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63631, #D9534F 20%, #D9534F 80%, #C63631); color: #ece5b6;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북위 北魏 | ||||
추존 (탁발부 수령) | |||||
성제 | 절제 | 장제 | 명제 | 안제 | |
선제(宣帝) | 경제 | 원제 | 화제 | 정제 | |
희제 | 위제 | 헌제 | 성무제 | 신원제 | |
문제 | 장제 | 평제 | 사제 | 소제 | |
환제 | |||||
추존 황제 | 대나라 국왕 | |||||
목제 | 평문제 | 혜제 | 양제 | 열제 | |
소성제 | 헌명제 | ||||
추존 황제 (도무제 이후) | |||||
경목제 | 팽성무선왕 | 효선제 | 무목제 | 선제(先帝) | |
비정통 | |||||
양려왕 | 효명제의 딸 | 유주 | 북해왕 | 여남문선왕 | |
문경제 | |||||
}}}}}}}}} |
<colbgcolor=#DC143C><colcolor=#ece5b6> 북위 추존 황제
원소 | 元劭 |
|||
출생 | 507년 이전 | ||
북위
하남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
|||
사망 | 528년 5월 17일 | ||
북위
하남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
|||
능묘 | 미상 | ||
재위기간 | 북위 무상왕(無上王) | ||
528년 5월 15일 ~ 528년 5월 17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DC143C><colcolor=#ece5b6> 성씨 | 하남 원씨 | |
휘 | 소(劭) | ||
부모 |
부황 숙조 모후 문목황후 |
||
형제자매 | 4남 5녀 중 차남 | ||
배우자 | 문공황후 | ||
자녀 | 2남 | ||
종교 | 불교 | ||
자 | 자눌(子訥) | ||
작호 |
팽성왕(彭城郡) → 무상왕(無上王) → 무상황(無上皇) |
||
시호 | 효선황제(孝宣皇帝) |
[clearfix]
1. 개요
남북조시대 북위 말기의 황족. 제6대 현조 헌문제 탁발홍의 손자이자, 팽성무선왕 원협의 적자. 모친은 팽성왕비 이씨로 제10대 경종 효장제 원자유와는 동복형제.2. 생애
원소는 팽성왕 원협이 죽고 나서 부친의 작위를 계승하였다. 그는 무예에 능하고 젊어서부터 지조와 절개가 있었다. 효명제 원후 재위 초에, 양나라의 무제 소연이 군대를 보내 북위의 변경을 침범하자, 원소가 상소하여 아뢰었다."거짓된 무리들이 떠도는 혼백처럼 변경을 엿보며, 군대를 동원하게 하고 하루에 천금의 비용이 들게 합니다. 신은 선조의 공적에 의지하여 풍성한 녹봉을 받아 누리고 있으니, 먼지 같은 미력으로 산과 바다 같은 국가에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신의 영지가 있는 서주(徐州)는 군대와 가까운 곳에 있으니, 삼가 곡식 9,000석, 비단 600필, 영지의 관리 200명을 바쳐 군용에 충당하고자 합니다."
당시 섭정을 맡고 있던
영태후 호씨는 원소의 충성심을 칭찬하였으나, 이를 허락하지는 않았다. 원소는 종정소경(宗正少卿)으로 관직을 시작하여, 이후 사지절(使持節)•가 산기상시(假散騎常侍)•평동장군(平東將軍)•북청주자사(北青州刺史)로 임명되었다.효창 3년(527년) 3월, 제주(齊州)의 백성인 유균(劉均)이 광천군(廣川郡)에서, 백성 방경(房頃)이 창국성(昌國城)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원소는 자신의 사마 녹여(鹿悆)를 보내 주군(州軍)을 감독하며 이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녹여의 토벌군은 상산(商山)에서 반란군과 전투를 벌여 어느 정도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장수들은 모두 원소의 측근으로, 그들 중 일부가 전공(戰功)을 과장하여 머리 수를 부풀리고 거짓으로 포상을 청하였다. 이에 녹여가 원소의 면전에서 이를 문제 삼으며 포상을 내리지 말 것을 주장했으나, 원소가 따르지 않으려 하였다. 결국 녹여는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내 온 힘을 다해 의견을 세우고 행동하는 것은 왕과 국가를 위함이지, 이 녹여 개인의 집안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는 더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떠나니, 원소가 뒤쫓아가 사과하였다. 이때 양나라의 무제도 혼란스러운 북위의 정국을 틈 타서 장수 팽군(彭群)과 왕변(王辯) 등을 보내 70,000군대로 낭야(琅琊)를 공격하게 하였다. 봄부터 가을까지 조정의 구원군은 오지 않았고, 남청주와 북청주의 병력을 다 합해보아도 겨우 10,000여 명에 불과하여, 북위군은 운성(鄖城)에 주둔한 채 오랫동안 진격하지 못하였다.효창 3년(527년) 7월, 원소는 녹여를 파견하였고, 남청주자사 호평(胡平)은 장사 유인지(劉仁之)를 보내 여러 장수를 감독하며 직접 적의 진영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이들은 대승을 거두어 적을 크게 무찌르고, 적장 팽군의 수급을 베었으며, 2,00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효창 4년(528년) 2월, 영태후가 장성한 효명제로부터 권력을 지키기 위해 황제를 독살하였다. 여기에 더해서 육진의 난으로 사방이 혼란스러워지자, 원소는 다른 뜻을 품었다. 그러나 안풍왕 원연명의 고발로 조정에 소환되어 어사중위(御史中尉)로 임명되었다.
건의 원년(528년) 4월, 변고를 들은 글호족 이주부의 추장 이주영이 진양(晋陽)에서 출격하여 하내(河內)로 진군하였다. 이주영은 왕상(王相)을 낙양으로 파견해 원소의 동생 원자유와 접촉하였고, 원자유는 형 원소와 동생 원자정과 함께 밤에 황하(黃河)를 건너 이주영에게로 도망쳤다. 이후 이주영에 의해 황제로 즉위한 효장제 원자유는 원소를 무상왕(無上王)으로 존숭하였다.
건의 원년(528년) 4월 13일[1], 대장군 이주영이 하음(河陰)에서 영태후와 여러 북위의 황족들을 살해하였다. 이때 원소도 다른 황족들과 마찬가지로 살해당했고, 사후 '무상황제(無上皇帝)'으로 높여졌다가, 529년 '효선황제(孝宣皇帝)'로 추시되었다. 아들 원소가 본래의 팽성왕 작위를 이었다.
3. 가족 관계
원소에게는 두 아들 원소(元韶)와 원습(元襲)이 있었다.
[1]
무신년 정사월 경자일. 음력으로는 4월 13일이고, 양력으로 5월 17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