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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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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체 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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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체 CI
<colbgcolor=#0B4DA2><colcolor=#fff> 설립일 1947년 5월 25일[1]
국가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사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194[2]
창업주 정주영
회장 현정은
유형 중견기업[3]
링크 파일:현대그룹 로고.svg

1. 개요2. 역사
2.1. 자수성가형 재벌2.2. 20세기 대한민국 최고 재벌2.3. 정주영의 대선 패배, 왕자의 난, 공중 분해
3. 역대 로고 및 심볼4. 역대 임원5. 역대 슬로건6. 기업 문화
6.1. 노조 문화
6.1.1. 정규직 노조에 대한 비판
7. 기업 정신
7.1. 사훈7.2. 미래 비전 (2010~ )7.3. 사가
8. 대북 사업9. 영문 명칭10. 여담11. 오너 일가
11.1. 범현대가 직계 기업 집단11.2. 방계 기업 집단11.3. 해산/분리 계열사11.4. 스포츠단11.5. 지분 관계사
12. 명칭이 유사하지만 무관한 기업13. 대중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꿈과 희망의 현대
긍정[4]
대한민국의 기업집단으로, 창업주는 아산 정주영이다. 계열 분리가 이루어진 이후 "현대그룹"이라고 하면 분리된 기업 집단 가운데 5남 정몽헌이 물려받아 현재는 부인 현정은이 이끄는 집단만을 이르는 말이다. 참고로 정몽헌은 정주영이 직접 지목한 후계자 이었다.

과거 현대그룹에 속한 기업 집단을 통칭 범현대가로 부르며, 여기에는 정주영 생전에 현대그룹으로부터 독립한 기업 집단도 포함된다. 2010년 이후로도 자산기준 10대 기업 집단에 현대자동차그룹 HD현대가 올라 있으며 현대백화점그룹, HDC그룹이 대기업 기준의 순위에 있다는 점에서 과거 현대그룹의 위상을 조금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다.

2. 역사

2.1. 자수성가형 재벌

파일:현대토건사 창업.jpg
1947년 현대토건사를 창업
1976년에 제작된 그룹 PR

라이벌 삼성그룹이 조상 때부터 지역에서 나름대로 재력을 축적하고 있던 가문[5]에서 출발한 데 반해 현대그룹은 정주영의 집안이 지지리도 못 살던 빈농이었고 정주영 스스로도 소학교만 졸업하고 농사를 짓다가 부모 몰래 소 판 돈 들고 가출하여 세운[6] 자수성가형 기업으로 유명하다.

1947년 현대토건사를 세워 1950년에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합친 뒤 주식회사로 개편했고, 같은 해 현대상운을 세워 사업 확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1962년 충북 단양에 시멘트공장을 세우고 현대양행까지 세웠다.

해방 전쟁을 겪으며 수없는 기업들이 흥망을 거듭하는 와중에 현대는 건설업을 중심으로 미군이나 정부의 수주를 받으며 사세를 꾸준히 키워나갔고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1967년 현대자동차, 1972년 현대조선중공업 경상남도 울산시에 각각 세워 자동차 조선업에 진입해 중화학 드라이브를 선도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 집단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현대가 공장을 울산에 세움으로써 그저 평범한 도시였던 울산은 대한민국 제7의 도시이자 한반도 최대의 조선소가 위치한 최대의 공업도시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현대가 없었으면 지금의 울산광역시도 없었다. 현대가 울산을 만들었고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외에 1971년 금강개발산업을 세워 관광 등 서비스사업에도 진출했고, 1977년 국일증권을 인수해 금융업에도 손을 뻗었다. 1979년 그룹 참모조직 '종합기획실'도 발족했다.

2.2. 20세기 대한민국 최고 재벌

리즈 시절이던 1995년에 제작된 그룹 PR[7]

21세기 이후의 한국에서는 삼성이 규모에서나 영향력에서나 압도적인 지위를 갖지만 1970년대 후반 중동 건설붐 이후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대한민국 최대의 기업 집단은 현대그룹이었다. 간단히 말해 현대가 재계 서열 1위였을 당시 한국 내에서 현대의 위상은 현재의 삼성 이상이었다.

삼성과 현대의 관계는 1970년대까지는 우호적이었다. 유통(백화점), 식품, 전자, 무역, 화학 등 경공업이 주력 업종이던 삼성과 달리 현대는 건설, 자동차, 조선 등 중공업이 주력 업종이기에 경쟁하는 분야가 없었다.

그러나 1979년 현대문화신문- 중앙일보 매스컴 전쟁부터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특히 1980년대 이후 현대가 전자, 백화점, 석유화학에 진출하고, 삼성은 중공업, 건설에 뛰어들면서 둘 사이의 경쟁이 치열해진다. 두 그룹의 사업분야가 사실상 똑같아진 것이다. 게다가 현대는 중앙일보를 견제한다고 문화일보를 만들기도 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까지 매출액, 자산 등에서 밀리던 삼성이 그 차이를 뒤집기 위해서 반도체에서 거둔 수익으로 삼성자동차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시중에 떠돈 적도 있다.[8]

다만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이미 삼성은 1960년대부터 계열사 총 자산에서 현대를 앞섰고[9] 오히려 1990년대에 현대가 이를 추월했다가[10] 정주영 사후 삼성이 다시 탈환한 바 있다.[11]

2.3. 정주영의 대선 패배, 왕자의 난, 공중 분해

정주영이 1992년 대선에서 패한 후, 이듬해 출범한 김영삼 문민정부는 1995년까지 현대에 '자금 압박'이란 정치 보복을 가해 위기로 몰아넣는다. 그 상태로 1995년 말 정기인사 때 동생 정세영이 현대자동차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자 차남 정몽구가 그룹 회장을, 5남 정몽헌이 그룹 부회장을 각각 맡아 2세 경영체제로 들어섰다.

