 별 다를 것이 없었다.

7월 11일 새벽에 비행 폭음에 잠이 깬 제3비행단의 발데마르 뷔브케 소위는 기지를 공격해온 소련 폭격기 2대를 요격해 그들이 안전지대에 도달하기 전에 격추시켰다. 기지에 귀환해보니 잠옷 차림이었다. 7월 14일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마지막 장애물인 루가강이 돌파됐으며 이제 레닌그라드가 불과 100 km 전방에 있었다. 한 달도 채 안가 항공단의 전과는 500대에 달했다. 항공단의 3개 비행대가 플레스카우 호수 남쪽을 돌아 레닌그라드로 북상하는 주공인 제16군을 지원하고 1개 훈련중대는 발틱 해안을 따라가며 페이푸스 호수와 발트해 사이를 돌파할 예정인 제18군을 지원했다. 프랑스에서 온 훈련중대는 전투항공단으로 배치되기 직전의 훈련생도들로 구성돼있었다.

훈련생 발터 노보트니 소위는 2대의 Bf 109E로 7월 19일 24회째 출격을 나섰는데 외젤섬에 있는 소련 공군 기지에서 출격한 14대의 I-153과 맞붙어 2기를 격추하는 동안 그의 윙맨이 사라졌다. 연료가 부족해진 노보트니는 위치를 보고하고 리가만을 가로질러 80 km 떨어진 기지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비행하다보니 뒤에 따라오는 기체가 있어 그의 윙맨이라고 판단했는데 그 기체로부터 사격을 받고 기체가 파손돼 어쩔 수 없이 불시착하게 됐다. 가까운 외젤섬 백사장에 내리면 소련 포로가 될게 분명했으므로 바다에 불시착을 선택했고 작은 구명보트에 의지한 채 사흘을 표류해서 기지로 귀환할 수 있었다.
9월 중순 항공단은 레닌그라드 폭격대의 호위 외에도 볼호프-일멘호 전선의 지상공격 지원, 소련전선 후방의 저공 공격 등으로 하루에 몇 번씩 출격해야했다. 9월 25일에는 항공단의 호위를 받고 출격한 한스 울리히 루델 중위가 슈투카로 크론슈타트 항구에 있던 강구트급 전함 마라를 격침했다. 3개월 간의 쉴새 없는 접전 결과 항공단의 가동 전력은 절반으로 줄어들었지만 항공단의 담당 구역은 핀란드 만부터 시작해서 데미얀스크에 이르는 400 km에 달했다. 이 광대한 구역을 커버하는 작전 규모는 한번에 고작해야 2~4대에 불과했다. 항공단의 중점 전투구역은 레닌그라드로, 9월말 제3비행단장인 아놀트 리그니츠 대위가 레닌그라드상공에서 메서슈밋 전투기의 날개가 떨어져나가는 바람에 낙하산 탈출해서 시가지로 떨어졌다. 대위는 기아에 빠진 시내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한 걸로 추정된다. 라인하르트 자일러 대위가 후임으로 임명됐다. 10월에는 7명의 조종사를 잃었는데 실종됐던 게르하르트 프로스케 하사는 10일 만에 적진을 뚫고 돌아오기도 했다.

4. 동장군

10월에는 다시 폭우가 내려 활주로가 진창이 돼버렸고 이동도 불가능해졌다. 10월이 좋지 않은 계절이었다면 11월은 나쁜 계절로, 눈이 내리고 기온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악천후를 무릅쓰고 항공 엄호도 없이 실시된 티흐빈으로의 진격은 성공적이어서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마지막 철로가 절단됐다. 하지만 레닌그라드는 아직도 라도가 호수를 통해 (여름에는 배, 겨울에는 빙판 위) 숨쉬고 있었다. 12월 8일 날씨가 영하 30도에 달하자 동부전선에서의 모든 공격이 중지됐고 12월 9일에는 소련군이 반격을 시작해 티흐빈으로 진격했던 제39장갑군단을 밀어냈다. 북부 집단군의 첫 후퇴였다. 날씨가 이제 영하 40도에 달하자 항공단의 작전은 크게 위축돼 12월에는 사고나 지상에서 손실이 늘어났고 제2비행단은 휴식과 Bf 109F-4형으로 장비 개편을 위해 독일로 돌아갔다.

1942년 1월 1일 제1비행단장인 프란츠 엑켈레 대위가 I-16 2기와 I-153을 격추하며 나름대로 신년을 축하했지만 제3비행단은 별로 축하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은 1월 2일 밤 영하 45도의 날씨에도 작전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소련군의 폭격으로 지상에서 Bf 109F-2 전투기 5대와 연락기 10대를 한꺼번에 잃었다. 1월 둘째 주에는 소련군이 북부 집단군 지역 볼호프, 스타야라루사(Ста́рая Ру́сса), 중앙 집단군과의 접경 지역 3곳에서 역습을 걸어왔다. 제1항공함대는 즉시 가장 위급한 전선으로 항공지원을 투입했는데 급히 독일에서 돌아온 제2비행단은 스타야라루사에서 한 달간 3명의 조종사를 잃으면서 99대나 격추시켰다.

1월 중순에는 소련 제2충격군이 독일군 전선내로 60 km까지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레닌그라드를 해방하려는 시도였다. 또한 볼호프 전선에서는 소련군이 Po-2 복엽기로 밤을 이용해 끊임없는 폭격과 안면방해를 해왔으므로 트라우트롭트는 선발된 조종사들로 야간 요격을 나서게 해서 그해 7월까지 손해없이 56대를 격추했다. 이것은 동부전선에서 처음 실시된 독일군의 야간 요격이었다. 항공단에서는 자일러 대위가 16대 격추로 최고 전과였고, 핀크 중위가 9기, 라이카우프 소위가 8기로 뒤를 이었는데 라이카우프 소위는 6월 22일 밤 1시간 동안 독일 전선내의 파르티잔에게 가는 소련 보급기 6대를 줄줄이 격추시켰다.

