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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9 20:38:58

해근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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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제기(帝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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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서기(序記)」 2권 「태조기(太祖紀)」 3권 「태종기(太宗紀)」
탁발부 · 대나라 탁발규 탁발사
4권 「세조·공종기(世祖恭宗紀)」 5권 「고종기(高宗紀)」 6권 「현조기(顯祖紀)」
탁발도 · 탁발황 탁발준(浚) 탁발홍
7권 「고조기(高祖紀)」 8권 「세종기(世宗紀)」 9권 「숙종기(肅宗紀)」
원굉 원각 원후
10권 「효장제기(孝莊帝紀)」 11권 「폐출삼제기(廢出三帝紀)」 12권 「효정제기(孝靜帝紀)」
원자유 원공 · 원랑 · 원수 원선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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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열전(列傳) ]
13권 「황후전(皇后傳)」
신원황후 · 봉황후 · 기황후 · 평문황후 · 소성황후 · 헌명황후 · 도무황후 · 도무선목황후 · 명원소애황후 · 밀황후 · 태무황후 · 경애황후
경목공황후 · 문성문명황후 · 문성원황후 · 헌문사황후 · 효문정황후 · 풍폐후 · 효문유황후 · 효문소황후 · 선무순황후 · 선무황후 · 선무영황후
효명황후 · 효정황후
14권 「신원·평문제제자손전(神元平文諸帝子孫傳)」
탁발흘라 , 탁발제, · 탁발영문 · 탁발육 · 탁발인 · 탁발수낙 · 탁발퇴 · 탁발소연 · 탁발욱 · 탁발목진 · 탁발육수 · 탁발비간 · 탁발여 · 탁발고
탁발돈 · 탁발석 · 탁발위 · 탁발대두 · 탁발제 · 탁발처진 · 탁발니
15권 「소성자손전(昭成子孫傳)」 16권 「도무7왕전(道武七王傳)」
탁발식군 · 탁발한 · 탁발준(遵) · 탁발건(虔) · 탁발순 · 탁발의열
탁발굴돌
탁발소 · 탁발희 · 탁발요 · 탁발수 · 탁발처문 · 탁발연 · 탁발려(黎)
17권 「명원6왕전(明元六王傳)」 18권 「태무5왕전(太武五王傳)」
탁발비 · 탁발미 · 탁발범 · 탁발건(健) · 탁발숭 · 탁발준(俊) 탁발복라 · 탁발한 · 탁발담 · 탁발건(建) · 탁발여(余)
19권 「경목12왕전(敬穆十二王傳)」
탁발신성 · 탁발자추 · 탁발소신성 · 탁발천사 · 탁발만수 · 탁발낙후 · 탁발운 · 탁발정 · 탁발장수 · 탁발태락 · 탁발호아 · 탁발휴
20권 「문성5왕전(文成五王傳)」 21권 「헌문6왕전(獻文六王傳)」
탁발장락 · 탁발략 · 탁발간(簡) · 탁발약 · 탁발맹 원희 · 원간(幹) · 원우 · 원옹 · 원상 · 원협
22권 「효문5왕전(孝文五王傳)」 23권 「위조등전(衛操等傳)」 24권 「연봉등전(燕鳳等傳)」
원순 · 원유 · 원역 · 원회 · 원열 위조 · 막함 · 유고인 연봉 · 허겸 · 장곤 · 최현백 · 등연
25권 「장손숭등전(長孫嵩等傳)」 26권 「장손비등전(長孫肥等傳)」 27권 「목숭전(穆崇傳)」
장손숭 · 장손도생 장손비 · 울고진 목숭
28권 「화발등전(和跋等傳)」 29권 「해근등전(奚斤等傳)」
화발 · 해목 · 막제 · 유업연 · 하적간 · 이율 · 유결 · 고필 · 장려 해근 · 숙손건
30권 「왕건등전(王建等傳)」
왕건 · 안동 · 누복련 · 구퇴 · 아청 · 유니 · 해권 · 차이락 · 숙석 · 내대천 · 주기 · 두대전 · 주관 · 염대비 · 울발 · 육진 · 여락발
31권 「우율제전(于栗磾傳)」 32권 「고호등전(高湖等傳)」
우율제 고호 · 최영 · 봉의
33권 「송은등전(宋隱等傳)」
송은 · 왕헌 · 굴준 · 장포 · 곡혼 · 공손표 · 장제 · 이선 · 가이 · 설제
34권 「왕낙아등전(王洛兒等傳)」 35권 「최호전(崔浩傳)」 36권 「이순전(李順傳)」
왕낙아 · 차노두 · 노노원 · 진건 · 만안국 최호 이순
37권 「사마휴지등전(司馬休之等傳)」 38권 「조옹등전(刁雍等傳)」 39권 「이보전(李寶傳)」
사마휴지 · 사마초지 · 사마경지 · 사마숙번
사마천조
조옹(刁雍) · 왕혜룡 · 한연지 · 원식 이보
40권 「육사전(陸俟傳)」 41권 「원하전(源賀傳)」 42권 「설변등전(薛辯等傳)」
육사 원하 설변 · 구찬 · 역범 · 한수 · 요훤
43권 「엄릉등전(嚴棱等傳)」 44권 「나결등전(羅結等傳)」
엄릉 · 모수지 · 당화 · 유휴빈 · 방법수 나결 · 이발 · 을괴 · 화기노 · 순퇴 · 설야저 · 우문복 · 비우 · 맹위
45권 「위랑등전(韋閬等傳)」 46권 「두근등전(竇瑾等傳)」 47권 「노현전(盧玄傳)」
위랑 · 두전 · 배준 · 신소선 · 유숭 두근 · 허언 · 이흔 노현
48권 「고윤전(高允傳)」 49권 「이령등전(李靈等傳)」 50권 「울원등전(尉元等傳)」
고윤 이령 · 최감 울원 · 모용백요
51권 「한무등전(韓茂等傳)」
한무 · 피표자 · 봉칙문 · 여나한 · 공백공
52권 「조일등전(趙逸等傳)」
조일 · 호방회 · 호수 · 송요 · 장담 · 종흠 · 단승근 · 감인 · 유병 · 조유 · 색창 · 음중달
53권 「이효백등전(李孝伯等傳)」 54권 「유아등전(游雅等傳)」 55권 「유명근등전(游明根等傳)」
이효백 · 이형 유아 · 고려 유명근 · 유방
56권 「정희등전(鄭羲等傳)」 57권 「고우등전(高祐等傳)」 58권 「양파전(楊播傳)」
정희 · 최변 고우 · 최정 양파
59권 「유창등전(劉昶等傳)」 60권 「한기린등전(韓麒麟等傳)」 61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유창 · 소보인 · 소정표 한기린 · 정준 설안도 · 필중경 · 심문수 · 장당 · 전익종 · 맹표
62권 「이표등전(李彪等傳)」 63권 「왕숙등전(王肅等傳)」 64권 「곽조등전(郭祚等傳)」
이표 · 고도열 왕숙 · 송변 곽조 · 장이
65권 「형만등전(邢巒等傳)」 66권 「이숭등전(李崇等傳)」 67권 「최광전(崔光傳)」
형만 · 이평 이숭 · 최량 최광
68권 「견침등전(甄琛等傳)」 69권 「최휴등전(崔休等傳)」 70권 「유조등전(劉藻等傳)」
견침 · 고총 최휴 · 배정준 · 원번 유조 · 부영 · 부수안 · 이신
71권 「배숙업등전(裴叔業等傳)」 72권 「양니등전(陽尼等傳)」
배숙업 · 하후도천 · 이원호 · 석법우 · 왕세필 · 강열지 · 순우탄 · 이묘 양니 · 가사백 · 이숙호 · 노시경 · 방량 · 조세표 · 반영기 · 주원욱
73권 「해강생등전(奚康生等傳)」 74권 「이주영전(爾朱榮傳)」 75권 「이주조등전(爾朱兆等傳)」