그러나 1997년 IMF 사태를 전후하여 상당수 계열사가 위기에 처했다.[12] 1998년부터 그룹 회장제와 종합기획실, 문화실을 경영자협의회와 구조조정협의회, PR사업본부로 각각 개편해 정몽구/몽헌 형제가 공동의장을 맡도록 했고, 같은 해 정주영이 소떼 1만 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넘으면서 금강산 관광 성사의 계기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대북 사업에도 박차를 가해 이미지 전환을 꾀하려 했다.

위와 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내부에서는 2세 승계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아 2000년에 소위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위기를 맞게 되고, 결국 정주영이 은퇴하고 2001년에 숨을 거두면서 완전히 분해되는 운명을 겪었다.[13]

사실 한국 재벌의 역사에서 이런 식으로 자식 세대에서 기업을 나눠가지는 ' 분봉' 관행은 딱히 보기 드문 일은 아니다. 삼성 역시 CJ그룹 신세계그룹 등을 분리시켰으며, GS그룹 LS그룹 등이 분리된 LG을 비롯한 여러 재벌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다만 현대그룹의 경우 분열 과정이 워낙 극적이고 다툼이 많았으며, 한꺼번에 서너개의 그룹으로 분열이 이루어졌다.

정몽헌이 이끄는 현대그룹은 2001년 현대전자 현대건설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재계순위 10위권 밖으로 규모가 축소되었다. 정몽헌 회장은 2003년 대북송금 사건으로 수사를 받던 중 자살하였고, 그의 사후에도 현정은 회장이 의욕적으로 계속 추진한 대북 사업은 2008년 이후 남북관계 악화와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으로 금강산이 막히면서 사실상 엎어져 버렸다. 2010년 채권단이 현대건설을 매물로 내놓자 인수전에 뛰어들었으나 자금조달 증빙 문제로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박탈당하고 결국 현대자동차그룹이 현대건설을 인수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대하면 현정은의 현대그룹이 아닌 정의선의 현대자동차그룹을 먼저 떠올리게 되었다.[14][15]

그 와중에 세계금융위기로 해운 업황이 악화되면서 2016년 현대증권을 포함한 현대저축은행·현대자산운용 등 금융 3사를 KB금융지주에 매각하고, 현대상선은 채권 출자전환으로 채권단에 넘어갔다. 결국 한때 재계 1위였던 현대그룹은 사실상 현대엘리베이터만 남게 되어 대규모 기업 집단의 기준인 자산 가치 5조원도 넘지 못하는 중견기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현대엘리베이터그룹이라고 불러도 이상할 것이 없는 수준이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대로 이미 정몽구의 현대자동차그룹이 기존 정주영의 현대 적통을 잇는다고 공공연하게 인식되어 왔기 때문에 현대그룹이 중견기업으로 밀려나는 초유의 사태도 별다른 이슈가 되지 못하고 묻혔다.

3. 역대 로고 및 심볼

파일:현대그룹 로고.svg
<rowcolor=#ffffff> 1957~
심벌마크는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2개의 정삼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각형은 인류 건축을 대표하는 이집트 피라미드를 형상화한 것이며, 황금색과 초록색은 새싹이 자라 녹음이 되듯 영원히 새롭게 번영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문이나 한글 로고가 없는 것은 아니나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주 로고는 한문이 들어간 로고다.
파일:현대 심볼(1957-1974).svg 파일:현대 심볼(1974-1984).png 파일:현대 심볼.svg
<rowcolor=#ffffff> 1957년 ~ 1974년 1974년 ~ 1984년 1984년 ~ 현재
1957년 제정된 심벌마크로 당시에는 심벌마크가 두껍게, 그리고 세로로 길게 그려졌다. 1974년에는 두꺼운 모양의 심벌마크가 얇은 정삼각형으로 변경되었다. 현재의 CI는 1984년에 심벌마크의 삼각형들의 위치를 조정하는 등의 수정을 거친 것으로, 뒤쪽 노란 세모의 아랫변이 앞쪽 초록색 세모의 변과 줄이 맞추었다.

4. 역대 임원

5. 역대 슬로건

6. 기업 문화

창업자가 맨손으로 일으킨 자수성가형 기업인데다 주력산업이 건설, 자동차, 조선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매우 진취적, 모험적이면서도 거칠고 남성적인 기업 문화로 이름이 높았다. 한국 경제의 "하면 된다" " 안 되면 되게 하라" 정신을 상징하는 기업이라고 보면 맞다. 물론 부작용도 고스란히 안고 가긴 했으며, 그 일부는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데... 일부 범현대가 그룹의 경우 군대식 "다나까"체 사용을 권장하며 상명하복을 강조하는 똥군기 문화를 아직도 지키는 경우가 많다.

6.1. 노조 문화

이러한 기업 문화적 특징 덕에 1987년 6월 항쟁 후 한국의 노동 운동이 끓어오르던 시기에 무노조이던(인천제철은 제외) 현대그룹 계열사는 가장 강력한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었고,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현대정공 등 울산에 자리잡은 현대그룹 노동조합들은 말 그대로 노동 운동의 아이콘이 되었다.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포함, 수만명이 지게차, 굴삭기, 덤프트럭 등 중장비들을 앞세우고 거리에 나섰고 이를 막던 경찰을 밀어내고 울산 시내로 진출한 일은 지금까지도 전설처럼 회자되며, 1990년 당시 '골리앗 투쟁'으로 알려진 겐트리 크레인 위 고공 농성도 유명하다. 사실상 현대그룹 노동조합들이 지금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을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년 무파업 기간 어용 노조로 전락했던 현대중공업 노조 역시 원래 엄청 강성 노조였다. 그러나 정몽준이 정치에 입문해 현대중공업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기면서, 본인의 정치인 이미지를 위해 "노조와 잘 지내라"는 부탁을 한 것이다. 그러자 전문경영인 지휘 하의 현대중공업 사측은 노조의 입장을 잘 들어주게 됐고, 현중 노조는 사측이 자기네 말하는 대로 다 들어주니 호혜적 관계에 물들어 이후 강성 노조 색채를 잃고 사실상 어용처럼 변질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대중공업 노조가 대표적인 무파업 노조로 알려질 정도로 물노조 소리를 들었는데, 2004년 하청 노동자 분신 자살 사건 당시 같은 노동자 편을 들지않고 사측 편을 드는 만행을 보이자 민주노총으로부터 제명을 당했고, 그 후 10여년 뒤 노조 집행부가 강성으로 바뀌고 나서야 재가입을 했다.