2월 초 일멘 호수 남쪽의 상황은 더 나빠져서 깊숙이 돌파해온 소련군에 의해 몇 개소의 독일군이 고립됐다. 히틀러가 후퇴를 금지하고 내린 거점방어 명령에 의해 홀름에 3,500명, 데미얀스크에 95,000명의 병력이 고립됐다. 이 병력에 대한 보급기의 호위가 항공단의 또 다른 임무로 추가됐다. 20~40기 단위로 비행하는 Ju 52의 항공로와 투하지점 근처에서 2~4기 단위로 매복하는 작전은 성공적이어서 2월에 201기, 3월에는 359기를 격추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피해도 이어져서 2월 14일 제1비행단장인 엑켈레 대위가 홀름 상공에서 대공포에 격추 당해 전사했다. 항공단 창설 멤버였던 그는 사후 곡엽기사십자훈장이 추서됐다. 또 다른 고참인 제3중대장 한스 슈몰러-할디 대위도 중상을 입었는데 그는 회복 후 전투기부대 사령부 참모가 됐다. 3월에는 전선이 안정돼서 진격해온 소련 제2돌격군을 협격해 포위했고 데미얀스크의 포위망으로도 육상 보급로가 개척됐다. 동부전선에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5. 1942

1942년 3월 9일에는 항공단내 훈련비행대가 해산되고 훈련 임무는 프랑스와 독일에서 신편성된 훈련 항공단으로 이관된다. 이 항공단에는 전선의 베테랑들이 교관으로 파견되기도 했는데 JG 54에서도 오토 키텔, 루돌프 라데마허 같은 고수들이 그들의 실전 노하우를 전수했다. 3월 둘째 주에는 항공단의 넘버1 에이스인 한스 필리프가 82대 격추로 그의 곡엽기사철십자훈장에 검을 추가했고 넘버2인 헬무트 오스터만 중위는 62대로 곡엽기사철십자훈장을 받았다. 필리프 대위는 얼마 후 전군 4번째로 100대 격추를 달성한다.

히틀러는 1942년 4월초 총통 지령을 통해 레닌그라드를 점령하고 핀란드군과 연결할 것을 지시했다. ‘남부에서 추진하는 공격이 성공하면‘이라는 단서가 붙어있었던 이 작전은 소련군이 오히려 반격을 가해오고 남부에서 작전이 완전실패 함에 따라 포기된다. 항공단의 주력은 다시 레닌그라드로 돌려져 크론슈타트 항구의 발틱 함대를 폭격하는 제1항공함대 소속 슈투카와 폭격기 호위임무를 시작했다. 발틱 함대에 대한 공격은 4월 내내 계속돼서 전함과 중순양함을 비롯한 크고 작은 함선에 피해를 입혔지만 함대의 화력이 별로 약화되지 않아 중지된다.

5월에는 홀름과 데미얀스크의 독일군이 완전히 구출되고 전선을 밀어붙인다. 5월 12일에는 헬무트 오스터만이 볼호프 상공에서 중상을 입으면서도 항공단 두 번째로 100기 격추를 달성해 병상에서 곡엽검 기사철십자훈장을 수상한다. 5월말에는 볼호프강에 포위된 소련 제2충격군이 완전 섬멸되고 지휘관인 안드레이 블라소프 장군이 체포된다. 후에 자유러시아군을 지휘하게 되는 바로 그 사람이다. 한편 레닌그라드로 가는 보급 선박을 격침하기 위해 포함, 기뢰함, 이탈리아군의 어뢰정 등이 동원됐는데 이들의 항공원호를 위해 15기 정도의 전투기를 뽑아 핀란드 영내의 우티로 보낸다. 그들은 10월 호수가 얼어붙을 때까지 거기서 작전을 벌인다.

7월에는 Bf 109G-2로 기종 개편을 시작하는데 부상에서 회복된 제8중대장 오스터만 중위가 신형기 2기 편대로 소련 영내에 침투해 일멘호 상공 고도 1,000미터 지점에서 9대의 커티스 P-40과 조우한다. 첫 번째 공격에서 근거리 사격(30m)으로 격추를 달성한 중위가 2차 공격을 시도하는 순간 구름 사이로 또 다른 소련군 편대가 나타나 중위의 조종석에 총탄이 명중했고 그것이 넘버2 에이스의 최후였다. 한편 중앙 전선의 루제프로 잠시 파견됐던 제6중대장 칼 자틱 대위도 실종된다. 후임은 귄터 핀크 소위와 한스 바이센베그너 소위였다.

8월 27일에는 레닌그라드를 구출하려는 소련군의 공세가 재차 볼호프 전선에서 시도됐지만 1개월 간의 전투 결과 공격군 16개 사단 중 7개 사단이 므가의 대삼림 지대에서 포위 섬멸됐다. 소련 공군의 전투기술은 나날이 향상돼 10월 6일에는 스키 세계챔피언이던 안톤 파이퍼 하사가 일멘호 상공에서 전사했고 며칠 후 제5중대장인 요아힘 반델 대위도 같은 운명이 됐다. 10월 27일에는 부대 최고참인 제2비행단장 디트리히 흐라박 대위가 남부 전선의 제52전투항공단장으로 영전하고 후임에는 또 다른 에이스인 서부전선 JG 2 제3비행단장 한스 한 대위가 착임했다. 쉴틈 없는 방어전투로 지나간 1942년에는 바이스베그너 소위(119), 한 대위(78), 필리프 대위(130)의 전과가 두드러졌지만 무엇보다 괄목상대할 만한 사람은 막스 스토츠 소위로 하루에 10기를 포함 순식간에 129대까지 기록을 늘리고 있었다.

