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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파/대한민국/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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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세기 한반도( 대한민국, 북한)에 찾아온 한파를 나열한 문서.

19세기, 특히 구한말 당시에는 아직 대한민국에서 공식 기상 관측이 없었던 시기였기에 서울의 자세한 날씨 기록을 알기 어렵지만, 인천의 비공식 기록을 참고하면 당연히 현대보다 매우 추운 겨울이 많았다.[1] 1880~ 1890년대 사이에는 특히 2월 한파가 강한 양상을 보여 12월보다 2월이 더 추웠다. 물론 1884년 1892년, 1897년 12월이 있기는 하지만 2월 1886년, 1895년, 1897년이 압도적으로 낮았고 나머지 해들도 2월이 따뜻하지 않은 편이었다.

2. 목록

2.1. 1870년대

2.2. 1880년대

2.3. 1890년대



[1] 하지만 서울에서 1월 평균 기온 -7~-9℃는 몇 번 기록된 것으로 추정( 1855년, 1856년, 1861년, 1862년, 1864년, 1874년, 1876년, 1893년, 1900년 1월 등)되지만, 조선 후기나 구한말 시절이라도 19세기 중후반에는 -10℃까지 기록했을 가능성은 요원해보인다. 소빙하기의 절정이던 17세기 18세기 초, 그나마 덜 올라가도 181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월평균 기온 -10℃ 이하를 기록한 1월이 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2] 한기의 축이 일본 관동에 집중되지 않았다면, 서울은 무려 -25℃~-26℃라는 뒷날에 다시 없을 대한파가 덮쳤다는 가정이 세워질 수 있다. 참고로 1900년, 1902년, 1904년에 도쿄가 -6℃선까지 떨어졌는데 서울로 치면 -20℃~-21℃선까지 떨어진 것과 비슷하다. [3] 의외라 생각할 수도 있는데 당시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 해상 교통의 요지인 항구도시는 서울 이상으로 매우 중요했다. 목포 이후 부산, 인천, 원산에서도 같은 해에 공식 기상 관측을 시작했다. 서울 대구, 평양은 약간 더 늦은 1907년, 강릉 1911년, 울산 1932년, 광주 1939년에 시작되었다. 참고로 대전은 한참 늦은 1968년에 시작되었다. [4] 서울 기준으로는 2014년, 2015년 수준의 나름 이상 고온이지만, 기후가 따뜻한 부산은 평년이 17.9℃, 19세기 후반 당시 기준으로도 16.4~16.6℃ 정도이다. 게다가 블로그의 기온이 실제보다 높은 것을 감안하면 14°C 전후. 비교적 편차가 작고 기온이 높은 부산을 감안하면 엄청난 이상 저온이다. [5] 한반도의 기온 자료를 설명하면서 왜 갑자기 일본 이야기가 나오는지 의아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1884년의 일별 자료를 한반도에서 분석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기상 관측 자료의 부재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웃 국가이면서도 그나마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일본 나가사키의 자료를 토대로 하여 분석하는 것은 차선책의 방법이다. 실제로도 나가사키 한반도만큼은 아니어도 겨울에 한기가 자주 내려오는 지역이기도 하다. 사실 현해탄 너머에 있어 한파 강도가 반감 되는 나가사키보다는, 현해탄 사이에 있어 어느 정도 한파의 강도가 살아 있는 쓰시마섬의 이즈하라가 기온 추측에 그나마 용이하지만, 이쪽은 1886년 9월부터 기상 관측이 시작된지라 그 이전의 날씨는 알 수 없다. [6] 당일 서울 12월 하순의 평년 아침 최저 기온과 맞먹는 -5.1℃라는 가공할 만한 수치를 기록했다. [7] 하다못해 그 한파가 심했다는 1912년 11월, 1917년 1월, 1917년 12월, 1936년 3월 등도 상순, 중순, 하순까지 한 달 내 모든 시기에 골고루 역대급 한파가 찾아오지는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했을 때, 1884년 10월 10월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아예 기상 관측 이래 모든 달을 대조해보아도 유례를 찾기가 힘든, 한 달 내 모든 