범현대가 기업들은 노동조합 다루는 기술이 유명하다. 조합과 대화와 타협, 협박과 회유를 적절히 섞어 대응하는 고단수 노조 운영을 하고, 필요하다면 언론플레이를 통한 여론몰이에도 능숙하다.[16] 따라서 세간에는, 현대가 노조 관련 문제에 대한 기술만은 삼성을 압도한다는 말이 있다. 삼성은 무노조 경영 원칙을 고수하여 노동 운동 자체를 강압적으로 억제하며 산재나 사고는 돈으로 회유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무노조 방침은 실정법에 위배되기 때문에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하며, 산재나 사고를 매번 돈으로 회유하기에는 비용이 많이 든다. 즉, 현대의 노조 대응이 더 세련되고 비용 대비 효과가 좋은 셈이다. 한편, 2020년 삼성에서 무노조 경영을 안 하겠다고 발표한 상태라 향후 어떨지는 두고 볼 일이다.

6.1.1. 정규직 노조에 대한 비판

노동자들의 임금이나 복지 수준이 말할 수 없이 향상된 지금의 현대자동차나 HD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대형 노동조합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 노동조합들이 같은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훨씬 열악한 처우를 받는 동료 노동자인 비정규직이나 사내 하청 노동자 등에 연대하지 못하고 그 자체로 기득권이 되었다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현대차의 경우 같은 작업 라인에서 일하는 데도 정규직과 사내 하청 비정규직 간의 임금 격차가 두 배까지 벌어진다. 정규직에게만 주어지는 각종 복지 혜택을 감안한다면 더욱 더 차이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규직 노조는 사내 하청 비정규직 노조와 연대함이 응당한데, 그렇지 하지 못하고 오히려 견제를 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물론,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동등하게 여기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현대자동차나 HD현대중공업의 생산직 정직원으로 들어가기는 무척이나 어렵다. 전국 각 지역 전문계 고등학교에서 최상위 성적이어야 하고, 여러 관련 국가 공인자격증, 철저한 신체 검사에 합격할 건강한 신체를 가져야 한다.

7. 기업 정신

7.1. 사훈

근면, 검소, 친애

7.2. 미래 비전 (2010~ )

꿈과 희망을 향한 도전과 창조적 예지로 풍요로운 내일을 창조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현대
고객 행복 경영, 가치 창조 경영, 사회 친화 경영

7.3. 사가


작사는 조지훈, 작곡은 김동진이 맡았으며, 현대그룹에서 분리된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도 같은 가사의 사가를 부른다. 다만 중간에 회사명이 들어가는 부분을 다르게 부르는 것이 현대그룹 사가와의 차이다.
보아라 하늘 높이 치솟는 꿈을 / 들어라 젊은 가슴 힘찬 고동을
일하는 기쁨은 우리의 보람 / 바친다 이 정성을 조국건설에[17]
현대그룹[18] 현대그룹 굳건한 이름 / 현대를 건설하자 우리 현대그룹으로

8. 대북 사업

창업주 정주영의 고향이 휴전선 이북의 강원도 통천군인 관계로, 정주영 생전부터 대북사업에 큰 관심을 보여왔다. 관련 기사 소떼 방북으로 유명한 1998년의 소떼 지원은 남북 모두에서 큰 화제가 되었으며, 금강산/개성 관광 사업 등 남북간의 정치, 경제적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데 현대그룹이 기여한 바는 항목 하나로 정리하기 어려울만큼 지대하다.

정주영이 사실상 장남 정몽구를 제치고 정몽헌을 후계자로 지명한 것도 정몽구가 대북 사업에 미온적이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을 정도였다. 정몽헌이 자살한 뒤 회장직을 계승한 아내 현정은 역시 대북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정주영 사후 현대그룹이 산산조각난 뒤 이명박 정부에서 금강산 관광 중단, 박근혜 정부에서 개성공단 중단이 이루어지는 등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현대아산이 주도하던 대북 사업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9. 영문 명칭

현재 공식적인 로마자 표기법에 따르면 '현대'는 HYEONDAE가 된다. 그럼에도 영문 표기가 HYUNDAI인 이유는 과거에는 영문 표기법이 정립되기 전이라[19] '대'자의 영문 표기법이 'DAE'와 'DAI'가 혼용되었기 때문이다. 훗날 'DAE'로 결정된 뒤에는 이미 수십년간 표기가 굳어져왔기 때문에 이제 와서 이름을 바꾸기엔 리스크가 있어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20]

여담으로 이 명칭에 대해서 일본 그룹처럼 보이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루머가 있다. 하지만 현대라는 명칭은 1947년에 처음 쓰였고, 현대자동차의 설립은 1967년이다. 그리고, 미국 시장 진출은 1985년임을 고려하면 일부러 노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절대 다수의 외국인들은 일본어의 ‘대’ 혹은 ‘다이’ 발음 존재 유무에 대해서 전혀 알지도 못하며, 현대가 현다이가 된다고 해서 갑자기 일본 기업 이름처럼 들린다고 생각하는 외국인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현다이가 일본어처럼 들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전세계에 한국인밖에 없다.