해강생 · 양대안 · 최연백 이주영 이주조 · 이주언백 · 이주도율 · 이주천광
76권 「노동등전(盧同等傳)」 77권 「송번등전(宋翻等傳)」 78권 「손소등전(孫紹等傳)」
노동 · 장열 송번 · 신웅 · 양심 · 양기 · 고숭 손소(孫紹) · 장보혜
79권 「성엄등전(成淹等傳)」 80권 「주서등전(朱瑞等傳)」
성엄 · 범소 · 유도부 · 유도빈 · 동소 · 풍원흥 · 녹여 · 장습 주서 · 질열연경 · 곡사춘 · 가현도 · 번자곡 · 하발승 · 후막진열 · 후연
81권 「기준등전(綦儁等傳)」 82권 「이염지등전(李琰之等傳)」
기준 · 산위 · 유인지 · 우문충지 이염지 · 조영 · 상경
83권 「외척전(外戚傳)」
하눌 · 유나신 · 요황미 · 두초 · 하미 · 여비 · 고조 · 우경 · 호국진 · 이연실
84권 「유림전(儒林傳)」
양월 · 노추 · 장위 · 양조 · 평항 · 진기 · 상상 · 유헌지 · 장오귀 · 유란 · 손혜울 · 서준명 · 동징 · 조충 · 노경유 · 이동궤 · 이흥업
85권 「문원전(文苑傳)」
원요 · 배경헌 · 노관 · 봉숙 · 형장 · 배백무 · 형흔 · 온자승
86권 「효감전(孝感傳)」
조염 · 장손려 · 걸복보 · 손익덕 · 동락생 · 양인 · 염원명 · 오실달 · 왕속생 · 이현달 · 장승 · 창발 · 왕숭 · 곽문공
87권 「절의전(節義傳)」
우십문 · 단진 · 석문덕 · 급고 · 왕현위 · 누제 · 유갈후 · 주장생 · 우제 · 마룡팔 · 문문애 · 조청 · 유후인 · 석조흥 · 소홍철 · 왕영세 · 호소호 · 손도등 · 이궤 · 장안조 · 왕려
88권 「양리전(良吏傳)」
장순 · 녹생 · 장응 · 송세경 · 노옹 · 염경윤 · 명량 · 두찬 · 배타 · 두원 · 양돈 · 소숙
89권 「혹리전(酷吏傳)」
우락후 · 호이 · 이홍지 · 고준 · 장사제 · 양지 · 최섬 · 역도원 · 곡해
90권 「일사전(逸士傳)」
휴과 · 풍량 · 이밀 · 정수
91권 「예술전(藝術傳)」
조숭 · 장연 · 은소 · 왕조 · 경현 · 유영조 · 강식 · 주담 · 이숙 · 서건 · 왕현 · 최욱 · 장소유
92권 「열녀전(列女傳)」
임성국태비
93권 「은행전(恩倖傳)」
왕예 · 왕증흥 · 구맹 · 조수 · 여호 · 조옹(趙邕) · 후강 · 정엄 · 서흘
94권 「엄관전(閹官傳)」
종애 · 구락제 · 단패 · 왕거 · 조묵 · 손소(孫小) · 장종지 · 극붕 · 장우 · 포억 · 왕우 · 부승조 · 왕질 · 이견 · 진송 · 백정 · 유등 · 가찬 · 양범
성궤 · 왕온 · 맹란 · 평계 · 봉진 · 유사일
95권 「유총등전(劉聰等傳)」
유총 · 석륵 · 유하 · 모용외 · 부건 · 요장 · 여광
96권 「사마예등전(司馬叡等傳)」 97권 「환현등전(桓玄等傳)」 98권 「소도성등전(蕭道成等傳)」
사마예 · 이웅 환현 · 풍발 · 유유 소도성 · 소연
99권 「장실등전(張實等傳)」
장실 · 걸복국인 · 독발오고 · 이고 · 저거몽손
100권 「고구려등전(高句麗等傳)」
고구려 · 백제 · 물길 · 실위 · 두막루 · 지두우 · 고막해 · 거란 · 오락후
101권 「저등전(氐等傳)」
저족 · 토욕혼 · 탕창강 · 고창 · 등지 · 만족 · 요족
102권 「서역전(西域傳)」
선선 · 차말 · 우전 · 백정 · 차사국 · 언기 · 쿠처 · 소륵 · 속특 · 파사 · 남천축 · 읍달
103권 「연연등전(蠕蠕等傳)」
연연 · 우문막괴 · 단질육권 · 고차
104권 「자서전(自序傳)」
위수
※ 105권 ~ 114권은 志에 해당. 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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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흠정 24사 관련 틀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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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본기(本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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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위본기1(魏本紀一)」 2권 「위본기2(魏本紀二)」 3권 「위본기3(魏本紀三)」
탁발규 · 탁발사 탁발도 · 탁발황 · 탁발준(浚) · 탁발홍 원굉
4권 「위본기4(魏本紀四)」 5권 「위본기5(魏本紀五)」
원각 · 원후 원자유 · 원공 · 원랑 · 원수 · 원보거 · 원흠 · 원곽 · 원선견
6권 「제본기상(齊本紀上)」 7권 「제본기중(齊本紀中)」 8권 「제본기하(齊本紀下中)」
고환 · 고징 고양 · 고은 · 고연 고담 · 고위 · 고항
9권 「주본기상(周本紀上)」 10권 「주본기하(周本紀下)」
우문태 · 우문각 · 우문육 우문옹 · 우문윤 · 우문천
11권 「수본기상(隋本紀上)」 12권 「수본기하(隋本紀下)」
양견 양광 · 양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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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4><tablewidth=100%><tablebgcolor=#000000> 13·14권 「후비전(后妃傳)」 ||
신원황후 · 봉황후 · 기황후 · 평문황후 · 소성황후 · 헌명황후 · 도무황후 · 선목황후 · 소애황후 · 명원밀황후 · 태무황후 · 경애황후
울구려황후 · 문명황후 · 문성원황후 · 헌문사황후 · 효문정황후 · 폐후 풍씨 · 효문유황후 · 효문고황후 · 우황후 · 고황후 · 호황후 · 효명황후 · 효무황후 · 문황후 · 도황후 · 우문황후 · 약간황후 · 효정황후 · 누소군 · 원황후 · 이조아 · 원황후 · 호황후 · 곡률황후 · 호황후 · 목야리 · 풍소련 · 원씨 · 질노씨 · 원호마 · 독고황후 · 아사나 · 이아자 · 양려화 · 주만월 · 진월의 · 원락상 · 울지치번 · 사마영희 · 독고가라 · 소황후
15권 「위제종실전(魏諸宗室傳)」
탁발흘나 · 탁발영문 · 탁발육 · 탁발인 · 탁발수낙 · 탁발퇴 · 탁발소연 · 탁발욱 · 탁발목신 · 탁발육수 · 탁발비간 · 탁발여 · 탁발고
탁발돈 · 탁발석 · 탁발위 · 탁발대두 · 탁발제 · 탁발처진 · 탁발니 · 탁발식군 · 탁발한 · 탁발준(遵) · 탁발건(健) · 탁발순 · 탁발의열 · 탁발굴돌
16권 「도무7왕·명원6왕·태무5왕전(道武七王·明元六王·太武五王傳)」
탁발소 · 탁발희 · 탁발요 · 탁발수 · 탁발처문 · 탁발연 · 탁발려(黎) · 탁발비 · 탁발미 · 탁발범 · 탁발건(健) · 탁발숭 · 탁발준(俊) · 탁발복라 · 탁발한 · 탁발담 · 탁발건(建) · 탁발여(余)