시기에서 초기록적인 이상 저온 한파가 찾아온 놀라운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기상학적인 겨울 역시 10월에 시작되어 1912년보다도 일찍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8] 기록에 의하면 19세기 당시에는 오전 9시, 오후 3시, 오후 9시로 일 3회 측정에 대한 평균치가 바로 일평균 기온을 산출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에는 오전 0시, 오전 3시, 오전 6시, 오전 9시, 오후 12시, 오후 3시, 오후 6시, 오후 9시로 일 8회에 걸쳐 측정된 시간대별 기온을 합산하여 일평균 기온을 산출해낸다. 하루 중 기온이 대체적으로 가장 낮은 시간은 늦은 밤~새벽 사이인 오전 0~9시 사이인데, 19세기 일평균 기온 산출 과정에서는 오전 0~9시 사이(0시, 3시, 6시)를 모두 빼먹었으니 당연히 현대와 같은 산출 방식보다는 수학적으로 높게 산출될 수밖에 없는 방식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다. [9] 부산이 이 정도였으니, 서울은 당시 10월 평균 기온이 9~10℃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4월도 9℃대이면 엄청난 이상 저온인데 그보다 높은 10월이므로 말할 것도 없다. 이 추측대로라면 서울은 공식 기상 관측 이후 10월 평균 기온 역대 최저 1위인 1912년 10월(11.1℃)보다 훨씬 낮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나가사키, 히로시마는 평년보다 낮긴 하지만 역대 최저와는 거리가 있어서 일본은 비교적 따뜻한 것으로 보인다. [10] 1912년 11월 1904년 이후 공식 기록 중에서는 압도적으로 낮은 1위인데, 그보다 0.7℃나 더 낮다는 것은 놀라운 기록이다. [11] 비슷한 시기에 이상 저온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난 교토 11월 하순에 최저 기온 -3℃ 이하가 사흘이나 기록된 것을 보면, 교토와 기온 차가 기본적으로 많이 벌어지는 서울 11월 하순에 최저 -10℃ 이하의 기온이 며칠씩이나 기록되어 월평균 기온까지 급격하게 낮아졌을 확률이 있다. 위도에 비해 그렇게 춥지 않은 하코다테에서도 11월 하순에 최저 기온이 -12.1℃로 측정되거나, 11월에 아무리 추워도 0℃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 와카야마조차도 11월 하순에 -0.6℃로 내려갔다. 당연히 두 지역 모두 각각 11월 역대 최저 기온이다. 도쿄 역시 월평균 기온이 7.6℃로 역대 최하위이고( 서울의 평년 11월보다 조금 높았다), 중국도 예외가 아니라는 듯 상하이의 월평균 기온이 8.5℃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다만 아쉽게도 수도인 베이징 1884년 10월부터 관측 기록이 끊겨 있어서 정확한 값은 영영 알 수 없다. 단지 한파의 규모나 상하이의 강력한 이상 저온을 볼 때 베이징 역시 막강한 한파가 들이닥쳐 1850년 11월, 1947년 11월처럼 0℃대, 심하면 영하를 기록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듯 이해 11월부터 내려온 한파의 규모가 심상치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12] 이곳에 접속해서 1991~ 2020년 기준 1884년 11월 평균 기온을 보면 한반도 남한 지역, 특히 내륙 지역은 -4℃가 한계인 파란색을 넘어 보라색(최소 -4.1℃ 이하)으로 도배되어 있다. 12월도 서울지역은 보라색으로 도배되어 있다. 관측 사상 가장 추운 11월 1912년 11월조차도 보라색 없이 파란색으로만 도배된 것을 보면 아연실색할 장면. 이것으로 1884년 11월 평균 기온이 1912년 11월보다 압도적으로 낮은 것은 확실하며, 그래도 0℃대였으냐, 아예 -0℃대였느냐로 갈릴 것으로 보인다. 히로시마현 역시 11월 8.5도, 12월 3.4도로 2위와 0.2도차이로 월평균 역대 최저 기록이며 나가사키도 11월이 10.1도로 역대 최저, 12월이 5.1도로 2위이다. 서울 11월 0도대, 12월 -6도대가 가장 유력하며 서울쪽에 한기가 집중되었다면 11월 -0도대도 불가능은 아니다. [13] 교토 오사카 한반도와 가깝지 않으므로 논외. 