결정적으로, 일본의 자동차 회사 혼다(1948년)는 현대그룹(1947년)보다 1년 늦게 창업했다. 따라서 Hyundai의 표기가 일본식 표기의 잔재라고 말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외국인들에게 일본 기업처럼 보이려고 이름을 Hyundai로 정했다는 주장은 억지에 가깝다. 또한 현대자동차 광고를 보면 Hyundai의 발음이 '현다이'가 아니라 '헌대이'[21]라고 정정해 알려주기까지 한다. 실제로 북미에서 현재 가장 보편적인 Hyundai 발음은 ‘헌대이’이다.

영국에서는 미국만큼 홍보가 널리 이루어지지 못한 탓에 '현다이'를 넘어 하이언다이로 발음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이들은 영단어나 라틴어를 (영어식으로) 읽을 때 늘상 음절 구분을 하던 대로 Hy-un-dai로 끊어서 읽기 때문이다. 타국 문화에 별 관심이 없는 영국인들 중에서는 미국인이 y발음을 무시하고 발음한다면서 '교양이 없다'고 여기는 이들까지 있다. 혹은 원어와 어긋남을 알면서도 '영국에서 이미 그렇게 널리 사용되니까 굳이 고치려 들지 마라'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일본을 포함한 몇몇 국가들은 글자 그대로 읽은 휸다이로 읽히는 일도 부지기수라고 한다. 현재, 현대자동차 일본지사는 'ヒョンデ(현대)'로 표기하며, 현재는 현대로 읽는 추세이지만, 일본 시장에 처음 진출했을 때는 대부분 휸다이로 읽혀[22], 연배가 있는 일본인들은 휸다이로 읽고, 부르기도 한다. 중고차 검색 사이트에서도 휸다이로 찾아야 나올 정도.

10. 여담

이명박이 현대건설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20대 부장, 30대 사장, 40대 회장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친 화려한 이력을 바탕으로 정계에 진출한 바 있다. 샐러리맨 신화의 대표격 인물. 그러나 정주영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면서 대선에 출마할 당시 이명박은 민주자유당에 입당하면서 둘 사이는 갈라졌다.

각종 국제대회를 대한민국으로 끌어오게 하는 건 현대측 인사들이 아주 도가 텄다. 가까운 예시로 정주영은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에 성공했고 정몽준은 2002년 한일 월드컵, 정몽구는 2012 여수 엑스포를 유치시켰다. 현대건설 출신의 이명박도 대통령 임기 동안 2012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2010 G20 서울 정상회의를 유치했다.

특히 2002년 월드컵과 관련하여, 일본이 1980년대부터 차근차근 월드컵을 유치할 전초전을 벌였는데, 1990년에 갑자기 현대가 "아 우리도 이제 월드컵 개최하자"는 말과 함께 한일 공동개최를 만들어 버렸다. 공동개최를 이끌어낸 실적은 높이 평가해야 하고, 실제로 2002년 월드컵 개최지를 발표할 때 이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본축구협회장이 넋이 나간 상태로 있었는데 정몽준이 억지로 손을 잡아 같이 손을 올리기도 했다. 한국 축구 분야에 엄청난 기여를 했으며 다른 분야에서도 무시하지 못할 성과를 올렸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또한 현대가는 세계 유수 싱크탱크들과 어깨를 겨루는 정책연구소를 길러내보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정주영부터가 세종연구소의 모태인 일해재단 이사장을 맡기도 했으며, 그의 아들들인 정몽준은 2008년 아산정책연구원[23]을, 정몽구는 2011년 동아시아재단을 각각 설립하고 투자도 많이 했다. 이들 모두 한국에서 지명도가 높은 싱크탱크들이 되었는데, 그 덕에 한반도 관련 각종 정치전략 관련 보고서들 중에 현대가가 관여한 연구소 손을 안거치는게 없을 정도. 여기에 한술 더 떠 정몽구는 2016년 '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에서 전경련 해체 여부에 대한 질문을 받고 "전경련이 미국의 '헤리티지 재단'처럼 연구 중심 싱크탱크로 변모해야 한다"[24]는 제언을 하기도 했다.

1995년 현대방송을 개국한 이래 케이블방송 사업에도 진출했다. 같은 시기 KM뮤직(구 현대음향) 계열 KMTV에도 자본 등의 지원을 했으나 1999년에 HBS를 넥스트미디어그룹으로 넘겼고, 2000년에는 현대오토넷을 통해 KMTV를 직접 운영하다 이듬해 대영에이브이로 넘겼다. 그런 연유로 채널CGV와 KM으로 각각 따로 분리되었다. 이후 이 두 채널이 다시 CJ미디어 산하로 들어갔다가 2015년에 다시 분리되었다.

사족으로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의 퇴직금을 지급한 곳이 현대그룹이다. 2000년 정주영의 퇴직금이 그것인데, 현대그룹 24개 계열사에서 총 217억이 지급되었다. 그 이전의 기록은 1999년 당시 현대자동차 회장을 퇴임한 정세영이 지급받은 50억, 1995년 구자경의 퇴임 시 LG화학에서 지급한 20억 등이다.

본래 재벌 총수들은 퇴직금의 지급을 사양하는 경우가 많은데 회사 사정에도 부담이 되고 부정적 여론도 들끓기 때문이다. 근데 심지어 당시 산업은행으로부터 4,000여억 원을 지원받는 등 현대건설의 재무상황이 좋지 않은 와중에 이만한 금액의 퇴직금을 받았다. 그리고 이 퇴직금은 이후 현대그룹 계열 분리 당시 현대자동차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던 MH를 지원하기 위해 기타 계열사 주식을 처분한 자금과 함께 현대자동차 주식의 매입에 사용되었으나, 현대건설이 부도위기에 처하자 모두 처분한 후 현대건설의 회사채 매입에 쓰였고, 회사채와 기타 지분을 매각한 자금이 출자전환과 유상증자에 투입되어 현대건설 주식으로 바뀌었다. 이 주식은 정주영의 사망 당시 현대건설에 증여되어 감자되었다.

