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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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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헌문제의 황자
원협 | 元勰
출생 473년
북위 하남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사망 508년 10월 27일
북위 하남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능묘 미상
재위기간 북위 팽성왕
? ~ 508년 10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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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C143C><colcolor=#ece5b6> 성씨 탁발(拓跋) → 하남 원씨
협(勰)
언화(彥和)
부모 부황 헌문제
모후 태비 반씨(潘氏)
형제자매 7남 5녀 중 6남
왕비 이원화(李媛華)
자녀 4남 5녀
종교 불교
작호 시평왕(始平王) → 팽성왕(彭城王)
묘호 숙조(肅祖) → 폐지
시호 무선왕(武宣王)
→ 문목황제(文穆皇帝)
→ 무선왕(武宣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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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가족4. 참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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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위의 황자. 헌문제의 6남.

2. 생애

탁발협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성품과 재능이 남달랐다. 탁발협은 총명하고 학문에 몰두하였으며,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배움에 전념하였다. 그는 경서와 역사에 두루 정통하였고, 문장을 짓는 것을 특히 좋아하였다.

탁발협이 태어날 때 어머니인 귀인 반씨(潘氏)가 세상을 떠났고, 같은 해에 아버지인 헌문제 또한 붕어하였다. 탁발협이 어느정도 성장한 후, 어머니를 위해 복상(服喪)을 하게 해달라고 청하였으나,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문명태후 풍씨가 이를 허하지 않았다. 이에 원협은 스스로 몸을 상하게 하며 3년 동안 초췌한 상태로 지내고, 길흉(吉凶)의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효문제는 이러한 동생을 보고 무척 기특히 여겼다.

태화 9년(485년) 3월, 효문제 탁발굉이 동생들을 왕작에 봉할 때, 탁발협 또한 시평왕(始平王)에 봉해지고, 시중(侍中)•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의 직책이 더해졌다. 오랜 시간이 지나, 효문제가 개혁을 단행하면서 탁발협의 시중과 정서대장군 직위를 해임하고,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협은 다시 시중으로 임명되었고, 궁궐 안에서 장기적으로 근무하며 군국(軍國)의 대정(大政)을 함께 논의하였다. 이로써 국가의 모든 중대사무 중 그가 관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태화 17년(493년) 8월, 효문제가 남벌을 선포하고, 대군을 일으켜 낙양(洛陽)으로 향하였다. 이때 탁발협은 무군장군(撫軍將軍)을 겸임하며, 종자군(宗子軍)을 거느리고 황제의 좌우를 호위하였다.

태화 18년(494년) 11월, 낙양 천도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효문제가 오등작을 새로 개편할 때, 탁발협은 팽성왕(彭城王)으로 개봉되어 식읍 2,000호를 받았고, 중서령(中書令)으로 승진하였으며, 시중의 직책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태화 20년(496년) 정월, 효문제가 조서를 내려 황족의 성씨인 탁발씨를 원(元)씨로 바꾸게 하였다.

한번은 효문제가 시종과 신하들과 함께 낙양의 금용성(金墉城)에 올라 바라보다가, 당(堂) 뒤의 오동나무와 대나무를 보고 말했다.
"봉황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이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지금 오동나무와 대나무가 모두 무성하니 어찌 봉황이 내려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때 원협이 대답하였다.
"봉황은 덕(德)에 응하여 오는 것인데, 어찌 대나무와 오동나무로 인해 내려오겠습니까?"
그러자 효문제가 물었다.
"어찌하여 그리 말하는가?"
이에 원협이 다시 대답하였다.
"옛날 우순(虞舜) 시대에는 봉황이 와서 위엄을 나타냈고, 주나라(周)가 흥성할 때에는 악작(鸑鷟)이 기산(岐山)에서 울었습니다. 다만 그것들이 오동나무에 내려앉고 대나무 열매를 먹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를 들은 효문제가 웃으며 말했다.
"짐도 그것이 내려오기를 바라지는 않았소."

이후 효문제는 청휘당(清徽堂)에서 시종과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이윽고 해가 저물자, 장소를 유화지(流化池)와 그 아래의 향기로운 숲으로 옮겼다. 효문제가 입을 열어 말했다.
"아까 연회가 시작될 때에는 군신(君臣)이 엄숙하였으나, 끝나갈 즈음이 되어서야 술자리의 즐거움이 겨우 무르익었소. 그러나 시간은 흘러 해가 저물려 하니, 끝내 그 즐거움을 다 누리지 못하였소. 남아 있는 햇빛이 아쉬워 다시 경(卿)들을 불러 함께하려 하오."
이어서 효문제는 위를 올려다보더니 무성한 오동나무 잎을 바라보고 노래하며 말했다.
"'그 오동나무와 그 느릅나무에 열매는 주렁주렁하니, 즐겁고 온화한 군자는 술을 마셔도 몸가짐을 잃지 않네.'[1] 지금 이 숲 아래에 모인 여러 어진 이들은 이를 노래하고 읊기에 충분하오."
그리고는 황문시랑 최광(崔光)에게 명하여,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늦봄에 어울리는 시를 돌아가면서 낭독하게 하였다. 어느덧 원협의 차례에 이르러, 효문제는 그 시의 한 글자를 직접 고치며 말했다.
"옛날 기해(祁奚)가 아들을 추천했을 때, 천하는 이를 지극히 공정하다고 여겼소. 이제 원협의 시를 보니, 중령(中令, 중서령)으로 천거된 것에 사사로움이 없음을 비로소 알겠소."
원협이 대답하여 아뢰길,
"신은 이러한 졸렬한 작품을 드러냄으로써 비로소 성조(聖朝)의 사사로움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성스러운 붓으로 고쳐 주시어 훌륭한 명예를 얻게 되었나이다."
라 하니, 효문제가 말했다.
"비록 한 글자를 다듬었을 뿐이니, 여전히 이는 옥(玉)의 본래 형태를 갖춘 것이오."
원협이 대답하였다.
"신이 듣기에, 《 시경》 300편은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폐하께서 한 글자를 고쳐 주셨으니, 그 가치는 연달아 성(城)을 잇는 것과도 맞먹습니다."

어느 날, 원협이 시중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효문제가 조서로 이를 기각하며 말했다.
"선초(蟬貂)의 아름다움은 너로 인해 더욱 빛나고 있거늘, 인재가 부족한 때에 어찌 물러나려 한단 말이냐? 성인(聖人)의 도리를 이루는 데 반드시 너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태화 21년(497년) 2월, 효문제는 옛 도읍 평성(平城)으로 향하던 중, 상당(上黨)의 동제산(銅鞮山)에 잠시 머물렀다. 길가에는 큰 소나무가 열몇 그루 서 있었는데, 당시 효문제는 수레에서 내려 산책하였고, 우산 아래에서 길을 걸으며 시를 지었다. 효문제는 사람을 시켜 그 시를 원협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내가 방금 이 시를 지었는데, 비록 칠보시(七步詩)처럼 빠르게 지은 것은 아니지만, 또한 먼 이야기를 담은 것도 아니다. 네가 이를 이어서 짓고, 내가 있는 곳에 도착하기 전에 마치도록 하라."
이때 원협은 효문제로부터 열여 걸음가량 떨어져 있었고, 그는 효문제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시를 완성시켰다.
"묻노라, 소나무 숲이여,
소나무 숲은 몇 번의 겨울을 겪었는가?
산과 시내는 옛날과 같으며,
바람과 구름은 옛날과 같은가?"
효문제가 이를 듣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너의 이 시는 역시 나를 꾸짖는 것이로구나."
그리고 조서로 말하기를,
"아우 원협의 생모 반씨는 일찍 세상을 떠났으나, 존호가 미처 더해지지 못하였다. 원협의 불행은 그의 삶과 함께하였고, 슬픔은 그의 형체에 따라 일어났으니, 지금 그의 그리움을 펼쳐 보니 더욱 애통하고 측은하게 여겨지는구나. 반씨를 팽성국태비(彭城國太妃)로 추증하여, 살아있는 자와 세상을 떠난 자 모두를 위로하도록 하라."
라 하였다. 여기에 더해서 원협을 중서감(中書監)으로 삼았고, 시중의 직책은 그대로 유지하게 하였다.