6. 도살새

1943년에 접어들면서 항공단은 동부전선의 위기에 처한 어느 곳에라도 달려가도록 하는 소방대 역할을 담당했다. 1월에는 제1비행단이 Fw 190으로 기종 개편을 시작했는데 공랭식 엔진을 가진 견고한 이 기종은 Bf 109보다 동부전선에 더 적합했다. 치열한 공중전 보다는 덜 중요했지만 지상공격 임무도 항공단의 역할 중 하나였다. 전차 부대와 보병 집결지, 철도 수송, 보급차량 등 목표는 널려있었는데 겨울을 맞아 가장 눈에 들어온 목표는 라도가 호수 위를 통과하는 수송행렬이었다.

항공단은 얼음을 깨서 수송을 방해하기 위해 소이탄과 고폭탄을 투하했지만 강추위에 파괴된 얼음은 곧 다시 얼어붙었다. 하지만 ‘나비’라 불리는 SD 2형 폭탄은 2 kg의 눈 색깔과 같은 폭탄을 넓게 산개시켜 지뢰 같은 역할을 함으로써 효과적이었다. 소련군은 야음을 이용해 얼음판 위로 눈을 치우고 길을 만들어 밤새 보급품을 나르고 있었으나 날이 밝아 독일군 정찰기가 이를 발견하면 즉시 전투기가 출동해 남아있는 소련군 보급행렬에 기총소사를 퍼부어 얼음판 위는 죽음의 공간이 됐다. .

2월 초에는 자일러 대위의 제3비행단은 서부전선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제 그륀헤르츠는 독일이 처한 상황 그대로 동·서 양쪽에서 전투를 벌이게 됐다. 2월 19일 항공단이 통산 4,000기 격추를 달성한 며칠 후 한스 한 제2비행단장이 Bf 109의 엔진 고장으로 소련군 진영에 불시착해 포로가 된다. 탈출을 시도했던 그는 갖은 고초를 당한 끝에 1949년에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후임은 하인리히 융 대위였다. 3월 6일에는 또 다른 에이스 한스 바이스베그너 중위가 4기 편대를 이끌고 스타라야루사-홀름간 고속도로 상공으로 출격해 Il-2를 호위하는 LaGG-3 전투기 15~20기를 만나 공중전을 벌이다 피격, 실종됐다. 그의 마지막 기록은 152기였다.

한편 포케불프로 장비를 바꾼 제1비행단의 전과는 급상승하기 시작했는데 2월 23일 34대, 3월 7일에는 59대를 격추한 반면 손실은 없었다 ! 지휘관 한스 필리프는 3월 17일에 203대 격추를 기록해 전군에서 헤르만 그라프 이후 처음으로 200대를 돌파한 에이스가 됐다. 그는 4월 1일 본토 방공전의 주력부대인 제1전투항공단 사령관으로 영전하는데 얼마 후 트라우트롭트에게 새로운 임무의 어려움에 대한 편지를 보낸다.
"그전에는 수십 배의 적을 만나도 무섭지 않고 재미있었지요. 그게 스핏파이어였어도 별 다른 건 없었습니다. 그런데 B-17 폭격기 70대가 눈앞에 나타나면 지난 죄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고..."

이 탁월한 하늘의 용사조차도 그해 8월에 미군의 호위 전투기에 격추되어 전사하고 만다.

4월에는 지상 공격의 달인으로 불렸던 에드빈 두텔이 슈르셀부르크 상공에서 저공임무 수행 중 전사하고 호르스트 아데마이트와 오토 키텔의 격추기록이 포케불프 전투기로 바꾼 후 급상승하기 시작한다. 한편 제5중대의 메서슈밋 전투기들은 소련군 잠수함에 대한 초계 임무 수행을 위해 핀란드의 헬싱키로 이동한다. 이들은 삭막한 소련 전선과 딴판인 헬싱키에서 나름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6월에는 제2비행단도 Fw 190으로 기종 개편을 완료했고 항공단 주력은 KG 53의 He 111(80기)과 슈투카(40기)를 엄호해 소련군 철도와 라도가호의 항만 시설 공격에 나선다. 레닌그라드로 가는 보급로를 끊으려면 가장 중요한 시설중 하나가 전선 후방 30 km의 볼호프강에 놓인 철교였다. 육군이 열차포를 사격했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고 결국은 제1항공단이 이 일을 맡았다. 철교의 중요성을 독일군만큼 잘 알고 있었던 소련군도 1,000문의 각종 대공화기를 배치해 놓고 있었으므로 한번 공격할 때마다 불꽃놀이 하듯이 대공포가 불을 뿜었고 항공단의 호위를 받는 슈투카와 He 111이 그 사이를 뚫고 들어갔다. 여러번의 공격 후 실시된 정찰기의 보고는 교각 하나가 날아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보급열차는 아직도 강을 건너다니고 있었다!! 그 비밀은 며칠 후 풀렸는데 소련군은 철교 몇 킬로미터 하류에 수면 바로 아래(소련군의 특기였다) 새로운 다리를 완성하고 있었다. 공격은 중단되는데 폭격기들이 다른 곳에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 다른 곳은 바로 중앙 집단군 구역으로 치타델 작전(Unternehmen Zitadelle) 지원을 위해 제1항공단의 가동기 전부가 중앙 전선의 제6항공함대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륀헤르츠의 제1비행단도 같은 임무를 가지고 쿠르스크 돌출부 북쪽인 오렐로 이동했다. 불과 20여기의 가동 가능한 Fw 190을 보유한 제1비행단은 7월 5일 작전 개시부터 11일 간의 치열한 전투에서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지만, 그 댓가로 9명의 조종사를 잃었다. 비행단장인 자일러 대위는 7월 6일 오렐과 쿠르스크 사이에서 109기째 격추를 달성하지만 자신도 중상을 입고 전열을 떠난다. 퇴원 후에도 비행불가 판정을 받은 그는 제104훈련항공단장이 된다. 공격 실패 직후인 7월 17일 중앙전선에서 통산 5,000대 격추가 달성됐다.
한편 제2비행단과 함께 북부 전역에 남아있던 트라우트롭트는 7월 6일에 갈란트의 전투기 사령부 동부전선 감독관이라는 직책으로 승진하면서 항공단을 떠난다. 그는 떠난 후에도 깊은 관심과 유대관계를 가지고 부대를 돌봐줬다. 후임은 JG 52에서 온 후베르투스 폰 보닌 소령이었다. 잠시 항공단을 떠나있기는 했으나 그도 JG 54 창설 멤버 중 하나였다.