현대라는 이름이 너무 단순하고 쉽게 떠올라서인지, 아니면 국내 굴지 기업의 이름을 따라 쓰고 싶은 것인지, 전국 각지에 현대의 이름을 사칭한 '현대슈퍼', '현대약품'[25], '현대병원'[26] 등 여러 업종의 '현대OO'가 전국에 넘쳐난다. 특히나 이들은 영문 표기마저 HYUNDAI라고 해놓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도호쿠, 홋카이도 지방에서도 '파칭코 현대(파칭코 겐다이)'가 1980년대 영업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사명(社名)을 <VEGAS VEGAS>로 변경하였다. 다만 현대라는 단어 자체가 보통명사이기에 무조건 현대그룹을 의식해 따라 썼다고 보긴 어렵다.

파일:attachment/Hdhq.jpg
1983년부터 소위 왕자의 난 때까지 옛 현대그룹의 본사였던 계동 사옥.[27] 원래 휘문고등학교가 있던 자리로, 휘문고가 강남으로 옮겨간 후 그 터에 지어졌다. 재미있는 것은 이 건물이 들어선 후 인근의 운현궁의 우물이 말라버렸다고 운현궁 투어 가이드하시는 분이 이야기하는데, 어쩌면 터파기를 하며 지하수맥을 건드린 것일 수도 있다.

현대차, 현대중공업 등이 분리되고 2004년까지는 이 사옥을 썼다. 계동 사옥이 지어지기 전에는 현대해상 사옥으로 불리는 광화문 사옥을 썼는데, 사옥 이전 이후 현대건설이 이 사옥을 팔아 현대해상이 매입하고 2004년에 리모델링했다.[28]

참고로 이 사옥과 똑같이 생긴 호텔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다. 호텔현대가 운영하는 호텔 점포인데 현대에서 계동 사옥을 참조해 만든 호텔이다. 이 호텔은 이후 호텔롯데에 매각되었다. 사실 전국에 산재한 80년대에 지어진 현대 관련 건물들 중 상당수는 계동 사옥을 본떠서 비슷하게 지어진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서울 동작구 현대차 대방동 사옥인데 계동 사옥을 1/3 크기로 뚝 잘라서 얹어놓은 모양이다.

파일:external/pds.joinsmsn.com/htm_2010111721293250005010-001.jpg
위는 현재의 현대그룹이 사들여 리모델링하고 2011년부터 본사로 쓰는 연지동 사옥.[29]

11. 오너 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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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범현대가 기업은 정주영의 동생 대("영"자 돌림)에 분가한 기업과 아들 대("몽"자 돌림)에 분가한 기업으로 분리하였다. 현재 크게 보면 10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있다. 2015년 기준 재계서열에 범현대 기업이 무려 7개가 있다. 물론 자산총액을 다 더해도 삼성그룹 하나에 못 미치는 함정.

범현대의 자산 및 매출 현황에 대해서는 이 기사를 참고하면 좋다.

아래 기업은 주요 계열사만 나열하였다.

11.1. 범현대가 직계 기업 집단

순서는 출생 순서

장남 정몽필은 1982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고[30], 4남 정몽우는 음독자살, 그 자식들 몫으로 현대비엔지스틸이 있다지만 이 회사는 지금 현대자동차그룹 소속이다. 막내(8남) 정몽일은 바로 윗형 정몽윤과 마찬가지로 금융 계열사를 받아 독립했으나 종합금융 사태 때 맛이 가면서 정몽준의 현대중공업그룹 우산 아래에 있으며 특별한 배려를 받았지만, 결국 경영에서 은퇴, 야인(野人)이 되었으나, 이후 현대중공업의 지주회사 전환과정에서 다시 현대기술투자를 받아 분가했다.

# 5남 정몽헌은 대북송금 사건에 연루되어 자살했으니[31] 8명의 아들에게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알뜰살뜰하게 챙겨주려던 정주영의 의도와는 별개로 정상적으로 기업을 승계한 아들은 절반에 불과한 셈이다.

11.1.1. 현대자동차그룹

파일:현대자동차그룹 로고.svg
범현대가 최대의 그룹이자, 실질적으로 정주영 시절의 현대를 잇는 그룹. 현대건설을 인수한 후 정통성까지 가지게 되었다.

11.1.2. 현대백화점그룹

파일:현대백화점그룹 로고.svg

11.1.3. 현대그룹

파일:현대그룹 로고.svg

11.1.4. HD현대

파일:HD현대 로고.svg
舊 현대중공업그룹.
지주사
조선·해양부문
에너지부문
기계·로봇 부문
기타서비스 부문

11.1.5. 현대해상화재보험그룹

파일:현대해상로고.png

11.1.6. 현대미래로그룹

11.2. 방계 기업 집단

11.2.1. HL그룹

파일:HL그룹 CI.svg
구 한라그룹.
첫째 동생 정인영 계열[39]. 현재 정인영의 차남 정몽원이 회장으로 있다.

11.2.2. HDC그룹

파일:HDC 로고.svg
넷째 동생 정세영 계열[40] 현재 장남 정몽규가 회장으로 있다.

11.2.3. 현대코퍼레이션그룹

파일:현대코퍼레이션 로고.svg
정주영의 형제 중 다섯째 정신영[43]의 아들 정몽혁 계열. 현대종합상사는 왕자의 난을 거치며 은행관리로 넘어간 것을 2009년에 현대중공업그룹에서 인수하여 정몽혁이 CEO로 임명되었고 이후 인수하여 2016년 계열분리하였다.