17·18권 「경목12왕전(敬穆十二王傳)」
탁발신성 · 탁발자추 · 탁발소신성 · 탁발천사 · 탁발만수 · 탁발낙후 · 탁발운 · 탁발정 · 탁발장수 · 탁발태락 · 탁발호아 · 탁발휴
19권 「문성5왕·헌문6왕·효문6왕전(文成五王·獻文六王·孝文六王傳)」
탁발장락 · 탁발략(略) · 탁발간(簡) · 탁발약(若) · 탁발맹 · 원희 · 원간(幹) · 원우 · 원옹 · 원상 · 원협 · 원순 · 원유 · 원역 · 원회 · 원열
20권 「위조등전(衛操等傳)」
위조 · 막함 · 유고인 · 울고진 · 목숭 · 해근 · 숙손건 · 안동 · 유업연 · 왕건 · 나결 · 누복련 · 염대비 · 해목 · 화발 · 막제 · 하적간 · 이율 · 해권
21권 「연봉등전(燕鳳等傳)」 22권 「장손숭등전(長孫嵩等傳)」
연봉 · 허겸 · 최굉 · 장곤 · 등언해 장손숭 · 장손도생 · 장손비
23권 「우율제전(于栗磾傳)」 24권 「최영등전(崔逞等傳)」
우율제 최영 · 왕헌 · 봉의
25권 「고필등전(古弼等傳)」
고필 · 장려 · 유결 · 구퇴 · 아청 · 이후 · 을괴 · 주기 · 두대전 · 거이락 · 왕낙아 · 거로두 · 노노원 · 진건 · 내대간 · 숙석 · 만안국
주관 · 울발 · 육진 · 여락발 · 설표자 · 울원 · 모용백요 · 화기노 · 순퇴 · 우문복
26권 「송은등전(宋隱等傳)」
송은 · 허언 · 조옹(刁雍) · 신소선 · 위랑 · 두전
27권 「굴준등전(屈遵等傳)」
굴준 · 장포 · 곡혼 · 공손표 · 장제 · 이선 · 가이 · 두근 · 이흔 · 한연지 · 원식 · 모수지 · 당화 · 구찬 · 역범 · 한수 · 요훤 · 유숭
28권 「육사등전(陸俟等傳)」 29권 「사마휴지등전(司馬休之等傳)」
육사 · 원하 · 유니 · 설제 사마휴지 · 유창 · 소보인 · 소정표
28권 「노현등전(盧玄等傳)」 29권 「고윤등전(高允等傳)」
노현 · 노부 고윤 · 고우 · 고덕정 · 고익 · 고앙
32권 「최감등전(崔鑒等傳)」 33권 「이령등전(李靈等傳)」
최감 · 최변 · 최정 이령 · 이순 · 이효백 · 이예 · 이의심
34권 「유아등전(游雅等傳)」
유아 · 고려 · 조일 · 호수 · 호방회 · 장담 · 단승근 · 감인 · 유연명 · 조유 · 색창 · 송요 · 강식
35권 「왕혜룡등전(王慧龍等傳)」 36권 「설변등전(薛辯等傳)」
왕혜룡 · 정희 설변 · 설치 · 설징
37권 「한무등전(韓茂等傳)」
한무 · 피표자 · 봉칙문 · 여나한 · 공백공 · 전익종 · 맹표 · 해강생 · 양대안 · 최연백 · 요훤 · 이숙인
38권 「배준등전(裴駿等傳)」 39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배준 · 배연준 · 배타 · 배과 · 배관 · 배협 · 배문거 · 배인기 설안도 · 유휴빈 · 방법수 · 필중경 · 양지
40권 「한기린등전(韓麒麟等傳)」 41권 「양파등전(楊播等傳)」
한기린 · 정준 · 이표 · 고도열 · 견침 · 장찬 · 고총 양파 · 양부 양소
42권 「왕숙등전(王肅等傳)」 43권 「곽조등전(郭祚等傳)」 44권 「최광등전(崔光等傳)」
왕숙 · 유방(劉芳) · 상상 곽조 · 장이 · 형만 · 이숭 최광 · 최량
45권 「배숙업등전(裴叔業等傳)」
배숙업 · 하후도천 · 이원호 · 석법우 · 왕세필 · 강열지 · 순우탄 · 음중달 · 장당 · 이묘 · 유조 · 부영 · 부수안 · 장열 · 이숙표 · 노시경 · 방량
조세표 · 반영기 · 주원욱
46권 「손소등전(孫紹等傳)」
손소(孫紹) · 장보혜 · 성엄 · 범소 · 유도부 · 녹여 · 장요 · 유도빈 · 동소 · 풍원흥
47권 「원번등전(袁翻等傳)」 48권 「이주영전(爾朱榮傳)」
원번 · 양니 · 가사백 · 조영 이주영
49권 「주서등전(朱瑞等傳)」
주서 · 질열연경 · 곡사춘 · 가현도 · 번자곡 · 후심(2) · 하발승 · 후막진열 · 염현 · 양람 · 뇌소 · 모하 · 을불랑
50권 「신웅등전(辛雄等傳)」
신웅 · 양기 · 고도목 · 기준 · 산위 · 우문충지 · 비목 · 맹위
51·52권 「제종실제왕전(齊宗室諸王傳)」
고침 · 고악 · 고성 · 고영락 · 고현국 · 고사종 · 고언귀 · 고령산 · 고준 · 고엄 · 고유 · 고환(高渙) · 고육 · 북제 · 고식 · 고제 · 고응 · 고윤
고흡 · 고효유 · 고효연 · 고효완 · 고장공 · 고연종 · 고소신 · 고소덕 · 고소의 · 고소인 · 고소렴 · 고백년 · 고량 · 고언리 · 고언덕
고언기 · 고언강 · 고언충 · 고작 · 고엄 · 고곽 · 고정 · 고인영 · 고인광 · 고인기 · 고인옹 · 고인검 · 고인아 · 고인직 · 고인겸 · 고각 · 고선덕
고매덕 · 고질전
53권 「묵기보등전(万俟普等傳)」
묵기보 · 가주혼원 · 유풍 · 파륙한상 · 금조 · 유귀 · 채준 · 한현 · 울장명 · 왕회 · 임상 · 막다루대문 · 사적회락 · 사적성 · 장보락
후막진상 · 설고연 · 곡률강거 · 장경 · 요웅 · 송현 · 왕칙 · 모용소종 · 질열평 · 보대한살 · 설유의 · 모용엄 · 반락 · 팽락 · 포현 · 피경화
기연맹 · 원경안 · 독고영업 · 선우세영 · 부복
54권 「손등등전(孫騰等傳)」
손등 · 고융지 · 사마자여 · 두태 · 울경 · 누소 · 사적간 · 한궤 · 단영 · 곡률금
55권 「손건등전(孫搴等傳)」
손건 · 진원강 · 두필 · 두태 · 울경 · 장찬 · 장량 · 장요 · 왕준 · 왕굉 · 경현준 · 평감 · 당옹 · 백건 · 원문요 · 조언심 · 혁련자열 · 풍자종 · 낭기
56권 「위수등전(魏收等傳)」
위수 · 위장현 · 위계경 · 위난근
57권 「주종실전(周宗室傳)」
우문호 · 우문련 · 우문낙생 · 우문중 · 우문측 · 우문신거
58권 「주실제왕전(周室諸王傳)」
우문진 · 우문직 · 우문초 · 우문검 · 우문순 · 우문성 · 우문달 · 우문통 · 우문형 · 우문강 · 우문현 · 우문정 · 우문실 · 우문찬 · 우문지
우문윤(允) · 우문충 · 우문태(兌) · 우문원 · 우문연(衍) · 우문술(術)
59권 「구락등전(寇洛等傳)」 60권 「이필등전(李弼等傳)」
구락 · 조귀 · 이현 · 양어 이필 · 우문귀 · 후막진숭 · 왕웅
61권 「왕맹등전(王盟等傳)」
왕맹 · 독고신 · 두치 · 하란상 · 질열복귀 · 염경 · 사녕 · 권경산
62권 「왕비등전(王羆等傳)」 63권 「주혜달등전(周惠達等傳)」 64권 「위효관등전(韋孝寬等傳)」
왕비 · 왕사정 · 울지형 · 왕궤 주혜달 · 풍경 · 소작 위효관 · 위진 · 류규
65권 「달해무등전(達奚武等傳)」
강자일 · 약간혜 · 이봉 · 유량 · 왕덕 · 혁련달 · 한과 · 채우 · 상선 · 신위 · 사적창 · 양춘 · 양대 · 전홍
66권 「왕걸등전(王傑等傳)」
왕걸 · 왕용 · 우문규 · 경호 · 고림 · 이화 · 이루목 · 달해식 · 유웅 · 후식 · 이연손 · 위우 · 진흔 · 위현 · 천기 · 이천철 · 양건운 · 부맹 · 양웅 · 석고 · 임과
67권 「최언목등전(崔彥穆等傳)」 68권 「두로녕등전(豆盧寧等傳)」
최언목 · 양찬 · 단영 · 배과 · 당영 · 류민 · 왕사량 두로녕 · 양소(楊紹) · 왕아 , 왕세적 한웅 · 하약돈
69권 「신휘등전(申徽等傳)」