태화 21년(497년) 8월, 효문제가 남쪽으로 한양(漢陽)을 정벌할 때, 원협을 임시로 중군대장군(中軍大將軍)을 맡게 하고, 추가로 고취(鼓吹) 한 부대를 하사하였다. 원협은 총애를 받는 일이 지나치게 빈번함을 느끼고, 직접 나아가 아뢰며 말했다.
"신이 듣건대, 친한 자와 소원한 자를 함께 아우르고, 다른 점과 같은 점을 모두 세우는 것이 이미 옛날부터 정해진 도리라 하였습니다. 신은 이를 후대에 전하고자 합니다. 조비(曹丕)는 아우인 조식(曹植)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는데, 어리석은 신은 청하지도 않았으나 이미 얻고 말았습니다. 어찌 지금과 옛날의 상황이 다르겠습니까? 단지 행운과 불운으로 인해 큰 차이가 생겼을 뿐입니다. 이는 조식이 멀리서 신을 부러워할 뿐만 아니라, 폐하께서도 역시 위문제(魏文帝)의 발자취를 따르시면서 돌아보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에 효문제가 크게 웃으며 원협의 손을 잡고 말했다.
"조비와 조식은 재주와 명성을 서로 시기하였으나, 나는 너와 도(道)와 덕(德)으로써 서로 친밀하니, 이를 두고 말하자면 옛날의 뛰어난 인물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다. 너는 그저 스스로를 극복하고 예(禮)를 회복하기만 하면 되므로, 더 이상 많은 말을 할 필요는 없다."

어느 날, 효문제는 친히 상복(喪服)에 대한 강의를 청휘당(清徽堂)에서 열고, 여유롭게 신하들에게 말했다.
"언화(彥和, 원협)와 계예(季豫, 원상) 등은 나이가 어린 시절에 이미 관직에 올라, 가정의 교육을 제때 받지 못하였고, 예(禮) 또한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 매번 나에게 상복을 한 번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하나, 스스로 생각해 보니 나의 설명이 의리에 비추어 얕고 부실할까 염려되어 허락하지 않았다. 얼마 전에는 술에 취한 자리에서 허락하겠다는 말을 무심코 하였기에, 마침내 조정의 학문이 뛰어난 이를 불러 강의를 직접 전달받았다. 이제 강연을 열고 앉으려 하니,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동시에 교차하는 기분이다."
어사중위 이표(李彪)가 대답하였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천자가 예(禮)를 친히 강연하는 일은 없었는데, 폐하께서는 성스럽고 깊은 지혜를 가지시어 그 업적이 백대를 뛰어넘으십니다. 신이 친히 폐하의 교훈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영광입니다."

태화 21년(497년) 8월, 원협은 효문제의 면북(沔北) 정벌에 종군하였고, 이에 따라 비단 3,000필을 하사받았다.

태화 22년(498년) 2월, 효문제가 완(宛)을 함락시키고, 원협을 사지절(使持節)•도독남정제군사(都督南征諸軍事)•개부(開府)•중군대장군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에게 조서를 내려 말하길,
"곧 적과 맞설 것이니, 장병들에게 명하여 군의(軍儀)를 엄숙히 하도록 하라."
라 하였고, 이에 원협은 친히 대군을 지휘하였다. 잠시 후, 두 마리의 큰 새가 남쪽에서 날아왔는데, 한 마리는 행궁(行宮)을 향하고, 다른 한 마리는 막부(幕府)를 향하였다. 두 새 모두 사람들에게 붙잡혔다. 원협이 효문제에게 아뢰었다.
"처음에 한 마리의 새가 깃발을 보고 떨어졌으니, 신은 이것이 매우 길한 징조라고 생각합니다."
효문제가 농담하며 말했다.
"새가 우리 군대의 위엄을 두려워한 것이 어찌 중군대장군의 전략 때문만이겠느냐? 나 또한 그 일부에 기여한 것이다. 이는 참으로 좋은 징조이니, 병법에서도 모두 이를 길하다고 말한다."

태화 22년(498년) 3월 1일[2], 북위군이 등성(鄧城)에서 최혜경(崔慧景)과 소연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그날 밤에 큰 비가 내리자, 효문제가 말했다.
"옛말에 이르기를, 국가의 군대가 승리를 거두면 항상 구름과 비를 만난다고 하였다. 오늘날 신야(新野)와 남양(南陽)을 함락시키고 이 적들을 무찌른 후에, 과연 시기적절한 단비가 내리는구나. 참으로 옳은 말이다!"
원협이 대답하였다.
"수덕(水德)의 호응은 먼 옛날부터 하늘의 뜻이라 일컬어져 왔습니다."
이윽고 효문제가 원협에게 노포(露布)를 작성하라고 명하자, 원협이 사양하며 말했다.
"신이 듣건대, 노포(露布)는 온 세상에 퍼져 하늘과 땅의 귀와 눈에 드러나는 것이니, 반드시 폐하의 위엄과 전략을 널리 선포하여 천하에 보여야 합니다. 신의 작은 재능으로는 어찌 이처럼 중대한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효문제가 말했다.
""네가 어찌 단지 내가 내리는 조서를 가까이할 뿐이겠느냐? 너는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니, 이 일을 맡아 수행하라."
결국 원협이 이를 작성하니, 그 문장이 더욱 황제의 글과 흡사하였고, 사람들은 그 글을 보고 모두 황제의 친필이라고 여겼다. 이에 효문제가 다시 원협에게 말했다.
"네가 작성한 글을 사람들이 모두 내 글이라 여기니, 형이 아니면 아우인데, 누가 이를 구별할 수 있겠느냐?"
원협이 대답하였다.
"자하(子夏)가 옛 성현으로부터 조롱받은 적이 있듯이, 신 또한 지금과 후대의 책망을 받게 되었습니다."

태화 22년(498년) 3월 30일[3], 효문제가 예주(豫州)의 현호(懸瓠)에 이르러 가족을 위해 원협에게 서신을 써서 말했다.
"풍속의 교화가 은밀하고 미세하며, 예법과 정치는 엄격하고 철저하니, 만약 깊은 마음으로 날마다 스스로를 권면하지 않는다면 어찌 남을 존경하게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항상 한 명의 종사(宗師)를 세워 우리 원씨(元氏) 가문을 엄숙히 하고자 한다. 너는 신극(宸極, 천자의 거처)과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고, 지위는 중서감에 이르렀으며, 풍모와 재능이 뛰어나 진실로 모범이 될 만하다. 거듭 구두로 명을 내렸으나, 너는 늘 겸손하고 사양하며 이를 받아들이기를 어려워하니, 그 고결함으로 인해 세월이 흘러 지금에 이르렀다. 종가(宗家)의 중대한 규범을 맡길 자로 너를 제외하고 또 누구에게 의지할 수 있겠는가? 이제 너에게 종가의 의례를 맡기고, 이를 완수할 책임을 너에게 지우겠다. 만약 가르침과 전례를 따르지 않는 일이 있다면, 그에 따라 즉시 보고하도록 하라. 내가 따로 엄숙히 다스릴 것이다. 만약 종실(宗室)에 허물이 있는데도 이를 숨기고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 벌은 네 몸에 돌아갈 것이다. 규범을 서로 격려하고 바로잡아야만 권면과 개선이 있을 수 있으니, 내가 아침에 듣고 저녁에 떠나더라도 그것은 한이 되지 않을 것이다."
서신을 받은 원협은 이튿날 직접 나아가 아뢰었다.
"이번에 조서를 받들어 종가의 규범을 전담하고, 잘못된 행위를 바로잡아야 할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신이 듣건대, '자신의 몸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해지고, 자신의 몸이 바르지 않으면 아무리 명령해도 따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종실에 있으면서 장유(長幼)의 순서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고, 사람을 대할 때 국사(國士)의 예를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매번 폐하께 아뢰었을 때마다 폐하께서는 측은히 여기시어 관대히 허락하셨사오나, 이제 다시 이러한 조서를 받게 되니 끝내 용서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성스러운 자비를 베푸시어 신을 직책에서 면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효문제가 말했다.
"네가 적임자이니, 가서 엄숙히 수행하라."

태화 22년(498년) 7월, 원협이 1년간의 봉급을 포기함으로써 군국(軍國)의 운영에 보탬이 되게 하고 싶다는 상소를 올리자, 효문제가 조서로 답하였다.
"몸을 나누어 나라를 돕는 것은 이치상 너무 지나친 일이니, 멀리 나아갈 필요는 없다. 그러나 네가 나와 가까운 친족으로서 스스로를 줄여 나라를 돕고자 하는 마음은 가상하다. 직봉(職俸)은 중단하되, 황족과 봉국 두 가지에서 나오는 봉급은 삼분의 일만 받도록 하라."