은행 관리 시절 사업 다각화를 위해 이것저것 손을 대었는데, 특기할만한 것으로 '청도현대조선'이 있다. 2005년 조선경기가 활황일 때 중국 칭다오의 '링산조선소'를 인수한 것으로 이후 조선해운경기가 침체되자 한해 200억의 손실을 내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이후 2015년 매각에 성공하였는데, 2,500만달러를 추가 투입하여 채무 상환에 사용하고, 보유지분 66.25%를 단돈 '1$'에 매각하였다. 그렇게 해서야 추가 손실이 없을거라고 증권사에서 호재라 평가했다는 후문이 있다.

그리고 위 현대오일뱅크항목에 기술된 바 있는 정몽혁이 2010년 현대종합상사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2014년 외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26세 아들을 법무팀 차장으로 입사시켰으며, 2015년 1월 1일자로 현대씨엔에프 부장으로 발령내어 빈축을 샀다.

정몽혁이 현대종합상사를 인수할 자금이 부족하여 독립할 가능성이 낮다고 점쳐졌으나, 2015년 현대종합상사의 사업 중 브랜드관리사업과 수입육유통사업만 현대씨엔에프로 분리시키고, 정몽혁이 현대씨엔에프를 인수 → 현대씨엔에프가 현대종합상사를 인수 하는 식으로 계열 분리를 이루었다.

11.2.4. KCC그룹

파일:KCC 로고.svg
정주영의 막내(여섯째) 동생 정상영 계열. 건축자재를 만드는 구 금강스레트공업과 도료를 만드는 고려화학으로 시작했으며 이후 합병하여 KCC건설과 함께 KCC그룹을 이룬다. 범현대가의 주력인 건설, 자동차, 중공업 등에 사용되는 각종 건축자재와 도료납품으로 성장했으며 현재 현대자동차 기아의 차량 유리도 여기서 생산한다.

11.2.5. 서한그룹

매제 김영주 계열. 김영주는 현대 창업의 1등 공신이자 정주영의 셋째 동생 정희영의 남편이다. 김영주 사후 현재 장남 김윤수가 회장이다. 한국프랜지그룹으로 알지만 홈페이지를 보면 서한그룹이다. 물론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자동차 부품사인 한국프랜지공업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11.2.6. 후성그룹

파일:후성그룹.png
매제 김영주의 차남 김근수 계열. 현대제철을 대상으로 내화물 제조 및 시공하는 한국내화를 시작으로 그룹이 성장했으며, 현재 한국내화 후성[44]이 그룹 전체 매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11.3. 해산/분리 계열사

11.4. 스포츠단

범현대가 스포츠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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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야구단 현대 유니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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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농구단 청주 현대 하이페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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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축구단 전북 현대 모터스
프로 축구단 인천 현대제철 레드엔젤스
프로 야구단 KIA 타이거즈
프로 농구단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프로 배구단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프로 배구단 수원 현대건설 힐스테이트
양궁단 현대제철 남자 양궁단
양궁단 현대모비스 여자 양궁단
럭비단 현대글로비스 럭비단
양궁단 현대백화점 여자 양궁단
탁구단 현대백화점 여자 탁구단
프로 축구단 울산 HD FC
실업 축구단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
프로 씨름단 현대 코끼리 씨름단
파일:현대해상 CI.svg 파일:HL그룹 CI.svg 파일:HDC 로고.svg 파일:KCC 로고.svg
실업 야구단 현대해상화재보험 야구단
테니스단 현대해상 남자 테니스단
아이스하키단 HL 안양 프로 축구단 부산 아이파크 프로 농구단 부산 KCC 이지스
핸드볼단 금강고려화학 여자 핸드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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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열 분리 당시의 명칭을 우선적으로 기술했다. 현존 스포츠단의 경우 강조 처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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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지분 관계사

