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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우

<colcolor=#FFF><colbgcolor=#292929> 홍종우
洪鍾宇
파일:홍종우1.jpg
이름 <colbgcolor=#FFF,#191919>홍종우(洪鍾宇)
자 / 호 성숙(聲肅) / 우정(羽亭)
본관 남양 홍씨[1]
출생 1850년[2] ( 철종 원년) 11월 17일
경기도 안산군
사망 1913년 1월 2일 (향년 62세)
묘소 경기도 고양군 아현리[3]
국적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조선
소속 단체
[[황국협회|
황국협회
]]

1. 개요2. 생애
2.1. 초기 행적2.2. 프랑스 시절2.3. 김옥균을 죽이다2.4. 근왕주의적 근대화론자2.5. 만년
3. 평가4. 기타5. 대중매체에서6. 참고 문헌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조선 말기의 정치인이자 관료. 근왕 온건개화파[4] 계열로 분류된다.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었으며 대중적으로는 김옥균을 암살한 것으로 유명하다. 황국협회를 이끌며 독립협회와 대립했던 인물인데, 그렇다고 정치깡패 취급하기에는 정치적 식견이 가벼운 인물은 아니었다. 왕족인 창산군 이해창의 장인이다.

2. 생애

2.1. 초기 행적

1850년( 철종 원년) 11월 17일 경기도 안산군[5]에서 아버지 홍재원(洪在源)[6]과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남양 홍씨 남양군파 32세로 집안은 정치적으로 노론에 속했다. 흥선대원군 권력을 장악했을 때 영의정을 지낸 홍순목과 그의 아들이자 개화당의 핵심 인사였던 홍영식, 을사조약 때 자결한 홍만식 등이 바로 남양군파 벌족이었다. 그러나 홍종우는 벌족 집안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후일 프랑스 파리에 체류할 때 남양군파의 위세를 빌려 조선의 명문 귀족 행세를 하기도 했지만 그의 직계 가문은 이미 오래 전에 기울었다. 그 내막은 알 수 없지만 홍종우의 고조부로부터 그의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관직에 오른 사람은 1명도 없었다.[7]

몰락한 가문에서 출생한 홍종우는 어린 시절 빈곤하게 생활했으며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아버지를 따라 전라도의 고금도에 정착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1894년까지 이곳에 거주했다. 홍종우의 성장 과정은 자료가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고금도 연동리에 위치한 영모사(永慕詞)는 그의 성장 과정을 유추해볼 수 있는 단서이다.[8] 홍병례는 생전에 서당을 만들어 청소년들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아마도 홍종우는 그의 증조부 뻘인 홍병례에게서 교육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고 보면 홍종우 일가가 고금도로 이주한 이유도 홍병례와 무관하지 않을 듯 하다.

2.2. 프랑스 시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HongJongU.jpg
프랑스 유학 시절[9]

그러던 중 그는 메이지 유신이 프랑스 헌법을 모델로 했다는 것[10]이라 듣고 1890년부터 1893년까지 자비를 들여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다. 1886년 프랑스 유학을 결심하고 외무대신 김윤식이 발행한 여권을 가지고 1888년 도일하여 나가사키, 규슈, 오사카를 거쳐 도쿄에 도착했다. 그는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오사카 아사히신문 촉탁 식자공으로 일하며 일본어를 배우며 학비를 모았고 1890년 이타가키 다이스케 자유당 당수의 추천을 받아 프랑스 대통령 사디 카르노에게 보내는 추천장을 가지고 프랑스 유학을 가게 되었다.

1890년 12월 24일 파리에 도착한 그는 프랑스의 사회 지도층과 두루 교류하였으며 이때 '여행가의 모임'이라는 고급 사교 단체의 초청을 받아 조선의 역사와 현실에 대해 강연도 하는 등 인기 있는 한국인이었다고 하는데 복식은 늘 한복을 유지하고 흰 장갑만을 꼈다고 한다. 그러다가 자신의 후원자가 되는 펠릭스 레가미와 인연을 맺게 되는데 1892년 샤를르 바라 탐사단 수집품이 기메 박물관으로 이관되면서 펠릭스 레가미의 소개로 기메와 만난 홍종우는 연구 보조자로 채용되어 이를 장르별로 분류하고 프랑스어와 한국어로 유물 카드를 만들었는데 그의 노력으로 기메 박물관은 1893년부터 한국실을 개관했다. # 그는 기메 박물관에서 2년간 근무하였고 < 춘향전>, < 심청전>, <직성행년편람> 등의 한국 고전과 점성술 책을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점성술에 능해[11] 프랑스에서 그것에 대해 책으로 출간하여 유럽에서 또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 번역판 <춘향전>의 표지
홍종우가 프랑스에서 번역한 춘향전 번안명 <향기로운 봄(Printemps Parfumé, 프랭탕 파르퓌메)>.[12]