태화 22년(498년) 9월, 효문제가 병환에 걸리자, 원협은 내부로는 약을 지어 황제를 봉양하며 간호하였고, 외부로는 군국(軍國)의 일을 총괄하였다. 멀고 가까운 곳의 사람들이 모두 엄숙히 그를 따랐으며, 누구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또한, 원협은 당대 명의로 유명한 서건(徐謇)을 불러 효문제의 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이전에 낙양으로 돌아갔던 서건이 부름을 받아 다시 도착하였을 때, 원협은 그를 별도로 마련된 장소로 데리고 가서, 눈물을 흘리며 손을 붙잡고 말했다.
"그대는 지금 세상에 둘도 없을 명의요. 폐하의 기력이 위태롭고 쇠약하니, 바라건대 그대는 마음을 다하고 오직 치료 방법을 깊이 생각하여 주시오. 만약 성체(聖體)가 날로 회복된다면, 사해(四海)가 그 은혜를 입을 것이고, 그대는 예상할 수 없을 정도의 상을 받게 될 것이나,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헤아릴 수 없는 형벌을 받을 것이오. 이는 단순히 영예와 치욕의 문제가 아니라, 폐하의 생존 여부가 여기에 달려 있으므로, 그대는 온 힘을 다하시오!"
이를 곁에서 지켜보던 이들은 모두 흐느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원협이 서건을 효문제에게 들여보내자, 서건은 곧바로 치료를 시도하려 하였다. 그러나 원협은 효문제의 기력이 극도로 쇠약하다고 판단하여, 단지 음식의 맛을 살피며 점진적으로 회복시키도록 지시하였다. 이후 원협은 몰래 여수(汝水) 강가에 제단을 세우고, 주공(周公)의 고사를 따라 하늘과 땅, 그리고 아버지 헌문제의 영령에게 명을 구하며, 자신의 몸을 바쳐 헌문제를 대신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이튿날, 고조의 병세가 약간 호전되었다.

태화 22년(498년) 11월 4일[4], 효문제가 현호에서 업성(鄴城)으로 행차할 때, 원협은 항상 황제의 가마를 곁에서 지켰다. 그는 낮밤을 가리지 않고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음식과 음료는 반드시 자신이 먼저 맛본 후 직접 손으로 효문제에게 진상하였다.

태화 23년(499년) 정월, 효문제가 수도로 돌아오자 선극당(宣極堂)에 백관을 모아, 더불어 술을 마시고 공적을 기리는 책훈(策勛)의 예를 행하였다. 이때 명을 내려 사인(舍人)이 조서를 낭독하게 하였다.
"원협은 육사(六師)를 보좌하고 병력을 이끌며 형초(荊楚)와 면북(沔北)의 전공을 쌓아 조정의 계책을 보필하였다. 신야(新野) 정벌에서는 성을 함락시키는 계책을 세웠고, 명을 받아 등성(鄧城)에서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 공적은 여러 장수들 중에서도 으뜸이라 할 것이니, 별도로 상을 내려 그 공로를 기리지 않을 수 없다."
이후 효문제가 원협에게 직접 말했다.
"나는 너와 같은 이들과 함께 일찍이 어려움을 겪고, 중간에는 멀고 험한 일을 당하면서, 항상 정과 의리가 상황에 따라 소원해질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지난 해 동안 병에 시달리며 위태롭기가 마치 차가운 나뭇잎과 같았던 때에, 너의 깊은 마음과 충성과 효를 다지는 정이 아니었다면, 누가 몸소 약과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고 돌보았겠느냐? 매번 이를 되새길 때마다 감동하고 멀리까지 생각이 미친다."
원협이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신(臣)들은 오래전부터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불행을 겪어 왔으며, 오랜 세월 동안 깊은 원한을 품고 살아왔으나, 폐하의 어루만지심과 보살핌 덕분에 사람들 속에 설 수 있었습니다. 어찌 위에 계신 신령이 이를 살피지 않으셔서, 다시금 성스러운 폐하의 몸이 병환에 들게 하고, 만국(萬國)이 이에 매달리며, 창생(蒼生)의 목숨이 이로 인해 위태로워질 수 있겠습니까? 폐하의 고단함을 생각하면, 어찌 신들이 씀바귀와 여뀌를 먹는 것과 같은 고난을 대신할 수 없겠습니까?"
이로 인해 원협은 최혜경 등을 격파한 공로를 인정받아, 식읍 500호가 추가로 더해졌다. 또한 조서에서 이르기를,
"짐은 어린 시절부터 몸이 쇠약하였고, 오랜 세월 동안 마음이 수고로웠는데, 쌓인 걱정이 병이 되어 한꺼번에 발작하여 여영(汝潁)에 이르렀다. 여섯째 아우 원협은 효성이 주공(周公)의 동생과 같고, 그 감동은 희단(姬旦)에 비할 만하다. 음식을 나누고 잠을 미루며, 모든 일에 몸소 참여하고, 의술을 권하고 음식을 준비함에 있어 성의를 다하고 힘을 모두 쏟아냈으니, 이로 인해 짐이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는 실로 혈육의 도움 덕분이다. 또한 정무를 맡아 정사를 다스림에 있어 백관들이 이를 의지하였으며, 규범을 바로잡고 조화를 이루어 만 가지 일을 무사히 이루게 하였다. 비가 계속 쏟아지는 시기에는 군대를 어루만지며 안정시켰고, 적이 위협하는 날에는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치렀다. 외부를 평정하고 내부를 안정시킨 것은 실로 공신의 큰 공로이다. 궁궐에서의 봉사에서 보인 업적은 깊은 마음으로 칭찬하지 않을 수 없으며, 조정을 도와준 노력은 실로 국가의 공적을 남긴 것이다. 이에 합당한 포상이 있어야 하니, 국가의 공을 드러내기 위해 식읍 1,000호를 더해줄 것이다."
원협이 사양하며 아뢰었다.
"신이 폐하의 은혜를 받은 것은 혈연 덕분이며, 영화와 곤궁은 모두 신의 의무와 같사옵니다. 이런 이유로 상을 받는 것은 신의 본심에 어긋나는 일이니, 이를 철회하여 조서를 완성하셔서 비방의 말을 잠재워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지만 효문제는 불허하며,
"네가 사사로운 자리에서는 효를 다하고, 공적인 자리에서는 반드시 충성을 다하였으니, 최근의 근심과 노고는 조정과 민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니 단지 이 명령을 받들도록 하라."
라 하였다.

태화 23년(499년) 2월, 효문제는 원협을 사도(司徒)•태자태부(太子太傅)로 임명하였고, 시중의 직책은 그대로 유지하게 하였다.

태화 23년(499년) 3월, 남조 제나라의 태위 진현달(陳顯達)과 평북장군 최혜경이 이끄는 40,000 군대가 마권성(馬圈城)과 남향(南鄕)을 연이어 함락시켰다는 보고가 조정에 올라왔다. 효문제는 친히 이를 막기 위해 출정하였고, 동시에 조서를 내려 원협에게 사지절(使持節)•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를 맡겨 육사(六師)를 총괄하도록 하였다. 당시 효문제는 병환으로 상태가 무척 좋지 않았다. 이에 원협은 사양하며 아뢰었다.
"신은 폐하의 병환을 간호하느라 여유가 없사옵니다. 육군(六軍)에는 반드시 이를 맡을 적임자가 있어야 하니,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잘할 수는 없습니다. 신의 정성과 힘이 이미 소진되었으니, 다른 왕 한 명을 고르시어 군사의 요직을 총괄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효문제가 불허하며 말했다.
"군사의 일과 간병의 일을 모두 너에게 의지하니, 내가 이처럼 병에 시달릴 때 너가 없으면 이를 감당하지 못할까 깊이 걱정된다. 육군(六軍)을 안정시키고 사직을 지킬 자가 너를 제외하고 또 누가 있겠느냐? 어찌 편리함을 구하여 다른 이를 요청하며, 마음을 너에게서 옮길 수 있겠는가? 종묘와 사직이 의지할 곳은 오직 너에게 달려 있다. 제갈공명(諸葛孔明) 곽자맹(霍子孟)은 이성(異姓)임에도 신뢰를 받았거늘, 하물며 너는 어떠하겠느냐!"
이윽고 황제의 군대가 육양(淯陽)에 이르자, 효문제가 원협에게 말했다.
"내 병세가 더욱 악화되고 있으니, 너는 더욱 노력하라."
이후 효문제의 군대가 마권(馬圈)에 도착하였는데, 적의 진영에서 몇 리 떨어진 곳이었다. 이때 진현달 등이 출진하여 공격하자, 무위장군 원숭도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나아가 응자(鷹子)에서 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원협은 곧이어 여러 군대를 나누어 배치하고 적의 진영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그날 밤에 적이 달아났다.