12. 명칭이 유사하지만 무관한 기업

13. 대중 매체에서


[1] 현대그룹의 기반이 된 현대건설의 창업시점을 설립일로 삼는다. 일본의 혼다(本田, 1948년 9월 24일)와 영문명(HONDA)이 유사하다고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현대그룹의 설립일이 더 앞선다. [2] 현대그룹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삼성카드가 이 건물을 본사로 썼다. [3] 20세기말까지는 재계 서열 1위의 초대형 재벌이었지만 정주영 사후 계열 분리 과정을 거치면서 몸집이 크게 줄어 현재는 중견 기업이 되었다. [4] 현대그룹 광고를 보면 2007년부터 긍정이라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사실 '긍정적인 사고'는 창업주인 정주영 회장이 강조하던 덕목이기도 했다. [5] 호암 이병철의 집안은 경남 의령군 내에서 대대로 만석꾼 집안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시대적인 상황 때문에 사업을 2번 말아먹었다. [6] 돈 벌겠다고 가출해서 대도시로 상경한게 총 4번이다. 처음 2번은 다시 돌아갔고, 3번째에 소판 돈 훔쳐서 서울 상경 후 학원에 다니다가 다시 돌아간 후에 4번째 가출해서 서울로 올라간 다음 쌀집 배달꾼으로 취직한다. [7] 이 그룹 PR는 나이키의 1993년 광고를 표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8] 삼성자동차 설립은 현대를 의식했다기 보다는 이건희가 자동차 산업에 관심이 있던 것이 더 크다. [9] 1960년대에는 현대가 급성장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도 재계서열 1위를 차지하고 있던 삼성과 격차가 아주 큰 편이었다. [10] 1997년 외환 위기부터 대우그룹이 해체되기 전까지 삼성그룹 대우그룹한테도 순위가 밀렸던 적이 있다. 삼성그룹의 경우 외환위기 당시에 돈이 안된다고 판단한 사업체를 여러개 청산한 반면에 대우그룹은 그동안 몸집불리기를 시전했기 때문인데 대우의 몸집불리기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대우그룹은 망해버렸고 반대로 삼성은 애니콜이 잭팟을 터트리면서 승승장구를 거듭하게 되었기는 했지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현대그룹에게 밀렸던건 사실이다. [11] 이렇게 된 데에는 삼성이 이병철 사후 일찍부터 자녀들에게 계열분리를 한 것도 있다. 1991년 한솔그룹을 시작으로 새한, 중앙, 보광, CJ, 신세계그룹 등이 계열을 분리해 나갔다. 삼성이 당시 대우그룹한테도 규모가 밀렸던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대우는 무리한 확장으로 망했으며 현대 역시 2세 시대에 접어들어 계열분리가 실시되자 삼성과의 위치가 역전되었다. [12] 당시 현대그룹은 주요 계열사 중에 흑자를 내는 곳이 현대증권 뿐이었다. 삼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꽤 어려움에 처했으나 삼성자동차 르노에게 지분을 일부 넘겨주는 식으로 반 포기하는 선에서 그룹을 지킬 수 있었다. [13] 반면 이 시기 삼성은 삼성전자의 눈부신 성장에 힘입어 자타공인 대한민국의 원탑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물론 삼성 역시 2세 승계 과정에서 잡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 시점에서는 먼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다. [14] 그러나 현대건설 인수전 이전부터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하게 정몽구가 적통을 이었다고 인식되고 있었다. 현대건설을 인수하면서 공공연한 인식만이 아닌 명목상으로도 확실히 적통을 잇게 된 것이다. [15] 심지어 현대건설 직원들 대부분이 현대차그룹에 인수를 원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현대-기아차 임직원할인이 적용되어 차를 싸게 살 수 있게 될듯 해서였다(...). # 결국 현대건설이 현대차그룹에 인수되면서 현대건설 직원들의 염원은 이루어지게 되었다. [16] 울산 외 지역에서 현대차 노조에 대해 긍정적 감정을 가진 사람이 적고, 특히 조중동을 필두로 한 우익 언론의 독자 및 우파정당 지지자들 중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은 언론을 통한 여론몰이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준다. 오늘날 울산과 울산 외의 온도차는 1980년대 광주와 비 광주 사이의 인식차를 압도할 정도였다. [17] 현대백화점그룹 측은 '고객의 기쁨은 우리의 보람 / 바친다 이 정성을 고객감동에'로 부른다. [18]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백화점그룹 등은 각자의 모기업명을 넣어 부른다. 그러나 현백 측은 '맑은 마음 밝은 미소 행복한 생활 / 미래를 밝혀가자 현대백화점으로'라고 부른다. [19] 특히 현대가 설립된 1947년은 광복 후 아직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으로 일본식 표기의 잔재가 꽤 남아있었다. [20] 지금은 'ㅐ' 발음이 단모음이지만 200~300여 년 전, 19세기만해도 이중모음('아이'를 빨리 발음했으며 당장 형태가 ㅏ+ㅣ다.)이였기 때문에 그런 유래를 생각한 예전 사람들이 'ㅐ'를 AI로 표기한 것. 19세기 초반 이후엔 단모음으로 발음됐지만 당장 아펜젤러도 ' 배재'의 영문표기를 PAICHAI로 한 것을 보면 꽤나 이런 유래를 생각해 쓰는 사람이 많았다.(다만 이건 당시 국제공용어 프랑스어에서 ㅐ와 같은 발음인 'ɛ'를 'ai'라 적었던 걸 반영한 걸 수도 있다.) 참고로 해태의 영문명도 HAITAI이다. 현대그룹과 전혀 관계없는 현대교역(현대칼라 회사)은 HYONDAE를 썼다. 그나마 바꾼곳이라면 DAIWON 정도, 다만 이회사는 1974년도에 설립됐다. [21] 이 캠페인은 현대자동차가 1980년대 미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Hyundai'를 '현다이'라고 읽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이 경우 영어의 'die'(죽다)를 연상시켜 자동차 마케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원발음에 최대한 가깝게 읽도록 홍보한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에서 ' Hyundai like Sunday' 캠페인을 전개해 'dai' 부분을 'Sunday'의 'day' 부분과 같이 발음하라고 알려준 일화는 유명하다. [22] 굳이 일본뿐만이 아니라 마케팅에 힘을 쏟기 전에서는 휸다이, 히윤다이 등으로 읽혔다고 한다. [23] 정치인인 정몽준 본인의 정책/공약개발을 위한 측면도 있기는 했다. [24] 다만 헤리티지 재단은 태생부터가 강경보수, 신자유주의, 기독우파 옹호의 최일선에 서는 행동 조직이 있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정몽구의 설명과는 거리가 있다. 