1892년 프랑스 소설가인 조제프앙리 로니(Joseph-Henry Rosny)가 번역하여 기욤 소 총서 가운데 1권으로 출판되었는데 삽화에 묘사되는 한복이 인도차이나 의상에 가까운 점이 이색적이다.[13] 1890년 12월 파리에 도착한 홍종우가 구술하고 조제프앙리 로니가 받아썼다는 점에서 홍종우가 실질적인 번역자의 역할을 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후원자 펠릭스 레가미는 이때 홍종우에 대해 크게 고평가했다.
홍종우는 학식 있고, 정력적인 사람이다. 가장 고결한 감정으로 고무되어 있는 것 같으며, 틀림없이 그는 제 나라의 일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맡도록 운명지어져 있으리라.
펠릭스 레가미: 정치적 암살자, 한국 학보, 240쪽

펠릭스 레가미 외에 다른 프랑스인들도 대체로 홍종우를 정력적이고 애국적인 사람으로 고평가했는데 이는 홍종우가 가지고 있던 조국 근대화의 야망 때문이었다. 홍종우는 유럽인들이 조선을 저열하게 바라보는 이유가 조선이 서양 문명과 접촉하려는 열의가 적었기 때문이라면서 자신의 일은 정치적, 지리적 관점에서 '유럽의 발칸반도'와 같은 조선을 유럽인들에게 보다 가깝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선조가 세운 정부 형태'를 고수할 것을 천명했는데 군주권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을 주장한 것. 그는 조선이 대대로 내려온 전제 왕정의 형태를 유지하며 유럽 문명을 도입하는 동도서기론을 주장했다. 홍종우의 근대화론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중국, 일본, 러시아로부터의 완전 독립.
2. 조선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려는 모든 세력의 척결
3. 유럽 문명의 도입을 통한 일본과 같은 근대화의 완성

2.3. 김옥균을 죽이다

파일:kmgykkn.jpg 파일:/img/img_link7/807/806799_1.jpg
일본에서 그린, 김옥균을 암살한 장면을 묘사한 그림

첫 번째 그림의 고화질 버전

김옥균의 목과 홍종우가 직접 쓴 글인 '대역부도옥균'[14]

1893년 7월 23일 홍종우는 프랑스를 떠나 조선으로의 귀국길에 올랐다. 그 후 그의 행방은 잠시 묘연한데 6개월이 지나서 그는 펠릭스 레가미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이 일본에 머물고 있으며 여독으로 오랫동안 누워 있었고 이 때문에 조선에 돌아가지 못했다면서 아내가 병사하여 괴롭기 때문에 한동안 더 일본에 머무를 것이란 신변에 대해 알려왔다. 1894년 홍종우는 민영소의 지시를 받고 김옥균을 암살하기 위해 일본에 왔던 이일직 일당과 만나게 된다. 본래 궁핍했던 홍종우는 유학 생활을 마치고 앞날이 막막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를 간파한 이일직이 장래를 보장해주겠다는 조건으로 홍종우를 포섭하였다. 여기서 왜 홍종우가 이일직의 보수 추천에 넘어갔는지에 대해서는 총 4가지 주장이 있다.
1. 출세하려고
2. 갑신정변 때 처형된 친족들의 명예를 회복하려고
3. 고종과 명성 황후의 직접 지시
4. 조선 근대화에 대한 의견 대립

