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초의 실전 제트기 부대
제트 전투기를 처음으로 운용한 실험 부대 지휘관 발터 노보트니의 이름을 따서 노보트니(Nowotny)라고 불린 JG 7은 세계 최초의 실용 제트전투기인 메서슈밋 Me 262를 독점적으로 운용하며 압도적인 물량으로 죄어오는 연합군 항공력에 맞서 싸웠다. 이미 패색이 짙어진 1944년 말에 조직되어 제3제국이 전쟁에서 패하기 직전인 1945년 5월까지 전투를 멈추지 않던 이들은 항공 역사상 처음으로 편성된 실전 제트기 부대로 이름을 남겼다.2. 배경
이 부대는 발터 노보트니가 지휘봉을 잡았던 소규모의 실험 전투기 부대 코만도 노보트니(Kommando Nowotny)를 노보트니가 전사한 후에 제3비행단(III./JG 7)으로 재편해 창설한 것이 그 시초였다. 초대 사령관은 조종사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우면서도 그 자신도 수퍼 에이스인 요하네스 슈타인호프가 지휘봉을 잡았다. 부대의 씨앗이 된 제3비행단은 에리히 호하겐 소령이 이끌었는데, 이들은 처음에 호하겐 소령의 비행단만이 작전에 투입할 수 있는 상태일 정도로 그 규모는 보잘 것 없었다.JG 7, 즉 그 무렵 독일에서 하나뿐인 제트 전투기 부대가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더디게 공급되는 신형기의 조달 문제와 더불어 제트 엔진에 맞는 등유 기반의 항공연료, 그리고 각종 교체 부품의 불규칙한 공급이 발목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부대에는 충분한 실전 경험을 쌓은 베테랑 조종사에 한해서 선발하여 배속시키고 있었으나 초기 6주 동안 기종전환 훈련을 하면서 무려 10대의 Me 262를 잃고 말았는데, 더 놀라운 것은 이들에게는 이 같은 높은 사고율이 지극히 일반적인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3. 실상
기술적인 난제와 말썽, 그리고 물자 부족은 JG 7로 하여금 1회 출동에 4대나 잘해야 6대의 Me 262만 띄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브란덴부르크-브리에스트(Brandenburg-Briest), 오라니엔부르크(Oranienburg)와 파르킴(Parchim) 비행장을 기지로 삼고 작전을 펼친 이들은 간헐적으로 미군 폭격기의 대편대를 요격하기 위해 날아갔다. 이들이 첫 공식적인 전과를 세운 날은 2월 3일로, 이 날 JG 7은 폭격기의 강을 향해 달려들어 5대의 4발 중폭격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1945년 2월 말까지 이들은 45대의 중폭격기를 해치우는 댓가로 15대의 제트 전투기를 잃어야만 했다. 두말 할 나위 없이, 한 번 공습에 최소 수 백대 이상씩 몰려오는 연합군의 대규모 공습 작전에 이 정도 격추율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을 뿐더러 그다지 수지맞는 일도 아니었다.
4. 실전에서
3월에 들어서서야 어느 정도 진용이 갖춰진 JG 7은 다시 한번 연합군 폭격기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시도했다. 3월 3일에는 29소티의 출격으로 8대의 폭격기를 확인 격파했으며 1대의 우군기를 잃었다. 3월 18일에 III./JG 7은 그때까지 시도했던 가장 대규모의 요격 작전을 펼쳐서 37대의 적기를 무찔렀지만, 이날 연합군 공습 부대는 무려 1,200대의 폭격기와 600대의 엄호 전투기로 이루어져 있었던 탓에 그정도의 피해는 강물에 돌멩이를 던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이들은 이 날 임무에서 신병기인 R4M 공대공 로켓의 첫 번째 실전 사격도 경험했다. 미8공군의 전투일지에 따르면 적어도 아군 폭격기 12대가 추락했고 호위 전투기 1대는 확실히 격추되었으며 반대로 엄호 전투기들이 3기의 Me 262를 잡았다고 기록되어 있다.최종적으로 이들의 전과 총계는 지리멸렬해진 루프트바페 수뇌부로 인해 정확히 특정짓기가 어렵지만, 최소 136대에서 최대 420대의 연합군 항공기를 격추했음을 주장했다.
5. 지휘관
1. 대령 요하네스 슈타인호프 : 1944년 1월 1일~2. 소령 테오도어 바이센베르거 : 1945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