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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비정통 황제
원호 | 元顥 |
|
<colbgcolor=#DC143C>묘호 | 없음 |
시호 | 없음 |
작호 | 북해왕(北海王) |
연호 |
효기(孝基, 529년) 건무(建武, 529년) |
성 | 원(元) |
휘 | 호(顥) |
자 | 자명(子明) |
생몰 | ? ~ 529년 |
재위 | 529년 |
[clearfix]
1. 개요
남북조시대 북위의 황족으로 자는 자명(子明)이었으며, 비정통 황제이자 외세인 양나라의 힘을 빌린 반역자였다.2. 생애
원호의 할아버지는 제6대 현조 헌문제로, 그의 아버지는 북해왕(北海王) 원상(元詳)이었다.부친의 북해왕 작위를 이은 원호는 처음에 용양장군, 통직산기상시로 제수되었고, 종정경, 광록대부로 전임되었으며, 장성한 뒤에는 종정경, 산기상시, 평동장군을 겸임했다. 이후에는 도관상서로 전임되었고 안남장군이 더해졌으며, 산기상시, 무군장군, 서주(徐州)자사를 맡았지만, 이윽고 어사로부터 탄핵을 받아 제명되었다.
숙근명달(宿勤明達)과 질간기린(叱干騏驎) 등이 빈주와 화주 등지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원호는 왕작이 회복되었는데, 사지절, 도독화빈동진제군사(都督華豳東秦諸軍事)가 되어 좌복야와 서도행대를 겸임하고 이들의 반란을 진압했다. 원호는 이때 공적을 세워서 정서장군으로 승진했고, 지절, 행대, 도독을 그대로 받은 채 상서우복야로 임명되었으며, 거기대장군, 의동삼사로 옮겼다. 한편 소보인 등이 평양(平涼)에서 패배하자 원호는 어쩔 수 없이 수도 낙양으로 돌아왔다.
갈영(葛榮)이 반란을 일으키고 업성으로 침공해오자, 원호는 시중, 표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 상주(相州)자사로 임명되어 갈영의 침공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원호가 급군(汲郡)에 당도했을 때, 선비화한 갈족계 이주부의 추장인 이주영이 이미 수도 낙양으로 입성하여 조정을 장악하고, 제9대 숙종 효명제를 독살한 영태후 호씨와 유주 원조를 황하에 던진 뒤 원자유를 제10대 경종 효장제로 옹립했다. 갈영의 침공과 이주영이 북위 조정을 장악했다는 소식까지 겹치면서 원호는 결국 자신의 안전을 도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당시 원호의 외숙부인 범준(范遵)이 은주(殷州)자사로 부임했으나 갈영의 침공으로 인해 움직이지 못하자, 원호는 범준을 업성에 남겨 상주의 직무를 대행하도록 하기로 했다. 그런데 상주행대 견밀(甄密)이 이미 원호의 계획을 눈치채고 범준을 살해했으며, 이신에게 상주의 직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결국 원호는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아들인 원관수(元冠受)와 측근들을 데리고 양나라로 망명했다.
양나라로 망명한 원호는 자신이 망명한 경위를 양무제 소연에게 설명했는데, 눈물을 흘리는 장절한 모습에 무제가 감동을 받아 원호를 위주(魏主)로 삼고 군사를 빌려주어 명장 진경지가 활약한 대통북벌을 도와주었다. 원호는 529년 4월에 위나라의 황제로 즉위하고, 연호를 효기(孝基)로 선포했는데, 북위에서는 제음왕(濟陰王) 원휘업(元暉業)을 도독으로 삼아 원호의 침공에 대응하도록 했다. 하지만 원휘업이 원호에게 패전하고, 형양(滎陽)에서도 행대 양욱(楊昱)이 원호에게 패전하면서 이주세륭(권신 이주영의 사촌동생)은 호로관으로 달아났고, 효장제 원자유 또한 수도 낙양을 탈출했다.
이렇게 낙양에 입성한 원호는 연호를 건무(建武)로 개원했지만, 황제로 즉위한 이후부터는 점점 교만해지고 나태해졌다. 원호는 자신의 측근들만을 대우하고 정사를 보지 않았으며 밤낮으로 술에 탐닉하여, 이로 인해 북위 내부가 원호에게 매우 실망하게 되었다. 결국 이주영이 군대를 재정비하고 원호를 공격하여 원관수가 사로잡히자, 패전이 이어지면서 원호는 달아나게 되었다. 하지만 원호의 부하들은 뿔뿔이 흩어져버렸고, 결국 원호는 임영현(臨潁縣)에 이르러 그곳의 군졸에게 살해되었다.
원호는 사후 사지절, 시중, 도독양정상은4주제군사(都督冀定相殷四州諸軍事), 표기대장군, 대사마, 기주(冀州) 자사로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