태화 23년(499년) 3월 24일[5], 효문제는 병세가 심각해지자, 북쪽으로 이동하여 곡당원(穀塘原)에 이르렀다. 이때 효문제가 원협에게 말했다.
"수명의 길고 짧음이 정해져 있고, 죽고 사는 것은 큰 갈림길인데, 지금 내 기력은 위태롭고 쇠약하여, 이제 내가 끝내 회복하지 못할 듯하다. 비록 진현달(陳顯達)을 격파하였으나, 국가의 안위는 이 한 번의 행동에 달려 있고, 사직이 의지할 곳은 오직 너 한 몸에 달려 있다. 곽자맹(霍子孟)이 이성(異姓)임에도 신뢰를 받았거늘, 하물며 너는 나의 가까운 혈육이자 어진 인재인데, 어찌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느냐!"
원협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선비는 비록 평민이라도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다한다 하였건만, 하물며 신(臣)은 신령하신 선황(先皇)을 의지하고 폐하와 혈통을 함께하니, 진실로 사력을 다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신은 폐하의 신뢰를 입어 항상 중요한 자리에 출입하며 중대한 일을 맡아왔고, 폐하의 은총은 멀리까지 빛나 그 명성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또한 신이 정무를 맡으면서 모든 국정이 신에게 귀속되었으니, 이는 필히 임금을 위협하는 소문을 불러일으키고, 의심을 받을 만한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이는 마치 주공(周公)이 도망쳤던 일이나, 성왕(成王)이 의혹에 빠졌던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신을 사랑하시는 마음이 있다면, 끝까지 온전한 아름다움을 이루도록 하셔야 합니다. 신은 화려함과 권세를 싫어한다거나, 수고를 피하고 편안함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폐하의 밝으신 지혜로 하늘의 빛처럼 모든 것을 살피시어, 신이 물러나지 못함으로 인해 닥칠 재앙을 헤아려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를 들은 효문제는 한참 생각한 뒤 말했다.
"내가 네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이치는 정말로 부인하기 어렵구나."
그리고는 당시 수도를 지키고 있는 태자 원각에게 보내는 조서를 손수 작성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너의 여섯째 숙부인 원협은 맑고 규범이 엄정하며, 그 명성은 흰 구름처럼 깨끗하다. 그는 영화를 싫어하고 관직을 버리며, 늘 소나무와 대나무를 마음의 본보기로 삼았다. 나는 젊을 때부터 그와 깊이 교분을 나누며, 도(道)를 더불어 취해왔다. 그는 항상 조정의 관직을 내려놓고 산림에서 조용히 지내기를 청하였으나, 내가 장형(長兄)으로서의 무게를 생각해 그를 멀리 떠나게 할 수 없었다. 어찌 그의 소박한 뜻을 억누르며 세속의 그물에 오래도록 얽매이게 할 수 있겠느냐?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의 청을 받아들여 관직을 내려놓고 평온한 본성을 따르게 하라. 성왕(成王)의 조정에서 희단(姬旦)의 성스러운 덕(德)을 의심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참으로 좋지 않겠느냐? 너는 효자(孝子)로서 나의 뜻을 어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효문제가 병환에 걸린 이래로, 원협은 항상 그 곁에 머물며 친히 약과 음식을 살폈다. 그는 밤낮으로 효문제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허리띠조차 푸는 일이 드물었고, 머리카락은 흐트러지고 얼굴은 때가 묻어 있을 정도였다. 효문제는 오래도록 병환을 앓으며 자주 분노하였고, 이를 원협에게 때때로 화풀이하기도 하였다. 원협은 자주 책망과 꾸지람을 받았으며, 그 말은 매우 날카롭고 가혹하였다. 또한 효문제는 가까운 시종들에게도 위세를 부리며, 사소한 일에도 처형을 거론하곤 하였다. 그럼에도 원협은 효문제의 뜻을 받들어 최선을 다하며, 많은 일을 바로잡고 도왔다.

태화 23년(499년) 4월 1일[6], 효문제가 함양왕 원희, 북해왕 원상, 임성왕 원징, 광양왕 원가, 상서령 왕숙(王肅), 이부상서 송변(宋弁) 6명에게 원각의 보정을 부탁하고, 곡당원의 행궁에서 붕어하였다. 원협은 상사(喪事)를 감추고 비밀리에 움직였다. 그는 임성왕 원징을 비롯해서 측근 몇 사람과 함께 논의하여, 효문제의 시신을 안거(安車)에 눕혔다. 그런 후에 원협 등은 평소와 다름없이 출입하며 병세를 살피고 음식을 올리는 척하며, 외부에서 올라오는 문서를 결재하였다. 이는 아직 진현달의 군대가 멀리까지 철수하지 않아, 효문제의 붕어 소식을 듣고 이들이 다시 엄습해올 것을 걱정한 것이었다. 며칠 후, 완성(宛城)에 이르자, 밤중에 안거를 군청(郡廳)으로 옮겨 몰래 염하고 관에 모셨다. 이후 비밀리에 관을 다시 안거에 실었으며, 육군(六軍)의 안팎에서도 이를 아는 자가 없었다. 아울러 원협은 중서사인 장유(張儒)를 낙양으로 보내, 태자 원각에게 조서를 받들고 입조하여 효문제의 관을 모시도록 요청하였다.

태화 23년(499년) 4월 12일[7], 태자 원각이 노양(魯陽)에서 효문제의 관을 모셨고, 이때서야 비로소 효문제의 상사를 알렸다. 원각이 상복으로 갈아입고 발상한 뒤에 그 자리에서 황제로 즉위하니, 원협은 선무제 원각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효문제의 유칙(遺敕)이 적힌 종이 여러 장을 전달하였다. 이후 원협 등은 효문제의 유조를 받들어 유황후 풍씨를 사사하였다.

한편, 함양왕 원희는 원협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의심하여, 노양군 밖에서 대기하며 오랫동안 입성하지 않았다가 나중에서야 들어왔다. 원희가 원협에게 말했다.
"너는 단지 수고로움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그 위험함도 극에 달하였구나."
원협은 이에 분개하며 대답하였다.
"형님은 식견은 높고 연륜이 많아 위험과 평안을 구별할 줄 아시지만, 저는 뱀을 잡고 호랑이를 탄 듯한 상황 속에서도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원희가 말했다.
"너는 내가 늦게 온 것을 원망하는구나!"
효문제가 승하하고, 진현달이 도망친 뒤부터는 원협은 조정에서 효문제의 부고가 누설될 것을 우려하여 긴장과 압박 속에 행동하였다. 원협은 내심 비통했으나, 겉으로는 평온한 표정을 보이며, 출입하거나 머리를 조아릴 때도 기색에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노양에 이르렀을 때, 선무제의 측근인 동궁(東宮)의 관속들도 원협이 반란을 일으킬 마음을 품었다고 의심하며 몰래 경계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원협은 진심을 다하고 예법을 지켜 끝내 조금의 의심을 사는 행동도 하지 않았다.

원협이 효문제의 시호를 논의하는 상소를 올려 말했다.
"삼가 살펴보건대, 시법에 따르면 '시대와 협력하여 제사를 시작한 이는 효(孝)라 한다.', '오종(五宗)을 평안하게 한 이는 효(孝)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도덕이 널리 알려진 이는 문(文)이라 한다.', '천지의 이치를 경륜한 이는 문(文)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대행황제(大行皇帝)의 업적을 우러러 살피건대, 이 의미를 충분히 갖추고 있으니, 마땅히 존호를 올려 '효문황제(孝文皇帝)'라 하고, 묘호는 '고조(高祖)'라 하며, 능호는 '장릉(長陵)'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선무제가 이를 받아들였다.