신휘 · 육통 · 사적치 · 양천 · 왕경 · 조강 · 조창 · 왕열 · 조문표 · 양대 · 원정 · 양표
70권 「한포등전(韓襃等傳)」
한포 · 조숙 · 장궤 · 이언 · 곽언 · 양흔 · 황보번 · 신경지 · 왕자직 · 두고 · 여사례 · 서초 · 단저 · 맹신 · 종름 · 유번 · 류하
71권 「수종실제왕전(隋宗室諸王傳)」
양정 · 양찬 · 양상 · 양홍 · 양처강 · 양자숭 · 양용 · 양준 · 양수 · 양량 · 양소(楊昭) · 양간 · 양고
72권 「고경등전(高熲等傳)」
고경 · 우홍 · 이덕림
73권 「양사언등전(梁士彥等傳)」
양사언 · 원해 · 우경칙 · 원주 · 달해장유 · 하루자간 · 사만세 · 유방(劉方) · 두언 · 주요 · 독고개 · 걸복혜 · 장위 · 화홍 · 음수 · 양의신
74권 「유방등전(劉昉等傳)」
유방(劉昉) · 유구 · 황보적 · 곽연 · 장형 · 양왕 · 배온 · 원충 · 이웅
75권 「조경등전(趙煚等傳)」
조경 · 조분 · 왕소 · 원암 · 우문필 · 이누겸 · 이원통 · 곽영 · 방황 · 이안 · 양희상 · 장경 · 소효자 · 원수
76권 「단문진등전(段文振等傳)」
단문진 · 내호아 · 번자개 · 주나후 · 주법상 · 위현 · 유권 · 이경 · 설세웅
77권 「장정화등전(張定和等傳)」
배정 · 이악 · 포굉 · 고구 · 영비 · 육지명 · 양비 · 유욱 · 조작 · 두정
78권 「장정화등전(張定和等傳)」
장정화 · 장윤 · 맥철장 · 권무 · 왕인공 · 토만서 · 동순 · 어구라 · 왕변 · 진릉 · 조재
79권 「우문술등전(宇文述等傳)」
우문술 · 왕세충 · 단달
80권 「외척전(外戚傳)」
하눌 · 요황미 · 두초 · 하미 · 여비 · 풍희 · 이혜 · 고조 · 호국진 · 황보집 · 양등 · 을불회 · 조맹 · 호장인 · 여씨
81·82권 「유림전(儒林傳)」
양월 · 노추 · 장위 · 양조 · 평항 · 진기 · 유헌지 · 장오귀 · 유란 · 손혜울 · 서준명 · 동징 · 마자결 · 이흥업 · 양원의 · 풍위 · 장매노 · 유궤사
포계상 · 형치 · 유주 · 마경덕 · 장경인 · 권회 · 장사백 · 장조무 · 곽준 · 심중 · 번심 · 웅안생 · 악손 · 기준 · 조문심 · 신언지 · 하타 · 소해 · 포개 · 방휘원 · 마광 · 유작 · 유현 · 저휘 · 고표 · 노세달 · 장충 · 왕효적
83권 「문원전(文苑傳)」
온자승 · 순제 · 조홍훈 · 이광 · 번손 · 순사손 · 왕포 · 유신 · 안지추 · 우세기 · 유변 · 허선심 · 이문박 · 명극양 · 유진 · 제갈영 · 왕정 · 우작
왕주 · 유자직 · 반휘 · 상덕지 · 윤식 · 유선경 · 조군언 · 공덕소 · 유빈
84권 「효행전(孝行傳)」
장손려 · 손익덕 · 동락생 · 양인 · 염원명 · 오실달 · 왕속생 · 이현달 · 장승 · 창발 · 왕숭 · 곽문공 · 형가 · 진족 · 영선 · 황보하 · 장원
왕반 · 양경 · 전익 · 유인 · 유사준 · 적보림 · 화추 · 서효숙
85권 「절의전(節義傳)」
우십문 · 단진 · 석문덕 · 급고 · 왕현위 · 누제 · 유갈후 · 주장생 · 마팔룡 · 문문애 · 조청 · 유후인 · 석조흥 · 소홍철 · 왕영세 · 호소호
손도등 · 이궤 · 장안조 · 왕려 · 곽염 · 지용초 · 을속고불보 · 이상 · 두숙비 · 이악 · 유원 · 장수타 · 양선회 · 노초 · 유자익 · 요군소
진효의 · 두송지 · 곽세준 · 낭방귀
86권 「순리전(循吏傳)」
장응 · 노옹 · 염경윤 · 명량 · 두찬 · 두원 · 소숙 · 장화업 · 맹업 · 소경 · 노거병 · 양언광 · 번숙략 · 공손경무 · 신공의 · 유검 · 곽현 · 경숙
유광 · 왕가 · 위덕심
87권 「혹리전(酷吏傳)」
우락후 · 호니 · 이홍지 · 장사제 · 조패 · 최섬 · 저진 · 전식 · 연영 · 원홍사 · 왕문동
88권 「은일전(隐逸傳)」
휴과 · 풍량 · 정수 · 최곽 · 서칙 · 장문후
89·90권 「예술전(藝術傳)」
조숭 · 장심(1) · 은소 · 왕조 · 경현 · 유영조 · 이순흥 · 단특사 · 안악두 · 왕춘 · 신도방 · 송경업 · 허준 · 유준세 · 조보화 · 황보옥 · 해법선 · 허준 · 위녕 · 기모회문 · 장자신 · 육법화 · 장승 · 강련 · 유계재 · 노태익 · 경순 · 내화 · 소길 · 양백추 · 임효공 · 유우 · 장주현 · 주담 · 이수 · 서건 · 왕현 · 마사명 · 요승원 · 저해 · 허지장 · 만보상 · 장소유 · 하조
91권 「열녀전(列女傳)」
난릉공주 · 남양공주 · 초국부인
92권 「은행전(恩倖傳)」
왕예 · 왕중흥 · 조수 · 여호 · 조옹(趙邕) · 후강 · 구락제 · 왕거 · 조묵 · 손소(孫小) · 장종지 · 극붕 · 장우 · 포억 · 왕우 · 부승조 · 왕질 · 이견 · 유등 · 가찬 · 양범 · 성궤 · 왕온 · 맹란 · 평계 · 봉진 · 유사일 · 곽수 · 화사개 · 안토근 · 목제파 · 고아나굉
93권 「참위부용전(僭偽附庸傳)」
혁련발발 · 모용외 · 요장 · 풍발 · 걸복국인 · 저거몽손 · 소찰
94권 「고려등전(高麗等傳)」
고려 · 백제 · 신라 · 물길 · 해족 · 거란 · 실위 · 두막루 · 지두우 · 오락후 · 류구 · 왜국
95권 「만등전(蠻等傳)」
만족(蠻) · 요족(獠) · 임읍 · 적토 · 진랍 · 파리
96권 「저등전(氐等傳)」
저족 · 토욕혼 · 탕창 · 등지국 · 당항 · 부국 · 계호국
97권 「서역전(西域傳)」
선선 · 포산국 · 실거반 · 권우마국 · 차사국 · 우전국 · 고창 · 차미 · 언기 · 구차 · 고묵국 · 온숙국 · 울두국 · 오손국 · 소륵국 · 열반국 · 토호라
소월씨 · 아구강국 · 속특국 · 파사국 · 복로니국 · 색지현 · 가색니국 · 고창 · 차미 · 여국
98권 「연연등전(蠕蠕等傳)」
연연 · 우문막괴 · 단질육권 · 고차
99권 「돌궐등전(突厥等傳)」
돌궐 · 철륵
100권 「자서전(自序傳)」
이연수
(1) 본명이 장연(張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
(2) 본명이 후연(侯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tablebgcolor=#000> ||
}}}}}} ||
<colbgcolor=#dc143c><colcolor=#fff> 홍농소왕(弘農昭王)
奚斤 | 해근
시호 소왕(昭王)
작호 산양후(山陽侯) → 산양공(山陽公)
→ 의성왕(宜城王) → 의성공(宜城公)
→ 홍농왕(弘農王)
달해(達奚) → 해(奚)
근(斤)
토벌근(吐伐斤)
생몰 369년 ~ 448년 11월 24일
부친 해단(奚簞)
출신 항주(恆州) 대군(代郡)
자녀 20남 이상
1. 개요2. 생애3.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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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위의 인물. 선비족. 본래 성씨는 '달해(達奚)'였으나 효문제의 한화 정책으로 인해 그의 집안은 모두 '해(奚)'로 바뀌었다.