7. 제국 본토 방공전

전투기부대 사령관인 갈란트는 동서 양 전선의 전투항공단 1개씩을 교환 배치하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선발된 것이 고도의 경험과 전투력을 가진 동쪽의 JG 54와 서쪽의 JG 26이었다. 한꺼번에 바꿀 경우 완전히 다른 전투환경 때문에 벌어질 수 있는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1개 비행단 단위로 실시하게 됐는데 제26전투항공단 1개 비행단은 동부전선에서 몇 달 후 귀환하지만 제54전투항공단 제3비행단은 서부전선에 눌러앉게 된다. 자일러 소령의 제3비행단은 1943년 2월 스몰렌스크를 떠나 프랑스로 와서 서부의 최일선 방공을 담당하는 요제프 프릴러 소령의 제26전투항공단 휘하로 들어가는데 탑승기는 Bf 109G-4였다.

동부전선에서는 익숙한 저고도에서 2~4대 단위의 전투는 이곳과 달랐고 미영군 전투기 부대와 대결 외에도 거대한 중폭격기를 상대하는 전술을 익혀야 했다. 한달 정도의 숙달훈련 후 완벽주의자인 프릴러 소령은 Ⅲ./JG 54가 실전투입 부적합이라는 보고서를 상부에 제출한다. 결국 제3비행단은 3월 27일 연합군 전투기의 항속거리 밖에 있는 독일 북부의 올덴부르크로 후퇴한다.

한편 제26전투항공단의 제10중대(전투폭격), 제11중대(고공 요격)가 각각 10./JG 54와 11./JG 54로 개편됐다. JG 26이 소련으로 떠나더라도 이 2개 중대는 소련 전선에 별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JG 54 전체가 올 것에 대비해 이뤄진 일이었다. 제10중대의 Fw 190들은 3월 24일에 치열한 대공포화에 1대를 잃으면서도 애쉬포드를 공격해 큰 피해를 입힌다. JG 54 전체 이동이 취소된 4월 중순, 부대는 제10고속폭격항공단(SKG 10)으로 편입된다. 제11중대도 잠시 존재하다가 JG 26 휘하로 다시 돌아간다.

북부 독일로 간 제3비행단은 4월 17일에 브레멘을 공습한 미군의 폭격기 3대를 격추했다. 피해는 한스-에케하르트 봅 대위가 하늘의 요새에 충돌, 부상한 것이 전부였다. 최초의 B-17은 비행대장 자일러 대위의 전과였는데 그에게는 100번째 격추 기록이었다. 그는 곧 한스 필리프가 떠난 동부전선의 제1비행단장으로 전출되고 후임에는 서부전선 톱에이스 중 하나인 지크프리트 슈넬 대위가 부임한다.

6월 23일 비행대는 이제 영국 전투기의 항속거리 이내인 네덜란드의 아른헴과 암스테르담 지역으로 이동했다. 2개월 동안 제8중대의 루돌프 파트착 중위는 「요새」 7기를 격추시켰고 슈넬 대위와 오이겐-루트비히 츠바이가르트 상사는 그들의 주적으로 떠오른 스핏파이어와 호커 타이푼 몇 대를 잡는다. 7월 27일은 가장 성공적인 날로 15분간 전투에서 영국 전투기 7기를 떨어뜨렸고 손해는 잠옷 사건의 주인공인 제7중대장 뷔브케 대위를 포함한 부상 셋뿐이었다. 8월 9일에는 그들의 특기인 저고도 전투가 벌어져 5기의 브리스톨 보파이터가 네덜란드 해안에 떨어졌다. 8월 15일에는 비행대가 독일의 함부르크 동쪽에 위치한 슈베린으로 이동해 다시 4발 폭격기 요격전에 투입된다. 여기서 Bf 109G-6으로 기종 개편을 시작한 비행대는 또 다시 사고로 많은 손실을 입는다. 10월 9일에는 발틱 해안의 해군기지를 폭격한 B-17 4기를 격추시켰고 미군에게는 잊지 못할 참극으로 끝난 10월 14일의 슈바인푸르트 공습에서 거둔 전과는 3대였다. 한편 연말까지 5명의 대원이 전사한다.

1944년에 접어들면서 미군은 압도적인 질과 양은 물론이고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엄호 전투기들을 동원하기 시작한다. 1월 11일에는 손해 없이 B-17 11기를 격추하고 P-51도 처음 격추하는데 성공하지만 첫 8주 동안 12명 이상이 전사하고 그 이상이 부상하는 등 손해가 가파르게 증가한다. 2월1일에는 슈넬 소령이 동부전선의 제4비행대장(신편성)으로 가고 임시로 루돌프 파트착 중위가 지휘를 맡았다. 2월 20일 미군이 대공세가 시작되는데 - Big Week - 비행대는 3명을 잃으면서 요새 6대를 격추하고 2대를 대파시켰다. 다음날은 파트착 중위를 포함한 3명이 전사하고 또 그 다음날은 중폭 6기를 격추, 25일에는 5대의 B-24를 비롯해 P-38 2기, B-17 1기를 격추한다. 손실은 부상 1명이었다.