태화 23년(499년) 5월, 효문제의 장례를 마친 후, 선무제는 원협을 재상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원협은 거듭 효문제의 유지(遺旨)를 언급하며 자신의 소박한 뜻을 따를 수 있도록 청원하였다. 하지만 선무제는 원협을 볼 때마다 비통한 마음이 들어 매번 그의 요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원협은 계속하여 상소를 올려 자신의 뜻을 알리며, 간절하고 진지한 말로 설득하였다. 결국 선무제는 효문제의 유지를 어기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하고, 마침내 원협의 소망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외직을 맡기는 방식으로 그의 재능을 활용하고자 하여, 원협을 사지절•시중•도독기정유영영안평7주제군사(都督冀定幽瀛營安平七州諸軍事)•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개부(開府)•정주자사(定州刺史)로 임명하였다. 원협은 이번에도 다시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고, 직접 나아가 이전의 뜻을 재차 밝히며 청원하였다. 그러나 선무제는 끝내 허락하지 않고 그를 직책에 머물게 하니, 원협은 하는 수 없이 부임하여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상서령 왕숙 등이 선무제에게 상주하였다.
"신들이 듣건대, 공적을 기리고 덕행을 드러내는 것은 선왕(先王)의 도(道)를 중히 여기는 것이며, 공훈과 친족을 높이는 것은 위대한 전례로 그 의리가 탁월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희단(姬旦)은 주나라(周)를 보필하여 곡부(曲阜)를 빛냈고, 동평왕(東平王)은 한나라(漢)을 보필하며 제후를 초월하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팽성왕 원협은 그 심오한 사상은 안에서 드러났고, 뛰어난 풍모는 밖으로 발현되었으며, 천지의 도리를 넓게 펼쳐 규범을 세우고, 한수(漢水)와 면수(沔水)의 어지러움을 쓸어버렸습니다. 선제(先帝)께서 하늘에 계실 때에도 봉황의 깃발은 휘날렸고, 육군(六師)을 안정시켜 남방의 복속을 엄숙히 이루었습니다. 또한 성황(聖皇) 폐하를 하늘의 갈림길에 오르게 하여 위나라(魏)의 영광과 은혜를 열었으며, 올바른 도리를 논하여 중추를 바로잡고, 왕도(王道)를 더욱 화목하게 하였으니, 일곱 가지 덕은 매우 훌륭하였고, 아홉 가지 공적은 찬미받을 만하였습니다. 신들이 이를 살펴보건대, 팽성왕에게 식읍 1,500호를 추가로 내려야 마땅하옵니다."
선무제도 조서로 이르기를,
"상주한 내용을 보니, 그 공적을 돌이켜 볼수록 더욱 슬픔이 커지며, 그 공훈과 덕행에 보답하기에 여전히 부족함을 느낀다. 그러나 우선 상주한 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라 하니, 원협은 거듭 상소를 올려 겸손하게 사양하였고, 선무제는 마침내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 이후 선무제는 서신을 보내어 원협에게 말했다.
"숙부께서 사양의 말씀을 주신 이후로 지금까지, 슬픔과 그리움에 목이 메입니다. 세월은 멀어져 가고, 어느덧 겨울의 끝자락에 이르렀는데, 항상 도(道)를 듣고 숙부의 교훈을 받들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숙부께서 이미 영화를 버리고 외진 곳에서 한가로이 지내고 계시니, 그 높은 덕을 갑자기 멀리할 수는 없습니다. 변방에 나가신 지도 여러 달이 되어, 황폐한 지역에서의 수고가 실로 깊습니다. 이제 주서(主書) 유도빈(劉道斌)을 보내어 저의 슬픔과 그리움을 전하오니, 숙부께서 반드시 이곳으로 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제 간절한 뜻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이에 원협은 수도로 올라와 선무제를 알현하였다.

경명 원년(500년) 정월 7일[8], 제나라의 예주자사 배숙업(裴叔業)이 수춘(壽春)을 들어 귀순하자, 선무제는 조서를 내려 원협을 도독남정제군사(都督南征諸軍事)로 임명하고, 다른 관직은 그대로 유지하도록 하였다. 원협은 상서령 왕숙과 함께 수춘으로 가서 배숙업을 맞이하였다.

경명 원년(500년) 2월 28일[9], 선무제가 조서를 내려 말했다.
"예로부터 다섯 가지 가르침으로 근원을 다스리는 일을 행할 자를 선발하기 어렵다고 하였는데, 어질고 지혜로우며, 친족으로서의 가까운 사이를 겸하지 않으면 이를 맡기기 어렵다. 팽성왕은 밝은 덕과 친밀한 관계로 보필과 교육을 맡았으며, 외적으로는 변방을 다스리고, 내적으로는 조정의 중요한 직책을 담당하며 안팎을 화합시켜 백성과 신들이 그에게 의지하였다. 지금 군사를 지휘하며 위엄을 떨치고 있으니, 마땅히 그의 명성과 권위를 높여야 한다. 다시 사도(司徒)의 직위를 내려 그 덕망과 참됨을 빛내게 하라."
또한 원협이 본래의 관직을 유지하면서 양주자사(揚州刺史)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원협은 형벌을 간소화하고 예를 바르게 이끌어 백성과 함께 휴식을 취하며 안정된 통치를 이루었다. 양주(揚州)의 경계는 걱정이 없었고, 멀고 가까운 곳 모두 평온하였다.

경명 원년(500년) 3월, 양주(揚州)에 속한 건안(建安)에서 수주(戍主) 호경략(胡景略)은 여전히 제나라를 위해 저항하며 북위에 항복하지 않았다. 이에 원협은 수군과 육군을 동원하여 토벌하였고, 호경략은 스스로 포박한 채 나와 항복하였다. 원협이 수춘에 도착한 이후, 동쪽으로는 성과 수비대를 안정시켜 양석(陽石)에 이르렀으며, 서쪽으로는 건안을 평정하였다. 산간의 오랑캐들도 순종하였고, 복종하지 않은 무리는 토벌하여 참수하거나 생포한 적은 수만 명에 달하였다.

경명 원년(500년) 6월 8일[10], 원협이 대사마(大司馬)로 진급하고, 사도를 비롯한 다른 관직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또, 식읍 800호가 추가로 더해졌다.

경명 원년(500년) 8월 18일[11], 제나라의 관군장군 진백지(陳伯之)가 비구(肥口)에 주둔하고, 그의 장수 호송(胡松)은 양성(梁城)을 점거하였으며, 제나라 수군이 이어져 200여 리에 걸쳐 배치되어 수춘을 압박하였다. 이에 원협은 장병들을 나누어 지휘하며 각 진영을 나누어 공격하였다. 진백지와 호송이 병력을 이끌고 나와 싸웠으나, 여러 장수들이 그들을 공격하여 적군 9,000명을 참수하고, 10,00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진백지 등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봉화(烽火)로 퇴각하였다. 원협은 다시 여러 장수들에게 명을 내려 계속해서 싸우게 하였고, 진백지는 계책이 다하여 밤중에 도망쳤다. 이로써 회남(淮南)이 평정되었다. 선무제가 조서를 내려 말했다.
"팽성왕은 황실과 가까운 친척으로서 높은 지위에 있고, 그 덕과 공훈은 둘도 없으며, 짐은 식견이 부족하여 왕의 보필에 의존하였다. 최근 수춘(壽春)이 처음 평정되면서 진압의 책임이 무거워, 왕으로 하여금 친히 군대를 지휘하며 멀리 회수(淮水) 밖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무더운 열기를 무릅쓰고, 가마가 흔들리는 고생 속에서 오랜 기간 군략을 펼치며 반드시 피로와 손실이 따랐을 것이다. 짐 또한 왕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 밤낮으로 그리움이 이어졌다. 더구나 승리를 거두고 방략을 펼쳐, 위엄과 공적이 두루 드러나고, 공사(公私)가 모두 이를 칭송하니, 그 의로움이 참으로 기리고 찬양할 만하다. 비록 개선의 기일이 정해져 있더라도 더 미루지 말라. 속히 급사황문시랑(給事黃門侍郎) 정도조(鄭道昭)를 보내어 그곳에서 왕을 위로하도록 하라."
이에 원협을 소환하여 조정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원협은 정사를 행함에 있어 관대하고 너그러움을 숭상하였으며, 사소한 잘못도 범하지 않았다. 회남의 사대부와 백성들은 그의 은혜를 그리워하며, 지금까지도 추억하였다. 당초 원협이 수춘을 평정하였을 때, 제나라의 여음(汝陰) 태수 왕과(王果)와 예주치중 유직(庾稷) 등 여러 사람을 사로잡았다. 원협은 그들을 정중히 대하며 예우하였고, 항상 자리에 함께 앉도록 하였다. 이때 왕과가 틈을 타 원효에게 청하였다.
"저희는 일생 동안 이리저리 떠돌며 고생하였고, 이제 머리가 희어졌으니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 성스러운 교화를 만나, 마땅히 이 노쇠한 몸을 다해 미력을 바치고, 조금이나마 보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남쪽에 100여 명의 가족이 생사 여부도 모른 채로 흩어져 있으니, 강남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해 주시어 덕과 은혜를 펼칠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청합니다."
원협은 그 말을 듣고 측은히 여겨 허락하였다. 그러자 왕과가 감사의 뜻을 표하며 다시 말했다.
"전하께서 저희를 국사(國士)를 뛰어넘는 은혜로 베풀어 주셨습니다. 저희는 이제 돌아가면서도 전하의 자비와 은혜를 저버리는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청건대, 인자하신 전하의 가마가 군대를 이끌고 개선하시어 강남과 반대로 향해주십시오."
이렇게 말한 뒤 그들은 돌아갔다. 이처럼 원협은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깊은 존경과 그리움을 받았다.