2. 생애

해근의 집안은 대대로 말을 기르고 관리하는 직책을 맡아 왔고, 그의 아버지 해단(奚簞)은 대나라에서 대왕 탁발십익건의 총애를 받았다. 당시 대나라에는 "와류(騧騮)"라는 명마가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갑자기 사라져 찾을 수 없었다. 이후 남부대인 유고인이 훔쳐서 자신의 굴 속에 숨겨 두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해단은 이를 듣고 즉시 말을 되찾으러 갔으나, 유고인은 대나라 왕실의 외척이라는 신분을 믿고, 해단이 찾아온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거칠게 저항하였다. 이에 해단은 유고인의 머리카락을 잡아 땅에 쓰러뜨리고, 그의 한쪽 유방에 상처를 입혔다.

후에 전진의 천왕 부견이 대나라를 멸망시키고, 나라의 부락 절반을 나누어 각각 유고인과 유위진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하자, 해단은 두려워하며 가족과 함께 백성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그럼에도 유고인이 그를 집요하게 추적하자, 해단은 결국 서쪽으로 도망쳐 유위진에게 의탁하였다. 그 후, 북위를 건국하고 자립한 위왕 탁발규가 유위진을 멸망시키자 해단은 뒤늦게 북위로 귀순하였고, 이로 인해 그의 명예와 지위는 다른 구신(舊臣)들보다 낮았다.