보수 정권과의 유착, 친기업 및 우파 행동주의적인 면으로 볼 때 오히려 전경련보다 더 문제시되는 자유기업원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25] 물파스 메이커 [26] 참고로 진짜 현대그룹 계열의 병원 이름은 현대가 아니라 아산의료원이다. [27] 2003년 이 건물 12층에 있는 회장실에서 정몽헌이 투신자살했다. [28] 여담으로 이 사옥이 건축가 김수근의 공간 사옥 바로 옆에 대궐만하게 지어져, 건축가들은 계동 사옥을 깐다고 한다. 2001년에 현대건설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10개층은 현대자동차그룹이, 5개층은 현대중공업그룹이 매입해 사용했고 2011년에 현대건설이 현대자동차그룹 산하로 들어가면서 현대건설이 다시 되돌아왔다. [29] 1992년 준공되었으며 그 전까지는 삼성카드가 썼다. [30] 더군다나, 정몽필은 슬하에 딸 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몫으로 돌아온 회사도 없다. 정몽필의 사위 주현은 현대자동차그룹의 계열사 현대BHL의 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31] 그나마 며느리 현정은이 경영하게 된 현재의 현대그룹도 해운업 불황으로 인해 현대상선이 그룹에서 이탈, 사실상 해체되었다. [32] 현정은이 소유한 현대그룹의 실질적 지주회사. 현대엘리베이터가 현대상선을, 상선이 기타 제조업계열사와 현대증권을, 증권이 기타 금융계열사를 지배하는 식이었다. 상선·택배·증권이 모두 분리된 현재는 실질적으로 현대그룹 그 자체나 다름없다. 정몽헌이 현대그룹 분리 이후 현대건설·현대전자의 부도로 담보로 제공했던 주식이 다 없어졌을 때, 정몽헌의 자살 이후 현정은이 처음 경영으로 나설 때 모두 현정은의 어머니 김문희가 보유한 현대엘리베이터 주식(당시 약 18%정도)의 의결권을 위임받아 현대그룹을 경영하였다. 이 지분은 당시 범현대가의 지분율과 맞먹었다. 김문희는 아직도 현대그룹에 대한 영향력이 매우 크며 이것이 범현대가에서 현씨 가문이 정씨 가문의 회사를 접수하려 한다는 오해와 갈등을 불러일으킨 주요 원인이 되었다. 정몽헌 사후 초기에는 백기사를 자처했던 범현대가에서 현대그룹에 적대적 M&A를 시도하게 된다. [33] 범 현대그룹과 무관한 '현대일렉트릭'이라는 별개의 회사가 이미 존재하여 현대일렉트릭앤에너지시스템이란 다소 긴 상호명을 쓴 관계로, 대내외적으로 그냥 현대일렉트릭을 약칭처럼 썼으나 HD브랜드로 사명 변경 후에는 옛날 일이 되었다. 현대중공업 전기전자시스템사업부를 2017년 4월에 계열분리시킨 회사이다. [34] 현대중공업 건설장비사업부를 2017년 4월에 계열분리시킨 회사이다. [35] 구 호텔현대 경포대이자 현 씨마크 호텔을 운영하는 기업이다. [36] 1955.3. 동방해상보험 설립 → 1963.8. 동방해상화재보험 사명변경 → 1980.5. 동방화재해상보험 사명변경 → 1985.10. 현대해상화재보험 사명변경. [37] 1990.2. 한일자동차손해사정 설립 → 2000.2. 현대해상 자회사 편입 / 현대해상자동차손해사정 사명변경 → 2013.4.1. 현대하이카손해사정 사명 변경 [38] 2002.6. 현대하이서비스 설립 → 2005.11. 현대하이카손해사정 사명변경 → 2013.4.하이카업무 이관 / 현대하이라이프손해사정 사명변경 [39] 신군부에게 현대양행의 중공업사업부(한국중공업 → 현 두산중공업)을 빼앗긴 것이 철천지 한이 되어 한국중공업 사옥이 보이는 곳에 사무실을 마련하여 매일 내려다 보았다고 한다. IMF 크리로 한라건설을 제외한 모든 계열사가 정리되었다. 당시 재계순위 10위였으나 부채비율 1000%로 30대 그룹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한라중공업은 현대중공업에 넘어가 현대삼호중공업이 되었고, 김치냉장고 딤채를 만들던 만도기계(구 현대양행)의 공조사업부는 UBS컨소시엄에 매각되어 위니아만도가 되었다가 대유그룹에 인수되었다. 만도기계의 자동차부품부문은 만도가 되어 범현대가의 지원(현대자동차에서는 범현대가 아닌 다른 곳에 회사를 넘기면 납품을 끊어버린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KCC는 한라컨소시엄에 참여했다.)으로 한라그룹이 되찾았다. [40] 포니정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별명처럼 평생을 현대자동차에 바쳤으나 정주영이 빼앗아 정몽구의 현대산업개발과 맞바꿔주고 독립시켰다. [41] 오래된 현대아파트의 경우 대부분 HDC현대산업개발에서 지은 것이다. [42] 이명박의 자서전을 보면 아파트 시장이 커질 거 같아 진출은 해야 하는데 당시 현대건설이 오일 달러로 인해 한창 잘 나가던 시기라 '대 현대건설이 어찌 쪼잔하게 집 장사 하겠나!'란 내부 의견이 많아 따로 만든 회사다. [43] 정주영의 형제 중 가장 영특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아일보 기자였으나 독일 유학 중 교통사고로 죽었다. [44] 일본의 반도체 원료 수출규제에 맞춰 불소로 유명해진 업체. [45] 이후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가 선수단을 인수하여 우리 히어로즈가 출범했다. [46] 이름이 현대칼라라서 국산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일본 코니카의 필름을 수입하는 업체였다. 1970년대 코니카 필름(당시 고니시로쿠 사진 공업)은 사쿠라칼라필름이라는 상표명으로 일본 및 한국에서 판매되었는데 이름이 너무 왜색이 짙다보니 현대칼라라는 이름으로 일종의 ODM 수입을 해온 것이다. 여담으로 후지, 코닥, 아그파 모두 수입품이다. [47] 실제로 현대그룹과는 상관이 없으나, 현대유니콘스 감독이었던 김재박을 광고모델로 사용하는 등 현대그룹 이미지를 이용하려 했었다. 결국 저축은행사태때 부실불법경영으로 현대스위스가 언론에 언급되자 범현대가, 특히 금융계열사에 안좋은 이미지가 전염되는것을 우려하여 범현대그룹계열사들이 공동으로 2011년 특허심판원에 상표등록무효를 청구하였다가 패배하자 2013년에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였다. SBI저축은행으로 사명이 바뀐 현재에는 옛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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