2월 25일에 비행대는 함부르크 동남쪽의 륀부크르로 이동하고 동부전선의 제4비행단장이던 루디 진너 대위가 지휘를 시작한다. 3월 6일에는 801기의 전투기 호위를 받으며 730기의 폭격기 대편대가 수도 베를린을 목표로 날아온다. 본토를 지키는 모든 요격 전투기가 날아올라 10대의 폭격기를 떨구지만 피해도 7명이나 되어 전혀 남는 장사가 아니었다. 지휘관인 루디 진너 대위도 브레멘 상공에서 B-17 방어기총에 맞아 중상을 입고 비상탈출했고 제8중대장 게르하트트 로스 중위는 P-51에 격추되어 전사해버렸다. 그도 풍부한 동부전선 경험을 포함해 92대를 격추한 베테랑이었다.

지중해의 톱에이스 중 하나인 베르너 슈뢰어 소령이 임시 지휘를 맡는다. 3월 23일은 5기 격추, 29일은 전과없이 7명 전사, 4월 8일은 5명이 전사하며 B-24와 P-38 몇 기를 격추했다. 4월 15일에는 Fw 190A-8로 기종 개편을 위해 장비와 지상요원을 싣고 온 Me 323 수송기가 추락하며 막사를 덮치는 참사가 일어나 제7중대 지상근무원 대부분이 전사한다. 기종 개편 후에도 부대는 격렬한 폭격기 요격전을 벌이며 전과를 올리지만 동부에서 60기, 서부에서 6기의 4발기를 격추한 라인홀트 호프만 소위 등 보충 불가능한 소중한 자원이 점차 하늘에서 지거나 사고로 순직하고 있었다.

8. 노르망디와 보덴플라테

6월 6일 독일군에 경보가 발령됐다. 연합군 노르망디에 기습 상륙해 교두보 구축에 성공한 것이다. 제3비행단은 즉시 파리 근교로 전진 배치됐다. 지휘는 동부전선 제1비행단에서 온 기사십자장 수상자 로베르트 바이스 대위가 맡았다. 경험 없는 어린 조종사가 연합군의 방해와 항법 미숙으로 계획대로 이동하지 못했으므로 처음에 가동기수는 단 1대뿐이었다. 6월 7일 노르망디에서 첫 작전이 시작돼 바이스 대위가 스핏파이어와 P-51을 격추했다. 6월 8일에는 제7중대장 알프레트 토이머 중위와 제9중대장 에밀 랑 대위가 P-51을 5대나 격추했다. 두 사람은 소련 전선에서 긴급 지원 받은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같은 날 제8중대장 츠바이가르트 중위는 노르망디 해안 근처에서 P-51에 격추돼 전사했다.

하늘에서의 병력 열세는 40대 1에 달해 이런 상황에서 전과를 올리고 생존 가능한 것은 베테랑뿐이고 전사자 명부는 경험 없는 어린 조종사들로 순식간에 채워졌다. 베테랑 1명에 대한 이들의 전사 비율은 30~40배에 달했으며 6회 정도 작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이들의 생존 가능성은 높아졌지만 많은 신출내기들은 첫 작전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손실 보충이 불가능해진 독일의 정상적인 조종사 수급 체계는 무너지고 있었다.

제3비행단의 증강을 위해 동부전선에서 제2중대가 급거 투입됐는데 베테랑이었던 이들도 6월 12일 중대장 호르스트 포르빅 소위가 실종되는 등 혈전을 치러야 했다. 6월 15일 공습으로 제7중대가 모든 장비를 잃었다. 7월 말까지 비행대의 손실는 51명(전사 32, 부상 19)에 달했지만 전과도 90대였으며 에밀 랑 대위가 14기를 격추하며 분전했지만 그도 제26전투항공단 제2비행단장으로 승진한 9월 초에 전사하고 말았다.

8월 말에 생존자들은 재편성을 위해 독일의 올덴부르크로 후퇴한다. 비행대에는 필요가 없어져 해산된 폭격항공단에서 근무하던 폭격기 조종사들이 배치됐다. 그들은 경험 많은 조종사였지만 전투기 부대에서는 또 다른 경험이 필요했다. 부대는 대전 최강 전투기의 하나로 평가되는 Fw 190D-9를 장비했다. 한편 소련군의 중앙군 집단에 대한 대공세에서 굉장한 손실을 입은 볼프강 슈푀터 소령의 제4비행단이 재편성을 위해 동부전선에서 라이프치히 북쪽으로 이동해온다.

9월 17일에는 머나먼 다리라는 고전 영화로도 잘 알려진 연합군의 마켓 가든 작전이 네덜란드에서 실시된다. 제4비행단은 쉴 틈도 없이 아른헴으로 투입돼 막강한 연합군 공군과 대결, Fw 190A-8 27대와 23명(전사17, 부상6)의 조종사를 잃는 참혹한 손실을 입는다. 10월 7일 생존자들은 라이프치히로 후퇴하고 Me 163 비행대로 전출한 슈푀터 소령의 뒤를 이어 루돌프 클렘 대위가 지휘를 맡아 한달만에 두 번째 재편성에 들어간다.

한편 제3비행단 예하의 제9, 12중대의 Fw 190D-9들은 10월 12일에 그륀헤르츠 출신 동료 노보트니 소령의 Me 262 부대 이착륙 엄호부대로 차출된다. 쉬운 임무가 아니어서 제9중대는 10월 15일까지 P-47에게 6기를 잃었고 제12중대는 우군 대공포에 3기가 격추됐다. 한편 제12중대장 한스 도르텐만 중위가 11월 2일 4발기를 격추시킨 것을 비롯 연말까지 신형 전투기를 이용해 38대를 격추한다. 12월 16일, 아르덴 숲에서 독일군 최후의 대공세가 시작되는데 제4비행단은 JG 27에 배속돼서 방공 및 지상공격 임무에 투입된다. 연말까지 중대장 2명을 포함해 25명의 조종사가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고 전열에서 물러났다. 제3비행단은 JG 26에 배속돼서 12월 27일 뉴질랜드 조종사들이 모는 호커 템페스트 3기를 격추하지만 29일에는 전 비행대가 출격했다가 저공 전투가 벌어져 하루 동안 15명을 잃는다. (전과는 스핏파이어 6, 타이푼 2)