해근은 기민하고 식견이 있어, 등국(登國) 초기에 장손비 등과 함께 금병(禁兵)을 통솔하였고, 얼마 뒤에는 시랑(侍郎)으로 임명되어 위왕 탁발규를 곁에서 모셨다. 또, 그는 후연 모용보가 북위를 침공했을 때, 참합(參合)에서 그를 격파하는 데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황시 원년(396년) 8월, 위왕 탁발규가 후연을 정벌할 때, 해근은 정동장군 장사(長史)로 임명되어 종군하였고, 월기교위(越騎校尉)로 승진하여 탁발규의 곁에서 숙위하면서 친위병을 지휘하였다.

황시 3년(398년) 정월, 위왕 탁발규가 원정을 마치고 수도 성락(盛樂)으로 돌아왔을 때, 박릉(博陵), 발해(勃海), 장무(章武) 등의 여러 군(郡)에서 도적이 일어나 군집하며 지방의 관리들을 살해하고 있었다. 해근은 약양공 탁발준과 더불어 산동(山東)의 여러 군대를 이끌고 이를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천흥 2년(399년) 2월, 해근은 도무제 탁발규를 따라 고차국의 여러 부락을 정벌하여 대승을 거두고, 수도 평성(平城)으로 돌아왔다.

천흥 2년(399년) 3월, 해근은 건의장군 유진(庾眞)과 함께 고적부(庫狄部)와 유련부(宥連部)를 격파하여 그들의 여러 부락을 변방 남쪽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어 후막진부(侯莫陳部)를 공격하여 10만 마리 이상의 가축을 약탈한 뒤, 대아곡(大峨穀)에 수자리를 두고 귀환하였다. 그 후 해근은 도수사자(都水使者)로 전임되었다가, 다시 진병장군(晉兵將軍)•유주자사(幽州刺史)로 임명되었고, 산양후(山陽侯)에 봉해졌다.

영흥 원년(409년) 10월, 명원제 탁발사가 즉위하자, 해근은 남평공 장손숭, 북신후 안동, 백마후 최굉, 원성후 탁발굴 등 8명과 나란히 지거문(止車門) 오른편에 배석하여 정무를 논의하고 국사를 처리하였다. 이로 인해 해근은 이들과 한데 묶여, 당대에 "팔공(八公)"이라 불렸다.

또, 해근은 정병장군(鄭兵將軍)으로 임명되어, 주군(州郡)을 순행하며 백성들의 고충을 살폈다. 이때 장무(章武) 출신의 백성 유아(劉牙)가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자, 해근이 이를 진압하고 평정하였다. 명원제는 해근의 가문이 대대로 충성과 효를 다했다고 여겨, 그의 아버지 해단을 장녕자(長寧子)로 추증하였다.

영흥 3년(411년) 4월 22일[1], 명원제가 금릉(金陵)에 참배하기 위해 운중(雲中)으로 순행할 때, 해근은 평성에 남아 수도를 수비하였다.

영흥 3년(411년) 5월, 명원제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창려왕 모용백아(慕容伯兒)가 경박하게 협객을 흉내내는 소인배인 이침(李沈) 등 300여 명을 모아 반란을 꾀하자, 해근은 이를 듣고 모용백아를 천문전(天文殿) 동쪽 복도로 소환하여 철저히 심문하였다. 이후 그는 모두의 혐의를 밝혀내어 반란에 가담한 무리들을 처형하였다.

영흥 3년(411년) 12월 13일[2], 명원제가 조서를 내려, 해근과 남평공 장손숭 등에게 조당(朝堂)에 앉아 죄수를 심리하고 판결하도록 하였다. 이때 공정하고 합당한 처리를 최우선으로 삼도록 명령하였다.

영흥 4년(412년) 7월, 명원제가 동교(東郊)에서 군대를 열병하고 무술을 강습하며, 해근을 좌승상(左丞相)으로 임명하여 석회산(石會山)에서 대규모의 병력을 검열하도록 명령하였다.

영흥 4년(412년) 4월, 명원제가 서쪽을 순행할 때, 해근, 홍비장군 울고진 등을 선봉에 세워 발나산(跋那山)에서 월륵부(越勒部)를 정벌하도록 명령하였다.

영흥 4년(412년) 7월, 해근은 대승을 거두어 말 50,000필, 소와 양 20만 마리를 노획하였으며, 20,000여 호를 강제로 이주시킨 후 귀환하였다.

신서 원년(414년) 12월, 유연의 가한 욱구려대단이 북위를 침략했다가, 명원제가 친히 지휘하는 북위군에게 공격을 받고 북쪽으로 도주하였다. 이에 명원제는 해근에게 명을 내려 욱구려대단을 추격하도록 하였으나, 해근은 진군 도중에 폭설을 만나 얼어죽거나 동상으로 심한 부상당한 병졸이 2~3할에 달하면서 추격을 중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에게는 여전히 유연의 군대를 격파한 공이 있어 천부대인(天部大人)으로 임명되었고, 작위는 공(公)으로 승격되었다. 또한, 명원제는 해근에게 궁궐에 출입 시 초헌(軺軒)을 타고 위엄 있는 의장을 갖출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태상 7년(422년) 5월, 명원제는 계속 오석산을 복용하다가 병에 걸려 눕고 말았다. 이에 태자 탁발도가 조정을 주관하며 정무를 보게 되었고, 해근은 좌보(左輔)로 임명되어 북신공 안동과 함께 동상(東廂)에 앉아 서쪽을 바라보면서 태자를 보좌하였다.

태상 7년(422년) 9월, 유송에서 무제 유유가 붕어하고, 그 뒤를 이은 유의부를 유송의 대신들이 따르지 않아 나라가 혼란스럽다는 소식을 들은 명원제는 해근에게 과거 무제 유유의 침공에 의해 상실했던 하남(河南) 지역을 수복하도록 명령하였다. 해근은 가절(假節)•도독전봉제군사(都督前鋒諸軍事)•사공공(司空公)•진병대장군(晉兵大將軍)•행 양주자사(行揚州刺史)로 임명되어, 녕삭장군 주기, 오병장군 공손표(公孫表) 등과 함께 남쪽을 정벌하러 나섰다.

태상 7년(422년) 10월, 해근은 20,000명의 병력으로 황하를 건너, 공손표의 계책에 따라 활대(滑臺)를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하였고, 조정에 지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에 명원제는 해근이 땅을 먼저 정복하지 않고 무리하게 공격했다며 그를 엄하게 질책한 뒤, 직접 남쪽 순행에 나서서 중산(中山)에 이르렀다. 그러자 유송의 동군(東郡) 태수 왕경도(王景度)가 성을 버리고 도망쳤고, 사마초지 등이 모두 사자를 보내 해근에게 투항하니, 해근은 나아가 창원(倉垣)과 활대를 차례로 점령하였다.