개화파 측에서 주장하는게 1번인데 홍종우가 출세에 눈이 먼 소인배라서 김옥균을 죽였다는 것이고 이후 실제로 홍종우가 고위직을 두루 거쳤다는 것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동안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출세를 하려면 보통 조선에서 과거 시험을 보는 등 훨씬 간단하고 현실적인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다 건너 외국에 유학하기 위해 몇 년간 일본에서 일을 하며 을 벌었고 프랑스로 건너 가서도 단 하루도 빠짐없이 한복을 입고 지냈으며 그 나라의 문화를 익히고 배우고 왔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에 본인의 소신과 주관이 뚜렷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편하고 쉬운 출세[15] 길을 마다하고 지인없는 외국으로 건너가서 유학하고 거기서도 지식인으로 인정받았던 사람일진대 단순히 자신의 출세만을 위해서라고 보기는 무리가 있다. 1번 견해는 일본에서 지일파였던 김옥균을 높이기 위해[16]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에서 수십 년간 홍종우를 깎아내리기 위해 음해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2번의 경우 그의 친족 홍영식이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일가가 작살났다는 점에서 나름 신빙성이 있다 하겠다. 하지만 3번의 경우 일본인 소설가 아오야기 미도리 등의 주장인데 홍종우가 조선에 귀국한 적도 없다는 것은 둘째치고 어디까지나 소설에서 나온 주장이라서 근거가 부족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4번은 조재곤 등이 주장한 것인데 결정적인 것으로는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왜냐하면 당시 홍종우와 김옥균의 사상은 서로를 죽여야겠다고 생각할만큼 충돌하는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옥균은 이미 일본에서 찬밥 신세가 돼서 자신이 증오하던 청나라 이홍장까지 찾아갔다는 시점에 홍종우가 이념 대립 때문에 그를 굳이 찾아가서 죽일 이유가 있는지는 회의적이라 하겠다. 다만 개화파의 상징적 존재로서의 김옥균의 위상을 생각하면 개화파가 틀렸다는 의도에서 살해했을 가능성은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1번과 2번의 혼합이 유력한 것으로 보지만 개화파들이 주장한 것처럼 '그가 소인배라 그렇다'라는 주장이 무분별하게 수용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홍종우는 이일직과 함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에게 접근해 자신이 죽은 홍영식과 같은 집안이며 조선 조정이 자신의 어머니를 죽였고 아버지는 외딴 섬에 숨어 있으며 자신도 살기 위해 일본으로 망명한 사람이라 주장했다. 조선은 그 세가 약해 외병을 당할 수 없으니 장안으로 쳐들어가 진멸권귀, 개화보신, 부귀쌍전, 명전후세, 입기강, 통설갑신지분을 해야 한다고 하며 김옥균의 환심을 샀고 마침 김옥균이 이홍장과 담판을 지을 생각을 하고 있던걸 알고 민영소로부터 막대한 공작금을 받았던 이일직의 재력을 통해 김옥균의 상하이 행을 주선하였다. 그리하여 홍종우는 김옥균과 함께 1894년 상하이로 향했고 3월 28일 상하이 미국 조계의 일본인 요시지마 소유의 동화양행에서 김옥균을 암살하였다. 김옥균을 저격하기 직전에 1가지 흥미로운 행동을 하는데 김옥균을 만날 무렵부터 입고 다니던 양복을 벗고 갓과 도포로 갈아입었다. 홍종우는 직후 청나라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청나라 신문에 김옥균을 1. 갑신정변에서 죄없는 사람들을 많이 죽인 죄, 2. 국왕을 선동하여 나라를 혼란케 하고 국왕을 고통에 빠뜨린 죄, 3. 외국 군대를 이끌고 궁중에 들어온 죄, 4. 조선, 청나라, 일본의 국제 관계에 큰 해를 끼친 죄가 있어 죽였다고 밝혔다. 여기서 홍종우의 김옥균 암살 동기 4번이 충족되는데 홍종우는 김옥균 식의 외세를 끌어들이는 급진 쿠데타 아시아의 균형을 파괴하고 왕실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일로 부정적으로 바라봤던 것이다. 이후 조선 정부가 이홍장과 접촉하여 홍종우는 풀려나 귀국하였고 고종, 명성황후 갑신정변에서 살해당한 민태호, 민영목, 한규직, 이조연, 윤태준, 조영하의 가족들에게 원수를 갚아준 것에 대해 초대받아 성대한 환영을 받았지만 홍종우는 이들의 환대를 거절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의 형세대로 말한다면 어쨌든 제공(諸公)에 대신해서 원수를 토멸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생(홍종우)의 본지는 결코 제공의 사적을 토멸한 것에 있지 않음은 물론이고 또한 다만 갑신의 역적이고 국가의 공적이기 때문만 아니라 그의 생조는 조•청•일 3국의 화맹을 방해하고 혹은 일전한다면 동양 전국의 난계도 헤쳐 나갈 수 없는 우려가 있다.(그래서 죽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겸양 태도에 민영소와 홍종우로서는 김옥균을 살해하는게 사심이 아닌 대의로 포장할 필요가 있기에 걸러서 볼 필요가 있다. 그러다가 1894년(고종 31) 조선시대 마지막 과거 시험이 되는 그해 식년시 문과에 병과 10위로 특별히 급제하였고 병과 10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정5품인 홍문관 교리가 되는 특혜를 입었다.[17]