1945년 1월 1일에는 독일 공군이 남겨둔 비장의 900대가 연합군 비행장을 습격하는 야심찬 보덴플라테 작전이 실시된다. 브뤼셀 부근 연합군 비행장을 목표로 출격한 제3비행단은 17대 중 9대를 잃고 전과는 겨우 6대를 지상격파한 것 뿐이었다. 제4비행단의 25대는 11기의 빅커스 웰링턴과 3기의 스핏파이어를 지상에서 격파하고 2명을 잃었다. 1월 14일에는 제4비행단이 연합군의 대편대에 돌입했다가 P-51에 가로막혀 전과없이 중대장 둘을 비롯한 10명의 대원을 잃었다. 전투력을 상실한 제4비행단은 해산되고 제트기를 장비한 제7전투항공단 제2비행단으로 개편이 추진되지만 실현되지 못한다. 또한 제3비행단은 2월 23일에 제26전투항공단 제4비행단으로 개칭된다. 부대원들은 흡수된 후에도 그륀헤르츠 배지를 그대로 달고 있었다고 한다. 서부전선에서 그륀헤르츠의 이름을 단 마지막 부대는 2월 말 제76구축항공단 1개 비행대를 개편한 제54전투항공단 제3비행단이었다. 이들은 1개월간 처참한 손실만 입고 4월 초 해산된다. 서부전선에서 그륀헤르츠라는 이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9. 국민적 영웅

쿠르스크 전투가 한창이던 7월 6일 트라우트롭트가 3년간 정든 부대를 떠난다. 그는 부하의 일방적 희생만 강요하는 명령을 거부할 용기도 있었고 대원들이 항상 최상의 상태에서 출격할 수 있도록 배려해 부하들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는 전후에 서독 공군에서 장군이 된다. 새로운 사령관 폰 보닌 소령은 제3비행단이 서부로 떠난 공백을 메우기 위해 동프로이센에서 Bf 109G를 긁어모아 제4비행단을 조직한다. 이 부대의 지휘관은 에리히 루도르퍼 대위였다. 7월 22일에는 레닌그라드를 해방시키려는 소련군의 대공세가 개시되는데 이리 저리 전력을 나눠준 북부 집단군의 유일한 전투기 부대는 30여기의 Fw 190와 소수의 Bf 109 뿐이었다. 7월 30일에는 제2비행단장 하인리히 융 대위가 므가 상공에서 실종되고 제4비행단장인 루도르퍼 대위가 동프로이센에서 날아와 급히 지휘권을 이어 받는다. 제4비행단도 훈련을 마치고 루디 진너 대위의 지휘 하에 8월에 북부 집단군 지역으로 투입된다.

한편 치타델레 작전 후에도 중앙 집단군에 남아 있었던 제1비행단에는 치명적 손실이 이어지는데, 8월 3일 부상한 비행대장 자일러 대위 후임으로 아프리카 전선의 JG 27에서 온 게르하르트 호무트 소령이 두 번째 출격에 나섰다 전사한다. 그 후임인 제2중대장 한스 괴츠 중위도 이틀 후 브랸스크 상공에서 전사했다. 2개월간 3명의 지휘관을 잃은 것이다. 8월 5일에 소련군은 오렐을 탈환했고 18일에는 일멘호 남측에서 새로운 공세를 시작하는 등 거센 압력을 가해온다. 8월 19일 막스 슈토츠 중위가 비텝스크 상공에서 야크기 대편대와 대결을 벌이다 피격 후 낙하산 탈출해 소련군 진영에 떨어진다. 그 후 소식 불명이 된 그의 마지막 기록은 189기였다.

한편 열흘간 37기를 격추하는 등 기록이 수직 상승중인 22세의 발터 노보트니 중위가 괴츠 중위 후임으로 제1비행단장으로 임명된다. 8월 한달간 항공단의 전체손실은 24명(전사 18, 부상6)이었다. 8월 23일에는 하르코프가 해방되고 전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소련군의 대공세가 이어지자 불과 20여기의 포케불프를 보유한 루도르퍼 소령의 제2비행단이 우크라이나로 이동한다. 그륀헤르츠는 동부전선 3개 전구에 모두 흩어진 셈이었다.

노보트니의 분전은 눈부셨는데 9월 1일 하루 동안 10기를 격추하더니 소련 공군의 맹공격을 받았던 샤타로브카에 있는 비행대 기지를 방어하면서 12기를 추가, 9월 15일에는 215기에 도달, 루프트바페 최고의 격추왕이 됐다. 22일 총통에게 직접 곡엽기사철십자훈장을 받기로 결정됐는데 그 사이 기록한 다른 격추기록으로 이 훈장에는 검이 추가되어 곡엽검 기사철십자훈장으로 격상됐고 10월 1일에 대위 진급, 10월 13일에는 LaGG-3, La-5, P-40 등 6기 추가로 루프트바페, 아니 세계 최초로 250대 격추라는 전인미답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10월 19일에 또 히틀러에게 가서 다이아몬드 곡엽검 기사철십자훈장를 수상하므로서 한 달간 세가지 훈장을 타는 진기록도 남겼다. 또한 그와 칼 슈뇔러, 안톤 되벨레, 루돌프 라데마허로 구성된 편대는 474기라는 믿을 수 없는 격추 기록을 남겼다.

한편 9월 20일 키에프 서방으로 이동해온 제2비행단은 일류신 공격기를 찾아 격추시키는 작전에 돌입한다. 10월 말 소련군은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를 양익에서 조여오고 있었다. 제2비행단은 키에프에서 후퇴가 결정됐지만 1개 편대는 남아서 가능한 시간까지 키에프에서 버티는 육군을 지원하기로 했는데 전직 루프트한자 여객기 조종사 출신으로 34세의 제5중대장 에밀 랑 소위가 지원하고 나섰다. 5대의 포케불프와 8명의 지상요원, 연료트럭 등은 우군이 후퇴해 폐허가 된 비행장에 자리 잡았다.