태상 7년(422년) 11월, 해근이 활대에서 다음 목표인 낙양(洛陽)을 공략하기 위해 호뢰(虎牢)로 진군하였다. 호뢰를 지키던 유송의 사주(司州) 자사 모덕조는 사마 적광(翟廣), 장군 요용조(姚勇錯), 두패(竇霸) 등에게 5,000명의 병력을 주어, 토루(土樓)에 주둔하게 하여 해근의 군대를 막으려 하였다. 해근은 이를 공격하여 대파하였으며, 적의 군대는 전멸하였고, 적광 등은 단기로 도망쳐 목숨만 간신히 건졌다. 해근은 승세를 타고 곧바로 호뢰로 진군하여 군대를 사동(汜東)에 주둔시켰다.

해근은 공손표를 사동에 남겨 군량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경무장한 병사들을 이끌고 하남(河南), 영천(潁川), 진군(陳郡) 남쪽 지역을 평정하였다. 이때 백성들은 모두 해근에게 귀부하였고, 유송의 진류(陳留) 태수 엄릉(嚴棱)도 군(郡)을 들어 해근에게 투항하였다. 해근은 연이어 연주(兗州)와 예주(豫州)의 여러 군들을 평정한 다음, 비로소 호뢰를 포위하여 압박하였다.

태상 8년(423년) 3월, 명원제의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호뢰를 더욱 강하게 압박하자, 모덕조는 호뢰성 내에 7장(丈) 깊이의 땅굴을 뚫고 여섯 갈래로 나누어 북위의 포위망을 밖으로 나가는 길을 만들었다. 그리고 참군 범도기(范道基)로 하여금 결사대 400명을 이끌고 땅굴을 통해 포위망 바깥 쪽에서 적을 습격하게 하니, 후방을 갑자기 습격당한 북위군은 금세 혼란에 빠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범도기의 결사대는 적 수백 명을 참수하고는 병장기를 불사르고 돌아왔다. 해근과 공손표는 도망치던 군대를 겨우 수습한 뒤, 해근은 3,000명의 별동대를 선발해 허창(許昌)을 공격했고, 공손표는 남아서 더욱 맹렬하게 호뢰성을 공격하였다.

해근은 유송의 영천태수 이원덕(李元德)을 순식간에 무찌르고 유룡(劉龍)을 영천태수로 삼아 허창을 지키게 한 뒤, 모덕조의 예상보다 일찍 호뢰로 돌아와 성밖으로 나와서 싸우던 모덕조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모덕조는 대패하여 중갑병 1,000여 명을 잃은 채로 성으로 들어가 다시 농성하였다. 당시 모덕조는 과거 동진에 내려오기 전, 공손표와 친분이 있었는데, 그것을 이용해 공손표와 해근을 이간질하려는 계책을 꾸몄다. 그는 먼저 공손표에게 안부를 묻는 서신을 보내는 동시에, 해근에게도 사람을 보내 공손표가 자신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믿게끔 유세하게 하였다. 결국 이간책에 넘어간 해근이 명원제에게 이 사실을 고하였고, 명원제는 공손표를 의심하여 암살자를 보내 공손표를 목 졸라 죽이게 하고, 병주(幷州) 자사 이루발(伊樓拔)로 하여금 해근을 돕게 하였다.

태상 8년(423년) 4월, 명원제는 친히 군대를 지휘하여 성고(成皋)에서 호뢰의 수로를 끊어버렸다. 모덕조는 끝까지 항전하며 항복하지 않았으나, 초병장군 숙손건도 가세하여 해근의 호뢰 공략을 돕자, 결국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호뢰성은 함락되었다. 호뢰가 마침내 함락되자, 명원제는 수도 평성으로 돌아갔다.

태상 8년(423년) 9월, 명원제가 해근을 불러 수도로 돌아오게 하니, 해근은 수령을 두어 지역을 위무하게 하고, 병력을 호뢰에 배치한 뒤에 수도로 귀환하였다.

태상 8년(423년) 11월, 명원제가 붕어하고 태무제 탁발도가 즉위하자, 해근은 작위가 올라 의성왕(宜城王)이 되었다.

시광 2년(425년) 3월 2일[3], 태무제가 해근의 사공 직책을 유지시켰다.

시광 3년(426년) 6월, 태무제는 공경(公卿)들을 소집하고 북하와 유연 중 어디를 먼저 정벌할 지에 대해 물었을 때, 해근은 장손숭, 장손한과 함께 유연을 정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시광 3년(426년) 9월, 북하에서 혁련발발이 죽고 관중이 혼란에 빠지자, 태무제는 북하를 정벌하기로 결심하였다. 해근은 의병장군 봉례(封禮) 등과 함께 45,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포판(蒲阪)을 기습하도록 명령받았다. 당시 포판을 수비하던 혁련을승(赫連乙升)은 해근의 군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북하의 황제 혁련창에게 알리기 위해 사자를 보냈다. 그러나 혁련을승의 사자가 북하의 도읍 통만(統萬)에 도착했을 때, 이미 북위군이 통만성을 포위하고 있는 것을 보고 돌아와 혁련을승에게 혁련창이 이미 패하였다고 알렸다. 이에 혁련을승은 두려움에 포판을 버리고 서쪽으로 도망쳤다. 해근은 혁련을승을 추격하여 그를 격파하였고, 혁련을승은 결국 장안(長安)으로 도망쳤다. 해근은 포판에 입성하여 물자와 무기를 회수하고, 백성들을 안정시켜 생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시광 3년(426년) 12월, 혁련창의 동생 혁련조흥(赫連助興)은 장안을 지키고 있었는데, 혁련을승이 도착하자 함께 장안을 버리고 서쪽의 안정(安定)으로 도망쳤다. 이에 해근은 다시 서쪽으로 진군하여 손쉽게 장안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진옹(秦雍) 지역의 저족 강족들은 모두 해근에게 귀부하였다.

시광 4년(427년) 정월, 장안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들은 혁련창은 동생인 평원공 혁련정에게 무리 20,000명을 주어 장안을 수복하게 하였다. 해근은 혁련정과 여러 차례 교전하여 때때로 이기기도 하였으나, 대치 상태를 깨뜨리지는 못하였다.