2.4. 근왕주의적 근대화론자

이후 홍종우는 '내정 간섭 불용론'을 내세우며 주체적 근대화 및 황실의 권위 회복을 목적으로 행정 실무 등에 종사했고 고종에게 7차례 상소를 올려 개혁을 주장했는데 상소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한로은행 설치 반대
2. 외상의 도성 개잔과 내지행상 반대
3. 절영도 석탄고 조차 및 광산 이권 양도 반대
4. 조선 연해 어업 및 홍삼 사매에 대한 반대
5. 방곡령 실시
6. 광무 연호 주조
7. 관독상판형 보호 상업주의 실시
8. 군주권의 절대화
9. 군권의 확립 및 군사권 간섭 반대
10. 고문관과 각국 공사의 내정 간섭 반대
11. 민선 의원 설립

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열강의 이권 침탈 및 간섭 반대 + 국가 재정 확충 및 조선 상업계의 보호를 위한 보호 상업주의 실시 + 군주권 확립과 정부 자립 + 이를 보조하는 개혁 정책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궁내부 외사과장, 평리원 재판장, 중추원 의관, 비서원승 겸 태의원 소경 등을 두루 거치며 정력적으로 활동했으나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부터는 독립협회와의 충돌로 활동이 주춤해졌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홍종우와 같은 황실파 관료들의 계획은 황제권을 바탕으로 개혁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는데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이 이어지면서 황실의 권위는 실추되어 있었고 대한청년애국회 사건 등 각종 반역과 쿠데타 음모들이 적발되면서 애로 사항이 꽃피었다. 이 때문에 홍종우 등은 황제권의 절대화를 시도하였는데 민권 운동을 벌이던 독립협회와의 충돌은 필연적이 되었다.

홍종우 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가 바로 황국협회이다. 황국협회는 1898년 6월 30일 전국적 규모의 상단 부활을 주장하던 보부상들을 중심으로 창설되었는데 여기에 고영근[18], 이기동, 홍종우, 길영수 등의 황실파 관료들 및 정부 고관, 허위, 민용호, 심상희, 김홍제, 이상천, 황보연, 채광묵 등의 의병장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이들은 7월 7일의 발회식에서 "농상공의 실업읠 주의"로 하며 "나라를 문명부강케하는 도리는 황실을 존숭하고 충군하는 대의를 밝힌다."라는 입장을 천명했다. 이에 황실이 직접 간부를 칙임하고 활동비를 하사하는 등 적극 지원에 나섰으며 이들은 개국 기원절, 계천 기원절(고종 즉위일), 만수성절(고종의 생일) 등에서 애국 집회를 자주 행하였고 독립신문에 따르면 규칙과 절차가 있어 사람들이 칭찬을 하였다 한다. 황실을 높이는 집회를 여니 황실 안에서도 흡족해한 것은 당연했다. 사실 황국협회나 독립협회나 모두 황제 중심의 군주제를 인정하는 단체였지만 의견 충돌이 컸다. 독립협회는 일정한 위치에 오른 사람들 중심의 상원 의회 중심의 정치 체제를 주장했지만 황국협회는 민선 의원 설치를 주장했던 홍종우를 비롯하여 모든 계층의 사람이 참여하는 하원 의회 중심 정치 체제를 주장하였다. 물론 고종은 상원이고 하원이고 다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으나 고종과 황실은 황실파 관료들이 구상하던 군제 개편, 군관 양성, 재정 안정, 황제권 강화에 도움이 되는 황국협회와 이해 관계의 일치를 보아 이들과 협력했다. 보부상의 준군사 조직화는 병인양요를 겪은 흥선대원군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조치다. 따라서 근대적 경찰 제도가 도입된 후에도 통제가 안되는 시골에는 보부상들이 실질적으로 지방군과 연합해 치안 활동을 전개했으며 나라의 유사시나 정부가 필요할 때 보호 황실을 목표로 적극 참여하기로 약조가 되어 있었다.