함께 있던 노르베르트 하닉 소위의 증언을 보자.
"11월 3일 새벽에 우리가 출격을 준비할 때 소련군의 키에프 공격이 개시됐다. 맹렬한 포격과 함께 소련 전투기들이 아무런 방해없이 폭격을 퍼붓고 있었다. 랑의 2기는 출격하고 우리는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남았다. 소련 공습부대가 폭격을 마치고 돌아가는 순간 랑이 그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엄호하던 La-5가 지상으로 곤두박질치고 랑은 Il-2의 배면을 파고들며 다시 명중탄을 날렸다. 슈투르모빅들이 우왕좌왕하며 동쪽 하늘로 부랴부랴 사라졌다. 랑 소위가 돌아와서 자신의 우익 기관포가 고장났다며 예비기에 올라타고는 그로스 하사와 함께 이륙했다."

하루에 18대 격추 ! 새로운 일일 격추기록을 세운 랑이 국민적 영웅으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바쁜 하루를 지내고 야간에 비행장에서 좀 떨어진 숙소 건물로 왔는데 한밤중에 T-34와 소련군 보병이 진격해 건물을 수색했다. 다행이 발견을 면한 그들은 새벽에 비행장으로 달려가 후방으로 탈출했다. 지상근무 요원들도 그날 오후 모두 무사히 돌아왔다. 키에프가 해방된 11월 6일 에리히 루도르퍼 대위는 하루에 11대를 떨구는 기염을 토했다.

이제 소련 공군의 세력은 1만대에 달했고 새로운 전술과 장비로 무장해 예전의 만만했던 상대가 아니었다. 승리를 위한 싸움은 생존을 위한 싸움으로 변하고 고공에서 대기하다 기습 후 다시 고공으로 달아나는 요요 전술을 써야 했다. 10월 말에는 소련군이 라트비아 국경에 도달했고 말없는 사나이 오토 키텔 상사가 123기를 기록해 기사십자훈장을 받았다. 한편 노보트니 편대에는 불운이 이어져서 11월 11일 되벨레 상사가 스몰렌스크-비텝스크간 고속도로 상공에서 슈투르모빅과 충돌해 전사했고 13일에는 공격을 받고 있는 보병 구원을 위해 노보트니와 함께 출격했던 슈뇔러 상사도 우군 대공포에 맞아 70 m 상공에서 낙하산 탈출하다 두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는다. 15일에는 노보트니가 255기라는 대기록을 달성하면서 영웅이 전사할 경우 생길 국민의 사기 저하를 고려해 작전비행 금지명령을 받는다. 그는 1944년 2월 제101훈련항공단장으로 취임하면서 전선과 부대를 떠났다.

10. 의미 없는 노력

12월 5일 71기 격추의 귄터 셸 소위가 오렐 상공에서 Yak-9에게 당해 전사했고 15일에는 항공단 지휘관 폰 보닌 소령이 비텝스크 상공에서 전사한다. 소련군의 새로운 공격으로 지휘부와 제1비행단은 포위 위협에 처한 비텝스크를 떠나 오르샤로 후퇴한다. 크리스마스날 남부에서는 소련군의 새로운 공세로 제2비행단은 타르노폴로 후퇴가 결정되지만 안개 때문에 후퇴하지 못하고 그들의 기지가 소련군 세력권 내로 들어가 버린다. 12월 28일 노련한 고참들이 먼저 날아오른데 이어 나머지 기체들도 별다른 손실을 입지 않고 1월 초에 다시 전비행대가 합류에 성공한다.

1944년 1월에는 소련군이 라도가와 일멘 호수 사이를 돌파하는 데 성공한다. 므가는 21일 해방되고 레닌그라드도 27일에 900일에 걸친 길고 긴 포위를 벗어나는데 성공한다. 잠시 공석이던 항공단장에는 제11전투항공단 사령관이던 안톤 마더 중령이 부임한다. 노보트니가 떠난 제1비행단장은 호르스트 아데마이트 대위가 이어받고 루디 진너 대위가 서부의 제3비행단으로 떠난 제4비행단장 자리에는 지크프리트 슈넬 소령이 온다. 서부전선의 톱 에이스였던 그는 2주 후인 2월 25일 나르바 상공에서 격추돼 허무하게 전사한다.

이제 북부 집단군은 레닌그라드 지역에서 완전히 물러나 발틱해 - 페이푸스호 - 나르바로 이어지는 준비된 진지, 판터 라인으로 후퇴한다. 2월 말 제1, 2비행단이 에스토니아 지역으로 이동해와 그륀헤르츠는 다시 한 지역에서 (Fw 190 45, Bf 109 20) 작전하게 된다. 3월 23일에는 부대 통산 격추수가 7,000대에 도달하고 4월에는 키텔 소위(150기), 랑 중위(144), 루도르퍼 대위(133)가 곡엽 기사철십자훈장을 받는다.

2월에 남부전선에 파견됐었던 제4비행단은 6월에는 Fw 190A-8로 기종 개편을 시작했는데 22일 개시된 중앙 집단군에 대한 소련군 대공세 저지를 위해 폴란드의 루블린으로 배치된다. 태풍처럼 몰아친 공격을 정면으로 맞은 비행대는 지휘관 슈푀터 소령이 낙하산 탈출 중 부상, 중대장 전원이 모두 전사하거나 부상, 대원 절반이 전사. 부상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북부전선에서는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의 주요 시설물들이 소련 공군의 맹렬한 폭격을 받고 있었다. 그륀헤르츠는 60기 정도의 가동기로 3,500대에 달하는 소련기와 대결해 5월 한 달간 4명의 대원을 잃고 83대를 격추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6월 9일에 소련군은 레닌그라드 북쪽의 카렐리아 지협을 공격해 핀란드에 대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핀란드의 애타는 지원 요청에 대해 전력이 남아도는 것이 아니었으나 쿨마이 대령이 지휘하는 전투단이 파견된다. 이 전투단에 포함된 제2비행단은 7월 말 카렐리아 지협이 돌파되며 비푸리가 함락돼 전투단이 해산될 때까지 핀란드에서 싸웠다.