시광 4년(427년) 6월, 해근과 혁련정이 장안을 두고 대치하던 사이, 태무제가 황하를 건너 통만성을 습격해 함락시켰고, 북하의 황제 혁련창은 기병 수백 기를 이끌고 서남쪽으로 도망쳐 상규(上邽)로 달아났다. 혁련창이 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혁련정도 상규로 퇴각하였고, 해근은 이를 추격하여 옹(雍)에 이르렀으나, 끝내 따라잡지 못하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해근이 다시 출정하여 혁련창을 추격할 때, 태무제가 그에게 철수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이에 해근은 상소를 올려 간청하였다.
"혁련창은 이미 패배하여 상규(上邽)로 도망갔으며, 남은 세력을 모으고 있으나 아직 본거지를 확립할 기반이 없습니다. 지금 그들이 위태로울 때를 틈타 소멸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갑옷과 군마를 증원해 주신다면 혁련창을 완전히 평정한 후 철수하겠습니다."
태무제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혁련창은 이미 나라를 잃은 역적이다. 그를 공격하려다가는 장수와 병사들만 고생하고 피로해질 뿐이니, 지금은 병력을 쉬게 해도 그를 잡는 것은 늦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해근이 상소를 올려 계속 간청하며 강하게 주장하자, 태무제는 마침내 그의 요청을 허락하여, 그에게 병사 10,000명을 추가로 배속시키고, 장군 유발(劉拔)을 보내 말 3,000필을 지원하였다.

시광 4년(427년) 9월, 해근이 병력을 이끌고 안정으로 진군하자, 안정의 백성들이 성을 들어 투항하였다. 해근은 군대를 안정에 주둔시키며 전열을 가다듬었으나, 군량이 부족하고 말들이 죽어가는 상황에 처하였다. 이에 해근은 진영을 구축하여 스스로를 방어하는 데 주력하였다.

신가 원년(428년) 2월, 평북장군 울권이 상규를 공격하자, 혁련창으로 동쪽으로 달아나 평량(平凉)으로 갔다. 혁련창은 안정을 공격하여 탈환을 시도해보았으나, 이때 울권과 감군시어사 안힐(安頡)이 혁련창을 습격하여 생포하는 데 성공하였고, 혁련창의 무리는 평량에서 그 동생 혁련정을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였다.

신가 원년(428년) 3월, 해근은 자신이 원수(元帥)로서 혁련창을 생포하지 못한 것을 무척 수치스럽게 여겼다. 이에 그는 군량과 군수품을 모두 버리고, 3일치의 군량만을 준비하여 혁련정을 추격하였다. 해근의 부장 아청은 물길을 따라 진군할 것을 제안했지만, 혁련정을 반드시 사로잡아야 한다는 일념에 사로잡힌 해근은 이를 따르지 않고 북쪽 길로 가서 혁련정의 퇴로부터 차단하려 하였다. 한편, 혁련정도 군대를 이끌고 출진하려는 가운데, 해근의 진영에서 소장(小將) 한 명이 죄를 짓고 탈영하여 혁련정에게 투항하여 군대의 상황을 모두 누설하였다. 혁련정은 해근의 군대가 식량과 물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이용하여 마모령(馬髦嶺)에서 해근의 앞뒤를 차단하였다. 결국 해근의 군대는 크게 패하였고, 지휘관인 해근, 아청, 유발은 모두 북하군에게 생포되었으며, 북위의 병사들 중 6~7,000여 명이 전사하였다.

신가 3년(430년) 12월, 친정에 나서서 순고원(鶉觚原)에서 혁련정의 주력군을 궤멸시킨 태무제가 평량에 이르자, 평량을 지키고 있던 나머지 북하의 무리들이 모두 성 밖으로 나와 태무제에게 항복하였다. 북위의 관중후 두대전은 평량으로 들어가 포로로 잡혀있던 해근 등을 구출했으나, 태무제는 해근의 패배를 치욕스럽게 여겨 그를 면직시키고 재인(宰人)으로 강등시켰다. 그리고 그에게 술과 음식을 짊어지고 무릎을 꿇은 채로 걸어서 두대전에게 이를 바치게 하는 수모를 주었다. 이후 해근은 재인(宰人)으로서 여전히 술과 음식을 들고, 황제의 수레를 따라 수도로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근은 안동장군(安東將軍)으로 복직되고, 작위는 공(公)으로 강등되었다.

연화 원년(432년) 6월, 태무제가 북연을 정벌하려 할 때, 해근은 조서를 받들어 유주(幽州)의 백성과 밀운(密雲)의 정령(丁零)족 10,000여 명을 징발하여 공성 병기를 제조하고, 남쪽 길로 이를 운반하였다.

태연 원년(435년) 5월, 해근은 위위(衛尉)•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으로 임명되었고, 작위는 다시 홍농왕(弘農王)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 만기대장군(萬騎大將軍)으로 임명되어 다시 군사 작전을 수행하였다.

태연 5년(439년) 4월, 태무제는 서당(西堂)에 신하들을 대거 소집하고, 북량 정벌을 논의하였다. 이때 해근을 비롯한 30여 명의 대신들은 다음과 같이 의견을 냈다.
"하서왕(河西王) 저거목건은 서쪽 변방의 속국으로, 비록 내적으로는 충성스럽지 못하나, 외적으로는 조공과 의무를 다하고 있으므로, 그의 미미한 과실 정도는 너그러이 용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지난해 새로 군대를 동원하면서 병사와 말이 지쳤으니, 지금은 대규모 원정을 감행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우선은 묶어두고 제어하는 정책을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또, 그 지역은 땅이 메마르고 물과 풀이 거의 없어, 대군이 도착하더라도 오래 머물 수 없을 것입니다. 저들은 군대가 오면 반드시 성 안으로 들어가 수비를 강화하여 공략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들판에서는 약탈할 것도 없어 끝내 큰 성과를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태무제는 이 의견을 따르지 않고 북량 정벌을 감행하였다.

태연 5년(439년) 9월, 북량이 평정된 후, 해근은 전투에서 공을 세워 70호의 사내아이 종과 노비를 상으로 하사받았다. 이후 해근은 원로로서 안거(安車)를 하사받고, 형옥(刑獄)을 결정하고 조정의 정사를 자문하는 역할을 맡았다.

해근은 총명하고, 언변이 뛰어나며, 기억력이 탁월하여 담론에 능하였다. 그는 먼 옛날의 선조 이야기까지도 자주 언급했는데, 비록 모든 것이 정확하지는 않았으나, 때로는 들어맞는 바가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감탄하며 칭찬하곤 하였다. 그가 대정(大政)을 논의할 때마다 그의 의견이 자주 받아들여졌으며, 조정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태평진군 9년(448년) 10월 13일[4], 해근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80세. 태무제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친히 빈소를 찾아 애도하였다. 시호는 '소왕(昭王)'.

해근은 아내로 맞이한 부인이 수십 명에 이르렀으며, 20여 명의 아들을 두었다고 한다. 장남 해타관(奚他觀)이 작위를 이었다.

태화 연간에 효문제는 선대의 공신들을 추모하여 해근을 종묘에 배향하였다.

3. 가계



[1] 신해년 계사월 무술일. 음력으로는 4월 22일이고, 양력으로 5월 30일이다. [2] 신해년 신축월 을유일. 음력으로는 411년 12월 13일이고, 양력으로 412년 1월 12일이다. [3] 을축년 경진월 정사일. 음력으로는 3월 2일이고, 양력으로 4월 5일이다. [4] 무자년 계해월 신해일. 음력으로는 10월 13일이고, 양력으로 11월 24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