원협이 낙양에 이르자, 선무제는 동당(東堂)에서 그를 맞아 접견하였다. 선무제가 조서를 내려 원협에게 말했다.
"요즘 봉황(鳳皇)이 아직 내려오지 않아 백성과 변방의 두 지역을 교화하지 못했기에, 그대의 높은 지혜를 의지하여 변방을 안정시키고 백성을 위로하였다. 그러나 적의 무리가 어리석고 방자하여 감히 회수(淮水)와 초(楚) 지역에서 싸움을 벌이니, 숙부께서는 뛰어난 지략과 빛나는 재능으로 적을 응징하고 평정하셨다. 이제 승전하여 개선한 이 날, 깊이 위안을 느끼며 그동안의 기다림이 보람되었다."
원협이 감사를 표하며 말했다.
"신이 감히 군대를 맡아 새롭게 복속된 지역과 기존의 땅을 안정시키는 일을 맡았으나, 무력을 펼치는 바람에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멀고 가까운 곳 모두를 위엄으로 품어야 할 책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소인배 진백지(陳伯之)가 개미 같은 무리를 이끌고 변방의 요새를 침략하며 소란을 일으키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는 하늘 같은 폐하의 용안을 우러러 보기에 부끄럽고, 조정의 여러 신하들에게도 머리를 숙여 송구함을 느끼게 합니다. 《 춘추》에서 책임을 묻듯, 신이 마땅히 이를 부담해야 하나, 폐하의 깊은 자비로 과오를 용서받아, 신이 죄책을 면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이후 원협은 대사마와 사도의 직책 및 추가로 받은 식읍을 거듭 사양하며, 자신을 중산(中山)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청원하였다. 그러나 선무제는 조서로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경명 원년(500년) 10월 21일[12], 선무제가 원협을 녹상서(錄尚書)•시중으로 삼고, 사도 직함은 유지하게 하였다. 원협은 굳게 사양하였으나 면할 수 없었다. 원협은 평소 담백하고 소박한 삶을 좋아하여 권세와 이익에 마음을 얽매지 않았다. 효문제는 그의 능력을 중히 여겨 계속 중책을 맡겼고, 원협은 이를 거듭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효문제가 붕어하고 그 뒤를 이은 선무제도 원협을 계속 곁에 두고자 하였고, 이는 원협의 본래 뜻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이에 원협은 항상 쓸쓸히 한숨을 쉬며 탄식하곤 하였으나, 조서의 뜻이 간절하였기에, 원협은 마지못해 명령을 받아들여 녹상서에 올랐다.

당시 함양왕 원희는 점차 교만해져 다소 법을 어기는 행위를 하였다. 다른 보정대신들을 밀어내고 권력을 독차지하고 싶었던 북해왕 원상은 은밀히 선무제에게 이를 일러바침으로써, 선무제의 마음에 깊은 경계심을 품게 하였다. 또한, 원상은 원협이 백성들에게 큰 신망을 얻고 있음을 지적하며, 그가 오래도록 재상의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원상은 선무제에게 효문제의 유칙(遺敕)에 따라 원협을 재야로 돌려보낼 것을 권유하였다. 한편, 함양왕 원희 등은 영군장군 어열(於烈)을 억지로 항주(恆州)로 보내려고 하였다. 이는 어열의 본심이 아니었으나, 원희는 끝까지 강요하였고, 어열은 이에 대해 깊이 분노하였다.

경명 2년(501년) 정월 15일[13], 어열의 아들 어충(於忠)은 선무제의 곁에서 가까이 지냈는데, 어열은 은밀히 어충에게, 선무제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도록 지시하였다.
"여러 왕들의 속마음을 헤아리기 어렵사오니, 그들을 폐출시키고 조속히 직접 정무를 맡아 보심이 좋겠습니다."
때마침 약제(礿祭)를 올릴 기간이라 왕공(王公)들이 모두 종묘 동쪽의 거처에서 재계하고 있었다. 선무제는 어열에게 궁중 숙위병 60여 명을 이끌게 하여, 함양왕 원희, 팽성왕 원협, 북해왕 원상 등을 불러 광극전(光極殿)으로 들이게 하였다. 선무제가 원협에게 말했다.
"근래 남북(南北)의 일이 번잡하여, 숙부께서 소박한 뜻을 이루시도록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 각(恪, 선무제의 휘)이 무슨 사람이기에 감히 오래도록 선황의 칙령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이제 숙부의 고상한 뜻을 이루어드리겠습니다."
이에 원협이 감사를 표하며 아뢰었다.
"선황께서는 신의 부족함과 얕은 재주를 탓하지 않으시고, 특별히 다함없는 은혜를 내려 주셨습니다. 출입을 막론하고 가까이 보살펴 주시며, 공사(公私)를 가리지 않고 신에게 의지해 주셨습니다. 폐하께서 구오(九五)에 오르신 이후로, 신은 여러 차례 직책에서 물러날 것을 요청하였으나, 폐하께서도 재상의 직책을 억지로 맡기시며,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지난해 여름, 천청(天聽)이 다시 번거롭게 되었을 때, 폐하께서 특별히 은혜를 베푸시어, 신을 정주(定州)로 내보내 주셨습니다. 그 후 작년에 낙양으로 돌아왔을 때, 명을 받아 회수(淮水)와 비구(肥口) 지역의 군대를 총괄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공적을 세운 바는 없으나, 다행히도 큰 죄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낙양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신에게 합당치 않은 직책을 맡기시니, 신은 여러 번 간청하며 폐하의 성스러운 귀에 모든 것을 아뢰었습니다. 결국 폐하께서 효성이 깊으셔서 뜻을 굽히지 않으시고, 위로는 선황의 유조를 받들어 그 지혜롭고 밝으신 아름다움을 이루시며, 아래로는 신과 같은 미천한 신하의 뜻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를 생각하니 지금 떠나려는 이 마음에 슬픔과 기쁨이 깊이 교차합니다."
이내 선무제는 조서를 내려 말했다.
"팽성왕은 평소 한적함과 고요함을 숭상하며, 세속의 일을 멀리하려는 뜻을 지니고 있었으나, 선황이 그를 지극히 사랑하고 신뢰하여 그 뜻을 따르지 않으셨다. 이윽고 유칙(遺敕)을 내리시어 소박하고 물러나려는 뜻을 허락하셨으니, 그 고상한 품행은 변함이 없다. 짐 또한 이를 거스르거나 억누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 마침내 관직을 내려놓고 사저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니, 언덕과 동산에서의 삶을 영위하도록 하라. 고상한 절개는 참으로 굳고도 견고하며, 《분(賁)》과 《이(履)》의 지조는 아득하여 따르기도 어렵다.

팽성왕의 저택은 막 건축을 시작하였으나, 재력과 자원이 부족하여 완공될 기약이 해를 넘기고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공역(工役)을 적절히 배치하고, 재목과 기와를 나누어 제공하라. 왕의 뜻에 따라 신속히 마련되도록 하되, 반드시 간소함을 따르게 하여 왕의 마음에 부합하도록 하라."
원협은 이를 계기로 《승부(蠅賦)》를 지어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며, 참소와 모함을 경계하였다.