7월 28일에는 북부 집단군의 최우익인 뒤나부르크가 함락됐고 제18군은 나르바 진지에서 밀려났으며 제16군도 플레스카우에서 남쪽으로 쫓겨났다. 8월에는 기사십자훈장 수상자인 제1비행단장 호르스트 아데마이트 대위(166기)가 뒤나부르크 상공에서 소화기의 사격을 받고 소련군 전선으로 추락, 행방불명되는 등 11명의 대원을 잃는다.

11. 쿠를란트 공방전

항공단이 재편성 중이던 8월 말, 소련군이 발틱해에서 120 km 지점에 도달해 북부 집단군 전체가 포위될 위험성이 생겨났다. 소련군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병목과 같은 좁은 통로를 통해 연락이 가능했다. 제1비행단은 이 부근에서 작전을 벌였다. 9월 말에는 마더 중령이 건강 악화로 부대를 떠나고 후임에는 제52전투항공단장을 지낸 디트리히 흐라박 - 이제는 대령 - 이 지휘관으로 임명돼 최후의 순간까지 부대와 함께 하게 된다. 그도 전후에 서독 공군에서 장군이 된다.

10월 9일에는 소련군이 메멜에서 발트해에 닿는데 성공해 북부 집단군의 퇴로가 차단되고 제16, 18군은 쿠를란트 반도로 몰린다. 처음에는 소련군이 개척한 회랑을 뚫고 후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으나 아돌프 히틀러는 10월 21일 북부 집단군에게 현재 위치를 고수할 것을 명령한다. 소련군이 독일 본토를 공격할 때 소련군의 우익 후방을 내리치겠다는 생각이었다. 이곳을 내버려두고는 발트해의 지배권을 가질 수 없었던 소련군도 종전까지 6회 이상의 공세를 거듭 펼친다.

포위망 서쪽에 둥지를 튼 그륀헤르츠는 10월 27일에 57기를 격추했고 28일에는 루도르퍼 대위가 11기를 추가해 200기 격추를 돌파한다. 11월 25일에는 키텔 소위가 230기에 도달했고 12월 14일에는 리바우 항구를 공격해온 소련 폭격기를 44대나 격추시켰다. 그 다음날도 56기를 격추했지만 11기가 지상 격파되고 지상근무 요원의 피해도 컸다. 12월 21일에는 2,000대의 지원을 받는 소련군의 대공세(제3차 쿠를란트 공방전)가 시작되지만 그전에 있었던 두번과 마찬가지로 실패한다. 한스-요아힘 크로신스키 상사(76기)는 이날 5기의 Pe-2 전폭기를 격추한 후 방어 총좌의 응사에 당해 실명에 이르는 중상을 입는다.

1944년 말까지 항공단은 격추기록 9,141기를 달성하는데 이것은 JG 52 다음가는 기록이었다. 1945년 1월 25일에는 루도르퍼 소령이 210기 격추를 기록해 곡엽검 기사철십자훈장을 받는다. 같은 날 군집단은 5개 사단을 다른 전선으로 할애하고도 2월 3일 개시된 소련군의 4차 공세를 격퇴했다. 이 시기부터는 연료가 극도로 부족해지기 시작해 전투기는 지상군이 적공군에 공격 받는 경우와 해상수송로 수비에만 사용됐다. 소련 공군이 해상 수송로에 대량의 기뢰를 뿌렸으므로 Ju 52 기뢰 탐색기 호위도 중요한 임무였다. 제5차 쿠를란트 공방전 시기인 2월 14일 오후, 우군을 공격중인 슈투르모빅 14대로 구성된 편대를 요격하던 키텔 중위가 방어 기총을 맞고 전사한다. 최종 기록은 267기에 그친 그의 전사는 쿠를란트 집단군의 전도를 암울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항공단은 70기 이상 가동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연료 부족으로 한번에 2~4기 밖에는 움직이지 못했다. 최후가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4월 8일에는 제7중대장 게르하르트 튀벤 중위가 150기 격추로 마지막 곡엽 기사철십자훈장을 받았다.

5월 7일에 독일이 항복하면서 칼 되니츠는 쿠를란트 부대에 모든 가용한 수단을 동원해 본국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한다. 그륀헤르츠의 포케불프 전투기들은 무전기를 떼내고 그 자리에 지상근무 요원을 태운 후 발트해를 건너 슐레스비히-홀슈타인으로 날아가 영국군에 항복했다. 5월 8일 아침, 마지막으로 출발한 게르하르트 티벤 중위의 포케불프가 발트해로 접어들었을 때 불타는 리바우 항구 상공에서 Pe-2 전폭기를 발견했다. 이 기체가 해상으로 철수하는 우군 함정을 공격하려는 것으로 판단한 그는 지체 없이 기관포를 퍼부어 격추시켰다. 이것이 그륀헤르츠가 기록한 9,451기의 전과 중 마지막 기록이었다.

그륀헤르츠의 대전 중 전사, 실종자는 650명이었으며 기사철십자훈장 이상 수상자가 53명(이중 전사자 27명), 100기 이상을 격추한 엑스페아텐 에이스가 24명에 달했다. 쿠를란트 공방전에서 포로가 된 소련 공군 조종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그륀헤르츠는 불과 2~4기 단위로 작전하지만 그들이 나타나면 시끄러워진다. 그들은 항공단 전체가 에이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