1898년 11월 고종이 독립협회를 자신의 군주권 자체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인식하고[19]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탄압하는 계엄정국이 열렸다. 고종은 처음에 공권력을 동원한 해산을 시도했으나 각국 공사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보부상들을 대거 동원하였다. 1898년 11월 21일 홍종우와 길영수가 이끄는 2천여 명에 달하는 보부상을 몽둥이로 무장시켜 만민공동회를 습격해 닥치는대로 폭력을 행사해 참가한 인원들을 해산시켰고 11월 22일 마포 나루에서 난투극을 벌여 만민공동회에 참여했던 상인 김덕구가 사망하고 20여 명이 부상을 당하는 참사까지 벌어졌으며 이에 분노한 군중들이 쏟아져 나와 황국협회를 습격하고 홍종우 등의 집을 파괴하기도 하였다. 결국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하기로 마음먹은 고종이 군대를 동원하고 황국협회가 합세하여 함께 만민공동회를 무력 해산시켰는데 황국협회도 같이 해산된다. 이후 홍종우는 입헌군주제를 위해 고종의 양위를 주장하던 이승만을 체포한 뒤 종신형을 선고한다. 이 때의 일에 대해 이승만은 그의 자서전에서 '홍종우가 자신을 구했다'고 회고하고 있다.[20]

2.5. 만년

홍종우는 1903년 제주목사가 되었다가 1905년에 해임되었고 이것으로 공식 기록에서 사라진다.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어 각종 설만 난무하는데 예를 들어 홍종우가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를 반대하다가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없다.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는 독립협회도 해산되기 이전인 1897년이고 거문도 사건과 연계되어 있기에 홍종우를 좌천시킬 근거는 되지 못했다. 반면 홍종우가 제주목사로 부임한 것은 러일전쟁이 터지기 직전인 1903년이다. 그나마도 홍종우는 제주도에 연고가 있었으며 대한제국 시기에도 신병을 이유로 물러나겠다는 상소를 계속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홍종우가 정말로 좌천되었는지도 의문이다. 1909년 젊은 시절 활동했던 프랑스로 갔다는 기록도 있지만 더이상 예전의 활동을 하지 못하고 얼마 안가 귀국해 전라남도 무안군에서 칩거하였다. 이후 홍종우는 곤궁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한일합방 이후인 1913년 사망하였다.

3. 평가

오랫동안 홍종우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가 죽인 김옥균이 이후 풍운아로 한일 할 것 없이 널리 이름을 얻었기 때문에 홍종우는 개인 홍종우로 주목되지 않고 오로지 김옥균 암살범 홍종우만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했다.

일제가 김옥균을 신격화하는데 열을 올리는 동안 홍종우는 아예 무시당하거나 위대한 개혁가요 사상가인 김옥균을 암살한 저열한 반동 인물로 줄기차게 폄하되어 왔고 이러한 평가는 조선을 '족장이 다스리는 야만 왕국, 무능한 국왕과 관료들 때문에 안에서 무너지며 해외의 침탈로 밖에서 무너지는데도 자기들끼리 싸움만 하는 열등한 국가'로 평하며 일제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움직임에서 주로 나온 것이었으며 이것은 비열한 홍종우와 위대한 김옥균이라는 이분법적 시각을 창출했다. 이러한 인식은 해방 후에도 오종섭 등에 의해 계승되었는데 학계에선 홍종우라는 인물에 대해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아 홍종우에 대한 평가는 '관직과 출세를 위한 기회주의자' 정도로 부정적으로 남았다.

그러다가 1970년대 서울대학교 김윤식 교수가 그의 프랑스 시절 행보에 대해 발굴하면서부터 홍종우는 조명되기 시작했으나 이러한 조명의 움직임도 김옥균 암살 이후의 홍종우의 모습은 배제된채 춘향전을 번역한 홍종우의 모습에만 집중이 되었다. 본격적인 홍종우에 대한 재평가의 움직임은 1992년 조재곤이 홍종우 재조명 논문을 내놓으면서 시작되었는데, 홍종우를 김옥균에 대비되는 사상가요, 나름의 근대화 철학을 가지고 있던 인물로 우호적인 평가를 내렸다. 조재곤은 홍종우의 김옥균 암살도 오로지 사상 대립 때문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학계 내부에서도 빈곤하고 역적으로 몰린 집안 사정 등이 주고 사상 대립은 부차적인 것이란 반박이 있다.