경명 4년(503년) 7월 21일[14], 선무제가 원협을 태사(太師)로 임명하였으나, 원협은 이를 굳게 사양하였다. 이에 선무제가 조서로 이르기를,
"하늘과 땅이 형상으로 나뉘었을 때, 군신(君臣)의 지위가 형성되었고, 상하(上下)가 그 자리에 있으면 창화(唱和)의 의로움이 생겨난다. 예로부터 하늘의 이치를 이어받아 천하를 다스리는 군주는 밝은 스승에 의지하고, 현명한 보좌에 힘입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음양(陰陽)을 조화롭게 다스리고, 예의와 인륜, 백성과 만물을 바르게 다스릴 수 있었지 않았는가? 떠나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은, 과연 옛사람들에게도 있었으나, 이는 바로 그 몸만을 스스로 잘 다스릴 뿐, 큰 윤리와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을 신경쓰지 않는 산림의 은자(隱士)를 이르는 것이다. 현인(賢人)과 군자(君子)는 그러하지 않다. 자신을 굽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몸을 고되게 하여 만물을 구제하는 것, 이는 바로 먼저 아는 자로서 나중에 아는 자를 깨우치며, 세속과 함께하면서도 천하와 더불어 깨끗함을 유지하는 이라 할 것이다.

짐은 일찍이 나이가 어린 채로 황위에 올라 천하를 다스리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숙부께서 보좌한 공로에 힘입은 것이다. 진실로 마땅히 숙부께서는 장수와 재상의 직책을 영구히 겸하여 안팎의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나 선황의 뜻을 억지로 어기는 것은 꺼려지고, 숙부의 소박하고 물러나려는 마음을 거스르는 것 또한 조심스럽다. 이에 뜻을 낮추고 마음을 갈라내어, 숙부의 고상한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한 것이었다. 최근 수해와 가뭄이 조화를 잃고, 음양이 그 질서를 잃었으니, 이에 왕을 모셔 도(道)를 논하게 하여, 바라건대 이 옥촉(玉燭)을 조화롭게 다스리려 한다. 아울러 스승과 재상의 직무는 여유로이 수행하게 하여, 그 고상한 품격을 간직하게 하려 한다. 그러므로 주공(周公)은 다시 조정을 열어 그 자리를 지켰고, 태공망은 백세의 수명을 누리며 그 직위를 마쳤다. 팽성왕의 의리는 집안과 국가를 겸하여 지켜, 그 이치가 나라에서 홀로 높은 지경에 이르렀다. 시중(侍中)을 보내어 그를 정중히 타이르고 권유하도록 하라."
동시에 선무제는 원협에게 가족의 뜻을 담아 쓴 편지를 보내어 말했다.
"원각이 아뢰옵니다. 숙부께서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시며 여전히 겸손함을 지키고 계시나, 조카의 부족한 능력으로는 정사를 다스리는 데 결점이 많아, 숙부의 보필과 지도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숙부의 덕망은 중하고도 무거우니, 스승의 가르침으로 삼아 모든 이가 돌아갈 수 있는 의지할 곳이 됩니다. 어찌 집안과 나라를 멀리하시고, 스스로의 청정한 뜻을 지나치게 높이시는 데에 머무려 하십니까? 바라건대 뜻을 굽혀 받아들여 주시어, 조카의 간절히 의지하는 마음을 이루어 주십시오."
원협은 어쩔 수 없이 선무제의 명령을 받아들였다. 원협이 태사로 임명되어 조정에 복귀한 이후, 선무제는 원협의 저택으로 자주 행차하였다.

정시 원년(504년) 5월, 일찍이 선무제는 외척 고조에게 정무를 위임하였는데, 고조는 원협을 포함한 북해왕 원상 등 여러 황족들을 무척 꺼렸다. 결국 고조가 원상이 반란을 모의했다며 참소하였고, 원상 또한 이전부터 저지르던 부정한 행위가 많아, 폐출당하고 얼마 안 가 급사하였다. 원상이 모반을 꾸몄다는 참소를 믿고 있던 선무제는 조서를 내려 숙위대주(宿衛隊主)에게 우림군과 호분군을 이끌게 하여, 여러 왕들을 각각 그들의 저택에 유폐시키도록 명령하였다. 원협은 상소를 올려 간절하게 이에 대해 간언하였으나, 선무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저택에서 유폐당한 원협은 산수(山水)를 즐길 여유가 없었고, 절친한 벗들과의 교류도 끊겨, 오직 아내와 자식들과 지내며 울적하고 즐겁지 못한 날들을 보냈다.

조정의 율령을 논의하고 확정하는 과정에서 원협은 고양왕 원옹과 팔좌(八座)의 대신들, 그리고 재능과 학문이 뛰어난 학자들과 5일마다 모여 제도의 타당성과 규범의 적합성을 논의하였다. 원협은 어려서부터 효문제를 가까이 모셨던 경력이 있었고, 총명하고 박식하였기에, 그가 내린 모든 결정은 당시의 명사들로부터 경외와 신뢰를 받았다. 또한 그는 용모가 빼어나고 풍채와 자태가 훌륭하여, 단정하고 엄숙한 모습은 마치 신선과 같았으며, 행동과 태도는 항상 예법에 맞았다. 출입하며 대화하거나 웃음을 보일 때도 사람들은 그를 보고 피로를 잊을 정도였다. 이로 인해 얼마 뒤에 시중의 직책이 더해졌다.

원협은 문학과 역사를 숭상하고, 여가가 생기면 책을 읽고 살피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고대의 제왕과 현명한 인물에서부터 북위의 선조들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30권 분량의 책 《요략(要略)》을 편찬하였다. 그는 조심스럽고 신중하여 처음부터 큰 과오가 없었으며, 비록 한가롭게 지내거나 연회를 즐길 때도 태만하거나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유학자들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진심으로 예우하였다. 그는 성정이 청렴하고 검소하여, 그의 집을 사사로이 방문하는 자는 없었다고 한다.

한편, 상서령 고조는 성격이 사악하고 고집이 세며, 재능 있는 사람을 해치기를 즐겼다. 한번은 고조의 조카 고영이 황궁에 들어가 선무제의 후궁이 되었는데, 때마침 순황후 우씨가 사망하자 선무제는 그녀를 황후로 삼고자 하였다. 이에 원협은 강하게 반대하며 이를 막으려 하였다. 고조는 이를 계기로 선무제에게 원협을 수차례 참소했으나, 선무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이 과정에서 선무제는 고영을 황후로 세웠기에 원협의 정치적 입지는 매우 좁아지게 되었다.

영평 원년(508년) 8월, 경조왕 원유가 신도(信都)에서 거병하여 황제를 참칭하였다. 원협은 이전에 조정에 건의하여 그의 외숙부인 반승고(潘僧固)를 기주(冀州)의 악릉(樂陵) 태수로 임명하게 한 적이 있었는데, 반승고는 원유에게 강요받아 이에 가담하게 되었다. 원협을 제거할 기회만 노리던 고조는 반승고가 원유의 반란에 동참한 일을 이용해, 원협이 북쪽으로는 원유와 내통하고 남쪽으로는 만적(蠻賊)을 불러들였다고 무고하였다. 이때 원협의 부하인 팽성국의 낭중령 위언(魏偃)과 전방각(前防閣) 고조진(高祖珍)이 고조와 친밀히 어울리며, 그와 함께 음모를 꾸미는 데 가담하였다. 고조는 처음에 시중 원휘를 이용해 이를 선무제에게 아뢰도록 할 계획을 꾸몄으나, 원휘가 따르지 않아 실패하였다. 이에 그는 좌위장군 원진(元珍)[15]을 시켜 선무제에게 아뢰게 하였다. 선무제가 이 일에 대해 원휘에게 물었더니, 원휘는 원협에게 그러한 혐의가 없음을 명확히 밝혔다. 그러나 선무제가 고조를 불러 다시 묻자, 고조는 위언과 고조진을 증인으로 내세웠고, 선무제는 마침내 이를 믿게 되었다.

영평 원년(508년) 9월 18일[16], 선무제는 원협과 고양왕 원옹, 광양왕 원가, 청하왕 원역, 광평왕 원회, 그리고 고조 등을 소환하였다. 그러나 원협의 왕비 이원화(李媛華)가 막 출산을 한 상태였기에, 원협은 이를 이유로 소환에 응하지 않겠다고 굳게 사양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중사(中使)가 거듭 독촉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수레를 준비하도록 명령하고 떠날 준비를 하였다. 원협은 몹시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이원화와 작별 인사를 한 뒤 수레에 올라탔다. 원협이 동액문(東掖門)에 들어가 작은 다리를 건널 때, 그의 수레를 끌던 소가 나아가기를 거부하였고, 채찍질을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한참 후에 다시 황제의 사자가 와서 원협의 늦음을 책망하니, 결국 소를 떼어내고 사람의 힘으로 수레를 끌게 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이후 금중(禁中)에서 연회가 열렸다.