아쉽게도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쓰시마 섬 이즈하라 1886년 여름이 다 지나고서야 관측이 시작되었다. [14] 참고로 서일본보다 평균 기온이 낮은 우리나라에서도 일평균 기온이 이 정도까지 내려가면 겨울이 시작된 것으로 본다. [15] 서울 나가사키의 거리상 찬 공기가 남하하는데 시간이 걸리기에 둘 중 하나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시기가 확실하게 마지막으로 11월에 한파일수를 충족시킨 사례로 추정되기도 한다. 하술할 1891년 11월의 사례는 정말로 -12℃ 이하를 기록했는지는 모호하기 때문이지만 실제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당시는 국지적으로 인천에 비해 서울이 낮게 떴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6] 반면 일본 도쿄 1885년 1월 평균 기온이 0.6℃로 1922년 1월과 함께 역대 최하위를 기록하였으며, 최저 기온 극값도 무려 -9.1℃로 역대 최저 2위를 기록할 정도로 추웠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한기 남하의 축이 일본 쪽으로 치우친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일본이 가까워보이지만 동서로 꽤 긴 나라라서 한반도 중부 지방과 도쿄간의 동서 직선 거리는 1,160km에 달할 정도로 제법 멀다. 오히려 더 멀 것 같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서울 간의 거리는 746km 정도로 더 가깝고, 도쿄와는 1,067km로 100km 정도 더 가깝다. [17] 1위는 1936년 4월의 10.5℃ [18] 참고로 서울의 기상 관측 이후 12월 상순의 역대 최저 기온은 12월 7일까지 -11~-13℃ 정도이다. 그런데 비슷한 날짜에 이보다 3℃나 더 낮은 기온을 기록한 셈이다. 이런 날씨에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은 악마인가? [19] 그 외에 1880년, 1883년, 1891년 12월 상순에도 앞서 서술한 12월 상순의 역대 최저 기온보다 낮은 기온을 기록했을 것으로 보인다. [20] 비공식 기록으로 1891년 7월 8월 둘 다 월평균 기온이 22.8℃라고 한다. 뒤이어 서술될 겨울과 연관을 지어보면 1980년 여름~ 겨울의 상위호환 격이다. 다만 1980년 11월 이상 고온이 있었다. 인천의 해관자료를 보면 7월은 매우 시원하긴 했으나 8월은 그맘때 여름 날씨였고 더위도 존재했다. [21] 아침(3~9시) 최저 기온이 -12℃ 이하인 날을 한파일수로 정의한다. 반대로 폭염일수는 일 최고 기온 33℃ 이상. 한파일수와 폭염일수를 셀 때는 특보와는 다르게 체감온도와 기온 급락 사례를 거르고 오로지 기온 요소로만 판단하는 것이 흥미롭다. [22] 아무리 추운 11월일지라도 서울이 영하 두 자릿수를 기록하는 것은 굉장히 드물며 [23] 정황을 보았을 때 11월 28일 전날처럼 비슷하게 추웠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경악을 금치 못할 다음 날의 멘트도 이런 맥락으로 나온 듯. [24] 2022년 11월 30일 서울-8.1℃까지 내려갔을 때 1993년 이후 29년 만에 가장 낮은 11월 최저 기온이라는 타이틀을 가져갔다. 그런데 저 당시에는 -9℃가 추위가 많이 풀린 수준이라는 것이 현대와 기후의 차이를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25] 21세기 기준 2001~ 2002년 겨울, 2004~ 2005년 겨울, 2006~ 2007년 겨울, 2007~ 2008년 겨울, 2008~ 2009년 겨울, 2013~ 2014년 겨울, 2014~ 2015년 겨울, 2016~ 2017년 겨울, 2019~2020년 겨울로 총 9해 [26] 다만 소빙하기가 이어졌던 19세기 중반( 185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의 사건은 흔했을 것이고, 더한 적도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장 이해로부터 불과 7년 전인 1884년 11월도 이와 비슷하거나 더 낮았을 가능성이 높다. [27] 보통 11월 하순에 한파가 올 때 인천 서울보다 1~2℃ 정도 높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는 바, 실제 서울의 기온은 -12℃ 전후( 1922년, 1947년, 1970년과 비슷)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22년 11월 27일에도 인천이 -10.6℃를 기록할 때 서울은 -11.6℃였고, 1947년 11월 27일에도 인천이 -10.1℃일 때 서울은 -11.8℃, 1970년 11월 30일 인천이 -9.8℃일 때 서울은 -11.9℃였다. 