적어도 전처럼 그를 저열하고 비열한 소인배로 보는 시각은 사실상 사라진 상태다. 조재곤은 그를 근대화의 또 하나의 희망 정도로 고평가하는 수준이고 그가 전처럼 수구파의 하수인이 아닌 나름의 신념을 가진 황실 중심의 근대화론자였다는 평가에 무게가 실리는 편이다.

4. 기타

5. 대중매체에서

6. 참고 문헌

7. 관련 문서


[1] 당홍계-남양군파 32세 종(鍾) 항렬. [2] 1853년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3] 現 서울특별시 중구 만리동 [4] 군주제 유지, 동도서기 [5] 지금의 안산시, 시흥시, 화성시 일부에 위치하였던 조선 시대의 행정 구역으로 현 안산시와는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6] 생몰년도: 1827년 ~ 1898년 [7] 조부의 이름은 홍치섭(洪致燮)이다. [8] 영모사는 홍병례(洪秉禮)와 그의 제자였던 윤세용, 배학연을 추모하기 위해 지역 주민들이 만든 사당이다. 홍병례는 1811년 홍경래의 난에 연루돼 이곳으로 유배되었고 1864년 귀양에서 풀려났으나 이곳에 계속 거주하다가 사망했다. [9] 한복에 흰 서양식 장갑을 낀 모습이 이질적이다. [10] 실제로는 이토 히로부미 독일 유학을 갔다온 뒤 독일의 입헌주의를 기반으로 일본 제국 헌법을 제정했다. [11] 너무 점성술에 열심이었던 나머지 아버지가 책을 불에 태우기까지 했다고 한다. [12] '춘향(春香)'의 한자 의미 그대로 '향(香)기로운 봄(春)'으로 풀이한 것. [13] 이는 당시 프랑스인들에게 친숙했던 아시아 유교 국가의 이미지라고는 당시 프랑스가 이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던 중국이나 베트남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14] 아주 오래된 흑백사진이지만 잘린 목이 걸려있는 모습이라 사람에 따라 무섭거나 불쾌할 수도 있으므로 링크로 대체한다. [15] 김옥균 암살 만큼의 승진 가도는 아닐지언정 [16] 한국에서는 친일파 매국노로 인식되는데 김옥균은 매국 행위를 한 적이 없고 조선의 개혁을 위해 일본을 이용하려 한 것이므로 지일파로 봐야 한다. 다만 자국의 개혁을 계획하면서 타국을 너무 믿었다는 점은 옹호하기 어려운 실수. [17] 조선시대에 문과에 급제할 경우 아무리 장원 급제라도 종6품부터 시작하는게 관례였다. 때문에 종9품부터 시작해야 할 병과 10위가 급제하자마자 정5품의 관직을 받는건 과도한 특혜이다. 홍종우가 살해했던 김옥균은 장원 급제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는데 2년이 지나서야 홍문관 교리로 임명되었다. [18] 초기 황국협회에 포함되어 있던 고영근은 이후 이탈하여 독립협회에 가담했으며 독립협회 부회장을 거쳐서 만민공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단적으로 헌의 6조가 고영근이 발의한 것이며 중추원에 참여한 독립협회 몫 17인 가운데서 1인이기도 했다. 이 시기 대립 양상에서 고영근은 대표적인 독립협회 인사였으며 홍종우는 고영근과 윤치호를 죽여야 한다고 대놓고 주장하기도 했다. [19] 독립협회는 순수한 개혁 운동만이었던 것은 분명히 아니고 박영효 등의 권력 장악 도구로도 활용됐으며 박영효, 안경수, 정교인 계열의 권력 장악 운동 노선에서는 최종적인 고종의 권력 축출을 목표로 했다. [20] 홍종우가 이승만의 아버지에게 '아들은 살 것'이라고 귀띔해주었다고 한다. 반면 함께 잡혔다가 이승만에게 를 뒤집어 씌우려고 했던 최정식은 목이 달아났다. # 종신형과 함께 선고된 태형 100대도 형리가 때리는 시늉만 했다는데 홍종우의 안배가 있었던 듯 하다. [21] 라고 알려져 있는데 궁녀인지 관기인지 의문. [22] 혹은 리진 또는 이화심 [23] 흔히 알려진 이야기는 대부분 소설의 내용을 따른 것인데 이를 다룬 소설이 두 종류[24]라서 이름부터 통일이 안되고 있을 정도로 확실하지 않다. 이 이야기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은 차치하고 이 이야기를 긍정하는 입장에서도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었다 외에는 근거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추정과 추정으로 대립하는 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