밤이 되자 연회가 파하였고, 참석자들은 모두 술에 취하여 각자 흩어져 쉬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진이 무사들을 거느리고 들이닥쳐, 독주를 들고 와 원협에게 마실 것을 강요하였다. 원협이 말했다.
"내가 조정에 충성을 다했거늘, 무슨 죄로 죽임을 당해야 하는가! 단 한 번이라도 황제를 뵐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원진이 말했다.
"폐하를 다시 뵐 수는 없습니다! 왕께서는 그저 이 술을 드시기만 하면 됩니다."
원협이 다시 말했다.
"폐하께서는 성스럽고 밝으신 분이니, 까닭 없이 나를 죽이실 리가 없다. 나의 죄를 고하는 자와 단 한 번이라도 대면하여 시비를 가리게 해 달라."
그러자 무사들이 칼자루로 원협을 두 차례 강하게 때렸다. 이에 원협은 크게 외치며 말했다.
"하늘이시여! 충성을 다했음에도 죽임을 당하니 억울합니다!"
무사들이 아랑곳 않고 다시 칼자루로 원협을 때리니, 결국 원협은 독주를 마셨고, 무사들이 곧이어 그를 죽였다. 다음 날 아침, 원진은 이불로 원협의 시신을 감싸고, 수레에 실어 궁의 병문(屏門)으로 나갔다. 그리고 시신을 원협의 저택으로 운구하며, 왕이 술을 마시다가 붕어했다고 알렸다. 원협의 왕비 이원화는 사공 이충(李沖)의 딸이었다. 그녀는 크게 통곡하며 외쳤다.
"고조(高肇)가 억울하게 사람을 죽였으니, 하늘의 도리가 있다면 너도 반드시 악한 죽음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먼 훗날 고조가 죄를 지어 처형되자, 이를 두고 논하는 사람들은 인과응보가 있었다고 여겼다.

선무제는 동당(東堂)에서 원협을 위해 애도를 표하고, 동원(東園)의 비기(秘器), 조복(朝服) 한 벌, 부의금 80만 전(錢), 비단 2,000필, 밀랍 500근을 하사하였으며, 대홍려(大鴻臚)로 하여금 장례를 주관하게 하였다. 원협은 국가에 큰 공로가 있었음에도, 아무런 죄 없이 억울하게 해를 당했기에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원통히 여겼다. 길을 지나던 남자와 여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고령공(高令公, 고조)이 이토록 어진 왕을 억울하게 죽이다니!"
조정에서도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충격을 받고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원협은 사후 가황월(假黃鉞)•사지절(使持節)•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사도공(司徒公)•시중•태사 등의 관직으로 추증되었으며, 왕의 지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장례 때에는 난로(鑾輅)와 구류(九旒)의 깃발이 제공되었고, 호분과 반검(班劍) 100명이 호위병으로 배치되었으며, 우보(羽葆)와 고취(鼓吹), 온량거(轀輬車)가 제공되었다.

관련 부서에서 상주하며 태상경 유방(劉芳)의 논의에 따라 원협의 시호를 다음과 같이 올렸다.
"왕은 어릴 적부터 덕을 드높이고, 어린 나이에도 지극한 효성을 타고났습니다. 지혜롭고 밝은 본성은 사람을 뛰어넘었으며, 배움을 스승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스스로 깨달았습니다. 뛰어난 품행은 타고난 천성과 같았고, 남다른 아름다움은 어려서부터 두드러졌습니다. 정사(政事)에 참여한 후에는, 그의 지도와 관리로 조정이 빛을 발하였으며, 중책을 맡아 오교(五教)를 밝게 펼쳤습니다. 한수(漢水) 이북이 위기에 처하자,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죄를 물으러 나섰고, 왕은 내적으로는 약과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며 황제를 모셨고, 외적으로는 육군(六師)을 총괄하였습니다. 황제의 붕어 소식에 조정과 백성이 모두 슬픔에 잠겼을 때도, 왕은 슬픔 속에서도 용맹을 떨치며 뛰어난 계략으로 조정을 안정시켰고, 황제의 영구를 호위하며 군대를 정비하고 깃발을 떨쳤습니다. 왕은 완(宛)에서 사무를 처리하고, 마침내 노양(魯陽)에 이르러, 선황의 유지를 받들며 장례를 모셨으니, 그 공적은 주공(周公)과 곽자맹(霍子孟)에 견주어 봐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왕은 선황의 유지를 이어 보필하며 먼 지역부터 가까운 곳까지 안정시켰고, 변방을 나누어 다스려 항상 그 명성이 연(燕)과 조(趙) 땅에 퍼졌으며, 강서(江西)를 평정하여 남월(南越)을 위압하였습니다. 그런 후에 조정에 들어와 백규(百揆)를 바로잡아 온갖 공적을 드러내며 조화롭게 다스렸고, 부지런함을 꺼리지 않았으며, 공적이 쌓일수록 더욱 겸손하였습니다.

온화하고 공손하며, 유순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녔으며, 충성스럽고 품격이 고상하며 관대하고 인자하였습니다. 일거수일투족이 법도에 맞았고, 끝맺음을 잘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습니다. 그 마음은 고상하고, 공적을 이루고 나서는 몸을 물러나게 하였으며, 그 의로움은 성스러운 군주의 뜻을 밝히고, 그 아름다움은 세상의 전범(典範)을 빛냈습니다. 시법(謚法)에 의하면, '큰일을 보전하고 공을 세운 자는 『무(武)』라 하고, 바르게 묻고 두루 통달한 자는 『선(宣)』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시호를 '무선왕(武宣王)'이라 정하는 것이 옳습니다."
선무제도 이를 채택하여 원협의 시호를 '무선왕(武宣王)'이라 하였다.

훗날 아들 효장제 원자유가 즉위하자, 원협의 묘호를 '숙조(肅祖)', 시호 '문목황제(文穆皇帝)'로 추존하였다. 그러나 절민제 시기 원협의 위패는 종묘에서 철거되었고 효장제가 추존한 제호(帝號)들은 폐지되었다.

3. 가족

4. 참고문서



[1] 주나라 시기에 왕이 제후들에게 연회를 베풀 때 연주하던 노래 중 하나다. [2] 무인년 병진월 임오일. 음력으로는 3월 1일이고, 양력으로는 4월 7일이다. [3] 무인년 병진월 신해일. 음력으로는 3월 30일이고, 양력으로는 5월 6일이다. [4] 무인년 갑자월 신사일. 음력으로는 11월 4일이고, 양력으로는 12월 2일이다. [5] 기묘년 무진월 경자일. 음력으로는 3월 24일이고, 양력으로는 4월 20일이다. [6] 기묘년 기사월 병오일. 음력으로는 4월 1일이고, 양력으로는 4월 26일이다. [7] 기묘년 기사월 정사일. 음력으로는 4월 12일이고, 양력으로는 5월 7일이다. [8] 경진년 무인월 정미일. 음력으로는 1월 7일이고, 양력으로는 2월 21일이다. [9] 경진년 기묘월 무술일. 음력으로는 2월 28일이고, 양력으로는 4월 12일이다. [10] 경진년 계미월 병자일. 음력으로는 6월 8일이고, 양력으로는 7월 19일이다. [11] 경진년 을유월 을유일. 음력으로는 8월 18일이고, 양력으로는 9월 26일이다. [12] 경진년 정해월 정해일. 음력으로는 10월 21일이고, 양력으로는 11월 27일이다. [13] 신사년 경인월 경술일. 음력으로는 1월 15일이고, 양력으로는 2월 18일이다. [14] 계미년 경신월 신미일. 음력으로는 7월 21일이고, 양력으로는 8월 28일이다. [15] 북위의 국성을 사용하나 황제인 조상이 열조부(6대조, 탁발울률)까지 올라가야 할 정도로 본 황실과는 촌수가 멀었다. [16] 무자년 임술월 무술일. 음력으로는 9월 18일이고, 양력으로는 10월 27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