다만 예외적으로 1979년 11월 14일에는 서울 -11.1℃, 인천이 -12.0℃로 인천이 더 낮았다. [28] 북반구 대다수의 지역에서 강한 라니냐의 여파로 이상 저온이 발생하였다. 그중에서도 라니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지역은 서시베리아, 카자흐스탄, 중국 남부 등지로, 이들 지역에서는 기상 관측 사상 역대급으로 강력한 한파가 찾아왔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혹독한 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반면 일본 한반도는 후술할 자료들을 참조하면 상대적으로 한파의 강도가 덜했던 것으로 보인다. [29] 비슷하게 강한 라니냐를 보였던 1917년 1월 인천 월평균 기온을 생각해보자. 무려 -8.0℃로 관측 사상 역대 최저 1위이다. [30] 우리나라에서야 서울 기준 -7℃ 정도는 매년 겨울마다 기록하는 최저 기온이지만( 2020년 1월 제외), 일본 2018년 1월 25일 도쿄 최저 기온 -4.0℃ 기록만으로도 엄청난 한파라며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실제로 도쿄 대한민국보다 겨울에 훨씬 온화하며, 아무리 추워도 최저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일이 드물 정도로 대한민국에 비해 겨울이 따뜻하다. 예시로 도쿄 1875년 최초 기상 관측 사상 역대 최저 기온은 1876년 1월 13일-9.2℃에 불과하다. 서울 1907년 최초 기상 관측 사상 역대 최저 기온인 1927년 12월 31일의 -23.1℃와 비교해보면 무려 14℃나 높다. 기본적으로 이 지역은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이 직격타로 들어오는 곳인데 -7℃의 한기를 머금은 칼바람이 불어대면... 게다가 일본의 기상 관측 자료를 살펴보면 1893년 1월은 다른 날에도 거의 최저 기온이 영하권이었으며, 대부분 0~-4℃ 사이를 기록한 날이 많았다. 비슷한 환경이 갖추어진 1917년 1월 도쿄 최저 기온과도 비교하였을 때 1893년 1월확연히 낮은 기록이다. [31] 여러가지 말이 많고 의문점이 드는 겨울인 것은 사실이다. 이에 대한 이유를 추측해보자면 1893년 1월 1945년 1월같은 스타일의 겨울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1945년 1월은 월평균 기온만 보면 -7.8℃로 역대 최저 5위를 기록했을 정도로 매우 낮았다. 그렇지만 월 최저 기온 극값은 -19.1℃로, 한파가 강하게 찾아오면 -20℃ 이하로도 자주 내려가던 일제강점기 겨울들에 비하면 크게 기록적인 수준이 아니었다. 즉 1893년 1월 서울이 아침 최저 기온 -10℃ 이하의 추위가 계속 이어져서 뮈텔 주교가 계속 일기에 기온을 적었고, 다만 1945년 1월처럼 기록적인 수치는 없었다는 추측이다. 사실 도쿄 1월 26일 -7.1℃ 기록이 단일 기록으로서는 매우 낮은 것이 사실이지만, 막상 월평균 기온 자체는 2.6℃로 의외로 기록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1900년 1월이 1.6℃로 더 낮을 정도이다. 인천 1900년 1월이 -6.1℃로 더 낮다. 즉 1893년 1월 일본 한반도 둘 다 추운 겨울을(월평균 기온이 기록적이지는 않은) 보내다가 1월 26일 쯤에 한 번 한기가 정말 강하게 왔는데 그때의 한기가 유난히 일본 쪽으로 치우치는 시나리오라면 이와 같은 현상이 가능하다. 정확히 비유할 사례를 찾기는 힘드나, 2019년 1월 2월 상순에 대한민국 이상 고온이 찾아왔지만 일본 도호쿠 홋카이도는 매우 추웠던 사례를 생각해보면 될 듯하다. 참고로 뮈텔 주교의 일기에서는 1895년 2월 2일 서울이 -22℃로 1891~ 1895년 기간 중 가장 낮았다고 적혀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1893년 1월은 최저 기온이 -22℃보다 높았을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지만, 그 말은 반대로 생각해보면 1893년 1월도 -21℃ 정도는 갔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엄청 기록적이지는 않지만 이것도 분명한 강력 한파이다. 더군다나 1893년 1월 도쿄의 최저 기온 극값(-7.1℃)보다 더 낮은 극값(-8.1℃)을 기록한 1922년 1월의 경우 같은 달에 서울의 최저 기온 극값이 -21.0℃였던 것을 보면, 1893년 1월 서울의 최저 기온 극값은 -20~-21℃ 정도에 그쳤을 가능성이 더 높아보인다. 허나 기록적인 혹한이 없이 그냥 꾸준히 추운 정도였다고 쳐도 일기를 매일 적을 정도였다면 인천이 최소 월평균 -6~-7℃ 정도는 되었어야 할텐데 이상한 점이 많다. 사실 해당 자료의 출처인 블로그에 적힌 기록들이 추정치에 비해 다소 높게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천의 실질적인 월평균 기온은 -6~-7℃ 정도로 추정되며, 이에 따라 서울 1893년 1월 평균 기온은 -7~-8.5℃, 최저 기온 극값은 -20~-21℃ 정도였을 것이라 추측해본다. [32]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쓰시마 섬 이즈하라의 이날 최고 기온이 불과 -0.2℃였다. 참고로 이 지역은 한낮에 영하로 잘 내려가지 않는 지역이다. 오키나와 나하에도 찬 공기가 도달했는지 이날 최고 기온이 불과 12.8℃에 불과했다. [33] 1월이면 최고기온 -10도 이하인 한파가 현재에도 많지만 기온이 매우 가파르게 올라가는 2월 중순에 저 정도 한파가 온다고 생각을 하면.... [34] 1904년 인천의 공식적인 기상 관측 시작 이래 2월 역대 최저 기온은 1913년 2월 9일의 -18.4℃이다. 앞서 서술했듯이 당시에는 소수점 단위를 어림잡아서 0.5 단위로 기록했기 때문에 정확한 기온은 -18.5℃에서 ±0.2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즉 -18.3~-18.7℃ 사이의 오차 범위가 있기는 하나 [35] 원산의 공식적인 2월 역대 최저 기온은 1920년 2월에 기록된 -19.2℃이다. [36] 대마도 이즈하라와 부산 간의 기온 차, 그리고 부산과 서울의 기온 차를 고려하면 -19℃까지 곤두박질쳤을 수도 있다. 당시 이즈하라에서 -8.6℃였는데, 부산은 이즈하라보다 대략 5℃ 낮음으로 -13℃ 가량으로 추정되는데 이미 여기서도 역대급으로 뒤늦은 한파이다. 그리고 서울은 또 부산보다 5~6℃나 낮으니 최대 -19℃까지 떨어졌을 수 있다. 여하튼 1910년, 1913년, 1920년 2월 이상으로 뒤늦으면서도 엄청난 한파로, 이후 1968년 2월이 하순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14℃까지 내려갔는데, 1895년 2월보다 한참 높음에도 공식 기록상 1968년 2월 기록이 제일 낮다고는 한다. [37] 그리고 바로 옆의 서울 겨울 인천보다 1~2℃ 낮은 경향이 있어서 같은 날 서울은 -19~-20℃를 기록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략 1922년 1월 19일과 비슷한 수준으로 추정. 단 일교차는 내륙인 서울이 더 크기에 최고 기온은 -10.6℃보다 조금 더 높았을 것이다. [38] 1위는 1913년 2월 9일의 -18.4℃, 2위는 1910년 2월 2일의 -18.0℃, 3위는 1910년 2월 1일의 -17.3℃, 그리고 공동 4위가 1931년 2월 11일 1897년 2월 7일의 -17.0℃. 다만, 1897년 인천은 소숫점 단위를 어림잡아서 0.5 단위로 기록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오차 범위가 -16.8~-17.2℃ 사이로 -17℃보다 약간 높을 수도 혹은 약간 낮을 수도 있다. [39] 이를 공식 기온이라고 간주할 경우 원산 2월 역대 최저 기온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원산 2월 역대 공식 최저 기온은 1920년 2월의 -19.2℃에 불과하다. [40] 이상 저온/사례 문서에서도 나와있듯, 홋카이도를 제외하고 한반도보다 한파의 영향을 덜 받는 일본도 열도 전역에 걸쳐 4월 평균 기온이 다른 해보다 낮게 나왔다. 옆 나라 전체가 이랬으니 하물며 한기의 영향을 다이렉트로 받는 한반도는... [41] 오후 3시만 해도 기온이 37℉(2.8℃)였는데 오후 9시에 19℉(-7.2℃)로 급격하게 떨어져 있었다. [42] 다음 날에 발생한 중부 지진 한강의 얼음이 갈라졌다는 기록이 있다. [43] 한낮에도 -8.6℃에 그칠 정도로 낮 추위는 강력했다. 서울 기준으로는 최저 기온 -15℃, 한낮 기온 -7℃ 정도로 추정되나, 같은 한파여도 인천 서울의 공식 최저 기온이 5~6℃ 이상 차이가 벌어진 경우도 있어서, 인천이 -13.5℃에 그쳤다고 해도 서울이 이와 비슷한 수준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대략 -16~-17℃, 더 낮으면 -18℃ 정도까지 떨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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